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복지 칼럼

'매드맥스' 한국, 쿠오바디스!

일취월장7 2015. 6. 20. 11:44

'매드맥스' 한국, 쿠오바디스!

[민교협의 정치시평] 이 기만적인 풍요로움!
 
메르스 사태가 거의 한 달째 한국 사회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한 네티즌의 말처럼 메르스 바이러스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렇게 대처하는 이 사회가 우리를 무섭게 한다. 어쩌면 1년 전 세월호 사태와 이렇게도 닮았을까. 배가 기울어져 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데도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만 반복하면서 자신들은 탈출한 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던 그 정부, 함께 아파하겠다는 사람들을 불순분자로 몰아간 이 나라의 기득권층은 이번에도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메르스 발병 이후 정부가 했던 첫 번째 말이 "유언비어 유포자 엄단"이었다. 그 말은 세월호 참사의 "가만히 있으라"가 변종된 바이러스였다. 세월호 참사에서 눈감으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삼성이란 공룡 기업을  위해 정보를 숨겼다"는 이른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그 가운데 수많은 사악한 일들이 능수능란하게 처리되고 있다.

국방장관이란 사람이 1600억을 삼켰으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통영함 비리에 대한 국회조사에 기껏 생계형 비리라고 해명했단다. 끊임없이 터지는 방위 산업 비리와 곳곳에서 터지는 병역 비리에 대한 인식이 겨우 그 정도란 말인가. 생계형이란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그런 비리를 저지르지 않으면 생계가 위험하다는 말이다. 부적절한 답변이란 비판에 권력형 비리가 아니라 실무자들이 저지르는 비리라서 그렇게 표현했단다. 그렇다면 권력형 비리는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는 것일까.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이 더 두렵다.

병역비리, 전관예우, 탈세라는 비리3종 세트에 곁들여 종교편향, 불법 정치개입, 삼성 특혜 의혹,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과 간첩 조작 사건 등에 대한 불의한 개입 등 끝도 없이 나오는 부패와 부정, 불의의 한복판에 서있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의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하려하지 않고, 올바른 정신은 고사하고 정당한 민주주의 국가를 이끌어가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사람을 여전히 세 사람에 한 명 꼴 이상으로 지지하고 있단다. 도무지 제정신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한국사회는 근대화 이래 물질적이며 경제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움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풍요로움은 병든 것이며 약탈적인 풍요로움이다. 그런 측면에서 반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이 풍요로움 뒤에 숨은 수많은 갈등과 불평등, 착취 구조에 침묵한다면 그 풍요로움이 기만적인 것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 풍요로움은 분명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근대의 체계 덕분이다. 근대적 사유와 체계가 과학주의적이며 산업사회로, 또 자본주의체제로 현실화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풍요는 위험하고 한계가 있으며, 수많은 역기능과 모순을 초래하고 있다. 지금 인류는 이러한 근대의 철학과 체제를 넘어 그 이후를 모색해야할 매우 중요한 순간에 처해있다. 이는 시대적 요청이면서 또한 전 세계가 당면하는 핵심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풍요로움은 결코 계속될 수 없다. 한 순간 성공한 시대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생존하고 인간다운 삶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시대를 되돌아보고, 역기능과 모순을 수정하면서 다음 시대를 준비해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수없이 지적된 것처럼 한국은 근대를 산업화로만 수용하였으며, 19세기 말 이래의 처절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에 우승열패, 승자독식의 사회로만 치달았다. 그 희생과 노력 끝에, 그 역사적 투쟁 끝에 우리가 누리는 일정 부분의 물질적 풍요와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이 작은 성공에, 이 물질적 풍요로움에 넋이 빠져 인간과 삶의 핵심적 가치와 중요한 규범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 끝은 무엇이며,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독일의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은 <근대에 대한 고찰>이란 책에서 사회 전체가 경제란 단일한 척도에 의해 지배될 때 그 사회는 다른 중요한 규범과 가치를 결여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상세한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다. 그럴 때 애써 이룩한 경제적 풍요로움도 그 정당성과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 끝에는 마침내 공동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전 새누리당 의원이었던 경남기업의 성완종 씨가 자살한 것은 지난 4월 9일이었다. 그 다음날 <경향신문>을 통해 여권 실세에 대선자금을 전달했다는 폭로와 함께 구체적인 사람과 정항을 상세히 보도했다. 곧바로 검찰은 특별 조사팀을 꾸며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이완구 전 총리를 소환 조사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나머지 6명의 전 현직 대통령 비서실장과 두 광역시장이 관계되었고 2012년 당시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회 핵심인물이었던 정권 실세에게는 다만 서면으로 조사하는 데 그쳤다. 서면으로 "죄 있나요?" 하고 묻고 아니라니, 아니구나 했단다. 돈이 오갔다는데 통장조차 열어보지 않았다. 유정복 인천시장의 경우 명확한 진술이 있었음에도 수사 자체를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곁가지 같은 두 사람만 기소하는 선에서 검찰 수사는 끝이 났다. 그래도 홍준표 도지사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것이 정의인가? 허태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홍문종 의원, 서병수 부산시장은 물론, 현직 대통령 비서실장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메르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란으로, 경제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허덕이고 있다. 정녕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수없이 많은 근본적인 문제들이 사회 곳곳에서 끊임없이 터져 오르고 있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니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런 문제가 핵심적 관건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 사회가 나서 모든 분야를 새롭게 치유하고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할 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가운데 개인의 욕심과 집단 이기심으로만 가득한 이들이 그들끼리 뭉쳐 탐욕스럽게 이익을 갈구하고 있다. 파멸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이걸 허용하는 사람도 역시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닌가. 이 혼돈의 시간, 세상이 미친 것일까 내가 미친 것일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관련 기사 : 민교협의 정치시평 지난 글 보기)

 

 

조선보다도 못한 21세기 전염병 대처법

조선 시대도 전염병에 이렇게 대처하지는 않았다. 역사를 돌아보면 문제를 키우는 건 방역 당국의 일방통행이다. 콜레라가 창궐하던 1946년 경북에서 숨진 박근혜 대통령의 큰아버지가 오늘의 모습을 보면 무어라 했을까.

  조회수 : 127  |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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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호] 승인 2015.06.20  10:38:27

 메르스 공포가 한창이다. 공포의 가장 큰 원인은 ‘알 수 없어서’일 거야. 치료법도 예방법도 나와 있는 게 없고, 어떻게 전염되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어느 정도로 퍼졌는지 도통 알 수 없으니 무서운 거겠지. 그래도 우리는 메르스라는 바이러스의 존재와 그 모양이라도 알지. 당최 원인을 알 수 없으면서 사람들을 픽픽 쓰러뜨리던 옛날 전염병이란 아마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상어 떼 그득한 바다를 헤엄치는 공포와도 같았을 거야.

우리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염병은 무엇이었을까. 언뜻 떠오르는 건 천연두야. 수천 년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또 역사를 여러 번 바꾸기도 한 병이지. 우리나라에서는 ‘마마’라는 극존칭으로 불릴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런데 19세기 이 천연두를 무색하게 하는 신흥 강호(?)가 조선을 휩쓸어. 페스트? 아니야. 페스트는 역사상 최대급의 괴물이긴 하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조금 관대했던 듯싶어. 페스트가 집단 발병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니까. 문제의 젊고도 강력한 전염병의 이름은 콜레라였어.

콜레라는 세계를 휩쓸고 중국을 거쳐 1821년 조선에 들어왔어. 그해 9월의 <조선왕조실록>에 “이 병에 걸린 사람 열에 하나둘도 살아남지 못했다”라고 했으니 치사율 90%의 무서운 병마였지. 조선 인구를 1000만명으로 잡고 100만명 정도가 콜레라의 제물이 됐다고 보더구나. 그 뒤 콜레라는 몇 번의 유행을 거쳐 ‘호열자(虎列刺)’라는 이름을 획득하지. ‘호랑이가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라는 뜻이니 이 병이 어느 정도의 공포였는지 알 수 있지 않겠니.

  <div align=right><font color=blue>ⓒWikimedia</font></div>조선 최초의 ‘콜레라 대책위원장’ 에비슨 선교사(맨 오른쪽)와 에비슨의 양아들 박서양(오른쪽에서 두 번째).  
ⓒWikimedia
조선 최초의 ‘콜레라 대책위원장’ 에비슨 선교사(맨 오른쪽)와 에비슨의 양아들 박서양(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전에 콜레라가 발생하면 정부가 하는 일이라고는 성 밖에 움막을 짓고 환자들을 데려다 놓고 병이 낫든가 죽든가를 기다리고 무당에게 굿을 시키거나 제사를 올리는 게 다였어. “유행하는 괴질이 아직 가라앉지 않아 사망자가 날마다 늘어난다고 하니, 놀랍고 송구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이 이미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사례의 유무에 구애받지 말고… 산천(山川)의 양재제(禳災祭)를 정성껏 거행하도록 하라.”(순조 21년 8월)

19세기의 막바지, 그러니까 청일전쟁과 갑오농민전쟁이 온 조선을 혼란으로 몰아넣던 그 시기에 호열자, 콜레라는 또다시 발생했어. 이때 조선 정부는 콜레라를 상대한 이래 처음으로 근대적인 방역을 실시하게 돼. “예방법을 행치 않고 편안히 앉아 인민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으면 정부의 책임을 잃는 일”이라고 공언했던 내무대신 유길준은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에비슨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서울 일원의 콜레라 퇴치를 요청하지. 순검(경찰) 20여 명을 붙이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관리들에 대한 처벌권까지 줬다니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던 셈이야.

에비슨은 서울에 와 있던 선교사들을 동원해 방역위원회를 만들고 방역 활동에 나서. 조선 사람들은 이때 에비슨이 장안에 써서 붙인 포고문을 보면서 호열자의 정체와 처음 마주하게 돼. “콜레라는 악귀에 의해서 발병되지 않습니다. 세균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생물에 의해서 발병됩니다. 만약 당신이 콜레라를 막으려면 균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은 음식은 반드시 끓이고, 끓인 음식은 다시 감염되기 전에 먹기만 하면 됩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6월8일 메르스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6월8일 메르스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조선 최초의 ‘콜레라 대책위원장’ 에비슨은 신분 귀천에 개의치 않고 환자를 치료했고 그 와중에 목숨이 위태롭던 박성춘이라는 백정을 구하게 돼. 고종의 주치의였으며 후일 명성황후가 죽은 뒤에는 권총 들고 겁에 질린 고종을 지켰던 에비슨이 백정 마을로 뛰어들어 그들을 치료한 것은 큰 울림을 주었지. 이 일을 계기로 박성춘과 그 동료 백정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박성춘은 아들 봉출을 에비슨에게 맡겼어. 후일 박봉출은 박서양이라는 이름의 의사가 돼서 독립운동과 의료 활동을 함께하는 선각자가 되지.

또 에비슨은 자신에게 고마워하는 내무대신 유길준에게 탄원했어. “백정도 다른 이들처럼 갓을 쓰고 다닐 수 있게 해주시오.” 그 후 에비슨은 거리에서 멋들어진 갓을 쓰고 활보하는 한 남자를 보게 돼. 그건 “내 아들을 맡아주시오. 백정으로 살게 하긴 싫소!” 하며 두 손 모으던 백정 박성춘이었어. 에비슨은 환호한다. “내가 한국에 와 있는 이유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 있지 않았던가.”

‘고위직 친척’이 있어야 검사도 받는구나

그 후로도 콜레라는 간간이 발생해서 식민지 조선 사람을 괴롭히고 일제 당국을 긴장시켰어. 일본 경찰이 기차간에서 설사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바지를 내려보라고 하면 그대로 해야 했을 만큼 콜레라는 여전히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었지. 그 후 또 한 번 콜레라가 대유행했는데 1946년 광복 후 첫봄이었어. 중국 동포들이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상륙했는데 그중 한 청년이 구토와 설사를 거듭하다가 죽어버려. 콜레라였지. 콜레라는 무서운 기세로 확산됐고 특히 대구의 경우가 가장 심했다. 식량난이 심각해서 사람들이 쇠약했던 데다가 대구가 워낙 더운 지역이라 냉수나 냉차를 마시던 습관 때문이라고도 해.

문제를 키운 것은 병에 대한 지나친 공포와 방역 당국의 일방통행이었어. 환자가 나오면 무조건 격리시켰는데 감기몸살 환자나 영양실조로 누워 있는 사람들까지 끌고 갔고 이에 겁먹은 사람들은 가족이 병이 나도 벽장에 숨겼다가 나란히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기도 했으니까. 또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통행금지를 실시했는데 이건 이곳저곳을 떠돌며 일하던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굶어 죽으라는 명령과도 같았단다.

“병들어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다! 식량을 다오!” 만성적인 식량난에 콜레라가 덮쳤던 1946년 봄과 여름은 마침내 10월1일 대구 봉기로 이어지게 돼. 좌익 세력의 개입도 있었다지만 핵심은 굶주림과 전염병에 시달린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지. 당시 대구 근처 구미에서 인망 높았던 한 사람이 경찰과 봉기한 군중의 중재에 나섰다가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이름은 박상희. 박근혜 대통령의 친삼촌 되시는 분이야.

세균과 바이러스, 그리고 그들이 일으키는 전염병은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하던 시절부터 인류를 대량학살하기도 하고 또 인간에 의해 정복되기도 하면서 오랜 세월 함께 살아왔단다. 사람들은 전염병의 공포에 굴복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 와중에 스스로를 바꾸면서 역사의 페이지를 고쳐 써왔어. 그런 뜻에서 오늘 우리의 메르스 사태를 돌아다본다.

무엇보다 메르스는 21세기를 지나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었어. 일선 병원에서 메르스 의심 환자의 바이러스 검사를 의뢰했을 때 질병관리본부는 검사를 거절했어. 환자가 “우리 친척 중에 고위직이 있다!”라고 윽박지른 다음에야 검사를 시행했다지. 선교사 에비슨이 보면 “조선 왕조 조정도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하고 혀를 찰 일이야.

정부는 메르스 발생이 2주나 지나서야 ‘긴급’ 회의를 열었단다. 지난 주말에는 난데없이 “손 잘 씻으라”는 ‘긴급 재난’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더구나. 정부는 무능하고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고 환자와 병원은 죄인 아닌 죄인이 돼 머리를 숙이고 수천명이 ‘격리’를 요구받은 상황이 됐어. 콜레라가 창궐하던 1946년 대구에서 눈에 핏발 선 사람들을 달래려고 애쓰던 현 대통령의 큰아버지, 박상희 선생이 오늘의 모습을 보면 기가 막혀 하지 않을까. “이런 호열자만도 못한 일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