정치, 국제정세 칼럼

아베 정부의 기습과 한국경제 나비 효과 - ‘정직한 중재자’ 역할 주저하는 트럼프 셈법

일취월장7 2019. 8. 20. 11:04

아베 정부의 기습과 한국경제 나비 효과

아베 정부는 한국이 달라졌다는 걸 계산에 넣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반도체 산업이 곧 위기를 맞을 것처럼 주장했지만 3개 소재 모두 국산화 내지 대체 투입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남문희 기자 bulgot@sisain.co.kr 2019년 08월 19일


닌자의 나라답게 기습을 한 것까지는 좋았다. 기습전의 요체는 단기 결전이다. 거사와 동시에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한국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에 대한 일본의 ‘경제보복’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각자 알던 일본에 입각해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공통점은 있다. ‘일본이 하면 뭔가 다를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정작 아베 정부는 한 달이 훌쩍 지나기까지 최초의 기습 이외엔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 논자들이 각각 만들어낸 ‘일본몽’에 따라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그럴싸한 ‘이유’를 창조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월스트리트저널> 도쿄지국 부국장을 지낸 윌리엄 스포자토는 8월6일자 <포린폴리시>에서 일본 아베 정부의 기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싸울 준비도 안 된 채 한국과의 전쟁을 시작”해서 “모순된 입장과 모호한 빈정거림 외에는 (스스로의 입장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조차 못할 정도로 허술하다.”

거사의 막후 인물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라는 게 일본 정가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일본 정치권력의 실질적 ‘당중앙’인 스가 장관이 경제산업성(경산성)을 동원해 일으킨 소요가 이번 ‘경제 침공’이라는 것이다.

ⓒAP Photo
아베 일본 총리는 8월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왼쪽은 스가 관방장관.

문제는 기습의 설계부터 오류였다는 점이다. 목표와 수단의 괴리다. 스가 장관이 노린 것은 문재인 정부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국의 행보를 못마땅해했던 그의 심기에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 불을 붙인 셈이다.

다만 엉뚱하게도 한국 반도체 산업을 ‘수단’으로 선택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3개 핵심소재의 대한국 수출에 내주던 3년짜리 포괄허가를 개별허가로 바꾼 것이다. 문재인 정부를 혼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의 소재산업과 글로벌 분업구조를 모두 뒤흔들 만한 조치다. 목표와 수단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 내에서 ‘일본의 논리’를 설파하며 문재인 정부를 뒤흔들어 고립시키는 움직임도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베 정부는 한국이 과거의 한국이 아니라는 점을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다. 촛불혁명으로 아시아 민주주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자부심이 있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스가 관방장관의 심경이 복잡한 이유


일본 내부는 이미 7월 하순부터 분열되기 시작했다. 경산성은 한국의 산업을 가장 심각하게 타격할 만한 공격 수단으로 3개 반도체 핵심소재를 고르는 과정에서 게이단렌(일본 경제단체연합회)을 소외시켰다. 수출규제로 초래될 부메랑은 게이단렌의 몫이었다. 게이단렌의 불만이 <니혼게이자이 신문>을 필두로 한 언론과 경산성 내 지역 경제과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이들의 입장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는 더 이상 일본을 위한 실익이 없으니 중단하자는 것이다. 역사 문제는 쟁점으로 놔두더라도 통상 문제에서는 철수하자는 ‘전술적 후퇴론’이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가운데)이 8월6일 삼성전자 천안 사업장을 둘러보고 있다.

반면 이번 사태를 주도한 스가 장관을 비롯한 경산성과 외무성 일부의 입장은 ‘전략적 공세론’으로 부를 수 있다. 더욱 전방위적으로 공세를 강화하면 한국이 무너질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예상외로 한국의 반격이 거세 이 상황을 장기간 끌고 갈 수 없다는 데에는 공감대가 이뤄진 듯하다.

그렇다면 아베 정부는 이번 사태에서 명분 있게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7월 중순 이후 일본 외무성이 국내의 일본 인맥을 통해 발신해온 ‘1+1+α(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에 한국 기업, 일본 기업, 한국 정부가 함께 참여)’ 방안과 ‘이낙연 국무총리 특사 파견’이 그것이다. 즉, 이낙연 총리가 ‘1+1+α’ 같은 수정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방안을 들고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는 방법으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보자는 것이다.

지난 7월 말,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들고 도쿄를 방문한 것은 일본 내부가 저마다의 수습책을 놓고 암중모색하던 시점이었다. 일본 정가 소식통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8월2일로 예정된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국가 제외를 중단하고, 호르무즈해협의 선단을 호위하는 호송 연합에 자위대를 동참시키라는 것이었다. 일본 자위대는 호르무즈 선단 동참 요구에 환호했다.

그러나 스가 장관의 심경은 복잡했을 터이다. 호르무즈 파병안을 수용할 경우 일본 여론의 반발이 심상찮을 것이 우려됐다. 더구나 미국의 요구에 따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중단할 경우, 아베 정권의 정체성이 손상될 수 있다. <로이터 통신>이나 <아사히 신문>까지 미국의 중재 사실을 보도했는데도 “그런 사실 없다”라고 스가 장관이 강력하게 부인한 배경이다. 또 이란과의 우호관계를 들며 호르무즈해협 파병까지 거절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참의원 선거 이후로 미뤄뒀던 미·일 무역협상이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다. 미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일본 경제의 운명이 요동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베 정부는 지난 8월2일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아베 정부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의 이유를 ‘일본의 안보적 사유’라고 둘러대왔다. 안보라는 명분까지 내세운 마당에 관련 조치를 슬그머니 철회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AP Photo
한·일 우호 관계를 희망하는 일본 시민들이 8월4일 도쿄 신주쿠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8월7일 경산성은 시행세칙을 발표했다. 당초엔 일본 측이 3개 반도체 핵심소재 이외에 1100여 개에 이르는 ‘전략물자 취급 품목’ 가운데 일부 물자의 대한국 수출을 ‘개별허가’로 추가 지정할 것이 우려되었다. 그러나 이날 발표된 시행세칙을 보면, 추가로 개별허가 품목에 묶인 물자가 하나도 없다. 즉, 일본 기업들은 7월4일 개별허가 품목으로 지정된 3개 반도체 핵심소재 이외의 다른 물자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큰 규제 없이 한국으로 수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일본 경산성이 자국 기업들에 화이트리스트 국가가 아닌 나라에 대해서도 간편하게 수출할 수 있게 마련해준 제도들(특별일반 포괄허가와 특정 포괄허가)을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하도록 시행세칙을 정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 가운데 특별일반 포괄허가와 특정 포괄허가를 얻은 업체들은 화이트리스트 국가가 아닌 나라의 기업에도 개별허가 없이 포괄적으로(예컨대 한 번 허가를 얻으면 3년 동안 개별허가 없이 수출) 수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더욱이 한국의 대기업과 거래해온 일본 업체들은 대다수가 특별일반 포괄허가증과 특정 포괄허가증을 보유하고 있다(36~39쪽 기사 참조).

8월8일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일본 경산성이 현재 개별허가 심사 중인 세 가지 반도체 핵심소재 중 일부에 대해 조만간 대한국 수출을 허용하기 위한 최종 조정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90일 걸릴 것이라는 기존 예상을 깨고 일부 승인을 앞당기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오후, 경산성은 3개 소재 가운데 하나인 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출을 승인했다. 스가 장관은 정례 브리핑에서 “엄정한 심사를 거쳐 안보상 우려가 없는 거래임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이유는 명백하다. 8월24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시한과 8월28일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한국 제외 실행을 앞두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보겠다는 심산이다. 즉, 일본의 최근 조치들은 한국에 대한 공격이나 보복이 아니라 오직 ‘일본의 안보를 위한 것’이며, 안보상 우려가 없다고 판단될 때는 대(對)한국 수출을 허가해줄 수도 있으니 ‘아베 정부를 믿어달라’는 제스처다. 그 대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강행함으로써 언제든 허가권을 무기로 휘두를 수 있는 칼자루만은 쥐고 있겠다는 이야기다. 만약 한국 측이 불안하다면 그동안 여러 루트로 흘려온 ‘이낙연 총리 특사 사절단’을 일본으로 파견해,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1+1+α’ 안을 내놓으라는 말도 된다.

문재인 정부가 아베 정부 측의 안을 받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아베 정부는 일본 시민들에게 한국이 사죄 사절단을 보냈다며 일방적으로 승리를 선언할 것이다. ‘1+1+α’ 안에는 일본 정부가 빠져 있다. 일본의 한국 병합은 합법적이었고 개인 청구권 역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아베 총리 등 일본 극우집단의 입장이 그대로 관철된 방안이다. 반도체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로 자유무역 질서뿐 아니라 첨단산업의 국제분업 구조를 교란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아베 총리와 스가 장관 등에게는 최선의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입장은 어떠한가? 앞으로 한국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국가로 복귀한다 해도 통상 부문에서 일본과의 신뢰 관계가 이미 깨져버린 상황이다. 아베 정부가 언제든 허가권이란 칼자루를 휘두를 수 있게 된 지금의 양국 간 통상 시스템에서는 ‘신뢰’를 거론하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또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이후 국내 일각에서는 반도체 산업이 곧바로 위기를 맞을 것처럼 주장했지만 3개 소재 모두 국산화 내지 대체 투입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오히려 국산 소재가 양산 체제에 들어가는 내년 2월 이후에는 일본 소재 산업 기업들이 위기를 맞으리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국내 첨단소재 분야에 미칠 영향

아베 정부가 타깃으로 삼은 최첨단 소재조차 한국 측은 단기간에 국산화 내지 대체 투입 방법을 찾고 있다. 그보다 낮은 기술 수준의 부품소재 분야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탄소섬유나 카메라 렌즈 등 일본이 강점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분야도 국내 기업이 비슷한 수준으로 추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동안 국내 부품소재 기업들이 빛을 보지 못한 것은 그 자리를 일본 기업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베 정부의 단견이 한국과 일본의 고착화된 국제분업 질서에 변화를 이끌고 있다. 삼성은 이미 반도체 분야에서 ‘탈일본’을 목표로 국산화에 박차를 가한다. 과거 특허분쟁을 겪었던 대기업 간 협력체제가 구축되고, 중소기업들을 부품소재 강소기업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산학연 협력체제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 신성장동력인 첨단소재 분야에서 강한 중소기업 등장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



“아베 그룹이 악화되고 위축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제통상 전문가 송기호 변호사는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가 한국이 아닌 일본 기업을 규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중소기업의 피해에 대비해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2019년 08월 19일


아베 정부는 8월2일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닷새 뒤 8월7일에는 무역 관련 주무 부서인 일본 경제산업성(경산성)이 시행세칙을 공포했다. 지난 7월4일부터 수출규제를 시행 중인 반도체 핵심소재 3개 이외 품목엔 별도의 조치를 일단 취하지 않았다.

그사이 8월5일, 국제통상 전문가 송기호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전 국제통상위원장)를 만났다. 이번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가 돌아온 직후였다. 송 변호사는 이틀 뒤(8월7일)에 발표될 일본 경산성 시행세칙의 윤곽을 내다보고 있었다. ‘화이트리스트 국가 제외’가 ‘수백 개 일본산 자재의 수입 중단’으로 여겨지던 시점에서 일종의 ‘예언’처럼 들렸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시사IN 조남진
송기호 변호사는 “한국이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되어도 해당 일본 기업들은 특별일반 포괄허가증으로 한국에 수출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우선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국가’ 제도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일본 수출기업을 식당에 비유해보자. 식당은 어느 정도 위생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영업허가를 받는다. 영업허가증(포괄허가)을 받은 식당은 손님에게 음식을 내갈 때마다 일일이 보건 당국으로부터 허가(개별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 이와 비슷하게 일본에서는 수출기업이 최소한의 ‘전략물자 통제 능력(대량살상무기 생산에 사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를 적성국가에 수출하지 않도록 기업 내에서 통제하는 장치)’만 갖추고 있다면 그 업체에 ‘일반 포괄허가’라는 것을 내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기업으로부터 수입한 전략물자를 적성국가에 다시 수출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는 국가들을 골라 화이트리스트 국가 명단을 지정한다. 일반 포괄허가를 받은 일본 업체가 화이트리스트 국가의 기업에 물품을 판매할 때는 건별로 따로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일정한 기간 포괄적으로 허가를 받아) 바로바로 수출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유일하게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국가에 들어가 있었다. 여기 포함되지 못한 국가들은 일본산 전략물자를 수입할 때 건별로 개별허가를 받아야 했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일본 기업이 이른바 ‘특별일반 포괄허가’를 받아둔 상태라면 화이트리스트 국가가 아니어도 개별허가 없이 수출할 수 있다. 다시 비유를 들자면 (어느 정도의 위생상태 유지 능력만 있으면 되는) 식당이 아니라 식품공장이라면 ‘해썹(HACCP: 원재료 생산에서 최종 소비자가 섭취하는 최종 단계에 걸쳐 식품오염을 방지하는 위생관리 시스템)’이란 제도를 적용받는다. 보건 당국이 그 식품공장에 대해 정기적으로 깨끗한 제조환경을 갖췄는지 검사하고 교육과 사후관리도 시행하는 등 식당보다 엄격한 위생관리 기준을 요구한다. 이 ‘해썹’이 특별일반 포괄허가와 비슷하다. 일본 기업들 역시 당국이 요구하는 (일반 포괄허가보다 까다로운) 수출관리 기준을 충족시키면 특별일반 포괄허가를 받아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 등 화이트리스트 국가에 포함되지 않은 나라에도 개별허가 없이 수출할 수 있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이런 제도는 일본 자국의 기업을 위한 것이다. 기업들이 까다로운 절차 없이 좀 더 편하게 수출하라고 이런 제도를 마련해놓았다.

한국이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되어도, 곧바로 1100여 품목에 이른다는 일본산 물품의 수입선이 끊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인가?

한국 대기업들에 물자를 수출하는 대다수 일본 기업, 예컨대 미쓰이 물산(일본 최대의 종합상사)이나 도쿄일렉트론(반도체 제조장비 업체) 같은 업체는 대다수가 일반 포괄허가증과 특별일반 포괄허가증을 모두 갖고 있다. 한국이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돼도 해당 일본 업체들은 특별일반 포괄허가증으로 개별허가 없이 한국에 수출할 수 있다. 다만 한국 중소기업과 거래하는 일본의 작은 업체들은 특별일반 포괄허가증을 갖지 못했을 수 있다. 중소기업 수입선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아베 정부는 이번 조치의 명분을 안보 문제에서 찾고 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전략물자를 적성국가, 예를 들면 북한으로 유출시킨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근거가 있나?


이번 사태는 한국 대법원 판결(일제강점기 강제징용 관련 민사소송)의 집행을 좌절시키려고 아베 총리가 부당하게 개입한 불법 무역보복이다. (대법원 판결과 집행은) 한국으로서는 엄연한 주권 행사이며, 재판의 피고가 일본 국가도 아니다(피고는 신일철주금 등 일본 기업). 안보를 핑계로 한·일 무역관계를 무기화한 반인도적인 국제법 위반 행위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안보적 사유가 전무하다. 일본에서 만난 <도쿄 신문> 기자에 따르면, 이 신문은 이번 조치의 주무 부서인 일본 경산성에 ‘한국의 안보 저해 행위’에 대한 확인 취재를 끈질기게 시도했다. 경산성 측은 “자세히는 밝힐 수 없지만 부적절한 사안이 있었다”라고만 답변했다. 부적절한 사안이 구체적으로 뭐냐고 질문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베 정부는 이웃 나라의 국가경제를 위협하는 대단히 중대한 조치를 취해놓고 정작 그 사유는 설명하지 못하는, 심각한 국제법 위반 행위를 저질렀다.

국가 간 정치 분쟁을 통상 문제에 연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세계무역기구(WTO) 등의 자유무역 규범에 정면 도전하는 행위 아닌가?


일본은 다른 나라들의 무역분쟁에 대해 일관되게 자유무역을 옹호해왔다. 일본 경산성이 지난 7월 중순에 낸 <통상백서>는, “국제 생산활동의 연쇄에 장애가 생기면 양국 간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체 국제 시스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라며 무역제한 조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을 확대하자”라고 주문한다. 심지어 일본은 준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무역분쟁(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자, 러시아 측이 우크라이나산 식품 수입금지, 러시아 영토 경유 우크라이나 제품 수출길 차단 등의 조치를 감행한 사건)에 대해서도 WTO 분쟁해결기구에 다음과 같은 공식 의견을 제시했다. “경제 외적 이유로 무역을 제한할 수 없다.” “(안보 목적으로 그런 조치를 했다면) 조치의 정당성을 입증할 책임은 러시아에 있다.” 국가별 전략물자 통제시스템 평가에서 권위를 가진, 일본의 비영리기구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는 2016년 영문 보고서에서 한국의 전략물자 관리를 “리거러스(rigorous)”라고 평가했다. 대단히 엄격하고 까다롭다는 의미다.

ⓒ연합뉴스
8월7일 ‘일본 수출규제 관련 지역별 설명회’에서 참석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아베 정부는 누가 봐도 무리한 짓을 강행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이번 사태는 경제·통상이 아니라 정치 문제라고 본다. 아베 총리와 주변 집단이 ‘자신들이 바라는, 현재와 전혀 다른 일본’의 상(像)을 일본 국민에게 의도적으로 보여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최근 일본 측의 제스처를 봐라. 고노 다로 외무상은 주일 한국 대사를 불러 “한국이 무례하다”라고 말했다. 외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은 한국 국회의원단의 면담을 일방적으로 취소시켰다. 실무협의회에서는 일본 실무자들이 한국에서 찾아온 무역정책관들을 문전박대했다. 과거 한·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도 일본이 한국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때리는 경우는 없었다. 아베 정부는 개헌을 통해 만들 수 있는 나라, 즉 ‘식민지 불법행위와 전후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일본’ 그래서 ‘전쟁도 할 수 있는 일본’이 어떤 모습일지, 일본 국민에게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8월 말 화이트리스트 국가 제외로 전환되면 한국 기업의 경제적 타격이 예상되는데?

지나친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일단 이번 조치가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대상은 한국 기업이 아니라 일본 기업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 기업들이 수출허가 관련 규제를 위반하면 굉장히 강한 처벌을 받는다. 책임자는 최고 징역 10년, 기업엔 3년간의 업무 정지가 가능하다. 벌금도 3억 엔까지 낸다. 이런 규제 때문에 일본 기업들에 실제로 피해가 생기면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 불만을 아베 정부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한국의 경우엔 중소기업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중소기업에 물자를 납품하는 일본 측 공급업체들이 특별일반 포괄허가증이 없는 경우가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너무 낙관적이지 않나? 한국 대기업엔 큰 피해가 없단 말인가?

한국 대기업에 물자를 납품하는 일본 업체들은 대다수가 특별일반 포괄허가증을 갖고 있다. 이 업체들은 개별허가 없이 물자를 수출할 수 있다. 지금(8월5일)으로서는 8월7일 일본 경산성에서 발표하는 시행세칙을 봐야 우리 기업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입을지 알 수 있다.

시행세칙이라니?

반드시 ‘화이트리스트 국가는 포괄허가’ ‘화이트리스트 배제 국가는 개별허가’인 것은 아니다. 아베 정부는 지난 7월4일, 불화수소 등 반도체 핵심소재의 대(對)한국 수출을 건마다 개별허가를 얻어야 하도록 묶었다. 당시 한국이 화이트리스트 국가였는데도 그렇게 했다. 반대로 화이트리스트 제외 국가라고 해서 꼭 개별허가를 받아 수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업체가 특별일반 포괄허가증을 갖고 있으면 개별허가 없이 포괄적으로 수출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 정부로서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시킨 뒤 후속 절차를 밟아야 한다. 한국으로 수출되는 물품들에 대해 ‘이건 개별허가’ ‘이건 포괄허가’ 식으로 일일이 지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인 시행세칙이 8월7일에 나온다.


ⓒReuter
7월24일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장에서 대표단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한국 대표단 바로 옆에 일본 대표단이 앉아 있다.


정리하면, 8월2일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 결정’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도화지이고, 그 도화지에 ‘어떤 물자는 개별허가, 다른 물자는 포괄허가’라는 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날이 8월7일인가?


정확한 표현이다. 다른 표현을 사용하자면 ‘화이트리스트 국가 제외’는 일본 측의 폭격 범위가 달라졌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어디를 폭격할지는 8월7일에 정해진다. 설사 특별일반 포괄허가증을 가진 일본 업체라 해도 그날의 시행세칙에서 해당 물자를 개별허가로 묶어버리면 수출 건마다 일일이 심사와 허가를 받아야 한다. 8월2일, 경산성이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한국 수출에 대해 일본 기업이 가진 특별일반 포괄허가를 그대로 유지한다’라고 되어 있다. 한국 대기업에 물자를 공급하는 일본의 주요 제조업체와 종합상사는 거의 100%가 특별일반 포괄허가증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시행세칙에서 특정 물자를 추가로 떼어내 개별허가로 묶지는 않겠다는 의미다(송 변호사의 예측대로 8월7일 일본 정부는 시행세칙을 공표하며 기존 반도체 핵심소재 3개 품목 외에 추가로 개별허가 품목을 지정하지 않았다).

세칙은 언제든 바꿀 수 있으니 화이트리스트 국가 제외가 두고두고 골치 아픈 화근이 될 듯하다. WTO 제소는 너무 시간이 걸리는 방법 아닌가?

그렇지 않다. WTO에 제소해야 하고, 이런 한국의 결의를 아베 정부에 각인시켜야 한다. 아베 정권의 도발에 대해 일본 시민사회의 반응 중엔 ‘아베 총리가 방사능 수산물 관련 WTO 판정에서 한국에 패배하더니 또 지려고 저러나 보다’라는 것이 있다. 일본 사회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WTO 패소에 예민하다. 일본 측이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규제 건에 대해 ‘뭔가 부적절한 사안이 있다’ 이외엔 입을 닫는 이유도 WTO 제소에 대비해 조심하는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들은 ‘WTO로 가봤자 2~3년 뒤에야 결과가 나온다’라며 제소할 필요까지 부정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이 WTO에 제소할 것이 명백한 만큼 아베 정부의 선택 폭이 좁아진다.

WTO 제소 자체가 의미 있다?

그렇다. 더욱이 일본의 WTO 규범 위반을 명확히 입증할 만한 자료를 최근 찾아냈다. <도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했는데, 아베 정부가 중국과 타이완에 불화수소를 특별일반 포괄허가로 수출하고 있더라. 생물화학무기에 대한 ‘국제적 전략물자 수출통제’ 시스템인 AG(오스트레일리아 그룹)에 한국은 가입한 반면, 중국과 타이완은 비가입국인데도 말이다. 국제 전략물자 통제에 참여하지 않은 중국과 타이완에 불화수소를 포괄적으로 수출하면서, 훨씬 엄격하게 전략물자를 통제하는 한국엔 개별허가를 강요하고 심지어 한 달 이상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이는 명백히 WTO 가트 협정 제10조 3항의 ‘수출 규정의 공평하고 합리적인 운용’ 규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사안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문제는 한국이 핵심 원천기술과 소재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3년 참여정부의 신산업정책처럼 제대로 된 산업정책으로 이 부문의 대일 의존성이 더는 우리 경제를 교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 WTO 제소, 일본 시민사회 및 산업계와 소통 등을 통해 ‘아베 그룹’의 입지를 최대한 좁혀나가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기’ 여론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했으니 우리도 GSOMIA를 폐기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면 곤란하다. 아베 그룹의 모순은, 안보적 명분으로 정치 문제를 경제·통상 부문에 억지 연계시킨 데 있다. 이런 모순을 국제사회에 폭로해야 한다. 그렇다면 GSOMIA 역시 무역도발 문제에 연계하기보다는 군사협력이라는 차원에서 독립적으로 평가하고 방침을 정해나가는 쪽이 낫다. 한편 오래갈 싸움인 만큼 한·일 민간교류 역시 지금보다 훨씬 활성화해야 한다. 이렇게 한·일 관계를 관리하면서 핵심 기술 및 소재의 자립화를 촉진해나가면, 이번 사태는 결국 아베 그룹이 일본 내에서 약화되고 위축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직한 중재자’ 역할 주저하는 트럼프 셈법

미국은 한·일 갈등을 끝내기 위한 ‘정직한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일이 경제 전쟁에 돌입하거나 군사정보보호협정이 파기되면 적극 개입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8월 19일



아시아 군사동맹이자 최대 우방인 한국과 일본의 무역분쟁으로 미국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미국도 이번 사안을 한·일 간의 단순한 무역분쟁으로 보지 않는다. 한·일 양국의 역사적 앙금을 폭발시킬 수 있는 정치적 ‘뇌관’으로 보는 데다, 미국이 특정국을 선호한다는 인상을 줄 경우 외교적 손실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때일수록 당연히 수행해야 할 동맹국 사이의 ‘정직한 중재자(honest broker)’ 역할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분위기다.

지난 8월2일, 타이 방콕에서 한·미·일 3국 외교장관 회담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적극적으로 중재하지 않았다. 미국 측은 회담 직전, 한·일 양국이 일단 시간을 벌면서 사태 악화를 방지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는 ‘분쟁중지 협정(standstill agreement)’을 맺으라고 제안했지만 일본의 거부로 무산됐다. 워싱턴 외교가에선 한·일 양국의 갈등이 결국 최악의 상황까지 가야 미국이 적극 개입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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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왼쪽부터)이 타이 방콕에서 외교장관 회담을 했다.

사실 과거에는 이 정도 한·일 갈등이면 양국의 동맹인 미국은 무엇보다 ‘동북아 지역 내 미국의 국가안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막후 외교 채널을 통해 적극 개입해왔다. 하지만 갈등의 근저에 양국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을 경우엔 다르다. 한반도 전문가이자 스탠퍼드 대학 학자인 댄 스나이더는 “역사적으로 미국은 한·일 분쟁에 개입하길 꺼려왔고, 특히 역사 문제가 걸린 경우엔 더욱 그랬다”라고 <시사IN>에 말했다. 그는 특히 미국이 중재에 난색을 보이는 이유로 “역사 문제는 대부분 해결이 난망한 데다, 설령 미국이 개입해서 어떤 결론이 나온다 해도 욕을 먹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30년 넘게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에서 동북아 분석실장을 지낸 존 메릴 박사도 <시사IN>에 “역사적 갈등이 깔린 한·일 사안은 해결에 시간이 많이 걸릴 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처럼 최고위층의 개입 없이는 수습이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 부서가 한국보다 경제력이 훨씬 앞선 일본에 편향돼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미국 측의 이해와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한국 정부 고위 관리들과 국회의원이 최근 줄줄이 워싱턴을 다녀갔다. 미국 측 반응은 신통치 않은 듯하다. 이번 사안에 대한 미국 내 관심 또한 크지 않다. 양국 분쟁이 확산 일로인데도 아직 미국의 주요 언론과 싱크탱크, 의회에서 북핵 문제에 비하면 주요 이슈로 부상하지 못했다. 이번처럼 중차대한 사안이 터졌을 경우를 대비해 미국 내 ‘친한(親韓)’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존 메릴 박사는 “워싱턴에서 이 문제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진작시키려는 한국 정부의 외교 노력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한·일 양국의 갈등 확산에 전혀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정통한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로 한·일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자 미국 국무부 역시 막후에서 양측 실무자들과 나름의 해소책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국무부는 고위급 관리들이 개입하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이 난망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는 최근 백악관과 국무부 고위 인사들의 한·일 양국 연쇄 방문으로 이어졌다. 백악관에서는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과 매슈 포틴저 아시아담당 선임국장, 국무부에선 데이비드 스틸웰 동아태담당 차관보 등이 최근 한·일 양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미국 고위 관리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중재가 아닌 원칙론적 입장뿐이었다. 단적인 예로 스틸웰 차관보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만난 뒤 기자들에게 “근본적으로 한·일 양국이 민감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미국은 양국의 긴밀한 친구이자 동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하겠다”라고 말했다.

전통 맹방인 한·일 양국의 갈등이 확산 일로인데도 미국이 중재에 나서지 않는 것을 두고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오바마 행정부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아시아 국장을 지낸 에반 메데로스 조지타운 대학 교수는 최근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아시아에서 위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른 나라가 아니라 미국 정부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일 양국 갈등이 비단 무역뿐 아니라 미국의 동맹체제와 지역 번영 및 반도체 소재의 범세계적 공급망을 위협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적극적 개입을 촉구했다. 비영리 싱크탱크인 우드로 윌슨 센터의 고토 시호코 아시아 프로그램 부국장은 <저팬 타임스>에 실린 기고문에서 “사태가 악화되면 한국 기업은 물론 애플, 델 등 미국 기업과 미국 경제에도 큰 피해를 주는 만큼 미국이 지금이라도 ‘정직한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미국, 2014년 한·일 갈등에 개입

과거의 전례를 보면 미국이 한·일 양국의 역사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2014년 당시 미국은 위안부 문제로 한·일 양국의 외교적 갈등이 심화되자 국무부 고위 관리들은 물론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까지 한·일 양국 정상을 만나 적극 중재에 나선 전례가 있다. 당시 미국이 개입하게 된 이유는 뭘까? 미국의 국익과 직결된 안보 문제 때문이다. 2013년 11월 중국이 동중국해 상공에서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는 등 방위력을 증강했다. 한·미·일 공동 대응을 위해서도 미국은 위안부 문제로 한·일 관계가 더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중국의 도발 직후인 그해 12월 바이든 부통령은 한·일 양국 순방길에 올라 적극 중재에 나섰다. 나중엔 오바마 대통령까지 개입해서 문제 해결의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미국의 중재가 늘 한국에 ‘최선’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이 중재의 결과물이 바로 2015년 12월28일 한·일 양국의 위안부 합의였다. 박근혜 정부는 미국의 중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일본과 부실 합의에 이른 것이다.

외교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대목도 바로 이 점이다. 존 메릴 박사는 “미국은 이번 사안이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주요 문제로 비화하면 지금보다 적극 중재에 나설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댄 스나이더도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나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물론 NSC, 국무부, 국방부 차원의 고위 실무선 이상에서 개입하려는 의사가 별로 없다. 하지만 한·일 양국이 전면적인 경제 전쟁에 돌입하거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취소 등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위협하는 조치를 취할 경우 미국도 적극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일 군사정보호협정이 파기될 경우 미국 정부는 북핵과 중국의 군사력 증강 등 자국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최근 외교 채널을 통해 이 같은 염려를 한국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보니 글레이저 아시아 담당 선임고문은 “이 협정이 실제 파기되면 대북 문제와 관련해 한·일 양국의 협력과 대북 억지력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타격을 줄 것이다”라고 <뉴욕타임스>에서 지적했다.

일각에선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압박해야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한·일 문제에 개입하려면 나의 전담(full-time)이 필요한 것 같다”라며 난색을 표한 바 있다. 이와 관련, 부시 행정부 시절 NSC 아시아 선임국장을 지낸 마이클 그린 교수(조지타운 대학)는 한·일 갈등 해소 노력과 관련해 <뉴욕타임스>에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에 ‘우리는 한 팀’이라는 인식을 조성하는 데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적극 개입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