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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닛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걷기의 인문학> - 마광수, 공공의 적이 된 천재

일취월장7 2017. 9. 15. 11:30

솔닛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걷기의 인문학> 저자 리베카 솔닛(사진)이 방한했다. 강연회를 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신청자가 폭주했고 주요 매체가 현장을 보도했다. ‘솔닛 현상’이라 부를 만했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7년 09월 14일 목요일 제521호

글자를 배우기 전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리베카 솔닛이 처음 되고 싶었던 건 도서관 사서였다. 도서관은 일어났던 모든 일이 저장되어 기억되는 장소였고, 그 안에는 세상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책이라는 보물 상자를 열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누구라도 될 수 있었고,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도 책과 한층 더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면서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결국 그렇게 됐다.


ⓒ시사IN 윤무영

솔닛의 글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깊고 넓어서다. 때로 시 같기도 하고 때로 잠언 같기도 한 문장은 독자를 오래 책 속에 붙든다. 자전적인 이야기와 성찰에서 출발하는 글은 예술과 문화에 대한 비평을 잇고, 환경과 인간의 역사를 엮으며, 종내 사회와 정치에 대한 논평으로 밀고 나간다. 

여러 사상가와 작가의 문장을 재료로 삼지만, 솔닛의 글은 단단한 ‘현장’ 위에 서 있다. “내게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가르쳐준 것은 네바다 핵실험장이다(영국 문예지 <화이트리뷰>, 2013년 인터뷰)”라고 할 만큼, 솔닛은 작가와 활동가라는 두 가지 역할을 충실히 살아왔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고, 저널리즘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부터 인권운동, 기후변화, 아메리카 원주민 토지권 반환운동, 반전운동, 반핵운동의 현안에 참여해왔고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에도 적극 가담했다. 2010년 미국의 대안 잡지 <유튼 리더>는 솔닛을 ‘당신의 세계를 바꿀 25인의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꼽기도 했다.

솔닛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계기는 2008년에 찾아왔다. 미국의 독립언론 매체 <톰 디스패치>에 기고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Men Explain Things To Me)’라는 제목의 원고는 이전에 쓴 어떤 글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널리 퍼졌다. ‘맨스플레인(mansplain:man+explain)’은 2010년 <뉴욕타임스>가 꼽은 ‘올해의 단어’가 됐고, 2014년에는 옥스퍼드 온라인 사전에도 등재됐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는 국내에서 3만 부가 넘게 팔렸다.

신간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창비)와 개정 출판된 <어둠 속의 희망>(창비), <걷기의 인문학>(반비) 출간을 기념해 솔닛이 8월25일 4박5일 일정으로 처음 방한했다. 강연회를 연다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신청자가 폭주했다. 애초 150명 정도 수용 가능한 강연 장소를 준비했던 출판사는 800석 규모의 행사장을 다시 마련해야 했다. 최종 신청자는 1400명이 넘었다. 유료 행사 ‘페미데이’ 역시 일찌감치 마감됐다. 몇 년 전 방한한 마이클 샌델이나 슬라보예 지젝을 능가하는 대중 동원력이었다. 주요 매체가 강연 현장을 보도했다. ‘솔닛 현상’이라 부를 만했다.

<시사IN>은 8월26일 서울 마포구 베스트웨스턴프리미어 서울가든호텔에서 리베카 솔닛을 만났다. 대담자로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서해문집), <글쓰기의 최전선>(메멘토) 등을 쓴 은유 작가가 나섰다. 독립 연구자이자 에세이스트라는 정체성을 공유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여성의 글쓰기와 에세이에 대해 1시간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회견과 강연장에서는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시사IN 윤무영
8월26일 은유 작가(왼쪽)와 리베카 솔닛은 에세이스트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며 글쓰기와 에세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은유:이번에 개정 출판된 <걷기의 인문학>에 “솔닛의 글쓰기를 훔치고 싶었다”라는 추천사를 썼다. 환경운동가·철학자·페미니스트·예술가 등 다양하고도 입체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계기가 있었나?

솔닛
:이민 2세대(솔닛 어머니의 조부모는 아일랜드, 아버지의 부모는 러시아와 폴란드 국경지대 출신이다)이자 좌파 성향을 가진 가정환경이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트로츠키주의자였고, 외할아버지는 아일랜드의 반식민혁명을 지지하셨다. 또 내 남동생은 사회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했다(솔닛의 남동생인 데이비드 솔닛은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리던 시애틀에서 이른바 ‘시애틀 대첩’이라 불리는 반WTO 시위를 주도했다). 동생이 뉴스레터를 발간할 때 내가 도움을 주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사회 이슈들이 얼마나 응급한지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됐다.

은유:현장 기반의 공부가 글을 쓸 때 어떤 도움이 되었나?

솔닛
:일단 페미니스트가 된 계기를 말하고 싶다. 여성으로 산다는 일은 일상적으로 굉장히 많은 위협에 시달리는 일이다. 여성도 자유롭고, 안전하게 또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나는 이를 일종의 시민권 문제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게 여성 이슈는 사적인 문제이니 그냥 이런 환경에 적응하라고 조언했다. 이를테면 좀 더 남자처럼 보이게 입어라, 아예 총을 사라, 호신술을 배워라, 생활수준이 높은 동네로 이사를 가라…. 남성 폭력이 만연한 환경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에 적응하라고 나에게 강요했다.

은유:나는 가부장 사회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에게 부여되는 많은 역할을 수행하다 보니 페미니즘 공부가 절로 됐다(웃음). 당신에게 부여된 다양한 역할이 있는데, 일과 공부 시간을 어떻게 분배하나?

솔닛:
조카를 여럿 둔 고모로서 나 역시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다(웃음). 남편이 없고, 아이가 없다는 게 시간을 절약해주는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러나 활동가나 작가로서 공적인 삶이 요구하는 것들이 늘어나다 보니 사적으로 연구를 하거나 공부하는 데 시간적으로 방해를 받기도 한다. 다행히 이번 방한 일정을 마치면 히말라야에서 머물 예정이다. 그런 시간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은유:솔닛이 추구하는 인문학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의 인문학과 어떻게 다른가?

솔닛
:페미니즘의 근간이 되는 생각은 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많은 가정폭력이나 차별 같은 불의한 일이 분리되고 구별함으로써 감춰지는데, 나는 그것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내 작업을 해왔다. 역사학자는 이거, 인류학자는 이거, 하는 식으로 각각의 학문 분야를 분리해서 보는 시각은 거부한다. 특정 분야에 국한되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자 했다. 생태학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모든 것은 상호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의 위기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보수 이데올로기가 야기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빈곤의 문제는 사회나 경제 시스템과는 무관한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으로, 이 말대로라면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줄 필요가 없다. 고립주의적인 보수 이데올로기의 대립항으로 상호연결성, 의존성에 기반한 진보 진영의 사상이 인문학의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은유:한국에서는 논픽션이나 에세이를 낮잡아보는 경향이 있다. 사사롭게 여긴다고 할까.

솔닛
:미국에서도 논픽션이 비슷하게 폄하되는 측면이 있다. 시나 희곡, 소설은 고매한 문학인데 저널리즘은 쳐주지 않는 식으로. 그러나 지난 20여 년에 걸쳐 미국에서는 논픽션의 위상이 계속 올라간 측면이 있다.

은유:솔닛의 영향인가?(웃음)

솔닛
:전혀(웃음). 나는 사실 논픽션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는데 마치 유색인종을 지칭할 때 논화이트(non-white, 백인이 아닌 사람)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픽션을 기준으로 하는 분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전이나 지도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보면 그런 논픽션이 세계를 소유하고, 픽션은 그 안에 있는 섬 아닌가? 나는 논픽션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은유:사람들이 나에게 ‘언제 소설 쓰냐?’ ‘시는 안 쓰냐?’라고 묻는다.

솔닛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그렇게 묻는다. 그게 꼭 글쓰기가 오를 수 있는 정상인가? 되묻고 싶다.

은유:조지 오웰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라고 했다. 어떤 독자가 당신의 방한 행사를 다녀와서 이런 후기를 남겼더라. ‘나에게 리베카 솔닛은 조지 오웰이 온 정도의 존재다.’

솔닛
:글을 쓸 때 ‘오웰이라면 어떻게 썼을까’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너무 감사한 평가다.

은유:글쓰기 수업을 할 때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반비)을 꼭 넣는다. 에세이의 힘을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굉장히 공감하는데, 남성들은 난감해한다. 이 감수성의 차이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나?

솔닛
:여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성 위주의 교육,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백인 남성 위주의 교육을 받는다.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와 책을 접하게 되고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콘텐츠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래서 많은 경우 책을 쓸 때도 남성 독자에게도 꼭 공감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멀고도 가까운>을 쓸 때 남성 독자를 타깃으로 생각하거나 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건 논픽션에 대한 이야기와도 이어질 것 같은데,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적으로 과거에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나 성 소수자,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그렇다. 논픽션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겼던 체제나 현상을 깨뜨리는 증언을 담는 것이다.

은유:<멀고도 가까운>에서 가장 좋았던 건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었다. 독자를 말하는 주체로 끌어낸다.

솔닛
:그 부분이 내가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추구했던 바다. 내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와 연결하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다.


ⓒ민음사 제공
8월26일 민음사 주최로 열린 ‘페미데이’에 참석한 리베카 솔닛(마이크 든 이)이 ‘공적 공간을 걷는 여성의 역사’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은유:어머니가 딸에게 가하는 억압은 쉽게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책에 나온 당신과 어머니 사이의 에피소드를 통해 여성들이 자신과 어머니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아들은 곱셈이고, 딸은 나눗셈”이었던 경험 같은 것들이다.

솔닛:<멀고도 가까운>은 내가 쓴 책 중 가장 여성주의적인 책인데, 서평 등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많이 읽히지 않았다는 게 흥미롭다. 최근에 한국에서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고 들었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여성혐오를 페미니즘을 통해 극복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머니는 여성으로서 남성보다 더 열등한 지위, 제대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고통받았지만 또 그걸 나에게 물려준 측면이 있다. 그게 내 지난 50여 년의 삶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었는데, 이 책을 쓰면서 극복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어머니가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계와 어머니의 고통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보게 됐고, 어머니와의 긍정적인 경험들도 다시 되돌아보게 됐다.


은유:이번에 개정판이 나온 <걷기의 인문학>은 20년 전에 쓴 책이다. 새로 보낸 서문에 한국의 ‘촛불혁명’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솔닛
:걷기의 힘을 볼 수 있는 사례는 역사에 고스란하다. 근간에는 아랍의 봄이 그랬고, 한국의 촛불혁명이 그렇다. 공적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발휘할 수 있는 힘에 대한 증거다. 100만명이 물리적인 공간에 함께 모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걷기를 통해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확실성에는 분명 가치가 있다.

은유:촛불집회는 공적인 감각을 몸에 새기는 경험이었다. 당신은 낙관적인 것 같은데, 광장에서 진보적인 구호를 외치고 현실에서는 보수적이고 위계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들처럼 민주주의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괴리가 생기더라.  

솔닛
:광장에 참여했던 모든 분들이 평등을 경험했길 바란다. 이를 통해 위계질서를 거부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특히 가정의 영역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공적 영역에서 이룬 경험이 사적 경험으로 스며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은유:싸워야 한다는 건가?(웃음)

솔닛
:경험이 전염성을 갖기를 바라는 거다(웃음).

은유:정권교체라는 큰 과제 앞에서 젠더 이슈는 뒷전이 된다. 여성 대통령에 대한 여성혐오 발언이 나왔고, ‘해일 밀려오는데 조개 줍느냐’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러한 남성중심성 앞에서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솔닛
:미국에서 힐러리에 대해 사람들이 보여줬던 반응과 굉장히 유사하다. 물론 힐러리는 젠더와 무관한 이슈로 싫어할 만한 이유가 많이 있지만(웃음). 삼성의 이재용도 보자. 그 사람이 비리를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남성’이 부각되지는 않는다. 남성은 어떤 일을 저질렀을 때 모든 남성의 대표로 취급되지 않지만 여성 한 명의 잘못은 모든 여성의 잘못이 된다. 젠더를 기반으로 해서 여성 정치인에 대해 폄훼하고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트럼프는 가부장제의 모든 해악을 대표하는 존재로, 남성을 대표한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웃음).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는 줄리언 어산지를 보면서도 느끼지만, 사람들은 여성의 권리가 중요하긴 한데 다른 모든 것보다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지는 않는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 여성 이슈 중요하지. 근데 아직 너네 차례 아니니까 저 뒤에서 기다려.’ 이런 느낌이랄까? 가부장의 역사에 비하면 우리가 싸워온 시간은 아직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은유:말씀하신 것처럼 여성은 계속 사적 존재, 보조적 구실로 취급받아왔다. 그러다 보니 공적 자아에 대한 공포가 큰데 한국에서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많은 여성들이 공적 공간에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솔닛
:한국에 와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한국 여성들은 지난 몇 년간 아주 훌륭한 일들을 해왔다. 노력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변화가 더딘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거다. 여러분이 바꾸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오래, 깊은 뿌리를 가진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남성에게 가정과 일을 다 건사하고 있느냐고, 잘하고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일·가정 양립’은 당연히 아내 몫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남성에게는 그런 기대 자체를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런 이슈들을 계속 공론화하길 바란다. 절대 포기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싶다.



마광수, 공공의 적이 된 천재

9월5일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1989년 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1992년 발표한 <즐거운 사라>로 그는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공격받았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2017년 09월 14일 목요일 제522호

얼마 전 자전 <수인>을 펴낸 황석영 작가가 말했다. 한국의 작가는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연애며 사랑에 대해서도 마음껏 말하고 싶은데, 한국적 현실에 발목 잡혀 그러질 못했노라고 아쉬워했다. ‘역사’라는 ‘엄처시하’에 갇혀 있었다는 표현도 썼다.


마광수는 달랐다. 스물여덟 이른 나이에 대학교수가 된 이래 그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썼다. 당대의 작가들이 역사와 민중을 말할 때 그는 에로티시즘을 노래했다. 길고 새빨간 손톱을 가진 ‘사라’와 함께 한반도라는 유교적 감옥에서 탈출하는 생을 꿈꿨다. 성과 자유를 향한 그의 열망은 동시대 작가들이 다른 가치에 쏟는 그것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시사IN 윤무영

시대가 공명하지 않았다. 세상의 99%는 눈살을 찌푸리거나 노여워했다. 그 결과 제도가 그를 옭아맸다. ‘세계 최초로 음란물로 인해 구속된 작가’라는 불명예만 부각됐다. 대학교수직도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해직과 복직, 휴직을 반복하다가 지난해 여름 연세대에서 퇴직했다. 우울증과 외로움으로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이야기가 풍문으로 들렸다. 그리고 꼭 1년 만에 불귀의 객이 되어 이 땅을 떠났다.

다들 <즐거운 사라>를 이야기하지만, 작가 마광수가 우리 사회에 이름을 알린 건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에세이를 통해서였다. 이 책에서 마광수는 ‘행복은 오직 관능적 쾌감에서 온다’라며 ‘나는 사랑이 헤프고, 애무가 헤프고, 화장이 헤프고, 섹시한 옷차림이 헤픈 여자가 더 좋다’라고 말했다. 그는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을 일컬어 ‘뻔뻔스러운 독재자’나 ‘속물주의적 애국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신드롬 그 자체였다. 책의 상당 부분은 마조히즘, 리비도, 나르시시즘 등에 대한 문화 비평이었지만 세간의 평가는 달랐다. 지나친 쾌락주의로 우리 사회를 성적 향락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여성계 역시 마광수 교수가 여성을 성적 도구로 바라본다고 비판했다. 결국 1989년 2학기 마광수 교수의 강좌는 모두 폐지되고 만다.

2010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개정판에서 마광수 교수는 “이 책은 나의 인생길을 아주 복잡한 쪽으로 바꿔놓았다. 실력 있다는 평판을 받으며 상위권 대학의 교수로 살고 있던 나를 대다수 지배 엘리트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차가운 감자’ 취급을 받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3년 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사건이 벌어진다. 1992년 10월29일 마 교수는 강의 도중 검찰 수사관에게 연행된다. 그해 출간된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이라는 이유였다. 출판사 대표(장석주 시인)도 함께 구속됐다. 1심 재판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고, 1995년 대법원은 원심을 확정했다.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검찰은 주인공이 질 속에 땅콩을 집어넣어 성적 쾌감을 얻는 장면 등 총 17부분을 음란물의 사례로 적시했지만, 당시에도 법적 공방은 치열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시 마광수 교수를 둘러싼 시대의 광기다.

당시 담당 검사가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었고, 수사를 지휘했던 검사는 심재륜 전 고검장이었다. 심 전 고검장은 1997년 한보 사건 때 김현철씨를 구속해 ‘국민 검사’ 별명을 얻기도 했다. 심 전 고검장은 마광수 교수의 정년퇴임을 앞둔 지난해 6월 <주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마광수 선생은 할 말 없을 겁니다. 그 소설이 도덕적으로도 나쁜 게 교수와 불륜을 벌이는 건 물론이고 엄한 아버지를 성적 대상으로 보고 있어요. 김진태 검사도 처음엔 ‘자기는 문학도로서 수사할 수 없다’고 했어요. 책을 한번 읽어보더니 ‘맡겠다’고 했어요. 발행인까지 구속했잖아요”라며 25년 전 검찰 수사에 별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법정에서 마광수 교수를 옹호했던 민용태 전 고려대 교수는 학교에 시말서를 제출해야 했다. 고려대 교수가 연세대 교수를 도와줘서 되겠느냐는 비난까지 터져 나왔다. 

그는 진보와 보수로부터 동시에 공격당했다. 한국 문단에서 그만큼 ‘시대와의 불화’를 견뎌낸 이도 없을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마광수의 작품에 대해 “구역질을 동반한다”라고 힐난했고, 안경환 서울대 교수는 <즐거운 사라>를 일컬어 “헌법이 보호할 예술적 가치가 결여된, 이를테면 법적 폐기물이다”라고 밝혔다. 안경환 교수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올랐다가 과거 저서의 여성 비하 논란 등으로 사퇴했다.

이러다 보니 보수는 물론 진보를 향한 마광수 교수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그는 백낙청 교수나 고은 시인을 향해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어서 문단정치, 문단권력이 나온다. 후배들이야 출세하려면 이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라고 하거나, 김애란 소설가에 대해서는 “왜 인기가 있나 봤더니 역시 소외계층만 다뤄. 넓은 의미의 민중문학이라서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평했다. 각종 시국선언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그가 시국선언에 참여한 것은 2008년 촛불집회와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딱 두 번이다.

완고하게 ‘육체만이 진실이다’ 주장 되풀이

‘홍역’을 치르고 난 뒤 그는 더욱 완고해져갔다. 형이상학과 정신세계에 몸서리를 쳤다. 오직 ‘육체만이 진실이다’라는 유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지식인들이 명예욕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명예욕은 단지 ‘사회규범이 성욕을 제약하는 데 따른 박탈감’을 보상받기 위한 ‘변칙적 오르가슴 확보 수단’에 불과하다”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자칫 여성혐오로 읽히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가령 1997년 펴낸 <성애론>에서 마 교수는 “성은 이제 인권의 문제요, 문화적 민주화의 문제다”라며 공론화를 제안하지만, 같은 책에서 이런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기형적인 남녀평등운동 바람이 불어, 섹스 행위에 있어서도 여자가 주는 쪽에 서기보다 ‘뻔뻔하게 받는 쪽’에만 서게 됐다. 그러다 보니 요즘 남자들은 아주 죽을 지경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잘난 ‘섹스’ 하나 제공받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늘같이 마누라님을 떠받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는 마광수에게 죄가 있다면 ‘시대를 앞서간 죄’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형벌은 가혹했다. 옥고를 치른 이후 그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빠져 완성도 높은 작품 창작에 몰입하기 어려웠다. 마광수 교수 사후 그의 작품세계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공허하다. 가장 큰 불행은 그가 죽기 전까지 내놓은 수많은 작품(그는 올 초까지 개정판을 포함해 무려 90여 권에 이르는 시집, 소설, 에세이집 등을 펴냈다)을 어떤 잣대로 평가해야 할지 난망하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 사회가 그를 한반도라는 감옥에 영원히 가둬버린 건지도 모른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더 필요한 이유

이민경 (작가)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9월 15일 금요일 제521호

최근 한 초등학교 교사가 온라인상에서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도를 넘은 비방과 공격에 시달렸다. 페미니스트 교사를 학교 밖으로 내보내라는 요구도 거세다. 교사란 무릇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주장은 정치적이다. 사회를 함께 만들어 나갈 구성원을 교육하는 기관으로서 학교 역시 언제나 그러했다. 정치적이지 말라는 목소리야말로 가장 정치적이다. ‘열렬히 행동함’만이 정치적인 게 아니다. 비정치성을 강조하는 태도가 결국 무엇이었는지,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경험했다.

정치적이지 않은 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이지 않을 것을 강조하는 대신에 무엇을 가르치도록 결정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한다. 사회 구성원이 될 학생들에게 무엇을 전수할 것인지, 어떤 가치를 함양하게 할 것인지,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선택해야 한다.

더 배우고 더 자유로워지라고 응원하던 그들

ⓒ정켈 그림

나는 학교에서 식민지였던 역사를 배우고 민주주의를 배우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이들의 이름을 배웠다. 학교가 아니었다면 배울 수 없었던 가치였다. 내게 학교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공간이었던 동시에 폭력이 지배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때리고, 만지고, 성적인 농담을 건네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있었다. 내가 졸업한 지 벌써 한참이 지났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한 폭력과 혐오가 지배하고 있다. 며칠 사이의 일만 살펴봐도 그렇다. 한 학교에서는 몇백명을 추행했고 또 다른 학교에서는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 언어와 신체와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한 성폭력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학교는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폭력에 맞서는 일은 정말로 시급한 과제다. 

페미니스트 교사는 지금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폭력과 억압의 문화를 강요하는 선생님도 만났지만 그로부터 지켜준 선생님도 드물게 만났다. 여자라서 못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즐겁게 배우고, 부당한 일에 목소리 높이라고 북돋아주는 그들 덕에 학교를 답답하고 폭력적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괜찮은 면도 있는 곳이라고 추억할 수 있었다.

여학생인 내게 정해진 성 역할을 따르라고 하지 않고, 더 먼 곳으로 가라 하고 더 배우고 더 자유로워지라고 말하던 이들은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돌아보면 모두 페미니스트 교사였다. 학교는 그들과 같은 존재가 더 많이 필요했다. 그런 사람들을 학교에서 내보내라니. 그들을 없앤 학교에는 과연 무엇이 남는가. 그 긴 교육과정 동안 누가 우리를 더 나은 존재라고 여길 수 있게 해줄 것인가. 누가 우리에게 스스로 더 나아질 기회를 줄 것인가. 요즘 들어 날로 거세지는 혐오와 폭력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오직 그들에게만 있다. 학교를 지키기 위해 용감히 나선 이들을 지켜줘야 한다. 교육부와 정부는 침묵을 멈춰야 한다.

페미니즘은 진작 정규 교육과정에 도입되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학교는 안전하고 자유롭기만 한 공간일 수 있었다. 후회는 나의 학창시절을 회고할 때로 끝나야만 한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늦은 감은 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 교사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등장이 또 다른 이들의 등장을 부르고 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학교라는 공간에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기로 결정한 이들의 용기를 지지하고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