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복지 칼럼

가난한 자는 '현금'에 집착한다! - 한국을 위한 복지 처방전

일취월장7 2015. 6. 22. 11:01

가난한 자는 '현금'에 집착한다!

[함께 사는 돈 탐방기] 물고기를 줘야 하는 이유
 
<프레시안>과 녹색당,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는 '함께 사는 돈 탐방기'라는 공동기획을 시작합니다. 지금은 '각자 생존'의 시대라고 합니다. 노인빈곤율이 OECD 최고수준인 48.1%에 달하고, 체감 불평등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장년층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점점 높아지고 있는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도 이런 현실의 반영입니다. 

그래서 이 기획에서는 우리 사회의 소득 실태에 대해 진단하고, 지역과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대안을 모색해 보려고 합니다. 각자 생존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많은 관심과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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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한국사회에서 완전히 낯선 개념은 아니다. 기초노령연금이나 무상급식처럼 소득기준을 철폐한 분배방식이 미흡하나마 정책화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한국기본소득네트워크,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와 같은 민간단체가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적잖은 기여를 해왔다. 

기존 작업은 유럽사회에서 구축한 이론적 논의를 바탕으로 기본소득 법안이 제정되었거나 일부 시행하고 있는 나라의 사례를 주로 소개했는데, 복지에 대한 관심과 신자유주의적 개입이 동시에 똬리를 튼 한국사회에서 기본소득이 어떻게 제도화될 수 있는가를 모색하려면 유럽중심성을 탈피한 다양한 경험적 연구가 축적될 필요가 있다.

물고기 잡는 법 가르쳐라? 현재 어업이 숙련된 노동을 요구하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관한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on) 교수(미국 스탠퍼드대 인류학과)의 작업을 소개하는 것은 이 같은 취지에서이다. 퍼거슨 교수는 아프리카에 관한 경험적 연구를 중심으로 빈곤과 개발, 이주와 현대성 문제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의 논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류학자이다. 2012년 11~12월 연세대 문화인류학과와 한국문화인류학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현금 거래'의 사회적 삶: 돈, 시장, 그리고 빈곤의 상호의존성', ''사회적인 것' 이후: 신자유주의적 위기와 새로운 복지국가' 주제로 강연을 했고, 한국기본소득네트워크와 좌담회를 가졌으며, 2015년 그간의 작업을 바탕으로 저서 <물고기를 줄 것: 새로운 분배 정치학의 모색>(Give a Man a Fish: Reflections on the New Politics of Distribution, Duke University Press)을 출간했다.  

"어떤 사람에게 물고기를 그냥 준다면 그를 하루만 배부르게 할 것이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 평생을 배부르게 할 것이다." 

개발과 빈곤퇴치 사업에 참여하는 정부나 NGO, 종교단체가 구사해 온 이 관용적 수사를 현시기 어업(fishing)의 사례를 들어 반박하는 것으로 퍼거슨 교수의 논의는 시작된다. 오늘날의 어업은 과거와 달리 아시아의 양식업에 상당 부분 의존하며 일반 어업의 경우 고도로 자본화, 기술화된 특정 기업들이 독점하는 상태다. 노동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면서 실직 어민이 넘쳐나는 판국에 현재의 어업이 정말로 숙련된 노동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우리가 지금보다 물고기를 더 많이 잡을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작금의 어획량은 이미 바다의 생태계를 파괴할 만큼 엄청나다. 어획량을 무작정 늘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이러한 비유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 생태 위기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분배가 아닌 생산에서 탈빈곤의 해법을 찾고자 하는 시각에 대한 문제제기다. 아프리카에서 공식부문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는 전체 성인인구 중 극소수에 불과하며, 실업률은 기약 없이 치솟고 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은 일시적 잡일을 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적당히 손 벌리거나, 자잘한 소매치기로 '땜질'을 반복하는데, 과거 식민지배자들이 "부랑자"라 불렀고, 마르크스(Karl Marx)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 칭했던 이들은 이제 남아공에서 나이가 40대든 50대든 상관없이 '청년'으로 통한다. '청년'이 단순히 세대 범주가 아니라 공식부문 고용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결혼과 출산, 양육을 통해 가족을 구성할 기약이 없이 만성적 유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일반에 대한 통칭이 된 것이다.

실업률이 35퍼센트에 달하는 남아공은 물론 극단적 사례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실물경제와 무관한 금융자본주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기업이 청년들에게 일자리가 아니라 각종 인턴십과 자원봉사기회만 선물보따리처럼 제공하는 한국사회에서 ‘청년’ 집단이 살아갈 사회가 남아공보다 낫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못사는' 남아공은 동정의 대상으로 남겨둔 채 이미 파산선고를 한 유럽 복지국가체제의 파편들을 짜깁기하는 게 유일한 대안일까? 

ⓒ프레시안(최형락)


유럽 복지국가에 노스탤지어를 가질 필요없다

퍼거슨 교수는 (대부분의 비서구인들이 경험해보지도 않은) 유럽 복지국가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전통적인 복지국가의 근간이자 현재 종말을 고했다고 이야기되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정규직 임금노동자와 그의 가족들'만을 대상으로 사회적 돌봄을 제도화했던 불완전한 구성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안정적인 임금 노동의 기회를 박탈당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s)가 새로운 노동자의 전형으로 급부상한 시대에 조응하는 체제도 아니라 주장한다. '보편적인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종말 이후 무엇이 올 것인가가 아니라 '이러한 사회적인 것'(this social) 이후에, 남아공의 역사로 한정 짓자면 "백인 정착자와 흑인 노동귀족만을 위한 역사적으로 특수하고 위계적이었던" 사회적인 것 이후에 무엇이 등장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를 파괴한 주범으로 곧잘 거론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하에서 남반구의 많은 나라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회지원체계를 실험 중이다. 과거의 차별정책이 종식되고 첫 흑인 대통령이 선출된 1994년 이후 남아공의 사회적 부조체계는 계속 확대되어왔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 인구의 30퍼센트를 차지하는 1500만 명의 국민이 정부의 사회지원프로그램을 통해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극빈 지역의 경우 이 수치는 전체 가구의 75퍼센트에 다다른다. 

이를 두고 유럽에서 이미 한물간 '사회적인 것'이 현재 아프리카에서 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퍼거슨 교수는 강조한다. 아프리카에서 등장하는 '사회적인 것'은 유럽 복지국가의 근간이었던 임금노동과 보험 메커니즘과 거리가 멀며, 대규모의 사회적 지원은 오히려 임금노동에서 배제된 다수 개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1998년 이후 대대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아동지원보조금의 경우 결혼 여부를 따지지 않으며, 오직 보조금 지원 대상이 아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돌보는 자인지만 조사한다. '정상적'인 가족을 더 이상 복지 급여의 기준으로 전제하지 않게 된 것이다. 또한 모든 남아공 국민에게 매달 15달러 수준의 현금을 지급할 것을 주창하는 기본소득 캠페인은 가족구조는 물론이고 임금노동의 여부도 따지지 않는다. 임금이라는 공식적 대가를 지급할 직업이 늘지 않는 상황에서 생계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추구하는 다수를 끌어안는 작업을 제안한 것이다. 

빈자들, 사회적이며 현금에 집착한다

이쯤에서 다시 물고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남아공의 사례에서 보듯 기본소득운동이 제안하는 것은 물고기 자체라기보다는 '현금화'된 물고기이다. 금전을 매개로 한 관계를 사회적, 도덕적 연대의 대척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현금 지급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퍼거슨 교수는 사람들에게 생필품이 아니라 현금을 주자고 호소하는 기본소득 입안자들의 주장을 경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옹호한다. 빈자들은 굉장히 사회적이며, 동시에 굉장히 현금에 집착한다. 

이들의 일상에서 시장의 논리와 공통 연대의 논리는 서로 모순적인 것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자기 호주머니 안의 돈이란 (결국 생사의 문제이기도 한) 사회성, 상호의존성의 기회를 배가시켜줄 너무나 소중한 자원이다. 교통비가 없어 이동조차 못 한다면 자신이 의존할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현금거래란 결국 사회적 세계에 '의존성'을 새로이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빈자들의 삶에서 덜 해악적인 의존의 관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일방향적인 의존관계가 상호의존이라는 좀 더 평등한 형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호혜성의 통로를 열어젖히는 창구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고기를 주라는 게 무작정 현금을 베풀자는 게 아니라는 점, 토지든 지하자원이든 특정인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는 공동의 세계에 대해 '지분'을 가진 개인들에게 배당하는 것임을 첨언해야겠다. 노동권이 아닌 사회적 성원권을 강조했던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1842-1921)의 말을 인용하자면, "내가 어떤 재화를 생산하기 때문에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우리 공통의 산출물에 대한 상속인으로서의 지분을 갖기 때문에 배당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이 새로운 정치 형태의 포문을 여는 것인지, 아니면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처럼 현재의 구조적 모순을 야기한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 값싼 해결책에 불과한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크로포트킨이 주장한 정당한 지분(rightful share)이 국경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배당될 수 있는가도 현재로써는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퍼거슨 교수는 프롤레타리아트 임금 노동의 찬양, '룸펜'이나 금전적 관계에 대한 경멸 등 이론적 연역에서 출발한 편견이 수십 년간 좌파 정치학에 전혀 도움이 못되었다는 점을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다른 출발점을 제안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가들의 생각이 아니라 이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경험적 관찰로부터 급진적인 정치를 실험해야 하지 않을까? 신자유주의의 '안티'로 자족하기보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로 문제의 지형을 바꿔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을 위한 복지 처방전

<복지사회와 그 적들>/가오롄쿠이 지음/김태성 외 옮김/부키 펴냄

  조회수 : 216  |  장동석 (출판평론가)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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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호] 승인 2015.06.22  08:54:44

 

 
 
한때 선택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를 두고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논쟁은 현재진행형인데, 선택적 복지를 주장한 사람들은 ‘지나친’ 복지가 효율을 떨어뜨리고 사람들을 나태하게 만든다고 선동했다. 하지만 <복지사회와 그 적들>을 쓴 홍콩의 경제학자 가오롄쿠이의 주장에 따르면 “복지사회는 결코 저효율을 발생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어떤 사회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효율을 창조”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사유경제의 무질서를 가져온다고 본 스웨덴·핀란드·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5개국은 “일부 산업을 국유화하고 민간경제에 국유 자본이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등 국가의 개입을 강조한” 혼합경제 노선을 선택했다. 이를 바탕으로 세금을 통해 복지 재원을 마련하면서 중산층은 점차 늘어나고 안정되었다.

어떤 정치인은 복지는 낭비라고 주장한다. 단기적인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긴 5년밖에 집권할 수 없는데, 누구라서 장기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이들을 향해 <복지사회와 그 적들>은 복지는 낭비나 소비가 아닌 ‘투자’라고 강조한다. 앞서 열거한 나라들이 당당한 복지국가로서 1인당 GDP, 국가 경쟁력, 청렴도 순위, 경제자유지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여타 나라를 압도하는 것이 그 방증이다. 복지 지출이 빈부 격차를 줄이고, 사회적 수요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때문에 경제위기를 비켜갈 수 있는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포토</font></div>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노숙인(위)이 급증했다. 한국은 여전히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이 더 많다.  
ⓒ시사IN 포토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노숙인(위)이 급증했다. 한국은 여전히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렇듯 자명한 사례들이 많은데, 세계 각국은 왜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선택하지 않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복지국가로 가지 않아야만 이득을 얻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단적으로 ‘고위층’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고위층은 “경제 기초부터 생활 방식까지 모두 완벽하게 독립적인 집단”으로 “숫자는 결코 많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사회 전체의 유·무형 자원을 통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셈이다. 복지사회로 이행하면 이들에게는 “가시적인 이득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입는다. 당연히 복지사회의 최대 반대자가 될 수밖에 없다.

복지사회가 부자 나라에서만 가능하다고?

문제는 편견이다. 한국 사회를 보면 명확한데, 선거 때마다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아직도 자본주의가 우리 모두를 잘살게 해줄 것이라는, 이제는 폐기되어야 마땅한 생각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복지사회는 부자 나라에서만 가능하다는 의식도 여전히 팽배하다. 북유럽 5개국뿐 아니라 독일의 복지사회도 이 나라들이 그리 부유하지 않을 때 탄생했고, 그 원동력으로 지역과 국가 발전이 뒤따랐다. “복지 수준이 높을수록 경제 수준 또한 높고, 반대로 복지 수준이 낮을수록 경제 수준 또한 떨어진다. 게다가 사회복지 제도를 일찍 수립한 나라일수록 발전이 더욱 빠르고 복지제도 수립이 늦을수록 국가 발전에 방해를 받는다.”

복지 논쟁을 둘러싼 한국적 상황에 이보다 더 적절한 처방전은 없어 보인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복지정책을 결정하는 그 누구도 이 책을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복지사회와 그 적들>이 오래도록 책상 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