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미국과 중국이 원하는 걸 안다
정세현 "북한, '리비아 방식' 비핵화 거부한 것"
정 전 장관은 29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6일(현지 시각) 북중 정상회담에서 단계적 비핵화를 언급한 것을 두고 "(미국이) 요즘 와서 핵을 먼저 폐기하면 경제지원 해주겠다는 '리비아 방식'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하자고 하는데 (북한이) 이를 거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리비아가) 그 말을 믿고 핵을 폐기했더니 (미국이) 경제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후에 여러 국내 정치적 상황 변화가 일어나서 카다피가 몰락했다"며 "(북한은) 우리는 그런 바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제가 통일부 장관으로 남북 장관급회담 할 때도 북측에서 '미국에서 자꾸 리비아 방식으로 하자고 그러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한다. 리비아 봐라'라는 이야기를 했다"며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가 리비아 방식 이야기하는데 (북한은) 이걸 견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은 (자신들이) 비핵화하겠다는 (미국과 한국이) 진심으로 믿어주고 동시 행동 취해지면 우리도 (비핵화) 하겠다는 이야기를 시진핑(중국 국가주석)과 나눴고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기로 합의하고 돌아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이 주장하는 단계적 해결 방식을 취하게 되면 북한은 보상만 챙기고 결정적 단계에서는 합의를 파기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정 전 장관은 "미국이 무슨 보상을 해줬냐"며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합의 이행이)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계적으로 접근하면서 진정성을 확인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 처음부터 '거짓말이야', '약속 안 지킬거야' 하는 식으로 하면서 자꾸 상대방의 진정성을 확인하려고 하면 시간은 가버리고 핵 문제는 해결 못한다"고 일갈했다.
북중 정상회담이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북한의 비핵화 과정에 제동을 걸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정 전 장관은 "미국 쪽에서 공짜로 (북한 비핵화를) 하려는 데는 제동이 걸렸지만 반대급부를 주면서 하려는 자세만 가지고 있으면, 정치적으로 그쪽으로만 조정이 된다면 오히려 속도를 낼 수 있는 구도가 짜인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이 확실하게 비핵화 해야 보상하겠다는) 미국을 우리가 설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과 협조할 필요가 있다"며 "마침 오늘 양제츠(杨洁篪) 정치국 위원 겸 국무위원이 방문하니까 한중 간 협력을 통해 동시 행동으로 나가는 원칙을 합의 하고, 미국이 공짜로 (북한 비핵화를) 하려는 생각은 버리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리비아 모델? 북한에 핵포기 하지 말라는 말!
"제가 보기엔 김정은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일들을 예의주시해왔습니다.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과 그걸 지렛대로 삼았던 국가들을 말이죠. 김정은은 자신의 주머니에 핵 카드를 넣고 있어야 강력한 억제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북한이 리비아와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에서 얻은 교훈은 불행하게도 '만약 핵이 있으면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핵무기가 없다면 그걸 가져야 한다'라는 것이죠."
누가 한 말일까? 국내 인사가 이런 발언을 했다면, 아마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이 발언의 주인공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정보 수장인 댄 코츠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이다.
그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인 '화성-14형'을 연달아 발사했던 지난해 여름 방송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변호하고(?) 나섰다. "김정은이 매우 특이한 타입이지만, 미친 것은 아니다"라며 "그의 행동은 정권 및 국가의 생존을 위한 합리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댄 코츠 발언의 요지는 리비아의 사례는 김정은이 핵무장을 결심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거꾸로 이른바 '리비아 모델'을 북한에 강요하면 역효과만 커질 것이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의 상당수 언론과 보수적 정치인들은 존 볼턴이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내정된 것을 기회로 '리비아식 해법'을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볼턴이 리비아식 해법의 신봉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곤 이내 청와대에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청와대 관계자가 리비아식 해법은 "북한에 적용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발언한 것을 두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한반도 비핵화를 원한다면 리비아식 해법이라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개발 초기 단계에 있었던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파괴무기 포기를 선언한 지 8년 후에 벌어진 일을 상기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리비아 모델'은 무엇인가
2011년 2월 들어 리비아에도 튀니지와 이집트를 휩쓴 반정부 시위의 여파가 몰아닥쳤다. 리비아 사태가 내전으로 치닫자 유엔 안보리는 비행 금지구역과 카다피 일가의 자산 동결을 선포하고 민간인 보호에 나섰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리비아 반군에게 대규모의 군사 지원을 하면서 공습에 돌입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는 "핵무기 포기 압력을 받고 있는 다른 나라들은 리비아의 경험이 주는 메시지가 미국 정부가 의도하는 것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리비아의 예를 따르라고 서방으로부터 자주 거론되었던 이란과 북한은 카다피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란 카다피가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결국 결사 항전을 다짐하던 카다피는 2011년 10월 20일 시르테에서 반군에게 생포되어 최후를 맞이했다. "만약 2003년에 카다피가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서방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렇게 자문을 하면서 "카다피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 무기의 사용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자답했다. 2003년 합의를 통해 "최악의 악몽"을 예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리비아의 사례를 똑똑히 목도한 김정일-김정은 부자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이들은 "'리비아 핵포기 방식'이란 바로 '안전담보'와 '관계개선'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상대를 얼려넘겨 무장해제를 성사시킨 다음 군사적으로 덮치는 침략방식이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구상에 강권과 전횡이 존재하는 한 자기 힘이 있어야 평화를 수호할 수 있다는 진리가 다시금 확증됐다"는 생각을 더더욱 굳혔다. 이런 북한을 상대로 리비아식 해법을 운운하는 것은 핵 포기를 하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선 핵포기, 후 정권교체'
오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다수 언론은 리비아식 해법을 두고 '일괄타결'과 '선(先)핵폐기 후(後)보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김정은이 시진핑 주석에게 말한 '단계적, 동시적 조치'와 대립되는 것처럼 분석한다.
그러나 2003년 12월 카다피의 WMD를 포기 선언 이면에는 약 5년간 축적된 미국과의 신뢰 구축 및 경제 제재의 부분적인 해제가 있었다. 1988년 팬암 103기 폭파 사건으로 악화일로를 걸었던 양국 관계는 1990년대 후반부터 개선되기 시작했다. 리비아는 팬암기 테러 사건과 연루된 2명을 네덜란드 법정에 인도했고, 미국은 유엔의 리비아 제재 해제 방침에 동의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리비아 사이의 화해 분위기를 계승한 부시 행정부는 추가적인 조건으로 팬암기 테러 사건의 희생자에 대한 리비아 정부의 보상을 제시했고, 이를 리비아 정부가 수용함으로써 미국의 동의하에 유엔의 리비아 제재가 2003년 여름 해제됐다. 이러한 신뢰구축에 힘입어 양국은 'WMD 포기와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합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행간도 있었다. 카다피와 조지 W. 부시는 리비아에서 암약하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공동의 적'으로 삼았다. 카다피에겐 정치적 도전 세력이었고 부시에겐 극단적인 테러리스트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카디피는 국내의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부시는 이를 "테러와의 전쟁"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공동의 이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주목할 점은 또 있었다. 테러지원국 해제와 관계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미국의 약속 이행은 리비아의 포기 선언 이후 무려 30개월 만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미국의 약속 이행이 더딘 만큼이나 리비아의 불만도 커졌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WMD를 포기한 카다피 정권을 제거했다.
결국 '리비아 모델'은 '선 WMD 포기, 후 정권교체'가 된 셈이다. 체제 안전보장을 핵포기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 김정은에게 리비아식 해법을 요구하는 것은 비핵화를 더더욱 멀어지게 할 뿐이라는 지적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울러 일괄타결과 단계적·동시적 조치는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5년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합의는 일괄적으로, 이행은 단계적·동시적으로 하는 것이 핵협상의 기본에 해당된다.
물론 결과적으로 두 합의는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접근이 필요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실패의 원인은 일괄적으로 '타결'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북한 못지않게 한미일도 크다는 게 역사적 진실이다.
하여 다른 접근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괄타결을 추구하면서 단계적이고도 철저한 이행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간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시간이더라도 그 길이는 화학작용에 따라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 가령 비핵화를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은 평화협정 체결을 포함한 신뢰할 만한 안전보장, 경제제재 해제, 관계 정상화 등의 상응 조치를 빠르게 취하는 데에 있다.
이를 두고 흔히 '보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보상이 아니다. 평화협정 체결은 북한의 안전만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일의 안보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된다. 경제제재가 해제되고 북한과의 경제협력이 본격화되면 한국에도 좋고 미국과 일본 경제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긴다. 관계정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존 볼턴의 황당한 모순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볼턴의 황당함이다. 그는 협상과 제재로는 북핵 문제를 풀 수 없다며, 정권교체와 군사 행동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말했었다. 그런데 같은 입으로 리비아식 해법을 모범으로 삼아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볼턴이 바보가 아니라면 북한이 리비아식 해법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을 터다. 그런데 볼턴은 왜 북한이 도저히 삼킬 수 없는 약을 제시하려는 것일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사실상 외교적 항복을 추구하는 리비아식 해법이 통하지 않으면 본래의 신념, 즉 정권교체와 군사 행동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그가 정책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지만, 이는 대단히 우려되는 시나리오다.
그래서 청와대를 비난하고 볼턴을 옹호하는 한국의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이 개탄스러운 것이다. 진정으로 국익을 생각한다면, 리비아식 해법은 결코 처방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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