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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 세월호 아픔 공감 못해” - “교과서라 부르기도 민망한 원고 뭉치”

일취월장7 2016. 12. 13. 15:56


“朴 대통령 세월호 아픔 공감 못해”

《오만과 무능 굿바이 朴의 나라》 출간한 전여옥 前 국회의원 인터뷰… “공감 능력이 떨어지니까 TV 보며 식사까지 한 것”

안성모·구민주 기자 ㅣ asm@sisapress.com | 승인 2016.12.12(월) 15:01:42 | 1417호


12월9일 오후 1시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 1층 커피숍에서 전여옥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을 만났다. KBS 기자 출신인 전 전 의원은 한때 박근혜 대통령의 입으로 통했다. 2004년 3월 정계에 입문하면서 한나라당 대변인을 맡았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바로 박 대통령이었다. ‘원조 친박’ 중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았던 그는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을 겨냥한 ‘최고의 저격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아닌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친박 진영에서는 그를 ‘배신자’라고 맹비난했다. 2008년 재선에 성공했지만 2012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총선 패배 후 정계를 떠난 그는 ‘정치인 박근혜’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자 그가 했던 말이 ‘어록’으로 회자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와의 만남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탄핵안은 가결될 것이다”고 확신했다. 만약 탄핵안이 부결된다면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오만과 무능 굿바이 朴의 나라》를 출간한 그는 ‘세습정치인 박근혜의 오만’과 ‘자질 부족 박근혜의 무능’이 국가적 혼란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전여옥 前 국회의원 © 시사저널 이종현

전여옥 前 국회의원 © 시사저널 이종현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오늘 친박 의원들이 말한 것에 공통점이 있다. 박 대통령은 1원도 받은 게 없다는 거다. 그런 단순함이 참 무섭다. 국민들이 왜 분노하는지 모르고 있다. 최순실이라는 비선을 통해 우리 세금 수천억원이 손실됐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대통령은 단돈 1원도 받지 않았다는 친박의 사고 구조, 이게 곧 박 대통령의 사고 구조다.”

 

 

박 대통령은 몰랐으니 문제없다는 식인 건가.

 

“그렇다. 선거 치를 때도 본인 돈을 전혀 안 썼다. 자서전에 인쇄비용으로 500만원만 썼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친박 내에서도 너무 기가 막힌다는 얘기가 나왔다. ‘선거를 치르려면 돈이 필요하다’라고 하면 “누가 돈 쓰라고 했습니까” 이랬다. 약삭빠른 친박은 그걸 알아들었다. ‘돈 문제는 니들이 알아서 하고 무슨 일 생기면 니들이 뒤집어써라.’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경계의 담장을 낮췄을 뿐 잘못한 게 없고, 이 모든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다고 하지 않나. 본인이 하면 곧 공익이 되고 나라를 위한 일이 되는 거다. 왜냐면 이 나라는 아버지의 것이자 자신의 것이고, 대통령이 된 것도 가업(家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이용당했으니까 박 대통령도 피해자라는 논리와 비슷해 보인다.

 

“박 대통령이 최순실의 피해자라고 한다면 이 나라의 대통령은 박근혜가 아니라 최순실이라는 걸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변명인가.”

 

 

‘박근혜가 대통령 돼서도 안 되고 결코 될 수도 없다’라고 말한 적 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봤나.

 

“일단 자질에서 함량 미달이었다. 신문 사설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대통령은 때로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데 국민을 설득할 힘이 없다고 봤다. 국민 앞에서 손은 흔들어줄 수는 있지만. 순발력과 결단력도 심각하게 부족했다. ‘세종시 수정안’ 문제가 있었을 때 그냥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걸 보고 하도 답답해서 전화해 보라 했더니 얼른 구석으로 가서 정윤회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부모님이 흉탄에 돌아가셨다는 ‘지정곡’밖에 부를 수 없는, 성장이 정체된 정치인이었다. 이미자가 《동백아가씨》만 불러서는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가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여의도에 최태민 일가에 대한 엄청난 자료가 돌아다녔는데 야당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당이 다 파헤치면 결코 대통령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거다.”

 

 

하지만 대선 경선 이후 최태민에 관한 얘기는 쏙 들어갔다.

 

“당시 한나라당 경선이 곧 본선이었다. 야당이 선거 자체를 포기했던 것 같다. MB(이명박 전 대통령) 쪽에서도 박근혜의 사생활이라고 여겼다. 여자의 치마폭을 들추게 되면 경선이 끝난 후에 영남에서 과연 표를 얻을 수 있겠느냐는 전략적인 계산이 있었다. 그래서 경선이 끝나자 입을 딱 다물었다. 2012년 대선에서는 퇴임 후를 고려할 때 문재인보다는 그래도 박근혜가 낫다고 생각한 거다. 이 점은 참 부끄럽게 생각한다."

 

 

40년간 최태민이 친 주술의 덫에 걸려서 ‘국정 농단’을 자행했다고 했는데 최태민은 사망한 지 이미 20년도 더 지나지 않았나.

 

“박 대통령의 가슴속에 최태민은 살아 있다. 최태민에 대해 언급만 해도 벌벌 떨고 천벌을 받을 거라고 분노하는 모습을 봤다. 최태민은 죽었지만 그의 아바타라고 할 수 있는 최순실이 그 역할을 세습해서 업그레이드시켰다. 최순실은 박근혜에게 아시아의 지도자가 될 거라고 세뇌시킨 아버지의 ‘업적’을 물려받았다. 박근혜의 모든 살림과 시중을 다 들며 대통령을 무력화시키고, 아버지에게 배운 수법으로 열 배 백 배 더 해먹었다.”

 

 

최순실과 관련한 일화도 있나.

 

“최순실을 처음 본 건 1995~96년 무렵이다. 대구방송에서 토크쇼를 진행할 때였다. 당시 야인(野人)이던 박 대통령이 왔었는데 두 명의 중년 여성이 코디처럼 옷가방을 들고 따라왔었다. 방송이 끝나고 임원들이 박 대통령을 점심에 모셨는데 두 여성도 같이 와서 먹더라. 그중 한 명이 교양 없고 오만하게 굴길래 작가한테 ‘저 아줌마 도대체 누구냐’고 했더니 ‘최태민의 딸 최순실 모르냐’고 했다. 그래서 ‘저 여자가 최순실이구나’ 안 거다. 그때 하도 유난스러워서 얼굴을 기억해 뒀다.”

 

 

정계 입문 후에는 만난 적 없나.

 

“당시에는 너무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저녁 6시만 되면 블랙아웃 상태가 됐다. 당에서 얘기가 나왔다. 뭘 결정하면 다음 날 뒤집히니까. 정윤회와 최순실의 강남비선팀이 조언을 해 준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리고 하도 베일에 싸여 있다고 언론에서 보도하니까 오픈 하우스를 했다. 그때도 두 여성이 서빙을 했는데 딱 봐도 종업원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피붙이인가보다 생각해서 안봉근(전 비서관)한테 누구냐 물어보니까 친척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나중에 박지만씨가 나한테 누구냐고 묻길래 친척 아니냐고 하니까 우리 집안에 저런 여자들 없다고 얘기했다. 나중에 보니까 최순실 쪽 조카였다.”

 

 

장시호였나.

 

“장시호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최순실과 굉장히 닮았었다.”

 

 

최태민이라는 이름 자체가 금기시됐다고 했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나.

 

“한 일간지 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최태민이 영애를 이용해 돈을 갈취하고 부정부패를 했다는 얘기를 하니까 (박 대통령이) 갑자기 손을 덜덜 떨면서 목에 파란 힘줄이 솟은 채 ‘그분이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천벌을 받으려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느냐”며 이성을 잃더라. 평소에 절제가 강하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부들부들 떨더라. 그래서 보통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을 대선후보로 만들려고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모 의원이 있었는데 어느 날 팽(烹)을 당했다. 그 이유가 뭐였냐면 이 의원이 기자들과 술을 먹으면서 최태민 일가를 끌어내야 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말이 정보 보고에 올라갔고 (박 대통령이) 다음 날부터 그 의원에게 레이저를 쏜 거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친박 핵심 인사들 상당수가 최순실을 모른다고 얘기한다. 정말 모르는 건가.

 

“모를 수가 없다. 김무성 의원이 최순실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하지 않았나. 그 한마디로 끝난 거다. 모를 수가 없다.”

 

 

친박 핵심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건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는 게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 내부 청문회가 있었다. 그 안에서 다 나왔었다. 그런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말이 안 된다. MB가 대통령 되고 나서는 (박 대통령이) 미래 권력이 됐잖은가. 최태민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심정 이런 걸 다 알기 때문에 친박들이 아무도 얘기를 안 한 거다.”

 

 

대통령 당선 후 원로 7인회 인사 중에서도 최태민 얘기를 했다가 멀어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에 얘기하면 뭐하나. 되기 전에 했어야지. 정말 국민을 생각한다면 그 전에 얘기했어야 한다.”

 

한나라당 17대 국회 당선자 연찬회에 참석한 박근혜 대표와 전여옥 대변인(왼쪽) © 시사저널 이종현

한나라당 17대 국회 당선자 연찬회에 참석한 박근혜 대표와 전여옥 대변인(왼쪽) © 시사저널 이종현


그분들은 잘 알고 있었다고 보나.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었을 거다.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때 일어난 일들을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정말 실망했다.”

 

 

박 대통령이 대면 보고를 싫어하는 걸로 알려졌는데 예전에도 그랬나.

 

“그랬다. 일단 대면 보고고 뭐고 당무를 보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한나라당이 비록 야당이긴 했지만 역사도 오래됐고 조직도 복잡했다. 당시 경제 문제 등 현안도 많았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회의나 당무 보는 것 자체를 굉장히 불편해했다. 현안을 보고하면 아무 말 없이 눈 감고 있거나 종이만 꾸깃꾸깃 접고 있어서 무슨 심오한 판단을 하려나 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라 불편했던 거다.”

 

 

‘베이비 토크’라는 표현을 썼는데 어눌했다는 건가.

 

“그때는 지금만큼 심하지 않았다. 다만 말이 짧고 적었다. 만약 오늘 아침에 부엉이를 만났으면 하루 종일 ‘오늘 아침 부엉이를 만났습니다’ 이 얘기만 하는 거다. 누굴 만나도 그랬다. 그거 외엔 얘기할 수 없었던 거다. 베이비 토크라는 건 아주 짧게 말하는 건데, 사람들은 단답형이니까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건 줄 아는데 나는 그게 아닌 걸 알았다. 대통령이 된 후 ‘우리 경제가 퉁퉁 불어터진 국수 같아 불쌍해 죽겠다’고 얘기한 적 있다. 그건 유치원 애들이 말하는 어법과 똑같은 거다. 유치원 교사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나. ‘책상 어질지 말아요. 책상이 아야아야 해요’. 이렇게 의인화(擬人化)하지 않나. 이게 한 나라의 대통령 입에서 나오는 수준의 말이라고 보나.”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해 최근 올림머리를 하느라 미용사를 부른 사실이 밝혀졌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얘기했는데.

 

“박 대통령을 보고 느낀 건 희로애락에 대한 반응이 없다는 거다. 흉탄에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추억, 그리고 18년 동안 청와대라는 온실에서 자란 기억, 그리고 최태민으로부터 거의 세뇌를 당한 것 등 어떤 측면에서는 사육됐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가 나이 들면서 성장을 한다는 건 공감 능력이 성장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분은 공감능력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냉정했다. 큰 슬픔을 겪어서 냉정해졌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자신밖에 모르는 거였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다. 그러니까 세월호에 대한 국민들의 슬픔과 아픔을 공감 못하는 거다. 그리고 올림머리도 20분 만에 했다고 얘기하는데 절대로 20분 만에 할 수 없다는 걸 대한민국 모든 여성들은 다 알 거다. 2005년 미국에 갔을 땐 미용사를 데려갈 수 없으니까 머리를 묶고 부분 가발을 썼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지 않나. 그냥 머리 묶고 나와도 되잖나. 그런데 머리를 연출까지 하고 나왔다는 건 슬픔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거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TV를 보면서 식사도 하고 그랬던 것 아니겠나. 당시 TV에 나오는 게 다 세월호 얘기였는데.”

 

 

불면증 얘기도 많이 나오는데 예전에는 어땠나.

 

“예전엔 못 느꼈다. 그땐 정말 저녁 6시 이후엔 연락두절이었다. 안봉근을 통해 전화하거나 아니면 집에 있던 경비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경비도 자야 하니까 아무리 급해도 밤 10시쯤 전화하면 받지를 않았다. 김선일 피랍 사건 때는 열댓 번을 전화했다. 그러니까 경비가 전화를 바꿔줬다. 당시 당내에서 ‘어떻게 깨웠느냐, 그런 적이 없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당시에는 수면제 이런 건 못 느꼈다. 대통령 일을 퍼스트레이디 일로 착각했다가 그게 아니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불면증에 걸렸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최순실이 이것저것 드셔보라며 약물 중독을 시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차라리 날 바보로 취급해달라'는 박근혜

[기자의 눈] 유권자는 '금치산자'의 푸념을 들을 의무가 없다
박세열 기자      
2016.12.13 16:53:36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씨의 잘못을 인정하고, 본인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모양새다. 예측됐던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바보의 길'이냐, '국정 책임자'의 길이냐, 갈림길에서 전자를 택했다. 박 대통령은 스스로 '바보'가 돼야 한다. 그게 '피의자'로서 방어권을 행사하는 길이다.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간 박 대통령의 행동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다만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박 대통령이 최근 청와대 참모들에게 "나와 눈도 못 마주치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어떻게…"라고 푸념을 했다고 한다. 또한 박 대통령은 탄핵 직후 주변 사람들에게 "최 씨는 내 시녀같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됐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최 씨에게 배신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억울하다는 취지의 언급을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이 지난 4년간 청와대를 들락날락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청와대 양식 조리장에 발탁돼 2016년, 올해 6월 말까지 근무한 전 청와대 조리장 한상훈 씨의 증언에 따르면 "청와대에서 나오기 직전까지도 최 씨가 매주 청와대를 출입"했다고 한다. "매주 일요일이면 (1인분 이상 음식을 마련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도 증언했다. 4년 가까이 대통령 최순실의 배신을 몰랐다는 말을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말이 유명해진 이유가 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직을 '쟁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식적으로라면 "국민들이 이런 꼴을 보려고 나를 대통령으로 선택해줬나, 자괴감이 든다"라는 문장이 돼야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대통령 직을 본인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적극적 행위로 그 자리에 드디어 올라섰다', '숱한 역경을 딛고 내 능력으로 고지에 깃발을 꽂았다' 이런 의미다.  

이런 인식을 가졌으니, '최순실에게 농락당했다'는 발언도 가능하다. 어디 감히, 일개 "시녀"에 "눈도 못 마주치던"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나의' 대통령직을 능멸하다니. 

박 대통령의 고백들을 종합하면 "그래서 최순실을 처벌해야 한다. 나는 최순실이라는 티를 떼 내면 여전히 대통령직을 쟁취한 사람 그대로다"는 의미로 들린다.  

박 대통령은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본인 스스로 잘못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기대다. '촛불 민심', 그리고 '여론조사'를 토대로 가늠할 수 있는 그 민심은 일찍이 이런 상황을 간파했다. 그래서 탄핵을 요구했다. 국회는 뒤늦게 탄핵을 받아들였고, 박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끝장냈다. 헌법재판소 심판이라는 법적 절차가 남았지만, 정치적 사형 선고는 형태상으로 이미 완결됐다.  

최순실 씨와 박 대통령의 관계를 유권자들이 뻔히 아는데, 박 대통령은 '바보'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이것만큼 자괴감을 들게 하는 말이 없다. 대통령의 고백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는 물증으로 드러난 안종범 전 수석비서관,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에 대한 지시의 의미조차도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박 대통령이 일개 기업의 CEO였다거나, 예를 들어 돌아가신 아버지를 '교주'로 둔 사학의 이사장 같은 직책에 있었던 상황이었다면, 그래서 사기꾼에게 속은 것이라면 그나마 인간적인 이해를 구할 수는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구성원들에게 중죄를 저지른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박근혜의 죄는 그가 대통령이었다는 점이다. 본인만 스스로 '쟁취'했다 생각한 것이지, 대한민국 유권자라면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자리다. 유권자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당사자다. 그리고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만인지상 국정 운영 주체였다. 그런 사람이 본인의 입으로 시녀에게 당했다느니, 눈도 못 마주쳤던 사람에게 당했다느니 하고 아무렇게나 내뱉는 푸념을 왜 유권자들은 듣고 있어야 하는가. 2012년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표 수가 1570만 표다. 1570만 명을 이렇게 모독해야 하나? 

박 대통령은 2차 가해를 하고 있는 중이다. 더이상 헌법을, 그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직을 그가 모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떳떳하게 알았지만 손을 쓸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게 맞다. 유권자는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금치산자가 된 모습을 볼 의무가 없다. 책임 지느니 바보가 되겠다는 길을 택한 그를 보며 든 단상이다.  


‘세월호 7시간’, 박근혜 시대 상징하는 단어

‘불통과 무능’ 상징어…홀로 식사하고 머리 손질한 사실 드러나

소종섭 편집위원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2.13(화) 16:41:07 | 1417호


2014년 4월16일, 평온한 바다를 가던 배가 느닷없이 침몰했다. 배의 이름은 세월호. 사망자 295명, 실종자 9명 등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사고, 믿을 수 없는 사망자 숫자였다. 그러하기에 국민의 마음에는 지금도 분노와 미안함이 병존한다.

 

꽃다운 목숨들이 바닷속으로 사라질 때 최고 통치자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나. 대통령은 왜 적극적으로 구조를 지휘하지 않았나. 무슨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무능했던 것인가. 사고 발생 2년7개월이 넘었지만 미스터리는 여전하다.

 

하지만 ‘세월호 7시간’은 더 이상 미스터리만은 아니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느냐 하는 사실 관계를 따지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것은 박근혜 시대를 상징하는 시대의 단어가 됐다. 박근혜 정권의 불통과 무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해 두 건의 주목되는 보도가 있었다. 먼저 지난 7월까지 청와대 조리장을 지낸 인사와의 인터뷰를 ‘여성동아’가 보도했다. 이 조리장의 증언은 이렇다.

 

“세월호 사고 당일 관저에 딸린 주방에서 정오와 저녁 6시에 각 1인분의 식사를 준비했다. 아침 식사는 당선 전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보필했던 비서가 조리장들이 준비해 둔 재료 등으로 직접 준비한다. (대통령은) 식사는 평소처럼 했다. 사고 당일 오후 5시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한 후 관저로 돌아와 식사를 했다. (대통령은) 혼자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는 분이다. 술은커녕 간식도 잘 안 하신다. 박 대통령은 건강식에 관심이 많다. 지방 출장이 있어도 식사는 대체로 혼자 하길 원했다. 그래서 대부분 차에서 먹을 수 있는 유부초밥과 샌드위치 같은 걸 준비하곤 했다. TV에 대통령이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 7시간’은 위기에 있어서 대통령과 청와대 대응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보여주는 상징어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 영상 캡처 ©해양경찰청 제공

‘세월호 7시간’은 위기에 있어서 대통령과 청와대 대응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보여주는 상징어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 영상 캡처 ©해양경찰청 제공


세월호 당일에도 일상 영위한 대통령

 

박 대통령은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거의 관저에서 식사를 하고 그것도 혼자 한다는 것이다. 즉, 식사 시간이 누군가와 소통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관저에 머물 때도 TV를 보는 것을 즐긴다 하니 민심을 어떻게 파악해 왔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세간에 ‘박 대통령은 최순실과 TV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는 말이 돌았는데, 전 조리사의 증언을 보면 이런 말을 그저 소문이라고만 치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박근혜식 소통’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증언이다.

 

12월7일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 출석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렇게 증언했다. “일이 있을 때는 일주일에 두 번도 되고 일주일에 한 번도 못 뵙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일주일에 한 번도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증언이다. 가까이 있는 비서실장도 이 정도였으니,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 시절 “정무수석 재임 11개월간 한 번도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도 이해가 된다. 대통령은 참모들과 밥을 먹으며 소통하는 대신 홀로 식사하는 것을 즐겼다. 세월호 사고로 수많은 목숨이 죽어가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 참석한 청와대 수석들에게 “대면 보고가 꼭 필요한가요?”라고 물었던 장면이 다시 떠오르는 이유다.

 

세월호 사고 당일 오후에 미용실을 운영하는 정아무개씨가 박 대통령의 머리 손질을 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친동생 정아무개씨와 함께였다. ‘한겨레’는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90분 정도 머리 손질을 했다”고 보도했으나 청와대는 “20분 동안 손질을 했다”고 해명했다. 청와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이 미용사는 15시22분에 (청와대에) 왔다가 16시47분에 갔다. 정씨가 서울 강남 청담동에서 일을 하니 오후 3시22분에 청와대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오후 2시 반 이전에는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당일 2시50분에야 370명 구조가 오보라는 것을 알았고, 오후 3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방문 준비를 지시했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대통령이 실제로 중대본을 방문한 것은 5시15분이다.

 

 

위기대응 원칙과 거꾸로 대응

 

전직 조리사와 미용사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당일도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영위했다는 점이다. 식사나 미용에서 달라진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아침에 하던 머리 손질을 오후에 했던 것이 변화라면 변화라고나 할까. 전직 조리사는 말한다. “당시 주방에서도 세월호 참사 소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식사 일정에 갑작스러운 변동이 있는 일이 없던 터라, 예정대로 관저에서 1인분 음식을 준비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전직 조리사와 미용실 원장 정씨의 증언으로 세월호 사고 당일 대통령의 행적은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져 가는 흐름이다. ①당일 대통령은 집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 머물렀다 ②오전에 전화와 서면으로 보고를 받았다 ③정오에 홀로 식사를 했다 ④오후 2시 넘어 미용실 원장을 호출했다 ⑤3시~4시30분 사이에 머리를 손질했다 ⑥5시15분에 중대본을 방문했다 등이다. 시간 흐름으로 미뤄보면 시술을 했다거나 프로포폴을 맞았다거나 할 가능성이 높지는 않아 보인다. 오히려 관저에 머물면서 TV를 통해 현장 소식을 접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왜 적극적으로 구조를 위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세월호 7시간’은 위기에 있어서 대통령과 청와대의 대응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보여주는 상징어이기도 하다. 위기관리 전문가들이 꼽는 위기관리 3원칙은 ‘긴급성, 일관성, 개방성’이다. 빠르게 대응해야 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말해야 하며, 미디어와 열린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대응은 이와 정반대로 갔다. 그러니 의혹이 증폭되고 꼬리를 물 수밖에 없었다. 2014년 7월7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참사 당일) 대통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모호한 답변이었다. 그 이후부터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한 온갖 의혹이 생겨났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빠르게 당일 대통령 행적을 공개하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 2년4개월이 지난 현 시점에서야 언론 취재로 머리를 손질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마지못해 인정했을 뿐이다. 그저 숨기고 밝히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한 것이 청와대 대응이었다. 현 정부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다름 아니다.

 

‘세월호 7시간’은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에도 들어 있다. 탄핵안은 “국가적 재난을 맞아 즉각적으로 국가의 총체적 역량을 집중 투입해야 할 위급한 상황에서 행정부 수반으로서 최고결정권자이자 책임자인 대통령이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며 헌법 10조인 생명권 보장 조항을 위배했다고 기록했다.

 

야권에서는 앞으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세월호 7시간’을 거론할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논란에서 나아가 ‘왜 대통령은 적극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가’로 논점이 옮아갈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불통과 무능을 보여주는, 정치적으로 야권에 매우 유리한 정치적인 키워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미용사를 불러 머리를 손질한 대통령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 대통령은 역사에 대한 의식이 있기나 한 것일까. 



박근혜 '공감 상실병', 퇴진해도 치유 필요!

[안종주의 안전 사회] 박근혜의 실패가 주는 교훈
안종주 사회안전소통센터장     
2016.12.13 08:14:33


대통령 박근혜(이하 박근혜)의 실패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문화, 외교, 사회, 정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는 실패한 대통령이다. 비뚤어진 4대강 사업, 자원외교 등으로 나랏돈을 왕창 들어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하 이명박)보다 액수 면에서는 혈세를 덜 탕진했지만 비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했다는 점에서는 그 어느 대통령과 견줄 바가 못 된다.

많은 정치·경제·사회평론가와 심리학자까지 나서서 인간 박근혜와 정치인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의 비정상을 해부하고 있지만 딱 부러지게 한마디로 '원인이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이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박근혜의 실패는 시작부터 이미 예정돼 있었으며 예견된 것이다. '진실한 사람'을 자기 정치하는 사람, 선거 때 반드시 심판해야만 할 사람으로 매도하고 구린내가 진동하는 알랑방귀를 가까이서 뀌는 간신들을 '진실한 사람', 즉 '진박'으로 추켜세우기 훨씬 전부터 그의 실패는 눈앞에 보였다.  

최순실, 박근혜가 당나귀 귀임을 드러내다  

그는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당나귀 귀를 가졌다. 하지만 가까이서 이를 지켜보고 알고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1급 비밀보다 더한 비밀로 취급했다. 그가 당나귀 귀의 소유자임을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는 최순실이 범죄자로 드러나면서 마침내 절대비밀의 봉인이 자연스레 풀렸다. 그리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의 통치를 받아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는 포용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소통이나 공감이란 단어도 몰랐다. '대박' '우주의 기운' '암덩어리'와 같은 요상한 말에 빠져 정상적 언어를 쓰며 정상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철판도 뚫을 듯한 강력한 레이저빔을 눈에서 쏘았다. 역대 최강의 레이저빔 발사 대통령이었다.

우리는 박근혜 실패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수 있다. 박근혜는 거의 모든 부문에 제거하기 쉽지 않은 악취 덩어리 쓰레기를 투하했다. 그 청소에 들어갈 시간과 인력, 비용과 노력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대청소가 필요하다. 매우 신속한 청소가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대청소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이명박이 만들어 아직 치우지 못한 쓰레기도 골칫거리인데 박근혜 쓰레기까지 보태니 정말 산더미가 따로 없다. 하지만 대청소 없이는 결코 안전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없다.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렵다. 대청소 없이 나아가면 전진하는 이조차 오물 진흙탕에 빠져 온몸에 냄새 칠갑을 하게 된다. 박근혜 실패를 분석·성찰하여 이를 극복하는 방안을 찾아서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그래야 박근혜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

초등학교 때 공감 상실이 대통령 때까지 이어져  

박근혜는 일찍부터 타인과는 잘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 유형이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이미 예견돼 있었다. 당시 아버지 박정희는 장군이었다. 그 뒤 대통령의 딸이라는 신분이 되면서 타인과 공감할 기회는 더욱 사라져갔다. 

그리고 부모가 모두 최측근 등의 손에 죽임을 당한 뒤 마침내 병적 수준의 공감 상실형 인간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와 유사한 분석을 내놓는 평론가와 전문가도 있지만 앞서 말한 단정적 표현은 어디까지나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분석이다. 최근 몇 년간 대한민국에서 벌어져 뒤늦게 드러난 일련의 비정상 통치 내막들을 살펴보면 다른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어릴 때도 그러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 버스나 지하철 타는 법도, 은행거래도, 장보기도 한 일이 없고 할 줄도 몰랐다. 모든 것을 타인이 해주었기 때문이다. 공주가 직접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유신공주 자리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그만둔 뒤에도 타인과 공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통 받는 국민과 눈 맞추지도 못하는 사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나

공감은 소통의 다른 표현이다. 소통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이고 타인과의 눈 맞춤이며 타인과 기쁨과 고통을 나누며 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소통과 대화를 몰랐다. 대통령 시절 국민이, 기자들이 애타게 원하는데도 각본 없는 기자회견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은 소통 때 드러날 자신의 본모습을 걱정해서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역지사지하지 않으니 타인의 고통을 알 리 없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감각상실 행동과 언어를 보였다. 구조 골든타임에 올림머리에나 신경을 쓰고 평상시처럼 점심과 저녁 등을 맛있게 뚝딱 먹는 것도 바로 이것 말고는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다.

흔히들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또는 위기 소통에서 정직하라, 잘못이 있으면 이를 솔직히 시인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잘못 또는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이를 지키라고 말한다. 위험소통 7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위험 소통의 '소'자도 몰랐다. 그러니 세월호 7시간에 대해 2년 반이란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최순실이 국정농단을 마음껏 하도록 헌법까지 파괴하며 뒤에서 도움을 주었음에도 자신은 아무런 사익을 취하지 않았기에 잘못이 없고 억울해서 피눈물이 난다는 식의 말을 하고 있다.  

대통령 물러난 뒤에라도 치유가 필요할 듯 

이 정도의 공감 상실 상태라면 히포크라테스나 화타, 허준과 같은 전설적 명의들이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치유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소통을 모르고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박근혜의 불통, 불감증은 극소수의 인물에게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생활에서도, 정치에서도 그러했다.  

100만 촛불, 200만 촛불을 사실상 부정하는 행동을 줄곧 일삼아온 것은 박정희 사망 후 18년간의 은둔 생활과 부모 죽음이라는 비극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제때, 제대로 치유하지 않은 결과로 볼 수 있다. 그가 만약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난 뒤 대통령직에서 완전 물러난 뒤라 할지라도 반드시 치유 과정은 필요하지 않을까싶다. 

박근혜 실패를 계기로 우리 사회는 소통과 공감의 중요성을 다시금 곱씹어보아야 한다. 학교, 직장, 사회, 공직사회, 정치권에서도 이 땅의 어린이와 청년들이 공감형 인간으로 커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공감형 인간, 즉 소통형 인간을 공직에 많이 앉히고 선거에서 뽑는 혜안을 국민이 지녀야 한다. 

일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빈곤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노인이 왜 많은지,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는 청년들이 왜 이 땅에 그득한지를 알고 그 대안을 찾는 노력을 하기 위해서라도 공감형 정치인이 미래 한국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청와대든, 국회든, 정부든, 회사든, 학교든 공감형 인간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를 보듬어줄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새로운 체제의 나라가 될 것이다.



박근혜,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고 싶다

[다산 칼럼] 고백하고, 용서 구하고, 제 발로 떠나라
김정남 언론인    
2016.12.13 10:56:43


매우 안타깝게도 우리 박근혜 대통령은 왜 매주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에 전국적으로 그렇게 많은 국민이 모이고, 왜 국회에서 그렇게 압도적인 다수가 자신에 대한 탄핵소추를 의결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직도 그 까닭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세 차례에 걸친 담화나 마지막 국무회의 간담회에서의 발언, 그리고 막판에 단행한 국민통합위원장, 인권위 상임위원, 민정수석 등에 대한 인사조치를 보면 그 오기와 철면피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두 달 가까이 '대통령 박근혜'와 관련한 음습한 소식들을 들으면서 국민들은 너나없이 더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누구 말대로 너무도 같잖은 인물이 박근혜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에서 국민은 참담한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 박근혜가 최순실과 같은 급이었고, 정권 자체가 사실상 최순실‧박근혜 공동정권이었다는 증언을 들으면서 그 모욕감은 절정에 달했다.  

아는가, 이 참담한 국민의 모욕감을   

최순실이 '보안 손님'으로 출입증도 없이 청와대에 들어가 문고리 3인방과 회의를 하고, 국무회의와 수석비서관 회의일정과 대통령이 할 말까지 점검했다니, 장관과 수석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받아 적었던 것들이 필경은 최순실의 말씀이었을 것이다. 차(車) 아무개가 추천하는 그의 대학 시절 지도교수가 갑자기 장관이 되고 그 외삼촌이 수석이 되었으니, "이게 나라냐"는 울분 어린 탄식이 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정호성의 음성 파일만 공개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행세하던 왕실장은 이제와 발뺌과 모르쇠로 일관하고, 그토록 대통령의 총애와 보호를 받던 민정수석은 청문회 출석요구 우편물을 받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뺑소니 법률 미꾸라지 행각으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근혜, 최순실을 뒤에 두고 국정을 쥐락펴락 농단했던 그들이 실상은 하찮은 쥐새끼들에 지나지 않았는지 국민은 더할 수 없는 치욕감을 느낀다.

박근혜 정권 4년 동안 이 정권 안에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간(諫)하거나 "이럴 수는 없다"고 항거한 사람이 오직 유진룡 전 문화체육부장관 한사람뿐이었으니, 박근혜 정권 안에는 온통 간신과 내시만 있었더란 말인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 황교안 국무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국회로부터 탄핵소추를 받은 박근혜 대통령과 공범관계에 있거나, 적어도 대통령을 잘못 보필한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그들이 사과 한마디 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4‧19혁명 당시만 해도 그해 4월 21일, 전 국무위원이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블랙리스트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박근혜 정권 4년은 역사를 거슬러 역행하는 기간이었음에 비추어, 무엇보다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시급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작업과 1만여 명에 달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다. 시대에 역행하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자체도 문제이지만, 정권의 그릇된 역사 인식의 강요가 더 큰 문제다. 일례로 검토본에 나온 제주 4‧3사건 기술은 2003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사건의 정의조차 외면하고 있다.  

유신시대의 망령인 블랙리스트가 대명천지 21세기에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박근혜 정권에 의한 역사의 역주행을 증언하고 있다. 타계한 김영한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문화예술계의 각종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 "영화계 좌파인식 네트워크 파악 필요" 등 색깔론으로 각색한 나치식 문화 탄압을 비서실장 김기춘 등이 지시한 사항이 적시되어 있다.

헌법은 물론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 유린한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진실은 끝까지 추적해 그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온 세계가 부러워하고 칭송해 마지않았던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말짱 빈껍데기, 도로아미타불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가져온 이 대한민국의 치욕, 떨어진 국격과 그리고 그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지금은 국민의 촛불이 막아내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지금 건곤일척의 시험대 위에 올라있다. 오늘의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위상과 수준이 새롭게 설정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제까지와 같은 구차한 변명보다는 그동안 국민으로 하여금 비탄과 우울과 치욕에 빠뜨리게 한 역사적 죄과와 무능을 솔직하게 국민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제 발로 떠나길 바란다.  

이형기 시인이 <낙화>에서 노래한 것처럼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며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최고의 애국이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도리이다. 그리하여 국민의 마음속에 그에 대한 한 가닥 연민이라도 남겨질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조응천·박관천 "최순실이 관저에 살고 잔다더라"

<세계일보>, 뒤늦게 조응천·박관천 '취재 메모' 공개
박세열 기자     
2016.12.13 09:09:57


지난 2014년 11월 28일 '정윤회 문건'을 처음으로 보도했던 <세계일보>가, 보도 직전인 그해 11월 3일부터 12일까지, 총 5차례 걸쳐 진행했던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관천 전 민정수석실 행정관과의 인터뷰 내용을 13일 지면을 통해 뒤늦게 공개했다. 조응천 의원, 박관천 전 행정관은 당시 공직기강비서관, 행정관으로 있다가 옷을 벗은 상태였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조 의원 등은 당시 문고리 3인방(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 정호성 부속비서관)의 비위 의심 보고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박근혜-정윤회-최순실의 국정 농단 의혹을 캐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문고리 3인방은 전횡 및 각종 이권, 인사 개입 등에 전방위적으로 활약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현재 구속된 것은 정호성 전 비서관 뿐이다. 

조 의원 등은 문고리 3인방의 전횡을 차단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최종적으로 부당한 일처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주목, 그 '윗선'을 캐려 했으나 금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옷을 벗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윗선'에는 최순실 씨가 있었다. 

이들이 '문고리 3인방'을 감찰한 이유는 "말이 많았으니까. 온갖 이권에 개입하고 불미스러운 보고가 (경찰과 검찰, 국정원 등 기관에서) 계속 올라왔다(박관천)"였다. 구체적으로 "이재만(비서관)과 관련해선 대우건설 관련 얘기가 나와 산업은행 쪽을 불러 경고했다. 안(봉근)은 계속 얘기가 나왔고, 정(호성)도 사고가 있었다. 그로 인해 구두 경고했다(박관천)"고 말했다. 

조 의원은 이재만 전 비서관의 '대우건설 취업 사기' 의혹과 관련해 "이재만은 '자신은 모른다'고 해 (이재만을 판 사람을) 죽였는데 왜 (대우건설에) 들어갔는지 그게 이상한 것"이라고 했다. '죽였다'는 표현은 해당 인사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암행어사'격인 공직기강비서관의 '비토'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누구나 '비선'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안봉근의 경찰 인사 전횡 "대통령이 '경찰 인사는 네가 해라'고 했다더라"

경찰 인사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안봉근 전 비서관에 대해 조 의원은 "안봉근이 술을 얻어먹고 다닌다는 그런 소문이나 최근 VIP와 관련된 사적인 내용을 얘기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런 건 내밀하기에 확인하려면 작업이 많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확인하려다가 퇴출된 건가'라는 질문에 "그렇지"라고 답했다. 관련해 박관천 전 행정관은 "안봉근은 형이 (경북) 경산인가에서 업자들에게 공사를 따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돈 받고 룸살롱을 다니고 했다"고 말했다.  

안봉근 전 행정관과 관련해 조 의원은 "작년(2013년) 요맘때 강신명(치안비서관) 후임으로 허영범(당시 경찰청 수사기획관)이가 온다는 거야. 그래서 허영범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봤다. 그러고 나서 '허영범은 죽어도 안 된다'고 썼지. 그래서 난리가 났고 (안봉근이) '책임질래?'라고 해 '책임진다'고 했다"라고 증언하며 "할매(박 대통령 지칭)가 '경찰 인사는 네가 해라'고 안봉근에게 시켰대. 경찰 인사는 안봉근이 했다고 소문이 났잖아. 결국 허영범이 못 들어오고 구은수(당시 경찰청 외사국장)가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이 때 '항명'에 대한 대가는 컸다. 조 의원은 "그랬더니 나중에 '민정(수석실)에 있는 경찰 열몇명(11명)을 다 나가라'고 하더라. 나가는 건 좋은데, 후임을 단수로 찍었다. 상당수가 MB(이명박 정부) 때 정보장사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할매한테 가 '이런 OO를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무산시켰다"고 했다. 

조응천 의원은 이같은 정보를 얻은 배경을 설명하며 "망이 있었다. 기업체나 언론사 정보망 등에 들어온 거지. 그래서 '이런 게 있는데 알아보자'고 하다가 죽었다. 정(호성)과 이(재만)는 펄쩍 뛰고 안(봉근)을 죽이려다가 내가 죽었지"라고 말했다. 문고리 3인방의 비위를 캐다가 본인이 밀려났다는 것이다.  

안봉근 전 비서관의 경우는 인사 전횡에 깊숙히 개입했다가 "할매(대통령을 지칭)한테 완전 쪼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전횡들은 청와대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는 게 조 의원과 박 전 행정관의 증언이다.  

보이지 않는 비선 "최순실이 관저에서 손님 안내를 한다더라"

이처럼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이 정부에서 많이 일어났다. 조 의원은 "이 정부 특징은 안 보인다는 거다. 그러니까 명확히 누가 날 죽였고, 지금 누가 장난을 치고 있으며, 명확히 누가 득을 보고 있는지,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 누가 책임을 지는지가 나조차도 100% 거기다고 못 한다. 숨어서 한단 말이죠"라고 했다.  

조 의원은 당시 '비선'으로 정윤회 씨를 지목했다. 그러나 최순실 씨에 대한 의심도 동시에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 씨가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이어서, 일개 사업가에 불과한 최 씨에 대한 의심을 크게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조 의원은 최 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최순실이가 요새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서 아예 산다더라. 왜 자꾸 BH에 들어가느냐고 뭐라 하니까 이제 아예 안 나온다는 거다. 거기서 잔다더라. BH에 들어간 사람들이 관저에 가니까 최순실이 안내를 하고 한다는 거야. (최순실은 왜 거기서 자는가) 101 경비단 사람들한테 알아보라"  

'곧 비선 문제가 터지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에 박관천 전 행정관은 "내년 말쯤이면 터질 것 같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다. 환관이 득세한 왕조의 말로가 어땠는가. 요즘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내년 말도 멀다.) 나는 세월을 낚고 있겠다"고 했다. 

결국 최순실 게이트는 박 대통령이 탄핵 당하게 되는 계기로 작동한다. 



주치의도 허수아비 진료도 비선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은 여전히 의문이다. 대통령의 대리처방 전력과 청와대의 과도한 주사제 구입 사실이 밝혀지면서 의혹이 커졌다. 청와대는 의혹에 대해 명확히 해명하지 못했다.

전혜원 기자 woni@sisain.co.kr 2016년 12월 12일 월요일 제482호


“최순실 병원 찍나 보네.” 최순실씨 단골 성형의원이 있는 서울 논현동 빌딩 외관을 촬영하자 지나가던 시민이 말했다. 이 빌딩 7층 김영재 의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두운 실내가 드러났다. 지키고 있던 간호사 한 명이 어딘가로 전화하더니 ‘언론 대응 담당자’가 나타났다. 이 담당자는 “서류 준비로 바쁘다. 특검 조사 등 공적 루트를 통해 대응하겠다”라고 말했다. 의원 아래층에 있는 김영재 원장 가족회사 사무실로 한 직원이 노트북을 든 채 바삐 걸어 들어갔다.

최순실 의혹이 의료계로 확산된 초기만 해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의혹 일부가 점차 사실로 확인됐고, 보건당국이 대리처방 정황을 확인해 수사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박영수 특검이 최순실씨뿐 아니라 청와대와 긴밀히 얽힌 이른바 ‘의료 농단’의 진실을 밝혀낼지 관심이 모인다. 관련자들의 해명에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의혹을 꼽아봤다.


ⓒ연합뉴스
11월26일 박근혜 대통령 주치의였던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비선 진료’ 어디까지?



비선 진료 의혹의 핵심은 김상만 전 녹십자아이메드 원장이다. 2013년 8월 김상만 당시 차움의원 의사가 대통령 자문의로 위촉됐다. 통상은 대통령 주치의가 자문의단을 꾸리는데, 당시 대통령 주치의였던 이병석 세브란스병원장은 자신이 추천하기 전에 김상만 전 원장이 이미 명단에 들어와 있었다고 언론에 밝혔다. 김 전 원장은 최순실·순득 자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수년간 주사제를 처방한 인물이다. 그는 최근 언론에 자신을 청와대로 부른 이는 안봉근 당시 제2부속비서관이었다고 밝혔다. 안봉근 비서관은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전뿐 아니라 취임한 이후에도 최순실·순득 자매 이름으로 김상만 전 원장한테 주사제를 대리처방 받았다. 김 전 원장은 최순득씨 이름으로 주사제를 처방한 뒤 직접 청와대로 가져갔다. 정맥주사인 경우 간호장교가 주사하고, 피하주사인 경우 김 전 원장 본인이 직접 놓았다고 보건당국 조사에서 밝혔다. 이런 진료는 공적 프로세스를 우회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2014년 9월부터 2016년 2월까지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은 11월26일 기자회견에서, “다른 자문의 치료와 달리 김상만 전 원장의 경우는 주치의를 통하지 않고 의무실장이 직접 연락을 한다”라고 말했다. 또 서 병원장은 의무실장 연락으로 김상만 전 원장과 셋이 진료에 들어간 적은 있지만, 태반·백옥주사 등에 대해 “요청받은 적이 없다. 적어도 내 컨트롤하에서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초대 대통령 주치의였던 이병석 세브란스병원장이 “대통령이 태반주사 등 영양주사를 먼저 요구했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라고 밝힌 점을 고려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주치의를 통하지 않고 직접 김상만 전 원장에게 각종 주사를 요청해 맞았을 수도 있다.

김상만 전 원장은 또 2013년 9월 박근혜 대통령 혈액을 최순실씨 이름으로 검사했으며 혈액은 간호장교가 채취했다고 했다. 하지만 간호장교 두 명 중 한 명인 신 아무개씨는 그를 아예 본 적이 없고 혈액 채취도 한 바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 명인 조 아무개씨는 혈액 채취 관련 질문에 대해 답한 바 없다. 김상만 전 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그때 피를 가져온 건 간호장교가 아니고 행정관이었다더라”고 말을 바꿨다. 그는 대통령 혈액을 가져온 인물로 이영선 전 청와대 행정관을 지목했다고 채널A가 보도했다.


김상만 전 원장이 “청와대 의무실 또는 관저 파우더룸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진료했다”라고 밝힌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의무실이 아닌 공간에서 대통령이 진료를 받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청와대 제2부속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인사는 “침실 안쪽 욕실 옆에 작은 드레스룸이 있는데 그곳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간이침대 정도나 놓을 수 있을까, 그렇게 큰 공간은 아니었다. 영부인이 머리를 다듬는 공간이거나, 제3의 공간일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미용주사 누가, 왜 주문했나?


청와대가 2014년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이른바 태반주사 200개, 감초주사 100개, 백옥주사 60개, 마늘주사 50개 등 영양·미용주사를 구입하는 과정에도 김상만 전 원장이 주도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은 “의약품 구입은 의무실장이 관여하며 주치의는 결재 라인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자문의인 김 전 원장은 당초 대리처방 의혹을 부인하면서 “대통령이 밖으로 못 나오니까 내가 필요할 때마다 청와대 의무실에 주문을 넣어두면 의무실에서 다 구비해뒀다”라고 언론에 해명했다. 그러면서 감초주사 등 각종 영양주사를 예로 들었다. 그가 직접 주문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비아그라·팔팔정 등 발기부전 치료제 구입에 대한 해명도 말이 엇갈려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선우 청와대 의무실장은 서면을 통해 비아그라 구매에 대해 “주치의 자문을 요청해 처방을 권고받아 고산병 치료용으로 구매했다”라고 밝혔다.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은 “약품 구입은 의무실장 소관으로 주치의는 결재 라인에 없다”라며 “(다른)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한 것으로 안다. 그 사람의 요청으로 알고 있고 나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세월호 당일 진료받았나?


이른바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진료 내지는 시술을 받았을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관저에 있었던 사실이 공개되면서 관저에서 모종의 진료를 받은 것 아니냐는 의심이 쏠렸다. 참사 당시 간호장교로 근무한 신 아무개씨와 조 아무개씨가 연이어 해명에 나섰다. 신 아무개씨는 “세월호 당일 오전 관저에 가서 부속실에 가글을 전달했다. 당일 대통령을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가글 전달 시각은 오전 10시쯤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첫 서면 보고를 받던 시점이다. 앞서의 제2부속실 근무 경험자는 “의약품은 간호장교가 갖다 주는 게 맞다. 필요한 게 있으면 보통 의무실장을 통해서 요청한다. VIP 취향에 따라 달라지므로 가글 상시 비치 여부는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간호장교로 미국에 머물고 있는 조 아무개씨는 세월호 참사 당일 진료가 없었고, 대통령을 보지 못했으며, 관저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이나 청와대 직원에게 정맥주사나 피하주사를 놓은 적은 있지만, 백옥·태반·마늘주사나 프로포폴 등 성분에 대해서는 의료법상 비밀누설 금지 조항에 위반된다며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또 김상만 전 원장이 진료할 때 본인은 없었다고 말했다. 두 간호장교 인터뷰는 청와대와 사전 조율을 거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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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일 프랑스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김영재 원장의 처남이 운영하는 존제이콥스 홍보 부스에 들렀다.


세월호 참사 당일 자신의 행적에 대한 말을 바꾼 의사도 있다. 김영재 원장이다. 서울 논현동에 있는 김영재 의원은 최순실씨의 단골 성형의원이다. 김영재 의원 측은 당초 참사 당일인 수요일은 정기 휴진일이어서 김 원장이 인천에서 골프를 쳤다며 고속도로 하이패스와 골프 영수증을 공개했다. 하지만 김영재 의원의 프로포폴 관리대장에 2014년 4월16일 프로포폴 15㎖를 사용한 게 발견되자 김영재 의원 측은 “당일 오전 9시께 장모에게 노화방지용 자가혈소판풍부혈장(PRP) 시술을 10~20분 했다”라고 말을 바꿨다. 김영재 의원 측 한 관계자는 “‘휴진’은 언론에서 만든 얘기다. 예약제라 솔직히 휴진이라는 개념이 없다”라고 말했다. 또 “프로포폴을 외부로 반출한 적 없고, 파쇄한 문서는 최순실씨와 관련 없다”라고 해명했다.

청와대가 왜 소규모 성형의원을 도왔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을 제쳐두고라도, 김영재 원장은 수사 대상이다. 각종 특혜 의혹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김영재 의원은 의사 한 명에 간호사 두 명이 있는 소규모 의료기관이며, 김영재 원장은 전문의가 아닌 일반의다. 김 원장 부인 박채윤씨가 대표로 있는 의료기기 회사 와이제이콥스메디칼(2011년 설립), 처남이 대표로 있는 화장품 회사 존제이콥스(2004년 설립)는 규모도 작고 매출 등 실적이 뚜렷하지 않았다.

현 정부 들어서는 달랐다. 와이제이콥스메디칼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해 중남미(4월)와 중국(9월), 올해 프랑스(5월) 순방에, 존제이콥스는 프랑스 순방에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했다. 박 대통령이 이 화장품 회사 부스를 직접 방문했다. 이 회사는 2월 청와대에 명절 선물용 화장품을 납품했다. 그 뒤 5월 신세계면세점, 7월 신라면세점에 입점했다.

청와대가 김영재 의원 가족 회사를 직접 지원한 정황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와이제이콥스메디칼의 수술용 봉합실 연구에 15억원을 지원한 것에 대해 주형환 산자부 장관은 “BH(청와대) 비서관실에서 R&D 저희 소관과에 요청한 것이라고 보고받았다”라고 말했다. 앞서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부인은 “박 대통령 지시로 김영재 의원과 회사의 중동 진출을 도와줄 컨설팅 회사를 연결해줬다”라고 언론에 밝혔다. 조 전 수석은 이 해외 진출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질되었고, 컨설팅을 담당했던 업체는 세무조사를 받았다. 와이제이콥스메디칼에 특혜를 준 것으로 지목된 인물은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이다. 서창석 원장은 대통령 주치의 시절이던 2016년 1월 와이제이콥스메디칼의 기능성 봉합실 개발 사업계획서에 참여자로 이름을 올렸다. 보건복지부 출신 한 관계자는 “대학병원 교수가, 더구나 서울대병원이 다른 소규모 민간 업체의 개발 사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윗선이 없다면 절대로 안 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서창석 원장은 김영재 원장의 부인 박채윤 대표를 2014년 봄에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서창석 원장이 지난 5월 서울대병원장에 오른 과정도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건복지부 출신 한 관계자는 “분당 서울대병원 출신이 다시 본원으로 오는 경우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다”라고 말했다. 서창석 원장은 임명 직후 김영재 원장의 봉합실을 서울대병원 의료재료로 등록하라고 압박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 실은 지난 7월 실제로 도입됐다.

서창석 원장이 지난 7월 일반의인 김영재 원장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외래교수로 위촉했다가 2주일 뒤 해촉한 것도 명백한 특혜이자 규정 위반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서창석 원장은 “중국인 VVIP가 우리 병원을 이용해 김영재 원장 시술을 받는데, 아무 타이틀도 없이 하게 하는 건 불법이라고 생각했다”라고 해명했다. 일련의 특혜 의혹에 대해 김영재 원장 측은 “전문의냐 아니냐는 성형외과협회에서 만들어낸 프레임이다. 저희가 아는 한 최순실씨에게 받은 도움은 전혀 없다”라고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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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씨의 단골 성형외과인 김영재 의원(위)은 박근혜 정부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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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라 부르기도 민망한 원고 뭉치”

11월28일 국정 역사 교과서 현장검토본이 공개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헌정 교과서’가 아니냐는 그간 의혹은 사실에 가까웠다. 공개하지 않았던 집필진도 드러났는데, 대부분 친정부·우편향 인사들이었다.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2016년 12월 13일 화요일 제482호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지난 11월28일 국정 역사 교과서의 현장검토본이 공개됐다. 지난해 11월3일 고시를 확정하고 밀실 집필을 이어온 지 1년 만이다. 그간 국정교과서를 둘러싸고 비판과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교육부는 “실제 나온 교과서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교육부가 자랑하는 대로 국정 역사 교과서가 진짜 ‘질 높고 균형 잡힌’ 교과서인지, 전문가들과 함께 그 내용을 검증했다.

교과서야? 오답 노트야?

국정 역사 교과서는 책 전반에 걸쳐 초보적인 사실 오류가 수두룩하다. 청동기 시대 단원은 첫 문장부터 틀렸다.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금속 도구는 청동기였다”(고등 <한국사> 20쪽). 고고학고대사협의회 김장석 회장(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설명에 따르면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금속 도구는 ‘청동’이 아닌 ‘순동’으로 만든 것이다. 김 회장은 “집필자의 무지함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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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국정교과서를 둘러싸고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이준식 교육부 장관(위)은 “실제 나온 교과서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근현대 단원에도 틀린 내용이 많다. 안중근 의사의 미완성 논책 <동양평화론>을 ‘자서전’으로 둔갑시키고(고등 <한국사> 190쪽),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성립 당시 노동국 총판이었던 안창호를 내무 총장으로 잘못 표기했다(고등 <한국사> 210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 강령’ 일부 내용은 실제 원문과 다르다(고등 <한국사> 238쪽).

세계사 단원도 만만치 않다. 세계 최고(最古) 법전은 우르남무 법전인데, 함무라비 법전을 세계 최초의 법전으로 설명하거나(중등 <역사 1> 18쪽),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성립 과정 순서를 뒤바꿔놓는(중등 <역사 2> 12쪽) 등 오류가 심각하다. 한국서양사학회 강성호 회장(순천대 사학과 교수)은 “서양사를 기술한 14쪽에서만 확실한 오류 19건을 찾아냈다. 한 쪽당 평균 1.5건으로, 이를 전체 교과서에 적용하면 오류 개수는 모두 400~ 500건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23회나 언급

하지만 이런 오류들은 현대사 왜곡 서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현장검토본이 발표되기 전부터 국정교과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헌정 교과서’가 아니냐는 의혹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실제 공개된 내용을 보면 의혹은 사실에 가깝다.

일단 국정교과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언급하는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고등 <한국사>의 경우 261쪽에서 269쪽까지 9쪽에 걸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력과 업적을 다루었다. 한 쪽에 일곱 번 등장하기도 하는 ‘박정희’ 이름 석 자는 책 전체에서 총 23회나 언급된다. 교과서에 등장한 전 역사적 인물을 통틀어 가장 많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이신철 교수는 “예전 한 검정교과서의 경우 한 페이지에 ‘민족’이라는 단어가 아홉 번 등장해 ‘너무 민족주의적인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거기에만 비추어봐도 국정교과서가 얼마나 ‘박정희 찬양’ 책인지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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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과 함께 나온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맨 위·아래)은 뉴라이트 학자들의 <대안 교과서>에 실린 것으로, 이번 국정교과서에 그대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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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한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을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치켜세운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과 비교하며 5·16 쿠데타 세력의 경제개발 계획을 높이 평가하고(고등 <한국사> 260쪽),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박정희 정부의 수출정책, 중화학공업 육성, 새마을운동 등의 장점을 자세히 설명했다(고등 <한국사> 264~268쪽). 박정희 집권 시대를 다룬 단원 소제목들을 살펴보면, ‘박정희 집권→경제발전’의 인과관계를 암시한다. ‘박정희 정부의 출범’ 뒤에는 ‘경제개발 계획의 추진’이, ‘유신 체제의 등장’ 뒤에는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따라붙는 식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오를 설명할 때는 항상 명분과 단서가 붙었다. 5·16은 “사회적 혼란과 장면 정부의 무능, 공산화 위협”(고등 <한국사> 261쪽) 때문에, 1965년 체결된 한·일 협정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고등 <한국사> 262쪽), 유신 체제는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고등 <한국사> 265쪽) 이루어진 것이라고 국정교과서는 설명했다.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아홉 줄에 걸쳐(고등 <한국사> 268쪽) 그 장점을 나열하다가 단점은 딱 한 줄, “유신 체제 유지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라고 서술했다.

2008년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창립한 교과서포럼은 <대안 교과서 근·현대사>를 펴냈다. 친일을 미화하고 이승만·박정희를 찬양했다는 비판을 받은 이 책 195쪽에는 포항제철 착공식에서 발파 스위치를 누르고, 용광로에 불을 지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이 나란히 실렸다(왼쪽 위 두 사진). 이 두 사진은 이번 국정교과서 중등 <역사 2> 143쪽과 고등 <한국사> 267쪽에 각각 나눠 실렸다. 이제껏 역사 교과서에 수록된 박정희 관련 사진은 주로 쿠데타 당시 군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또한 이번 국정교과서는 이례적으로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고등 <한국사> 266쪽)도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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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역사 교과서에 주로 실려온 쿠데타 당시 군복 차림의 사진(위)은 수록되지 않았다.


교과서가 재벌 홍보?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주연이 박정희라면, 조연은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 집단”이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 아래) 재벌은 투자 규모가 큰 중화학공업과 신규 사업에 진출하였”고 “이후 미국, 유럽 등의 세계적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였다”(고등 <한국사> 267쪽). 교과서에는 삼성 이병철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유한양행 유일한 회장을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소개하며 그 업적을 기술하기도 했다. 이신철 교수는 “교과서에 특정 기업인과 현존 기업명을 홍보한 것이 불법이 아닌지 검토가 필요하며, 다른 경쟁 기업의 소송도 가능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작 우리나라 경제개발에 헌신했던 노동자, 농민, 소상인 등은 ‘고속 성장의 그늘’이라는 소단락 안에서 짤막하게 다뤄졌다. 전태일 열사는 그의 주장에 대한 제대로 된 소개도 없이 “요구가 매번 묵살되자 분신자살”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독일 나치 정권도 미화

국정 역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도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서양사학회 강성호 회장은 국정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독일 나치 정권의 등장 과정을 미화화고 부정적 서술을 최소화했다고 분석했다. “대공황을 전후하여 사회 혼란이 가중되자 사람들은 안정과 질서를 가져다줄 강력한 정권의 출현을 희망하였다”(95쪽)라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또한 국정교과서는 세계사 분량 대부분이 미국 역사 중심이며 동남아시아·인도·서남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 대해 “광범위하고 철저한 무관심”을 보이고 있다고도 비판받았다. 실제 서양사 부문 집필진 3명 가운데 2명이 미국사 전공자다.

내용은 둘째 치고, 세계사를 ‘국정’으로 가르치는 것 자체가 국제사회에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보통 교과서를 누가 편찬하느냐에 따라 국정(Government -issued Textbook System), 검정(Textbook Authorization System), 인정(Textbook Adoption System), 자유발행(Textbook Autonomy System) 체제로 나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을 대상으로 중·고등 과정의 역사 교과서 발행 실태를 살펴보면, 국정제가 남아 있는 나라는 멕시코·그리스·아이슬란드·터키·칠레 등 5개국뿐이다(이 가운데 멕시코·터키·칠레는 검·인정도 병행한다). 국정과 정반대인 자유발행은 16개국이나 되었다. 서유럽 등 국내총생산(GDP)이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자유발행제가 많다. OECD 회원국들은 국정→검·인정→자유발행제로 넘어가는 추세이지, 한국처럼 검정제에서 국정제로 역주행하려는 나라는 한 곳도 없다(<시사IN> 제333호 ‘역사의 주권은 국가에게 없다’ 기사 참조).

이신철 교수는 최근 만난 일본과 중국 출판 관계자 및 학자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며 국정 역사 교과서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을 전했다. “일본에서 우익 교과서를 펴내는 우익 출판사 관계자가 한국에서 1년 안에 국정 역사 교과서를 펴낸다는 소식을 듣고 말문이 막혀 ‘아무리 한국이 압축 성장을 했다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놀라더라. 중국에서는 공산당 원로들이 ‘한국처럼 우리도 국정교과서를 내자’고 주장하고 나서 학계 학자들이 골치가 아프다는 얘기를 전했다. 이 얼마나 국제적 망신인가.”




ⓒ시사IN 신선영
11월30일 역사교육연대회의 소속 학자들이 국정교과서 내용을 분석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올드 보이’들이 쓴 낡은 교과서



역사학계 전문가들은 이번 국정 역사 교과서에 ‘한물간’ 학설도 잔뜩 실렸다고 지적했다. 대표 사례가 고려시대 권문세족을 권문(權門)과 세족(世族)으로 구분해 부른 것인데, 이는 오히려 교육부가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했다’며 자랑스레 내세운 부분이다.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이익주 교수 설명에 따르면, 이런 구분법은 고려시대 변화와 발전을 강조하던 민족주의 사관을 비판하는 차원에서 1990년대에 제기된 학설로,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이 교수는 “권문세족을 권문과 세족으로 기계적으로 분리하면 고려 후기 사회발전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양반·상민·노비의 구성 비율에 관한 설명(고등 <한국사> 145쪽)이나 광주 학생 항일운동을 ‘여학생 댕기머리 희롱’으로 축소 묘사한 부분(고등 <한국사> 220쪽) 등도 학계에서 거의 폐기되다시피 한 학설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서남아시아보다 농경이 늦게 시작되었지만”(고등 <한국사> 16쪽)이라는 설명은 50년 전쯤에나 통용되던 학설이다. 고고학고대사협의회 김장석 회장은 “남중국의 쌀 재배가 서남아시아보다 최소한 1000년 이상 빨랐다는 것이 고대사학계 상식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낡은 학설이 교과서에 실린 원인은, 집필진 대다수가 현직에서 은퇴한 고령 연구자들이기 때문이다. 역사 전공 교수들은 “학회 활동도 하지 않아 최신 동향을 접할 길이 없는 은퇴 사학자들이 기존 교과서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답습하거나 자신의 특정 학설이 적힌 저서만 참고하다 보니 이런 낡은 교과서가 나온 것 같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처럼 오류·왜곡투성이인 국정 역사 교과서를 두고 역사학계와 현장 교사들은 ‘수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고쳐서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국역사교사모임 등 485개 단체가 속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는 국정 역사 교과서에 대해 “교과서라는 이름을 달기에도 민망한 원고 뭉치일 뿐”이라며 즉각 폐기하고 교육부 장관이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교육부는 12월23일까지 현장검토본에 대한 국민 여론을 듣고 현장 적용 방법을 검토하겠다는 방침이다. 국정·검정 교과서를 1년 동안 혼용하는 방안 등도 거론되지만 박근혜 정부 특유의 ‘물타기’와 ‘시간 벌기’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교육부는 12월1일 “국정교과서를 거부하는 교육감에게는 시정 명령과 특정 감사 등 모든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