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무엇이 교사를 ‘설명충’으로 만들고 있나

일취월장7 2015. 6. 8. 14:55

 

무엇이 교사를 ‘설명충’으로 만들고 있나

교사도 학생도 진도를 빼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교육현장에서 학생은 손과 발, 머리를 놀릴 필요가 없다. 그저 안다고 착각하고 넘어간다.

  조회수 : 624  |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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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호] 승인 2015.06.08  08:18:44

학생들과 함께 공부의 기쁨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성적이라는 대답이 제일 많고 심심찮게 교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공부해야 하는 점,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외우고 봐야 하는 점 등등 여러 대답이 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문제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질 정도다.

한 학생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마침 ‘진도’의 문제를 이야기할 참이었다. 그는 공부를 학습이라고 한다면 배우고 익히는 과정인데 한국의 교육에는 배우는 것만 있지 익히는 과정이 없어서 재미가 없다고 했다. 외국의 교재에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설명을 싣지 않는다. 틀린 문제가 있어서 해설을 보려고 했지만 답지에 해설이 없었다고 한다. 답을 찾아가는 다양한 과정을 인정하고 중시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해설까지 친절하게 제공해 배우는 자가 생각하는 데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 틀리면 바로 문제 해설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알게 됐다고 생각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진도를 나가는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해성 그림</font></div>  
ⓒ박해성 그림
이 학생의 말을 같이 공부하는 교사들에게 전했더니 한숨을 내쉬며 전적으로 공감했다. 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드러내는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시간을 좀 더 길게 가지고 다양하게 접근하면서 학생들의 흥미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해보고 싶지만 늘 시간의 압박을 받는다고 한다. 진도다. 교과과정에 정해진 진도를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야 교사 스스로도 불안하지 않다. 진도 때문에 ‘배움의 순간’을 포기해야 하는 때도 있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교사도 학생도 진도를 빼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한국의 교육현장에서, 배우는 자가 시간을 들여 익히는 과정은 교재와 가르치는 자의 설명과 해설로 대체된다. 일단 배우고 나면 그것을 익히는 데는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다음 배울 것은 일단 중단해야 한다. 그런데 시간의 압박을 받다 보니 가르치는 자가 깔끔하고 매끄럽게 설명하고 해설하는 것이 이 익힘의 시간을 대체한다. 배우는 자는 손과 발, 그리고 머리를 놀릴 필요가 없다.

‘친절한’ 설명과 해설(사실은 친절하지도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이 공부의 주적이 되는 이유는 그 뒷이야기에 대한 궁금함과 호기심을 파괴하고 궁리를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배우는 자를 바보로 만들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촉발되고, 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궁리하면서 배움과 익힘의 ‘학습’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배운 것을 몸에 익혔을 때 비로소 배우는 자는 배우고 익힌 것을 자신의 ‘기예’로서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능수능란함이 바로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인 자유의 상태다. 배움이 사람을 자유롭게 함은 이 익힘을 통해서인 것이다. 그렇기에 공자가 <논어>의 첫머리에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라고 말을 한 것이다. 배운 것만 있고 익히는 것이 없다면 그 배운 것은 내 머리를 휙 지나간 것에 불과하다.

교육의 ‘궁극적 목표’를 잃어버린 교실

교사가 배움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도에 대한 압박에 시달릴 때 배우는 자는 이 익힘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없다. 익힘이 없기에 배우는 자는 아는 것을 활용할 능력은 없으면서 그저 안다고 착각하고 넘어갈 뿐이다. 아는 것을 어떤 상황에서건 잘 활용할 수 있는 기예를 체득하는 과정, 그 기예를 통해 자유를 얻는 교육은 이 과정에서 실종된다.

이 과정에서 가르치는 자가 친절하면 할수록 그는 배움과 익힘이 아니라 설명과 해설로 배움의 과정을 도배하게 된다. 영화로 말하자면 이런 설명과 해설은 ‘스포일러’에 해당된다. 교사가 친절할수록 배움을 파괴하는 ‘설명충’이 되고 마는 비극이 진도의 압박에서 비롯된다. 슬프게도, 설명충은 ‘극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