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통일 문제

북한은 미국과 중국이 원하는 걸 안다

일취월장7 2018. 3. 29. 11:05

북한은 미국과 중국이 원하는 걸 안다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북미관계 변화는 북중관계의 변화
2018.03.29 11:49:44

금년 4월과 5월 두 달에 걸쳐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지겹게 끌어 온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고, 동아시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역사적인 회담이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폐기할 수 있는 방안이 도출되고, 북미관계를 개선하여 평화협정까지 이룰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을 것이다.

북미관계가 변한다는 것은 곧 북중관계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남북관계의 변화를 낳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도 변화시킬 것이다. 중국은 동아시아 안보의 지각변동에 직면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차이나 패싱의 위기감을 가지고 이번 회담을 촉각을 곤두세우며 지켜보고 있다.  

북중관계를 중국에서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묘사하곤 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매우 밀접한 관계임을 나타내는 말 같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중국은 북한을 자기들 이가 시리지 않게 막아주는 입술 정도로 여기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북중관계를 혈맹이라 부른 적도 있었다. 한중 수교 전에는 주로 그렇게 알고 있었다. 6.25 때 중국이 참전했었고, 더 이전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공산혁명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 왔다. 적어도 양국의 인민들 사이에는 그런 정서적 유대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북중관계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혈맹이라고 부를 만큼 관계가 끈끈하지는 않았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영부인인 리설주는 그동안 북한 최고지도자들의 부인들과는 달리 이번 방중에서 영부인으로 전면에 나섰다. 사진은 27일(현지 시각)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 양위안자이(養源齋)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김정은-시진핑 부부. 왼쪽부터 김정은 위원장 영부인 리설주, 김정은 위원장,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시 주석 영부인인 펑리위안 ⓒ노동신문 캡펴


일본이 만주로 진격하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미던 시기에 북중 간의 미묘한 갈등은 시작됐다. 일본의 관동군이 한국인과 중국인을 이간질시키고, 침략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조장한 만보산사건이 시작이었다. 1931년에 일본의 자본이 투자한 농지를 한국인들이 빌려서 제방을 쌓고 수로를 정비하자 근처의 중국농민들이 반기를 들어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현지의 유혈충돌은 크게 번지지 않았지만 그 소식이 조선일보를 통해 창춘(長春)의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에게 핍박받고 있다고 왜곡되어 전해지자 대대적인 반중운동이 일어났다. 평양, 원산, 인천 등을 비롯해 여러 도시에서 중국인들에게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만주 일대에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도 그런 갈등과 반목의 정서가 퍼지기 시작했다. 

1928년부터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1국 1당의 원칙에 따라 대부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간도(間道) 지역에 동만특위(東滿特委)를 구성하고 왕칭(王淸)을 비롯한 4개 현에 위원회를 두었으며 당원은 상당수가 한국인이었다. 그런 와중에 민생단(民生團)사건이 터졌다. 민생단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친일조직의 명칭이다. 일본의 헌병대에 잡혔다가 풀려난 한국인 당원이 심문 끝에 민생단 단원임을 자백하자 중국공산당 내의 민생단원을 색출하는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벌어졌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벌어진 숙청의 광풍은 실로 어이없고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중국인은 한국어를 몰랐고, 한국인은 중국어를 몰랐다. 그러나 일제치하에 있던 한국인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무조건 의심했다. 기침 한번 한 것을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며 숙청했고, 밥에 모래가 섞인 것을 두고 공산당을 위해하기 위한 것이라며 숙청했다. 1983년에 발표된 중국공산당 문건에 따르면 497명이 체포되고 367명이 처형됐다고 나와 있으나 1000여 명 이상이 체포되고 500여 명 이상이 처형됐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이 광란의 숙청작업은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끝내고 만주의 접경지역인 옌안(延安)에 정착한 후에 당 중앙의 지시로 비로소 중지되었다.  

민생단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김일성도 1국 1당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민생단 사건이 한창일 때 그는 간도 지역 두 개의 현과 한 개의 시를 포괄하는 왕칭(汪淸) 유격대의 정치위원이었다. 그의 휘하에 있던 대원 40여 명도 처형당했고, 처형을 앞둔 16명은 도망쳤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을 신뢰하지 않았다. 언제 태도가 돌변하여 이와 같은 사건이 다시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미군이 압록강에 다다르자 중국의 인민지원군이 남하했다.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소련의 원조를 기대하기도 했고, 일본이 만주에 남기고 간 산업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3년간의 전쟁은 당초 김일성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상호간에 엄청난 피해만 남기고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구 소련의 문건에 따르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는 평양에서 불과 10km 떨어진 곳에 주둔했지만 북한군 사령부와 연합작전을 위해 회합을 갖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중국은 전쟁 중인 1952년 주 북한 중국대사를 소환한 후 1955년 1월까지 파견하지 않았다. 이렇듯 전쟁 중에도 북중관계는 좋았다고 말할 수 없다. 

1953년 3월 1일 6.25 전쟁의 총지휘자인 스탈린이 사망한 후 소련의 중재로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18만여 명의 인민지원군이 사망한 전쟁에서 중국은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또 북한은 중국의 참전에 대해 그리 고마워하지 않은 듯 했다. 중국의 자료에 따르면 전쟁 후에 평양에 들어선 전쟁 기념관 12개의 전시실 중에 중국군에 관한 것은 한 곳뿐이었다.  

김일성은 전쟁의 실패와 경제적 어려움의 책임을 중국공산당 출신인 연안파에게 묻기 시작했다. 특히 스탈린 사망 후에 소련에서 정권을 잡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자 비슷한 비판을 받을 것을 우려한 김일성은 연안파와 소련파 등 해외 공산당 출신들을 종파주의 반당분자로 몰기 시작했다. 실재로 헝가리에서는 스탈린 격하운동에 영향 받아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숙청의 위기를 느낀 연안파 출신 당 고위간부들이 중국으로 몰래 도망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김일성은 이들의 노동당 당적과 모든 직위를 박탈했다. 1956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8월 사건'이라 부른다. 8월사건 이후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독일의 나치 같다고 비난하고, 약속한 원조도 중단하거나 미루었다.  

이 무렵 중소관계가 틀어지고 있었다. 중국은 아시아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1955년부터 제3세계 외교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흐루시초프는 평화공존론을 선언하며 미국과 화해를 시도하고, 1958년부터 시작하는 중국의 제2차 5개년 계획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 중국은 자력갱생을 위해 대약진 운동에 돌입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북한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거의 원하는 만큼 지원했고, 그때까지 북한에 남아있던 중국군을 완전 철수시키면서 설비와 시설은 무상으로 북한에 넘겨줬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줬다. 이때 김일성은 반대파를 마오쩌둥의 묵인 하에 완전히 숙청했다.  

중소분쟁의 시기에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좋은 말로 하면 견제와 균형, 나쁜 말로 하면 양다리외교를 통해 양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와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흐루시초프는 8월사건 때 중국이 소련을 끌어들여 북한에 간섭하려 했다는 사실을 고자질하면서 6.25 때 북한이 소련에 빚진 차입금과 전쟁비용을 모두 탕감해주었다. 중국은 여기에 뒤질세라 4.2억 루블 차관을 제공하고 고무타이어 공장, 무선통신장비 공자, 생필품 공장 건설 지원을 약속했다.  

중국은 빚을 지면서까지 북한을 원조했고 나아가 대약진운동 시대에 자국민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북한에 23만 톤의 식량을 지원했다. 그러자 소련은 북한에 야금공장을 확장해주고, 화력발전소와 정유공장을 지어주고 원유까지 공급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70년대까지 사회주의 국가가 북한에 제공한 원조 금액은 20.43억 달러인데 그중 소련이 43.14%, 중국이 30.75%에 달했다.  

북한은 1961년에 중국과 소련 두 나라와 거의 동시에 군사동맹을 포함한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이 당시 한국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한일 간 국교정상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미국이 동아시아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위기의식을 느낀 세 나라가 서둘러 동맹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십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면 수백만의 인명을 희생한 전쟁 당사자로서 북한은 미국과 평화공존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개적으로 중국의 편에 섰다. 

소련은 62년부터 북한에 대한 원조를 연기하더니 급기야 64년에는 군사원조를 정식으로 중단했다가 브레즈네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북한에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북한도 다시 더 많은 원조를 받기 위해 중국과 멀어지고 소련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66년에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발발했을 때 홍위병들은 김일성을 배신자이며 수정주의자라 비난하며 조선족 자치주의 동포들을 박해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묘역을 때려 부수게 했다. 심지어 6.25 때 사망한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묘비도 박살냈다고 전해진다. 1970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에게 문화혁명 당시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해명하고 나서야 쌍방관계는 개선되었다. 

이후 중국은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면서 경제발전과 체제개혁의 변화를 추진했지만 북한은 여전히 두 나라 사이에서 이익을 저울질하며 체제유지에 온 힘을 쏟았다. 러시아는 1990년 9월 30일에 한국과 수교하고, 1996년에는 북한과 소련이 맺었던 우호조약이 폐기됐다. 북한과 러시아는 단순한 교역상대국이 된 것이다. 

중국은 1992년 8월 2일에 한국과 수교했다. 수교 직전에 중국의 외교부장 첸치천(錢其琛)이 북한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었다. 여느 때 같으면 수십만의 군중을 동원해서 환영했을 텐데 공항에는 북한 외교부장 김영남(金永南)만 영접을 나와 곧바로 헬기를 타고 김일성이 있는 별장으로 이동했다. 김일성은 첸치천의 설명을 듣고 중국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으로 결정한 정책이니 이해한다고만 하고 자리를 떴다. 첸치천은 자신의 기억 속에 가장 짧은 회담이었다고 술회했다. 회견 후에는 관례에 따른 만찬도 없었다. 그리고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여 이익을 얻었다. 북한은 그들의 원조를 구걸한 것이 아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외교적 전략과 전술을 활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은 것이다. 적어도 북한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적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고, 소련은 해체되어 러시아가 된 후 북한은 자신의 외교적 재능을 발휘할 공간을 잃었다. 게다가 김일성이 1994년에 사망하고 나서는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을 세습하면서 오로지 핵무장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핵무장의 완성을 선언했다. 여전히 북한이 완벽한 핵능력을 갖췄는지 의심이 가기는 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북한 스스로가 완성했다고 공표한 것이 중요하다. 핵 프로그램 말고 다른 것을 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 북한이 가장 잘했던 것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다. 핵을 개발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니라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김일성이 없어서 혹은 김정일이 없어서 그때처럼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북한에는 김영남이 있다. 그가 비록 실권 없는 국가수반이긴 하지만 김정은에게는 일종의 상선영감 같은 존재이다. 김영남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김일성이 탁월한 외교를 펼치던 1956년에 조선노동당 중앙국제부 과장에 임명됐고, 61년에는 부부장이 됐다. 그 이후로 김영남은 줄곧 외교분야에서 일해 왔다. 그는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어떻게 했는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북한은 일방적으로 중국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국민들은 물론 주변국들과 세계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환영했다. 우리와 미국 그리고 북한이 원하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와 미국은 한반도에서 비핵화를 이루고자 하고, 북한은 체제보장을 원한다. 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이루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마치 상대방을 향해 서로 총구를 겨누고, 네가 먼저 총을 내려놓으면 나도 내려놓겠다는 식이었다. 뭘 믿고 먼저 총을 내려놓겠는가? 그러는 사이에 불신의 골은 깊어만 갔었다. 이제 당사국 정상들끼리 만나 신뢰를 회복하는 대화를 하려고 한다. 신뢰회복은 단순히 말로 하는 약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북중 우호조약은 2021년이 만기이다. 6개월 전에 일방이 폐기를 통보하면 효력이 정지된다. 북한이 우선 북중우호조약의 폐기를 공표하고, 미국과 단계적인 핵폐기에 합의하면 체제를 보장받을 수 있다. 또한 개성공단을 황해도 해주까지 확대하여 재개하고, 공단에 미국기업을 유치하면 경제지원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도 있다. 당연히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미국은 북한에 진출한 미국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대만관계법과 유사한 개성관계법을 제정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남북관계는 고려해야할 것이 많아지기는 하지만 불가능했던 협상의 대상이 가능한 대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남북관계가 호전되기를 원하는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의 영향을 받으며 북미관계는 미중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전혀 실현 불가능한 억측은 아니다. 현재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경제문제에 있어서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중국이기 때문에 그렇다.

정세현 "북한, '리비아 방식' 비핵화 거부한 것"

반대급부 주면서 단계적으로 가는 비핵화 방식 취해야
2018.03.29 10:16:51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최근 북중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먼저 추진하고 이후 보상한다'는 미국의 구상을 견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 전 장관은 29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6일(현지 시각) 북중 정상회담에서 단계적 비핵화를 언급한 것을 두고 "(미국이) 요즘 와서 핵을 먼저 폐기하면 경제지원 해주겠다는 '리비아 방식'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하자고 하는데 (북한이) 이를 거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리비아가) 그 말을 믿고 핵을 폐기했더니 (미국이) 경제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후에 여러 국내 정치적 상황 변화가 일어나서 카다피가 몰락했다"며 "(북한은) 우리는 그런 바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제가 통일부 장관으로 남북 장관급회담 할 때도 북측에서 '미국에서 자꾸 리비아 방식으로 하자고 그러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한다. 리비아 봐라'라는 이야기를 했다"며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가 리비아 방식 이야기하는데 (북한은) 이걸 견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은 (자신들이) 비핵화하겠다는 (미국과 한국이) 진심으로 믿어주고 동시 행동 취해지면 우리도 (비핵화) 하겠다는 이야기를 시진핑(중국 국가주석)과 나눴고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기로 합의하고 돌아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이 주장하는 단계적 해결 방식을 취하게 되면 북한은 보상만 챙기고 결정적 단계에서는 합의를 파기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정 전 장관은 "미국이 무슨 보상을 해줬냐"며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합의 이행이)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계적으로 접근하면서 진정성을 확인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 처음부터 '거짓말이야', '약속 안 지킬거야' 하는 식으로 하면서 자꾸 상대방의 진정성을 확인하려고 하면 시간은 가버리고 핵 문제는 해결 못한다"고 일갈했다.

북중 정상회담이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북한의 비핵화 과정에 제동을 걸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정 전 장관은 "미국 쪽에서 공짜로 (북한 비핵화를) 하려는 데는 제동이 걸렸지만 반대급부를 주면서 하려는 자세만 가지고 있으면, 정치적으로 그쪽으로만 조정이 된다면 오히려 속도를 낼 수 있는 구도가 짜인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이 확실하게 비핵화 해야 보상하겠다는) 미국을 우리가 설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과 협조할 필요가 있다"며 "마침 오늘 양제츠(杨洁篪) 정치국 위원 겸 국무위원이 방문하니까 한중 간 협력을 통해 동시 행동으로 나가는 원칙을 합의 하고, 미국이 공짜로 (북한 비핵화를) 하려는 생각은 버리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리비아 모델? 북한에 핵포기 하지 말라는 말!

[정욱식 칼럼] '선(先)비핵화, 후(後)정권교체'인 리비아식 해법, 불가능하다


"제가 보기엔 김정은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일들을 예의주시해왔습니다.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과 그걸 지렛대로 삼았던 국가들을 말이죠. 김정은은 자신의 주머니에 핵 카드를 넣고 있어야 강력한 억제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북한이 리비아와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에서 얻은 교훈은 불행하게도 '만약 핵이 있으면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핵무기가 없다면 그걸 가져야 한다'라는 것이죠."

누가 한 말일까? 국내 인사가 이런 발언을 했다면, 아마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이 발언의 주인공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정보 수장인 댄 코츠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이다.  

그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인 '화성-14형'을 연달아 발사했던 지난해 여름 방송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변호하고(?) 나섰다. "김정은이 매우 특이한 타입이지만, 미친 것은 아니다"라며 "그의 행동은 정권 및 국가의 생존을 위한 합리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댄 코츠 발언의 요지는 리비아의 사례는 김정은이 핵무장을 결심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거꾸로 이른바 '리비아 모델'을 북한에 강요하면 역효과만 커질 것이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의 상당수 언론과 보수적 정치인들은 존 볼턴이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내정된 것을 기회로 '리비아식 해법'을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볼턴이 리비아식 해법의 신봉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곤 이내 청와대에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청와대 관계자가 리비아식 해법은 "북한에 적용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발언한 것을 두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한반도 비핵화를 원한다면 리비아식 해법이라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개발 초기 단계에 있었던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파괴무기 포기를 선언한 지 8년 후에 벌어진 일을 상기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 원수가 지난 2011년 3월 2일(현지 시각) 수도 트리폴리에서 '자마히리야' 체제 수립 34주년 기념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리비아 모델'은 무엇인가
 

2011년 2월 들어 리비아에도 튀니지와 이집트를 휩쓴 반정부 시위의 여파가 몰아닥쳤다. 리비아 사태가 내전으로 치닫자 유엔 안보리는 비행 금지구역과 카다피 일가의 자산 동결을 선포하고 민간인 보호에 나섰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리비아 반군에게 대규모의 군사 지원을 하면서 공습에 돌입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는 "핵무기 포기 압력을 받고 있는 다른 나라들은 리비아의 경험이 주는 메시지가 미국 정부가 의도하는 것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리비아의 예를 따르라고 서방으로부터 자주 거론되었던 이란과 북한은 카다피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란 카다피가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결국 결사 항전을 다짐하던 카다피는 2011년 10월 20일 시르테에서 반군에게 생포되어 최후를 맞이했다. "만약 2003년에 카다피가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서방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렇게 자문을 하면서 "카다피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 무기의 사용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자답했다. 2003년 합의를 통해 "최악의 악몽"을 예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리비아의 사례를 똑똑히 목도한 김정일-김정은 부자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이들은 "'리비아 핵포기 방식'이란 바로 '안전담보'와 '관계개선'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상대를 얼려넘겨 무장해제를 성사시킨 다음 군사적으로 덮치는 침략방식이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구상에 강권과 전횡이 존재하는 한 자기 힘이 있어야 평화를 수호할 수 있다는 진리가 다시금 확증됐다"는 생각을 더더욱 굳혔다. 이런 북한을 상대로 리비아식 해법을 운운하는 것은 핵 포기를 하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선 핵포기, 후 정권교체' 

오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다수 언론은 리비아식 해법을 두고 '일괄타결'과 '선(先)핵폐기 후(後)보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김정은이 시진핑 주석에게 말한 '단계적, 동시적 조치'와 대립되는 것처럼 분석한다. 

그러나 2003년 12월 카다피의 WMD를 포기 선언 이면에는 약 5년간 축적된 미국과의 신뢰 구축 및 경제 제재의 부분적인 해제가 있었다. 1988년 팬암 103기 폭파 사건으로 악화일로를 걸었던 양국 관계는 1990년대 후반부터 개선되기 시작했다. 리비아는 팬암기 테러 사건과 연루된 2명을 네덜란드 법정에 인도했고, 미국은 유엔의 리비아 제재 해제 방침에 동의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리비아 사이의 화해 분위기를 계승한 부시 행정부는 추가적인 조건으로 팬암기 테러 사건의 희생자에 대한 리비아 정부의 보상을 제시했고, 이를 리비아 정부가 수용함으로써 미국의 동의하에 유엔의 리비아 제재가 2003년 여름 해제됐다. 이러한 신뢰구축에 힘입어 양국은 'WMD 포기와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합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행간도 있었다. 카다피와 조지 W. 부시는 리비아에서 암약하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공동의 적'으로 삼았다. 카다피에겐 정치적 도전 세력이었고 부시에겐 극단적인 테러리스트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카디피는 국내의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부시는 이를 "테러와의 전쟁"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공동의 이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주목할 점은 또 있었다. 테러지원국 해제와 관계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미국의 약속 이행은 리비아의 포기 선언 이후 무려 30개월 만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미국의 약속 이행이 더딘 만큼이나 리비아의 불만도 커졌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WMD를 포기한 카다피 정권을 제거했다.  

결국 '리비아 모델'은 '선 WMD 포기, 후 정권교체'가 된 셈이다. 체제 안전보장을 핵포기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 김정은에게 리비아식 해법을 요구하는 것은 비핵화를 더더욱 멀어지게 할 뿐이라는 지적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울러 일괄타결과 단계적·동시적 조치는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5년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합의는 일괄적으로, 이행은 단계적·동시적으로 하는 것이 핵협상의 기본에 해당된다.  

물론 결과적으로 두 합의는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접근이 필요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실패의 원인은 일괄적으로 '타결'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북한 못지않게 한미일도 크다는 게 역사적 진실이다.

하여 다른 접근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괄타결을 추구하면서 단계적이고도 철저한 이행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간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시간이더라도 그 길이는 화학작용에 따라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 가령 비핵화를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은 평화협정 체결을 포함한 신뢰할 만한 안전보장, 경제제재 해제, 관계 정상화 등의 상응 조치를 빠르게 취하는 데에 있다.

이를 두고 흔히 '보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보상이 아니다. 평화협정 체결은 북한의 안전만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일의 안보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된다. 경제제재가 해제되고 북한과의 경제협력이 본격화되면 한국에도 좋고 미국과 일본 경제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긴다. 관계정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 지난달 23일 워싱턴에서 열린 보수정치행동컨퍼런스(CPAC)에서 연설하고 있는 존 볼턴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 ⓒAP=연합뉴스


존 볼턴의 황당한 모순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볼턴의 황당함이다. 그는 협상과 제재로는 북핵 문제를 풀 수 없다며, 정권교체와 군사 행동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말했었다. 그런데 같은 입으로 리비아식 해법을 모범으로 삼아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볼턴이 바보가 아니라면 북한이 리비아식 해법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을 터다. 그런데 볼턴은 왜 북한이 도저히 삼킬 수 없는 약을 제시하려는 것일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사실상 외교적 항복을 추구하는 리비아식 해법이 통하지 않으면 본래의 신념, 즉 정권교체와 군사 행동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그가 정책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지만, 이는 대단히 우려되는 시나리오다.

그래서 청와대를 비난하고 볼턴을 옹호하는 한국의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이 개탄스러운 것이다. 진정으로 국익을 생각한다면, 리비아식 해법은 결코 처방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