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대한민국, 길을 묻다’ - 《그분을 생각한다》 펴낸 ‘인권변호사’ 한승헌

일취월장7 2019. 8. 20. 15:37
[한승헌 인터뷰①] “법은 피지배자의 지배자 견제 수단 돼야”
  • 김지영 기자 (you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8.20 14:00
[창간30주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길을 묻다(27)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 《그분을 생각한다》 펴낸 ‘인권변호사’ 한승헌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1)조정래 작가 (2)송월주 스님 (3)조순 전 부총리 (4)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5)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6)김원기 전 국회의장 (7)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8)박찬종 변호사 (9)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10)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11)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12)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13)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14)이종찬 전 국회의원 (15)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16)박관용 전 국회의장 (17)송기인 신부 (18)차일석 전 서울시 부시장 (19)임권택 감독 (20)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21)이문열 작가 (22)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교수 (23)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24)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25)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 (26)손숙 예술의전당 이사장 (27)한승헌 변호사

한 사람의 삶 크기와 무게는 그 시대 요구를 얼마나 제대로 반영해 충실히 응답했느냐로 측정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1세대 인권변호사’인 한승헌 변호사의 삶의 크기와 무게는 크고 묵직하다. 독재정권 서슬이 퍼렇던 70~80년대, 당시 ‘민주화’라는 시대 요구에 몸소 응답했던 한승헌 변호사. 그는 변호사로 누릴 수 있는 안온한 삶을 스스로 뒤로 물렸다. 그 자리를 궂은일과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일들로 채웠다. 법정 싸움과 거리 투쟁 등으로 두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한 변호사는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조작 사건부터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 한국 현대사를 얼룩지게 한 시국사건들 한복판에 섰다. 양심수와 시국사범 변호에 발 벗고 나섰다. 이후에도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 변론을 맡았다.

그는 최근 출간한 스물일곱 명의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 《그분을 생각한다》에서 “이 세상에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도 있다”며 “우리는 자칫 자신이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죄인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준엄한 자기성찰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1934년생, 올해 85세. 법조계 원로로 여전히 냉철한 이성으로 시대를 꿰뚫는 혜안을 소유한 이 시대 진정한 원로 가운데 한 분이다. “누구로부터도 책잡힐 오점 하나 없이 늘 올곧은 자세를 유지해 온 참된 지식인의 본보기”로도 평해진다.

그런 한 변호사와 인터뷰하긴 결코 쉽지 않았다. 6월11일 오후 5시경 한 변호사의 서울 은평구 갈현동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한 변호사는 첫 전화통화에선 승낙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날 두 번째 통화에서 “좋은 말 할 게 없어서 (우리 집에) 오셔도 들을 게 없을 거다”며 “우리 집사람이 (언론에) 나가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말린다. 집사람 말을 들어야지”라며 정중히 사양했다. 그때부터 한 변호사와 인터뷰 실랑이가 한 달 이상 이어졌다. 기자가 한 변호사 자택을 불시에 ‘급습’하기도 했다. 삼고초려 끝에 결국 7월31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19층 카페에서 한 변호사와 마주 앉는 데 성공했다. ‘유머리스트’로도 유명한 한 변호사의 유머 본색은 이날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90분 인터뷰였다. 한 변호사의 깡마른 얼굴엔 형형한 눈빛이 서려 있었다.

인터뷰를 여러 번 요청했는데 거절하셨습니다. 특별히 인터뷰를 사양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독자들에게 이렇다 할 기쁨이나 보람, 깨달음을 줄 만한 그런 답변의 밑천이 부족했어요. 귀한 지면(紙面)에 합당한 내용도 없는 빈곤한 말을 늘어놓을 바에야 아예 함구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언다필실(言多必失·말이 많으면 반드시 실수한다)이란 옛말도 떠올랐고요.”

그래도 이렇게 나오셨으니까, 편하게 여쭙겠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은퇴한 사람치곤 한가하지 못한 매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는 조상 때부터 ‘한가(韓哥)’인데도 한가하지가 못하니 나에게 어떤 인생의 숙제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체력 소모가 따르니까 되도록 외출은 삼가면서 지난달엔 《그분을 생각한다》라는 신간을 한 권 냈습니다.”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건강에 관해선 제가 명답 하나를 마련해 놓고 있어요. 몇 해 전에 로펌에 나갈 때만 해도 컴퓨터 모니터에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으러 오라’는 문자가 떴는데 얼마 전엔 ‘치매 테스트 받으러 오라’는 우편물이 날아옵니다. ‘80대 중반의 노인이 됐구나’ 하는 실감이 납니다. 누가 건강을 묻는 인사말을 해 오면 이런 준비된 답변을 합니다. ‘네, 제 나이만큼 건강합니다.’ 어느덧 내 나이 80대 중반이 되다 보니 아주 건강할 리는 없고 그렇다고 환자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나이만큼’이란 수식어를 붙이면 국회 인사청문회에 가도 트집 안 잡히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어요. 웃음과 유머러스한 생각이 저의 건강비결입니다.”

“웃음과 유머러스한 생각이 건강비결”

운동이나 음식 조절은 하시나요.

“저는 평소 소식(小食)하는 편이지요. 그래서 음식을 많이 먹는 친구를 보면 배가 아프기도 해서 ‘많이 먹다 걸리면 특가법이다, 특가법’ 이렇게 한마디 하지요. 산에 가거나 헬스클럽에 다니는 그런 운동은 하지 않습니다. 실내자전거 정도입니다. 건강관리에 적극성이 모자라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무슨 운동을 하시느냐’고 물으면 ‘내가 변호사니까 ‘석방운동’을 많이 했지요’라고 우스개로 응대하기도 합니다(웃음).”

그렇죠. 인권변호사로 양심수 석방운동을 많이 하셨죠.

“내 노력으로 남의 고통이 덜어진다면 적지 않은 보람이 됐을 텐데 실제론 그렇지 못한 아쉬움과 분노를 많이 체험했습니다. 특히 독재정권하에선 무죄임을 확신하면서도 유죄판결이 나리라는 점 또한 확신해야 되는 모순과 자괴감을 수도 없이 겪었으니까요.”

지난 6월10일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빈소에는 다녀오셨는지요.

“물론이지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학식과 신념을 갖추신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우리나라의 여성운동, 민주화운동을 위해서도 큰 공로를 남기신 여성 지도자이셨습니다. 특히 군사정권에서 납치를 당하고 또 사형 선고까지 받은 부군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신 투사로서 널리 기억돼야 할 분이십니다. 김대중 대통령에겐 아내이자 동지로서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변호사님께선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선포 후 일본에서 납치되신 후 선거법 위반 사건으로 회부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변호했고, 김대중 정부에선 감사원장을 지내셨습니다.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이 두터우신데, 어떤 분으로 평가하십니까.

“민족의 지도자로서 대통령까지 지내신 분에 대해 한두 마디로 간략하게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편견이나 정실(情實·사사로운 정에 이끌림)에 기울지 않고 말씀드린다 해도, 불의한 탄압을 이겨내고서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분단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지향해 헌신한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영예가 결코 우연한 경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했을 땐 변호인단에 들어가셨고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도 맡으셨습니다.

“그분은 지방의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법조인답게 인권 옹호활동과 민주화운동을 했습니다. 대통령 재임 중에 탄핵소추를 당했을 때 변호인단에 참여한 일과 그의 정부의 중요한 과제이던 사법제도개혁의 추진위원장으로 개혁안의 성안에 일조한 것을 적지 않은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심판의 변호인단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보수 야당 횡포를 방어한 것도 기억에 남는 일입니다.”

현 문재인 정부도 검찰 개혁을 중요 국정과제로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경찰이 수사권을 어느 정도까지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가, 그렇게 했을 경우 국민 인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가, 또 검찰이 모든 걸 지휘하고 결정하는 이른바 ‘검찰왕국’이 개혁될 수 있는가 등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결코 만만한 과제는 아니지요. 정부 해당 부처 간의 입장과 견해 차이를 어떻게 조정하느냐, 다시 말해 부처이기주의를 초월해 오로지 국민 인권과 권력 민주화를 최대공약수로 받들고 제도 개혁을 해야 될 것입니다. 명분 여하 간에 상당한 진통이 수반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검찰 개혁, 상당한 진통 수반될까 걱정”

법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 고위 법관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엄청난 사태도 어느 면에서 사법부가 짊어져야 할 자업자득의 업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사법부의 그동안 불미스러운 여러 맹점을 가감 없이 점검하고 개혁해야죠. 그런데 사법권 독립과 맞물려 있는 문제들이 많기 때문에 법원 개혁엔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죠. 사법권 독립이 외부요인이 빚어낸 걸림돌이라면 법관 독립은 사법부의 내부적 요인과 얽혀 있어 들춰내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사법부에 대한 ‘외풍’ 못지않게 법관에 대한 ‘내풍(內風)’이 더욱 위험하다는 경고를 여러 번 되풀이한 바 있습니다. 사법부의 자생적 치부를 먼저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게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어서 걱정입니다.”

사법부가 독립을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방금 말씀드린 대로 외풍이 사법권을 침해할 수 있지만 사법부 내의 내풍도 사법을 망치는 위험요인이 됩니다. 우선 법관들의 굳건한 신념과 노력이 중요합니다. 특히 정치권력의 입장에 맞춰 눈치 보며 재판하는 자기 모독을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법에 대해 ‘지배계급의 통치 수단’으로 규정하는 이론도 있습니다. 변호사님께선 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법을 통치권자가 피치자(被治者)인 국민을 다스리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 법치주의는 민주국가에서 국민이 지배자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해돼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지배자의 하향성 통치 수단이 아닌 피지배자의 상향적 견제 수단이 돼야죠. 지배자가 먼저 준법을 하고 그 준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하향적 지배를 하는 게 올바른 법치주의죠.”

그런데 지금은 법이 통치권자를 향한 상향적인 견제 기능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법이 상향적인 견제 기능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회주의가 제대로 확립돼야 합니다. 상향적인 견제 수단이 뭐냐. 그 수단은 법이죠. 그 법은 입법기관인 의회가 제대로 입법 작용을 완수해야 합니다. 집권자에 대한 견제 내지는 책임까지 물을 수 있는 그런 법치주의가 돼야죠.”

의회주의가 제대로 확립돼야 한다는 명제는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잘 안됩니다.

“그러려면 이제 선거를 통해 국회가 구성될 때 정말 민주적인 세력이 국회 다수당이 돼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법치주의도 허울만 남게 되는 거지요.”

요즘은 잠잠해졌지만 개헌 논란이 한창 일었습니다. 개헌에 대해선 어떤 입장이십니까.

“개헌은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이건 일반적인 얘기인데, 근본적으론 제왕적 대통령이 나오지 않도록 균형과 견제 기능을 갖춘 헌법이 나와야죠.”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한승헌 인터뷰②] “공안사건 수사·판결 유감스러운 사례 나와”
  • 김지영 기자 (you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8.20 14:00
한 사람의 삶 크기와 무게는 그 시대 요구를 얼마나 제대로 반영해 충실히 응답했느냐로 측정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1세대 인권변호사’인 한승헌 변호사의 삶의 크기와 무게는 크고 묵직하다. 독재정권 서슬이 퍼렇던 70~80년대, 당시 ‘민주화’라는 시대 요구에 몸소 응답했던 한승헌 변호사. 그는 변호사로 누릴 수 있는 안온한 삶을 스스로 뒤로 물렸다. 그 자리를 궂은일과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일들로 채웠다. 법정 싸움과 거리 투쟁 등으로 두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한 변호사는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조작 사건부터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 한국 현대사를 얼룩지게 한 시국사건들 한복판에 섰다. 양심수와 시국사범 변호에 발 벗고 나섰다. 이후에도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 변론을 맡았다.

그는 최근 출간한 스물일곱 명의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 《그분을 생각한다》에서 “이 세상에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도 있다”며 “우리는 자칫 자신이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죄인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준엄한 자기성찰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1934년생, 올해 85세. 법조계 원로로 여전히 냉철한 이성으로 시대를 꿰뚫는 혜안을 소유한 이 시대 진정한 원로 가운데 한 분이다. “누구로부터도 책잡힐 오점 하나 없이 늘 올곧은 자세를 유지해 온 참된 지식인의 본보기”로도 평해진다.

그런 한 변호사와 인터뷰하긴 결코 쉽지 않았다. 6월11일 오후 5시경 한 변호사의 서울 은평구 갈현동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한 변호사는 첫 전화통화에선 승낙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날 두 번째 통화에서 “좋은 말 할 게 없어서 (우리 집에) 오셔도 들을 게 없을 거다”며 “우리 집사람이 (언론에) 나가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말린다. 집사람 말을 들어야지”라며 정중히 사양했다. 그때부터 한 변호사와 인터뷰 실랑이가 한 달 이상 이어졌다. 기자가 한 변호사 자택을 불시에 ‘급습’하기도 했다. 삼고초려 끝에 결국 7월31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19층 카페에서 한 변호사와 마주 앉는 데 성공했다. ‘유머리스트’로도 유명한 한 변호사의 유머 본색은 이날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90분 인터뷰였다. 한 변호사의 깡마른 얼굴엔 형형한 눈빛이 서려 있었다.

요즘도 시국사건에 관심이 많으시죠.

“난 이제 은퇴한 고물이어서 그전과는 같지 않지만 사건에 따라선 관련 기사를 유심히 보고 있지요. 예전에 비해선 인권 침해 사례가 많이 시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공안사건에선 수사나 판결에서 유감스러운 사례가 나오고 있습니다.”

과거에 많은 시국사건 변론을 맡으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요.

“제가 언론 인터뷰를 열 번 하면 열 번 다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사건의 무슨 경중을 비교해 말하는 것 같아 난처할 경우가 있어요. 그래도 굳이 답을 한다면 검거 기소된 인원수, 사건의 정치적 성격, 형벌의 정도, 사회적 반응 등을 가지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예컨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 그런 충격적인 사건들은 지금도 기억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후 검찰과 법원 등 과거사위원회에서 재조사하고 재심의해 무죄 판결을 받아내지 않았습니까.

“재심에 무죄 판결이 난 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죠. 그러나 인혁당 사건이나 그 밖의 소위 공안사건으로 사형집행까지 당한 사람한텐 재심 무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때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란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2010년쯤 변호사님께서 갖고 계신 책과 시국사건 기록들을 서울대로 보내셨습니다. 당시 언론 인터뷰를 보니 ‘나머지 서적이나 자료도 분양하거나 기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더 분양하거나 기증하셨는지요.

“그때 서울대로 사건 기록과 자료를 보낸 건 사실인데, 서울대에서 전부 복사한 다음 원자료는 다시 저에게 돌려줬습니다. 대학에서 사건 기록 내용을 볼 수 있으면 되지 꼭 친필 자료를 볼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다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국사건 기록들을 계속 가지고 계실 건가요.

“주변에서 저한테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말해 줍니다. 이미 제 모교인 전북대 중앙도서관에 ‘산민문고’를 개설해 제가 기증한 상당량의 서적, 문헌이 보관돼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바로 옆에 공간이 있으니까 그 문고를 확장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한편 제 장서 일부는 민족문제연구소에 가 있으니까 거기로 보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법 관련 기념관에 자료실을 마련해 소장하는 것이 좋겠다는 아이디어도 최근 나온 바 있습니다.”

변호사님께서 1975년 여름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 반독재 시위를 하다가 옆방에 들어온 감방 후배 문재인을 위해 ‘러닝셔츠 이웃돕기’를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나요.

“마치 내가 대통령하고 친하다는 자랑을 하는 것처럼 돼서 지금은 그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대선 전에 쓴 《운명》이란 책에서 언급해서 화제가 된 거죠. 더구나 대통령 되신 다음에 여기저기 그 기사가 나가니까 화제가 된 것입니다.”

(한승헌 변호사가 ‘어떤 조사(弔辭)’라는 글을 써서 반공법 위반 혐의로 1975년 3월 서울구치소에 구속돼 있을 때다. 경희대 학생회 간부인 문재인이 시위를 하다 구속됐다. 당시 한 변호사는 교도관을 통해 러닝셔츠 한 벌을 일면식도 없던 문재인 학생에게 보냈다. 훗날 문 대통령은 《운명》에서 “(한 변호사가 보내준 속옷이) 큰 도움이 됐다. 나중에 1987년 대우조선 사건으로 공동변호인이 됐을 때 말씀드리니 기억을 하셨다”고 언급했다.)

일제하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수출보복을 하면서 한·일 양국 갈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침략과 관련해 사과한 적이 있지만 나중에 그 사과를 거의 모두 뒤집고 딴소리를 해 왔지요. 그렇다고 해서 옛날 원한을 갖고 앞으로 한·일 관계가 계속 이렇게 나가면 안 되겠죠. 다만 모든 출발은 일본의 침략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그 근본을 일본이 잊어선 안 됩니다. 일본이 침략과 강압 통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에 한 번이라도 인정한 이상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아베 정권이 한·일 갈등과 긴장을 극대화해 개헌을 하고 나아가 군사력을 강화하고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옵니다. 아베 정권을 선택한 일본 국민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 아닐까요.

“아베 정권이 선거에 의해 집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국민이 아베의 모든 주장이나 정책을 찬성하는 건 아닙니다. 흥미로운 건, 저하고 친한 일본인들은 거의 다 ‘반(反)아베’파예요. 그래서 만나면 서로 맞장구치면서 아베를 비판하죠. 그러면서도 아베를 권좌에서 밀어내진 못합니다. 일본의 민주 세력과 반정부 세력의 한계죠. 우리는 광장에서 촛불 들고 대통령을 탄핵시킨 국민이지만 일본은 상상도 못 하죠.”

“모든 출발은 일본의 침략에서 비롯된 것”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도 반아베 운동에 나설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 일본에서 2000여 명이 (아베 총리의 대한 수출보복 조치 등에 대해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어요. 거기에 저하고 친한 사람들 이름도 나와 있습니다. 일본 지식인들이 집단적으로 아베 정권을 비판하면서 그렇게 나온 데 대한 응답으로 우리 한국에서도 지식인들의 성명이 곧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금 의견을 모으고 있는 과정인데, 근일 중에 발표가 나올 것으로 믿습니다.”

변호사님도 서명하셨죠.

“제 이름도 끼어 있을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해빙됐다가 요즘은 주춤하고 있습니다. 북·미 관계는 아직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 한반도 정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방 70년 동안 (남북이) 정말 서로 불신하고 증오했는데 그게 몇 년 사이에 다 잊히기는 어려울 거예요. 제가 보기엔 아직도 남북 간에 완전한 신뢰가 회복된 게 아닙니다. 이 때문에 이런 좀 애매한, 정말 오해하기 쉬운 이런 시기가 어느 정도는 지속될 거라 봅니다.”

남북 간 신뢰 회복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간만 가도록 내버려둔다고 해서 남북관계가 지속적으로 나아지는 게 아닙니다. 그 시간 동안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신뢰를 쌓다보면 요즘 같은 애매한 현상은 없어질 것 아닌가요. 남과 북이 잘 이해하고 일치하면 미국과 일본을 대하는 힘이 강해질 수 있죠.”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들 가운데 잘하고 있는 것과 잘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현재 여건하에서 남북관계는 정부가 제대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미국을 보면 역시 자국 이익을 우선으로 하다보니 남북이 더 어긋나는 것도 볼 수 있어요. 우리가 그런 걸 알고 극복하면 남북이 이른바 평화세력이 돼 더 좋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텐데, 조금 두고 봐야죠.”

그런데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선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경제에 대해 말 몇 마디로 옳고 그름을 얘기할 수 없죠. 더욱이 저 같은 사람은 전문가도 아닌데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러나 큰 틀에서 남북이 서로 신뢰하고 안정 세력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면 크고 작은 문제들도 부수적으로 잘 해결될 거라 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해 주십시오.

“그냥 나이 든 할아버지로서 제 손자 걱정하는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있는데, 그게 괜히 어른 중심으로 이러고저러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생채기를 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청년기에 접어든 젊은이들에겐 ‘입신을 한 다음엔 반드시 헌신을 해야 한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몇 해 전, 서울대 로스쿨 입학식 기념 강연에서도 이 말을 했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도 가끔 쓰지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까 말한 책이나 자료(시국사건)를 잘 정리해 동시대나 후대 사람들의 연구나 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는 ‘소식(小食)’과 ‘유머’를 건강비결로 꼽는다. ‘인권변호사’라고 하면 그 언행이 항시 엄숙하고 진지할 것만 같다. 하지만 한 변호사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은 안다. 그가 우스갯소리 잘하는 ‘유머리스트’라는 걸. 그동안 《유머산책》 《유머기행》 《유머수첩》 등 유머 책만 3권을 쓴 유머작가이기도 하다. ‘한승헌과 유머’는 지난 7월31일 인터뷰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한 변호사의 유머론(論)은 이랬다.

유머 책도 세 권이나 내셨습니다. 유머에 대해 별도로 구상하시는 게 있나요.

“때로 머릿속에서 떠오르긴 하지만 그걸 구상이란 말까지 붙일 건 없죠. 유머는 그냥 떠오르는 생각이어야지, 그걸 심사숙고하거나 연구하면 유머 아닌 철학이 나오지요. 일상의 어려움이나 각박함을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융통성 있게 생각하다보면, 유머가 저절로 떠오르지요. 야구로 말하면 직구만 던질 게 아니라 변화구로 보는 사람들도 재밌게 하는 게 유머입니다. 유머는 여러 사람에 대한 정감과 너그러움, 생각의 폭, 기지가 없으면 절대 안 나옵니다. 또 유머는 원가(原價)가 하나도 안 들어서 참 좋고, 또 아무리 즐겨도 세금이 안 붙으니까 더 장려할 만합니다.”

어느 나라나 정치인과 유머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변호사님께서 보셨을 때, 요즘 정치인 가운데 유머 감각이 뛰어난 분이 있으신가요.

“정치인들이 요즘 유머 아닌 막말을 많이 하는데, 왜 막말을 하냐. 막말을 해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언론에 이름과 얼굴이 나오게 하려는 건데, 때론 가소로운 것도 많지요. 막말을 쓰면 일시적으론 관심 대상이 될지 몰라도 길게 봐선 마이너스입니다.”

정치인의 유머 가운데 기억나는 게 있으신가요.

“1985년인가. 미국에 망명 중인 김대중 선생께서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을 강행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 선생의 귀국 비행기엔 외국 언론인, 외교관, 정치인, 학자 등이 동승했습니다. 그때 정부에선 ‘김대중은 많은 외국 사람들과 몰려다니는 사대주의자다’라고 비방했어요. 이에 대해 김대중 선생은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내가 그 사람들 따라다녔으면 사대주의자지만, 그 사람들이 나를 따라왔는데 왜 내가 사대주의자냐’라고. 그렇게 해서 또 한 번의 역습이 대승을 거두고 화제가 되기도 했죠.”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