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 바로보기

우익 망령 살아나는 일본도 '국정 교과서'는 없다!

일취월장7 2015. 11. 2. 14:53

우익 망령 살아나는 일본도 '국정 교과서'는 없다!

[기고] 한국 역사 교과서 국정화 소식을 접한 소감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하게 추진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하는 국정화에 반대하면 "국민이 아니다"라는 발언이 여당 지도부의 입에서 나왔다. 국정화에 반대할 거면 북한에 가서 살라는 보수단체의 주장은 단골 레파토리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박 대통령이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일부 삭제하거나, 미화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임기 2년 조금 넘게 남긴 박근혜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있다. 8년 가까이 집권한 보수 정권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학생들의 '마음'에 수정을 가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교과서 문제는, 그래서 예민한 주제가 된다. 

<프레시안>은 서울대학교에서 역사교육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도쿄학예대학 명예교수를 맡고 있는 기미지마 가즈히코 명예교수가 역사정의실천연대에 보내온 기고글을 싣는다. 한국학 전문가인 일본인 원로 역사 교수가 바라보는 국정화 논란의 핵심은 무엇일까. 

기미지마 명예교수는 1945년생이다. 도쿄학예대학 명예교수, 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현재 일본학술회의 연휴회원, 일본역사학협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1960년대~1990년대 '교과서검정소송을 지원하는 역사학 관계자들의 모임'의 중심인물로 교과서 검정제를 반대해 왔고, 스스로도 일본의 교과서 집필자로 국정화는 물론 검정제에 맞서고 있다. 1990년대부터는 '한일역사공통교재' 제작을 추진했고 한국의 역사교과서를 번역하여 일본에 알리기도 했다.(편집자)

2015년 10월 12일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중학교·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소식을 접하고 한국 역사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한 사람으로서 매우 우려하고 있다. 

근년의 한국 역사교육은 심한 혼미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명박 씨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는 2007년에 정한 개정교육과정을 실시하지 않은 채 미래형 교육과정을 임의로 제정했으며, 또 2009년에 개정함에 따라 한국에서는 수시 개정을 통해 거의 매년 교육과정을 바꾸게 된 것이다. 한국의 역사교육이 큰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2007년 개정교육과정 고시까지 한국의 교육과정은 5~10년 간격으로 개정되어 왔다. 이것은 5년 임기의 대통령제를 실시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교육과정 개정에 대통령이 관여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김영삼 대통령 이후 민주개혁파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이 방식은 답습되었다. 1991년 제6차 교육과정 고시 때부터 7년이 지난 1997년, 김영삼 대통령 시기에 제7차 교육과정이 고시되었다. 이 조치는 허용 범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고등학교 역사의 경우 제7차 교육과정은 2002년도부터 적용하게 되었으나, 같은 해 고등학교에서 사용된 '국사'교과서에는 제7차 교육과정에 없던 근현대사가 기술되어 있었다. 갑자기 바뀐 것이다. 근현대사를 고등학교 2, 3학년용 선택 과목 '한국 근·현대사'에서 배우게 되었다. 근현대사가 갑자기 기술된 주원인은 일본에서 중학교용 우익적 교과서 <새로운 역사교과서>(후소샤)가 검정에 합격한 것 때문이었다. 이 사태를 초래한 것에 대해 필자는 크게 반성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한일관계가 아니라, 근현대사를 기술하게 한 방침 전환에 수많은 국민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근현대사를 배우는 것과 교과서에 근현대사를 기술하는 것에 있지, 어떤 근현대사를 배울까는 문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자국사 교과서(<한국 근·현대사>) 검정제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검정제 경험이 십년 조금 더 되었을 뿐이다. 

▲기미지마 가즈히코 도쿄학예대 명예교수ⓒ역사정의실천연대 제공


부실한 교육 행정과 보수 정권의 '입맛' 뒤엉켜한국의 역사 교과서, 길을 잃다 

제7차 교육과정(1997년 고시)으로부터 10년이 지난 2007년에 '2007년 개정교육과정'이 고시되었다. 자세하게 언급할 여유는 없지만, 역사교육에서는 획기적인 개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8년에 취임한 보수파 이명박 대통령은 이 교육과정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자신이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에 2007년 개정교육과정과는 다른 자신만의 교육 방침을 실현시키려 한 것이다. 그 출발이 신자유주의적 교육을 한층 더 추진하려는 미래형 교육과정의 발표였다. 

이 교육과정은 '총론'뿐 교과의 각론은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자유주의 이념을 교육제도에 강하게 반영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교육과정은 많은 국민들에게서 비판을 받아 일찌감치 사라졌고, 2009년 개정교육과정이 고시되었다. 그러나 각 교과의 내용은 2007년 개정교육과정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뉴라이트의 역사공격이 교육정책에 영향을 미쳐 역사교육만 문제 삼아 자국사의 교육과정을 개정하였다. 자국사를 강조하고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부추기는 교육과정이었다. 국수주의라는 비판에 따라 '국사'라는 명칭을 버리고 세계사와 한국사를 함께 배우는 '역사'를 신설한 2007년 개정교육과정의 과목을 '한국사'로 개칭하여 내셔널리즘을 강조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사로 개칭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 내용에도 개입하여 교육과정을 개정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검정에 합격한 교과서는 정부의 의도대로 집필되지 않았다. 검정에 합격한 교과서는 분류사를 쓰지 않고 계통적 서술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 이 '한국사' 교과서 때부터 검정제가 채용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사' 교과서는 역사연구의 성과를 반영하여 사실을 근거로 했으며, 사료나 사진, 삽화, 지도, 연표 등을 많이 활용하여 역사적 사고력을 키우는 교과서로 되었다. 제6차 교육과정 당시 '국사' 교과서를 일본어로 번역한 경험에서 볼 때, 그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검정 교과서의 본령을 발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교육과정 변경이 너무 단기간에 실시되어 교과서 편집에 지장이 생겼다. 2012년부터 사용된 교과서는 당시 고시된 교육과정(교육과학기술부고시 제2011-361호, 2011년 8월 9일 고시)에 준거하여 기술되지 못하였고, 실질적으로는 2007년 개정교육과정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검정에 합격한 '한국사' 교과서만 신교육과정에 준거해서 기술을 수정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것은 근현대사 부분의 보충이었다. 역사교과서는 길을 잃었다. 

더군다나 이명박 대통령의 의도를 담은 2009년 개정교육과정에서는 고등학교 3년간이 하나의 학년군으로 편성되고 모든 과목이 선택 과목으로 되었다. 따라서 '한국사'라고 이름 지은 자국사도 선택 과목으로 되었다. 이 조치에 대해 수많은 역사연구자와 교육자, 그리고 학부모회가 자국사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반대하여 한국사는 필수 과목이 되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모든 과목이 선택 과목이라는 제도 하에서 한국사만 필수 과목으로 된다는 비정상적 상태가 된 것이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제도가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된 것도 '한국사'를 선택 과목으로 하면 자국사를 배우지 않는 고등학생들이 생긴다는 주장이었고, 어떤 한국사를 배울 것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편 보수 세력이 문제로 삼은 것은 교과서 제도가 아니라 교과서 내용이었다. 2004년부터 본격화된 <한국 근·현대사>(금성사) 교과서를 향한 공격은 교과서 내용에 대한, 역사 해석에 대한 공격이었다. 2005년에 발족된 뉴라이트 단체인 '교과서 포럼'의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와 2013년 검정에 합격한 <한국사>(교학사)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을 이용한 다른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비판도 교육 내용과 역사 기술에 대한 공격이었다. 

일관되게 교육 내용에 대한 비판을 전개해 온 보수 세력으로서는 민주적 검정제도 하에서 교과서의 기술과 역사 평가를 둘러싼 비판적인 국민들의 목소리를 고려하면, '국정 교과서' 제도가 훨씬 더 쉬운 해결책일 것이다. 국론 통일이라는 명분의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정당성을 획득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더 좋은 역사 교육을 어떻게 할지, 좀 더 시간을 들여 토론하자

이렇게 보면, 한국의 많은 국민들이 왜 고등학생들이 역사를, 특히 자국사를 특별 취급을 해서라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고, 중국의 동북공정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로벌화된 세계 속에서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어떤 한국사를 배울 필요가 있는지 좀더 시간을 들여 차분하게 토론해 보는 게 어떨까. 이 점에 대해서 많은 국민들의 합의를 얻을 수 있다면 더 좋은 역사교육을 실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고등학생 역사 인식의 통일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교과서는 하나고 거기에 쓰여 있는 사실만이 '올바르다'고 합의할 필요는 없다. 여러 의견과 역사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도 좋다는 합의를 할 수 있다면 교과서는 국정으로 할 필요가 없다. 검정, 더 나아가서는 자유발행도 좋지 않을까? 다만 거기서는 누군가에게는 바람직하지 못할 교과서가 나올 수도 있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고등학생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의 역사 인식은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자국의 역사교육을 우려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일깨우며 조심스레 발언하였다. 

 

 해외 학자들 “한국 정부 국정화, 아베와 똑같아”

해외 한국학 연구자 204명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에 참여한 연구자 가운데 6명으로부터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유를 자세히 들었다. 이들은 한국의 퇴행에 대해 우려했다.

송지혜 기자  |  song@sisain.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425호] 승인 2015.11.02  15:02:13

 

해외에서 한국 관련 연구를 하는 교수와 강사 204명(10월28일 현재)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의견을 밝혔다. 10월24일 154명이 성명서를 발표한 이후 지속적으로 느는 추세다.

‘한국 역사학자들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지지하는 성명서’에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 대학 교수, 놈 촘스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교수,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 대학 교수, 새뮤얼 킴 컬럼비아 대학 교수 등이 동참했다. 일본 근대사를 전공한 알렉시스 더든 교수는 지난 5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역사 왜곡에 항의하는 학자 500여 명의 참여를 이끌어낸 바 있다.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은 성명서를 통해 “한국 정부의 국정교과서 계획은 민주국가로 인정받은 한국의 국제적 명성에 악영향을 미치고 일본 정부의 역사 수정주의를 둘러싼 지역 내부의 분쟁에서 한국의 도덕적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역사에 단일한 해석을 적용해 ‘올바른’ 역사를 만들 수는 없다”라고 강조했다.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이 성명서를 통해 의견을 밝힌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반년 만에 역사 교과서 수정 논란이 일면서다. 2008년 11월, 당시 브루스 커밍스 교수, 카터 에커트 하버드 대학 교수, 찰스 암스트롱 컬럼비아 대학 교수 등 해외 학자 114명이 “역사 교과서를 강제 수정하려는 시도는 집권 세력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으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스스로 훼손한 행위다”라고 비판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10월24일 해외의 한국학 연구자 154명이 발표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서. 10월28일 현재 여기에 동의하는 연구자가 203명으로 늘었다.  
ⓒ시사IN 신선영
10월24일 해외의 한국학 연구자 154명이 발표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서. 10월28일 현재 여기에 동의하는 연구자가 204명으로 늘었다.

 

2009년, 북미 학자 240명은 6월항쟁 22주년을 맞아 ‘한국 민주주의 역행’을 우려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2013년에는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해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침해를 우려한다’는 내용에 해외 한국학 연구자 206명이 동참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에 참여한 해외 한국학 연구자 가운데 6명으로부터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유를 좀 더 자세히 들었다. 인터뷰는 이메일과 전화 통화로 진행했다.

 

 

   
 

 

박노자(42·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동방언어 및 문화연구학과 한국학 전공 교수/ 모스크바 대학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모스크바 대학과 경희대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2011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역사와 아무 관계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볼 때 긍정적으로 조명되지 않는 부분을 바꾸려는 정치 행위일 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일제강점기에 일부 조선인이 관료로 ‘출세’한 것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려는 거다. 역사학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없으니까 전문가 집단 전체를 배제하고 정치가 뛰어들었다. 지금 상황은 시민과 지식인이 반대해도 무시하고 끝까지 추진할 태세다. 명분을 잃었지만 후퇴도 못하고 본인이 판 함정에 스스로 빠져 국정교과서를 반드시 실현시킬 것이다.

국정교과서의 탄생은 한국과 중국 관계를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 집단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 또는 조선 민중과 중국 민중의 투쟁을 역사의 큰 흐름으로 본다. 조선에서는 김구 선생이 국민당과 손잡고 독립운동을 펼쳤고, 조선 공산주의자는 중국 공산당과 손잡고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은 중국과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식으로 ‘교정’된 서술은 한국 역사가 대일본 제국의 일부가 되는 거다. 일제 식민지가 긍정되고 독립운동은 합법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묘사될 위험이 있다. 그러면 한국의 과거는 중국과의 공동 역사 담론과 멀어지면서 역사적·지역적 동질성이 깨진다. 북한의 항일 투쟁 위주의 역사 서술과도 결정적으로 이질화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 우파를 강화시키는 교과서가 될 거다. ‘일제가 한국의 자본주의를 배양시켰다’ ‘일제강점기에 출세한 사람이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식이다.

박근혜 통치기에 접어들어 국내 상황은 본질적으로 바뀌었다. 노르웨이에서는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했다면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적 단죄는 물론이고 당장 하야할 일이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도 대통령이 계속 통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자국민을 상대로 심리전을 벌인다는 게 민주사회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권력이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파괴하는데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는 국민이 절반이 된다니, 전반적으로 집단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은 한국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 해외 학자들도 연구하고 학생 만나느라 한국 사회에 개입할 시간이 없다. 하지만 해외에서 한국학을 하는 사람조차 좌시하지 못할 만큼, 한국의 민주화 성과가 무너져가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종범이 되는 기분마저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해외에서 한국학을 하는 이들은 한국 국가기관으로부터 지원금 등 보조금을 받기 때문이다(박노자 교수는 현재 한국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다). 학생들이 새로운 ‘교과서’에 시달려야 할 상황이 안타깝다.

 

 

   
 

 

도널드 베이커(70)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 아시아학과 교수/ 정약용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2008년 외국인 최초로 다산학술상 학술대상을 수상했다. 평화봉사단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광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

먼저 한국에서 ‘학문의 자유’ 제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교수와 교사, 학생들에게 지지의 뜻을 밝힌다.

우리는 역사가로서, 역사가 결코 어떤 고정된 형태를 띨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역사의 탐구가 풍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역사로부터 얻은 통찰은 우리가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미국의 철학자 겸 시인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것을 되풀이할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아베 정부가 하려는 역사 왜곡과 사실상 똑같다. 그들은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해 정부의 목적에 따라 이용하려고 한다.

미국의 우익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를 놓고 수십 년간 싸워왔다. 언젠가 미국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가 연방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는 국립인문학재단이 운영하는 프로젝트에 상당한 예산을 배정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세우는 프로젝트였는데, 부시 2세 행정부가 정권을 잡고 딕 체니 부통령의 부인을 국립인문학재단 수장 자리에 앉힌 이후, 그 프로그램은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역사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도록 요구한다는 이유로 종료시킨 바 있다. 그 지침은 아예 대중에 공개되지도 못했다. 이는 고등학생들이 스스로 미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할 만한 내용보다 미국 정부가 과거에 저지른 실수들에 지나치게 치중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가들에게 맡겨두어야 한다. 역사가들은 한 가지 정답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역사가는 역사가들끼리도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과거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나가는 방법이다. 과거에 대해 논쟁함으로써 그로부터 교훈을 얻고 역사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에 다다르게 된다.

 

 

   
 

 

군 드 괴스트르(52)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 한국학과 교수/ 1994년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윤치호 사례로 본 한국 문화 민족주의의 딜레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 기억의 정치, 역사 서술 등을 연구해왔다.

지난 몇 주간 진행된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을 보면 교육부가 정치 중립적인 기관이 아닌, 특정한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권력자가 만족해할 만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을 띤다. 교육부는 자기 스스로 인가한 교과서에 대해 허위 사실을 퍼뜨리고, 보수 정권은 한국의 주요 역사학회를 북한식 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의 옹호자로 몰아세운다. 우스꽝스러운 수준이다.

국정교과서 논쟁이 ‘역사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가’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없이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올바른’ 역사가 존재한다는 주장과 ‘객관적’이라는 단어의 남발은 소름끼칠 정도다. 부인할 수 없이 절대적으로 옳은 역사가 존재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역사가들의 사실 해석은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1987년 6월항쟁은 경제사적 관점에서 한국 경제발전의 새로운 시기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지만, 사회사적 관점에서 노동자 의식화의 새로운 국면으로 볼 수 있다. 둘 다 같은 시기를 다루지만, 서로 다른 자료를 사용하고 서로 다른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둘 다 국사라는 만화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86∼1990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있었다. 1987년 여름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민주화가 한 걸음 한 걸음 진행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권위주의 국가에 맞선 학생과 활동가, 평범한 시민의 존엄과 끈기, 그리고 한국인이 근현대사 전체에 걸쳐 정치적·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은 사실에 나는 깊이 감명받았다. 당시 민주화 투쟁이 지금의 ‘나’를 형성했다.

한국 사회를 가르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매우 극명하다. 정치적 양극화가 한국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지만, 한국의 경우 이데올로기 양극화가 여러 논쟁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2008년에 시작된 ‘보수 결집’ 움직임은 뉴라이트가 한국의 국가 정체성을 ‘범한국’에서 ‘남한’ 중심으로 재정립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의 역사 교과서 논쟁은 여야의 정치적 대결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렘코 브뢰커(43)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 한국학과 교수/ 라이덴 대학과 서울대를 거치며 한국사를 공부했다. 탈북자 장진성 시인이 쓴 <경애하는 지도자에게>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남한의 민주화 역사’ ‘남한 자유주의’라는 사실과 상충한다. 세계에서 오로지 하나의 진실과 관점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나라는 전체주의 국가뿐이다.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남한 정부가 처한 압력은 이해하지만(북한이 이웃인 상황은 어떻게 보아도 쉽지 않다), 교과서로 한 가지 관점을 가르치는 건 결국 자멸적인 행동이다.

오스만 제국이 서유럽 교과서들에 (악역으로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등장하지 않거나 터키 교과서에 아르메니아 학살이 누락된 것 등 교과서 논쟁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네덜란드 교과서만 보더라도 인도네시아 식민지 점령기와 독립전쟁 기간 중 네덜란드 군인들이 저지른 잔혹행위들을 사실상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면 정부가 교과서를 집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인은 정치를 해야 한다. 역사 서술은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한다.

나는 남한의 국가 이미지가 크게 걱정된다. 남한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성공적으로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는 남한에서 배울 것이 많다. 지금 남한이 전 세계에 보여주는 모습은 전체주의로 회귀하고 있는 국가다.

 

 

   
 

 

마이클 페티드(56)

미국 뉴욕 주립대학 빙엄턴캠퍼스 한국문학 전공 교수/ 1983년 미국의 한 무역회사 직원으로 한국 지사에 파견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그 뒤 고전문학을 연구하고 이화여대, 버클리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한국사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해외 학자 대다수는 박근혜 정부의 움직임에 대한 우려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정부의 보수적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학자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한국에서 역사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노골적인 왜곡이 증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이처럼 역사를 고쳐 쓰고 통제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시도에 맞서 싸우는 한국 동료들에게 지지를 표하고 싶다. 성명을 낸 해외 학자들은 각자의 직업적 삶을 한국에 바쳐왔으며, 이전 세대가 일군 민주적 진보가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우리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박근혜 정부가 자행하려고 하는 부정의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박근혜 정부가 이 방침을 철회하도록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미국인으로서 이 일이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고,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박근혜 정부의 역사 왜곡 시도는 사실상 동일하다. 한·일 정부의 이와 같은 통제는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대판 분서갱유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인들이 역사를 결정한다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다시 말해, 반정부 인사의 투옥과 독재 시절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정녕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의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역사를 고쳐 쓰는 일이야말로 ‘과거’로의 첫걸음이다.

 

 

   
 

 

윤성주(54)

미국 칼턴 대학 역사학과 부교수/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중국사 및 동아시아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부터 칼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역사 교육은 학생의 민족 특수성보다 건강한 세계시민의 정체성을 함양하도록 지향해야 한다. 예컨대 탈냉전 시대에 남북의 평화적 통일은 우리 민족의 숙원일 뿐 아니라 평화를 지향하는 인류 보편의 열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학생들은 ‘쿨리 무역’이 중국인이나 인도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부끄러운 식민시대의 단면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교육 현장에서는 비판적 사유, 열린 담론, 자유로운 연설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 학생 스스로가 동일한 역사적 주제에 대해 앞선 세대보다 한 차원 더 높은 해석을 제시할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 역지사지할 수 있는 상상력, 끊임없이 정직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비판적 사유가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의 국정교과서 논쟁을 보면 시대착오적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국가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집단이 시민사회의 공공 기억을 독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학생들이 역사적 주제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열린 탐구를 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폭거다. ‘신(神)에 의한 정치’를 하는 국가에서는 가능한 일이겠지만, 한국은 민주국가다. 박근혜 정부 각료 가운데 국무총리나 교육부총리가 미국 남부 지역 일부에서 돌출하고 있는 극단적 근본주의자와 비슷한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역사에 대한 단일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서술은 ‘역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다.

국정교과서 논쟁을 보면 시민사회는 성숙했는데 정작 국가권력의 대표가 이를 따라잡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미래를 ‘선도’하고 있다고 믿는 데서 문제가 증폭된다. 다른 학문보다 ‘인간학’이기를 자처하는 역사학의 경우, 식민지와 냉전 시대에 두드러진 국가폭력 같은 인류사의 보편적인 주제를 비켜갈 수 없다. 이는 ‘자학’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가들은 이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높여 해결 방안을 제시하면서 소통하고자 한다. ‘권력’이 불편하다고 하여 특정한 역사 주제를 희석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있을 수 없다.

해외에서 국내 국정교과서 논쟁을 지켜보는 마음이 참담하다. 미국 현지 동료들을 비롯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학문 활동을 하고 있는 동료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 정부가 “21세기 세계 속의 한국의 위상에 걸맞은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간곡히 바라”면서 현사태의 추이를 주목하고 있다.

 

 

국정화, 야권은 어떻게 싸워야 하나

10월22일 청와대 회동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교과서 문제와 관련한 ‘전면전’을 선포했다. 박 대통령이 촉발한 이념 전쟁에서 번번이 패배했던 야권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 총선은 채 7개월도 남지 않았다.

이오성 기자

질문을 던져보자.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야권에 중요한 이슈인가? 그렇다. 야권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는 최고의 카드다. 친일·독재 세력이 득세한 한국 사회에서 역사 논쟁은 진보·개혁 진영을 똘똘 뭉치게 한다. 정파와 계층을 뛰어넘어 단일한 대오가 형성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이슈다.

실제로 내년 총선과 선거제도 개편을 놓고 평행선을 달리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천정배 의원,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백만 년 만에’ 한목소리를 내게끔 만들었다. 혁신안과 공천 룰을 놓고 내홍을 거듭하던 새정치민주연합도 오랜만에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였다. 역사 교과서 논쟁 1라운드, 야권은 투지가 넘쳤다.

2라운드 공이 울리면서 질문이 바뀌었다. 질문을 바꾸게 만든 주체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녀는 10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지도부 5자 회동에서 ‘전면전’을 선포했다. “(현행 검정교과서가) 결국 하나의 좌편향 교과서다”라고 못 박으며 “우리 아이들에게 패배주의를 가르쳐서야 되겠느냐”라고 말했다. 강경 그 자체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10월21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운데)·천정배 의원(오른쪽)·심상정 정의당 대표(왼쪽)가 서울 신촌에서 국정교과서 반대 대국민 서명운동을 함께하는 등 야권 공동 대응에 나섰다.  
ⓒ시사IN 이명익

10월21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운데)·천정배 의원(오른쪽)·심상정 정의당 대표(왼쪽)가 서울 신촌에서 국정교과서 반대 대국민 서명운동을 함께하는 등 야권 공동 대응에 나섰다.

 

박 대통령의 반응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지만, 충격은 컸다. 대통령이 직접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올랐다. 새정치민주연합 핵심 관계자의 표현처럼 “자기가 먼저 초대해놓고 동네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뺨을 갈겼다”. 국정화 철회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는 태도다. 전선이 더욱 달아오른 역사 전쟁 2라운드, 이제 야권 지지층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역사 교과서 논란은 야권이 승리할 수 있는 이슈인가?”

쉽지 않은 문제다. 야권 지지층 전체를 놓고 보면 “이길 수 있다”는 쪽이 다수파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 교과서 논란 초기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기울어진 운동장에 빠졌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창극 총리 후보자 사태를 거론했다.

지난해 6월 우리 사회에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이 총리 후보자로 지명한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이 과거 “일제와 분단은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박 대통령이 문창극 총리를 고집하며 2주일 동안 버텼지만, 끝내 여론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세월호 참사로 사의를 표했던 정홍원 총리가 헌정사상 최초로 유임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당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폭락했다.

확실히 친일 문제는 보수 진영의 아킬레스건이다. 친일 과거사 앞에서 살아남은 보수 인사는 없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과거사가 지금도 뜨거운 이슈고, 여당 수장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부친의 친일 논란도 현재진행형이다. 국정교과서 논란이 ‘친일·독재 미화’ 프레임으로 자리 잡힐 경우 정부·여당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넘어질 공산이 크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0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회동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교과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연합뉴스

10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회동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교과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친일·독재 미화’ 프레임으로 맞선 야권

야권은 프레임대로 총공세를 펼쳤다. 타깃은 ‘친일·독재 미화’로 맞췄다. 문재인 대표가 ‘친일 교과서에 반대하는 강남·서초 엄마들과의 대화’에서 “박근혜와 김무성은 친일·독재의 후예”라고 지칭한 대목이 핵심이다. 문 대표는 친일·독재의 후예들이 역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이 이번 교과서 사태의 배경이고 발단이다”라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벌이는 대국민 서명운동의 슬로건도 ‘친일·독재 미화 국정교과서 반대’다.

여론은 국정교과서 반대 쪽으로 흘러간다. 찬반양론이 팽팽하던 여론이 10월 넷째 주 들어 ‘반대 우세’ 국면으로 진입했다. 야권에서는 반대 여론이 높은 이유를 이렇게 본다. 첫째, 교사 집단 전체를 좌편향으로 매도했다. 둘째, 논란이 커지면서 교과서를 직접 살펴본 40~50대 학부모들이 국정교과서 반대로 기울었다. 교과서 논란의 당사자인 교사와 학부모가 등을 돌린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반대 여론이 오를 것이라는 게 야권 관계자의 공통된 견해다.

그러므로 야권에서는 강경 대응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조국 교수가 페이스북에 “과거 한나라당이 사학법 반대 투쟁하듯이 싸워야 한다”라며 올린 글이 대표적이다. 2005년 말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사학 비리를 바로잡겠다며 사학법 개정을 추진하자, 당시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 기반인 대구를 거점으로 초유의 장외 투쟁에 돌입했다. 6개월간의 국회 파행 끝에 결국 정부·여당은 사학법 재개정을 약속했다.

조국 교수는 국정교과서가 내년 총선을 노린 새누리당의 ‘기획’이라고 본다. 교과서 전쟁을 통해 ‘보수 총단결’을 꾀하는 총선 전략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흐리멍덩하게 규탄 성명서 몇 장 내고 싸우는 척만 하면” 내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야권 지지층에서 다수가 이런 의견을 지지한다. 편의상 이들을 ‘강경파’라고 부르자.

그런데 이런 흐름에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이 있다. 길게 보면 야권이 국정교과서 정국에서 이길 길이 없다며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정교과서 반대운동이 확산되는 지금, 사실상 ‘출구전략’을 찾으라는 이들의 주장은 몰역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당연히 이들은 소수다. 역시 편의상 이들을 ‘신중파’라고 부르자. 신중파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0월20일 한국자유총연맹 서울시지부 회원들이 광화문에서 ‘국정화 지지’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10월20일 한국자유총연맹 서울시지부 회원들이 광화문에서 ‘국정화 지지’ 기자회견을 열었다.

 

우선 국정교과서 논쟁은 국민 전체가 공감하는 이슈가 아니다. 진보·개혁 진영만 에너지를 발산하는 문제다. 최근 국정교과서 찬반 여론조사는 신기루에 가깝다. 만약 국민들에게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국정교과서는 저만치 뒤처질 것이다. 최근 여론은 일시적 찬반 현상일 뿐, 결코 총선까지 끌고 갈 이슈가 아니다. 반대 여론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여권 지지층이 결집할 계기가 된다. 투표율이 높은 여권 지지층이 결집하면 내년 총선은 필패다.

둘째, 과거 사학법 투쟁 때와는 다르다. 당시에는 수많은 사학재단 관계자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다. 이들 사학재단 세력이 한나라당과 함께 1년이고 2년이고 공동 전선을 펼 태세였다. 지금 야권과 행보를 맞추고 있는 시민사회 세력이 그처럼 굳건한 지지 세력이 되어줄 수 있을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예산안 처리를 외면할 수 없는 제1야당이 장기간 장외 투쟁을 벌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시민사회가 강경 투쟁을 압박하는 와중에 오히려 새정치민주연합의 발걸음이 꼬일 가능성이 크다.

셋째, 국정교과서 논란이 ‘이념 전쟁’ 프레임에 갇힐 가능성이 있다. 10월22일 청와대 5자 회동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논란을 이념 전쟁으로 몰고 갈 뜻을 노골화했다. 박 대통령이 전교조와 민족문제연구소를 언급한 것이 상징적이다. 이미 ‘김일성 주체사상’ 현수막을 통해 여권은 ‘친일·독재 미화’ 프레임에 맞불을 놓는 전략을 가동 중이다. 지금은 어설프게 보이지만, 정부와 교감하는 보수 단체가 대오를 정비하고 언론이 이를 ‘진보 대 보수’ 이념 전쟁으로 중계하고 나서면 정국이 고착화된다.

이념 논쟁을 주요 통치술로 써온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은 이념 전쟁의 화신이다. 말로는 우리 사회에 이념 대립이 없어져야 한다면서, 이념 논쟁을 가장 주요한 통치술로 사용해왔다. NLL 논란을 무기로 대선을 치렀고, 대통령 당선 이후 이석기 사태, 통합진보당 해산,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 등을 통해 정국을 흔들었다. 박 대통령이 촉발한 이념 전쟁에서 야권은 번번이 패배했다. 신중파는 역사 교과서 논란이 이념 전쟁 프레임으로 변질될 경우 야권이 또 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이에 대한 강경파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야권이 그동안 한 번이라도 지지층을 결집시켜 제대로 싸워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잇따른 선거 패배의 여파로 얄팍한 선거 공학만 늘었을 뿐, 야권 지지층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강경파는 어설픈 중도층 공략으로 야권 지지층을 ‘배신’해온 과거를 역사 교과서 정국에서 되풀이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내년 선거가 국회의원 총선거라는 점도 고려할 지점이다. 총선은 대선과 다르다. 투표율이 높은 대선과 달리 중도층 공략에 사활을 걸 필요가 없다. 기존 야권 지지층을 붙들어 매는 것이 중요하다. ‘집토끼’를 확실히 끌어안기만 하면, 총선 전망은 밝다는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당직자는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율은 합리적 보수층에서 나온다고 봐야 한다. 진짜 진보·개혁 성향 지지자는 아직 우리를 지지하지 않고 있다. 역사 교과서 전쟁을 어떻게 끌고 가느냐에 이들의 지지 여부가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0월23일 보신각 앞에서 전교조가 주최한 ‘국정화 반대’ 집회가 열렸다.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대립은 당분간 계속되리라 보인다.  
ⓒ연합뉴스

10월23일 보신각 앞에서 전교조가 주최한 ‘국정화 반대’ 집회가 열렸다.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대립은 당분간 계속되리라 보인다.

 

흥미로운 건 국정교과서 신중파도 이런 의견에 동조한다는 점이다. 야권이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어떤 이슈에서 강경하게 싸울 것이냐다. “국정교과서 문제 같은 정치적 이슈에서는 유연하되, 노동개혁 같은 민생 이슈에서 더 강경하게 싸워야 한다”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지금 야권은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 이슈에서 유연하라는 주장에 강경파는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두 세력은 이 대목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여권과 야당의 ‘투 트랙’ 전략이 맞붙는다면?

제1야당 내에 존재하는 두 가지 시각은 기실 아주 오래된 논쟁 같은 것이다. 시대와 이슈에 따라 ‘민생파 대 민주파’ ‘협상파 대 투쟁파’ ‘좌클릭 대 우클릭’ 등으로 이름만 바꿔가면서 대립을 계속해왔다. 물론 국정교과서 정국에서 이런 갈등이 아직 분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야권이 뚜렷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할 경우 논쟁은 격화될 수 있다. 10월19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총회에서도 향후 어떤 전략을 취할 것인지가 주된 토론 주제였다고 당 관계자는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공식적으로 ‘투 트랙’ 전략을 표방하고 있다. 국정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대여 정치투쟁을 이어가는 한편, 일자리·통일·복지 등 경제·사회 이슈도 틀어쥐고 간다는 방침이다. 청년 일자리 72만 개, 경제통일론 등 문재인 대표가 천명한 정책들이 그것이다. 정치 투쟁과 민생 이슈를 ‘잘’ 결합하는 것이 새정치민주연합의 최대 숙제다. 말은 쉽지만, 실제 해법은 뚜렷하지 않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도 ‘투 트랙’ 전략을 쓸 것이라는 점이다. 국정교과서 논란을 이념 전쟁으로 몰고 가는 한편으로, 노동개혁 이슈를 내세워 정국을 주도해나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 조국 교수의 지적대로 교과서를 통해 보수를 결집하고, 노동개혁 이슈로 진보·개혁 진영을 분열시키는 총선 전략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의 투 트랙과 제1야당의 투 트랙이 맞부딪친다면? “솔직히 새누리당보다 우리의 고민이 더 클 것이다”라는 새정치민주연합 관계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러므로 야권에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정국은 야권의 ‘미로’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