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통일 문제

김정은의 협상전략 분석

일취월장7 2018. 4. 30. 09:48

[남북 정상회담 관전법 1탄] 김정은의 협상전략 분석

“김정은의 전략적 협상력, 韓·美 협상력 무색하게 할 만큼 탁월”

박상기 한국협상학회 부회장 BNE글로벌협상컨설팅 대표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30(월)


김정은은 왜 427 남북 정상회담에 나왔을까? 무엇보다도 ‘​살기 위해 나왔다’​가 답일 것이다. 핵무기의 개발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하는 그로선, 이제 미국과 어느 정도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할 준비를 갖추었고 상황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한다는 것이 통론이다.

 

필자는 2013년 다수의 종편채널 방송에 협상 전문가로 출연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미국 본토를 핵미사일로 공격하겠다’는 노골적인 위협을 연일 내뱉는 김정은의 궁극적 협상목표는 ‘미·북 대화’를 통해 미국의 경제 제재를 풀고 서방의 경제지원 속에 북한의 경제 발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만큼 북한의 협상전략을 세밀하게 읽는 것이 녹록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본지에서는 2018 남북 정상회담의 전후를 살펴 북한의 협상전략을 시원하게 분석해 보고자 한다.

 

4월27일 서울역에 모인 시민들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는 역사적인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4월27일 서울역에 모인 시민들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는 역사적인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김정은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달성해야 할 협상 목표와 그 이유

 

첫째, 미국의 트럼프에게 김정은은 위험하지도 않고 우려할 것도 없는, 한마디로 협상 상대로 손색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다. 즉, 말이 통하지 않는 타협 불가의 공산주의 독재자라는 인식이 강했던 김일성이나 김정일과는 달리,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은 미국과도 충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협상을 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의 신뢰할 만한 인물임을 국제사회에 과시하고 인식시키겠다는 심리적 협상전략을 펼쳤고 앞으로도 지속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 북한은 ‘미국을 핵미사일로 공격하거나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도 결코 원하지 않는다’란 메시지를 국제 사회에 던지고자 했다. 그 분명한 반증이 남북 정상이 만난 지 몇 시간도 채 안되어 ‘판문점 선언’을 통해 ‘종전선언’을 전격 발표한 것이다. 이 종전선언을 통해 김정은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자신의 피를 말려왔던 미국의 잠재적 암살 제거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두 발 뻗고 자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북한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원하며, 더 나아가 북한 역시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자본주의식 경제개발이 지상 과제이니, 걱정하지 말고 투자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셋째, 김정은은 비록 나이가 어려도 북한의 절대적 권력을 가진 통치자로 확고한 입지를 굳히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즉, 향후 김정은과의 정상 간 협상 합의 내용이 북한 내 어떤 반대 세력이나 인물에 의한 방해나 절차상의 차질 없이 깔끔하게 이행될 것이라는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성공을 만든 김정은의 협상 판짜기 전략

 

북한은 미국 본토에 대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핵미사일 공격 가능성을 보여주는 무력시위를 통해, 본토 미국인들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미국 트럼프 정부가 즉각 북한의 핵공격 위험 해제 달성을 즉각 시행토록 요구하여, 결과적으로 북·미 협상에 트럼프를 끌어들이는 유인책을 성공시켰다.

 

그간 북한은 무모한 군사도발 성향을 미국 등 서방 언론 스스로 부각하였다. 자칫 미국 트럼프 정부로 하여금 섣부른 군사적 무력행사를 할 경우 미국을 향해 핵미사일 공격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는 곧 반대 여론(정국)을 형성하였다. 결국 북한에 대한 세계 최강의 미국의 군사력 사용을 미국 국민과 정치가들이 스스로 자물쇠를 채우게 만드는 놀라운 협상 성과를 달성한다.

 

또한, 코피 터뜨리기 작전(Bloody nose)으로 알려진, 김정은 은닉 벙커 정밀타격 제거 작전 혹은 북한 내 주요 핵시설 및 군사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 공격 시행으로 인한 북한의 돌발적인 군사도발 촉발 가능성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한국 정부로 하여금 트럼프에게 강하게 엄중하게 피력하게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미국과 우호 동맹관계인 문재인 정부로 하여금 북한을 대신해 미국과의 북·미 협상 중재인 역할을 자임하게 만드는 고도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외교 협상전략을 획책하고 성공한 것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로선 아쉽고 경계해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핵무기 개발 완료와 성공적 시험 장면 과시를 통한 남한 패싱(Passing)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 정부의 면밀한 대응 협상전략 수립이 요구된다.

 

한편 북한을 주적이라고 명시한 우리의 대북 군사관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전쟁 발발에 대한 전국민적 공포와 위기 분위기를 조장해 남한 국민들 대다수로 하여금 긴박한 위기상황이라면, 북한 김정은과의 남북 정상회담, 그리고 더 나아가, 김정은과 트럼프와의 북·미 정상회담조차도 반대하거나 거부하기는커녕, 한반도의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치밀한 ‘상황인식 전환 프레이밍(Framing)’ 협상전략을 구사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심정적으로 거부하기 힘든 ‘남북통일’ 이슈까지 긍정적으로  연계시켜, 결과적으로 김정은을 ‘적’이 아닌 협력해야 할 ‘파트너’로 인정하게까지 만드는, 남북 분단 70년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남북한 두 체제 간의 강력한 전략적 협력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 사실을 비추어 볼 때, 북한의 김정은과 그 수뇌부가 갖추고 있는 전략적 외교 협상력이 우리뿐 아니라 트럼프 정부의 외교 협상력까지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우수하다고 평가해도 감히 부인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비핵화로 가는 마지막 관문…미리 보는 北·美회담

[응답하라 트럼프!] 한반도 65년 정전체제 ‘마침표’ 찍을지 주목

송창섭 기자·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ㅣ realsong@sisajournal.com |승인 2018.04.30(월)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서. 김정은 2018. 4. 27.’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27 남북 정상회담’에 앞서 방명록에 쓴 내용이다.

 

3차 남북 정상회담은 막혔던 한반도 긴장의 물꼬를 트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새로운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후 열린 합의문 발표 자리에서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이제 관심은 한 달 이후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으로 모아지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미 정상이 회담 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도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역사다.

 

북·미 정상회담은 어떻게 진행될까.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의 진단과 전망을 통해 다각도로 분석해 봤다. 

 

© 사진=AP 연합·조선중앙통신 연합 (합성:시사저널 미술팀)

© 사진=AP 연합·조선중앙통신 연합 (합성:시사저널 미술팀)

 

“기업인 출신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11월에 치러지는 중간선거는 기업의 결산보고서(Annual Report)와 같다. 미국 기업인들은 중장기 계획보다 연례 결산보고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강한 미국 재건’을 내세운 트럼프는 중간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치적(治績)을 설명해야 한다. 되살아난 미국 경제에 힘입어 역대 어느 대통령도 풀지 못한 북한 문제마저 말끔하게 해결한다면 중간선거는 물론 재선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것이다.”

 협상 전문가인 박상기 BNE글로벌협상컨설팅 대표의 설명이다. 기업인 출신답게 트럼프는 외교 행보조차 공격적이다. 설전을 이어갔던 불과 반 년 전과는 180도 달라졌다.

 

남북은 4월27일 제3차 정상회담에서 3개 항 14개 항목으로 이뤄진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이번 회담에서 두 정상은 적십자회담을 비롯한 각 방면에서 민간 교류를 확대키로 했으며 올 8·15 광복절을 기해 이산가족상봉을 추진키로 했다. 한반도 긴장완화 차원에서 적대행위 금지, 비무장지대 평화지역 구축, 북방한계선의 평화수역 전환, 5월 중 고위급 군사회담을 열기로 했으며 개성에 남북 당국자가 상주하는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설키로 합의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과 관련해 동해선·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는 것에 대해서도 정상 간 합의를 봤다.

  

트럼프, 對北 회담에 기대감 높여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해선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는 것과 단계적 군축,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 종전을 선언하고 현재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남북은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회담을 추진한다. 이외에도 정상회담의 정례화 차원에서 올 가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비핵화와 관련해선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한다”고 해 최종 타결을 북·미 회담으로 넘겼다. 이번 합의안은 남과 북이 추진할 수 있는 것은 매듭짓되 비핵화와 같은 북·미 회담 의제는 여지를 남겼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로써 3차 남북 정상회담의 종국적 성패는 결국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에 좌우될 것이란 관측이다.

 

현재까지 파악된 북·미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스스로가 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합의안이 공개된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의 격렬한 한 해가 지나고 남북 간 역사적인 만남이 일어나고 있다”며 “한국전쟁 끝날 것! 미국과 모든 위대한 미국민은 한국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가디언은 “이번 선언문에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무엇을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다”면서도 “핵 무기를 언급한 것 자체는 긍정적이고 ‘완벽한 비핵화’라는 문구가 포함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은 회담이 열리기 전인 4월23일 ‘북한의 미사일 실험발사 중단 및 핵실험장 폐기를 진정한 진전으로 보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비핵화) 협상의 결실이 있을 것으로 낙관할 많은 이유들이 있다”고 대답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속내는 무엇일까.

 

가장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회담 성과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한국석좌는 4월24일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이 주최한 ‘아산 플래넘 2018’ 첫째 날 한·미동맹 세션 및 현장 인터뷰에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만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회담을 결코 실패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초 신중할 것으로 예상됐던 김 위원장은 3차 정상회담에서 “수시로 만나 대화로 풀자”고 말하는 등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내비쳤다. 문 대통령과의 만남을 통해 비핵화에 대한 통과의례를 성공적으로 치렀기에 다음 차례인 미국과의 담판을 준비하는 분위기다.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왼쪽 아래부터 서훈 국가정보원장, 문 대통령, 임종석 비서실장, 김영철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 위원장,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시계방향 순). © 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왼쪽 아래부터 서훈 국가정보원장, 문 대통령, 임종석 비서실장, 김영철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 위원장,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시계방향 순). © 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큰 틀에서 합의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정상회담 전 김 위원장이 “체제 보장만 된다면 핵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해 이후 열릴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김 위원장이 4월20일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이제는 우리에게 그 어떤 핵시험과 중장거리·대륙간탄도로케트 시험발사도 필요 없게 됐으며 이에 따라 북부 핵시험장도 자기의 사명을 끝마치었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북한에서 당 중앙위 전원회의는 정치·경제·군사·외교·사회문화 등을 이끌어가는 핵심세력이 참가하는 회의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만약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수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김 위원장이 북핵 프로그램의 완전하고도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를 요구하는 한·미 양국과 정상회담을 가질 이유가 없다”면서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보다 진전된 비핵화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우에 따라 이번 북·미 정상회담에서 시기가 명시된 비핵화 프로그램이 합의안으로 나올 수 있다. 또 북한이 전격적으로 NPT(핵확산금지조약) 복귀와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받아들이며, 1~2년 이내 검증 가능한 비핵화 약속을 대외적으로 천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은 “트럼프 행정부는 당장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술 폐기를 얻어내고 완전한 비핵화는 1~2년의 기한을 주는 방식으로 합의안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럴 경우 북한이 가져갈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은 ‘개혁·개방을 위한 대외투자 확대’다.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은 “비핵화의 큰 틀에 대해 북·미 양국 정상이 합의하면 미국은 북한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 것도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비핵화 기준·연한 놓고 北·美 치열한 협상

 

기대를 모았던 비핵화와 관련해선 남북 간 해석에 차이가 날 수 있다. 지난 3월말 전격적인 중국 방문 때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만남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비핵화와 관련해 ‘단계적 동시조치’를 언급했다.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시기에 맺어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1994년)나 9·19 공동성명(2005년) 등에서 북한이 써먹은 수법과 유사하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식량·중유 등만 챙기고 합의 파기와 재도발에 나서는 기만적 전술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문재인 대통령까지도 정상회담 직후 가진 판문점 선언 연설에서 “북한의 ‘핵동결 선언’에 경의를 표하며 이후 진행될 ‘완전한 비핵화 선언’에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단계적 비핵화로 연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의 대외기관지 역할을 하는 조선신보는 4월24일 칼럼 형식의 글을 통해 “전원회의에선 이미 완성된 핵무기에 대해선 보유하는 의사가 암시됐으며 미국이 현존하는 핵무기의 폐기까지도 조선에 요구한다면 조선이 요구하는 평화협정의 체결, 나아가서는 조·미 국교 정상화를 통한 조·미 적대관계의 완전한 해소가 요구될 것”이라고 밝혔다. 북·미 정상회담에 있어 북한의 전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4·27 판문점 선언’에 포함된 비핵화 합의안이 기대치보다 낮은 수준이라는 평가도 그래서 나온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은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개념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시점도 명기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1991년 발표된 남북기본합의서보다 못하다”고 평가했다. 25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협력 등 3개 범주로 구성돼 있다. 이번에 마련된 합의내용 중 상당수가 중복된다. 국내 보수층 사이에서 ‘합의안 내용보다 이행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북·미 정상회담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 3~4개의 회담날짜를 조율 중이라는 점과 5곳의 회담장소를 물색 중이란 점을 밝혔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내정자 시절 부활절 주말(3월31일~4월1일)을 틈타 극비리에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났다. 당시 김 위원장은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나랑 배짱이 맞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란 취지의 발언을 할 정도로 뭔가 의기투합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구체적 비핵화 방안 北·美 회담으로 넘겨

 

북·미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선 김 위원장이 회담 성사에 공을 들이고, 트럼프 대통령이 다소 깐깐한 태도를 보이는 모양새다. 북한 측의 입장을 세심하게 배려해 회담은 물론 이벤트 등에서도 가급적 북측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던 남북 정상회담과는 차이가 난다. 북한도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듯하지만 미국 측에 별다른 언급을 않고 있다. 오히려 핵 관련 발언을 자제하는 등의 모습이 드러난다.

 

현재로선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 대면이 성사될 공산이 크다. 북한과 미국은 모두 비핵화 협상을 통한 북·미 관계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비핵화와 관련한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다.

 

북한은 북핵 폐기 요구에 맞서 ‘조선반도 비핵화’ 주장을 굽히지 않아왔다. 2016년 7월 북한은 이른바 ‘정부 대변인 성명’을 내고 △남조선에 끌어다 놓은 미국 핵무기 공개 △남조선 내 핵무기와 기지 철폐 △미국의 핵 타격 수단 조선반도 내 반입금지 △대북 핵 사용 금지 공약 △미군 철수 등 5대 조건을 밝혔다. 이에 대해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를 강조하고 있다. 양측의 의견이 팽팽히 맞설 경우 북·미 정상회담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물론 북한으로선 다급한 측면이 있다. 핵과 미사일 도발로 자초한 대북제재와 압박 때문에 자칫 체제 위기가 오는 게 아니냐는 집권층의 걱정도 있어 보인다. 집권 직후 김 위원장은 ‘인민경제’를 챙기겠다고 나섰다. 2012년 4월 공개연설에선 “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2013년 3월엔 경제건설과 핵 개발을 함께 추진한다는 ‘경제·핵 병진노선’을 공식화했다. 핵무기 보유로 인해 재래식 무기 구입 같은 군사비 투입이 줄게 됐으니 이를 민생에 돌리겠다는 논리다.

 

하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찾지 못하고 있다. 핵과 미사일이 자초한 국제사회의 제재는 직격탄이 됐다. 지난해 신년사를 통해 김정은 위원장은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며 주민에게 머리를 숙여야 했다.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던 말이 공수표가 된 데 따른 민심 수습 움직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문제와 관련해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않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북한이 실제적으로 핵을 포기하기 전까진 대북제재 해제는 물론 대북지원 같은 실질적인 양보는 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 위에서 산책하며 대화하고 있다. © 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4월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 위에서 산책하며 대화하고 있다. © 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미국, 北 인권문제 제기할 가능성 커

 

미국 내 매파들의 불신도 여전하다.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역임한 위성락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객원교수는 “정상 간의 회담은 통상 거의 모든 합의안을 사전에 만들어 놓고 현장에서는 사인만 하지만, 이번 북·미 정상회담은 정반대로 회담 개최가 먼저 발표된 뒤 의제를 논의하는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합의를 하더라도 이행 과정에서 얼마든지 돌발 상황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김정은 위원장 의도에 대해 좀 더 좋게 생각하는 측면이 있는데 미국은 이것보다 회의적”이라며 “북한이 약속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구체적 비핵화 조치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김정은이 핵을 버리고 경제로 기어를 바꾸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의 핵실험장 폐기 선언에 붙어 있는 ‘부대조건’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영국 런던에 사무실을 둔 싱크탱크 휴먼시큐리티센터의 데이비드 플로릭 연구원은 미국 동서연구소(East-West institute)에 쓴 기고문을 통해 “김정은이 원하는 안전보장과 평화협정은 공식적으로 종전을 만들겠지만 한국과 한국의 동맹국들이 제재를 가하기 힘든 구도를 만들 것이며, 한·미 양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는 요구하지 않겠지만 정작 회담이 열리면 한국과 일본에서 미군이 떠날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트럼프는 노련한 비즈니스맨 출신답게 김 위원장과의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기 위한 승부수를 쉼 없이 던지고 있다. 끝까지 김 위원장이 마음을 놓을 수 없도록 뒤흔들려는 심리전도 펼치고 있다.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정중하게 빨리 회담장을 걸어 나올 수도 있고, 회담이 아예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예 북·미 정상회담이 불발될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북측의 양보를 유도하는 장외 탐색전을 벌써 시작한 형국이다. 외교 소식통은 “한동안 TV 뉴스쇼를 진행했던 트럼프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의회가 초당적으로 북한의 인권을 거론하고 나선 것도 북·미 간 회담에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미 상원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이틀 전인 4월25일 기존 북한인권법을 오는 2022년까지 5년 더 연장하는 ‘북한인권법 재승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이번 북·미 정상회담에서 일본인 납북자 처리를 요청한 바 있다. 보수적 성향의 싱크탱크인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설립자 에드윈 퓰러 회장은 “독립적인 조사관들이 합리적으로 의심되는 무기 개발 및 저장 창고에 대해 무조건 접근해야 한다. 그 안에서 무기를 꺼낼 때까지 어떠한 경제제재도 완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주요 싱크탱크들은 이미 두 차례의 핵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당초 약속을 어기고 핵 개발을 추진한 것을 이유로 들며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이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추후 북·미 양국은 회담 실패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릴 게 뻔하다. 그럴 경우 미국 내 강경파 의견이 고개를 들면서 또다시 북한 타격론이 거론될 수 있다. 한 북한 전문가는 “남북은 상시 회담이 가능한 체제지만 미국과 북한이 정상 간 대화에 또다시 나서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이번 북·미 정상회담에서 어떤 식으로든 합의안을 찾도록 우리 정부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비핵화는 핵보다 강하다

[장석준 칼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선언의 의미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의 결실로 발표된 '판문점 선언'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핵 없는 한반도"가 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구체적인 이행 조치가 없다는 볼멘소리도 있지만, 이번 회담은 북미정상회담 등등으로 이어질 긴 드라마의 제1막 제1장일 따름이다. 지금 할 일은, <조선일보>의 표현을 활용해본다면, 운을 제대로 떼는 것이다.

일단 남북 두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를 책임지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커다란 성과다. 지금 지구상 어디에도 핵무장 철폐를 당면 과제로 약속하는 나라가, 정부가 없다. 냉전 시대에는 그나마 핵무기가 정치와 윤리의 끊임없는 긴장을 촉발하는 소재라도 됐다. 그러나 정작 냉전이 끝난 지금은 그런 긴장마저 사라졌다. 핵무기는 사라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지난주에 한반도의 두 국가는 핵무장 철폐를 급박한 의제로 올렸다. 이제 막 핵무기를 갖게 된 나라가 비핵화의 논의와 실천에 발을 들여놓았다. 예사로운 결정이 아니다. 또한 결코 예사롭게 만들어서도 안 될 결정이다. 지구 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게 전쟁의 질서가 일상화돼온 이 땅에서 그만큼 유례를 찾기 힘든, 예기치 않은 가능성이 열리는 느낌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곱씹어봐야 할 것은 한반도 위기의 입구이자 동시에 출구가 되고 있는 이 핵무기라는 존재다. 그것이 있고 없는 삶의 의미다. 그것이 있고 없는 문명의 의미다. 이 의미를 확인하다 보면, 며칠 전 우리가 들어선 새로운 역사 국면의 무게도 달리 느껴질 것 같다.  

핵무기가 등장하기까지, 총력전의 두 얼굴  

다들 알고 있듯이 핵무기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처음 등장했다. 원자폭탄을 완성해 실제 투하한 나라는 미국이지만, 비슷한 연구는 적국 독일에서도 있었다. 그 경쟁담을 들어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마치 핵무기라는 최종 결실에 도달하려는 강대국 간의 치열한 경주였던 느낌마저 든다.  

왜 하필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핵무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여기에는 물리학 발전 속도라는 요인 말고도 정치와 전쟁 자체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국가와 전쟁의 뗄 수 없는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점점 더 전진하는 민주주의의 문제가 있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탈리아를 통일할 사명을 지닌 '군주'가 반드시 갖춰야 할 기반을 제시했다. 그것은 "자국의 신민 또는 시민, 아니면 자신의 부하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용병이 아니라 시민 군대가 있어야 했다. 이 주장을 번안하면, 근대 국민국가와 무장한 인민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서로 다투는 국가들로 이뤄진 세상에서 주권국가로 서려면 전쟁에 나갈 태세가 된 국민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근대 유럽사는 이 명제를 철저히 입증했다. 열강 대열에 합류한 유럽 국가들은 (해군력으로 대신한 영국만 빼고) 모두 징병제에 바탕을 둔 무력 없이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 능력이 국가 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 중 하나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진실은 모든 나라에 심각한 정치적 긴장을 불러왔다. 징집될 의무를 강요받은 국민은 당연히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권리도 요구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만 병역이 시민권과 연동된 게 아니었다. 근대사에서도 둘 사이에는 아주 강한 연관 관계가 작동했다. 이것이 전면에 노출된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흔히 제1차 세계대전을 현대전의 시작이자 총력전의 첫 사례로 든다. 이제는 징집 가능 연령의 남성만 전쟁에 동원되지 않았다. 여성을 포함한 전 인구가 국가의 전쟁 수행에 동원됐다. 동시에 민간인이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졌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면화하게 되는 민간인 학살과 공중 폭격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런 총력전 속에서 참정권 요구는 절정에 달했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여러 나라에서는 노동자와 여성의 선거권 쟁취 운동이 폭발 일보직전까지 끓어오르고 있었다. 세계전쟁은 이 폭발을 몇 년 뒤로 미뤘지만(러시아에서는 정말 '몇 년 뒤'였다), 다른 한편 총력전의 논리를 통해 노동자와 여성의 참정권 인정을 기정사실로 만들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끝나고 유럽 국가들이 일제히 보통선거제도를 도입한 것은 러시아 10월 혁명 탓이기도 했지만 전쟁 자체의 결과이기도 했다.  

우리는 도덕적 가치평가를 배제하고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총력전은 민주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전진을 낳았다. 그리고 불과 20년 뒤에 다시 일어난 세계전쟁에서는 이 명제가 더욱더 충격적인 모습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총력전은 무엇보다 총력 '희생'으로 나타났다. 전투 요원보다 더 많은 민간인이 학살, 폭격, 기아, 강제노동으로 쓰러졌다. 핵무기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희생의 규모 면에서 인류사는 새 단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영국 공군의 드레스덴 폭격은 원자폭탄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데 제2차 세계대전이 총력전의 극단으로까지 치달으면서 보인 또 다른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총력'무장'이었다. 이번에는 국가의 지휘 아래 민간인이 전쟁 지원 활동에 체계적으로 동원된 수준 이상이었다. 국가기구가 붕괴하지 않은 몇 나라를 제외하면 전선이 가로지른 모든 나라에서 상당수 민간인이 직접 무장했다. 위기에 빠진 기존 국가나 주변 열강은 잠시나마 이런 자발적 무장을 용인했다.  

그래서 소련,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의 독일군 점령지에서 빨치산이 봉기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도 친독일 지배자들과 반파시스트 시민들 사이에 내전 양상이 나타났다. 물론 가장 극적인 무대는 일본군 점령 지역 곳곳에 농촌 해방구가 점점이 박힌 광활한 중국 대륙이었다.  

이런 총력무장의 결과는 전쟁이 끝나고 등장한 세력균형에서 충격적으로 드러났다.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지구 전체를 보면 세력균형의 추가 역사상 가장 왼쪽으로 기울었다. 모든 정부(심지어는 승전국조차)는 기대치가 한껏 높아지고 자신감에 충만한 대중을 상대해야 했다. 총력무장은 국민국가를 대중 민주주의의 급진전이라는 위험(지배자들이 보기에는)에 빠뜨렸다.  

인류 역사의 바로 이 순간에 핵무기가 출현했다. 지구자본주의의 새로운 패권국 미국이 총력전과 민주주의의 딜레마에 내놓은 대안이 다름 아닌 원자폭탄이었다.

핵무기에 응집된 근대 국가의 욕망  

위에서 살펴봤듯이 핵무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국가 간 무장 경쟁이 의도하지 않게 대중의 능력을 고양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이어졌다. 현대전이 총력전으로 치달으면서 이 연관관계는 더 폭발적인 양상을 띠었다.  

핵무기는 이 연관관계를 종식시켰다. 핵무기의 파괴력이야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파괴력은 대중의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는 현대 물리학을 통해 변환된 자연의 힘이다. 국가는 과학기술과 약간의 경제력만 동원하면 된다. 국민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총력전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총력전의 두 얼굴 중 총력희생은 계속된다. 아니, 핵무기 때문에 희생은 거의 무한의 수준으로 커졌다. 광범한 지역의 인구 전체가 말살될 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파괴되고 인간과 자연의 미래 회복 가능성까지 짓밟힌다. 그러나 총력전의 또 다른 얼굴은 이야기가 다르다. 총력무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위력을 발휘할 수도 없다.  

즉, 핵무기는 총력전이 대중의 능력 고양으로 이어지던 연결고리를 분쇄했다. 핵무기 앞에서 대중은 능력을 고양하기는커녕 완전히 무능력하다. 대중은 이제 대량살상의 잠재적 희생 대상자일 뿐이다. 핵무기 앞에서는 나치 친위대나 일본군에게 했던 것과 같은 저항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핵무기 등장과 함께 만인은 잠재적으로 가스실 앞에 선 강제수용소 수인 신세가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핵무기의 위력에 현혹돼선 안 된다. 핵무기는 주연이 아니다. 주인공은 근대 국가다. 핵무기 이전에 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근대 국가의 욕망이 있었다. 대중의 능력과 상관없이 무력을 행사하고픈 국가의 욕망. 마키아벨리가 예고한 근대 국가의 숙명으로부터 벗어나 대중으로부터 자립하려는 욕망. 이 욕망은 핵무기 출현 전에 이미 무차별 공습 등에서 해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핵무기 말고도 살상용 로봇 등에서 또 다른 해법을 찾는다.  

다만 핵무기의 등장은 지구상 모든 국가를 이 욕망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로 나눴다는 점에서 결정적이었다. 전자의 핵심은 물론 핵무기 시대를 연 그 나라, 미국이다. 러시아, 중국 등이 뒤를 따르지만, 미국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비대칭적 수준의 핵무장이다. 자체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나머지 모든 나라는 이 중 어느 한 우산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우산 안의 국가 간 위계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냉엄한 진실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의 전방 한계선이 핵무기 등장으로 눈에 띄게 후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일국 수준에서는 그렇다. 국내 정치에서 국가는 여전히 여러 사회 세력의 투쟁에 흔들린다. 그런 투쟁으로부터 자립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 정치, 즉 국가 간 정치에서는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핵무기가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어느 국가든 최대 핵무장 국가(미국)의 위계질서 안에 포용되든가 아니면 이에 대항할만한 핵전력을 보유해야 한다. 둘 다 아니라면 그 국가의 지속 가능성은 보장받을 수 없다. 이 국가 안의 대중 정치는 자율성을 지닐 수 없다. 즉, 인민주권은 핵주권에 의해 최종 규율된다. 이에 따라 대중의 능력과 괴리된 무력을 사실상 독점한 한 국가가 아래로부터의 위협을 역사상 가장 효과적으로 차단한 지배 질서를 이어가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이 모순 그 자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한 정권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이 주도하는 이러한 국제 질서에 맞선 어쩌면 가장 논리적인 대응이었다. 이 점에서 핵무기의 존재 자체를 비판하지 않고 북핵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언명에서 오류를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일면 논리적인 북한의 이 선택 때문에 동아시아 전역에 근대 국가의 가장 반민주적-반인간적 욕망이 풀어헤쳐질 판이었다. 역내 모든 국가가 대중으로부터 자립한 대량 살상 전력을 확보하려고 경쟁하는 상황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촛불 항쟁으로 다시 힘을 받은 남한의 국내 민주주의 역시 이러한 한반도 위기 아래서 몇 개월간 좀처럼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가 국내 변혁의 절대적 한계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되는 듯했다.

'판문점 선언'은 바로 이 상황의 반전을 선포했다. 애초에 핵무기를 보유하려 한 북한 정권의 노림수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단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가장 최근에 핵무기 개발을 한 국가가 그 해체 과정을 개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한반도를 떠나 지구 전체를 보더라도 전무후무한 국면의 시작임에 틀림없다.  

근대 국가의 진화 방향에 영향을 끼칠 실험의 시작?  

올해로 정부 수립 7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대중의 처절한 고투의 연속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덕분에 처음에는 거의 파시즘 수준이었던 국가를 무혈혁명이 가능한 수준으로까지 길들였다. 이 나라 시민들은 대중 정치를 통해 국가를 변형하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대 국가는 시민사회로부터, '아래로부터'만 규정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보다 더 근본적이게 국가 간 질서로부터, '위로부터' 규정된다.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은 숱한 땀과 눈물, 피를 흩뿌리며 민주주의를 한 뼘 더 늘리려 할 때마다 이 근본적 사실을 숨 막히는 '한계'로 실감했다. 두 전쟁국가의 대치라는 한반도 현실이 남한 민주주의의 전방 한계선을 결정했다.  

한데 지금 이 70년간의 숙명과는 다른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아니, 정반대되는 일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국가 간 정치가 촛불 민주주의에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 단지 남한 내 대중 정치를 통해 국가를 민주화할 뿐만 아니라 국가 간 정치를 통해 국가를 (대중으로부터 자립하는 게 아니라) 대중에게 보다 호응하도록 변형시킬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비핵화와 평화협정, 단계적 군축이 바로 이런 일이다. 이는 오랜 전쟁국가 구조를 다른 어떤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일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종전 직후 패전국에게 일방적 징벌을 가하는 식으로 전쟁국가를 해체한 일은 여러 번 있었어도 순전히 협상이라는 평화적 과정을 통해 상호 대치 중이던 두 국가의 성격을 계획적으로 바꾸는 일은 전무후무하다. 무리한 통화통합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유럽 통합 과정을 제외하면 국가 간 정치에서 전에 없던 실험이 이 땅에서 시작됐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이 실험이 핵무장이 야기한 첨예한 위기를 반전시키는 비핵화 결단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우리 스스로 주목해야 한다. '판문점 선언'으로 시작된 평화와 통합(일부러 '통일'이라 하지 않았다)의 실험이 미국을 비롯한 모든 주변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보장받는다면, 이는 무엇보다 핵무장의 단계적 철폐 결정의 도덕적 이니셔티브 때문일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핵주권을 바탕에 둔 현존 지구 질서를 향한 문제제기이자 살아 있는 반대 사례가 될 것이다. 핵무장이나 핵우산과 상관없이 존립하는 현대 국가의 실례가 될 것이고('영세중립국'은 이런 가능성의 지나치게 고색창연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이런 국가들로 이뤄진 지구 질서에 공감하는 수많은 나라들의 연대의 출발이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지금 우리가 시작한 것은 한반도 평화의 정치만이 아니다. 한반도'발' 평화의 정치다. 그 정도로, 비핵화는 핵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