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초읽기 들어간 '이재용 시대', 4대 검증 포인트

일취월장7 2015. 7. 25. 11:50

초읽기 들어간 '이재용 시대', 4대 검증 포인트

[비즈니스 프리즘] 이재용 체제 삼성, 어디로 가나? ①
성현석 기자2015.07.07 11:00:06
 

'이재용'이라는 이름 뒤에 회장 직함이 붙는 건, 시간문제다. 병석에 있는 이건희 회장이 최근까지 유지했던 직함은 세 가지다. 삼성전자 회장,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이 가운데 뒤의 두 가지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물려받았다. 그게 지난 5월 15일이다. 


남은 하나, 삼성전자 회장을 물려받기 위한 작업은 마무리 단계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출범한 삼성특검 수사, 이후 진행된 재판이 모두 종결된 게 2008년이다. 대부분의 사안에서 면죄부를 받았다. 법적 걸림돌이 사라진 뒤, 경영권 승계 작업은 물 흐르듯 진행됐다. 


'이재용의 경영능력'을 따져 묻는 건 그래서다. 삼성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보통 25%이상이다. 올해 초에는 30% 가까이 됐다. 다른 경제지표를 살펴도 결론은 같다. 삼성이 흔들리면 한국경제에겐 치명타다. 삼성을 이끌 이재용이 무능하면, 우리네 살림살이도 피곤해진다.


"이재용의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라는 표현은, 물론 새롭지 않다. 삼성 경영권 승계를 염두에 둔 프로젝트는 그동안 다양하게 진행됐다. 1996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이 시작이었다. 그때마다 시민사회단체는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이재용'에게 경영권을 넘기기 위해 삼성이 온갖 편법, 불법 행위를 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비판의 초점은 주로 삼성의 편법, 불법행위였다. 이 당시만 해도, '이재용 삼성 회장' 체제는 먼 미래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건희 회장이 다시 경영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없다. '이재용 삼성 회장' 체제는 가까운 미래다. 총수가 황제처럼 군림하는 재벌 문화, 삼성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 두 가지를 함께 고려하면, '이재용의 경영능력'은 한가한 질문거리가 아니다.


그런데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먹고사는 일이, 그러니까 경제가 전부라고 외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최고의 경제 권력에 대한 정보가 이토록 적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일단은 어쩔 수 없다. 그간 알려진 정보만으로 네 개의 질문을 뽑았다. 이런 질문을 통해 '이재용의 경영능력'을 제대로 검증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이재용 삼성 회장' 체제가 현실이 되기 전에 잠시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는 되리라고 본다. 


1. 'e삼성'의 실패에서 뭘 배웠나


'이재용의 경영능력'을 이야기할 때 늘 나오는 단어가 'e삼성'이다. 벤처바람이 아직 뜨겁던 2000년, 삼성 구조조정본부(옛 비서실, 현 미래전략실)가 추진한 프로젝트다. 벤처바람이 식으면서 함께 망했다. 당시 삼성 구조본은 이재용을 위한 성공신화를 만들려 했다. 경영 후계자가 될 자격을 입증하는 사례 말이다. 아울러 벤처바람을 타고 'e삼성' 관련 주식 가격이 오르면, 경영권 승계 작업에 필요한 자금도 마련할 수 있다고 봤다. 이를 위해 삼성 계열사에서 다양한 인원이 차출됐다. 


'e삼성'의 실패 사례는 이재용의 경영능력을 불신하는 근거로 주로 인용됐다. 하지만 'e삼성' 관련 의사결정을 주도한 건 삼성 구조본이었다. 또 15년 전 사건이다. '2015년 지금, 이재용이 어떤 경영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근거로 삼기엔 무리가 있다. 다만 질문거리는 될 수 있다. 'e삼성' 실패에 따른 부담은 결국 삼성 계열사가 떠안았다. 이는 지금도 비난받는 대목이다. 따라서 삼성의 주주와 임직원, 다른 이해관계자들은 이재용에게 물어볼 권리가 있다. 


"이재용은 'e삼성'의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나. 어떤 반성을 하고 있나."    


2. '을'의 처지에 대해 얼마나 아나  


▲ '메르스' 사태에 대해 사과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 구조본에서 일하며 이재용을 지켜본 경험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늘 나오는 게 보통사람의 생활감각에 대한 무지였다. 결혼식 축의금으로 '0'을 더 붙인 돈을 내고도, 무감각했다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삼성이 만드는 제품과 서비스 가운데 상당수는 보통사람들을 겨냥한다. 소비자의 정서와 감각에 둔감한 건 기업가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건희 회장 역시 월급 받으려 일하는 보통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자신의 약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업가는 결국 장사꾼이며, 승부사다. 재벌 총수라해도 본질은 같다. 한마디로 '을'의 처지를 견뎌내는 독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황태자로 자란 이재용에게 이런 자질이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있다. 언론에 드문드문 비친 이재용의 이미지는 철저한 '갑'이었다. 아버지 이건희만 해도, 승계 우선권을 지닌 형들 앞에선 '을'이었다. 


이재용은 최근 1년 여 사이에만 네 차례에 걸쳐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을 만났다. 시 주석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힘이 센 사람이다. 그런데 시 주석을 수시로 만났다. 어지간한 국가 원수도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언론에 비친 모습만 보면, 이재용은 영국 왕실 가족 느낌이다. 이런 그가 단 하루라도 '을'의 처지를 견뎌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의 경영능력을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 기업가는 결국 소비자와 주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존재다. 왕실 가족 이미지는 기업가와 상극이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신호가 있었다. 지난달 23일, 이재용이 공개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삼성서울병원에서 확산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문이다. 사과 회견이 그의 생애 첫 기자 회견이었다. 마침 생일이기도 했다. 이재용이 사과를 자청했다고 한다. 이로써 그가 '허리에 깁스'하지 않았다는 건 입증됐다. 필요하면, 머리 숙일 줄도 안다.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다. 이재용이 머리 숙일 일들은, 이미 많았다. 그때마다 그의 허리는 꼿꼿했다. 생애 첫 공개사과가 너무 늦었다.


3. '미지의 충격'을 견딜 맷집이 있나


기사를 준비하며,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를 만났다. 김 교수는 삼성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로 꼽힌다. 이런 그가 이재용이 잘했다고 말했다. '메르스 사태'에 대한 사과 말이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삼성은 결과가 예상되는 일에 대해서만 강하다." '메르스 사태'는 어느 정도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사과'가 답이다. 시기와 방법이 고민거리였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재용이 서 있는 시험대는 또 있다. 투기자본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공격이다. 이건 성격이 다르다. 정해진 답이 없다. 엘리엇이 진짜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엘리엇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조건을 문제 삼았다. 그렇다면, 오는 17일로 예정된 두 회사의 주주총회에서 합병이 승인되면, 즉 삼성이 표 대결에서 엘리엇을 꺾으면, 문제가 풀리는 건가. 그렇지 않다. 그 뒤에 어떤 사태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미지의 충격'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 김 교수는 삼성이 '엘리엇 충격'에 취약한 게 그래서라고 했다. 삼성이 일부 사업부문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한 건 최근의 일이다. 선진국 기업을 따라잡으려는 추적자로 보낸 세월이 훨씬 길다. 추적자는 목표가 분명하다. 가야할 길도 선명하다. 하지만 1등은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 늘 '미지의 충격'에 노출된다. 2등이라면 1등의 대응방식을 배우면 된다. 그러나 1등은 그런 기회가 없다. 삼성은 아직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e삼성' 당시와 달리, '엘리엇' 사태 대응에선 이재용이 주도적인 결정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실무전략은 법률 및 재무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큰 결정을 내릴 사람은 이재용뿐이다. 늘 준비된 경로만 밟아왔던 이재용이 '엘리엇 충격'이라는 '정답 없는 문제'를 잘 풀 수 있을까. 한마디로 '미지의 충격'을 견딜 맷집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4. 창의적인 직원을 붙잡아둘 '매력'이 있나


삼성전자 국내 직원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연구 개발 직군이다. 머리 쓰는 일,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직원이 다수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지식기업. 2000년대 들어 가속화된 변화다. 이병철, 이건희 시대의 삼성 직원은 '매뉴얼'에 충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때는 '추적자'였다. 선진국 기업의 매뉴얼을 입수해 잘 따르는 게 중요했다. 1등이 된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자기 머리로 목표를 찾아야 한다. 지식기업으로의 변화는, 그래서 필연이다. 이재용 시대의 삼성 직원은 그저 고분고분하기만 한 걸로는 부족하다. 창의적인 인재를 끌어들이고 붙잡아두는 게 이재용 시대의 과제다. 


이병철, 이건희 시대의 삼성 직원들은 단지 회장이라는 이유로 충성했다. 하지만 이재용 시대의 삼성 직원들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자존심 강한 지식노동자를 끌어당길 '매력'이 이재용에게 있느냐는 질문이 나온다.


전길남 카이스트 명예교수.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가 <블로터> 인터뷰에서 지적한 내용이 날카롭다. 기사 마무리를 갈음할만한 내용이다.


"구글러(구글 직원)한테 물어봐라. 너희 사장 어떻게 생각하냐고. '굉장한 사람이다, 존경한다'라고 얘기할 거다. 삼성 사람한테 물어봐라. 너희 오너 어떻게 생각하나. 주식 투자 잘한다고 할 거다. 구글에서 일하는 사람이 래리 페이지(구글 창업자)를 존경하는 것처럼 삼성 직원이 이재용을 존경할까. 


(…) 이건희, 이재용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보나. 계속 삼성 오너 자리를 지키는 게 목적이다. 젊은 사람한테 물어봐라. 계속 이건희, 이재용 부자가 삼성 회장 자리를 지킬 수 있게 결사적으로 노력하는 일에 협조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 이건희 회장이 차기 사장(회장)이 될 기회를 아들에게만 준다면, 그게 삼성의 한계일 거다. 스티브 잡스가 아들에게 사장 시키고 다른 사람은 그 자리 못 앉게 하면 애플이 지금 같은 회사가 될 수 없었을 거다. 삼성의 공은 한국 회사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이 정도로 삼성의 미션은 끝나면 된다. 앞으로 구글, 페이스북 같은 회사를 만들 수 있는지는 젊은 사람들 손에 달렸다." 

 

 

"'응사' 세대는 '이재용 체제' 견딜 수 있을까?"

[비즈니스 프리즘] 이재용 체제 삼성, 어디로 가나? ②
성현석 기자2015.07.09 11:31:29
 

<응답하라 1994>. 2년 전 방영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다. 1990년대 초중반 대학 문화가 잘 묘사됐다. 학생운동이 퇴조한 문민정부 초기, 한국 대학생이 이념 고민과 취업난에서 자유로웠던 드문 시기다. 개인주의가 두드러졌고, 대중문화가 꽃 피웠다. 'X 세대', '신세대' 등의 표현이 유행했다.

대학 밖이 먼저 변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두 해 전인 1992년, 삼성이 대졸사원 공채제도를 바꿨다. 남녀 구분 없이 공개경쟁시험을 치르게 됐다. 전에는 남성과 여성 정원을 정해놓고, 따로 뽑았다. 이런 변화는 주요 대기업 가운데 최초였다. 곧 다른 대기업도 따라갔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것도 이 즈음이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놓고 다 바꾸라"고 일갈했다.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간 간부가 된 <응답하라 1994> 세대, '조직 규율'보다 '시장 규율'에 더 민감"

▲ <응답하라 1994>. ⓒtvN

이 무렵, 대학에 가거나 취업을 했던 세대가 이젠 기업 조직을 지탱하는 간부가 됐다. <응답하라 1994> 주인공들이 대리, 과장급이 된 2000년대 중반. 삼성경제연구소가 그룹 조직 진단을 했다. 비공개로 진행됐던 이 프로젝트 참가자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신세대' 간부들은 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다. 임원에게 대드는 일도 있다. 경영진 입장에선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조직의 위기인가.

"그렇지 않다"는 게 진단 결과였다. '신경영' 세례를 받은 '신세대'는 상사의 지시라고 해서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다. 가치관이 다르다. 예전엔 상사의 지시가 무조건 옳았다. 이젠 회사의 이익이 우선이다. 


만약 젊은 과장이 임원의 지시에 토를 단다면, 그건 조직 규율을 깨려는 게 아니다. 회사의 이익이라는 더 큰 가치와 임원의 지시가 상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사의 이익에 예민한 건, 시시각각 변하는 주식가격 때문이다. 회사 주가를 떨어뜨리는 결정은, 설령 임원이 내린 것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경영진 입장에선 이런 태도가 꼭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대략 이런 결론이었다.

'주주자본주의'가 신념인데, 삼성 공격하는 투기자본이 어떻게 비칠까

"회사의 주인은 주주이며, 회사는 주주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라는 이론이 처음 나온 건 1976년이다. <응답하라 1994> 세대가 걸음마 할 나이였을 때다. 마이클 젠선의 논문 <기업이론 : 경영자 행동, 대리인 비용 및 소유 구조>가 효시다. 이런 이론이 경영학 상식이 된 건 훨씬 나중이다. <응답하라 1994> 세대가 대학에서 이런 이론을 배웠다. 취업을 앞두고 IMF 외환위기를 겪었고, 취업 이후엔 코스닥 열풍과 소액주주 운동을 지켜봤다.


이들이 삼성 조직의 중추가 된 지금, 투기자본 엘리엇이 '주주행동주의'를 들고 나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기 위한 작업,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결정이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을 해친다는 게다. <응답하라 1994> 세대가 배운 대로라면, 꽤 타당한 논리다. 삼성물산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을 맡고 있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내놓은 논리도 이와 같다.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 글래스 루이스, 서스틴베스트 등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내놓은 권고 안도 마찬가지다. '주주 이익 극대화'라는 관점에선 하필 삼성물산 주가가 낮은 시점에 합병 결정을 할 이유가 없다.

삼성 조직의 균열 지점은 이 대목이다. 엘리엇의 공격 앞에서 삼성 수뇌부인 미래전략실은 '국익 수호' 논리를 편다. 엘리엇을 '먹튀', 그러니까 단물만 빨아먹고 도망가는 투기자본이라고 비난한다. 일리 있다. 투기자본이 재벌을 지배한다면, 숱한 일자리가 사라질 게다.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이야기할 때면, 늘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궁금증. 삼성이 언제부터 주주의 이익보다 국익을 앞세웠나. 더 큰 궁금증. 회사의 이런 설명을 <응답하라 1994> 세대 삼성 직원들은 어떻게 볼까.

지난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 이후, 삼성경제연구소가 진행한 그룹 조직 진단 결과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사장 및 임원들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래 직급으로 내려갈수록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이 우세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극대화인데, 무슨 엉뚱한 소리냐"라는 식이다.

딱 10년 전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비웃었던 이들이 지금은 임원이 됐다. 물론 일부는 자리가 높아지면서 시야도 넓어졌을 게다. 그래서 생각도 바뀌었을 게다. 하지만 다 그렇지는 않으리라. 이들이 투기자본을 비난하고 국익을 강조하는 삼성 수뇌부의 메시지에 얼마나 공감할까. 머리로는 동의할 게다. 투기자본이 '먹튀'하면, 회사도 손해니까. 하지만 투기자본을 비난하는 논리에 마음 깊이 동의할지는 의문이다. 이들이 배우고 믿어왔던 바는, 오히려 투기자본의 논리에 가깝다.

'관리의 삼성'은 옛말

그래서 균열이 생긴다. 엘리엇의 공격 앞에서 삼성이 허둥지둥 한다는 지적이 잦다. 삼성 경영권 승계 및 엘리엇에 대한 방어를 지휘하는 미래전략실이 관련 이해관계자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있느냐는 게다. 발 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데만 급급하다보니, 스스로 말을 뒤집는 일이 생긴다. 예컨대 삼성물산 자사주 매각이 그렇다. 자사주는 회사의 재산이다. 총수 개인 재산이 아니다. 삼성의 평소 입장 역시 자사주 매각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런데 엘리엇이 공격하자 갑자기 팔았다. 오는 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을 해야하는 처지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의 신뢰는 깨진다. 결국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잇따라 합병 반대 권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삼성 조직은 확실히 전과 달라졌다. '관리의 삼성'은 옛말이 돼 간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졌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가 없는 탓이라는 게다. 꼭 그 이유 때문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개인의 공식 입장과 내면의 균열, 조직의 균열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 ⓒ연합뉴스



메시지와 가치의 상충'잭 웰치 모델'과 "투기자본 반대"

 


엘리엇과의 표 대결을 앞두고, 주주들을 만나러 다니는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 그는 20년 동안 GE(제너럴 일렉트릭)에서 일하다 삼성에 스카우트 됐다. GE 근무 시절, 잭 웰치 회장이 그를 꽤 신임했다고 한다. 최근에도 그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법인을) GE처럼 만들겠다"고 말했다. '주주 가치 경영'을 극단적으로 밀어 붙인 게 잭 웰치 모델이다. 잭 웰치 전 GE 회장은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못 하는 일이 없었다. 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잘라냈다. '당장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구개발 투자를 대폭 줄였다. 주주들은 환호했지만, GE는 꾸준히 경쟁력을 잃어갔다.

"(삼성물산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단기 수익에 치중하면 안 된다" "주주의 이익보다 국부 유출 방지가 우선이다" 등이 삼성 미래전략실이 지금 하는 주장이다. 잭 웰치 식 경영을 배웠던 최치훈 사장이 주주들 앞에선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입으로 하는 말과 머리에 담긴 가치의 상충. 균열은 필연이다.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응답하라 1994>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삼성 미래전략실이 내놓는 메시지는, 삼성 조직 중간 간부들이 내면화한 가치와 모순된다. 그래서 메시지가 겉돈다. 조직 수뇌부에 대한 신뢰도 느슨해진다. 내가 믿는 가치와 다른 이야기를 하니까 말이다. 


 

▲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tvN


'황금의 삼각축'이 깨졌다"의사결정자가 열린 공간에 나와야"

 


문제는 삼성 조직 구조에선 이런 균열을 봉합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회장의 리더십-미래전략실(옛 비서실, 구조조정본부)의 기획력-계열사의 전문성'. 그간 삼성이 한 덩어리처럼 움직인 건 이 같은 구조가 잘 작동한 덕분이었다. 미래전략실이 계획을 짠다. 회장이 승인한다. 계획에 힘이 실린다. 계열사 사장들은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계획을 실현한다. 


'황금의 삼각축'이라 불리던, 이런 구조가 무너지고 있다. 회장은 의식불명이다. 새 회장이 공식적으로 나서기는 이르다. 그러니까 미래전략실은 힘이 빠진다. 계열사 정보가 종종 누락된다. 전처럼 계열사를 통제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는 어차피 필연이다. 언젠가는 겪을 문제였다는 말이다.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는 "시장과 사회를 직접 만나는 쪽과 의사결정을 하는 쪽 사이의 괴리"를 이야기했다. 또 "책임지는 쪽과 권한을 행사하는 쪽과의 괴리"도 거론했다. 모두 계열사와 미래전략실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법적 실체가 없는 미래전략실은 공식적인 대외접촉 창구를 가질 수 없었다. 계열사를 통해 정보를 입수해야 하는데, 결국 한계가 있다. 그 한계에 부딪힌 게 지금이다. 따라서 '황금의 삼각축'을 대신할 새로운 모델을 찾는 게 곧 경영권을 승계할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숙제다. 김 교수는 "의사결정자가 열린 공간으로 나와서 직접 듣고 설득하는 것"을 새로운 모델의 핵심으로 꼽았다. 


제2, 제3의 엘리엇이 나타나면?"균열은 필연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황금의 삼각축'을 대체할 모델은 결국 지주회사 전환뿐이다.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비춰볼 때 가장 안정적이다. 김 교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삼성은 지주회사로 전환할 생각이, 당장은 없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주회사 지분을 안정감 있게 확보하려면, 드는 돈이 천문학적인 까닭이다. 김 교수는 이 부회장의 지분 비율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지주회사 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분 지배력으로 존경받는 최고경영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부족한 지분을 채우는 것은 경영자의 비전과 리더십"이라는 설명이다. 삼성이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비춰볼 때 불안정한 지배구조를 고집하리라는 것. 


이는 제2, 제3의 엘리엇이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철저한 투기자본이 보기엔 계속 허점이 나타날 것이므로. 그때마다 삼성 수뇌부는 '주주자본주의'와 상충하는 메시지를 던지며 방어할 것이다. 이른바 '국익' 논리다. 그런데 '주주자본주의'를 내면화한 세대가 삼성 조직 안에서 한 계단씩 올라가고 있다. '이재용 삼성 회장' 체제에선, 그들이 경영을 담당할 것이다. 입으로 뱉어내는 메시지(주주자본주의 비판)와 내면화한 가치(주주자본주의 옹호) 사이의 간극, 거기서 비롯된 균열, 삼성 앞에 놓인 풀기 힘든 숙제다. 

 

 

삼성이 소액주주 애국심에 호소하면 누가 웃을까

[비즈니스 프리즘] 이재용 체제 삼성, 어디로 가나? ③
성현석 기자2015.07.15 08:15:31
 

'엘리엇 사태'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첫 경험이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쓰러진 뒤, 경영 의사 결정을 주도한 첫 사례. 평생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게다.


'을'의 입장이 된 경험이기도 했다. 삼성은 그간 소액 주주들에게 뻣뻣한 편이었다. 비슷한 위상을 지닌 외국 기업과 비교할 때, 그렇다.


삼성물산이 주주 총회에서 민원을 제기하려는 소액 주주를 미행하고 겁박하다 들통이 난 게 지난 3월이다. 불과 넉 달 전이다. 그리고 지금, 삼성물산은 단 한 주만 지닌 주주에게도 고개를 숙인다. '을'이 됐다. 엘리엇 덕분이다.


소액 주주 겁박하던 삼성, 이젠 소액 주주에게 굽신


오는 17일 주주 총회에서 엘리엇과 표 대결을 앞둔 삼성물산이 확보한 우호 지분은 45%안팎으로 추정된다.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시나리오에선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필수적이다.


합병 안이 통과되려면, 출석한 주주의 3분의 2 이상 찬성을 받아야한다. 주주 총회 참석률이 70%라면 전체 지분의 46.7%, 80%라면 53.3% 이상을 각각 확보해야 한다. 삼성 입장에선 아슬아슬하다. 기관 및 외국인 투자자는 대부분 입장을 정했으므로, 열쇠는 24.4%를 차지하는 소액 주주들이 쥐고 있다.


이들은 입장이 유동적이다. 감정적인 호소가 먹힐 여지도 있다. 최근 일간지, 방송, 포털 등에 삼성물산 소액 주주들을 겨냥한 광고가 쏟아지는 건 그래서다. 실제로 삼성물산 직원들은 주주들을 직접 만나러 다닌다. 소액 주주를 겁박하던 삼성물산 직원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 소액 주주들을 향한 삼성물산의 광고. ⓒ삼성물산


 

이재용의 첫 경험, 삼성엔 어떤 영향?


단 한 표가 아쉬웠던 경험. 평범한 회사원이 월급 털어 산 주식 한 주 때문에 경영권 승계 구도가 어그러질 뻔 한 경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는 낯선 경험일 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체제'를 전망할 때, 핵심 변수가 될 수 있다. 이재용 체제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주주들의 눈치를 볼 가능성이 높다. 첫 출발부터 그랬으니까.


이는, '소액 주주의 목소리'가 반드시 재벌 개혁의 방향과 겹치지 않을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재벌 총수 일가가 주주 가치를 노골적으로 훼손할 때는 '소액 주주의 목소리'가 일정한 개혁성을 띠었다. 상황이 바뀌면, '소액 주주의 목소리'는 다른 색깔을 띨 수 있다.


불안정한 경영권, '주주 눈치 보기' 피할 수 없다


삼성을 포함한 대개의 한국 기업이 그동안 주주들에게 인색했던 건 사실이다.

최근 <블룸버그>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배당 성향(5월 31일 기준)은 평균 16.75%로 조사 대상인 51개 나라 가운데 가장 낮았다. 1위인 체코(72.87%)와는 50%포인트 이상 차이가 났다. 2위는 호주(70.91%)였고 핀란드(69.07%), 뉴질랜드(65.49%), 영국(63.36%), 포르투갈(63.26%)이 뒤를 이었다. 배당 성향이란 순이익 가운데 배당금 총액의 비율을 뜻한다. 배당 성향이 높아진다는 건, 회사 이익 가운데 주주의 몫이 커진다는 뜻이다. 


한국과 문화가 비슷한 중국과 일본도 각각 31.57%(43위)와 27.96%(47위)를 기록했다. 한국과는 적어도 10%포인트 이상의 격차가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는 배당 성향이 13.0%다. 경쟁 관계에 있는 애플, IBM 등 글로벌 IT 기업에 비해 14~15%포인트 가량 낮은 수치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못 미친다는 지적에는 일리가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이 됐다는 점, 주력 산업인 반도체, 휴대폰 등이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산업의 성장기엔 배당성향이 낮고, 성숙기엔 배당 성향이 높아지는 게 경영학 상식이다.


엘리엇 덕분에 미소 짓는 삼성 주주들?


이런 사정을 다들 안다. 그래서 '주주의 목소리'에 바탕을 둔 재벌 개혁 주장에는 배당 성향을 높이자는 내용이 종종 담겼었다. 그리고 삼성은 이런 주장을 외면할 수 없게 됐다. 불안정한 경영권을 지키려면, 단 한 주가 소중하니까. 소액 주주들의 마음을 잡아야 하니까.


실제로 그렇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은 지난달 30일 긴급 기업 설명회(IR)를 열고 통합 삼성물산(합병 법인)의 배당 성향을 30% 수준으로 확대하고 거버넌스위원회(주주권익위원회)와 사회공헌(CSR)위원회를 설치한다는 내용의 주주 가치 제고 방안을 내놨다. 지난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산한 배당 성향은 21%였다. 이에 대해 지난 주말 판 <한겨레>는 "엘리엇의 공격이 없었다면"이라는 기사에서 "솔직히 엘리엇이 없었다면, 삼성이 부랴부랴 합병 이후 주주 친화 대책을 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옳은 지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따져봐야 할 건 '주주 친화 경영이 꼭 좋기만 한가'라는 점이다. '엘리엇 사태'에 화들짝 놀란 경험을 안고 출발하는 '이재용 삼성회장 체제'는, 지금보다는 훨씬 주주 친화적인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생기는 부작용은 없겠느냐는 게다.


 

▲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노인이 폴 싱어 엘리엇 회장. 지난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삼성이 '국익' 논리로 소액주주들에게 호소하자, 엘리엇이 이 사진을 공개했다. ⓒ엘리엣 매니지먼트


 

'주주 친화 경영', "황금 알 낳는 거위, 배 갈랐다"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2002년 민영화 이후 KT가 보인 행보가 좋은 예다. KT는 삼성과 달리, 이른바 '오너'가 없다. 지분이 특정인에게 쏠려 있지 않고 잘 분산돼 있다. 그래서 '주주 친화 경영'이 잘 이뤄졌다. 배당 성향도 높았다. 꾸준히 50%대를 유지했다. 이익 절반을 주주들에게 나눠줬다는 뜻이다.


민영화 이전에 매출액 대비 5.3%였던 연구개발비는 민영화 이후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설비 투자 역시 매출액 대비 20%대에서 15%대로 줄었다. 대신 마케팅 비용은 늘었다. 자사주 소각 등 오로지 주가 관리를 위한 일에 많은 돈을 썼다. 통신 요금도 높게 유지됐다. 대대적인 인력 구조 조정이 여러 차례 있었다. 요컨대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데는 소홀했고, 당장의 현금을 확보하는 데는 적극적이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늘리는데도, 소비자에게 저렴한 서비스를 제공하는데도 실패했다. 주주들을 만족시키려면, 그래야 한다.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다. 고배당 정책으로 유명하던 KT가 지난해에는 배당을 아예 못했다. 수익이 악화된 탓이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황금을 꺼내려 했다는 옛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지나치게 높은 배당 성향은 노동자를 울리고 소비자를 찌푸리게 한다. 그리고 끝내는 주주의 미소도 거둬간다.


'황제 경영'은 이제 불가능


'이재용 체제 삼성'이 KT처럼 될 가능성은, 물론 거의 없다. '오너'가 있는 기업과 없는 기업의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주주 친화 경영'에 따른 부작용을 전망하는 데는 힌트가 될 수 있다. KT가 겪었던 일 가운데 일부는 삼성에서 벌어질 수 있다.


'이건희 체제 삼성'에서 핵심 키워드는 '황제 경영'이었다. 미미한 지분만 갖고 황제처럼 군림한다는 것이다. 주주 가치를 훼손하고도 당당했다. 이건희 회장이 아버지 세대에게서 배운 경영은 그런 것이었다. 대중과 직접 소통하지 않는다. 대신, 권력과 통하는 인맥을 잘 관리해야 했다. '밀실 로비'가 필요했고, 비자금이 필연이었다. 2000년대 들어 높아진 소액 주주들의 목소리는, 이 같은 '황제 경영'과 정면충돌했다. '1주 1표'라는 주주 자본주의 논리를 상식으로 배운 소액 주주들이 보기에, '적은 지분을 지닌 황제'란 형용모순이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연대 등이 이 지점을 겨냥해서 날을 세웠다.


'이재용 체제 삼성'은 조금 다를 수 있다. 물론 대대적인 변화는 아닐 게다. '황제 경영', '밀실 로비'는 여전할 게다. 그러나 소액 주주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대중과의 소통을 피할 수 없다. 이게 아버지 시절과 다른 대목이다.


주주가 더 가져가면 약자의 몫은 줄어든다


그렇다면, '주주의 몫이 커지는 게 꼭 좋은 일인가'라는 질문은 '이재용 체제 삼성'에서 더 중요해진다. 재벌 개혁 운동의 방향 역시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기업이 남길 수 있는 이익은 정해져 있다. 누군가가 전보다 더 많이 가져간다면, 다른 누군가는 더 적게 가져가야 한다. KT가 그랬던 것처럼, 주주의 몫이 커지면 협력 업체나 노동자의 몫은 줄어들 수 있다. 아무래도 주주보다는 협력 업체나 노동자 쪽이 약자에 가깝다. 물론 고액 연봉을 받는 삼성 정규직이 삼성 주주가 될 수 있다. 이 경우는 주주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겹친다. 그러나 비정규직 등은 그렇게 보기 어렵다. 또 이해관계가 겹치는 경우에도, 월급 털어 주식 사는 소액 주주와 미국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자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당연히 후자에 더 힘이 실린다.


문제는 결국 사회적 힘의 관계다. 배당 성향을 높이게끔 하는 힘은 있다. 엘리엇을 포함한 투기 자본의 공격이다. 실제로 입증했다. <한겨레> 기사대로, 엘리엇이 나서니까 주주의 몫이 늘어났다.


반면, 협력 업체의 납품 단가나 임금을 올리게끔 하는 힘은 없거나 약하다. 협력 업체는 목소리 낼 통로가 없다. 삼성 노동조합 역시 존재감이 없다. 삼성이 낸 이익을 나누는 칼자루를 쥔 손은 많지가 않다.

그나마 힘을 쓰는 건 총수 일가 아니면 투기 자본이다. 지금은 이 둘의 싸움이다. 그러나 다들 이 싸움에만 관심을 두는 사이, 협력 업체와 노동자 등 다른 이해관계자의 몫은 조용히 줄어든다. 삼성과 엘리엇의 격렬한 싸움에서 누가 이기건, 별로 즐거운 소식이 아니라고 보는 건 그래서다.

 

삼성 승계, 이재용 앞에 놓인 네 가지 선택

[비즈니스 프리즘] 이재용 체제 삼성, 어디로 가나?④
성현석 기자2015.07.17 07:47:16
 

삼성물산 주주총회(17일)에서 '엘리엇'과 표 대결을 앞둔 삼성이 확보한 우호 지분이 얼마인지 점치는 보도가 넘쳐난다.

"운명의 날" 같은 표현이 나온다. 삼성물산 사장 및 임원에겐 맞는 말이다. 소액주주들에게서 받은 의결권 위임장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명나면, 삼성물산 사장 및 임원들의 운명이 바뀔 게다.

그런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운명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설령 삼성이 진다고 해도, 이 부회장이 삼성 경영권을 물려받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삼성전자에 대한 장악력이 느슨해진다. 애초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자체가 삼성물산이 갖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 4.1%를 장악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부회장이 '운명'까지 달라지는 일은 없다. 누가 뭐래도, 그의 운명은 '삼성 회장'이다.


48세 이재용, 6년 뒤면


누가 이길까? 이런 질문을 잠시 미뤄두자. 구구한 지분 숫자 계산해봐야 부질없다. 어차피 답은 곧 나온다. 대신, 다른 질문을 해보자. 그간 언론이 묻지 않았던 질문이다. 역시 숫자 이야기다.

이재용 부회장은 올해 나이가 48세다.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 승계 준비를 공식화한 건 1995년이다. 당시 유학생이었던 이 부회장의 나이는 28세였다. 이 회장은 이 부회장에게 당시 61억 원을 줬다. 이 과정에서 세금 16억 원을 냈다. 나머지 45억 원을 종자 돈 삼아 경영권 승계 작업이 진행됐다.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이 이듬해에 있었다.

1995년 당시 이건희 회장의 나이는 54세였다. 아마도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한 물밑 작업을 시작한 건, 그보다 한참 전이었을 게다.

여기서 간단한 산수. 54 빼기 48은? 그렇다. 딱 6년만 지나면, 이 부회장은 1995년 당시의 이건희 회장 나이가 된다. 지금 중학생 나이인 이 부회장의 아들은, 그때 대학생이 된다. 이 부회장이 자식에게 경영권 물려줄 준비를 할 때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부회장은 아직 회장 직함도 달지 못했다.

이건희가 물려받은 삼성, 이재용이 물려받을 삼성"'다른 기업'이다!"

변수가 많다. 일단 이 부회장이 언제 회장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취임과 동시에 승계 작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 맞다. 그간 갈고 닦은 경영능력을 발휘하는데 전력투구할 시간은 길지 않다. '승계 준비를 그렇게 일찍부터 해야 하나….'  일반인의 체감으론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봉건 왕조를 떠올리면 이해가 된다.


왕이 즉위하면 첫 과제가 후계자 선택이다. 왕자를 많이 낳아야 하고, 적당한 때 세자를 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선, 교육이라는 과제가 있다. 조선 왕실의 세자 교육은 매우 엄격했다. 세자를 잘 길러내야, 왕이 죽어서 선조들을 볼 면목이 선다고 믿었다. 당연하다. 왕의 절대 목표는 왕조의 유지다. 왕권이 한 세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

재벌도 똑같다. 기업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 속에 있는 봉건 영지다. 영주의 권력을 대대손손 누리고 싶어 한다. 어느 정도 성공한 기업인에게 물어보라. 가장 큰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십중팔구 자식 문제라고 한다. 자식 걱정 없는 부모가 어디 있겠나 싶지만, 재벌은 경우가 다르다. 재벌 왕조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문제다.

여기서 재벌과 왕조가 다른 대목이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크기나 인구는, 한 세대 만에 확 달라지지 않는다. 전쟁 같은 예외만 없다면 말이다.

재벌은 그렇지 않다. 이건희 회장이 물려받았던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이 물려받을 삼성은, 완전히 다른 기업이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 그룹을 물려받을 당시엔 순환출자구조 같은 편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세금을 제대로 내고 싶지 않았을 뿐, 그룹 장악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그룹의 간판 격인 삼성전자를 장악하려면 복잡한 편법이 필요하다. 삼성전자는 더 이상 국내시장에서 옥신각신하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대폰, 반도체 등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한 글로벌 기업이다. '엘리엇 사태' 역시 그래서 생긴 일이다. 


지금 이재용이 겪는 문제, 아들에게 물려줄 때 또 겪는다


삼성전자 최대주주는 국민연금이다. 7.6%를 갖고 있다. 그 다음은 삼성생명으로 7.2%다. 삼성물산이 그 다음인데, 4.1%를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네 번째로 3.4%를 쥐고 있다. 


삼성전자는 개인이 지배하기에 너무 큰 기업이 됐다. 다른 계열사가 지분을 갖게 하고, 그 계열사를 다시 총수가 지배하는 편법이 쓰인 건 그래서다. 이재용 부회장이 23.23% 지분을 갖고 있는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흡수 합병한다면, 이 부회장이 우회적으로 삼성전자 장악력을 높일 수 있다. 이 대목을 '엘리엇'이 겨냥했다.

앞서 이재용 부회장도 곧 승계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지금 이 부회장이 겪는 문제가 몇 년 뒤에 반복된다는 뜻이다. 취약한 지배구조가 그대로라면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네 가지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삼성, 지주회사 전환을 왜 두려워 하나?

하나는, 국민경제를 위해 불행한 경우다. 삼성전자가 확 쪼그라드는 것. 그래서 시가총액 자체가 줄어들면, 굳이 편법으로 장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경우는 원치 않는다.

두 번째는 지주회사로의 전환이다. 일부 언론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으로 탄생할 통합 삼성물산을 가리켜 "삼성그룹 지주회사"라고 부른다. 틀린 표현이다. "지주회사 격" "지주회사 역할" 정도가 무난하다. 삼성은 아직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않았다. 지주회사로 전환한다는 건, 지금처럼 다른 계열사를 동원해서 삼성전자를 지배하는 방식을 버린다는 뜻이다.

삼성 수뇌부는 당장 이렇게 할 마음이 없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주회사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데 드는 비용 때문이다. 지주회사 전환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 부회장이 왜 안정적인 지분 비율 확보에 목을 매야하느냐"고 반문한다. "안정적인 지분"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른데, 주주총회에서 특별결의를 막을 수 있는 수준을 가리킬 때가 많다. 특별결의를 위해선 3분의 2 지분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한 지분 비율은 3분의 1이상이다. 지주회사 지분을 이 정도 확보하고 있다면, 어떤 돌발변수가 생겨도 경영권이 흔들릴 일은 없다.


반면,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 장하성 고려대학교 교수 등은 약간의 경영권 위협 가능성은 총수에게 약이 된다고 보는 편이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영권이라면, 오히려 총수의 전횡 등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 부회장이 20%대 지분만 확보할 수 있다면, 지주회사 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정도라면, 삼성으로서도 큰 부담이 아니다.

포이즌 필, 차등의결권 도입 주장부작용은 없나?


세 번째는 법을 바꾸는 것이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와 코스닥협회는 지난 15일 '공정한 경영권 경쟁 환경 조성을 위한 상장회사 호소문'을 발표했다.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포이즌 필(신주인수선택권)과 차등의결권 등이 도입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포이즌 필이란, 기존 주주들에게 회사의 신주를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경영권 확보를 노린 누군가가 회사 주식을 전격적으로 사들일 때, 그를 제외한(즉 신주인수권자를 선택해서) 기존 주주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기존 주주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경영권 방어를 할 수 있다. 


차등의결권이란, '1주 1표' 원칙의 예외를 두는 제도다. 경영권을 쥔 측이 적은 지분으로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외국에서도 흔히 쓰인다. 예컨대 미국의 구글, 페이스북 등은 창업자가 차등의결권을 갖고 있다. 기술은 있지만 자금은 부족한 벤처기업이 경영권 위협을 신경 쓰지 않고 적극적으로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하게끔 하자는 취지다. 


재벌 총수 일가가 차등의결권 등을 활용할 수 있다면, 이재용 부회장은 제2, 제3의 엘리엇 사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등이 비슷한 주장을 했었다. 재벌 총수에게 안정적인 경영권을 보장해주고, 대신 세금을 제대로 걷자는 게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포이즌 필(Poison pill)'은 우리말로 '독약'이다. 부작용이 그만큼 명백하다. 경영권을 쥔 측이 이 제도를 악용하면, 견제할 방법이 없다. 기존 주주들은 영속적인 지배권을 갖는다. 정상적인, 꼭 필요한 인수합병마저 불가능해진다.

차등의결권도 문제가 있다. '1주 1표'의 원칙 위에 세워진 현행 상법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 그뿐 아니다. 한국의 재벌기업은 대부분 순환출자 구조 혹은 그와 유사한 형태다. 삼성처럼 계열사 지분을 동원해 다른 계열사를 장악하는 구조라는 말이다. 이런 구조와 차등의결권이 맞물리면, 재벌 총수의 권한이 너무 강해진다.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나라는 대부분 순환출자 구조 문제가 없다. 재벌이 차등의결권 도입을 주장한다면, 먼저 지배구조부터 손질해야 한다.

"이재용과 삼성을 생이별 시키자"

남은 한 가지는 총수 일가와 재벌을 '생이별'시키는 방안이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막대한 세금이 발생한다. 국가가 이를 현물 주식으로 징수하면, 사실상 국가가 대주주 역할을 할 수 있다. 국민연금 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국영 지주회사를 만들 수 있다. 논리적으론 그럴 듯하지만, 현실에서 구현되기란 쉽지 않다. 재계와 보수 진영의 반발이 필연이다.

'생이별'을 위한 방법은 또 있다. 재벌 총수가 주식을 공익재단에 넘긴다. 그리고 공익재단이 지주회사가 돼 계열사를 지배한다. 총수 일가는 재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다만 총수 가문 구성원은 일종의 명예직으로 참가한다. 총수가 왜 그래야 하느냐고? 정부가 정상적으로 세금을 걷고, 기업 규모가 계속 커진다면, 후계자 입장에서 다른 방법을 찾기 힘들다. 세금 내고 나면 상속분은 줄어든다. 그런데 기업이 커지니까, 지분 비율이 너무 적어진다. 다른 계열사를 동원한 지배방식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경영권을 행사할 방법이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공익재단에 지분을 넘기는 게 낫다. 때마다 배당도 받고 명예도 누린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 독일의 보쉬 등 유럽 대기업 중엔 이런 경우가 꽤 있다. 이들 가문이 공익재단에 지분을 넘긴 건, 모두 보수 정권 집권기였다. 따라서 '좌파 정책'이라는 비난을 살 여지도 적다. 정승일 <사민저널> 기획위원장이 이런 입장이다.

하지만 우려도 있다. 기업을 지배하는 공익재단 구성원을 누구로 할지가 문제다. 정치적 외압으로부터의 독립성, 경영 투명성 등이 확보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권 바뀔 때마다 몸살을 겪는 포스코나 KT처럼 될 수 있다.

이재용, 자식도 '엘리엇 사태' 겪게 할 건가?

위의 네 가지 답 가운데 첫 번째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 나머지 세 가지 중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이재용 부회장은 올해 48세다. 사실상 회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당분간은 부회장 직함에 머물러야 한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로 얼마나 있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회장이 되면, 곧 경영권을 물려줄 준비를 하게 될 게다. 이건희 회장이 남긴 지분 가운데는 동생들의 몫도 있다. 그걸 뺀 나머지 지분으로 거대 기업을 지배해야 한다. 


이건희 회장이 그랬듯, 당장은 이렇게 불안정한 지배구조로도 꾸려갈 수 있다. 하지만 자식에게 물려줄 때가 되면, 문제가 생긴다. 이런 허점을 투기자본이 그냥 넘어갈 리는 없다. 게다가 '엘리엇 사태'로 삼성의 실력도 검증이 됐다. 허점이 찔리면, 삼성은 허둥지둥 한다. 자사주 매각 같은 궁여지책까지 쓰면서, 스스로 시장의 신뢰를 깎아내린다. 이걸 뻔히 봤는데, 제2, 제3의 엘리엇이 나타나지 않을까? 


'엘리엇 사태'로 밤잠 못 이룰 이재용 부회장이 정말 자식을 사랑한다면, 답은 명백하다. 지배구조 개혁을 미뤄서는 안 된다. 어떤 식으로건 답을 찾아야 한다. 기자가 희망하는 답은 앞서 언급한 것 가운데 두 번째와 네 번째다. 모쪼록 이 부회장의 현명한 선택을 기대한다.

 

 

재벌 사랑이 애국인 이상한 나라, 한국

시사저널 | 윤민화 기자 | 입력 2015.07.23. 14:37 | 수정 2015.07.23. 14:45

 

"삼성 총수 일가가 미국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과 다툼에서 승리한 것과 별개로 (삼성물산 합병 논란은)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의 오랜 재벌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는 새 증거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 20일자 '삼성의 구사일생으로 드러난 재벌 체제의 문제점(Close shave for Samsung raises Chabol fears)'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는 근본적으로 한국의 불투명한 재벌 중심 기업지배 구조 탓이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7월11일자 "삼성 재편성하기(Reconstructing Samsung)"

"한국 정부는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며 재벌 편애 관행을 제한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연금공단의 합병 찬성은 이 약속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국민연금공단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과 서스틴베스트(의결권 자문기구)의 권고도 무시했다."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 7월 20일자 "한국의 삼성 분수령(Korea's Samsung Watershed)"

전 세계 언론이 한국 때리기(Korea-bashing)에 나섰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논란이 계기가 됐다. 온 나라가 합병 찬성에 발 벗고 나서면서 삼성 지배구조 지키기에 혈안이 된 것처럼 보였다. 이로 인해 국제 투자 금융 시장에서 코리아디스카운트(한국 기업 주가가 가치에 비해 저평가되는 현상)는 더 심해지고 있다.

한국 언론 다수가 국민연금공단에게 삼성 지키기에 나서라고 압력을 가했다. 일부 매체는 미국 투기자본이 한국 산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호들갑떨었다. 전 세계 115개 국가 3만9000여 기업에게 의결권 행사를 자문하는 ISS는 '투기자본 대변인' 쯤으로 취급받았다. 이 탓에 글로벌 금융투자자 눈에는 한국이 갈라파고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쯤으로 비춰지고 있다.

지난 17일 삼성그룹의 두 계열사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안이 통과됐다. 최대 수혜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일가다. 이재용 부회장은 뉴 삼성물산 지분 16.5%를 보유한 최대주주가 됐다. 지주회사격인 삼성물산 지분을 끌어올리면서 이재용 부회장은 그룹 지배구조를 장악했다.

찬성표는 당초 예상보다 많았다. 이날 삼성물산 임시 주주총회에는 의결권을 가진 주주 84.73%가 출석해 69.53%가 찬성표를 던졌다. 삼성물산 통합법인은 9월 1일 출범한다.

◇ ISS "소액주주 이익 무시하는 재벌 횡포"

ISS는 7월 3일자 보고서에서 "이번 합병으로 지배주주 일가는 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지배권과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로써 지배주주는 소액주주가 손해를 보더라도 자기 이익은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분석했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06%을 보유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삼성전자 지분 4%를 갖고 있다. 삼성물산 지배권만 접수하면 이재용 부회장 일가는 삼성전자 지분 8.06%를 확보하게 된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업체로 삼성그룹의 기함이다. 외국 투기자본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 지배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이번 합병으로 그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제 의결권 자문기구 글래스루이스(Glass Lewis)도 이번 합병을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지배주주의 재벌 놀음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글래스루이스는 지난 7월 1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번 합병은 삼성물산에 대한 전략적 이익보다 제일모직과 이재용 부회장 일가 이익에 더 부합한다"며 "독립 주주 입장에선 납득할 수 없는 경영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김우찬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이번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이 본인 이익을 위해 벌이는 자기 거래일 뿐"이라며 "주주이익과 완전히 어긋나는 결정"이라고 말했다.

◇ 재벌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경제

합병 논란 내내 삼성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원일 제브라 투자자문 대표는 "국내에 삼성의 도움을 받지 않은 기업이나 개인이 드물다"며 "(이번 합병은) 삼성이라 가능했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는 재벌과 함께 성장했다. 국내 기업지배 구조는 재벌 체제로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 재벌 총수가 대주주로서 경영권을 독점하는 행태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다. 이원일 대표는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의 재벌 기업지배 구조를 이해하기 힘들다"며 "수익이 나지 않으면 국적에 상관없이 주주의결권을 통해 기업을 매각하는 것이 국제 규범이다"고 설명했다.

경영권 승계 문화는 국제 사회 기류와 동 떨어져 기업 경쟁력을 퇴보시킨다는 의견이 다수다. 삼성, 현대차, SK, 한화 등 한국 재벌이 이에 해당한다. 김우찬 교수는 "엘리엇은 합병에 반대하는 다른 주주와 같은 논리를 폈을 뿐이다"며 "더 비겁한건 (삼성과 영업관계를 고려해 찬성표를 던진) 국내 기관 투자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원일 대표는 "엘리엇은 지배구조 펀드로서 단순한 이익 극대화가 최우선 목표"라며 "엘리엇이 삼성 경영권을 침해하려 한다는 주장은 낭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엘리엇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주주 친화적 접근 방법을 택하지 않아 아쉽다"고 덧붙였다.

한편 삼성물산 최대주주 국민연금공단은 17일 주총에서 합병 찬성 입장을 서면으로 통고했다. 하지만 찬성 사유는 밝히지 않았다. 이원일 대표는 "국민연금공단이 주총이 끝난 뒤에도 찬성 이유를 밝히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우찬 교수는 "국민연금공단의 찬성은 지난 10년간 선례를 모조리 무시한 결정"이라며 "삼성이라는 기업 하나에 국가 기관까지 동조하는 모습은 국제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원일 대표는 "수십년 뒤 이번 합병 사태를 돌아봤을 때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큰 변환점으로 남을 것"이라 말했다.

윤민화 기자 / minflo@sisa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