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일취월장7 2019. 8. 21. 12:25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①


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에 '무역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경제 전쟁'을 선언한 셈입니다.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이른바 '1965년 체제'를 전환해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비단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질서와 한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65년 체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 시작점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입니다.  

김민웅 교수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일협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문답형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레시안>은 김 교수의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 글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오늘부터, 문답형 질문 형태로 '한일협정'과 관련해 아주 쉬운 사실부터 점차 복잡한 논의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차근차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한일협정’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외교적으로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문건입니다. 이 내용과 그 해석, 논란의 지점 그리고 보다 큰 맥락의 역사를 아울러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한일협정'은 언제 양국 사이에 조인 된 것인가요? 

1965년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민정이양을 약속했다가 결국 이를 뒤집고 박정희 자신이 정권의 수반이 된 다음,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면서 무척 다급하게 이뤄진 조약입니다. 

(1-1) "다급하게" 라니요? 

한일회담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는 거센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굴욕적이고 매국적인 협상이라는 반발이었습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까지 동원해서 반대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이듬해 1965년 6월 22일 조인한 뒤, 국회에서는 8월 14일 공화당 1당과 무소속 2명을 구색으로 껴 맞춰 야당이 총사퇴 결의를 하고 불참한 가운데 내용 검토의 시간도 충분히 갖지 않은 채 일방적 비준을 강행한 것입니다. 

▲1965년 한일협정 조인식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2) '한일협정'을 위한 회담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요? 

1951년도부터 공식 논의가 시작됩니다. 1차 회담은 1952년입니다. 1965년 7차 회담으로 협정이 조인되었으니 무려 14년 동안 진행한 회담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1948년부터 일본과 배상문제를 정리할 준비를 합니다. 식민지 피해, 전쟁피해와 관련한 배상요구가 핵심이었습니다. 1948년은 한국이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부를 수립한 해였기 때문에 이런 준비가 가능했습니다.

일본은 7년 동안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1948년은 일본 정부가 세워지기 전이라 한일회담은 불가능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일본의 전후(戰後)처리를 위한 1951년 9월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있고서야 비로소 일본은 주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1951년 한일회담은 이렇게 한국과 일본의 정부와 정부 차원이 생겨난 시점에서 시동(始動)을 걸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1951년 한일회담은 한국보다 일본이 좀 늦게 정부로서 기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2-1) “강화조약”은 전쟁을 치룬 나라끼리 평화적 관계로 들어가기 위한 회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도 일본에 전쟁에 해당하는 무장독립투쟁을 했는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회의에 참여했나요? 

아닙니다.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애초 한국의 참가에 긍정적이었으나 영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국에게 언젠가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할 바입니다. 특히 패전국의 입장에 있던 일본이 적극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일본의 요시다(吉田茂)) 수상은 “만일 한국이 조약 서명국이 된다면 100만의 재일 조선인들을 연합국민으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은 경제적 부담으로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의 대다수는 공산주의자이다. 이들에게 조약의 재산상 이익을 주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은 결국 일본의 편에서 입장을 바꿔 1951년 5월 경, 한국을 제외하는 쪽으로 방향을 굳혔습니다. 일본을 냉전의 아시아 방어선으로 확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방침이 선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희생을 댓가로 말이지요. 

(2-2)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서명 작업에 참여하지 못한 결과 뭐가 문제가 된 것인가요?  

임시정부는 1941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합니다. 일본을 상대로 한 교전국(交戰國)의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연합군의 일원이 될 기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독립투쟁을 한 것도 일본과의 전쟁 당사자라는 국제법적 위상을 인정받는 근거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한국은 일본에 대해 교전국, 또는 승전국의 입장에서 전쟁배상 문제를 논의하고 배상요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대단히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이 길이 막힌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길고 고통스러운 한일회담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계속)  



'한일합병'이 합법적이라는 엉터리 '국제법'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②
2019.08.09 08:23:47

(3)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한국제외" 방침이 결정된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네요. 게다가 이걸 미국이 결정했다니,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해방이 된 거 잖아요? 그래서 독립된 주권국가가 된 거구요. 미국은 도대체 우리 한국을 뭘로 본 거에요? 

해방된 나라가 아니라, 일본의 지배가 종료된 나라로 본 것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 낯설거나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으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보세요.

(3-1) 하지만 그게 그거 아닌가요?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으면 독립국가가 되는 게 당연하지요. 

1945년 "한국에 대한 권위의 이양(Transfer of Title to Korea)"이라는 국무부의 문건은 "점령 자체는 영토에 대한 주권의 변경을 초래하지 않는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의 패전으로 한반도 남쪽에 미군정이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1.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주권이 해체되었다거나, 2. 그 주권이 한국인에게 반환되었다, 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3-2)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전쟁에서 진 상대방의 영토를 점령했다고 그 땅이 곧 점령자에게 귀속(歸屬)되거나 또는 원래의 주민에게 그 권한이 반환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달리 말해서 일본이 국제법적 주권의 영향력을 행사한 조선을 미국/소련이 점령했다고 해서 그 땅에 대한 주권을 미군정/소련군정이 곧바로 가질 수 있다거나 조선/한국사람이 그 주권을 돌려받아 행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식.


(3-3) 그러니까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 상태가 계속 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네요?

주권(sovereignty)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에게 행사하는 통치권인 대인주권(對人主權/imperium)과 땅, 바다, 하늘에 대한 영토주권(領土主權/dominium)이 있답니다. 

국무부 문건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대인주권은 패전으로 효력이 정지되었지만, 영토주권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논리입니다. 국제법상, 대인주권의 행사(行使)는 미군정이 하는 것이 되는 거구요. 

(3-4) 네? 그러니까 1945년 8월 15일 조선에 대한 영토주권을 가진 나라는 여전히 일본이라는 말인가요? 

국제법상 일본이 조선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공식화해야 이 문제가 풀리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전승국인 미국이 이 지역에 대한 관리를 위해 통치권을 발동하려면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해방 후 남한에서 정치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었던 신탁통치안은 미국이 해석한 이런 국제법적 배경이 있답니다.  

(3-5) 그래도 우리 한국이 임시정부도 가지고 있었고 오랫동안 독립투쟁도 했으니, 일본의 패전과 함께 우리가 주권국가로서의 권리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동적인 것 아닌가요?

그래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미국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미군정 법무부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대한 다음의 해석과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일본은 1945년 9월 2일 포츠담 선언을 승인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주권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적대관계의 종료는 한국을 합병 이전으로 복귀시키거나 한국의 새로운 국가수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한국의 해방은 한국인의 혁명운동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전승국의 결정에 의해 끝났으며... 한국이 국가들 사이에서 독립된 국가로 간주될 때까지 한국의 주권은 정지상태(abeyance)였다..." 

샌프란시스코 미국 특사 덜레스는 "미국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적이 없다"고 말했고 "독립투쟁도 개인적 행위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要人)들이 해방후 미군정에 의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는 것도 모두 이런 미국의 한국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3-6) 그렇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1910년 '한일합병(韓日合倂)'이 국제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이 되는 거 잖아요?

그렇습니다. 미국은 1910년 한일합병의 국제적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체제는 식민지를 지배했던 전승국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문제 또한 있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이 국제법적으로 정리되는 것은 너무나도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야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reparations)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이런 논의와 틀을 봉쇄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이런 틀을 자신의 식민지 지배 합리화에 적극 활용합니다.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지요? 이 또한 차근차근 정리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시 강조하고 강조하건데 '한일합병'의 국제법적 불법성을 확인하고 주장하는 것은 한일협정, 한일관계의 모든 사안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계속)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한국은 자유롭다!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③


(4) 한국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교전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우리로서는 매우 불리한 조처가 되고 말았는데, 그걸 우리가 꼭 따를 필요가 있는 건가요?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 강화조약의 서명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조약을 우리가 국제법적으로 지킬 아무런 의무가 없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한국제외”는 불리한 대목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역설(逆說)”이 발생하게 됩니다. 당시로서는 서명 당사자가 되지 못한 억울함이 있었지만, 그 바람에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이 된 것입니다.

(4-1) 아, 그렇군요. 그래도 그 조약이 일본과 우리의 관계를 규정한 것 아닌가요?

규정된 내용은 아주 일부일 뿐입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일본 사이의 조약입니다. 일본의 권리 내용과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한국의 의무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조약은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전후 관계 재정립 문제가 주제였기 때문에 식민지 배상 문제는 일체 논의되지 못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일본은 이 강화조약에서 식민지 배상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식민지 배상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거론하고 제기할 수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누락된 것이기 때문이며 식민지 피해 당사자인 우리는 당연히 제기할 권리가 있고 이 권리를 중심으로 한-일 관계를 정리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패전 후 맥아더 옆에 선 히로히토 천왕. 맥아더의 자세는 다소 삐딱한 반면, 히로히토 천황은 꼿꼿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4-3) 뭔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에요. 그렇지만 미국이 우리의 해방, 독립, 임시정부를 하나도 승인하지 않았는데 이런 문제 제기가 가능할까요? 

식민지 배상 문제를 제기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우리의 해방과 식민지 처리 문제를 미국이 승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곧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당시 이미 주권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1952년 체결되는데 우리는 유엔이 1948년 승인한 합법적 정부입니다.

미국과 연합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정한 내용은 패전국 일본에게 부과한 의무와 원칙이지 우리에게 부과한 의무와 원칙이 아닙니다. 

(4-4) 그래도 한국과 관련한 내용이 있지 않나요? 아주 일부의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고 해도 말이지요. 

일본은 한국에 대해 권리를 포기하고 한국과의 청구권 처리는 “당국 간의 특별 협정”으로 처리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제2조 a) 일본국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여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權原/title)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Article 2 (a) Japan, recognizing the independence of Korea, renounces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Korea, including the islands of Quelpart, Port Hamilton and Dagelet 

**제4조 a)........ 재산 및 청구권의 처리는 일본국과 이들 당국 간의 특별협정의 주제로 한다. Article 4 (a) Subject to the provisions of paragraph (V) of this Article, the disposition of property of Japan and of its nationals in the areas referred to in Article 2, and their claims, including debts, against the authorities presently administering such areas and the residents (including juridical persons) thereof, and the disposi tion in Japan of property of such authorities and residents, and of claims, including ; debts, of such authorities and residents against. Japan and its nationals, shall be | the subject of special arrangements between Japan and such authorities. The property of any of the Allied Powers or its nationals in the areas referred to in Article 2 shall, in so far as this has not already been done, be returned by the ad ministering authority in the condition in which it now exists. (The term nationals whenever used in the present Treaty includes juridical persons.)
(b) Japan recognizes the validity of dispositions of property of Japan and Japanese nationals made by or pursuant to directives of the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any of the areas referred to in Articles 2 and 3. 

여기서 말하는 청구권의 개념은 앞서 밝혔듯이 전쟁배상도 아니고 식민지 배상도 아닙니다. 채무관계의 정리를 뜻합니다. 전쟁배상과 식민지 배상이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본은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 권한,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되어 있으니 그 어떤 청구도 우리에게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남은 것은 우리가 일본에게 따져 받아야 할 재산처리와 채무 문제입니다. 여기에 식민지 배상과 전쟁배상까지 합해야 제대로 된 계산이 성립합니다. 이게 우리의 권리가 됩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우리의 권리에 대한 제약을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담겨져 있지 않은 내용은 다른 조약이나 협정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빠진 한일협정은 불완전하고 미완의 협정일 뿐입니다. 

(4-5) 연합군의 일원으로서의 교전국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우리는 분명히 독립투쟁을 통해 일본과 교전했고, 식민지로 일본에게 강점된 불법적 침략도 사실이니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1965년 한일협정과 관련해서 일본의 주장대로 (재산처리와 채무 관련) 청구권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해도, 식민지 피해 배상, 전쟁 피해 배상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1965년 한일협정 체제의 한계가 드러나는 겁니다. 

이것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역설의 논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계속) 


샌프란시스코 조약, 반드시 바로잡아야 ④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④
2019.08.12 08:24:34

(5) 듣고 보니 한일협정 논의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일협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이 조약을 거론하면서 “’국제법’도 모르는 소리”, 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우리가 국제법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않는다는 주장이지요. 이게 맞나요? 

아닙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당사자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나 강제조항이 없습니다. 일본이 포기해야 할 권리, 일본이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서명 당사자 국가들 간의 국제법일 뿐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부분만 근거 내지 참고사항으로 삼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가 자동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조약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5-1) 네? 그게 뭔가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한국을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로 여기지 않고 일본으로부터 “분리(seperation)”된 지역으로 취급했습니다. 

“해방된 지역”과 “분리되는 지역”에 대한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은 일본이 불법적인 강점으로 획득한 식민지가 아니라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합병조약을 체결하여 국제법적으로 정당하게 취득한 영토인데 패전으로 그 권리가 포기되어 일본 국가로부터 분리해야 하는 지역이라는 논리입니다. 일본이 바라던 바입니다. 

승전국들이 자신들에게 끼친 전쟁의 피해책임은 일본에게 묻되 식민지 배상의 문제는 덮어주는 식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제대로 된 한일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5-2) 너무 화가 나요. 

네, 맞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부당한 조약입니다. 지금도 분노하고 반드시 따져야 할 내용입니다. 이 책임은 일차적으로 이런 조약을 만든 미국에게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보다 뒤늦게 정부가 수립된 일본(1952년)이 먼저 정부가 세워진 한국(1948년)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조항입니다. (제2조 (a))

이렇게 되면 우리는 1948년이 아니라 1952년 일본의 승인으로 독립한 셈이 됩니다. 이게 어떻게 우리가 받들어야 할 국제법인가요? 비판과 규탄의 대상이지요.

1952년 1차 회담 당시 한국 측 대표단도 바로 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5-3) 국제법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네, 그래야 합니다. 일본은 식민지 문제 처리가 분명하지 않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한일관계를 정리하는데 자신들에게 유리하니까 국제법이라는 주장으로 이걸 근거삼아 우리에게 들이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한국 국내의 보수 언론과 일부 지식인들의 “국제법 운운”의 주장도 국제법이 뭔지 제대로 모르는 무지한 발언일 뿐입니다.  

(5-4)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기본 성격이나 본질을 뭐라고 하면 되나요?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서로 전쟁을 했던 나라들,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관계를 정리한 조약입니다. 하나의 체제, 그러니까 “전후질서(戰後秩序)”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패전국 일본을 포함한 구(舊)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식민지 처리 문제는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인류 보편의 역사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시대역행적이었습니다. 

식민주의 시대가 종식되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주제는 “탈식민주의” 작업입니다. 이걸 담지 않은 강화조약과 전후질서는 당연히 문제를 짚고 제기해야 마땅합니다.

이 조약과 질서가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고 기존의 권리를 포기하게 하는 전후처리의 기능을 했다고 해도 그 질서의 식민주의적 본질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5) 어떻게 하면 되지요? 

일본은 지금이라도 하루 빨리 한반도 전체에 대한 불법적 강점과 식민지 피해에 대해 근본적인 사죄와 함께 1965년 한일협정체제에서 한사코 빼먹은 청산의 실제적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이게 답입니다. 제대로 풀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길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불법이다" 주장한 일본, 한일협정 밀어붙이다 ⑤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⑤
2019.08.13 08:28:31

(6) 우리에게 그토록 불리했던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에게 식민지 배상에 대해 면죄부를 준 셈이니 일본으로서는 좋아했겠어요. 이걸 계기로 한일회담이 시작된 거라면 일본은 한일회담에 대한 준비도 그런 입장에서 했을 텐데, 두 가지 질문이 있어요. 

우선, 일본은 한국에 대해 어떤 태도로 회담에 임하게 되었을까하는 것과 어떻게 한일회담이 시작되었을까, 하는 거에요. 순서로 보면 두 번째 질문이 먼저가 되겠네요.

한일회담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된 뒤 미국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시작됩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되고, 그해 10월부터 한일 예비회담이 열리고 1차 회담은 1952년 2월 15일부터 4월 21일까지 했어요. 그때 한국은 한국전쟁 중이었어요. 

어디서 했는가, 이것도 중요한데 일본 동경에서 열렸답니다. 일본에서 미군정을 책임졌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ters/SCAP: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실제로는 미군 사령부가 있는 회의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회담 공식 언어도 영어였습니다. 

미국은 한일회담을 통해 한일관계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만든 질서 안에 담기도록 하려한 것입니다.  

(6-1) 우린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서명 당사자가 아닌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요?

바로 그 점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서명 당사자가 아닌 한국을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포함시키는 작업, 이게 미국이 의도한 한일회담이었습니다. 거기서부터 기본적인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배상문제를 비롯해 식민지 문제의 청산을 제기했지만 미국은 일본이 요구한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문제”에만 국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문제는 거론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반발이 워낙 커지자 결국 의제가 확대됩니다. 본격회담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빠지지만 예비회담에서는 참관인 명목으로 참가해 (윌리엄 시볼트 William Sebald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일본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끌고 갔습니다.

(6-2)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싸웠는데 왜 그런 거지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시아 냉전체제의 구축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기본 목적이었고 여기서 일본의 역할을 강화시켜 냉전수행기지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라고 해서 일본의 파시즘 체제를 해체시키기 보다는 그 기반을 적극 활용해서 경제부흥을 통해 미국이 중심이 된 동아시아의 강력한 반공망(反共罔)을 만들고자 한 것이지요. 

친일세력을 청산하기 위한 한국의 반민특위법률 제정이 미군정에 의해 계속 가로 막혔던 역사도 모두 이런 미국의 세계정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수직적으로 일본의 하위구조에 위치하도록 한 것이구요. 

우리는 경제적 재원이 절실한 상황이 여기에 얽혀 한일회담이 이 틀 안에서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6-3) 의제를 “재일조선인 법적 지위문제”로만 국한시키려 한 것은 왜 그렇지요?

패전국 일본은 일본에 있는 재일 조선인/한인들을 부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패전 직후 200만 명 가량이던 이들은 다수가 귀국 후 60만명 정도 남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법적으로 일본인이었으나 이제는 법적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집단이 된 셈입니다. 

미국으로서도 냉전체제 강화를 위해 일본의 입장을 편들고 나선 것이지요.

(6-4) 이 문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고, 회담에 임하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자세, 어떤 거였나요? 

중요한 대목만 짚어볼게요. 

1. 조선의 병합은 조약으로 적법하게 이루어졌다.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취득이다.
2. 조선통치 시절 한국인의 경제, 문화생활은 향상되었다.
3. 일본이 한국을 위한 통치를 했기 때문에 도리어 한국으로부터 받아 낼 것이 더 많다.

(6-5) 이건 혹시 지금 일본의 아베 정권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생각 아닌가요?

겉으로 내놓고는 그러지 못하지요. 그간 여러 총리들이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 사과라는 것도 “법적 책임”은 한사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우익은 한국의 식민지 지배가 정당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의 역사교과서에는 바로 그런 생각이 담겨 있으니까요. 한국의 이른바 뉴라이트 식민지 근대사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이후 제3차 회담(1953년 10월)을 중단시킨 일본측 회담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저 악명 높은 망언으로 정점을 이룹니다.

▲'구보타 망언'의 주인공, 구보타 간이치로


(6-6) 구보타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가요? 

- 한국에 대한 일본의 주권 포기를 명시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이전에 수립된 한국정부는 불법적 존재다. 
-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에게 유익했다. 철도시설, 항만건설, 자본투자 증가 등이 예이다.
- 일본이 아니었다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지배했을 것이다. 그건 더 나쁜 상황이다.
- 카이로 선언이 한국민족은 일본치하에서 “노예상태”라고 한 것은 연합군이 전시(戰時) 히스테리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을 통치한 미군정이 일본의 재산을 한국에게 넘겨 준 것도 국제법 위반이다.

이 가운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조선에게 유익했다고 한 발언은 그야말로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고, 결국 제3차 회담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요시다 총리가 일본이 더 받을 게 있다는 이른바 “역청구권(逆請求權) 논리”를 관철시키려 했던 시기의 문제였습니다. 

(6-7) 일본에서는 어땠나요? 

일본 외무성도 구보타의 발언을 옹호했고, 여당과 야당도 이를 지지했고 언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전체의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제4차 회담은 4년 뒤인 195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열리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본의 한국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부정은 바로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계속) 


'독립 축하금' 운운한 일본의 기만술 ⑥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⑥



(7) 결국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다, 이걸 출발점으로 해서 회담에 임했다는 거니까, 우리와 일본은 입장이나 자세가 완전히 극과 극이었군요.

그렇지요. 그래서 두 나라의 “기본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가 매우 본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그냥 두 나라로 설정하면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게 마련이지요. 

일본은 자신의 가해사실을 역사적으로 기록하는 걸 거부했고 우리는 그걸 기점으로 회담을 하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1차 회담 당시 우리는 “기본관계”라는 말을 주장했고 일본은 “우호관계”라는 말을 내세웠답니다. 이 말이 얼핏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식민지 지배 역사를 청산하는 문제를 담지 않으려 한 것이지요.  

(7-1)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제 안에서는 식민지 배상 문제가 제기되기 어렵게 되어 있다고 했잖아요. 

네, 그러니까 남은 것은 채무 관계를 정리하는 청구권 논쟁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근거한 회담은 청구권 협정에 한 한 것이고 식민지 배상, 전쟁배상은 따로 정리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전쟁배상도 교전국으로서의 배상요구,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당시의 피해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1965년 한일협정은 단지 청구권 논의에만 국한 한 것입니다. 정확히 따지면 일본은 우리에게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엄청나게 있는 겁니다. 2012년과 2018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관련 판결이 바로 이 문제를 거론한 거에요.  

(7-3) 대법원 판결 문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셨으면 해요. 근데 일본은 청구권 논의도 나중엔 하려 들지 않았다면서요? 이게 무슨 말인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애초에는 청구권 논쟁으로 자기도 받아낼 게 있다고 역청구권 개념을 가져와 돈 문제를 상쇄하는 방식으로 마무리 하려 했어요. 그러다 이게 되지 않자 요시다 시게루 정권 이후 기시 노부스케 정권에서는 “역청구권 포기”로 정리합니다.  

그리고는 아예 청구권이라는 용어 자체를 쓰지 않고 경제협력이네, 독립 축하금이네 하는 식으로 방향을 몰고 가려 하지요. 

▲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세계2차대전 A급 전범이다.


(7-4) 아, 복잡하네요. 그것도 1차에서 7차에 이르는 회담을 정리할 때 다시 설명 부탁드립니다. 하나 또 궁금해지는 건, 회담이 시작되었던 시기에 일본 정부나 일본 여론이 거의 모두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합법성, 한일합병이 정당했다, 그렇게 여겼다는데 그래도 일본 파시즘에 맞서서 반전운동을 했거나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 사람들도 있지 않았나요? 좀 중구난방으로 질문 드려 죄송합니다. 

무슨 요, 생각나는 건 그때 마다 하셔도 됩니다.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일본사람들이라, 네, 있었지요. 무엇보다도 우선 일본 공산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미국의 냉전정책이 강화되면서 배제되었고 일본의 미군정 당국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7-5) 아. 조금 조심스러워지네요. “공산당”이라고 하니까.

- 그럴 거에요. 그러나 일본 공산당의 역사를 알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전쟁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피압박 민족 해방”을 주장했습니다. 

(7-6) 1945년 이후는 어떻게 입장을 표명했나요?  

패전 이후 일본 공산당은 천황제 지배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적이었습니다. 천황제가 일본의 민주주의의 걸림돌이고 식민지 해방의 최대의 장애라고 밝혔습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황제 비판논쟁은 일본 정치의 아킬레스 건이에요. 이와 함께 일본 공산당은 
민족차별을 반대했고 재일 조선인/한인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7-7) 당시 일본 사회 안에 그런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고 지금으로서도 놀랍기만 합니다. 

당시 재일 조선인들을 해방이 되었다고 으쓱거리면서 일본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폭도라면서 요시다 정부의 차별과 핍박이 강화되자 일본 공산당 중의원 하야시 하쿠로(林白郞)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시다 정부와 경찰이야 말로 폭도다. 일본 국민은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 나섰던 조선 인민의 투쟁에 대해 오히려 깊은 경의를 가지고 있다.“ 

(7-8) 일본 공산당은 아니지만 지금도 이런 생각, 의식을 가진 일본 사람도 있겠지요?

네, 있습니다.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을 하는 여러 시민운동가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반 아베 운동을 하면서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나갈 분들이지요. 


아베는 '협정 위반' 운운하기 전에 '식민지 불법'부터 고백해야 ⑦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⑦
2019.08.15 10:38:14

(8) 한일협정 문제를 공부하다보니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참 중요하다는 건 거듭 거듭 깨닫게 되었어요. 그런데 식민지였던 나라의 피해는 승전국들인 연합국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대한(對韓) 청구권 포기와 협정을 통한 청구권 해결이라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생시킨 권리도 있지만 명시되지 않은 권리, 그러니까 식민지 배상, 전쟁 배상에 대한 권리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명시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권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요. 일본사회에도 이 문제에 대한 진실을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문제가 풀리는 출발점이 생겨납니다.

(8-1) 하지만 1965년 한일협정에서 청구권 문제는 다 해결된 걸로 되어 있지 않나요? 게다가 당시 일본이 가진 외화보유고 20퍼센트에 해당하는 거액인 5억 달러나 이미 주었는데, 왜 자꾸 더 달라고 하느냐? 이런 문제가 제기되어서 말입니다.

이러니 자꾸 말할 수밖에 없는데 1965년 한일협정에서 다루어진 청구권은 채무, 변제 관련 사안들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1965년 한일협정을 다룰 때 하기로 하고, 식민지 지배 시기 피해 전반에 걸친 배상 문제는 누락된 것입니다.  

1차 회담 때에도 우리가 요구한 것은 향후 관계를 생각해서 식민지 피해 배상 전체가 아니라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시기의 피해배상으로 최소화시킨 것입니다. 이 정도도 일본은 결국 응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5억 달라 지불의 내용은 협정문에 명기되어 있듯이 돈이 아니라 “3억 달러 가치에 해당하는 일본국의 생산물과 용역”의 무상제공이고 2억 달러는 “장기처리 차관”입니다. 이자내고 빌려오는 빚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지불도 무려 10년으로 나누어 하는 것입니다.

백보양보해서 청구권으로만 한정시켜 봐도 그 액수가 3억 달러에 불과하고 그 내용도 이미 말했듯이 식민지 지배 불법성에 기인한 배상이나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배상이 제외되어 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2012년과 2018년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은 이런 문제를 법적으로 정확히 제기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판결입니다. 

(8-2) 그러니까 실제로는 3억 달러가 무상으로 지불한 것이고 2억은 빚으로 빌려준 거군요. 무상 지불 3억 달러도 돈이 아니라 일본의 생산물과 용역이라면 결국 일본 시장의 확대가 이루어진 셈이네요.  

그래서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가 그리도 강렬했던 것입니다. 당시 한일 협정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지 않아 굴욕적이고 일본경제에 종속되는 길을 연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본질을 정확히 내다 본 것이지요.   

일본은 당시 한국전쟁 이후 전쟁 특수로 성장한 경제의 구조 재편의 과정에 들어갔고 낡은 경제 시스템의 이전과 시장 확대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걸 한국에서 한일협정을 통해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처리하려 든 것입니다.

이 액수를 한국이 가져오는 방식도 일본에게 경제개발계획을 보이고 협의과정을 거쳐 승인을 얻어 그 내용을 가지고 생산물과 용역이 제공되는 방식이어서 “내정간섭과 시장장악”이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안고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수직적인 국제 분업체계”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지요. 오늘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른바 “화이트 리스트 배제”가 경제적 타격을 줄 가능성이 생긴 구조적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본의 논리에 따른 대외진출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8-3) 일본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유리했던 협정이었군요.

그렇지요. 1965년 한일협정체제가 당시 정치적 정통성 문제 때문에 경제문제 해결이 급했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내부의 반대를 억압하고 작동했던 1965년에서 1980년까지만 계산해봐도 일본은 13억 달러를 한국에 투입한 반면, 20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일본이 마치 시혜를 베풀 듯이 돈을 엄청 주고 과거사에 대한 책임이 청산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지요. 

(8-4)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 2조 1항에 “양국 국가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규정된 것을 포함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 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로 되어 있지 않나요? 

의문이 제기될 법합니다. 그런데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바가 하나 있습니다. 한일협정에는 “기본관계에 대한 조약”이 포함되어 있는데 한국과 일본이 이 협정을 체결하는 입장과 관계가 담겨진 문서입니다. 이 조약에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관련 내용이 없습니다.“양국 국민 관계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말로 두리뭉실 넘어갔습니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일단 일본은 식민지 지배 피해 문제를 비켜가면서 조약 체결의 타결점을 찾았지만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관련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남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협정 위반이 아니라 협정이 다루지 않고 누락시킨 것을 제기하는 것이며 이 조약 그 어디에도 식민지 피해문제를 영원히 제기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입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은 변제와 채무관련 사안뿐입니다. 이 마저도 엄청나게 부족한 액수입니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기인한 피해는 이 조약 범위 밖의 것입니다.

한일협정은 따라서 강제징용 피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8-5) 이제 2012년과 2018년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판결의 취지를 요약해드릴게요. 

"청구권 협정 과정에서 일본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입장을 가지고 강제 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다. 따라서 그 당시 협정을 통해 한국과 일본 정부는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개인 청구권도 소멸하지 않았고 피해 국민에 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않았다." 

(8-6) 내용이 명확하게 들어옵니다. 식민지 지배 불법성에 대한 주권국가의 명확한 선언이군요. 국제법적으로도 의미 있는 선례가 만들어질 근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이 많이 진전되셨군요. 그러니 일본의 아베가 한국이 협정을 위반했다고 말하는 건 본질적으로는 한국의 정당한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자 논리적으로는 위반을 따질 수 있는 내용이 애초부터 없는 것을 가지고 위반이다 뭐다 말이 되지 않는 시비를 건 것입니다.

형법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상법을 가지고 와서 조항 위반이라고 하는 식입니다. 민사와 형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격입니다. 결국 아베는 역사와 현실의 법정에서 패소하고 말 겁니다.(계속) 


박정희, 군대 동원해 시민 짓밟고 엉터리 한일협정 추진 ⑧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⑧



(9) 지금까지는 일단 중요한 쟁점과 역사에 대해 좀 알게 되었으니, 14년 동안의 한일회담이 어떤 흐름으로 진행되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싶네요.

우선 시기로 보면 3차례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시기의 1차에서 4차까지 1단계, 그리고 중간의 장면 정권 때의 5차로 2단계, 그 이후 3단계는 박정희 집권시기의 6차에서 7차까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면정권은 단명해서 크게 보면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시기로 두 묶음이 됩니다.

(9-1) 연도별로도 정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우선 이승만 정권 시기를 연도로 정리하면 

1차 (1952년 2월 15일~1952년 4월 21일) 
2차 (1953년 4월 15일-1953년 7월 23일)
3차 (1953년 10월 6일~1953년 10월 21일) 
4차 (1958년 4월 15일~1960년 4월 15일)까지입니다.

날짜를 보면 아시겠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과 한국전쟁 시기가 겹치는 시기부터 1960년 4월 19일 학생혁명 직전까지였습니다. 

3차에서 4차까지 시간이 4년 반이나 걸린 까닭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게 은혜를 끼친 것이다”라는 구보타의 망언 때문에 3차 회담이 중단된 결과였습니다. 

4차 회담이 2년째 접어들어 한참 진행되던 1960년 4월에는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어 회담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다.


(9-2) 1단계 한일회담의 주요 논점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중요한 질문입니다. 일본은 재일 한인들의 법적 지위 문제와 어업문제에만 국한해서 회담을 진행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1. 두 나라의 기본관계, 2. 청구권 3. 어업문제, 4. 재일한인들의 법적 지위, 5. 문화재 반환 문제 등 이후 한일 회담이 다루게 된 문제의 기본 골격이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14년 동안 회담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큰 쟁점이 되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문제가 제기되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9-3) 그 이후는 한일협정 타결과정으로 들어가는 시기가 되는 거지요?

네, 그렇습니다. 형식상 타결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한일협정 타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회담 과정과 협정 내용에 대해서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협정체결 과정 또한 민주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은 이후 박정희 정권이 어떤 정권이 될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반대세력을 무력진압으로 억압해서 정치를 하는 정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5차 회담(1960년 10월 25일~1961년 5월 15일)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장면정권이 무너져 중단됩니다. 

6차는 1961년 10월 20일에서 1964년 4월까지 이르는 기간이었고 이 시기에 대대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3년 가까운 시기는 군사 쿠데타 세력의 민정이양(民政移讓) 약속 불이행, 이어지는 박정희의 공식적인 집권, 한일회담 내용에 대한 국내적 비판 등으로 정세가 불안정해져 회담 진행 자체가 간단치 않았습니다. 

이 와중에 1962년 10월 “김종필-오히라*”의 밀담이 이루어지면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당시 일본 외상) 한일협정 타결의 가닥이 잡힙니다. 이는 이후 그 내용이 알려져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 김종필-오히라 메모

▲김종필과 오히라


(9-4) 그 이전에도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이승만과 장면 정권 시기에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박정희 정권의 대일 협상 자세에 문제가 드러났고 그에 대해 지식인들을 비롯하여 4.19 혁명의 주체였던 학생세대의 문제의식이 날카로워졌던 것입니다.  

반대운동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서 반대운동을 진압하게 됩니다. 

1965년 한일협정 내용을 정리한 7차는 1964년 12월 3일에서 1965년 6월 22일까지입니다. 여기서 1965년 6월 22일은 한국과 일본이 조약을 조인한 날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국회에서 이 조약을 8월 14일 비준 통과시킵니다. 공화당 1당이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날치기 통과를 한 겁니다.  

비준 통과 이후에도 반대운동이 거세어지자 1965년 8월 26일에는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역시 군대를 동원해 반대운동을 탄압했으며 대학은 휴교령 조처를 취했지요. 

(9-5) 한일회담의 다른 한 축인 일본의 정권은 어떤 흐름이었나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역청구권” 논리가 회담을 난항에 이르게 한 시기, 이를 철회하고 식민지 관계 청산은 뒤로 한 채 경제협력에 중점을 두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정책 전환 시기,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시기의 소극적 대응, 그리고 기시 노부스케의 친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가 다시 경제협력 개념을 중심으로 한 협정타결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


(9-6) 일본에서는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가 없었나요?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과의 군사관계를 강화하는 신 안보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안보투쟁(安保鬪爭)”이었습니다. 미국, 일본, 한국이 하나로 엮어지는 군사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대였지요. 

게다가 일본의 독점자본이 한국에 진출해서 일본 내에서 저임금 구조가 심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9-7) 그러니까 일본의 식민지 지배 문제는 제기되지 못했군요.

그렇습니다. 일본 내 안보투쟁의 한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논쟁과 책임추궁,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일협정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의 문제는 소멸해버리고 미국의 냉전체제에 한국과 일본이 하부구조로 결합하면서 경제적 관계를 수직적으로 수립하는 것에 역점을 두는 쪽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9-8) 미국의 역할은 어땠나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만 여기서 미국의 역할은 매우 결정적이라는 점,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일관계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세계정책에 하위체계로 연동되어 있다는 점, 이걸 돌파하지 않고서는 정상적 관계를 만들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민족적 위상을 제대로 만들어낼 한반도의 냉전과 분단체제의 해소는 진정한 한일관계의 정상화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식민지배는 일본의 은혜'에 그들이 집착하는 이유 ⑨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⑨



(10) 한일회담의 첫 단추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과 맞물리면서 1951년 예비회담이라고 하셨는데,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하자면 그 내용에 대한 준비가 있었을 텐데 그런 게 있었나요? 

네, 있었습니다. 미군정 시기에 이미 일본의 배상 없이는 남한의 경제 건설이 어렵다는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은 일본의 경제 지원이 없으면 한국 경제의 미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해 피폐해진 현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49년 작성된 '대일배상요구조서'는 바로 그런 논의와 요구의 결과물입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니까 이 문건은 우리 정부 최초의 배상요구 내용이 담긴 것입니다. 

(10-1) 그런 게 있었군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 가요? 

두 차례로 나눠 정리되었는데, 그렇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미국은 전쟁배상 논의는 제외시키고 “반환적 성격의 항목”만 일단 제출하라고 한 것입니다. 명확히 따지자면 배상이 아닌 거지요. 미국의 이런 지침에 따라 1949년 3월 1권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현물반환과 확정채권에 대한 내용이 1부와 2부로 담겨 있습니다. 현물반환은 일본이 가져간 금 그리고 지금(地金)과 지은(地銀), 서적, 미술품과 골동품, 선박 등이고 확정채권은 유가증권, 보험금, 미수금 등이 포함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의 배상 요구에 대해 선을 그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이 있기 전의 시기였다는 점에서 배상 논의는 그때 가서 “고려”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인 겁니다. 이미 일본에 대한 정책이 달라져 일본의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방향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언급했던 역코스(reverse course)에 따른 미국의 일방적 통고였습니다. 
  
(10-2) 한국정부로서는 너무 당혹스러웠겠어요.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1권에 이은 속편을 정리합니다. 1949년 그해 9월에는 2권이 만들어집니다. 전쟁배상과 식민지 피해 일부 배상 요구가 담겨진 문건이었습니다. 

2권 역시도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중일전쟁 및 태평양 전쟁에 기인한 인적, 물적 피해, 2부에는 일본정부의 저가수탈에 의한 손해, 그러니까 강제공출에 의한 피해를 담았습니다.  이 두 권의 '대일배상요구조서'는 이후 청구권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재일(在日)재산문제”는 대단히 첨예한 논쟁을 가져온 대목이기도 합니다.  

(10-3) “재일재산 문제”라니요? 

흔히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라고 하면 한반도에 조성된 재산으로만 국한해서 생각하기 쉬운데, 재산의 소재는 일본이지만 귀속은 조선/한국이라는 논지에 따른 문제 제기입니다.

가령 조선은행, 조선척산은행, 조선신탁주식회사의 지점이 일본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재산은 누구의 것으로 귀속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조선총독부의 동경 출장소 재산도 여기에 포함되어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요구였습니다. 

이렇게 현물부터 전쟁배상에 이르기까지 다 계산해서 나온 액수가 당시의 환율로 치면 최소 24억 달러(1달러=15엔)에서 최고 75억 달러(1달러=4.35엔)에 달합니다. 이 액수의 차이는 일본 엔화를 어느 수준으로 평가하는가에 달려 있는 문제였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정리된 차관을 뺀 3억 달러와 비교하면 그 사이의 환율변동을 고려해도 엄청난 차이가 되지요. 

(10-4) 이런 내용들이 나중에 실제로 회담과정에서 청구권 논쟁으로 들어가면서 한-일간에 상당한 격돌을 불러 일으켰겠네요.  

그 충돌의 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 일본의 “역청구권” 개념입니다. 일본은 한국에 투여한 자본과 재화가 훨씬 많고 이미 미군정이 몰수해간 일본의 재산까지 합치면 일본이야말로 청구할 게 더 많다는 논리를 폈던 겁니다.  

(10-5)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은 청구의 권리를 포기한다고 되어 있지 않았나요?

당연히 그렇게 명시되어 있지요. 여기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해당 항목에 대한 미국의 해석이 중요해지는데 미국은 서로 '퉁' 쳐라, 그런 식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른바 “상쇄론”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 더 자세히 다룰게요. 일본의 “역청구권” 논리는 이 상쇄작전을 염두에 두고 제기한 것입니다.   

(10-6) 하나 잘 몰라서 묻는데요, 지금(地金) 그리고 지은(地銀) 이게 뭐지요?

네, 화폐 등으로 조물하기 위한 소재가 되는 금이나 은을 말하는데 그 말대로는 땅에서 캔 금과 은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금괴”라고 이해하면 가장 빠를 겁니다. 그런데 이게 중요한 까닭은 은행의 준비금으로 쓰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지금이나 지은의 보유고가 낮거나 고갈되면 화폐 발행 결정에 중대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지금”만 따져서 조선은행 통계에 따라 정리된 내용을 살펴보면,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의 지금 생산총량이 407톤, 이 중에 조선은행을 통해 일본으로 간 지금이 250톤 그러니까 총량의 60퍼센트가 넘는 양이지요. 이 대금이 5억 6천만 엔을 넘는데 이걸 일본에게 돌려 줄테니 현물로 도로 반환하라는 요구를 한 겁니다. 금괴반환 요구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5일 패전 이후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 전 화폐를 마구 발행해서 엄청난 인플레이션의 고통을 주고 떠났습니다. 물가가 두 배 이상 뛰어 그 피해가 막심했던 거지요.  

▲ MBC 취재 기자를 폭행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자 이영훈 교수. 식민지 근대화론, 이른바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에 은혜'라는 논리는 '식민 지배 불법'을 기를 쓰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에 그 근거가 된다. 한국의 '극우'가 만든 논리는 일본 '극우'의 논리의 숙주가 된다. ⓒMBC 화면 갈무리


(10-7) 그런데 '대일배상요구조서'는 1권이 반환항목, 2권이 전쟁피해 배상으로 되어 있다면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 문제는 정면으로 제기하지 않은 셈이 되나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묘한 대답이지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고 그에 따른 손실 전부를 요구할 수 있지만 이 정도로 요구 수준을 정리할 테니 응하라, 이게 '대일배상요구조서'의 입장이었습니다.  

배상요구 조서의 서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과거 36년간의 지배를 비합법적 통치로 각인하는 동시에 그간에 피해 입은 방대하고도 무한한 손실에 대해 배상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대일배상요구의 정신에 비추어 차제에 이에 대해서는 전면 불문에 부치는 바이다. 다만, 중일전쟁 및 태평양 전쟁 기간 중에 한하여 직접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가 받은 인적 물적 피해만을 조사하여 그 배상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

(10-8) 아,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은 제기하고 배상요구의 수준은 과도하지 않게 하겠다, 이런 논지였군요. 일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 '대일배상요구조서'를 직접 일본에 전달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지침에 따른 조사보고였고 향후 한일회담 기본 자료로 작성한 것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후 한일회담의 과정에서 이러한 내용과 논지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어 있는 거지요.

일본은 이미 여러 번 말했듯이 “적법한 한국병합이었다, 그러니 채권이나 보험금 등의 것은 국가의 분리에 따른 인계처리라는 의미로 해결할 수 있지만 배상은 택도 없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은 역청구권 논리를 붕괴시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불법적 재산 형성에 대해 청구할 권리는 애초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논의가 가장 첨예하게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 “일본의 한국지배가 한국에게 은혜를 끼쳤다”는 구보타 망언이 나온 제3차 한일회담이었습니다. 우리는 총독부 통계를 입증자료로 내세웠습니다. 한일합병 당시 일본 재산의 구성은 없었는데 이후 95퍼센트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일본의 식민지배가 얼마나 가혹한 착취체제였는가를 보여준다고 강조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인들의 노예상태”라고 지적한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10-9) 역시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최대의 관건이군요.

그렇습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채로 합의를 하는 순간, 문제는 미래로 넘어가게 되고 그 미래는 끊임없이 과거의 반격에 직면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강탈한 재산은 내 것" 주장한 일본의 모순⑩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⑩
2019.08.21 11:17:03

(11) 거듭되는 이야기지만, 무얼 놓고 한일 양국 간에 재산처리나 배상처리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식민지 지배의 본질에 대한 자세가 결국 핵심일 수밖에 없네요. 

그런 거지요. 일본의 입장에서는 불법으로 조성된 재산이라면 권리를 주장할 수 없지만, 적법한 재산이라면 반환청구가 가능한 거니까요. 이를 “역(逆)청구권”이라고 설명 드렸습니다만 이러한 일본의 자세는 1차 회담에서 3차 회담에 이르는 1952년 2월에서 1953년 10월의 기간 동안 일관해서 강조됩니다.  

말하자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라는 건 적법한 한일합병이고 그에 따른 적법한 재산취득이므로 “미군정의 재산몰수는 국제법 위반이다”, 이런 논리를 제기합니다. 3차 회담 때 문제가 되었던 구보타의 망언은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서 나온 겁니다. 큰 틀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청구권 포기 조항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온 겁니다. 

(11-1)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틀을 짠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이러한 주장이 불쾌하지 않았을까요?  

그랬어야 마땅하겠지요. 그러나 이미 일본의 배상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정책이 서 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자체가 이 문제에 대해 읽기에 따라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한일 간에 “미국해석” 논쟁이 이렇게 벌어지는데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은 결국 입본의 편에 선 셈이 됩니다. “미국해석”이란 샌프란시스코 2조와 4조에 대해 미국은 어떤 유권해석을 내리는가의 논쟁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2조에서는 일본이 일체의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을 못 박고 있는데, 4조에서는 채무나 부동산 처리 등 일본과 관련 당국 사이에서 서로 재산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청구권 문제는 “별도로 합의”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별도 협의를 통해 우리는 일본에 대한 청구권 해결을 생각했던 것이지 우리에 대한 일본의 청구권 요구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자기들에게도 청구권이 있다고 나오는 바람에 회담은 꼬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해놓고 재산문제분쟁은 별도로 협의하라? 

(11-2)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바로 그 조항을 근거로 한일회담이 시작된 것 아닌가요? “일본은 청구권 포기가 명시되어 있다, 청구권 논의는 그러니까 한국의 권리가 중심이 된다, 일본이 청구할 건 없다”, 그렇게 이해하고 회담이 이루어진 거잖아요. 

네, 그런 거지요. 헌데 일본의 논리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우선 미군정의 조선에서의 일본재산 처분 조처와 관련해서는 샌프란시스코 4조 b 항, “일본과 일본 국민 자산에 대해, 미군정의 지침이나 이에 준해서 제정된 처분권의 적법성을 인정한다.”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미군정의 처분권을 인정한 것이지 그 자산이 이양된 한국의 처분권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청구가 포기되기 어려운, 청구해야 할 항목이 생겼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모순이 됩니다. 미군정의 처분권을 승인했다면 그 처분의 결과가 그 자산, 흔히 적산(敵産)이라고 부른 재산의 귀속이 이미 한국에게 있게 되었는데 이걸 문제 삼을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러나 이걸 문제로 삼아 제기합니다. 일본이 말한 별도의 합의란 바로 이 자산의 처분에 대한 협의를 한국과 따로 해야 한다는 논지입니다. 청구권 포기의 영역 밖에 있는 자산처리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별도로 논의, 협의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청구권 포기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들의 권리인 청구권, 즉 역청구권 논의의 틀을 짜는 논리입니다. 이미 받을 걸 받았으니 일본으로서는 줄 게 별로 없다는 전략으로 가는 길을 열고자 한 겁니다.   

(11-3) 미국은 어떻게 대응했나요?  

미국은 이런 일본의 논리를 일정하게 거들어 줍니다. 미군정이 일본 자산을 한국에 넘겨주었으니 한국의 대일청구권은 “어느 정도” 소멸 내지 충족되었다는 점에서 서로 주고받을 걸 계산해서 청구작업에 고려하라는 이른바 “상쇄론(相殺論)”이 나오게 된 겁니다. 한국과 일본의 “상호포기”를 종용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공평한 논법인 듯 하지만 누가 손해인지는 너무나 분명한 논리입니다.  

“일본은 이미 대한 청구권을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일본 자산을 미군정을 통해 취득했다, 그러니 대일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 액수는 삭감하라”는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여기에 힘입은 일본은 배상요구조서에서 한국이 요구한 “일본에 있는 조선에 귀속되어야 할 자산”은 미군정 지침이 일본에 효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자의로 그 자산을 처분해버리고 맙니다.  

1956년에 내린 조선은행 일본재산의 폐쇄처분이라고 하는 이 조처는 대일청구권의 핵심부분을 허공에 날려버리는 처사였습니다. 조선은행 일본의 도쿄지점의 잔여자산 60억엔 가운데 47억엔 정도를 일본정부의 국고에 귀속시켜버린 것입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에게 돌아가야 할 재산을 일본이 마음대로 처분한 셈입니다. 

게다가 일본은 1945년 8월 25일 조선은행 본점 소유의 등록국채 약 45억엔을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넘겼는데, 이건 조선은행으로서는 보증준비금의 역할을 하는 건데 그걸 빼돌린 거니 조선은행은 발행담보 능력에 심각한 훼손을 입은 것이었습니다. 

▲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식.


(11-4) 오, 그런 일까지 있었군요. 한일회담의 내용은 알면 알수록 상상하지도 못한 내용과 논리, 그리고 논쟁이 있었군요. 결국 일본의 주장이라는 건 “자세히 따지고 보면 일본이 도리어 재산 반환에 대한 문제를 협의하고 청구할 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청구를 포기한 마당에, 한국도 그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하라”는 거군요. 그러나 그 재산의 본질이 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36년간 식민지 지배의 착취와 강탈의 결과로 조성된 재산에 대해 어떻게 일본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에 더하여 이 문제를 협의할 자격이나 권리가 있는가, 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일본인들의 “사유재산몰수”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국가재산의 경우 공유와 국유라는 점에서 점령군인 미군정의 처분에 이의가 없으나, 사유재산의 경우에는 해당 개인에게 청구의 권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주장입니다. 

(11-5) 네? 이건 또 뭔가요? 뭐가 이리도 복잡하지요? 

서로 적대적이었던 관계를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법 논리는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은 일종의 전시(戰時) 국제법이라고 할 수 있는 “헤이그 육전법규(陸戰法規/Hague Regulation Land Warfare)” 제46조에 의거해서 “사유재산은 몰수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 미군정의 일본자산 몰수 내용 가운데 사유재산 부문을 분리시키려고 했습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제2항이 규정한 사유재산탈취금지도 그 근거로 들어서 그건 내놓으라고 한 겁니다. 

일본이 이런 주장을 한 이면에는 패전 이후 일본으로 귀환한 일본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걸 다 감당한다는 것은 재정적으로 엄청난 일이 되는 것이기도 했구요.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국내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최전선에서 타민족을 착취하고 수탈한 자들에게 무슨 보상이냐, 라는 반제(反帝)진영의 반론도 나왔습니다.

(11-6) 하지만 “일본인들의 사유재산몰수 또는 박탈은 문제가 있다”라는 논리는 반박이 쉽지 않았던 건 아닌가요? 

아니죠. 그 사유재산의 형성과정에 대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입장은 확고했습니다. 일본에 의한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는 그 자체가 불법이고 원천적으로 무효이기 때문에, 이런 불법적 토대에 기초한 한국 내 일본인 재산의 법적 효력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미군정의 몰수도 그 효력을 인정한 이상, 그 어떤 재산에 대한 권리도 이미 소멸했다고 반박했습니다. 

결국 배상문제처리는 일본이라는 국가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의 문제 처리가 아니라,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절차 안에 들어 있는 사안이라는 인식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조성하고 가진 재산은 모두 조선 사람들의 피로 만들어진 이른바 “응혈체(凝血体)”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지요. 그러니 해방된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일본인의 사유재산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던 것입니다. 

1956년 12월, 일본은 마침내 대한(對韓) 청구권 포기를 밝힙니다. 이로써 제4차 한일회담(1958년 4월 15일~1960년 4월 15일)이 가능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청구권을 중심으로 한 협상에서 경제협력과 지원이라는 개념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 한국의 식민 피해 호소를 묵살하다 ⑪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⑪



(12) “일본의 대한(對韓) 청구권 포기”, 애초에 없던 것을 포기한다? 그러면서 무슨 선심을 쓰는 것 같이 들리네요. 1965년 한일협정에서 정리된 차관을 포함한 5억 달러에 대해서도 그걸로 우리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었지 않느냐라는 논리가 꼭 그런 식인 거 같아요.

일본 정부도 그렇게 우리 내부의 친일세력도 그런 논리를 펴지요. 그 돈 아니었으면 이런 경제발전이 있었겠느냐? 라는 겁니다. 빼앗긴 걸 일부, 그것도 아주 최소의 수준으로 돌려받은 것이고 만일 그런 식으로 빼앗기지 않았다면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했을 지에 대한 반증이 되기도 하는 거지요.  

강도에게 빼앗긴 재산의 일부를 겨우 돌려받았는데 그 강도가 “그걸로 너 이제 좀 살게 되었잖아!” 하면 누가 그 말에 “아,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하겠습니까? 일본으로서는 강도와 비유하는 게 불편할 수 있지만, 1947년 미군정 하의 과도 정부가 설치한 대일배상대책위는 “약탈, 강제동원, 학대 강탈”의 세 분야로 나누어 조사합니다. 강도당한 재산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그 경제적 효과로 보면 일본이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누렸습니다. 일본은 한일협정을 통해 자신의 시장 확대 기반을 확실하게 마련합니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한국전쟁, 한일협정 이 세  가지는 일본의 경제기반에 대한 역사적 본질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협정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 더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지요.

(12-1) 1947년의 대일배상대책위가 벌써 있었군요. 그게 나중에 1949년의 '대일배상요구조서'의 기반이 된 거겠네요.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되었지요. 미군정 아래의 과도정부는 1947년 2월 행정권 이양을 위해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을 민정장관에 임명해 출발했고 미군정청(美軍政廳)은 이후 6월에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편합니다. 물론 미군정이 전권을 쥐고 있는 체제지만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생겨난 겁니다. 이 남조선 과도정부가 8월에 “대일배상문제대책위원회” 설치를 결정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있게 된 것에는 두 가지 국내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12-2) 국내외적인 요인이라, 국제적인 요인부터 듣고 싶네요. 1947년이면 미국의 대일정책(對日政策)이 종전(終戰) 직후와는 다르게 변화되는 “역(逆)코스” 적용 시기라는 점에서 짐작이 가는데, 대일배상문제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뭔지 몰라서요. 미국의 냉전체제를 만들기 위해 일본의 경제적 부담을 줄인다, 일본의 국가적 역량을 강화시킨다, 그에 장애가 되는 것은 정리한다, 그 정도는 이제 파악이 되요.  

종전 직후와 1947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 역코스에 대한 개념, 국제적 요인, 이런 단어들이 술술 나오는 걸 보니 전체 판이 많이 읽혀지나 봐요. 잘 질문하셨습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종료되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분명했지요. 일본의 산업능력 박탈이었습니다. 군국주의 체제의 기반이었으니까요. 그 박탈의 과정을 통해 일본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나라들의 경제복구에 쓰겠다는 방침이었습니다. 1945년 11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대일배상사절단 단장 폴리(Edwin E. Pauley)를 도쿄에 파견, 조사 후 보고를 받게 됩니다. 대일배상 문제 처리 과정에서 당시 우리 민족이 엄청나게 주시했던 조사단이었습니다.  

보고의 내용은 확실했습니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일본에서 잉여 공업 설비를 제거하고 이 설비를 일본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로 옮긴다. 독립된 조선 경제의 부흥에 도움이 되기 위해 배상 청구의 일부로서 조선의 자원과 인민을 착취하기 위해 사용된 일본의 산업 설비를 한국에 이전한다.” 

(12-2) 오, 그대로 되었다면 오늘의 일본은 아니었겠군요. 

그렇지요. 바로 이 보고서의 연장선에서 미군정은 배상목록 작성을 위해 1946년 특별경제위원회를 만들고, 조선 문제에 관건을 쥐고 있던 도쿄의 맥아더가 지휘하고 있던 “극동위원회”의 움직임에 당시 우리 민족 전체가 주목하게 됩니다. 극동위원회에 참가해서 우리 요구를 알리고자 하기도 했지만 좌절되지요. 그 시기 조선상공회의소는 폴리가 방한했을 때 일본 식민지 지배의 수탈과 파괴에 대한 배상 없이 조선의 경제적 미래는 없다는 호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1947년이 되면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스트라이크(Clifford Stewart Strike)를 단장으로 하는 새로운 대일배상특별조사단이 일본을 방문한 뒤 맥아더에게 폴리 보고서의 권고 내용을 뒤집어 버립니다. “폴리 보고서대로 하면 일본 경제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쳐 미국의 일본 점령 비용을 증대시켜 미국의 납세자 부담으로 돌아온다. 극동지역 전체에 대한 이해와도 충돌한다.” 이런 소식이 들리자 남조선 과도정부 구성원들은 다급해졌습니다. 신속하게 배상 목록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생겨난 것이지요. 이러면서 “약탈, 강제동원, 학대강탈”의 세 분야가 정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2-3) 미국의 정책 변화에 상당한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네요. 이런 정책변화가 있었으니 나중에 “상쇄론”이니 뭐니 하는 식의 논리가 나온 거네요. 그래도 우리의 독자적인 준비와 대응이 있었다는 게 참 다행스럽네요. 

그렇지요? 당시는 아무래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그 역사적 기억도 생생하고 그로 인한 고통의 심각성, 피해 복구의 절박성이 개개인 모두의 실존 문제였기 때문이지요.   

배상 목록과 분야를 구체적으로 정리한 당시 실무 책임자이자 훗날 한일교섭 과정에서 청구권 위원회 대표가 되는 조선은행 업무부 차장 출신인 이상덕은 치열한 노력을 했습니다. 기억할 이름입니다. 그는 배상의 입장과 권리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힙니다. 

“일본의 장구한 조선 지배가 국제 정의의 기본적 조건인 도의, 공평, 호혜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폭력과 착취의 지배이었음은 카이로, 포츠담 선언에 ‘조선인민의 노예상태’를 지적한 바로 충분하다. 원래 한일합병은 조선인민의 자유의사에 반하여 일본으로부터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번 대전(大戰)도 일본이 기도하고 강제로 동원케 되었으나 조선인민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끈기 있게 반항했다. 그러나 대일배상이 있어서의 조선의 요구는 일본을 징벌하기 위한 보복의 부과가 아니고 폭력과 탐욕의 희생이 된 피해 회복을 위한 필연적 의무의 이행이다.”  

(12-4) 아, 위엄이 있고 단호한데다가 포용력까지 있는 문장이네요. 1949년 '대일배상요구조서'의 서문과 이어지는 정신이네요. “폭력과 착취의 지배, 강제동원, 그에 대한 끈기 있는 반항, 그러나 이런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징벌적 요구는 아니다, 폭력과 탐욕의 희생이 된 피해 회복을 위한 필연적 의무 이행이다” 와! 박수치고 싶어요, 울컥하구요.

그렇지요? 일본이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역사의 양심 앞에 섰다면 지금의 한일관계도 이런 모양이 아니었을 것이며, 일본 역시 자기를 구하는 길로 걸어왔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조사와 대응에는 피해 민중들의 자발적 요구와 운동이 있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과도정부나 이후 제1공화국 단독의 국가적 차원의 대응에만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8월 15일 바로 다음 날인 8월 16일, 당시 조선인들은 식민지 지배. 전쟁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각지에서 공장관리 위원회를 조직해서 일본 경영자가 회사의 물품과 자본을 빼돌리는 걸 막기 위한 투쟁을 벌입니다. 귀환 강제 징용 노동자들도 손해배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특히 전쟁 피해자들의 조직이 생겨나와 대일배상 요구 운동을 벌여나갑니다. 태평양 전쟁에 징병, 징용되었던 청년들이 “태평양동지회”를 구성했고, 사할린 쿠릴 열도 등지에서 비참한 지경을 겪고 있던 동포를 구하기 위한 “화태(樺太)천도(千島) 재류(在留) 동포 구출위원회”,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전국 유가족 동인회”등이 나서서 배상요구를 구체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서 이미 휴지조각이 된 일본 군대 군표(軍票)를 화폐로 바꿔 달라는 청원까지 합니다. 위안부 문제 최초의 등장이었습니다. 

(12-5) 정말 놀랍네요! 그런 움직임들이 있었기 때문에 논의의 기반이 생겨났다는 게 말이지요. 식민지 지배 청산은 과거사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당장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 제기였네요.  

하지만 이 모든 요구는 미군정에 의해 묵살당합니다. 쫓겨나가는 일본인들은 이런 요구를 자신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증오의 복수를 하는 것으로 여겼고, 미군정은 “소요, 협박, 강탈”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식민지 지배의 고통을 겪은 이들의 원통함이 외면당했고, 해방 공간의 아우성은 길을 잃고 맙니다.  이후 한일협정은 이런 역사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 채, 식민지 지배 청산이 냉전체제에 압박된 결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바는 민중 자신의 요구와 운동이 결국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입니다. 2005년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공개도 식민지 지배, 전쟁 피해자의 소송 판결의 결과이며, 일본의 한일회담 일부 문서 공개도 한국에서의 문서공개에 자극받은 일본의 학자들과 시민운동이 노력해 2006년에서 2008년에 이르는 기간 가능해진 것이지요.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도 그렇구요.  

이 문제는 이제 피해당사자에게만 맡길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서서 파고들어야 할 임무입니다. 한일(韓日) 시민연대의 힘도 길러가야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