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재벌의 상속에 관한 특별법이 필요하다” - 엘리엇 파문..

일취월장7 2015. 6. 29. 12:06

 

엘리엇이 나타났다

지난 5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 합병을 선언했다. 이건희 회장 이후에도 삼성전자에 대한 ‘삼성 일가’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헤지펀드 엘리엇이 합병을 반대하고 나섰다. 엘리엇은 어떤 회사이고 무엇을 노리는가.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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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호] 승인 2015.06.29  09:02:28

지난해 7월, 국가부도 사태를 앞둔 아르헨티나 경제 관료들은 채무 조정 협상을 위해 미국계 헤지펀드 간부들을 만났다. 협상 결렬 직후, 아르헨티나 관료들은 헤지펀드들을 ‘인간쓰레기(scum)’로 지칭했다. “썩어가는 시체나 쪼아 먹는 독수리(vulture)들에게 강탈당할 수는 없다.” 그 헤지펀드의 회장 폴 싱어는 동료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아르헨티나인들을 ‘시장 규칙도 거부하는 허풍선이 녀석들(charlatans)’이라고 불렀다(<블룸버그 비즈니스> 2014년 8월7일). 헤지펀드의 이름은 엘리엇(Elliott)이다. 오는 7월17일, 삼성물산 임시 주주총회에서 삼성그룹의 미래를 둘러싸고 이건희 회장 일가와 격돌할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합성 이정현</font></div>7월17일 삼성물산 임시 주주총회에서 삼성그룹의 미래를 둘러싸고 이재용 부회장(사진) 등 이건희 회장 일가와 헤지펀드 엘리엇의 일전이 펼쳐진다.  
ⓒ사진합성 이정현
7월17일 삼성물산 임시 주주총회에서 삼성그룹의 미래를 둘러싸고 이재용 부회장(사진) 등 이건희 회장 일가와 헤지펀드 엘리엇의 일전이 펼쳐진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배력’의 가장 약한 고리

핵심은 삼성전자였다. 삼성의 경영권 상속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삼성전자에 대한 ‘삼성 일가’의 지배력을 이건희 회장 사후에도 유지하는 것이다. 삼성 일가가 직접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4.7%에 불과하다. 다만 삼성 일가가 지배하는 기업들(삼성생명·삼성물산·삼성화재)이 다시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하게 만드는 것으로 ‘지배력’을 유지해왔다. 모두 합치면 17.4%다.

삼성전자는 비싼 회사다. 시가총액이 대충 190조원에 이른다. 그래서 17.4%(시가총액 190조원 기준으로 33조600억원)로도 안정적 지배가 가능했다. 삼성 일가에 도전하려면 수십조원(수백억 달러)이 들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제약 조건이 있다. 일가로부터 계열사들을 거쳐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지배력의 고리’가 끊어지면 안 된다.

가장 약한 고리는 삼성물산이다. 이건희 일가가 직접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은 고작 1.4%다. 계열사의 지분을 모두 합쳐도 13.99%다. 이런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지분을 4.1%나 갖고 있다.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삼성물산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삼성그룹이 지난 5월26일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을 선언한 이유다.

왜 제일모직인가? 제일모직은 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다. 삼성 일가가 제일모직에 직접 가진 지분만 42%(계열사 합치면 50.7%)다. 누가 덤벼도 끄떡없다. 더욱이 합병 선언 당시(5월26일), 제일모직 주가는 삼성물산의 3배에 이르렀다. 합병은, 이런 제일모직에 대한 지배력을 삼성물산(과 그 자산인 삼성전자 지분)으로 확산시키려는 시도다. 빨간색 물감 9g과 노란색 물감 3g을 섞은 물감의 색은 빨간색에 좀 더 가까울 터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엘리엇의 창립자는 변호사 출신인 폴 싱어 회장(사진)이다. 엘리엇은 ‘벌처(시체를 뜯어 먹는 탐욕스러운 독수리)’라 불리기도 한다. 이윤을 위해 전 세계를 넘나드는 헤지펀드다.  
ⓒEPA
엘리엇의 창립자는 변호사 출신인 폴 싱어 회장(사진)이다. 엘리엇은 ‘벌처(시체를 뜯어 먹는 탐욕스러운 독수리)’라 불리기도 한다. 이윤을 위해 전 세계를 넘나드는 헤지펀드다.
 
예컨대 기업가치 20억원(주주 10명이 시가 2000만원짜리 주식을 각각 10장씩 보유한 것으로 가정. 총주식수 100주)인 A사가 기업가치 10억원(주주 10명이 시가 1000만원짜리 주식을 각각 10장씩 보유. 총주식수 100주)인 B사와 합병해서 30억원짜리 C사를 설립한다고 치자. C사는 새로 주식을 발행해서 옛 A사와 B사의 주주들에게 배분해야 한다. 그런데 양사의 주주들을 동등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 그들이 가졌던 기업(=주식)의 가치가 달랐으니까. 그래서 A사와 B사의 이전 기업가치를 기준으로 신생 기업 C사의 주식을 나눠준다. 예컨대 A사의 기업가치가 B사의 2배였다면 ‘합병 비율’을 ‘1(A사) 대 0.5(B사)’로 설정한다. 이에 따르면, A사 주식 10주는 C사 주식 10주로 교환된다. 그러나 B사 주식 10주는 C사 주식 5주와 바꿔야 한다. 계산해보면, C사 주식은 모두 150장(A사 기존 주주 100장, B사 주주 50장)이다. 그리고 C사에서 A사 기존 주주들의 지분율은 66.7%(100/150)에 이른다. A사의 기업가치가 B사보다 높았던 덕분이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은 ‘1대0.35’다. 제일모직 주주는 주식 100주를 신생 합병회사 주식 100주로 바꾸게 된다. 삼성물산 주주는 100주로 합병회사 주식 35주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제일모직의 절대적 대주주인 삼성 일가는 합병회사(와 그 자산인 삼성전자 지분)에 대한 지배력을 안전하게 간직할 수 있다.

그러나 6월4일, 복병이 나타났다. 바로 엘리엇이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매입했다고 통보했다. ‘합병 조건이 공정하지 않아 주주이익에 배치된다’며 합병 반대 의사도 밝혔다. ‘합병 비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엘리엇은 양사의 ‘자산(assets)’으로 시비를 걸었다. 자산총액(기업이 보유한 토지, 공장, 시설, 증권 등의 가치)으로 보면, 삼성물산(29조5000억원)의 덩치가 제일모직(9조5000억원)보다 훨씬 크다. 이런데도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이 0.35밖에 안 된다는 것은 불공정하며,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친다고 했다. 한편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등 계열사 주식을 현물배당(배당금을 현금이 아니라 예컨대 삼성전자 주식으로 주주에게 지급)하자며 정관 개정도 요구했다. 사실상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소리다. 삼성물산에서 외국인 주주들의 지분은 26.63%다. 한국인 소액주주들 중에도 엘리엇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다. 삼성물산 임시 주총의 승패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국내 언론에서도 이 합병 비율(1대0.35)을 비판한다. 해외에서는 자산가치가 기준인데 유독 삼성만 어떤 ‘음모’로 시가총액(주가) 기반의 기업가치 산정을 해 삼성물산을 거저먹으려 한다고 암시하는 식이다. 이를 허용한 ‘자본시장통합법’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해외에서도 기본적으로 주식가치에 따라 기업가치를 산정한다. 주주에게 중요한 것은 ‘기업이 얼마나 많은 땅과 시설, 증권 등을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다. 회사가 그 자산들을 잘 활용해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주주에게 돌려줄 것인가가 핵심이다. 자산이 많아도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적은 자산으로도 큰 수익을 내는 기업도 있다. 금융시장이 기업평가에서 주가를 중시하는 이유다. 물론 특정 기업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릴지 추정하기 힘들 때도 있다. 이 경우에는 자산이나 다른 비슷한 회사의 시세 등을 참조해서 해당 기업의 가치를 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업가치 평가의 기본은 주식가치다. 자본시장통합법은 나름 글로벌 금융시장의 추세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은 누구에게 표를 던질까?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9.92%)로서 ‘삼성 대 엘리엇’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 재벌개혁을 주도해온 일부 시민단체들은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가치 제고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는 등의 성명서를 내고 있다. 엘리엇의 주장과 상당 부분 겹친다. 재벌개혁 운동을 주도해온 김상조 교수(한성대)는 <경향신문> 칼럼(6월17일)에서 “엘리엇이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삼성물산만이 아니라 삼성그룹의 미래에 대해서도 자신의 구상을 밝힐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삼성그룹의 미래나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따위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엘리엇의 투자 행태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놀랄 만한 엘리엇의 투자 행태

엘리엇의 창립자는 변호사 출신인 폴 싱어 회장이다. 엘리엇은 ‘벌처(vulture:시체를 뜯어 먹는 탐욕스러운 독수리)’라 불리기도 한다.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다. 엘리엇 등 헤지펀드들이 사들인 아르헨티나 국채 때문이었다. 국채란 국가가 돈을 빌릴 때 발행하는 증서다. 지금 5만원을 국가에 빌려주면, 만기(예컨대 10년 뒤) 때 국채에 기입된 액면가 10만원을 지급한다. 국채에도 가격이 있고 상황에 따라 변동한다. 발행 국가의 재정이 악화되어 상환 가능성이 줄어들면, 국채 가격 역시 급락한다. 아르헨티나는 2001년에 950억 달러 규모의 국가부도를 냈다. 국채 가격이 바닥을 쳤다. 대다수 국가에는 채무자가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경우 일부 금액을 탕감해주는 제도가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자국의 국채를 매입한 해외 투자자들과 여러 차례 국제 협상을 벌여 채무의 70% 내외를 탕감받았다. 아르헨티나로부터 10만원을 받아야 하는 채권자가 3만원 정도만 받기로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끝까지 버티는 채권자들이 있었다. 엘리엇 등 헤지펀드들이었다. 이들은 아르헨티나 국가부도 전후의 폭락한 가격으로 국채를 매입했다. 엘리엇은 액면가 6억3000만 달러(만기에 6억3000만 달러를 지급한다는 의미) 상당의 아르헨티나 국채를 불과 4800만 달러에 샀다. 그러나 ‘전액 상환’을 요구했다. 미국 법원에 소송도 제기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헤지펀드들이 요구하는 15억 달러를 갚기 전에는 채무 조정된 다른 빚들도 상환할 수 없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알박기’다. 지난해 6월, 미국 대법원은 엘리엇 등 헤지펀드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르헨티나 처지에서는 헤지펀드들에게 상환금(액면가) 전액을 돌려주면, 이미 채무 조정을 약속한 다른 채권자들에게도 그래야 한다. 결국 2001년 이후 13년 만에 아르헨티나는 다시 국가부도를 당했다.

엘리엇은 더 허약한 국가들도 같은 방법으로 압박해왔다. 국가부도 상태인 가난한 나라의 국채를 싸게 사들인 후 해당 국가가 국제기구나 부자 나라의 원조금(물품)을 받기까지 기다린다. 불쑥 국채의 액면가 전액을 상환해달라고 요청하고 관련 소송을 낸다. 가난한 나라가 거부하면, 채권자 자격으로 그 나라의 무역 및 금융거래를 동결시킨다. 국가경제 시스템 전체가 ‘인질’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종 동결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전액 상환’을 요구하면 버티기 힘들다. 엘리엇은 콩고, 페루 등의 국채로 수백%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2000년 말 반정부 시위의 격화로 탈출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 전용기가 엘리엇에 압류된 상태였다. 후지모리가 마지막 내린 대통령 명령은 엘리엇에 5800만 달러(1140만 달러에 매입)를 상환하는 것이었다.

기업도 엘리엇의 좋은 사냥감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집단 발병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있다. 탐사보도 전문 기자인 그레그 팰러스트는 미국의 대표적 거부인 폴 싱어 엘리엇 회장이 10억 달러를 어떻게 벌어들였는지 생생하게 취재했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의 석면 기업인 오웬스코닝, USG 등에서는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석면증 증세를 호소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와 관련된 소송이 잇따르자, 석면 기업들은 내부 자금을 동원해 사망한 노동자나 환자들에게 배상하기로 했다. 사실상 파산 상태였다. 폴 싱어는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오웬스코닝을 사들였다. 그는 오웬스코닝의 기업가치를 올릴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배상금을 줄이면 된다. 팰러스트는 싱어가 ‘석면증 환자들이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캠페인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가세했다. 대통령이 직접 관련 법률 개정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텔레비전에 출연해 ‘꾀병설’을 퍼뜨렸다. 폴 싱어 회장은 선거 때마다 공화당에 거액을 기부하는 열혈 지지자다. 석면 기업들의 배상금 액수는 계속 줄었다. 반비례해서 기업가치는 줄곧 올랐다. 싱어 회장은 오웬스코닝을 팔아 10억 달러 정도의 수익을 올렸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2014년 7월 아르헨티나 디폴트 당시 한 신문에 ‘아르헨티나 아니면 벌처펀드’라고 적혀 있다.  
ⓒAP Photo
2014년 7월 아르헨티나 디폴트 당시 한 신문에 ‘아르헨티나 아니면 벌처펀드’라고 적혀 있다.
 
글로벌 자동차 부품업체인 ‘델파이 사례’도 유명하다. GM과 크라이슬러 등에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델파이는 2005년 ‘파산 보호’를 신청한다. 이 무렵부터 엘리엇 등 헤지펀드들은 델파이의 회사채를 싼값으로 매집했다. 회사채는 회사가 발행하는 채권이다. 발행 기업의 재정 악화로 상환 가능성이 낮아지면 가격이 폭락한다. 팰러스트에 따르면, 엘리엇은 델파이 회사채 중 대다수를 액면가의 20% 정도로 사들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GM과 크라이슬러가 파산 위기에 몰렸다. 2009년 취임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동차 산업 구조 프로젝트’를 세우고 거액의 대출금을 지원하기로 한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사모펀드 운영자인 스티븐 레트너. 그가 구해야 하는 기업에는 델파이도 포함되었다. 델파이의 부품이 없으면 GM과 크라이슬러까지 망한다.

사실상 파산 상태였던 델파이의 실권자는 이 기업의 회사채를 대량 매집해둔 채권자들이었다. 엘리엇 등 헤지펀드들은 채권자로서 경영진도 장악하고 있었다. 레트너가 델파이를 살리려면, 채무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채권자(헤지펀드)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레그 팰러스트는 저서(<Billionaires & Ballot Bandits>)에서 레트너의 회고록, 당시 델파이 CFO인 존 시언의 청문회 증언록 등을 통해 협상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을 서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엘리엇 등 헤지펀드들은 미국 자동차 산업을 인질로 수억 달러 규모의 공공자금(자동차 산업 구조 자금)을 요구했다. 수틀리면 델파이의 문을 닫겠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GM과 크라이슬러도 파산할 것이었다. <뉴욕 타임스> 기자 마이클 콜커리는 이를 빗대어 ‘헤지펀드들에게 델파이는 또 하나의 제3세계인가?’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제3세계 국가의 국채를 싸게 산 뒤 그 나라의 경제 시스템을 인질로 삼아 거액을 뜯어내는 행태를 델파이에게도 반복하고 있다는 풍자다. 심지어 사모펀드 운영자인 레트너마저 국가경제를 인질로 삼은 헤지펀드들에게 경악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헤지펀드들은 자신들이 가진 델파이의 회사채를 주식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엘리엇 등은 델파이 회사채를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매입했다. 이런 회사채의 가치를 좀 더 높게 산정하는 반면 델파이 주식의 발행가를 낮게 책정한 뒤 교환하는 방식이다. 헤지펀드들은 델파이 주식을 1주당 불과 67센트로 사들여(회사채와 바꿔) 경영권을 장악했다. 채권자에서 주인(대주주)으로 변신한 것이다.

노조 무력화하고 본사를 ‘저세율 국가’에 등록

이후 엘리엇 등 헤지펀드들은 델파이의 노동조합을 무력화했다. 더욱이 헤지펀드들은 델파이 본사를 저세율의 영국에 등록했다. 이처럼 채무 없고, 노동비용 적고, 세금 안 내는 기업이니만큼 ‘기업가치’는 상승할 수밖에 없다. 헤지펀드들은 2011년 11월 델파이의 주식을 주당 22달러에 상장해서 각각 수억~수십억 달러 규모의 이익을 거둬들였다. 수익률이 무려 3000%다. 미국 정부가 델파이를 정상화하기 위해 퍼부은 공공자금은 모두 129억 달러로 추정된다. 이 돈이 헤지펀드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살려놓은 기업의 세금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2013년 상하이 모터쇼의 델파이 부스. 헤지펀드들은 델파이 회사채를 매집해 큰 이익을 거두었다.  
ⓒEPA
2013년 상하이 모터쇼의 델파이 부스. 헤지펀드들은 델파이 회사채를 매집해 큰 이익을 거두었다.
 
엘리엇은 최근에도 미국의 거대 IT 기업 EMC, 주니퍼 네트웍스 등에 대한 투자로 화제가 되고 있다. 주가가 낮게 형성된 기업을 골라 그 지분을 매입하고, 언론 플레이를 통해 ‘주주이익을 위해 주가를 올리겠다’고 홍보한다. ‘기업 분리’ ‘다른 거대 기업과 합병’ ‘자사주 매입’ ‘비용 삭감’ 따위 방법이 있다. 기업의 주요 사업부를 독립 기업으로 만들어 분사시키거나, 심지어 해당 기업 전체가 다른 기업과 합병하면 들뜬 분위기를 통해 단기적으로 주가를 크게 올릴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기업이 장기적으로 건강한 경영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기업이 내부 유보금으로 시중에 풀려 있는 자사주를 사들이면 그만큼 해당 기업의 총주식수는 줄고 이에 따라 주가가 오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기업의 투자는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크고, ‘비용 삭감’의 주요 대상은 노동자들이다.

엘리엇의 ‘명성’은 다른 주주들을 결집해서 경영진을 타격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실제 확보한 지분보다 훨씬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엘리엇은 단지 2%의 지분으로 EMC 경영진에 분사, 합병, 비용 삭감 등을 압박하다가 결국에는 이사 두 명을 경영진으로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EMC 경영진과 오는 9월까지 ‘평화협정’을 맺은 상태다. 한동안 EMC를 휘젓지 않겠다는 의미다. 주니퍼 네트웍스 역시 엘리엇(지분 8.3%) 측의 이사를 받아들이면서 비용 삭감, 30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 조직 축소 등에 동의했다.

오는 7월17일, 삼성 이건희 가문과 일전을 벌일 엘리엇은 이런 조직이다. 삼성이 그동안 국내에서 사용해온 ‘정·경·언 유착’ ‘삼성 장학생’ ‘국민경제를 위해 삼성을 살리자는 식의 호소’가 통하지 않는 상대다.

 

 

엘리엇 마음먹으면 괴담이 현실 된다

엘리엇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할 수 있다는 ‘괴담’이 돈다. 어느 한쪽의 언론 플레이일 가능성이 높지만 나중에 엘리엇이 ISD를 진짜 무기로 사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회수 : 464  |  노주희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ISD(투자자-국가 간 국제중재제도)에 대한 괴담 2개가 한국을 떠돌고 있다.

첫 번째 ISD 괴담은 2011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 사회는 한·미 FTA 비준 여부로 시끄러웠다. 특히 한·미 FTA에 들어간 ISD 조항에 대한 우려가 컸다. ISD 조항을 그대로 두면, 한국에 투자한 외국인들이 자신들의 투자 수익을 저해한다고 생각되는 한국의 공공정책에 시시콜콜 시비를 걸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자 당시 이명박 정부와 보수 언론이 나서 ‘그건 괴담일 뿐이야’라고 일축했다. ISD는, 후진국 정부가 ‘자국의 영토 중 외국인 소유의 부동산’ 등을 강제로 빼앗을 때나 당한다고 했다. 한국 같은 ‘선진국’은 염려 없다는 거다.

두 번째 ISD 괴담은 최근에 등장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하고 나선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현재 삼성물산 3대 주주)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한국을 상대로 ISD를 제기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엘리엇과 시비가 붙은 건 민간 자본인 삼성인데 그 화풀이를 생뚱맞게 한국 정부에 퍼부을 것이라고 하니, 그 근거가 궁금하다. 필자 역시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 출처를 탐색해봤지만 정확한 근거는 확인 불가능했다. 추측만 무성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5월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ISD로 다시 보는 론스타 문제’ 토론회가 열렸다. 현재 론스타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한 상태다.  
ⓒ연합뉴스
5월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ISD로 다시 보는 론스타 문제’ 토론회가 열렸다. 현재 론스타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한 상태다.
예컨대, 자본시장통합법에 따르면 주가를 기준으로 기업들의 ‘합병 비율’을 정하게 되어 있다. 엘리엇은 기업 가치가 낮게 평가된 삼성물산의 주주로서 자본시장통합법을 시행 중인 한국 정부에 시비를 걸 수 있다고 한다. 혹은 삼성물산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공단(광의의 정부기관)이 7월17일의 삼성물산 임시주총에서 반대표를 던지지 않아 합병이 성사되는 경우, 엘리엇이 한국 정부에 그 손해를 배상해달라고 나설 수 있다는 논리도 나온다.

본디 괴담이란, 출처를 알 수 없으나 사람들 입에 사실처럼 오르내리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뜻한다. 그런데 2012년 한·미 FTA가 발효된 지 채 몇 달 지나지 않아 ‘먹튀’ 론스타가 한국을 상대로 ISD를 제기했다. 물론 우리 정부가 론스타 소유의 부동산을 강제로 빼앗은 일 따위는 없었다. 론스타가 문제 삼은 것은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에 대한 승인을 지연하고 그 매각 차익 등의 수익금에 세금을 매겼다는 점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론스타가 외환카드 주가조작으로 재판을 받던 중이니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지연할 수밖에 없었다. 론스타의 매각 차익에 대한 과세 역시 실질과세 원칙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러나 론스타는 이처럼 우리에겐 정당하기 그지없는 금융·조세 정책들에 ISD를 제기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첫 번째 ISD 괴담의 경우 괴담이 아니라 근거 있는 주장이었던 것으로 판명 났다.

다행히 두 번째 ISD 괴담은 아직까지 괴담으로 남아 있다. 주가를 기준으로 회사 합병 비율을 정하도록 한 것은 한국이 엘리엇을 차별하거나 삼성에 혜택을 주기 위해 일부러 만든 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국제 기준에 어긋난 것도 아니다(22~26쪽 기사 참조). 또한 아무리 국가가 운용 주체라도 국민연금공단의 의사 결정에까지 ISD를 제기할 수 있다는 건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한국은 잘못한 게 없으니 엘리엇의 ISD 제기 또한 걱정할 것이 없다. 엘리엇의 ISD는 그저 괴담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전 회장(위). 유코스 지분을 가진 엘리엇 측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100조원대 ISD를 제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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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전 회장(위). 유코스 지분을 가진 엘리엇 측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100조원대 ISD를 제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런 괴담은 왜 나온 것일까? 현재로서는 삼성과 엘리엇 중 어느 한쪽의 언론 플레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론스타와 만수르(아랍에미리트의 왕족이자 부호) 등이 연이어 ISD를 제기하면서 한국 사회가 예민해하는 상황을 교묘히 이용한 언론 플레이다. 삼성의 언론 플레이라면, 엘리엇도 론스타 같은 ‘나쁜 먹튀 자본’이니 엘리엇에 붙으면 안 된다고 한국인 소액주주들을 설득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엘리엇의 언론 플레이라면, 국민연금에게 합병에 반대하라는 압력 또는 정부더러 이번 사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 정도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엘리엇은 헤지펀드 중에서도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소송을 통해 아르헨티나 군함과 대통령 전용기까지 압류한 전설의 ‘벌처 펀드(부실기업이나 부실채권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자금)’다. 소송뿐일까? 엘리엇은 ISD 역시 수익극대화 전략의 도구로 능수능란하게 사용해왔다.

각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활용해온 엘리엇

이쯤에서 소송과 ISD의 개념을 명백히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한국에 투자한 외국인이, 자기 나라와 한국 간에 체결된 투자보장협정(BIT)이나 자유무역협정(FTA)의 투자보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손해를 입은 것으로 판단했다고 치자.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ISD다. 외국인 투자자와 한국 정부가 각각 발탁한 법률 전문가 2명과 이들이 합의한 또 1명의 전문가 등 3명으로 ‘민간’ 차원의 중재위원회를 구성해서 분쟁을 해결토록 한다. ISD는 흔히 외국인 투자자와 한국 간의 ‘소송’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이처럼 외국인 투자자는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고 외국 민간인들에게 ‘중재’를 받을 수도 있으므로, 공적인 소송과 사적인 ISD는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

엘리엇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한 ISD를 제기한 바 있다. 2003년 러시아 정부는 에너지 대기업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회장을 탈세·횡령 혐의로 기소했다. 유코스의 외국인 주주들은 러시아 정부 때문에 손해를 봤다며 무려 100조원대의 ISD를 제기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엘리엇의 자회사 로즈인베스트코였다. 이 회사는 2010년 러시아 정부에 대해 승소했다. 물론 엘리엇이 ISD로 늘 단맛만 봤던 것은 아니다. 엘리엇의 특수목적법인(SPV) 율리시스는 2012년 에콰도르를 상대로 ISD를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2001년의 경제위기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내렸다가 외국인 투자자들로부터 수십 건의 ISD를 당한 바 있다. 그러나 엘리엇은 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현재로서는 ISD가 삼성이나 엘리엇 어느 한쪽의 언론 플레이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지만, 나중에 엘리엇이 ISD를 진짜 무기로 사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게다가 ‘론스타 ISD’의 경우, ‘우리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한국 정부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 정부는 머나먼 미국 땅에서 미국 변호사들에게 수백억원 규모의 변호사 비용을 줘가며 ‘한국의 정당성’을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다. 엘리엇도 ‘우리가 알고 있는 한도’를 훨씬 넘어서는 이유를 들이대며 ISD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ISD라는 제도 자체가 존재하는 한, ISD의 공격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현재의 우리로서는 예측할 수 없다.

이처럼 ISD는 괴담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 엘리엇은 곤경에 몰린 외국 정부나 기업을 공격해 돈을 뜯어내는 데는 천부적 능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엘리엇이 ISD의 가공할 위력을 활용해 한국을 약탈하겠다고 마음먹을 때, 그 파괴력의 궁극적 대상은 한국인들의 빈곤한 살림살이일 것이다.

 

 

“재벌의 상속에 관한 특별법이 필요하다”

삼성 가문과 엘리엇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형국이다. 국민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 기업집단을 헤지펀드가 차지하게 둘 수도, 총수 일가의 편법과 불법을 방치할 수도 없다. 이를 해결할 대안은 없을까.

  조회수 : 339  |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삼성그룹은 이미 십수년 전부터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그 아들인 이재용 현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그룹 전체를 상속시키는 절차를 진행해왔다. 그러나 실제로 낸 상속세는 16억원에 불과하다. 1996년,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61억원을 증여하며 낸 세금이다. 법률에 따르면, 상속되는 금액이 30억원을 넘어서는 부분부터는 50%의 세율이 적용된다. 더욱이 이건희 회장 같은 기업 대주주의 지분(주식)을 자손에게 물려주는 경우에는 ‘경영권 프리미엄(주식과 함께 해당 기업의 경영권까지 물려받는 프리미엄)’까지 계상한 할증률이 20~ 30% 부가된다. 즉, 이건희 일가가 내야 할 상속세는 모두 수조원에 달한다. 그러나 실제로 상속이 이뤄져왔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건희 일가의 상속세 납부 실적은 16억원에 머물러 있다.

1996년 이 문제를 처음으로 이슈화한 시민단체는 참여연대다. 이 문제 제기로 인해 이건희 회장은 불법적 수단을 통해 자식들에게 ‘금품(주식)’을 증여한 혐의(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사건)로 2007년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휠체어 쇼’를 벌이면서 구속을 피했는데 이런 탈세범은 중범죄로 처벌해 오랜 시간 감옥에서 반성의 시간을 갖게 했어야 마땅했다. 복지국가에 필요한 세수 증대를 위해서도 탈세범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 총수 일가는 사회 지배층이기에 더 엄중하게 처벌받아야 하며 그래야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법치의 붕괴’ 현상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2년 11월30일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이건희 회장 취임 25주년 기념식 직후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사장이 식장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2012년 11월30일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이건희 회장 취임 25주년 기념식 직후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사장이 식장을 나서고 있다.
다만 재벌 총수 일가의 상속에는 국민경제 차원의 특수성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물려주려고 하는 것이 단순히 돈과 부동산이 아니라 ‘거대 기업집단의 지배권’이기 때문이다. 삼성 같은 기업집단의 지배권을 누가 행사하느냐 하는 문제는, 단순히 재벌 일가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경제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의 3세인 이재용, 정의선 등에게 상속되는 재산은 대부분 경영권을 지키는 데 필요한 주식이다. 한국 재벌들의 경우, 가뜩이나 총수 일가의 지분이 적어 ‘쥐꼬리만 한 지분으로 거대 기업그룹을 지배한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물려받는 주식 지분의 최대 65%를 상속세로 납부하면, 계열사들에 대한 총수 일가의 지배력은 이론상 3분의 1로 줄어들게 된다. 이런 상속을 두세 번 거치면 지배력이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뭔가 ‘특단의 방법으로’ 총수 일가가 자신들의 경영권 지분을 확보하지 않는 한 가족 경영은 3세대가 마지막이란 이야기다. 이는 물론 일차적으로 총수 일가의 문제다. 그러나 국민경제적 차원에서 보면, 총수 일가의 지배력은 계열사들을 그룹으로 묶는 접착제 구실을 해왔다. 이 지배력이 사라지면 그룹 역시 해체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총수 일가에게는 특단의 대안이 있었다. 이재용과 정의선은 최근 몇 년간 자기 재산을 수십 배로 불리는 데 성공했다. 합법을 가장한 편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그룹의 경우, 이재용이 삼성SDS 같은 비상장 계열사의 주식을 싼값으로 대량 매입하게 했다. 그다음 그룹 차원에서 삼성SDS에 일감을 몰아줬다. 이렇게 하면, 삼성SDS의 매출과 수익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이후 삼성SDS를 상장했더니 주가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형성되었다. 이재용은 싸게 산 주식을 비싸게 팔아 1조5000억원 이상의 현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부모가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 4%를 상속받을 때 낼 세금 3조원의 절반 정도를 납부할 수 있는 돈이다. 나머지 1조5000억원은, 상속받은 삼성전자 지분 4%에서 매년 나올 수천억원 상당의 배당금으로 분할 납부하면 된다. 현대차그룹도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정의선에게 비슷한 일을 했다.

이러던 와중인 지난해 5월 이건희 회장이 돌연 업무를 처리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삼성그룹 처지에서는 이재용으로의 상속을 더욱 서둘러야 했다. 에버랜드-제일모직 합병과 삼성SDS 상장,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을 급전직하로 추진한 이유다. 문제는 삼성물산이었다. 에버랜드와 제일모직, 삼성SDS는 비상장회사였지만, 삼성물산은 상장회사였기 때문에 국내외 펀드를 비롯한 다른 주주들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 미국의 헤지펀드 엘리엇이 매복해서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재용이든 엘리엇이든, 그들이 노리는 궁극적 목표는 삼성전자다.

상속세 감면과 ‘고용·투자 증대’를 맞바꾸는 독일

문제는, 다른 대안 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총수 일가의 그룹 지배력이 급격히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총수가 없는 빈 공간으로, 주식 가치를 단기간에 크게 올려 엄청난 금융수익을 취하려는 목적밖에 없는 투기 펀드들이 치고 들어올 수 있다. 2003년, 소버린 펀드의 SK그룹 지배권 공격은 최종현 전임 회장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따라 아들인 최태원 회장으로의 경영권 지분 상속이 우왕좌왕 진행되던 와중에 일어났다. 헤지펀드 엘리엇의 삼성그룹 공격 역시 이건희 회장이 급작스레 쓰러지면서 서둘러 경영권 상속이 진행되는 와중에 일어났다. 금융수익밖에 모르는 투기 펀드들이, 현재 상황에서는 좋든 싫든 한국 경제의 근간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는 대기업 집단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고 총수 일가의 편법과 불법을 방치해서도 안 된다. 어떤 묘안이 있을까?

필자는 ‘재벌의 상속에 관한 특별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벌 가문이 상속하는 것은 즉시 경제적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현금이 아니라 경영권이다. 그리고 경영권이 잘못 이전될 경우 종업원과 협력회사, 고객, 회사 소재 지역공동체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다. 삼성그룹 같은 거대 기업집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독일의 경우, 경영권 상속 관련 주식에 대해서는 상속세를 감면해준다. 창업주가 경영권 주식을 자녀에게 상속할 경우 공제율이 85~100%에 달한다고 하니 사실상 상속세를 거의 안 낸다는 의미다. 중소·중견 기업만 아니라 대기업에게도 같은 공제 혜택을 준다. 물론 상속세 감면의 대가로 기업은 고용 증대와 투자 증대를 약속하고 지켜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감면은 취소된다.

이런 수단으로 상속 과정에서 발생 가능한 ‘사고’를 차단할 수 있다면, 중장기적으로는 좀 더 근본적인 ‘재벌 개혁’ 조치를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총수 가문을 대체할 만한 ‘대안적 대주주 블록’을 마련해야 한다. 먼저 국민연금에 공익적 목적의 특별 계정을 따로 만들어 삼성물산과 삼성전자 등에서 ‘공익적 주주권’을 행사하게 할 수 있다. 혹은 편법적인 재산상속을 중범죄로 엄벌하는 것을 대전제로, 이건희 일가가 상속세로 납부한 현물 주식을 관리하는 국가지주회사를 설립해 그 지주회사가 삼성그룹의 2대, 3대 대주주로 참여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그 경우 국가지주회사는 총수 일가가 잘못된 경영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를 경우 퇴진하도록 압박할 수도 있다.

다만 국가지주회사는 자칫 ‘국유화’라는 사회적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좀 더 시장친화적인 방안으로는 공익재단을 활용할 수 있다. 스웨덴의 최대 기업집단인 발렌베리의 최대 주주는 발렌베리 가족이 아니라 공익재단이다. 한국에서처럼 총수 일가가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무늬만(?) 공익재단’이 아니라 실질적 공익재단이다. 예컨대 삼성의 3세들이 상속세로 납부한 주식을 소유한 공익재단(머지않아 최대 주주가 된다)의 이사로 삼성 가문과 관련 없는 공익단체, 노동, 금융, 소비자 부문 등의 대표가 들어가는 경우다. 이렇게 삼성그룹을 ‘공익 기업’으로 만들 수도 있다.

지난 수십 년간 국민들의 세금과 피땀으로 키워낸 삼성 등 거대 기업집단들은 총수 일가의 재산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경제의 발전에 조금도 기여한 바 없는 투기 펀드들이 차지하게 둘 수도 없다. 삼성 가문과 엘리엇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을 그냥 넋 놓고 지켜볼 것이 아니라 차라리 삼성을 ‘국민 모두를 위한 공익적 기업그룹’으로 전환시킬 방안을 고심해보자. 이번 기회에 진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한번 구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