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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양심 문제에 관하여 - 교육에서 가르쳤으면 하는 것들..|_

일취월장7 2016. 8. 11. 14:20

[스크랩] 지식인의 양심 문제에 관하여|_경제현안

라그랑지 | 조회 586 |추천 9 |2016.08.09. 10:14 http://cafe.daum.net/kseriforum/7ofr/32073 

안녕하십니까? 광수 소장입니다.

 

이번 공부방에서는 한국의 고용구조 문제에 관해 강연을 했습니다만 그에 앞서 양심과 도덕의 문제에 대해 한 말씀 드렸습니다. 이에 고용구조 문제에 관해서는 강연장에서의 설명으로 대체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지식인의 양심과 정치인의 도덕성 문제에 대해 한 말씀 드려보기로 하겠습니다.

 

저희 연구소는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 민간연구기관으로서 국내에서는 많은 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계 20여개 국에서 저희 연구소의 <경제시평>을 구독하고 있을 정도로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 연구소의 책임자로서 일하는 저 역시 제가 원하든 원치 않든 지식인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런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분명히 저는 대학생 시절을 포함하여 연구하는 일을 제 평생의 직업으로 삼아 지난 30년 동안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에 비해 하나라도 더 많이 배우고 연구하며 문제해결의 대안들을 고민해오고 있으니 보통사람들에 비해서는 세상 경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한두 가지라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한두 가지 더 많이 안다는 것 또는 지식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끔씩 생각해보곤 합니다. 그런 생각들을 통해 지식과 지식인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식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흔히들 책 속에 담겨 있는 것을 지식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현실 세상에는 훌륭한 지식을 담은 책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온갖 잡서들이 더 많이 넘쳐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설명의 편의상 이 세상에는 단 한 권의 책밖에 없으며 그 책 속에 담겨있는 내용은 모두 오류가 없는 진짜 지식(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처럼 과학적 사고와 논리에 입각한 지식으로 한정)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지식이 책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 책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똑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똑 같은 지식을 지닌 지식인들의 주장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심지어는 정 반대의 주장과 행동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예컨대 이수일과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경제학원론 책을 똑같이 공부해 경제전문가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 두 사람에게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지금 주식을 살 것인지 팔 것인지를 말해보라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똑 같은 지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대답도 똑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두 사람의 대답이 똑같을 수도 있고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똑 같은 지식을 지니고 있는데 왜 같은 문제에 대한 대답은 다를까요?

 

여기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식 자체에 대한 인식 또는 정의가 잘못된 경우와, 둘째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 같으면서도 한 가지로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진짜로 지식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앞서의 단 한 권뿐인 책 속에 담긴 내용만이 정말로 유일한 지식이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그 지식을 접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지식인이 되어야 합니다. 책이 단 한 권뿐이듯이 지식인도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현실성도 설득력도 없는 말입니다. 모든 지식인들이 그저 컴퓨터의 메모리와 같이 기계적인 암기적 지식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지식인과 책이 구별이 안됩니다. 굳이 지식인이 필요 없게 됩니다. 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책을 찾아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란 단지 책 속에 들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책을 본 사람의 이해력과 통찰력에 의해 파생되는 창의적 지식(creative knowledge)까지를 포함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지식이란 공부하고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계속 쌓이고 축적되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책 속에 담겨 있는 지식은 앞서 진짜 지식으로 가정하였는데 진짜 지식이란 달리 말하면 현시점에서 검증된 지식(tested knowledge)’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즉 진짜 지식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까지로 국한되며 앞으로도 계속 진짜 지식으로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으며, ‘검증을 통해서 진짜 지식임을 확인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순된 말이기는 하지만 진짜 지식이란 항상 변할 수 있는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 지식이 항상 불안전하고 불안정한 것은 지식인의 이해력과 통찰력에 의해 2차적으로 파생되는 창의적 지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인의 창의적 파생지식이야말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생생하게 살아있는 지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검증된 지식 못지 않게 살아있는 지식 즉 이해력과 통찰력을 지닌 지식인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식이 제대로 발전하고 있느냐 못하느냐는 단순히 양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대학을 간다고 해서 또는 모두가 다 무조건 공부를 한다고 해서 지식이 발전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는 한 나라의 학문적 수준이나 지식 수준은 단지 지식인이라는 간판을 붙인 사람 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해력과 통찰력을 갖춘 창의적 지식인의 수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지식 수준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간판을 붙인 사람들은 넘쳐나지만 창의적 지식인은 크게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창의적 지식이 책 속의 지식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치열하고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책 속의 지식이란 창의적 지식들이 치열한 공개적 검증과정을 거쳐 쌓인 축적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책을 통해 지식을 얻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지식인은 항상 검증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식인이 검증을 두려워한다면 더 이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식은 지식인을 통해 끊임없이 창조적 생성 발전을 하지만 역으로 지식인은 끊임없이 검증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10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조그만 저희 연구소와 제가 전문지식기관으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많은 국민들로부터 높이 평가 받고 있는 것은 단지 책의 내용을 암기해서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책 속의 내용에 대한 이해력과 통찰력을 통해 파생되는 창의적 지식이 풍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제시평>아니 저희 연구소의 발간서적들을 보시면 얼마든지 그런 창의적 지식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연구소나 저만이 몰래 감춰두고 보는 마법의 책은 결코 없습니다. 경제분석 보고서를 내는 곳이 대한민국에 어찌 저희 연구소뿐이겠습니까? 국책연구기관이나 재벌연구소, 국내외 금융기관 등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반인뿐만 아니라 전문기관이나 전문가 등 지식인 등 수천명이 저희 연구소의 <경제시평> 등 자료를 구독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외국의 유명 씽크탱크기관마저도 저희 연구소의 보고서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저희 연구소는 10년 전 연구소를 창립한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미 넘칠 정도로 공개적으로 검증을 받아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똑 같은 책을 본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경우는 두 사람의 양심의 차이에 기인할 수 있습니다. 또다시 설명의 편의를 위해 두 사람 모두 다 똑 같은 수준의 이해력과 통찰력을 지닌 지식인이며 심지어는 가치관도 같다고 합시다. 즉 두 사람은 양심을 제외한 나머지가 유전적으로 동일한 복제품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런 두 사람이 같은 책을 보고 서로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둘 중에 한 사람은 책의 내용이나 그로부터 파생되는 창의적 지식과는 다른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거짓말을 할까요?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의 문제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심(良心)이란 말 그대로 선량한 마음을 말합니다. 선량한 마음은 맹자의 말씀처럼 사람의 타고난 본심(本心)에서 저절로 발로되는 것입니다. 측은해하는 마음(測隱之心),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본심인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어질고 자비로운 인()이 발현되며, 부끄럽고 미운 마음으로부터 정의(定義)를 행하게 되고, 겸손한 마음으로부터 예의(禮儀)가 표출되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으로부터 지혜(智慧)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이 양심 즉 네 가지 본심에 따라 인·의·예·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네 가지 본심은 모든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러나 이 네 가지 본심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의·예·지를 행할 용기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인들조차도 이러하거늘 항차 일반인들보다 한두 가지 더 많이 알고 있는 지식인의 경우에는 양심적 행동이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지식인이 더 많이 알고 있는 자신의 지식에 따라 양심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용기와 노력이 요구됩니다지식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는 것이 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지식인들에게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특별히 더 많은 양심적 행동이 요구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식이 속성상 무형의 힘 또는 권력(power)’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많은 지식인일수록 더욱 유명해지고 영향력이 커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지식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말을 참고 삼아 선택하고 의사결정하며 행동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니까요. 유명해지고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 바로 그것이 곧 힘이요 권력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힘이나 권력은 금력이나 제도화된 권력만이 다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비제도화된 무형의 힘과 권력도 있습니다. 저희 연구소 포럼에 오시는 분들이나 전국 각지의 공부방 모임에 오시는 분들이 저희 연구소가 재벌처럼 돈이 많기 때문이라든지 제가 대통령이나 힘있는 정치인이거나 유명 연예인이라서 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희 연구소가 발신하는 지식과 정보에 공감하시고 신뢰하셔서 자발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연구소나 저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무형의 힘과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만 이미 21세기는 제도화된 힘이나 권력보다는 무형의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20세기는 산업자본을 바탕으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장관 등 제도화된 권력이 지배하는 시대였다고 한다면 21세기는 지식정보 발신력을 지닌 저희 연구소와 같은 전문지식 창출기관이 힘과 권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21세기는 지식정보화 시대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정보화 시대에 지식과 정부가 힘의 원천이며 권력의 근원이 되지 못한다면 굳이 지식정보화 시대라고 부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세상은 컴퓨터와 인터넷 등 정보통신 혁명을 통해 그렇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미 2003년 대선과 총선 때부터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누구든 인터넷 상의 네티즌들의 여론과 움직임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근대사를 돌이켜볼 때마다 통렬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이른바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심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한국의 근대사는 조선 말엽 외척들의 부패탐학 정치, 일제 식민지배, 한국전쟁과 냉전 속의 분단 독재정권, 민주화 이후의 무능과 정경관언사법 유착의 부도덕한 기득권 세력들에 휘둘리고 얼룩져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대화 과정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양심에 반하여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해오면서 기득권에 편입해온 반면, 힘없는 일반국민들은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오로지 머슴처럼 살아오는 삶을 강요당했습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욱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미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로 접어들어 대부분 일반국민들의 삶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지식정보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21세기형의 무형의 힘과 권력을 부여 받은 지식인들이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로 들어서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지식인들이 비양심적인 행동을 한다면 일반국민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현상들이 이미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지식인들의 양심적인 행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연구소나 제가 잘나서 나서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전문지식기관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자식세대들을 위해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만일 강력한 무형의 힘과 권력을 지닌 저희 연구소나 제가 사적 이익에 눈이 어두워 지식인으로서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면 국가와 국민들 그리고 자식세대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와 상처를 주겠습니까? 상상을 하기 힘들 것입니다.

 

 이제, 도덕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유학적 의미의 도덕보다는 근대국가적 의미의 도덕에 국한하기로 하겠습니다.

 

양심과는 달리 도덕(道德)이란 태어난 순간부터 후천적으로 배우고 쌓고 길러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개인의 본심의 발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도덕은 타인에 대한 배려 또는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으로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선(勸善)이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징악(懲惡)은 도덕에 의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심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도덕이란 공동체의 규율 또는 국가의 규범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덕을 최소한으로 성문화한 것이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국민 모두에게 한 표의 권리를 부여한 민주주의 사상 역시 가장 강력한 도덕적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도덕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은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덕적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합니다. 즉 도덕적 행동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용기보다는 학습(공부)이 중요한 것입니다. 도덕은 공동체의 규율이나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에 해당합니다. 그런가 하면 앞서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의 기반을 이루기도 합니다. 따라서 도덕을 관장하는 사람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 지는 모르지만 최고 수준의 엄격한 도덕성을 필요로 합니다. 국가 질서 및 규율 즉 법과 정책을 관장하는 것은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법과 정책즉 정치가 올바로 이루어지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그것을 관장하는 사람의 도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철저한 도덕성 검증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필수인 것입니다. 도덕성이 결여된 정치인들이 집권을 하게 되면 법과 정책이 엉망이 되게 됩니다. 즉 나라 전체의 도덕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기득권과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지배를 하게 됩니다. 사람 사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본능적인 짐승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자는 이기심과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짐승의 세계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의 도덕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지식정보가 곧 힘과 권력을 의미하게 되며 국가는 지식에 의해 지배되게 될 것입니다. 그 경우 다소간의 시차는 있을지언정 창의적 지식정보 발신력을 가진 지식인들이 힘과 권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한국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진보/보수 이념 중심에서 지식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정치판도가 일대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지식과 지식인에 의해 국가와 정치가 지배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치 권력을 갖게 되는 지식인들의 양심적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일반 국민들의 삶이 평안하고 국가가 제대로 발전해가기 위해서는 지식인의 양심적 행동과 정치인의 도덕성 검증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논거에 입각하여 저희 연구소는 부모세대보다 훨씬 더 많이 배우고 전문적 지식을 갖춘 자식세대를 중심으로 철저한 도덕성 검증을 통해 세대교체를 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혼란에 빠진 한국경제와 사회가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본 포럼과 저희 연구소는 전문적 지식과 도덕성을 갖춘 자식세대를 중심으로 기존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목표로 행동해오고 있습니다. 올 연초부터 시작했지만 이미 전국 각지의 많은 민초들께서 참여하시고 계시며 갈수록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각계각층의 전문가 및 지식인 계층의 참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머지 않은 시기에 국민 여러분들의 장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선택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한다면 한국은 지난 100년 동안의 근대화 과정에서 겪어 왔던 불행한 역사를 또다시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양심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식세대로의 세대교체를 위해 한국사회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진심으로 기대하겠습니다.



교육에서 가르쳤으면 하는 것들..|_교육문제

길상이 | 조회 25 |추천 0 |2016.08.10. 10:02 http://cafe.daum.net/kseriforum/7ofv/5480 



저는 살아가면서 정말 한번도 일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많이도 배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데 아는 게 없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래서요, 배워서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 부분들은 과감히 빼버리고요,


첫째, 윤리과 철학이 강화되야 한다고 봅니다. 종교와 죽음에 대하여도 토론하고 학습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 가치있는 삶인가?

        문제를 내기위한 나열식 공부, 외우기식 공부는 안되겠죠.


둘째, 의료입니다.

        스스로 자기 몸의 의사가 되어야합니다.

        아주 중요한 생명을 다루는 지혜가 왜 꼭 의대에서만 가르쳐져야 하나요.

        초등학교때부터 가르치기 시작하면, 고등학교 졸업할 때 쯤되면 상당한 수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질환 50대 질환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겁니다.

       


셋째, 법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죄의 유무를 따지고 판결을 내리는지 원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리고,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사건을 위주로, case별로 공부할 수 있게 해야합니다.

        그래야, 지금처럼 일부 법을 독점한 사람들이 농단도 사라지고, 일상에서 법을 어기지 않게 더 조심하게 될거고,

         진정한 배심원제가 자리잡을 겁니다.


법과 의료를 배우면 안된다고 헌법에 나와있다거나, 국제적인 규제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을 건데요.

정말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교육이 진정한 교육 아니겠습니까?


고등부 역사책에는 사실 관계만을 서술하고, 각 사건에 대하여 대표적인 여러 주장(좌, 우, 여러주의등)을 같이 실어놓고, 참고문헌을 제시하는 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영어는 실생활 영어를 주로 하고요.

실제 외국의 논문을 보면 문법이나 단어가 딸려서 논문을 못보는 경우는 거의 없죠. 매우 평이한 방식의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단어는 모르면 찾아보면 되고요.

논문이 어렵다는 것은, 대부분 그 논문을 쓴 사람이 지식이나 표현력이 풍부하지 못해서 글을 어렵고 이상하게 쓰기 때문입니다.

근데, 대학 영어시험 문제를 보면,,, 뭐 이건...완전히 문제를 위한 문제지요.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어려운 영어는 "영어를 못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학은 물리학이나 천문학, 수학등을 전공할 학생에게만 필요한 부분은 따로 떼놓고 가르치고 평가하는 건 어떨까 생각합니다.


국어는 결국 잘 읽고, 쓰고, 말하면 되는데,, 너무 어려운 이론은 국문학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비슷하게라도 자신의 글들을 많이 쓰게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시, 소설, 수필등을요. 그걸로 평가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학생들이 정말 꿈이 없다고 생각해?
꿈이 없다는 학생들이 있다. 이유를 들어보면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다. 그런 학생들에게 가능성을 보여주면 꿈을 키우기도 한다.
  조회수 : 622  |  차성준 (포천 일동고등학교 교사)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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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승인 2016.08.10  15:22:05

나는 학생들을 상담할 때 종종 미술을 활용한다. 반으로 접은 A4 용지에 행복·기쁨·슬픔·우울함과 관련해 떠오르는 색을 칠하게 하고, 상담을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주제인 성적·학업·연애·진로 등에 대해 색을 다시 칠하게 한 후 왜 이 색이 떠올랐는지, 조금 전의 기분과 관련한 색과 비슷한 경우 왜 그런지 질문한다. 단지 어떤 색을 왜 칠했는지를 묻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자주 활용하는 편이다.

한 번은 학교의 행정적인 문제로 인해 30분 넘게 학부모와 통화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자녀가 속 깊은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말을 들었다. 때마침 그 아이와 상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아이가 “선생님, 저 왔어요”라며 교무실에 들어왔고, 나는 준비해두었던 자료와 색연필을 챙겼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아이는 행복·기쁨·슬픔과 관련해 자신만의 색을 골랐다. 그리고 왜 그 색을 선택했는지 표현했다. ‘우울함’과 관련해 그 아이는 초록색을 칠했다. 이어진 ‘진로’라는 단어에도 그 아이는 초록색을 칠했다. 우울함과 진로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 아이에게 물었다.

“진로에도 초록색을 칠했고, 우울함에도 초록색이네? 혹시 어떤 이유가 있을까?”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데…”라고 학생은 말끝을 흐렸다. “비현실적이에요.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 우울해요”라고 답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해성 그림</font></div> 
ⓒ박해성 그림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변변찮은 학원도 주변에 없고, 학생들 집은 대체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진로는 명확한데 가는 길이 험난하다. 학교에 미술 교사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아이를 지도해달라고 하는 것은 현실상 쉽지 않다. 그래서 학생들은 일찍 바라는 진로와 진학을 접고 현실과 타협한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같이하자고 손 내밀어야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림 그리기를 꾸준히 하고 있다는 아이에게 방학 동안 일주일에 두 장씩 그려서 보내면, 그 그림에 대해서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후에 만난 아이는 웃으면서 옆에 있던 남자친구에게도 과제를 내달라고 했다.

이 아이를 통해서 꿈은 있지만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꿈을 지지하고 싶어도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선뜻 지원해주지 못하는 부모가 많다. 불황으로 갑작스럽게 직장을 잃은 학부모들의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게다가 내가 근무하는 이 지역은 문화적·교육적 인프라가 매우 부족한 편이다.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놀이 공간은 PC방, 노래방, 당구장뿐이다. 볼링장이라도 가려면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40분 정도 나가야 한다. 극장까지는 최소 1시간30분이 걸린다. 근처에 군부대가 많아서 군 용품점, 치킨집같이 특화되어 있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서울에서 이곳에 오는 막차 시간은 저녁 8시50분으로 꽤 빨리 끊기는 편이다. 도심에 사는 아이들이 으레 할 수 있는 것들이 이곳에서는 크게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다.

사진기자가 꿈인 아이가 있었다. 가까운 곳에 학원이 없어서 괜찮은 학원을 가려면 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학원비 또한 만만치 않아서 가족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어느 날 그 학생이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담임교사에게 물어보니, 부모의 허락을 받아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사진을 배우러 갔다고 했다. 이 아이에게는 스스로 그 어려운 현실을 이겨낼 힘이 있었다. 순간,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했던 아이, 그리고 비슷한 현실에 갇힌 아이들이 떠올랐다.

과연 나는 교사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심하다 결국 방학식 날 아이들에게 희망 진로와 관련된 자그마한 과제를 개별적으로 내주었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같이하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