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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위기로 몬 박근혜 통치 4년 - 어둠의 2016년, 촛불로 밝힐 2017년

일취월장7 2016. 12. 22. 13:04


한국 사회 위기로 몬 박근혜 통치 4년


입력 2016.12.21 10:47 댓글 115

 


ㆍ무능, 공작과 증오정치,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등… 대규모 참사와 정경유착 불렀다

4년 전인 2012년 연말에 때아닌 ‘힐링’ 바람이 불었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멘탈이 붕괴’돼버린 시민들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잠시나마 도피처가 필요했다. 때맞춰 개봉한 영화 <레미제라블>이 힐링 영화로 꼽히며 흥행하고, 인기가 저물어가던 ‘힐링 서적’들이 그 수명을 연장했다.

4년 후인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하면서 박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됐다. 당시 좌절을 맛본 시민들은 4년 만의 힐링을 맛볼 법도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박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부터 4년 동안 추진해온 정책들의 결과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과감하게 밀어붙였지만 대규모 참사와 정경유착 등 부작용만 더 크게 낳았던 정책 실패는 박 대통령 특유의 공작·증오정치, 그리고 그 배후에 있었던 비선실세의 국정농단과 맞물려 한국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상황 보고를 듣고 있다. / 청와대 제공

무능한 정부

“학생들은 구명조끼를 다 입었다고 하던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 16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던진 질문은 지난 4년간 대통령과 정권이 보여준 무능의 모든 면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한마디였다. 사고가 일어난 지 7시간 뒤에서야 나타나 사고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관계자를 질책하는 모습을 보며 국민들은 대통령을 질책했다. 세월호 참사는 사고 발생 후 구조를 담당한 당국의 직무유기와 무능력으로 재난대응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이윤에만 급급한 기업의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피해를 극대화한 재앙이었다.

구조요청을 받고 출동한 해경은 선내에 진입해 구조를 진행하거나 최소한의 퇴선방송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결과 304명이 사망하고 9명은 아직도 시신이 수습되지 않아 실종상태로 남은 초대형 참사로 기록에 남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으로 해양경찰을 해체한 뒤 국민안전처를 신설한다는 대책을 내놓았을 뿐이다. 대통령 자신이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고 나서면서 관련 책임자들의 처벌과 책임규명도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시간이 지나 책임여론이 잦아든 그해 9월이 되자 도리어 “외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세월호 특별법 제정도 가로막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1년 후 정권의 무능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드러났다. 2015년 5월 20일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최초 감염자가 보고된 이래 189명이 감염돼 그 중 38명이 사망하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것이다. 2012년 세계에서 최초로 메르스가 보고된 이후 중동지역을 제외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감염환자가 모두 27명밖에 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보건당국의 총체적 무능이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인재를 발생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 대통령은 메르스 사태에서도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중 당시 확진된 환자의 수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태 수습을 지휘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였다. 대신 박 대통령은 국립중앙의료원을 방문해 ‘살려야 한다’는 문구가 적힌 종이를 벽에 붙이고 의료진과 통화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출했다.

무능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고 수습에서만은 아니었다. 취임 직후부터 꾸준히 거론된 인사문제 역시 편향적인 ‘코드 인사’라는 논란을 부르며 임기 후반까지 지속됐다. 당선 당시 박 대통령이 공언한 ‘국민대통합’이라는 슬로건에 맞춰 탕평인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나온 바 있지만 효력은 없었다. 먼저 취임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대통령이 임명한 장·차관급 인사 중 7명이 부동산 투기와 탈세, 병역기피 등의 문제로 줄줄이 낙마했고, 윤창중 당시 청와대 대변인도 해외순방 중 성추행 사건으로 잡음을 일으켰다. 박근혜 정부에서 가장 오르기 힘든 자리 중 하나로 꼽힌 국무총리 자리만 보면 김용준·안대희·문창극 후보가 심사과정에서 과거 부적절한 처신 등으로 낙마했다. 본의 아니게 총리직에 남았던 정홍원 전 총리는 이후 이완구 전 총리에게 바통을 넘겼지만 이 전 총리 역시 성완종 리스트와 엮여 정치자금 수수의혹으로 70일 만에 사퇴했다.

장관들과 청와대 참모 역시 박 대통령의 코드 인사가 실패작이었음을 잘 보여줬다.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가 논문 표절과 연구비 갈취의혹 등으로 낙마한 데 이어 간신히 인사청문회를 통과해 장관 자리에 오르더라도 역시 무능이 드러나 사임한 예가 적지 않았다. 여수 원유유출 사건 이후 경질된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나 메르스 대처 실패로 물러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인사는 웬만해선 쉽게 물러나는 일이 없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서 유신헌법의 초안을 만든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비롯해, 과거 한나라당의 불법정치자금 사건인 ‘차떼기’ 사건에 연루됐던 이병기 전 국정원장은 이후 비서실장까지 맡았다.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도 ‘초이노믹스’ 정책으로 논란을 불렀지만 총선 전까지 자리를 지켰다.

배신과 공작과 증오의 정치

박 대통령의 임기는 대선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이 개입한 의혹과 함께 시작했다. 국정원을 비롯해 국군 사이버사령부까지 댓글부대를 운용하며 조직적으로 대선에 개입한 정황이 임기 중 속속 밝혀졌지만 박 대통령은 “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은 적이 없다”고 대응한 이래 해당 문제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국정원 댓글공작과의 관련성을 부인하던 박 대통령은 2013년 8월에 접어들면서 역습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은 당시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 혐의가 있다며 수사에 나섰다. 이른바 ‘종북세력’을 공공의 적으로 돌려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려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국정원 대선개입 사태의 진상이 더욱 밝혀지면서 국군 사이버사의 대선 개입까지 드러났고, 이미 그해 5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정권 규탄 시국선언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는 당시만 해도 남아 있던 ‘콘크리트 지지층’을 믿고 1년이 소요된 역습의 시동을 걸었다. 이해 11월 5일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해산을 청구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을 위헌정당으로 결정해 해산시킨 것은 이듬해인 2014년 12월 19일이었다. 대선을 치른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대선 TV토론에서 “박근혜 떨어뜨리려고 나왔다”고 공공연히 밝힌 이정희 전 대표를 비롯해 통합진보당 세력에게 붙어 있던 ‘종북’이라는 꼬리표를 정부는 잘 이용했다. 박 대통령이 내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는 정당을 해산할 수도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진 것이다. 눈엣가시 같던 진보세력을 향한 공세는 이전부터도 쭉 이어졌다. 고용노동부는 2013년 10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해직교사를 조합원으로 뒀다는 이유 때문에 법적인 노조 지위를 박탈한다며 전교조에 법외 노조 통보를 했다. 2013년 12월부터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며 파업을 벌인 철도노조가 2014년 1월 파업을 접고 직장에 복귀한 이후에도 반격이 이뤄졌다. 그해 2월 198명에 달하는 철도노조 간부진을 연행하는 등 철도노조에 대한 본보기식 탄압이 이어진 것이다.

노동계와 진보진영 등 정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일종의 ‘비국민’으로 분류하고 국민 내부의 분열을 통해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는 공영방송 장악과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대표적인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뤄졌다. ‘공영방송 정상화’는 박 대통령이 임기 초 약속했지만 전면 뒤집힌 공약 가운데 하나다. 대선 후보 시절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방송의 공공성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한 박 대통령은 취임 후인 2013년 10월에도 “방송 장악은 그것을 할 의도도 없고 법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말과 행동은 달랐다. 청와대는 KBS와 MBC의 이사들을 통제하는 데 열을 올렸고, 2014년 KBS 사장 선거 직후에는 이사들의 반란표로 야권 추천 인사가 사장에 당선됐다는 판단으로 뉴라이트 성향이라고 비판받던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를 KBS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MBC의 인사를 좌우하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 역시 2015년 출범한 10기 이사회부터 이전보다 훨씬 보수성향이 강한 인사들로 채워졌다. MBC에서는 인사권 활용과 편성·보도 개입 등의 방식으로 저항을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2012년 파업 이후 사측에 비판적이었던 기자와 PD 등이 한직으로 밀려나는 대신 정권의 코드에 맞는 인물들로 대신 자리를 채웠다. KBS에서도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당시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이) 하필 오늘 KBS를 봤다”며 해경 비판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한 사건이 파문을 일으킬 정도로 노골적인 보도 개입이 뒤따랐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역시 정권이 일방적으로 선택한 시각이 교과서에 실리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지난해 10월 22일 여야 대표를 만나 “(역사교과서)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는 말로 운을 띄운 박 대통령은 11월 10일 국무위원회의에서는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고,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남겼다. 그해 10월 교육부가 역사교과서 전체를 국정화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대통령이 나서서 정치적인 제스처까지 취하며 독려한 것이다.

이 문제에 앞서 2013년 보수세력의 시각이 강하게 반영된 교학사 교과서의 채택을 두고 진보와 보수 간의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당시 새누리당은 교학사 교과서를 적극 지지했으나, 학계와 교육현장에서 사실상 존재감이 전무할 정도로 외면받자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정책의 방향이 바뀐 셈이다. 2005년에 “어떤 경우든지 역사에 관해서 정권이 재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다루겠다는 것은 정부가 정권의 입맛에 맞게 하겠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고 말했던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미래 자신의 정책을 전면 반박하는 모습이 확인된 것이다.

헛발질 외교

박근혜 정부는 외교력도 신통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외순방은 잦았지만 정상들이 모이는 기념사진 촬영에서도 빠지고, 드레스코드 역시 외교 관례를 무시한 경우까지 발생해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큰 비판을 받는 부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반대에도 정부가 나서서 한 일방적인 합의였다. 1965년 한·일협정이 졸속적으로 타결된 데 이어 50년이 지난 2015년에도 이전의 궤를 벗어나지 못한 오류를 반복한 것이다. 특히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은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협상해 타결한 것이 되돌릴 수 없이 최종 종결되었다고 선포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이제 남아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죄의 길이 열릴 방도를 정부가 나서서 차단해 버린 것이다.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생활비 지원까지 끊는가 하면, 위안부 문제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을 하기로 한 연구자의 참석을 막거나, 외교통상부와 여성가족부가 함께 추진해 온 위안부 백서 편찬사업도 중단시켜 사장될 위기를 만들었다. 비판이 빗발치는 가운데 박근혜 정부는 합의 이행을 강조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 사실상 외교상의 업적이 부족한 데다, 사드(THAAD) 배치로 대중관계에 균열을 가져온 박 대통령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나마 남은 마지막 치적으로 위안부 문제 합의를 홍보에 이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본과의 외교적 문제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박 대통령이 비선실세 국정농단 파문으로 정치력을 급격히 잃어가던 올해 10월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국방부가 느닷없이 발표한 사실이 논란을 더했다. 협정의 내용에 대해 국내의 논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방적인 통보 식의 일처리가 이어지며 급속도로 협상은 진행됐다. 협정이 발효돼 직접적인 군사정보 교환이 시작되면 국내의 군사기밀이 간접적으로 일본에 넘어갈 수 있음에도 북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명목만을 내세워 국방부가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주한미군이 배치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상 정부가 앞장서서 앞마당을 내줬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사드 배치 문제 역시 동맹국을 위시해 퍼주기 외교를 했다고 평가받는 대표적 사안이다. 박근혜 정부가 집권 초부터 추진해 온 정책 중 한류 콘텐츠를 수출한다는 부분은 중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바탕으로 진행됐다. 박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는 등의 행보는 대중관계가 우호적으로 진행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간의 기조와 반대되는 사드 배치로 대중외교에서 마찰이 극심해지고 말았다. 중국 정부가 점점 한류에 대한 압박을 강하게 하기 시작하는 한편, 한국산 콘텐츠 송신을 막는 정책도 나타나고 있다.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박근혜 정부의 실정이 이어진 배경에 최순실씨를 비롯한 국정농단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은 그간의 실정이 일어난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미르·K스포츠재단이 기업들로부터 거액의 모금을 한 이면에 최씨가 있었다는 의혹은 점차 모습을 드러내면서 국정 전반에 개입해 나라를 망가뜨렸다는 결론으로 향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유독 유명하지 않은 인물을 발굴한 인사방식이 독특하게 잦았던 점과, 청와대 내부를 비롯해 정부와 여당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책 방향이 제시된 지점마다 비선실세의 입김이 미쳤던 것이다. 기업의 돈을 갈취한 재단 설립이 대통령 지시였다는 증언도 나오면서 평창동계올림픽과 한류 콘텐츠 사업 등에 이르기까지 박 대통령과 최씨 일가가 이권을 챙긴 정황도 함께 드러났다.

최씨가 틀을 짜고 박 대통령이 거들었던 역점 사업인 ‘문화융성’ 사업의 경우 총 1796억원대의 예산을 제안하는 데서 시작해 시간이 갈수록 규모도 커져 7000억원대의 대형사업으로 불어났다. 여기에 필요한 돈은 예산 외에도 기업들을 겁박함으로써 가능했다. 차은택씨가 포스코 계열의 광고회사를 인수하는 데 실패하자 지분을 넘기지 않으면 세무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국정농단 세력이 정부와 기업들의 문화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인사 청탁 등에까지 전횡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기업들은 빼앗긴 돈의 반대급부로 일정한 이득을 챙겼다. 이른바 ‘노동개혁’으로 포장해 밀어붙인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길들이기 정책이 정경유착으로 인한 결과임이 드러나고 있다.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청년고용 창출을 늘린다는 취지로 실제로는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연장하고, 파견근로를 확대하는 정책을 2015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이를 위한 여론 형성 과정에서 특정 기업과 특정 성향의 지지자들을 위주로 설문을 실시해 이른바 ‘노동개혁’ 찬성 분위기까지 조성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난 뒤 분위기는 반전되고 있다. 재벌 총수에 대한 사면·복권 또는 기업의 현안 해결 등의 대가와 함께 출연을 받은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이 망친 나라 어떻게 뜯어고칠까?

[한반도 브리핑] 어둠의 2016년, 촛불로 밝힐 2017년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2016.12.21 14:32:03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일기에서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고 했다. 지도자가 '역사와 국민을 믿고' 공의를 추구하는 정치를 했을 때, 우리는 1년 반 만에 IMF 금융 위기를 극복했고, 우리나라 역사상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인권과 복지를 확장했으며,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평화와 통일을 꿈꿀 수 있었고, 우리 후손들을 위해 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하면서 행복했었다.

국민의 고통과 자괴감, 장탄식 속에서 저무는 2016년의 끝자락에서 지금 우리의 삶과 역사는 어떠한가? 새해에 어떤 꿈과 희망을 갖고 있는가? 이미 '금수저 대 흙수저'로 나눠져 부가 대물림되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어 일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후손도 낳지 못하는 젊은이들, 'IMF 때보다도 더 손님이 없는' 경제 상황에서 빚이 소득보다 5~6배 속도로 늘어남으로써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들, 일자리도 없지만, 땀 흘려 일해 봤자 그 혜택이 정경유착으로 결탁한 대기업들과 정치인들만 살찌우는 나라. 날마다 '우리'의 삶은 피폐해지고, '그들'은 더욱더 윤택해지기만 하는 나라.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생명과 재산, 행복을 '그들'에게 맡길 수 없는 나라.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아온 동서고금의 역사와 축적된 인류의 지혜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이것이 나라냐고. 이러다가는 대한민국이 완전히 망할 수도 있다고.

매서워져 가는 추운 날씨 속에서도 주말이면 광화문 광장과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살려내기 위해 촛불로 어둠을 밝히면서 묻고 있다.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무슨 희망을 주는가. 무엇이 잘못됐는가.

그동안 대선에서 대통령과 정부를 바꿔봤자, 그것이 우리 삶의 향상과는 무슨 관계가 있었는가. 과연 민주(民主)주의는 민(民)이 주(主)가 되는 정치가 아니라 위정자들이 "그래 민주(民主)주의 좋지. 너희 백성들은 민(民)해라, 우리가 주(主) 할 테니!"라는 정치에 불과하단 말인가.  

광장너머 저 담 높은 구중궁궐에는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의 신뢰를 배신한 대통령이 살고 있다. 청와대가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일자별 대통령의 일정을 보면, 세월호 사건 전후 두 달간, 주말인 토·일요일을 제외한 45일 중에 '공식일정 없음'이 17일이나 되고, 일정이 있는 날도 오전 또는 오후에 한 건만 있는 날이 대부분이다.  

청와대는 '대통령은 출퇴근의 개념이 아닌 모든 시간이 근무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청와대 어디서든 보고를 받고 지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45일 중에서 무려 17일이나 대통령이 하루 종일 집무실에 한번 나와 보지도 않고 당신이 사는 집, 즉 관저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 17일이 모두 정상적인 근무일이라는 주장이다.

시민들은 묻는다. 그것이 어떻게 근무일이냐고. 침몰하는 나라를 앞에 두고도 그동안 청와대 정무수석도, 경제부총리도, 국정원장도, 장관들도 대통령에게 제대로 대면보고도 하지 못하면서 지내왔다는데, 그것이 무슨 나라냐고. 

그런 대통령 곁에서 아부와 순종으로 빌붙어서 호가호위하면서 직권을 남용하고 사익을 위해 국민의 혈세를 빼먹어온 정상배, 모리배들이 들끓어온 나라. 촛불 들고 광장에 나와 어둠을 밝히는 시민들을 개·돼지 취급하면서 부끄러움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수구세력의 민낯. 아직도 3년 반이나 남은 철벽 임기를 무기삼아 호시탐탐 반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친박 국회의원들. 심지어 그들은 박근혜-최순실게이트를 파헤치는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 '그들'의 주군을 구하기 위해 '위증교사'를 감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인데도 그동안 자신들이 속고 살아왔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은 총동원령을 받들어 '그들'의 대통령을 보호하겠다고 길거리에 나와 촛불에 맞불을 놓고 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2016년의 차갑고 짙은 어두움을 걷어내고 새해에 어떤 꿈과 희망을 갖고 있는가. 어떤 정치학자는 우리나라의 시민혁명 단계를 설명하면서, 1987년 6월항쟁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획득한 제1단계 시민혁명으로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할만하고, 2008년 광우병 투쟁은 경제적 자유를 주장한 것으로서 제2단계 시민혁명에 해당하는데, 이는 1848년 프랑스 6월항쟁에 비견할만하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2016년 촛불 혁명은 제3단계 시민혁명으로서 생활 세계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는 바, 이는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에 견줄 수 있다고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세계사적으로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따라서 모두가 흔들리지 말고 힘을 합해 하나하나 극복해 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한국은 선거로 정부를 바꾸는 절차적(형식적, 최소주의적) 민주주의를 획득했다(1987년 체제). 그것이 어느 정도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적 자유를 맛보게 하고 또 지도자와 정부의 교체를 가능케 했지만, 1987년 체제는 기본적으로 경제·사회적 기본권을 강화하여 국민의 생활의 질을 높이는 데는 실패했다.  


구조적으로 흙수저를 벗어날 수 없는 대다수의 서민들이 자신들의 삶과는 큰 관계가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좌절과 회의가 깊어짐으로써 민주공화정이 위기에 빠졌다. 결국 이번에 국민들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자신들의 생활의 질을 보장해줄 경제·사회적 요구를 담아내는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북유럽 정치, 독일의 사민당의 공약과 같은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적 요구라고 할 것이다.  

▲ 지난 3일 박근혜 퇴진 촉구 집회가 열린 광화문 광장. 이날 전국적으로 232만 명의 국민들이 집회에 참가했다. ⓒ프레시안(최형락)


나라가 이렇게 무너졌는데, 통일, 외교, 안보인들 성할 수 있겠는가.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 등 주요 정책 연설은 최순실이 고쳐 쓴 원고를 읽은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남북 간 신뢰 회복을 강조하며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1년도 채 못돼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버리고 북한을 붕괴·흡수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통일 대박과 통일 준비'를 내세우면서 남북관계와 한반도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켰다. 개성공단을 폐쇄한 것도 최순실이 관여했다는 정황이 있다. 이 모든 국격의 훼손은 <뉴욕타임스>의 만평이 상징하듯이, 대한민국 '공공외교'를 통째로 무너뜨렸다.  

 
박근혜 정부는 미국 정부와 함께 남한 땅 성주군에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결정했고, 양국은 사드 배치를 원래 계획보다 앞당겨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우리의 군사정보 주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12월에는 일본 정부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하고,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10억 엔을 제공했고, 한국정부는 이 돈으로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이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평화·화해세력이 차기 대선에서 승리하여 정부를 구성하게 되면, 차기 정부는 대내적으로 국민의 경제·사회적 기본권을 강화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권력구조를 개편하는 일에 나서게 될 것이다. 동시에 개성공단 재개뿐만 아니라 폭넓게 남북 경제협력·교류협력을 되살리고, 양자 및 다자 대화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 수립에 큰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드배치 결정,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모두 재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것들은 내년 대선에서 민주·평화·화해 세력의 후보자들에 의해 선거공약이 될 것이며, 만일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 합의들은 어느 부분을 수정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폐기되어야 할 것인지 결정하게 될 것이다. 기존 합의에 대한 수정과 폐기는 대외 정책에서 일관성을 훼손한다는 비난도 받겠지만, 선거가 핵심 제도로 되어있는 민주 정치에서 선거에서 승리한 '새로운 지도자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해 달라'는 것이 유권자들의 기본적 요구이다.

그러한 새로운 정책 변화를 통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철저하게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이 가능할 것이며, 그것은 또한 박 대통령을 탄핵한 국민들이 통일·외교·안보 부문에서 꿈꾸는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외치를 업그레이드'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2016 올해의 인물] ‘박근혜-최순실’ 대한민국을 절망의 늪에 빠뜨린 40년 지기

국정 농단, 국민에 분노와 박탈감 안겨 촛불민심, 대한민국 희망 횃불 되살려

박혁진 기자 ㅣ phj@sisapress.com | 승인 2016.12.21(수) 12:48:06 | 1418호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는 12월 둘째 주가 되자 시사저널 편집국에는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설문 문항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희망과 기쁨을 전해 준 인물보다는 절망과 슬픔을 안겨준 인물이 우선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016년의 ‘슬픈 예감’은 더욱 정확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설문 문항에 답했는데, 모두들 같은 인물을 적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두 40년 지기는 오랜 기간 ‘우정’을 유지해 왔다. 우정의 깊이만큼이나 그들은 깊고 광범위하게 한국 사회 많은 영역을 쥐락펴락했다. 정부 부처, 대기업, 대학, 스포츠계까지 모두 두 사람의 것이었다. 그들이 웃을 때 국민은 울었다. 

2012년 시사저널은 올해의 인물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선정한 바 있다. 당시 박 당선인을 올해의 인물로 꼽은 것은 대선이 치러진 직후 그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을 반영한 결과였다. 박 당선인은 선거 기간 동안 경제민주화, 복지정책 강화, 지역갈등 해소, 국민대통합 등을 공약으로 내걸며 지지를 받았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도 상대 후보였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에게 손을 건네는 등 잠시나마 화합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4년은 대통령의 약속이 모두 거짓말이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에 불과했다.

4년이 지난 2016년. 박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올해의 인물에 선정됐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그의 40년 지기 최순실씨도 함께 선정됐다. 두 사람은 시사저널 편집국에서 선정한 올해 최악의 인물 분야에서도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국민이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지난 4년, 두 사람은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며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다.

 

최씨는 청와대를 제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청와대 조리사에게 본인이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는가 하면, 혈세로 월급을 받는 청와대 행정관을 자신의 수족 부리듯 했다. 대통령 연설문을 수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각종 국정 현안에 개입했다. 박 대통령의 모든 것이 최씨에 의해 결정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일각에선 “대한민국에는 대통령이 두 명이었다. 박근혜 대통령(大統領)과 최순실 대통령(代統領·대통령을 대신하는 사람)이다”란 웃지 못할 말까지 나돌았다. 최씨는 박 대통령이 취임 후 착용했던 의상과 가방을 직접 챙겼고, 각종 의료행위 및 미용 관련 시술에도 관여했다는 정황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뉴스1

© 시사저널 임준선·뉴스1


국정 농단은 ‘박근혜-최순실’ 합작

 

최씨는 대통령을 등에 업고 권력을 사유화해 이를 통해 사익을 추구했다. 딸 정유라의 고등학교 및 대학 입학 과정에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딸의 승마 교육을 위해 대기업으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은 것이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최씨의 전횡은 철저하게 박 대통령의 비호 아래 이뤄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소속 대기업들이 최씨가 주도한 재단에 800억이란 거금을 선뜻 내놓은 것이 그 방증이다. 최씨 뒤에 대통령이 있지 않았다면 기업들이 돈을 내놓을 리 없었다는 것이 대기업 사정에 밝은 이들의 공통 견해다. 우연의 일치일지 몰라도 최씨의 민원을 들어주지 않거나 등을 진 기업은 대부분 불이익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 고위공직자들은 그저 최씨의 민원창구에 불과했다. 김종 전 문체부 차관이나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은 최씨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상관 모시듯 했다. 반면 최씨 눈 밖에 난 고위공직자들은 옷을 벗어야 했다. 모두 최씨가 대통령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이번 사태가 처음 불거졌을 때 국민들은 물었다. ‘도대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기에 이처럼 헌정 사상 유례없는 국정 농단 사건이 벌어진 것일까.’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을 다 알 순 없지만 박 대통령의 담화 그리고 언론보도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11월4일 1차 대국민담화에서 최씨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를 챙겨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순실씨로부터 도움을 받고 왕래하게 됐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줬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왔던 최씨가 본인에게 특별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연결고리가 두 사람에게 있었다.

 

 

朴-崔, 1979년 ‘새마음제전’에서 처음 만나

 

두 사람의 만남은 정확히 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은 1979년 6월10일 한양대에서 열린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주재 ‘새마음제전’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박 대통령은 새마음봉사단 총재였고, 최씨는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장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지만,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크다. 최씨의 부친이었던 고(故) 최태민 목사가 박 대통령과 이미 그 전부터 돈독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비극의 시작을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아닌 박 대통령과 최 목사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박 대통령과 최 목사가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3월쯤으로 알려졌다.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최 목사는 영애였던 박 대통령에게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최태민)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편지를 계기로 박 대통령이 최 목사를 청와대로 불렀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함께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박 대통령의 사촌형부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11월3일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최태민하고 친해 가지고 자기 방에 들어가면 밖에 나오지도 않았다”며 “오죽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그 최태민이란 놈 조사 좀 해 봐. 뭐하는 놈인지’ 그랬을까”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10·26과 12·12 사태 이후 청와대를 떠났을 때부터 최씨는 늘 박 대통령 주변을 맴돌았다. 박 대통령이 19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최씨도 육영재단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는 이에 대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번째 딸 최순실이 박근혜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전횡을 일삼아 문제가 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줄곧 두 사람은 가깝게 지냈고, 급기야 박 대통령은 최씨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정윤회씨를 지근거리에 두기 시작했다. 정씨는 박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한 1998년에는 보좌관을, 이후엔 비서실장을 맡았다. 문고리 3인방으로 대표되는 보좌진도 직접 꾸린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기자와 만났던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이 정씨를 일컬어 ‘사수’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정씨와 그들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씨는 박근혜 정부 들어서 권력투쟁의 한 축으로 부상했다. 2014년 최씨와의 이혼, 세계일보의 비선 실세 문건유출 파문 등으로 권력 중심부에서 한발 물러서게 됐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계속된 국정 농단과 관련해 정씨의 역할론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은 악연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각자의 푸념을 보면, 박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후 측근에게 “최순실씨는 시녀 같았던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 하나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됐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최씨는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박 대통령의 험담을 자주 했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특히 최씨는 박 대통령에게 “아직도 자기가 공주인 줄 아나봐”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6월10일 한양대에서 열린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주재 ‘새마음제전’에 참가한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오른쪽)와 최순실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장 © 뉴스타파 화면캡처

1979년 6월10일 한양대에서 열린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주재 ‘새마음제전’에 참가한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오른쪽)와 최순실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장 © 뉴스타파 화면캡처


악연으로 끝나는 두 사람의 인연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아버지의 후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1998년부터 2012년까지 총 다섯 번의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쌓아왔다. 기성정치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런 이미지로 인해 지난 대선에서 젊은 사람들마저 보수 정당의 대선주자인 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 또한 역대 한국 대통령들의 고질적 병폐였던 친인척 관리에 많은 신경을 써왔다는 점에서 국민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아왔다.

 

국민들이 배신감을 더욱 크게 느끼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이 대선 때 내세운 공약들을 대부분 뒤집거나 수정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대표적으로 노인연금이 그랬고, 반값등록금이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친인척도 아닌 대통령 스스로가 ‘시녀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던 사람에 의해 국정이 놀아났으니 국민이 느끼는 배신감과 허탈함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2016년 겨울. 대한민국 국민은 1987년 6·10항쟁의 결과로 얻어낸 민주주의가 불과 30년 만에 단 두 사람에 의해 만신창이가 됐음을 목도했다. 그들로 인해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를 대한민국 국민은 비싼 수업료를 내고 깨달았다. 우리의 선택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2016년 세밑이다. 

 

 

‘올해의 인물’ 어떻게 선정했나

 

시사저널은 1989년 창간 이후부터 매년 12월 마지막 주 발행되는 송년호에 ‘올해의 인물’을 선정 발표해 왔다.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화제에 올랐던 인물(단체·사물·사건)들을 대상으로 그 인물이 우리 사회에 갖는 긍정적·부정적 영향력과 의미 등을 평가한다. 올해 역시 예년과 마찬가지로 본지 편집국 기자들이 전체 10개 부문별 후보를 추천하고, 추천된 후보들을 대상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독자 온라인 투표를 실시했다. 이를 통해 2~3명으로 압축된 최종 후보자를 놓고 편집국 내부 토론 과정을 거쳐 올해의 인물과 나머지 9개 각 부문별 인물을 선정했다.

 

 ‘올해의 인물’로는 국정 농단 사태 핵심 인물인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공동으로 선정됐다. 박 대통령과 최씨 중 한 명만 꼽은 답변까지 포함하면 다른 후보와의 표차는 압도적으로 벌어진다. 이 밖에 경제 인물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사회 인물에서 촛불집회 참가 시민들과 어버이연합이, 문화 인물에서 한강 작가와 차은택 전 창조경제추진단장이 경합을 벌였으며, 국제 인물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압도적 표차로 선정됐다. 최악의 인물로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사이좋게’ 1·2위에 올랐다. 

이명박근혜 10년, 추락하는 인권엔 날개가 없다

인권으로 무장한 대통령, 인권친화적인 정부가 아니고는 퇴행을 거듭한 한국의 인권 상황도, 추락한 인권위도 바로잡기 어렵다. 대선 주자의 인권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검증되어야 한다.

문경란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전 서울시 인권위원장)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2월 22일 목요일 제483호


‘역주행, 추락, 한심, 침묵, 무자격, 개탄, 식물, 좀비, 문외한, 눈치 보기, 무용론, 봉숭아 학당, 꼭두각시, 암흑기, 흑역사.’

최근 수년간 언론들이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를 평가하면서 쏟아낸 비판이다. 이보다 더 쓰리고 아픈 말들이 또 있을까. 정말 이러려고 인권위를 만들었나 자괴감이 들 뿐 아니라 참담함과 분노를 넘어 허탈하고 허망하다.

인권위는 권력에는 쓴소리를 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은 특별히 보살피라는 국민의 엄명과 열망 속에서 탄생한 국가기관이다. 지난 11월25일로 만 15주년이 되었다. 초기 6~7년간은 국제적인 모범 사례로 칭찬을 받았던 반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추락하는 인권위의 위상에는 날개가 없었다. 권력의 눈치 보기를 넘어 본분을 망각한 파행이 이어졌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협하는 인권유린에 대해서조차 민감한 사항은 철저히 외면했다.

역주행의 일차적 책임은 무자격 전직 인권위원장과 일부 인권위원에게 있다. 공적인 자리에서 흑인을 ‘깜둥이’라 말하는 등 스스로도 인권 문외한이라고 자인한 그 위원장은 무려 6년이나 버티면서 인권위를 고사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의 재임 기간 중 반인권적 결정이 줄을 이었고 주요 인권 현안은 방치됐으며 인권 감수성과 전문성이 높은 직원들은 쫓겨났다. 한 상임위원은 유엔에 제출하는 한국의 인권 상황 보고서에서 세월호 참사와 통합진보당 해산, 성 소수자 혐오세력 발호 등을 삭제했다. 그는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고 인권위원직을 헌신짝처럼 버리더니 현재는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활동 중이다. 아무래도 권력에 쓴소리하는 인권위원보다는 권력의 보호에 더 적임자였던 듯싶다.

이런 사례는 훨씬 많지만 중요한 것은 그 배경에 인권의 가치를 추락시키고 적극 방해한 이명박·박근혜 두 대통령이 있다는 점이다. 이 두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은 인권위를 보수 정권을 공격하는 좌파 이데올로기의 무기쯤으로 여기고 눈엣가시처럼 생각했거나, 아니면 무관심 또는 무지했다. 이명박 정권이 전자라면 박근혜 정권은 후자에 가까운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여하튼 두 대통령은 무자격 인권위원장과 인권위원을 임명함으로써 인권위를 무용지물로 만든 장본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를 되새겨본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헌법의 근본 가치를 담은 이 조항은 ‘국민은 존엄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의 주체이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자’임을 못 박고 있다.

국민은 행복하게 살 권리의 주체이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자다


새삼 이 조항을 한 자도 빠짐없이 적어보는 것은 도대체 두 대통령이 헌법의 이 엄중한 명령을 알고나 있었을까 싶어서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머리 손질부터 하는 대통령이 알았을 리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대통령이, 아니 사람으로서 이럴 수 있겠는가. ‘개·돼지’ 발언을 한 교육부 고위 공직자도 마찬가지다. 공무원이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시킬 인권의 옹호자여야 한다는 본인의 직분을 알았을 리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이게 나라냐”라고 탄식하며 절망해야 했던 밑바탕에는 인권에 대한 기본 인식조차 갖지 못한 두 대통령과 참모들이 있다.

광장에서 일렁이는 촛불은 대통령의 탄핵만 외치는 게 아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라고, “돈보다 사람이 우선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고 외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람이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할 최소한의 권리가 인권이다. 인권의 보장 및 향유는 인간다운 삶, 행복한 삶의 전제조건이다.

탄핵 후 정국을 준비하는 많은 대선 주자들이 있다. 이분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검증되어야 한다. 인권으로 무장한 대통령, 인권친화적인 정부가 아니고는 퇴행을 거듭한 한국의 인권 상황도, 추락한 인권위도 바로잡기 어렵다. 무엇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와 소수자들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을 또다시 만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12월1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인권선언의 날이다.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이 인류 보편의 규범이 이 땅 구석구석에,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도록 광장을 인권의 촛불로 가득 채우자. 인권은 저절로,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인권의 나무는 시민의 감시와 참여만큼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