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멘토

자유로운 영혼, 한비야입니다. 인터뷰

일취월장7 2010. 12. 16. 09:28
100여 명의 독자들 앞에 한비야가 섰다. 지난 12 4(), 충정로의 한 까페에서 한비야와의 속 깊은 티타임이 진행됐다. 오지여행가이자 구호활동가, 그리고 작가이기도 한 한비야는 9년간 몸담았던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 직에서 물러나, 지난해 7월에『그건, 사랑이었네』(푸른숲)를 출간하자마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지난 1년간 미 보스턴의 터프츠대학교 플레처스쿨 인도적 지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잠시 귀국했다 이번 달 말에 중국으로 떠난다는 한비야와의 짧은 인터뷰와 독자와의 만남시간에 들려준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요즘에 어떻게 지내나?
예전에는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이었고, 지난 5월까지는 터프츠대학교 대원생이었고, 요즘은 백수다.(웃음) 지금이 오후 3시쯤이지? 내가 백두대간 종주 중이라 이 시간쯤이면 산길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이 산불방지 입산 금지 기간이라 오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오늘 충청남도 예산에서 등산복을 입고 있다가, 독자들 만날 생각에 설레면서 빨간 옷으로 바꿔 입고 미용실에 가서 화장도 하고 왔다.
 
미국 보스턴에서 석사 과정은 다 끝난 건가.
지난 1년간 미국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대학에서 인도적 지원에 관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석사 과정을 1년 만에 마쳤다고 하니까, 천재냐고들 하는데.(웃음) 아니다. 2년 과정을 1년으로 압축해 놓은 과정을 공부한 거다. 공부는 되게 재미있었다. , 짭짤하던데. 내가 모르는 일에 약간 몰두하는 유전자를 가지긴 했지만, 공부할 때는 조금 더 한 것 같다. 내가 원래 이틀에 한번씩 자는데 공부하는 동안에는 이틀에 한 번도 못 잤다. 밤새도록 공부를 해도 새벽에 잠이 안 와서,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또 공부를 했다. 아침에 빨리 학교 가고 싶어서 막 발이 꼬이고 그랬다
 
나이 오십에, 학교를 처음 다닌 것도 아니고 대학원도 두 번째 인데 그렇게 가슴이 떨릴 수가 있나, 생각해 봤다. 공부하는 것도 다 때가 있다고 하지 않나, 공부할 때는 자기가 하고 싶은 때더라. 그 때에야 자기의 100%를 하는 것 같다. 내 지난 1년이 그랬다. 대학원을 졸업하던 날, 지난 5월에 빛나는 졸업장을 받았을 때가 기억난다. 그날 일기장에 장하다, 한비야. 멋지다, 한비야. 난 네가 마음에 들어라고 썼다. 그렇게 쓸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그리고 한국에 왔다.
 
백두대간 종주는 원래 계획했던 건가?
미국에서 돌아오니까  약간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진했다는 느낌이었다. 9년간 현장에서, 1년간 공부하면서 거의 바닥이 났다 싶은 거다. 그래서 내가 나한테 안식년을 선물로 줬다. 지난 1년 동안에 꼭 하고 싶었던 일이 두 가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백두대간 종주인데, 예전부터 꼭 하고 싶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백두산까지 가는 건데, 못 가니까 설악산 진부령까지 가는 거다. 24구간으로 나눠서 1주일에 1구간씩 한다고 치면, 6개월 정도 걸리는 거지. 지금 24-10까지 왔다. 지금은 겨울이라 잠깐 방학을 하고, 이번 달 말에 중국에 가서 6개월 동안 중국어 공부를 할 생각이다.
 
내가 10년 전에 쓴『중국견문록』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 때 중국에서 1년 동안 공부한 건 정말로 짭짤하게 썼다. 그것 때문에 중국 사람도 많이 사귀고 중국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지만 그것 가지고는 성에 안 차더라. 이번에 미국에 가서 앞으로 중국이 어떻게 발전하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같이 협력해야 할 지, 그런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래서 중국어를 한국말처럼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저번에 중국어 7급 시험을 봤다. 그게 중급이다. 이제 9급 시험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할 거다. 내년 6월 말에 되든 안  되든 시험을 보고7월에 다시 한국에 와서 백두대간 마지막 구간을 종주하고, 내년 겨울께 다시 구호 활동을 할 생각이다. 아직 NGO에 다시 들어갈 지, UN에 들어갈 지 어떨 지는 정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 나는 인생의 환승역에 와 있다. 월드비전이라는 기차에서 내리고 그 동안 원했던 공부를 끝낸 후 환승역에서 내 인생에 어떤 옵션이 있나 두리번거리고 있다. 어떤 차를 타던 내 가슴이 뛰는 일을 찾을 거다. 내가 누리는 즐거움과 행복이 다른 사람의 즐거움과 행복, 내가 믿는 하느님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연결 되는 일을 찾고 싶다.
 
 
 
힘을 다해 몰두하는 유전자를 타고 났어
  
 
새로운 NGO를 만들 생각은 없나?
내 이상과 가치와 같이 가는 사람들과 NGO를 만들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은 전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잘 하는 몇 가지 빼놓고는 다 못한다. 그저 잘하는 몇 가지에 몰두하는 거다.
 
나는 기본적으로 선동자 같다. 내가 어떤 가치에 대해서 뚜렷한 생각이 있으면 그걸 사람들한테 공유하고 같이 나가자고 하는 사람. 우리나라는 이미 넘치도록 많은 NGO가 있다. 그 많은 NGO들이 잘 되는 것이 중요한 거지, 새로운 NGO가 필요할까 싶다.어떤 NGO에서 일을 하든, 어떤 일자리가 목표일 리는 없다. 지금 내가 UN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UN의 어떤 자리가 아니다. 긴급 구호 현장에 가면 결국 UN을 중심으로 일하게 된다. 다른 NGO들은 이 시스템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아마 바깥에서 보면 불만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다. 그러니 안에 들어가서 개혁을 하고, 서로 호환되는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최종 목표는, 진짜 이건  한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다. 우리나라가 아주 좋은 후원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어차피 돈을 주는 나라지 않나. 우리가 받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좋은 후원국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요즘 중국이 국제사회의 법칙을 어기면서 자기들 생각으로 가는 면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중국에 가선 공부만 하지 않고, 여러 가지 네트워크를 할 생각이다. 어떤 사람들을 어디서 만날 지는 모르지만 중국이 적어도 내 분야에선 좋은 후원국이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꾸준히 책을 내고 있다. 최근작『그건, 사랑이었네』가 8번째 책이다.
나는 매일매일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다. 책을 쓸 때가 되면 그 메모들을 가지고 2, 3개월간 몰두를 한다. 메모장 따로, 일기장이 따로 있다. 매일 정도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으면 항상 기록해 둔다.
 
『그건, 사랑이었네』는 우리 집 막내다. 근데 책을 내자마자 내가 미국에 가게 됐다. 너무 미안한 거다, 얘한테. 책이 세상에 나오면 그걸 알리는 게 엄마의 의무인데, 이 책을 내기 직전에 상황이 안 좋았다. 작년 4월쯤이었는데 복막염으로 수술 받고, 퇴원하느라 스케줄이 늦어졌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이 못 나올 뻔 했다. 수술 받고 나서 너무 배가 아파서 앉아 있지도 못하니 책 마무리가 안 되는 거다. 만약 배가 나아서 컴퓨터에 앉아 있질 못하면 이 책은 못 나가는 거였다. 왜냐하면 보스턴에 갔다 오면 난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고맙게도 배가 안 아팠다. 기적처럼. 그래서 이 책이 태어났다그런데 이 핏덩이를 두고 가야 하는 거다, 보스턴에 바로. 출판사 이모나 삼촌에게 맡기긴 했지만 얼마나 미안한가. 근데 얘가 엄마도 없는 데 무럭무럭 자라서 1년에 한 60만 권 팔렸다는 거다. 60만 권이면 내 책 중에서 제일 빨리 사랑을 받은 거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 7 9일에,  미역국을 끓여 줬다. 즉석 미역국에다가 생굴을 넣어서. 그 날이 초판 발행일이거든
 
이 아이가 잘 자라는 바람에 내가 책에도 썼듯이 세계시민학교 육성을 위해서 내겠다 했던 인세 1억도 기부했고, 보스턴의 대학원 등록금도 이 책 인세로 충당했다. 그러니까『그건, 사랑이었네』를 사신 분들은 내가 한비야를 유학 시켰다라고 말할 수 있다.(웃음)
 
그 넘쳐 흐르는 에너지의 근원은 뭔가.
내가 모든 분야에 그런 게 아니다. 우리 집에 한번 가보라. 문을 열수가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다. 그러나 "정리정돈 못하는 내가 정말 싫어, 미워"라고 자학하는 가 하면 아니다. 정리 정돈 그거, 시간 내서 언젠가 하면 된다. 못하는 것도 있다는 걸 인정하면 된다.
 
대신 내가 잘 하는 것에 에너지를 몰두하는 거다. 나의 에너지는 한정돼 있다. 난 한번에 한가지에 몰두하는 DNA를 타고 난 것 같다. 한번에 하나씩. 예를 들어 내가 오지 여행을 한다. 그럼 오지여행에만 몰두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오지여행이다. 오지여행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 공부할 때도 그렇고. 힘도 없는 주제에 힘을 어떻게 남기나. 있는 힘을 다 쏟는 거다. 그러면 뭔가 된다. 백두대간 종주를 잘 하기 위해서 이틀에 한번 자던 잠을 요즘 매일매일 잔다. 내가 약간 무릎이 나빠서, 무릎에 좋은 건 다 한다. 백두대간 종주를 잘 하기 위한 모든 것을 한다.
 
 
 
나는 커서 뭐가 될까, 너무 궁금해  
 
 
오늘 한비야 씨를 만나기 위해 토요일 오후에 모인 100여 명의 팬들을 바라보는 기분이 어떤가.
되게 든든하다. 내 최대 응원군 아닌가.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이 다른 사람의 즐거움과 행복이기도 하다는 걸 아는 친구들과 같은 시대를 산다는 건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저 친구들이 나랑 이 세상을,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라는 게 나한테는 십자가이자 훈장이다. 나도 이 길이 매일 새로 가는 길인데, 이 길을 잘못 가면 어쩌나, 잘 가고 있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렇지만 나랑 같이 가는 저 친구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거다. 잘못 갔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람들의 기대치가 있는 데 잘못을 인정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지 않나?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들이 나한테 100% 천사를 기대하거나, 100% 완벽하기를 기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글을 읽어본 사람들은 내가 좀 노력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뭔가를 이룬, 저 멀리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을 걸. 되게 만만하게 본다, 나를.(웃음) 그런 게 나는 정말 좋다. 우리 독자들한테는 내가 어떤 실수를 했던, 잘못을 했던,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공감대가 있다. 우리들 사이에는.
 
롤모델이면서 만만한 존재!
정말로 같이 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섯 발자국 앞에 가는 사람으로.
 
특히 나는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에 대해서 거의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다. 너무너무 훌륭해. 내가 바깥에서 만나는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디다 내놔도 손색이 없다. 유학이면 유학. 공부도 열심히 하지. 여행이면 여행, 현지인하고도 잘 지내지. 정말 지혜롭게 싹싹하고 똑똑하고 비전 있고. 이 친구들에게 내가 어떻게 날개를 달아줘야 할까를 늘 생각하게 한다. 그런 사람들이 세계시민의식까지 있어. 우리들이 생각하는 우리보다 훨씬 우리가 멋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여자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떨린다. 저 친구들은 커서 뭐가 될까. 너무 궁금해. 나도 나는 커서 뭐가 될까, 너무 궁금하거든. 지금까지는 정말 전초전, 이 정도가 내 메인 게임이겠어? 전초전이겠지.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들을 다 합해서 이제 꽃을 피울 때인데 내가 어떤 꽃을 피울까가 너무 궁금하다. 지금부터 꽃을 피울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쉰을 훌쩍 넘어섰다. 50대면 흔히 인생의 완성을 논할 나이인데.
그러니까 주위에서 무슨 말을 하던, 어떻게 끌어 내리던 스스로 내공이 있어야 된다. 요즘에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산다지 않나. 50살에 그럼, 꿈이 없나? 나머지 50년은 그럼 어떻게 산단 말이야? 꿈 없이 그럼 밥만 먹고 살아? 그럴 순 없는 거다.
 
예전에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지금은 제대로 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잘한다는 기준이 좀 달라진 것 같다. 잘한다는 거는 누구랑 비해서 잘하는 거지 않나. 지금은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한비야 퀄리티, 내 이름이 들어간 거는 사람들이 믿을 만 하다고 할 정도로 제대로 하고 싶다. 축구 경기에 비유하자면, 이기는 경기도 물론 재미있겠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멋진 경기를 펼치고 싶다. 그게 40대에 비해 50대에 달라진 부분인 것 같다. 나의 50, 60대가 너무 기대가 되고 내가 죽기 전에 어떤 말을 할까 너무 기대가 된다.
  
자주 미디어에서 이름이 거론돼서 그런지 미디어 친화적이란 평도 오간다.
그거 있잖아, 완전히 반대다. 날 가깝게 느끼는 건 정말 좋지만 실상을 따지고 보면, 보스턴 가기 직전에 MBC 쇼버라이어티 <무릎팍 도사> 나간 거 말고는 지난 1년간 방송에 나가지 않았다.신문 칼럼 한두 번 쓴 거 외에는 어떤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물론 미디어에 자주 거론되는 게 나쁜 건 아니지. 내가 월드비전 직원이었으니까 구호 현장을 알려야 했고, 나도 미디어가 필요했고 미디어도 내가 필요했던 시기가 있었겠지.
 
2의 한비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신다면.
나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롤모델을 갖고 있다는 게 참 부럽다. 왜냐하면 내가 어렸을 때는 롤모델로 삼을 만한 사례가 별로 없었다. 국내 여자의 롤모델이 없어서 남자의 롤모델이나 외국 롤모델을 차용할 때 맞지 않는 면도 있었고. 또 내가 가고 싶은 분야에는 얘기를 해 줄 만한 이가 없었다. 근데 지금은 젊은이들이 롤모델들의 어깨 위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나. 그걸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제2, 3의 한비야라는 말은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나도 제 2의 누가 되기 싫거든.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 유일한 존재이지 않나. 누구를 따라 하기 위해 인생을 사는 건 아니지 않나.
 
꿈은 크게 꿀수록 좋은 것 같다. 2, 30대에 조그마한 꿈을 꾸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한번도 날개를 활짝 펴보지 않고 핑계만 댄다면 청춘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가. 20대에 정말 여러 가지 옵션을 실컷 실험해 보는 거다. 자신에 몰두해서 자신을 100% 끓이는 그 맛을 봤으면 좋겠다. 그건 정말 자기가 즐겁고 행복한 일을 해야만 끓는다. 끓을 수 밖에 없는 거다
 
글, 사진_ 유지영 (교보문고 북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