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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박근혜의 '왕국'이 무너지다

일취월장7 2016. 12. 10. 10:10


박정희·박근혜의 '왕국'이 무너지다

[분석] 최순실, 1961년 시작된 '박정희·전경련 신화' 동반 몰락을 재촉하다
박세열 기자     
2016.12.09 17:09:52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은 한국 정치사의 기념비적 장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결론에 이르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절차가 있다. 헌재가 탄핵 소추 의결서를 인용하게 될지 아직 알수 없지만, 의회의 탄핵 가결 자체만으로 다양한 정치적 함의를 읽어낼 수 있다. 

특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구체제의 개혁, 즉 정치 개혁과, 사회 개혁의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反의회주의자 박근혜, 의회 단두대에 서다차기 대통령에 귀감 될 것

'선거의 여왕'도, 박근혜 대통령의 '공포 정치'도 탄핵안 가결을 막지 못했다. 당연하다.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을 다섯 차례나 지냈지만 의회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대중을 직접 상대해, 메시지와 이미지를 기획하는 데 능수능란했던 정치인이었다. 단순 비교는 어려우나, 히틀러가 의회를 통한 정치가 아니라 대중을 직접 움직이는 방식의 정치를 선호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 파동'에서 '정치 기술자'인 박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여전히 의회를 무시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의회를 철저하게 폄하해 왔다. 사실상 '통법부' 수준으로 여겨왔던 것은 많은 정치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바다. 최순실 국정 농단 파동이 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은 3차례의 담화문을 통해 대중 앞에 직접 나섰다. 탄핵이 논의되는 상황에서도 의회를 향한 진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국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개헌을 던지고, 임기 단축 시점을 결정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대중을 직접 설득하려 했다.'엘시티 비리 의혹' 수사 지시와 같은 공작성 짙은 정치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국회는 300명의 국회의원이 민의를 위임받아 정국을 운영하는 대리통치 기구다. 국민을 상대로 한 선거에서 연전연승을 거둬왔던 박 대통령은, 지난 4월 총선에서 이미 몰락의 기미를 읽어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통'으로 이미 총선 결과 심판을 받았던 역사 교과서 국정화나, 노동 개악 등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4월 총선 결과는 강력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민의를 받든 의회가 만들어낸 탄핵 소추 의결서를 송달받게 됐다.  

박 대통령 탄핵 사건은,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치인들로 하여금 자각하게 한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와는 결이 다르다. 당시 국회의 탄핵 소추는 실패했고, 민심은 탄핵 세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민심을 거스른 탄핵이었다. 지금은 민심에 기반한 탄핵이다. 234표라는 탄핵 동참 의원의 숫자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리에 대해서도 강한 압박으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대통령을 끌어내린 경험을 가진 의회의 힘을 본 정치인들, 특히 예비 대통령들에게는 경각심이 생길 만한 일이다.  

물론 의회 정치가 담아내지 못한 '촛불 민심'은 더 큰 주제로 다가올 것이다. '촛불 민심'에 등 떠밀린 의회의 역할과 정치의 위상을 다시 고민해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라운드 제로'는 마련됐다.  

▲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 사진. 왼쪽부터 박근령 씨, 박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육영수, 박지만 ⓒ 대한민국정부


'박정희 신화'와 그 상징, '전경련 신화' 동시에 무너뜨린 박근혜와 촛불 

박 대통령 탄핵의 큰 의미 중 하나는 '박정희 신화'의 붕괴를 이끌어냈다는 데에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뿌리가 대한민국의 고질적 병폐인 '정경 유착'에 가 닿아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은 박정희, 박근혜 모녀의 신화를 붕괴시킴과 동시에, 그 시대부터 이어져 왔던 정경 유착의 추악한 민낯을 드러냈다. 

특히 삼성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다수 재벌 총수들이 전경련의 폐해를 인정하고,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겠다고 밝힌 것은 주목된다. 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의 쾌거 중 하나다. 청문회장에서 전경련 해체를 목청높여 주장했던 의원 중 한 사람이 보수 정치인인 하태경 의원이라는 점도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읽힌다.  

전경련과 박정희 체제,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이 신화는 한 뿌리를 공유한다. '정경 유착'의 본격적인 역사는 1961년 설립된 전경련의 모체 한국경제인협회에서 시작됐다. 이 단체는 1968년 회원사를 늘리고 '전국경제인연합회'로 조직을 확장한다. 설립을 주도한 사람은 삼성 명예회장인 고(故) 이병철 씨였다.  

전경련의 설립 목적은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올바른 경제정책"을 구현하고 "우리 경제의 국제화"를 촉진하는데 두었다. 그러나 전경련은 본 목적보다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된 군부 정치 권력과 결탁을 통한 이권 수호에 더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어버이연합 등 친정부 반공 단체에 돈을 지원해 사실상 '관제 데모'를 기획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등 우리 역사의 독재자를 재평가하는 작업에 돈을 쏟아 부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정권의 출발점 역시 1961년 5.16쿠데타다. 박정희 정권과 전경련, 그리고 정경유착은 샴 쌍둥이와 같은 관계였다. 이재용 부회장의 조부인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이 주도한 전경련의 역사를, 그의 손자인 이 부회장이 끊게 된 것이고, 박정희 정권의 구태 유물이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의 종언으로 끝맺음 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경 유착에 구멍이 뚫렸다. 고리가 약해졌다. 이는 사회 개혁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괴기스러운 '동화'의 끝, 그리고 '끝 이후' 

2012년, 박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한 언론인은 이렇게 평가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일종의 서양식 동화(fairy tale)다. 그것도 '판타지 동화'의 세계, 혹은 '잔혹 동화'의 세계다. "공주님은 결국, 아버지 왕의 원수를 갚고 궁궐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답니다'류의 이야기다. 동화의 원전은 대개 '잔혹 스토리'인데, 이는 원래 동화가 민담이나, 전설을 아이들 용으로 가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대한민국은 '노인들의 동화'가 지배하는 사회가 됐다."  

'동화'가 민낯을 드러냈다. 동화의 원전 '잔혹 스토리'의 결말은 이제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결말 이후'다.  


‘콘크리트 지지층’은 이렇게 탄생했다

대한민국의 할아버지들은 일자리와 쓸모를 한꺼번에 빼앗기면서 서서히 빈곤 노인이 되었다. 이들을 어떻게 보호할지 장기적 정책을 세워야 한다. 제4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노년층이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장정일 (소설가)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2월 09일 금요일 제481호

대한민국의 할아버지들은 한국 사회의 모든 독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 삼킨 사람들이다. 이들의 종교는 미국·가부장제·박정희·삼성·경제발전·흡수 통일·빨갱이 척결·<조선일보> 등이다. 피의자가 된 박근혜 대통령의 변하지 않는 콘크리트 지지층도 바로 이들이다. 이들에 대한 진보 좌파의 해석은 진저리나게 똑같다. 가난한 두 70대 독거노인을 밀착 취재한 최현숙은 <할배의 탄생>(이매진, 2016)을 출간한 직후,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민단체들이 집회할 때, 마이크 소리 최대로 켜놓고 맞불집회 하는 할배들을 꼰대라고 하는데, 난 애초부터 그런 시각에 의심이 좀 있었어요. 이분들을 만나면서 제가 느낀 건 이래요. ‘이들은 자기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기보다는, 가진 자들, 배운 자들의 시선과 평가를 좇아서 그걸 자기 정체성으로 내면화한다’는 점.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엔 자기 정체성을 독립적으로 가질 기회가 드물어요.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모방해서 자기를 평가하고, 그 잣대로 세상을 보죠. 그래서 자기 계급을 배반하는 정치적 선택들, 자기 허상화, 이런 현상이 나오는 거죠.”

ⓒ이지영그림

지은이는 인터뷰 첫머리에서 시민단체들의 집회를 훼방 놓는 할아버지들을 ‘꼰대’라고 부르는 진보 좌파의 시각을 의심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방금 읽은 인터뷰나, “자기 계급에 기반하지 않고 재벌이나 정치 지도자들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고 있다”라고 책에서 강조된 빈곤 노인들에 대한 지은이의 해석은, 뭇 진보 좌파들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진보 좌파는 일당 2만원을 받고 우파 관제 행사에 동원된 노인은 물론이고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노인 일반을 통틀어, 누군가(재벌·정치 지도자)에게 ‘세뇌된 사람’이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본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할배의 탄생>의 표층을 이루고 있을 뿐, 같은 책의 심층은 전혀 다르게 말한다. 모든 텍스트는 저자도 모르는 균열을 품고 있다. 오로지 두 번 읽는 독자만이 유리하다. 텍스트의 균열을 읽어낸 독자가 그 책의 진정한 저자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난 김용술씨는 1945년생이고,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난 이영식씨는 1946년생이다. 두 사람 다 유복(有福)한 집안이 아니어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두 사람은 더 배우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하고는 했지만, 짧은 가방끈이 두 사람의 현재를 빈곤 노인으로 만든 가장 큰 원인은 아니다. 전자는 양복점 재단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후자는 근력이 좋았던 시절의 대부분을 목수와 공사장 인부로 지냈다. 두 사람은 그 시절을 잘나가던 때로 기억한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동반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배운 기술의 세계로 대량생산과 규격화로 요약되는 산업화가 물밀듯 들어오면서다. 김용술씨는 LG패션의 전신인 반도패션이 기성복을 만들면서부터 양복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회상한다. 싸고 맵시 좋은 기성복이 나오면서 맞춤복은 사양길이 되었다. 이영식씨의 경우 아파트를 많이 지으면서 동네 목수들이 살아남기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공사 현장의 공법(工法)이나 재료가 기계화·조립화되면서 그만큼 목수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할배의 탄생>
최현숙 지음
이매진 펴냄

“사무실에서 펜대 굴리는 일에는 평생 취직할 생각을 안 해봤어. 근데 젊을 때는 기술직이 사무직보다 백배 나았어. 왜냐? 자유롭지, 돈 많이 벌지, 머리 숙일 필요 없지. 공무원이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공무원들도 기술자, 자영업들을 부러워했어. 근데 보니까, 다 같이 못 배울 때나 기술직이 잘나갔던 거야. 기술이 무지하게 빠르게 발전하잖아. 그걸 못한 거야. 한때 잘나가던 자영업 기술자들, 양복, 양재, 구두, 이발, 세탁, 그런 거 다 젊어 한때 잘나갔지 지금은 다 퇴물이잖아. 대학에 박사까지 나오고 빠릿빠릿한 놈들이 다 컴퓨터로 하고 돈 투자해서 프랜차이즈하고, 그걸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쫓아가냐구. 세상 변한 거 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 거 같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이런 게 상상도 못했던 거거든.”

산업화가 쫓아낸 “손맛”(김용술)과 “느낌”(이영식)의 생생한 즐거움을 만끽했던 두 사람은 인생관마저 놀랍도록 닮았다. “인생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 남한테 해 안 끼치고 사는 게 원칙이라면 원칙인데, 나는 내 손발로 땀 흘려서 살았어”(김용술). “나는요 이런 말씀이 죄송스럽지만, 나대로 원칙을 가지고 살아요.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살자.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나는 남한테 그러지 말자, 그게 내 원칙이에요. 그렇게 노력하면서 살았구요”(이영식).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주머니에 돈 한푼 없어도 어디 가도 혼자 살 수 있다, 그 주의야”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저력은 그들이 연마한 기술이다. 이런 세계관을 도저한 장인적(匠人的) 세계관이라고 부르고 싶다.

노인의 자긍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기초노령연금이 꼭 필요한 노인들이 기초노령연금 수령을 부끄러워하거나 노동자들의 연대와 파업을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독립 자존했던 시절의 장인적 세계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런 노인들을 세뇌된 사람이라는 관점으로만 보는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세뇌가 아니라 드높은 자긍심이다. 정진웅의 <노년의 문화인류학>(도서출판 한울, 2012)은 현실이 노인을 차별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규정할 때 혹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을 때, 노인들은 자랑스러웠던 과거를 현실대응책으로 내세운다고 한다. 이 자긍심을 퇴행적으로 볼 게 아니라, 거기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현재 폐휴지와 종이 박스를 줍는 노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살지 않았다. 이들은 농업시대에 태어나 산업시대를 살다가 정보화시대에 이르러 자신의 직종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리고 기술이 쓸모없게 된 사람들이다. 일자리와 쓸모를 한꺼번에 빼앗긴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빈곤 노인이 된다. 문제는 세뇌도, 높은 자긍심도 아니다. 이들의 자긍심과 기술을 사회적으로 환원하고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하고 싶어 하는 노인들에게 최적화된 일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요즘은 뭐 노인들이 청년들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말이 있던데, 그런 거는 아니라고 봐. 노인이랑 청년 일이 다른데, 그럴 리가 없지.” 다가올 인공지능시대에 퇴출되고 사장될 산업시대의 마지막 노동자들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장기적 정책을 세워야 한다. 제4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노년층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박근혜, '올바름' 아닌 '사악함' 품다

[작은책] 촛불과 인문정신
김경진 <고전, 어떻게 읽을까?> 저자    
2016.12.10 10:48:44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습니다. 50여 일 만에 2만 촛불은 230만 횃불이 됐고,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광화문 광장에서 청와대 100m 앞까지 진출했습니다.

< 함께자리>는 이번 주 이슈로, △ 촛불과 국제경제 △ 촛불과 생태환경 △ 촛불과 인문정신을 준비했습니다. 각각의 글은 박 대통령의 2차 대국민담화와 3차 촛불집회 전후에 작성됐지만, 당시로 돌아가 촛불의 의미를 여러모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국민의 명령이 국회를 움직였다면, 이제는 우리의 꿈이 실현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편집자.  

계강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춘추시대 어지러웠던 그 시절 이러한 물음이 있었다는 게 놀랍지만, 역설적으로 혼란은 안정된 정치에 대한 갈망을 추구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물음에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란 올바름입니다. 공께서 올바르게 이끌면 누가 감히 올바르지 않겠습니까?"(<논어> 중 '안연편') 공자는 정치의 기본 정의를 '올바름(正)'이라 했다. 정치의 기본적인 뜻인 모든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각자의 자리에 정확하고 알맞게 두는 것이고, 모든 일이 제 궤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사회 전체가 정상적으로 운행하게 하는 것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제도와 정책이 필요하고 그것을 제대로 움직이게 할 사람이 필요하다.  

2500여 년 전의 말이다. 그런데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은 그 '올바름'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한 '비정상적인' 국가가 되었다. '혼이 비정상적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편견과 고집과 독선으로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 계강자는 그 혼란의 와중에서도 정치가 무엇인지 대학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바른말을 하면 '배신의 정치' 운운하며 끝까지 복수의 칼을 거두지 않았고 지근의 인물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올바름'을 버리고, 사사로움과 어리석음을 테로 두른 셈이다. 모자라면 얻고 모르면 물어야 하거늘, 탐욕과 올가미로 무장한 여자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시민의 삶을 제대로 살아 본 적 없고, 늘 누군가 챙겨 주고 정해 주는 일만 살아온 사람은 천체와 우주마저도 자기를 중심으로 도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제힘으로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다. 공자는 제자 자로가 물었을 때 "자신의 몸을 바로잡았다면 정치를 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자신의 몸도 바로잡을 수 없으면서 어떻게 남을 바로잡겠느냐?"고 반문했다. 뒤늦게 쏟아지는 증언들은 그녀가 예전부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심지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는 내용들이다. 국회의원이 될 정치적 역량도 사회적 기여도 한 게 없었다. 그런 사람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런데도 '향수'와 '안쓰러움'으로 그녀를 선택한 유권자들이 절반쯤 된다. 그런 점에서 '올바름'을 버린 유권자들이 지금 이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그 시작부터 '올바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록 선거에서는 박빙으로 이겼는지 모르지만 국정원의 개입과 조작이 없었다면, 그나마도 집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발목을 잡히니, 이전 정부의 해악에 대해서 단 한 차례도 단죄하지 못했다. '올바름'을 걷어차고 사악함을 품었으니, 제대로 정치가 될 까닭이 없다.

ⓒ프레시안(손문상)


자유당 독재나 유신독재 당시에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 그저 막걸리 한 사발 대접에 넘어가 찍었다고 치자. 그러나 지금은 그 시절이 아니다. 60대 노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고등학교까지 보편적 교육을 받은 첫 세대들이다. 그런데도 감성에 이끌려서, 조작된 언론에 길들어서 표를 던졌다. 교육이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받은 교육이라는 게 20세기 사회가 요구한 노동력인 '속도와 효율'의 틀 안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것도 고작 선언과 개념으로 암기되었을 뿐 삶으로 체화되는 일에는 무심했기 때문이다. 어설프나마 공자를 들먹인 건 바로 그런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교육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일생을 바쳐 학문을 좋아하고 목숨을 걸고 실천을 중시한다. 망하려는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천하가 잘 다스려질 때는 나아가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무시당한다. 정의가 행해지는 나라에 살면서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부자라든지 지위가 높다든지 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논어> 중 '태백편') 

'올바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실천이 결여되어 있으니, 아무리 배운 게 많고 경험이 많으며 세상 사람들이 선망의 눈으로 바라봐도 곡학아세(曲學阿世)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기 딱 좋을 뿐이다. 대학교수를 지내다 권력의 중심을 기웃대며 높은 자리 얻어 악의 하수인이 되는 자가 부지기수며,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합격해 판검사가 됐어도 최고 권력자의 눈치만 보며 자기 잇속만 챙기는 자들은 또 얼마나 많이 우리 사회를 망가뜨려 왔던가. 재주는 뛰어난지 모르지만 덕은 모자란 자들에게 권력은 망나니 춤추며 휘두르는 칼이기 십상일 뿐이다. 수많은 동양철학자들이 되풀이하듯 언급하는 정의니 지혜니 따위는 휴지처럼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은 채 당장의 권력에 취해 안하무인으로 설치고 심지어 제가 몸담고 있던 조직마저 송두리째 만신창이로 만드는 자 또한 얼마인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재능이 뛰어나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자기만 옳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않고 공적 가치와 시민들의 바람을 따르는 건 예사롭지 않다. 분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배웠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최종적 책임과 의미는 최고 권력자의 몫이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공부가 많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백온 유기 등을 통해 사리와 분별의 힘을 배웠다. 그는 맹자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임금이 신하를 자신의 손과 발처럼 간주하면, 신하는 임금을 자신의 배와 심장처럼 간주한다. 임금이 신하를 개와 말처럼 간주하면, 신하는 임금을 일반 백성처럼 간주한다. 임금이 신하를 흙과 지푸라기처럼 간주하면, 신하는 임금을 도적과 원수처럼 간주한다"는 대목이었다. 전제 군주의 입장에서 제 입맛에 맞을 리 없다. 주원장은 즉시 맹자의 문묘 배향 자격을 박탈하고 위패를 철거하도록 명령했다. 더불어 한림학사 유삼오에게 '황제의 뜻에 거스르는' 말을 <맹자>에서 전부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백성이 고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라는 구절도 삭제되었다.
백성에게 마음을 얻어야 천자(天子)가 된다.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에게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된다. 그러나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제후를 바꾼다. 유일하게 바꿀 수 없는 요소는 오직 백성이다. 그게 맹자의 기본 사상이다. 주원장은 맹자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다행히 나중에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다음 해 바로 문묘에 맹자의 위패를 복원했고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말을 모두 삭제한 <맹자절문>도 당시 도성인 남경 부근에서만 잠시 유통되었을 뿐이다. 그게 '올바름'의 길이다.

문장 하나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판단력이 있으며 사고의 능력이 있을까마는, 어설픈 '향수와 안쓰러움'으로 표를 던진 사람들과 부정선거(국정원의 선거 개입 등)로 가까스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온 나라를 결딴내고도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못하는 자가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그를 뽑은 시민들도 '비선'의 강남 여인에게 휘둘린 대통령도 모든 '올바름'을 잃었다. 그리고 그 값을 지금 호되게 치르고 있다. 학교에서 아무리 민주주의와 정의를 배워도 그 사회가 그 덕목으로 굴러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훼손한 자들의 폭력에 순응하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제대로 배우되 선언과 이론이 아니라 삶의 실천적 덕목을 훈련하며 올바르지 않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을 포기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올바름'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그것이 올바른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이란, '내가 질문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질문하는 나'로 돌아오는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시대정신을 성찰하고 미래 의제를 이끌어 내는 힘을 마련하는 것이다. '올바름'의 인문정신과 실천이 없으면, 그것은 이미 죽은 인문학이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짜 인문학에 불과하다. 위정자는 일반 시민을 가장 고귀한 재산으로 삼아야 하며,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상식부터 회복해야 할 때다. 지금은 못 배운 사람들의 무지(無知)도 문제지만, '배운 놈들의 부역'이 더 큰 문제다. 나를 올바로 세우고, 사회를 올바로 재건하며, 정치와 경제를 올바른 상식에 맞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게 지금 우리에게 던져진 숙제다. 사람을 잃으면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 야만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