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고마워, 내 아이가 되어줘서 - 교육의 문제점을 재구성하다..

일취월장7 2015. 6. 13. 12:26

 

고마워, 내 아이가 되어줘서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의 문제점은 잔뜩 안다. 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건 잘 모른다. 자녀와의 소통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먼저 살펴보자. 그리고 자녀와 나눈 대화를 생각해보자. 관계에서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조회수 : 400  |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문화인류학자)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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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호] 승인 2014.10.08  08:02:31

 

① 김찬호-어느 인문학자가 말하는 ‘부모’    9월17일(수)
② 이승욱-대한민국 부모, 안녕들 하십니까?    9월23일(화)
③ 서화숙-세월호가 부모들에게 남긴 숙제    9월30일(화)
④ 전성은-시골 노(老)교장이 말하는 오늘의 학교    10월7일(화)
⑤ 안상진-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공부:초등 편    10월14일(화)
⑥ 강지원-세상 어딘가엔 내가 미칠 일이 있다    10월21일(화)
⑦ 송인수-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이미 왔습니다    10월28일(화)

부모 노릇 하기 어려운 시대다. 지난봄, 바다에서 벌어진 참사 이후로는 더 그렇다.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하기는커녕 안전과 생명마저 위협하는 사회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준비했다. 부모 교육 강좌인 ‘2014 등대지기학교’가 그것이다. 9월17일~10월28일 진행되는 등대지기학교의 전 강좌를 <시사IN>이 지상 중계한다. 강좌를 직접 현장에서 듣고 싶다면 이 단체 홈페이지(www.noworry.kr)에서 수강 신청을 하면 된다. 실시간 또는 녹화방송으로 동영상 강좌도 수강할 수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저출산 시대라지만 많은 사람이 평생 한 번 이상 해보게 되는 역할이 바로 부모다. 부모 노릇은 죽을 때까지 끊을 수도 없다. 김찬호 박사(위)는 부모 노릇에 대해 인문학적 성찰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시사IN 신선영
저출산 시대라지만 많은 사람이 평생 한 번 이상 해보게 되는 역할이 바로 부모다. 부모 노릇은 죽을 때까지 끊을 수도 없다. 김찬호 박사(위)는 부모 노릇에 대해 인문학적 성찰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오늘 내게 주어진 주제가 ‘부모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인문학적 성찰을 해달라는 거다. 저출산 시대라고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평생에 한 번 이상 해보게 되는 역할이 부모다. 그런데 그 역할이 이런 강의를 들어야 할 만큼 힘들어졌다. 왜 그럴까. 그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먼저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가 다른 동물과는 다르다. 양육 기간부터가 워낙 길다. 그 이유는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하게 커서다. 인간 뇌는 평균 1.3~1.4㎏으로, 500g인 침팬지에 비해 배 이상 무겁다. 뇌 크기로 보자면 인간의 임신 기간은 21개월은 되어야 적정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랬다가는 출산에 문제가 생길 터. 결국 인간은 10개월 만에 엄마 뱃속에서 나와 오랜 기간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생후 1년이다. 이 시기에 적절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외부와 소통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를 겪게 된다. 사도세자의 비극도 여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얻은 것은 서른여덟 살 때. 애지중지하던 큰아들을 잃은 지 7년 만이었다. 후궁이 사도세자를 낳자 영조는 크게 기뻐하며 생후 100일부터 아이를 생모로부터 떼어놓고 엄격한 태자 교육을 실시한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엄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사도세자는 열 살 때부터 발작을 일으키는가 하면, 스무 살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주변의 궁녀나 내시들을 해치기 시작한다. 자식에 대한 영조의 과잉 기대와 무관심이 결국 끔찍한 비극을 낳은 셈이다. 이는 어찌 보면 오늘날의 부모·자녀 관계와도 비슷하다. 지금 부모들 또한 자식에 대한 기대는 잔뜩 있으면서 자식의 마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 않나.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힘들어하는지….

사람은 평생에 걸쳐 수많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중 대부분의 역할은 어느 순간 무(無)로 돌릴 수 있다. 부부간이나 사제지간도 끊어지면 그만이다. 반면 부모 노릇은 죽을 때까지 끊을 수가 없다. 그것이 어떤 때는 엄청난 기쁨을 주기도 하고 말 못할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자문한다고 한다. ‘지금 알고 있는 아이를 그때도 알았더라면 아이를 낳았을까’라고(웃음). 이른바 ‘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뭐든 1만 시간 이상 노력하면 그 분야에서 프로가 된다는데 부모 노릇은 그런 것도 없다. 루소, 괴테, 간디, 피카소 등등 유명하다는 위인들도 자녀와의 관계에서는 쓰디쓴 실패를 겪었다.

다만 이들이 살던 시대와 달리 오늘날은 사회가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일단 ‘아들 선호’가 ‘딸 선호’로 바뀌었다. 아빠들이 양육 전면에 등장하면서 ‘부성의 발견’도 이뤄지고 있다. 비혼과 저출산 현상이 만연하고, 1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가족 개념도 바뀌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부모 되기는 더 어렵고 괴로워졌다. 과거 대가족 시절에는 부모나 삼촌이 아이 키우는 것을 보며 모든 사람이 일찍부터 육아를 경험했다. 결혼해서도 어릴 적 봤던 대로 비슷하게만 하면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선행 경험이 의미가 없어졌다. 부모 스스로도 ‘내가 살았던 세상을 아이들이 살아갈 게 아니기에 내 메시지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의 권위가 더욱 서지 않는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과잉 상품화의 시대, ‘괜찮은’ 부모가 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대화할 때는 ‘무엇’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


그 속에서 ‘자녀 리스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과거 자녀 문제라면 보통은 사춘기 자녀의 문제를 가리켰다. 그런데 최근에는 “우리 애가 서른 살인데 취직도, 결혼도 안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낸다”라고 호소하는 부모가 늘고 있다. 우리보다 일찍 이런 현상을 겪은 일본의 경우,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1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집계되고 있기도 하다. 부모는 오직 아이만 바라보면서 아이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정작 그 아이가 성장을 멈춘 채 무기력증에 빠지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상황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소통뿐인 것 같다. 따져보면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공부를 대신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소통은 노력하면 할 수 있다. 소통을 위해서는 일단 감정을 모니터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고 할 때 몸이나 생각, 행동을 돌아보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을 살피는 일이다. 누군가 아주 상냥한 표정으로 내게 욕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반대로 누군가는 굉장히 좋은 말을 하는데 비꼬는 눈치다. 누구 말을 믿을 것인가. 대부분 전자를 믿는다. 이는 우리가 대화할 때 말이 아닌 표정, 곧 감정을 읽는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 스스로는 자신의 감정을 잘 읽을 줄 모른다. 화가 난 게 분명한데 이를 감추려 든다. ‘나 그 정도로 쪼잔한 사람 아니거든?’ 하는 식이다. 그런데 실은 쪼잔한 게 맞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니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다.

감정 돌아보기 다음은 대화다. 요즘 아이와 나눈 대화를 한번 떠올려보시라. 어떤 상황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오간 문장 대부분이 짧고 단순하지는 않았나? 일방적이지는 않았나? 대화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what(무엇)’보다 ‘how(어떻게)’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올바른 말이라도 그 말을 아침에 하느냐 저녁에 하느냐, 단둘이 있을 때 하느냐 여럿이 있을 때 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아이는 흔히 ‘how’에 반응한다. 부모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나를 대하는 방식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는 거다. 인격을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 아이는 반발하게 돼 있다. 이것이 많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악순환이다.

최근에 혹시 아이가 내게 던진 질문이 있었는지도 떠올려보자. 인간관계에서 질문은 굉장히 중요하다. 부부간에도 애정이 사라지면 질문이 사라진다 하지 않나. 내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궁금해하는지가 관계의 중요한 본질이다. 그런 만큼 아이가 부모에게 뭔가를 궁금해한다면 그건 굉장히 좋은 신호다. “엄마, 그땐 어땠어?” “아빠라면 그럴 때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이런 질문을 받아봤다면 훌륭한 부모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아이들 대부분이 ‘용돈을 얼마 줄까’ 말고는 부모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웃음).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자료</font></div>아이를 함께 키우는 경험은 중요하다. 위는 서울 마포구 성미산 마을 성미산 대안학교.  
ⓒ시사IN 자료
아이를 함께 키우는 경험은 중요하다. 위는 서울 마포구 성미산 마을 성미산 대안학교.

 


대화법으로 들어갔을 때 부모와 자녀가 주고받을 수 있는 최고의 언사는 ‘축복/경탄/감사/위로/격려/칭찬’이다. 아이의 아주 사소한 행동에라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자. 스킬을 키우라는 게 아니다. 마음을 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반응이 나온다. 아이에게 감사하다는 표현도 하자. 내 경우 부모님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평생 잊히지 않는다. 어른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자주 들은 아이는 아마도 절대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표현/고백/수다/공감/유머’도 부모·자녀 관계를 윤택하게 만든다. 부모부터 자기감정을 잘 읽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아빠가 요즘 걱정이 많아” 이런 표현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빠들의 경우 자기감정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껏 한다는 표현이 “나, 떨고 있니?”라는 식이다(웃음).

부모·자녀 간 최악의 언사는 ‘비난/냉소/경멸/비아냥/모욕/무시/저주’다. 미국에서 공부하다 포기하고 들어온 제자가 있다. 그러자 제자의 엄마가 보인 반응이 “네가 하는 일이 늘 그렇지 뭐”였다고 한다. 제자는 이 말에 너무도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면서 생긴 관계의 틈을 메우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런 언사는 단 한 번만으로 평생 생채기를 남길 수 있다.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아이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고 높여주는 질문들


마지막으로 마음을 돌보기 위해 부모·자녀 간에 던져보면 좋을 듯한 질문들을 추려보았다. 일단 ‘우리 엄마(아빠)는 ________다’라는 빈칸을 아이 스스로 채워보게 하시라. 그런 다음 ‘나는/아이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시라.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 친구, 음식 등등.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들의 문제점은 잔뜩 안다. 그런데 아이가 좋아하는 건 잘 모른다. 당신 같으면 내 문제점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겠나? 아닐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돼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이의 강점과 매력은 무엇인가?’ ‘아이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던져보시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살아간다. 어찌 보면 이를 위해 공부하고 돈 벌고 성형하고 권력을 얻으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존재 가치를 정하는 기준이 너무 편협하고 획일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르지 않는 게 두 가지 있다고 한다. 남편 월급과 아이 성적.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사실상 이 두 가지만 갖고 상대를 평가하려 들지 않나.

이런 외적 지표 말고 아이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고 높여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이 부모 노릇의 핵심일 수도 있겠다. 부모는 아이가 학교에서 성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새롭게 발견해서 키워줄 수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보며 일상을 함께해온 부모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학교 교사는 한계가 있다. 고등과정으로 올라갈수록 학교는 아이의 실존이 아닌 성적에 집중할 뿐이다. 그런 만큼 “너의 매력은 이런 거야”라고 아이가 모르는 스스로의 강점을, 부모는 조금씩 부풀려서라도 계속 얘기해줄 필요가 있다. 나도 중학교 때 공부를 못해 의기소침해 있던 아이를 따로 불러내 “넌 참 달리기를 잘해” “친구들을 대하는 게 훌륭하던걸?” 하고 칭찬했던 일이 있다. 그랬더니 아이가 나중에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날 붙잡고 그러더라. “아빠, 내 장점 다시 한번 요약해줘”라고(웃음).

결국 부모 노릇을 잘하려면 의식을 바꾸는 수준이 아니라 존재 자체, 삶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바뀌려면 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 아이에 대한 나의 감정과 경험을 편안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부모가 주변에 셋 이상은 있어야 한다. ‘엄친아’ 얘기하면서 아이 성적 갖고 비교나 하는 자리가 아니라, 더 큰 비전을 공유하면서 자기 아이를 대승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자리에서 다른 부모들을 만나고 서로 배우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이것이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바로 그 ‘남들처럼’이 문제라니까

부모 역할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누군가의 아들·딸, 부모, 배우자로 말고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꿈꿔본 적이 있느냐고. 부모부터 개인으로서의 삶을 잘 살면서 아이를 개인으로 잘 성장시키는 게 중요하다.

  조회수 : 349  |  이승욱 (정신분석가, <대한민국 부모> 저자)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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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호] 승인 2014.10.15  08:55:44
② 이승욱-대한민국 부모, 안녕들 하십니까?    9월23일(화)

세월호 참사는 부모들에게도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하기는커녕, 안전과 생명마저 위협하는 사회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준비했다. 부모 교육 강좌인 ‘2014 등대지기 학교’가 그것이다. 강좌의 두 번째 주인공은 <대한민국 부모>라는 책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정신분석가 이승욱씨. 9월23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강당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남은 강좌를 직접 듣고 싶다면 이 단체 홈페이지(noworry.kr)에서 수강 신청을 하면 된다.


오늘 강의 제목이 ‘대한민국 부모, 안녕들 하십니까’던데, 나는 이걸 살짝 바꾸고 싶다. ‘대한민국 부모,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고. 단체 이름대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꿈이신가? 그렇다면 그런 세상이 왔다고 치자.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가? 사교육 걱정이 없어지면 행복할 것 같은가?

내가 묻고 싶은 말인즉 개인으로서 살아본 적이 있느냐는 거다. 누군가의 아들·딸이나 부모 말고, 배우자 말고,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꿈꿔본 적이 있으신가? ‘내가 원하는 세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이 두 가지를 함께 고민하지 않고는 답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대한민국 부모>의 저자 이승욱씨(위)는 상담과 심리학을 풀어내는 팟캐스트 ‘이승욱의 공공상담소’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는 부모와 아이 모두 ‘개인으로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사IN 신선영
<대한민국 부모>의 저자 이승욱씨(위)는 상담과 심리학을 풀어내는 팟캐스트 ‘이승욱의 공공상담소’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는 부모와 아이 모두 ‘개인으로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먼저 생태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간은 ‘적응’하는 존재인가, ‘순응’하는 존재인가. 우리는 적응이라는 말을 보통 “쟤는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해” 하는 식으로 사용한다. 이때 적응은 타인이 정해놓은 룰과 규칙에 잘 복무한다는 의미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양심과 윤리를 팔고 회계 조작조차 서슴지 않는 직장인, 의자에 붙어 앉아 시키는 대로 공부 잘하는 학생이 곧 회사·학교에 잘 적응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게 과연 적응인가? 나는 내용상 순응이라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이렇게 순응하는 사람을 요구한다. 요즘 보면 무기력한 아이들이 늘고 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비행·일탈 청소년이 주로 (심리) 상담실을 찾았는데, 지금은 무기력한 아이들이 다수다. 아무 데도 흥미가 없고, 관심·열정도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상담실에 들어선 부모들은 사정한다. “우리 애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제발 좀 낫게 해주세요”라고.

왜 그럴까? 컴퓨터 게임을 많이 해서 머리가 이상해진 것일까? 정신분석학자들은 어릴 적 아이에게 충분한 자율을 허용하지 않았던 데서부터 문제의 뿌리가 형성됐다고 믿고 있다. 발달 과정상 두세 살은 굉장히 중요한 탐색의 시기이다. 두세 살 난 어린아이는 신기한 게 있으면 무조건 입으로 가져가면서 세상을 탐색하며 자율성을 발달시킨다. 그런데 이 시기 대한민국 부모들의 양육 행태를 관찰해보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안 돼” “손대지 마” 같은 금지 명령어다. 자녀가 커가는 과정에서도 부모는 아이들의 야생성을 끊임없이 거세하려 든다. 정신을 완전히 표백해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하는 아이들로 기르려 하는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아이가 사춘기 때는 멘토로서 아버지 역할이 중요하다.  
ⓒ연합뉴스
아이가 사춘기 때는 멘토로서 아버지 역할이 중요하다.

 

 

물론 아이의 장래가 걱정돼 그런다고들 할 것이다. 그런데 따져보자. 요즘 부모가 아이들한테 흔히 묻는 말이 “넌 꿈이 뭐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반드시 ‘기-승-전-공부’ 구조로 끝난다. “엄마, 난 평생 여행하면서 살고 싶어요” 하면 “어머, 좋은 생각이구나” 해놓고 “여행을 하고 나면 책을 써서 먹고살면 되겠네. 그럼 지금부터 글쓰기 공부 좀 해야겠다”라는 식이다(웃음). 이러니 아이가 미치는 거다.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가. 때로는 ‘저게 내 새끼가 맞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한편으로 아이들이 세상을 포착해내는 능력은 놀라울 정도다. 논리가 아닌 감각으로 본질을 간파한다. 내가 아는 386 세대 부모가 있는데, 아들이 학교도 가기 싫어하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 보이기에 물었다고 한다. “넌 도대체 뭘 하고 싶냐”고. 그랬더니 아이가 “정규직 청소부가 되고 싶어요” 하더란다. 부모는 기가 막혔지만 이 아이는 아는 거다. 세상에서 업그레이드를 강요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직업이 청소부라는 걸. 요즘 세상은 취업에 성공했다고 끝이 아니지 않나. 자격증 따고 어쩌고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요구한다. 아이는 이를 꿰뚫어보고 자신이 안착할 곳이 청소부(단 정규직!)임을 정확히 짚어낸 거다.

아이의 장래 말고 당신의 장래를 걱정하라

얼마나 똑똑하고 계산적인가. 이런 아이들한테 부모들은 말로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해”라고 한다.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어엿하지 않거나(세속적 성공과 거리가 멀거나), 의미가 적어 보이거나,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가져다줄 것 같지 않은 일은 ‘하고 싶은 일’에서 제외시킨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본심을 간파하고, 결국 많은 것을 유예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부모만의 잘못은 아니다. 파업하는 노동자 연봉이 7000만~8000만원이라고 비난하면서 재벌을 위한 법인세 인하에는 침묵하는 사회에서 교육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렵다. 노동자 연봉이 1억이 넘고, 1년에 4주씩 휴가를 쓸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입시에 목을 매겠나.

그럼에도 내가 부모들을 만날 때면 “아이 장래 말고 당신 장래가 더 걱정된다”라고 말하곤 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인 아버지가 있다. 그 아들이 명문대에 합격한 날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넌 나처럼 회사원으로 살지 말라”고. 그 아들이 충격에 빠져서 상담실을 찾았다. 휴일도 없이 뼈 빠지게 일하면서 회사에 충성했던 아버지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을 보며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린 것이다. 이러면서 아이에게 과연 꿈을 찾으라 할 수 있나? 부모 자신조차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모른 채 전전긍긍 살고 있으면서? 내 주변에 쉰이 다 된 나이에 펀드매니저를 때려치우고 극작가를 하겠다고 나선 친구가 있다. 당연히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서 살던 집 규모도 줄이고 외식도 끊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굉장히 행복해하더란다. 부모가 자기들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키고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의견도 묻곤 하니까. 공부 아닌 다른 대화거리가 생기면서 관계가 훨씬 좋아졌다는 것이다.

결국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 ‘누군가의 아들·딸, 부모, 배우자로서의 나’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꿈꿔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녀를 대학에 보낸 뒤,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갑자기 삶이 공허하게 느껴진다면서 상담실을 찾는 분들이 있다. 대학을 못 보내면 못 보낸 대로 좌절감에 빠진다. 그러면서 자녀한테는 “너라도 잘살아라” 한다. 나는 부모들이 아이의 성장으로 자신의 성장을 대체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강력한 의심을 품고 있다. 이러니 아이들이 “우리가 부모의 대리인 같다”라며 괴로워하는 거다.

물론 개인으로서 살라는 게 가족을 팽개치고 책임을 방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지금부터는 부모의 책임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아버지의 절멸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가 생겨난 것은 근대 이후인데, 어찌 보면 이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가 아버지다. 그 전까지 자식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은 아버지였다. 직업을 세습했고, 아버지를 통해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농사짓고, 추수하고, 지붕을 고치는 등)을 배웠다. 그런데 근대 이후에는 아버지가 자식한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없어졌다. 오늘날 아버지의 역할은 ‘돈 벌어다주는 사람’일 뿐이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 ‘멘토’ 열풍이 불었는데 이게 다 ‘성공한 아버지’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최소한 안철수·강신주 급은 돼야지, 지질한 아버지는 멘토 반열에 오를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고향 친구들과 모임을 갖는데, “우리가 공범이다”라는 얘기들을 해서 놀란 일이 있다. 대구에 사는 평범한 50대 가장들이었는데, “우리라고 선장이랑 달랐겠냐” “우리라고 배에 과적하는 것 막고 불법 증축하는 걸 막을 수 있었겠냐”라고 너나없이 한탄하는 거다. 이걸 보면서 세월호가 엄마들한테는 ‘굉장한 슬픔’으로 다가왔지만 아빠들한테는 ‘굉장한 죄책감’으로 다가왔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부정과 비리에 눈감은 게 자기 한 몸 때문이었나? 아니다. 다 자식들을 위해 참은 거라 생각하며 살았을 텐데 그 자식이 죽어버렸으니, 가장 핵심적인 알리바이가 처참하게 사라져버렸으니….

아이의 행동은 아이가 보내는 메시지


그러니 부모라면 자문해볼 일이다. 자녀에게 어떤 삶을 물려주고 싶은지. ‘가장자리’라는 <개그 콘서트> 코너명대로 가장(家長)의 자리가 가장자리로 밀려난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버지가 할 일은 분명히 있다. 특히 사춘기 때가 중요하다. 요즘 중2 보고 우스개로 반인반충(半人半蟲) 내지 호모인섹트(homo insect)라 하던데, 청소년은 일종의 ‘사회적 신생아’라 할 수 있다. 2차 성징이 나타나 몸은 완성돼가지만 사회적으로는 신생아나 다름없다. 과거에는 아버지가 자녀를 데리고 다니며 어른에게 인사하는 법, 남의 집 방문하는 법 등등을 자연스럽게 가르쳤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관계 맺는 법을 배워갔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좋은 대학 나와서 대기업 취직한 젊은이들을 만나보면 처음에는 ‘내가 일을 잘할 수 있을까요?’ 걱정한다. 그런데 몇 달 지나고 나면 다들 한결같이 ‘관계’ 때문에 힘들어한다. 아버지처럼 가까이 있는 멘토를 통해 관계 맺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다.

‘그럼 엄마는 뭘 해야 하나요?’ 묻고 싶을 거다. 그냥 뭘 하려 들지 말고 밥만 잘해주시라고 답하고 싶다(웃음). 초등학교 4~5학년 정도까지는 엄마가 아이들의 마음을 조작하는 게 가능하다. 때론 설득하고, 때론 ‘자꾸 말 안 들으면 엄마 집 나갈 거야’라고 협박도 해가면서. 그런데 청소년기에 이르면 달라진다. 프로이트가 말하지 않았나.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라고. 모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아이의 삶을 기획하고, 관리하고, 조작·통제하려 드는 어머니는 어쩌면 생명과 가장 먼 존재일지도 모른다. 담배를 피우거나 ‘야동’ 에 빠진 자녀를 보고 너무 기겁할 필요도 없다. 정신분석에서는 “모든 증상은 메시지다”라고 말한다. 아이가 어떤 증상을 보일 때는 그 행위를 통해 말하려는 메시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이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면서 숨은 메시지를 읽으려 노력해야지,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막으려 해서는 그 행위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나도 아들 녀석이 공부는 뒷전이고 ‘주축야롤’에 빠진 걸 보면 속이 터진다. 낮에는 축구하고 밤에는 롤(<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만 한다(웃음). 그렇지만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게 뭘까’ 생각하다 보면 답이 나올 것도 같다. 억압이 없는 상태가 곧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도 대학은 보내야 할 텐데 어떻게 내버려두냐고? 정형화된 삶을 포기하면 가능하다. 우리는 남을 너무 의식한다. “그저 남들처럼 40평쯤 되는 아파트 살고, 남들처럼 1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 다니고, 남들처럼 자식놈 ‘인(in)서울’ 시키고 싶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인가요?” 묻는 분들이 있는데, 바로 그 ‘남들처럼’이 문제인 거다.

때로 한국에서는 가족이 결사체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교육을 위한 결사체랄까? 부모부터 개인으로서의 삶을 잘 살면서 아이들도 개인으로 잘 성장시켰으면 좋겠다. 프랑스 68혁명 때 라캉은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불가능한 세상을 꿈꾸고, 그런 세상을 가능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역사에서 우리가 경험했듯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내용적 민주주의가 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용적 민주주의는 ‘섬세함’과 ‘존중’, 그리고 ‘연대’로 채워질 때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이런 내용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정리·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승리자가 옳은’ 사회는 정당한가?

세월호 비극은 부모의 역할, 시민의 역할을 고민하게 한다. 부모로서, 시민으로서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헌법적 권리를 집요하게 요구하고 정부를 감시하고 따져 묻는 독한 시민이 되자는 것이다.

  조회수 : 24,067  |  서화숙 (<한국일보> 선임기자) 

세월호 참사는 부모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남겼다. 진실 규명조차 어려운 사회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마련했다. 부모 교육 강좌인 ‘2014 등대지기 학교’가 그것이다. 강좌의 세 번째 주인공은 <한국일보> 서화숙 선임기자. 9월30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강당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남은 강좌를 직접 듣고 싶다면 이 단체 홈페이지(noworry.kr)에서 수강 신청을 하면 된다. 실시간 또는 녹화 방송으로 동영상 강좌도 수강할 수 있다.

홍도 앞에서 배가 또 좌초됐는데, 105명의 승객과 5명의 선원 등 탑승객 110명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사건을 보면서 세월호 유족들이 슬펐을 것 같다. 진실 규명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뭘 해야 하나? 먼저 약자에 대한 연민을 가져주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약자를 도와주면 내 것을 뺏긴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몰아간다. 지금 상황에서 세월호 특별법을 만드는 게 최선이지만 그것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서화숙 <한국일보> 선임기자는 “아이들이 믿었던 선진사회를 만들어줘야 한다. 옳은 편에 서고 자기 자리에서 ‘n분의 1’ 역할을 하자”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서화숙 <한국일보> 선임기자는 “아이들이 믿었던 선진사회를 만들어줘야 한다. 옳은 편에 서고 자기 자리에서 ‘n분의 1’ 역할을 하자”라고 말했다.
영국에서 어떤 흑인 청년이 백인 불량배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서 죽었다. 그런데 영국 경찰이 인종차별을 하면서 사건을 덮었다. 경찰과 검찰이 백인 용의자를 기소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서 5년 만에 내무장관이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결국 2005년 재수사를 통해 2011년 그러니까 거의 17년, 18년 만에 범인 중 2명이 종신형을 살게 되었다. 진실 규명을 위해 일사부재리 원칙도 깼다.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는다면 17년 뒤, 20년 뒤에라도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서 정의를 세울 수 있다. 그래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교육 측면에서 보면 침몰 당시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했고 학생은 복종했다고 해설을 한다. 유교적 복종문화에 길들여져서, 간단한 주입식 교육에 물들어서 비극이 왔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나는 한국 교육의 희망을 봤다. 가만히 있으라는 건 선장 등 그 배의 지휘부가 한 발언이었다. 400여 명이 탄 배에서 우왕좌왕하면 쓸데없는 데서 사람이 더 죽는다. 그러니까 지휘부의 지휘를 정확히 따르는 게 선진국 방식이다. 지휘부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까 학생들은 구명조끼 입고 가만히 있었다. 어리석어 복종한 게 아니라 아이들은 한국 사회가 선진사회인 줄 알았던 것이다. 지휘부의 지시를 따르면 안전이 지켜질 줄 알고 구조될 줄 알았는데 안 지켜진 것이다. 그것이 비극이다. 한국 사회가 선진사회가 아니었던 것이 비극이지, 학생이 그것을 따른 게 유교적 비극, 주입식 교육의 폐해 때문이다 이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또 이번에 교사의 헌신이 굉장하다는 걸 느꼈다. 14명 교사 중 생존 교사는 3명뿐이다. 아이들과 함께하려고 되돌아갔고 자기 구명조끼를 벗어주기도 했다. 반면 승무원과 선원 대부분은 구조됐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자들이 얼마나 희생과 책임을 다하려는지 자기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여주었다. 살아나온 교감도 괴로움 때문에 자살을 택했다. 어쨌든 교사 대부분이 책임감을 지닌 분들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세월호 사건에서 희망적인 측면이다. 문제는 그런 책임 있는 교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밖에 없는 바깥의 구조를 반드시 바꿔줘야 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어도 안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선진사회다.

유족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뭔가를 주장하고, 그렇게 살고 싶겠나? 일하고 저녁에 집에 오면 꽃도 가꾸고 사람들과 술도 마시고 노을 보면서 얘기도 하고 이웃도 만나고 그렇게 살고 싶지, 매일 기본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 사회에서 살기는 싫다.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사회가 돼버렸으니 역설적으로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믿었던 선진사회를 우리가 만들어줘야 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세월호 참사는 안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민들이 무엇을 해야 할까 숙제를 남겼다.  
ⓒ시사IN 조남진
세월호 참사는 안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민들이 무엇을 해야 할까 숙제를 남겼다.

승리자가 옳은 사회는 정당한가

어떻게 선진사회가 올 수 있을까? 일단 옳은 편에 서주자. 그다음에 악한 편은 악한 편이라고 해주자. 가령 문창극이 총리 후보로 나왔을 때 이인호 교수(현 KBS 이사회 이사장)가 옹호했다. 이 교수는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 때 핀란드 대사를 지냈다. 어찌 보면 김대중 정부 때 발탁됐기 때문에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문창극 후보자에 대해서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그럼 평소대로 ‘아 저분은 훌륭하니까 저분이 하는 말은 맞다’라고 하면 안 된다. 이 사안과 관련해 그의 말이 옳으냐 그르냐로 판단을 해야 한다. 옛날 이미지를 갖고 그 사람이 그 말을 했으면 신뢰할 만할 거야, 생각하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

자기 자리에서 ‘n분의 1’ 역할을 하자. 아파트 난방비 문제를 폭로한 김부선씨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자기 주변에서 비리를 파헤치다 보면 문제가 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많다. 낙마한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경우 2억3000만원이라는 연구비를 자기 통장에 넣어서 밥도 먹고 보험료도 내고 쇼핑도 다니고 막 썼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이 쓸 수 있었겠나? 2억3000만원을 넣어준 직원이 있었으니 가능했다. 심재철 의원이 민간인 사찰 특위 위원장으로 16분 회의하고 매달 600만원인가 800만원을 받았다(심 의원은 특위 활동이 전무했던 점을 들어 16개월간 받은 활동비 9000만원을 전액 반납했다). 심재철 의원만 욕할 게 아니라, 특위가 한 번밖에 안 열린 걸 알면서도 돈을 따박따박 넣어준 국회 직원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주변을 보면 어떤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도와주고 방조하고 포기하기 때문에 악의 고리가 굴러가는 것이다.

자기 권리를 알자. 우선 공부가 뭔지 알자. 우리나라에서 공부는 성적이다. 공부 잘하라는 의미는 성적 올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공부는 자기 스스로 세상의 문제를 알아서 풀어갈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스스로 능력을 키우는 게 공부이기 때문에 오히려 남이 해주면 공부 방해다. 어떤 분들은 공부는 강요하지 않지만 체험을 과도하게 시킨다. 우리나라 관광지에 가면 무섭다. <아빠 어디가>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가수 윤민수씨와 그 아들 윤후가 뭔가를 하면 ‘교육 방법이 너무 좋다’라는 식의 인터넷 기사가 엄청 뜬다. 나는 반대로 윤후가 너무 딱하다. 그 나이 아이는 놀아야 한다. 그냥 놀아야 한다. 그런데 그 어린 애한테 여수 지나가면서 ‘이순신 장군이 무슨 말씀을 하셨지?’라며 안 가르치듯 가르치는 게 윤민수 교육법이라면서 칭찬들을 한다. 어이가 없다.

아이들에게 (성적 올리기를 강요할 게 아니라) 선악의 개념을 명확히 일깨워줬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옳은 게 옳은 게 아니라 승리자가 옳다는 생각을 아이들이 일찍부터 주입받는다. 성공한 사람이 언제나 준거 틀이 된다. 농촌에서 몇억 버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 되고, 책도 베스트셀러 낸 출판사가 좋은 출판사가 된다. 쌤앤파커스라고 여직원 성희롱 사건이 나도 해당 상무를 복직시켰다. 책을 잘 팔았다는 이유로, 베스트셀러 출판사라는 이유로 좋은 출판사라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 영업을 잘하는 사람이라 부도덕해도 자르지 못한 것이다. 성공 여부가 판단의 기준이 되니까 옳으냐 그르냐를 소홀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 전체가 옳은 편에 서기보다는 승리하는 편에 선다. 옳으냐 그르냐를 가릴 새도 없이 편승을 한다.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도 그렇다. 서북청년단 엄마 부대라니, 인간으로 할 짓인가? 교육 분야에서 특히 뭐가 옳은지 그른지가 제일 중요하다. 부모 스스로가 가해자로서 승리자가 되려 하지 말고 옳은 자가 되려고 노력하면 아이들도 그렇게 배운다.

아이들에게 구체적 권리를 가르쳐주는 교육

학생들에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권리를 가르쳐주는 교육을 하면 좋겠다. 교과 과정에서 헌법과 노동법을 필수로 가르치는 운동을 해야 한다. 헌법을 읽으면 내 권리가 뭔지 알 수 있다. 헌법에는 일할 권리(근로의 권리)도 명시되어 있다. 취직 못하고 있다면 프랑스 청년들처럼 나의 일할 권리, 헌법적 권리를 정부가 훼손하고 있다고 떠들어야 한다. 우리나라 시민은 너무 순하다. 사실 프랑스 헌법에는 “자유·평등·박애,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공동체 정신의 토대 위에 프랑스 국민은 권리를 가진다”라고만 되어 있다. 일할 권리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얼마나 거세냐. 법에 어떻게 규정되느냐가 아니라 시민들이 자기 권리를 찾아 정부에 따진다. 아이들에게 아르바이트할 때 요구해야 하는 최저임금, 이런 것도 확실히 가르쳐야 한다. 우리나라 경제 교과서에 창업과 경영자적 관점이 들어가 있다. 우리나라에 저렇게 세습 재벌이 많은데 새로 경영자로 편입될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학에 들어가면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한다. 내 딸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카페 사장이 심야시간을 맡아달라고 했다. 딸이 수당을 더 줘야 한다고 요구했더니 사장이 ‘그래 너는 줄 테니까 남들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단다. 자기 권리는 자기가 알고 찾아야 한다. 학교에서 알려줘야 한다.

피임 교육을 꼭 시켜야 한다. 왜 피임해야 하는지, 남자가 콘돔을 거부하면 여성의 몸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일 수 있으니 애당초 만나지 말라고 알려주어야 한다. 성폭력이 뭔지 폭력의 개념을 알려주고, 아는 즉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야 한다.

우리들 모두가 실은 강자라기보다 약자다. 약자가 살아갈 수 있는 건 결국 연대밖에 없다. 연대의 토대는 어쨌든 진실과 명분이다. 근로기준법을 어겼다, 최저임금법을 안 지킨다, 그러면 노동위원회에 제소하면 된다. 노동청에 신고해서 즉각 처리해주면 문제가 없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세월호 사건을 보면 정부에서 더 적극적으로 수사하고 밝혀야 할 일이 많다. 정부기관이 잘 굴러가야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된다. 왜 진실 규명을 정부가 막고 억압하느냐면, 그 책임에 정부가 끼어 있으니 그렇다. 궁극적으로 건강하고 민주적인 정부가 중요한 이유다.

지금은 국민이 무섭다는 걸 보여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더불어 광주학살의 주범이었다. 노태우가 1987년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집권했다. 노태우 집권기에 한국 사회가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고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고 중국과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중국이나 러시아가 더 이상 잠재적인 위협세력이 아니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에 보면 “이 법은 한국의 이적 세력을 단속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 법을 적용할 때도 국민의 인권을 최대한 적용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역시 노태우 정부 때 개정되며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 노태우는 전두환과 같은 학살자 출신인데 대통령으로서 왜 이런 일을 했을까? 1987년에 공포를 느낀 것이다. 시민의 힘을 느낀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을 겪으며 시민의 힘을 느꼈기 때문에 노태우 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지켜나가는 쪽으로 일보 전진한 것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는 그 시기보다 훨씬 퇴보했다. 일베는 당연히 단속에 들어가야 한다. 반인륜 범죄다. 지역차별을 조성하는 어휘를 쓰는 이들은 잡아가야 한다. 시민들이 무섭다는 걸 알려주고 보여주어야 한다. 내 헌법적 권리를 강력하고 집요하게 요구할 때 정부가 바뀐다.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정부를 감시하고 따져 묻는 아주 독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정리·송지혜 기자

 

교육부가 일선 학교에 커피 타주는 세상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은 ‘교육과 국가’를 되짚는다. 거창고 교장 시절에는 교사의 자율권을 부여하면 학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었고, 참여정부 시절 교육혁신위원장을 맡으면서 교육정책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조회수 : 12,404  |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

부모 교육 강좌인 ‘2014 등대지기 학교’가 5부 능선을 넘어섰다. 세월호 참사 이후 부모의 역할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 강좌는 이제 국가와 정부의 구실을 묻는 장으로 넘어갔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화두를 먼저 던진 이는 참여정부 시절 교육혁신위원장을 맡았던 전성은 선생이다. 10월7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강의실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남은 강좌를 직접 듣고 싶은 이는 이 단체 홈페이지(noworry.kr)에서 수강 신청을 하면 된다.


먼저 질문 하나 하겠다. 국가라는 게 뭘까? 대답해주실 분 안 계신가? (이리저리 둘러보다) 없는 모양이다. 우리 교육이 잘못돼 있다는 증거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60년대 초반만 해도 <국가와 교육>(이기호) 같은 책으로 공부를 했다. 그런데 (5·16 쿠데타로)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런 책이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됐다. 그러니 여러분이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은 <왜 학교는 불행한가> 등 ‘교육 3부작’을 통해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보여준 바 있다.  
ⓒ시사IN 이명익
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은 <왜 학교는 불행한가> 등 ‘교육 3부작’을 통해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보여준 바 있다.
하나 더 묻겠다. 제도란 무엇일까? (청중 가운데 누군가 “법이 뒷받침하는 거요”라고 답변) 그렇다. 우리가 결혼 제도라고 하는 것도 법으로 뒷받침되지 않나. 결혼할 때나 이혼할 때나 법적 신고를 해야 한다. 좀 더 엄밀히 얘기하자면 제도는 힘의 관계, 곧 지배-복종 관계를 묶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우리가 제도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제도에 대해 뭐라 했다가는 일제 총독부에 잡혀갈 것을 각오해야 했다. 자유당, 공화당, 군사 독재정권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제도를 지적하다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고, 모처로 끌려가 얻어맞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때에 비하면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국가와 제도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서대문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이승만 생일인 2월16일이 되면 남산 우남정에 서울 시내 초등학생들을 모아놓고 ‘존경하는 이승만 할아버지께’를 주제로 글짓기 대회를 열었다. 잘 믿기지 않으시나? 북한만 이런 짓을 했던 게 아니다(웃음). 당시는 이승만을 ‘국부(國父)’라 칭했다. 도대체 국가가 뭐기에?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국가는 교육을 통제하려 한다. 위는 9월25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교사 선언 기자회견.  
ⓒ연합뉴스
국가는 교육을 통제하려 한다. 위는 9월25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교사 선언 기자회견.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용어를 떠올려보면 ‘우리나라’라 하지 ‘우리 국가’라 하진 않는다. 국가는 나라와는 다른 개념인 것이다. 과거 특정 왕조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짐이 곧 국가’라 했다. 그러면서 국가에 충성하라 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얘기 아닌가? 단종에게 충성하는 게 충신인가, (단종을 내몰고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한테 충성하는 게 충신인가. 그냥 권력 잡은 놈한테 충성하는 게 충신이다. 영화 <명량>의 감독이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도 이것이었다고 본다. 백성을 버리고 떠난 왕한테 충성할 가치가 있냐고 아들이 묻자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답한다. “무릇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따르는 것이고, 그 충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향해야 한다”라고.

따지고 보면 유교의 중심 도덕이 충(忠)·효(孝)라는 일반의 인식부터 잘못되었다. 유교의 중심 도덕은 인(仁)과 의(義)다. 공자는 인, 맹자는 의를 강조했다. 공자가 효를 강조한 것은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논어>에 따르면,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왕은 부모를 대하듯 백성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일반인 또한 부모를 대하듯 이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정의(social justice)의 개념을 보탠 것이 맹자다. 그런데 한나라 유방이 유교를 국교로 삼은 뒤 이런 알맹이는 쏙 빼고 충·효만 강조했다. 이를 받아들인 한국의 지배층은 삼강오륜까지 보태 힘 있는 자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해왔다.

제도란 이 같은 지배-복종 관계를 드러낸다. 가부장제에 기반한 결혼제도에서는 힘 있는 자가 아버지다. 어머니는 약자다. 이런 제도는 매우 나쁘다. 그래서 나는 자녀 교육 강의를 나갈 때마다 남성들에게 내일 아침부터 커피를 직접 타서 아내에게 대령하라고 말한다. 나도 정년퇴직 이후 날마다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게 왜 중요하냐고? 집안에서 가장 힘이 센 아버지가 약자인 어머니를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 힘을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섬기는 게 바로 정의다.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섬기고, 건강한 사람이 장애인을 섬기는 게 정의다. 그런데 우리는 임진왜란을 겪고 6·25를 겪었으면서도 정의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일이 없다. 그러면서 충·효만 강조해왔다.

경제에서의 정의도 다르지 않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만큼 누구나 나눠가질 수 있어야 그것이 정의다. 도적질하고 게으르고 거짓말하는 자일지라도 최소한 먹고살 수 있게는 해줘야 한다. 아무리 나쁜 놈일지라도 자식은 공부시킬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나는 무노동 무임금이야말로 자본주의 논리 중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들에게 품삯을 똑같이 나눠준 얘기가 나온다. 곧 새벽 일찍 일하러 왔건, 점심때나 오후에 일하러 왔건 보수를 똑같이 지급한 것이다. 불공정한 것 아니냐고? 예수님이 많은 돈을 준 것은 아니다. 가족이 하루 먹고살 일당을 나눠줬다. 요즘 말로 하면 최저임금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경제학이다. 지금처럼 상위 1%가 한 나라 전체 부(富)의 20%를 차지하는 건 정의가 아니다.

나는 소망한다, 교육부 독립을


그런데 정의롭지 못한 이런 제도가 가장 무서운 힘으로 나타난 것이 국가인 듯하다.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어떤 형태의 국가든 언젠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 전 단계로 먼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국가주의다. 교육을 지배하는 것 또한 국가다. 옛날부터 그랬다. 고대 이집트가 학교를 세운 것은 평시에는 세금을 거두고 전시에는 전투를 지휘할 고급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신라가 귀족 자제들을 뽑아 화랑으로 교육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종교와 비슷한 구실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곧 지배 집단의 정당성을 만들어주고 보급시키고 재창출하는 구실을 해왔다. 종교 자체가 본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만 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뒤에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곧 ‘삼라만상이 고통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그 고통을 해결해주겠다’라고 존재의 이유를 밝히셨다. 그런데 뒤쪽을 얘기하면 곤란해지니까 지배층은 ‘천상천하 유아독존’만 강조해왔다. 기독교 또한 사랑과 정의의 종교이건만, 후자는 쏙 빼고 사랑만 강조해왔다.

물론 오늘날에는 신라 화랑 때처럼 귀족들만 교육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교육은 여전히 국가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구상에 있는 270여 나라 중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면 교육이 국가 통제를 가장 심하게 받고 있는 나라가 일본과 한국이다. 과장된 얘기 같으신가? 외국에 살다 온 분들에게 물어보시라. 우리처럼 (중앙집권적인) 교육부가 있는 나라가 몇 안 된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교육장관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교육자치가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일선 학교의 맨 꼭대기에 교육부가 있어서 모든 교육과정을 일일이 지시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국정교과서까지 부활시키겠다 하지 않나.

나는 교육부 폐지론자는 아니다. 그보다 나의 궁극적 목표는 교육부 독립이다. 입법부·사법부가 서로 독립된 기관이듯 교육부 또한 그래야 한다는 얘기다. 내 계산으로는 완전히 독립하기까지 짧게 잡아도 16~17년은 걸릴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는 과도기적 모델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일종의 삼각형 모델인데 각각의 꼭짓점마다 단위학교, 행정지원체제, 평가기구(민간 포함)가 있다고 머릿속에 그려보시면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들 셋이 상호 동등한 보완 관계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단위학교가 최종 결정권을 갖게 된다. 곧 교사가 직접 교육할 내용을 기획하고, 그 기획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르친 결과에 따라 학부모 등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이다.

유럽 중등교육에서 사회 과목의 목표는…


이는 공상이 아니다. 외국에서는 이미 다 이렇게 한다. 대학 또한 이 같은 교사의 교육 기획력을 보고 학생을 평가한다. 내가 몸담았던 거창고 산하에는 샛별초·샛별중이 있는데, 이들 학교 모두 교사에게 자율권을 주고 있다. 그러면 열성적인 교사는 밤 10시까지 남아 수업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이끈다. 이런 교사는 또 학생들이 용케 알아본다. 그러니 다른 교사들도 열심히 따라 할 수밖에 없다. 거창고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뒤 “처음부터 우수한 애들이 모이니까 대입 실적도 좋은 것 아니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 않다. 내가 거창고 8회 졸업생인데, 50년 전 그 시절에도 내 동기 상당수가 이른바 명문대에 입학했다. 단위학교와 교사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면 모든 학교가 이렇게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육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든다. 참여정부 때 교육혁신위원장을 맡으면서 내가 역점을 두고자 했던 것이 수능 등급을 완화하고 직능교육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입시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수능 등급을 대폭 줄여서 아예 2등급 정도로 만들자는 것이 내 제안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당시 비서실장), 이정우(정책실장) 세 사람 빼고 나머지는 다 게거품을 물고 반대하더라. 그래서 5등급까지 양보했는데, 결국 교육부 최종 발표에서는 이것이 다시 9등급안으로 바뀌었다. 안병영 당시 교육부 장관이나 이해찬 국무총리가 9등급안을 고집했다던데, 나는 지금도 그분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직능교육 강화안 또한 예산 부족을 이유로 무산됐다. 천재 1명이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인재 양성론에는 2300억원인가를 쓰면서 직능교육 강화에는 단돈 500억원도 쓸 수 없다더라. 참여정부에서조차 현실이 이랬다.

이는 결국 기본 철학의 문제다. 유럽에서는 중등교육의 목표가 명문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회 과목의 경우는 어떤 정책이 내게 유리하고 불리한지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목표다. 이를테면 환율을 올리고 내리는 게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할 수 있게끔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노골적으로 펴는 후보를 가난한 유권자들이 찍어주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중등교육 과정에서 이런 교육 목표만 달성되면 나머지는 자신의 재능과 소질, 그리고 관심에 따라 진로를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원하는 학생에게는 직능교육도 제공해야 한다. 이발사나 열쇠 수리공이 되려는 학생이 굳이 대학을 갈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모든 학생이 국·영·수에 몰입할 것을 요구한다. 어찌 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경제·학문·언론 부문을 장악한 엘리트 권력 집단은 학벌 중심의 현 체제를 그대로 가져가고 싶어한다. 왜? 그래야만 지금처럼 사회 각 부문을 장악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으니까. 이들은 국·영·수 중심으로 교육을 계속 몰고 가야만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들이 세상을 계속 지배할 수 있음을 똑똑히 알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3분의 1, 판·검사의 70%가 특정 학교 출신으로 도배돼 있는 나라에서 교육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나는 희망으로 생각한다. 최근 내가 ‘거창교도소 건립을 반대하는 범군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데, 여기서 활동하는 젊은 엄마들을 보며 많이 감탄했다. 이런 열정을 바탕으로 부모들이 우리 사회에 불공정하게 분배돼 있는 힘을 분산시키는 일에 나섰으면 한다. 일단은 교육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법적 효력을 갖는 교육감 협의기구를 만들어 교육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는 방법도 고려해봄직하다. 이제는 교육부가 일선 학교에 커피를 타주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정리·김은남 기자

 

 

혹시 당신도 ‘수포자’입니까

공교육정상화법의 다른 이름은 ‘선행학습 금지법’이다. 공교육만 제재하는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수학 과목은 제도적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도 수학을 따라갈 수 있을까.

허은선 기자

교육 현장에서는 또 하나의 ‘실험’이 진행되는 중이다. 지난 9월12일부터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이하 공교육정상화법)’이 시행되면서다. ‘선행학습 금지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안은 문자 그대로 과도한 선행학습을 규제함으로써 공교육을 정상화하자는 취지에서 제정됐다. 하지만 이 제도는, 시행 이전부터 공교육만 제재하는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입법 취지는 좋지만, 사교육 부문의 선행학습을 막지 못하면 효과가 미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별법 시행 이후 학교 현장의 반응은 혼란스럽다기보다 무반응에 가깝다. 법 시행 자체를 몰랐다는 교사도 많다. 당혹스러운 것은 학생과 학부모들이다. 나만, 혹은 우리 애만 뭔가 놓치는 게 아닐까 불안해지기도 한다. 결국 온·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정보 수집에 나선 결과 이들이 도달하는 곳은 다시 학원이요, 선행학습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윤무영</font></div>사교육걱정없는세상 안상진 부소장(왼쪽)과 전국수학교사모임 이동흔 회장. 이들은 수학 선행학습의 효과가 미미하고 비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시사IN 윤무영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안상진 부소장(왼쪽)과 전국수학교사모임 이동흔 회장. 이들은 수학 선행학습의 효과가 미미하고 비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교육부와 국민권익위원회가 일반 국민 9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선행학습을 가장 많이 하는 과목은 수학(41.4%)과 영어(31.9%)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수학이다. ‘수포자’(수학 포기자)라는 말이 일상어가 될 만큼 한국의 초·중·고교 수학 과정은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영어의 경우 최근 교육부가 밝힌 대로 수능 영어평가 방식이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뀌면 선행학습에 대한 수요가 크게 줄어들리라는 게 교육계 안팎의 기대다. 반면 수학은 이런 제도적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행학습 금지법안만 덜렁 통과된 상태다.

< 시사IN>이 그간 수학교육의 문제점을 집중 제기해온 안상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소장(고등학교 수학교사 경력 8년)과 이동흔 전국수학교사모임 회장(숭문고 수학교사)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수학을 따라갈 수 없다는 통념은 과연 진실일까? 공교육정상화법은 과연 ‘수포자’를 막을 수 있을까? 인터뷰는 10월1일 <시사IN> 편집국에서 진행됐다.

지난 9월12일 공교육정상화법이 시행됐다. 교육 현장의 분위기는 어떤가?

안상진 부소장(안):학교 현장에서는 체감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돌아다니면서 선생님들에게 물어보면 ‘이게 뭐 하는 법이냐’며 내용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이와 대조적으로 학원들은 ‘그 좋은 선행학습, 공교육에서 이젠 못하니 우리가 책임져주겠다’면서 나서는 식이다.

이동흔 회장(이)
:현장에서는 선행학습 금지에 대한 체감도가 아직 떨어진다. 개구리가 뜨거운 물속에 들어간 직후엔 온도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단 따져보자. 왜 수학 과목에서 특히 선행학습 문제가 발생하는 걸까?

:무엇보다 학생들이 배우는 수학 학습량이 지나치게 많다. 한국의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성장발달 수준에 따라 만들어진 게 아니라 고등학교 때 배워야 할 내용을 정해놓고 (초·중학교로) 내리꽂는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정해진 시간 내에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게 너무 많다. 이과 학생들은 더욱 심하다. 더 큰 문제는 그렇다고 질적인 심화가 이뤄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령 초등학교 4학년이 ‘분수’를 배운다고 가정해보자. 미국은 피자 한 판 나눠먹기 등 실생활 예시를 들어 학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학생이 (분수의) 개념을 발견하면 그걸로 된 거다. 이후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문제 몇 개만 풀면 된다. 하지만 한국은 개념을 일단 던져주고 그것을 계속 꼬아 문제를 풀도록 강요한다. (교육의 목적이 수학 개념을 이해시키기보다) 학생을 평가하고 구분하기 위한 거니까, 별 희한한 문제를 다 낸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질려버린다. 내용을 안다고 생각했다가 막상 문제를 풀어보니 ‘아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학원에 기대게 된다. 학원은 또 선행학습을 유도하고.

:요즘 애들 정말 고생한다. 내가 문제를 풀면 애들이 도사 쳐다보듯 본다. 평가를 통해 학생의 장점을 찾고 방향을 제시해줘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수학자와 수학교육학자가 생각하는 수학에 차이가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할 필요가 있다. 수학자들은 고교 과정에서 배우는 수학의 양이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 반면 수학교육학자들은 지금 배우는 양만으로도 학생이 합리적·논리적·사회비판적 사고를 갖춘 사회인으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선행학습 금지법에 대한 의견 차이가 발생하는 듯하다. 수학자들이 요구하는 학습량을 채우려면 선행학습이 불가피해지는 측면이 있다.

관건은 대학 입시 아닌가?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는 논술시험 등에 대비하기 어렵다고 현장에서는 하소연한다.

:대입 논술시험 등에서 편미분 문제가 나오는 등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만 유리하게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출제되어온 것이 현실이기는 하다.

:그래서 이런 걸 막을 법안이 필요하다는 거다. 공교육정상화법은 고교 학생들에게 대학 과정의 문제를 출제하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최근 3년 정도의 기출 문제를 분석해보면 대학 교수들은 고교 교육과정에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 가령 편미분 같은 경우 ‘이것도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미분이니까’ 하고 문제를 내는 경우도 있다. 물론 고교에서 배운 내용으로 해석·유추해서 문제를 풀 수는 있지만, 대학에서 배우는 편미분을 알면 되게 쉽게 풀리는 문제들이 있다. 이런 게 문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가 치러진 9월3일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교실. 특별법이 시행됐지만 학교 현장은 ‘무반응’에 가깝다.  
ⓒ연합뉴스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가 치러진 9월3일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교실. 특별법이 시행됐지만 학교 현장은 ‘무반응’에 가깝다.

그래도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면 학생과 학부모 처지에선 선행학습을 하려는 유혹이 생기지 않겠나?

:선행학습을 하면 성적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성적 순위가 최상위권인 학교에서 일한 적이 있다. 당시에 관찰해보니,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은 1학년 1학기 중간·기말고사, 1학년 2학기 중간고사까지만 성적이 좋다. 3학년에 가선 선행학습을 안 한 학생이 전교 1등을 하더라.

:2000년대 들어 특목고 입시 열풍이 불면서 초등학생도 <수학의 정석>을 떼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생겼다. 이후 특목고 입시 전형이 바뀌면서 선행학습이 필요한 내용은 출제를 못하게 됐다. 그런데도 선행학습이 줄어들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학원에 자체 동력이 생겨 있더라. “어머님, 서울대 들어간 누구 아시죠. 걔 이렇게 들어갔어요. 다른 애들도 다 합니다”라고 부추기는 거다.

선행학습이 효과가 없거나 미미하다는 뜻인가?

:선행학습을 하면 공부를 대충 한다. 모르면 ‘이게 뭐야, 왜 안 되지, 미치겠네’ 하면서 달려드는데, (선행학습을 하면) 이런 근성이 반감된다.

:수능 수학 100점 만점에서 52점가량은 4점짜리 문제로 이루어진다. 유형별 문제집 잔뜩 풀며 선행학습을 한 학생은 2점, 3점짜리는 맞히는데 정작 4점짜리를 못 푼다. 선행학습으로 인해 사고능력이 완전히 저하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교 교사로 있을 때 제일 무서운 게 “입학 전에 고교 수학 5번 뗐다, 10번 뗐다” 하는 학생들이었다. 이런 학생들의 약점은 뻔하다. 개념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어서 유형을 약간 변화시킨 문제들, 즉 본질에 대해 물어보는 문제를 내면 대책이 없다. 그냥 멍해진다. 그럼 그때부터라도 공부 방식을 바꿔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결국 학생들 입에서 ‘선생님, 저는 수학적 머리가 없나 봐요’ 소리가 나온다. 이게 가장 가슴이 아팠다. 선생님도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 때문에 수업 분위기가 망가져 피해를 보고, 학부모도 피해를 본다. 학교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시험 보러 가는 곳, 이미 뗀 걸 확인하는 곳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돈은 돈대로 쓰고, 불안하고, 좌절감이 들고….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꼼꼼히 복습해야 실제로 성적이 더 잘 나온다는 걸 알고 나면, 즉 선행학습이 비효율적이란 걸 깨닫고 나면 더 이상 선행학습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영화관으로 치면 다들 의자에 앉아서 영화를 보지 않고 의자 위에 올라서서 영화를 보는 거랑 똑같다. 한 사람이 의자 위에 올라서니까 뒷사람도 줄줄이 올라가서 불편하게 영화를 보는 꼴이다.

선행학습이 수학적인 사고능력을 약화시킨다고 말씀하셨지만 당장 시험을 눈앞에 둔 학생으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선행학습 없는 수학 공부, 어떻게 해야 할까?

:초등학생, 중학생은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사교육 없이 부모님이 옆에서 도와줄 수 있다. ‘오늘 학교에서 뭐 배웠니’ ‘그 문제는 왜 그렇게 되니’ 등 질문을 던져 계속 사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출제자가 꼬아놓은 문제들을 못 풀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사고하는 힘이 길러지면 그걸로 충분하다. 단, 고등학교 입학 전 고등수학은 미리 볼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수학 과목의 난이도가 갑자기 올라가기 때문이다. 중3 기말고사를 11월에 친 이후에 시간이 꽤 있으니 그때를 활용하면 된다. 이것은 오늘날 무분별하게 행해지는 선행학습과는 다르다. 고등학교 수학이 갑자기 어려워지니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비책이다.

:수학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다 이야기하는 거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하루에 8시간 넘게 피아노를 치고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프리킥을 3000번도 넘게 차듯, 수학도 참을성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부모들은 자녀가 수학 문제를 100번 틀려도 괜찮다고 봐주고 넘어갈 줄 알아야 한다. 변화가 중요한 거다.

:교사들도 ‘아이들이 수학을 나에게 처음 배운다’는 마음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면 한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걸 정말 잘 안다. 하지만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 선생님 수업을 듣는 아이들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수업해주면 좋겠다. 학부모들도 교육 담당자에게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요즘엔 다들 영어를 잘해서 영어학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거 틀렸네’라고 시큰둥해하는 학부모들이 있다. 반면 수학은 다들 할 말이 있어도 못한다. 대부분이 학창 시절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어서다. 하지만 수학교육에 대해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행정고시 합격, 나는 지금도 후회한다”

적성은 한 가지가 아니다. 여러 재능이 뒤섞여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다. 적성과 직업을 굳이 연결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다시 교육이다. 적성 교육과는 거리가 먼 한국 교육이 아이들을 자꾸 공부로만 몰아넣는다.

  조회수 : 65,002  |  강지원 (변호사·타고난 적성찾기 국민운동본부 대표) 

“공부 열심히 한 것을 후회한다”라는 고백이 ‘고시 2관왕’ 입에서 나오자 청중들의 눈이 커졌다. 부모들을 위한 ‘2014 등대지기 학교’ 여섯 번째 강좌가 있던 날의 풍경이다. 이날 강사는 청소년 문제 전문가이자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잘 알려진 강지원 변호사.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말문을 연 그가 부모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10월21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noworry.kr)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오늘 하려는 얘기의 요지는 간단하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태어났다는 것. 참 당연한 얘기인데 우리는 자주 망각하고 산다. 세계 70억 인구 가운데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마음 씀씀이도, 생각도 다르다. 타고난 적성에 맞춰 살아가면 그 사람 인생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어디 현실이 그런가? 다들 정해진 기준에 맞춰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려 든다. 

먼저 내 반성문부터 써야겠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왔다. 아버지 전근으로 그렇게 된 건데, 우리 어머니는 교육열이 굉장히 강한 분이셨다. 7형제 중 5명을 훗날 서울대에 입학시켰을 정도다. 그런 어머니가 처음 고른 곳이 재동초등학교였다. 재동초는 당시 서울시내 명문 초등학교 중 하나로 꼽혔다. 왜? 경기중학교에 학생들을 많이 합격시켰으니까. 나도 당연히 입학하자마자 중학교 입시를 준비했다. 6학년 때 우리 반 60명 중 4명이 합격했는데, 그중 하나가 나였다. 중학교 가서는 경기고를 목표로 입시를 준비했다. 또 붙었다. 그리고 재수해서 서울대를 갔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강지원 변호사는 “공부는 그저 여러 재능 중 하나”라고 했다. 그가 ‘타고난 적성찾기 국민운동본부’를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시사IN 신선영
강지원 변호사는 “공부는 그저 여러 재능 중 하나”라고 했다. 그가 ‘타고난 적성찾기 국민운동본부’를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3선 개헌 반대 가두시위에서 연설을 했다가 주동자로 찍혀 체포령이 떨어졌다. 야간열차를 타고 도망가 몸을 의탁한 곳이 어느 절간이었다. 아침이 되니 장정 여러 명이 밥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절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분들이 내 얘길 듣더니 “쓸데없는 짓 말고 고시 공부나 하라”고 충고했다. 남자는 ‘사’자가 붙어야 출세한다면서. 순진한 마음에 그날로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법전을 달달 외웠다. 그 결과 대학 졸업하기 직전 행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몇 년 뒤에는 사법고시에도 붙었다. 수석 합격이어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얼굴도 나고 그랬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고? 자기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다. 정반대다. 왜 젊었을 적에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 나는 지금도 후회하고 반성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보라. 행시·사시 패스했으면 판검사를 하거나, 대학에 남아 학자가 되거나 했어야 할 텐데 엉뚱하게 청소년 운동, 사회개혁 운동 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얼치기 방송인 노릇까지 하고 있다. 나는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절대로 고시 공부 따위는 안 할 거라고 단언하고 다닌다. 왜? 법률 따지는 게 너무 싫기 때문이다. 요즘도 내게 법률 상담을 청해오는 분이 가끔 있다. 법이란 게, 이걸 누가 훔쳤냐부터 계약할 때 선수금은 줬나 안 줬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등등 온갖 것을 따져야 한다. 조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런 게 적성에 맞는 사람도 있다. 법률을 다루는 일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해야 한다.

나는 내 적성을 우연히 발견했다. 검사 시절 비행 청소년들을 만나다 보니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고 심리 상담, 철학까지 공부하게 됐다. 하다 보니 청소년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교육이 바뀌고 사회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더라. 덕분에 정치개혁 운동에까지 관심이 확장돼 정책 선거를 주장하며 매니페스토 운동에도 나서게 됐다. 얼마 전 내가 대선에 출마했더니 ‘대통령병 걸렸느냐’고 비난하는 분들도 있던데, 대통령 되겠다고 선거에 나섰던 게 아니다. 정책선거라는 건 이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바람에 사재(私財)를 탈탈 털었다가 집에서 쫓겨날 뻔하기는 했지만(웃음). 그래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있으니까. 다만, 내가 젊었을 때 일찌감치 내 적성을 알아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파고들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잘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때는 있다. 그래서 ‘타고난 적성찾기 국민운동본부’를 만든 거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적성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자신의 ‘적성지도’를 만들어볼 필요가 있다. 위는 취업박람회장을 찾은 특성화고 학생들.  
ⓒ연합뉴스
적성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자신의 ‘적성지도’를 만들어볼 필요가 있다. 위는 취업박람회장을 찾은 특성화고 학생들.
공부 잘하는지가 그렇게 궁금한가?


여기 부모들이 많이 오셨으니, 한번 물어보자. 여러분 자녀는 공부를 잘하나? 대답이 없으시다(웃음). 다시 묻자. 어떤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던가?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 잘하던가? 그렇지 않다. 공부는 타고난 머리가 있는 애들이 한다. 이런 애들은 공부하지 말라고 해도 잘한다. 반면 공부 못하는 재주를 타고난 아이들도 있다. 이런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면 그 자체가 비정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반드시 알아둘 것이 있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대신 다른 재주를 타고났다는 사실이다. 공부는 그저 여러 재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공부 하나로 모든 아이를 재단하려 든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옆집 아이한테 꼭 묻는 말이 “넌 공부 잘하니?”이다(웃음). 이런 질문을 받는 아이들의 심정을 생각해본 일이 있나? 제발 그런 질문 하지 마시라. 또 한 가지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 “넌 꿈이 뭐니?”이다. 지금 존재하는 직종만 2만~3만 개라 한다. 앞으로 20~30년 뒤면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또 다른 직종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 가운데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누가 아나? 이런 무식한 질문 대신 이렇게 물어보자고 나는 제안하고 싶다. “너는 좋아하는 게 뭐니?” 또는 “너는 잘하는 게 뭐니?”라고. 사실 이렇게 물어봤자 돌아오는 답변은 “잘 모르겠는데요”일 공산이 크다. 요즘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이런 질문을 계속 받다 보면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뭐지?’ ‘잘하는 게 뭐지?’

적성이라는 건 아이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부모는 이를 도울 뿐이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 여러 자녀를 길러본 부모라면 똑같은 만화책을 던져줬는데 큰애는 밤을 새워 읽고, 작은애는 한 페이지 읽고 덮어버리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이다.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계속 하고 싶어한다. 이를 자극하고 기회를 던져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다. 이런 노력도 안 하면서 “넌 꿈이 뭐니?”라고 묻는 것은 무책임하다.

단, 흥미와 재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연예인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많다. 텔레비전에서 그저 멋있게 보인다는 이유로, 일시적인 유혹과 허영에 들떠 반짝 흥미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잘할 수 있으려면 재능이 뒷받침돼야 한다. 물론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함부로 재단할 일은 아니다. 재능 여부를 확인하려면 체험해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한 엄마가 중학생 딸을 데리고 와서 내게 상담을 청한 일이 있다. 가출도 곧잘 하던 녀석이었는데, 왜 그렇게 부모 속을 썩이느냐고 묻자 아이 왈, ‘가수를 하고 싶은데 엄마 아빠가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수를 하고 싶다고? 그래라” 하고 선선히 응해준 다음 방송국 PD에게 부탁해 녹음실을 잠시 빌렸다. 아이가 노래 부르는 것을 녹음해 스스로 들어볼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아이 입에서 가수 하겠다는 말이 쑥 들어갔다. 그러고는 내가 내준 숙제에 따라 자신이 뭘 잘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흔히 적성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시는데, 나는 단계별로 접근할 것을 권하고 싶다. 우선, 적성은 한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박지성처럼 축구 하나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예는 오히려 드물다. 보통사람에게는 여러 재능이 뒤섞여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든 재능을 일단 확인해야 한다. 2단계로는 각각의 적성이 차지하는 비중을 따질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축구를 잘하면서 말도 잘하고 사업적 수완도 있는 사람이 있다 치자. 이 사람의 경우 세 가지 적성을 타고난 셈인데, 자기 안에서 각각의 적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르다. 곧 축구 잘하는 적성이 30%인데 말 잘하는 적성은 50%요, 사업적 적성은 10%인 식이다. 3단계는 각 적성별 수준을 점검하는 것이다. 이를 종합해 나만의 적성지도를 만들어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 4단계는 적성을 융합하는 단계다. 축구를 좋아해 하루 일과의 60% 이상을 투자하는데 막상 공은 잘 못 차는 사람이 있다 치자. 반면 이 사람의 말하기 능력은 뛰어나다. 이럴 경우 적성을 융합해보면 이 사람에게 맞는 직업은 축구 해설가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적성과 직업을 굳이 연결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투잡, 스리잡도 많다. 나 같은 경우 사회운동가이면서 방송인이라는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있다. 재미있는 게, 내가 어쩌다 방송 일을 하게 됐을까 생각해보니 중학교 때 잠깐 방송반 활동을 한 일이 있더라. 방송반이라고 해봐야 허름한 앰프 하나 놓고 점심시간에 음악 틀어주는 게 다이긴 했지만, 나 자신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던 나의 흥미와 재능을 뒤늦게 되살리고 있는 셈이다. 흥미롭지 않나? 이러니 청소년 시절에 적성을 찾아주는 일이 소중하다는 거다. 자신의 타고난 재능은 절대로 속일 수가 없다.

문제는 한국 교육이 적성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교육이 인간에 대한 투자라면 아이들이 타고난 적성을 찾아주는 것이야말로 최적의 투자가 될진대, 지금의 교육은 아이들을 똑같은 교실에 앉혀놓고 똑같은 지식을 욱여넣는 데 골몰할 뿐이다. 그러면서 대입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이리떼처럼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간다. 이건 미친 교육이다. 내가 고3 때 수학에 미적분이 처음 도입됐는데, 이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화가 난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미적분의 ‘미’자도 써볼 일이 없으니까. 반면 교육을 받는 동안 “네 타고난 적성을 찾아라, 그것이 성공의 길이다”라고 말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교사도, 교수도, 부모도. 오직 공부만 하라고 했다.

‘진짜’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싶다면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선생님은 고시도 두 개나 합격하고 누릴 것 다 누려봤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죠”라고 시비 거는 분들이 있다. 그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후회하기에 아이들만은 나 같은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대로 우리 집 아이 둘은 대안학교에 다녔다. 아내(김영란 전 대법관)와 나는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우리가 왜 공교육 대신 대안학교를 선택했겠나? 돌이켜보면 상당한 용기와 소신이 필요한 일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지금도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진짜 행복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난 지금도 변호사 일을 다시 할 생각이 없다. 아내가 대법관 출신이니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면 3년에 100억원은 벌 수 있을 거라고 주변에서 얘기들 하는데, 나는 그냥 지금처럼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소박하게 살고 싶다.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남들 세단 타니 나도 세단 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자가용 대신 지하철·버스 타고 걸어다니면서 살기로 약속했다. 많이 걸으니 다리도 튼튼해지고 건강관리에도 좋다. 그런 나를 보고 누군가 무시한다? 그건 그 사람 소관이다. 나 스스로 내공이 쌓여 있으면 그런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행복의 기준은 결코 밖에 있지 않다. 우리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면, 그래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행복할 것 같은가? 결코 그렇지 않다. 행복은 절대로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잡히는 게 아니다. 오늘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내일도 행복할 수 없다. 왜? 행복은 습관이니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홍익(弘益)을 추구하는 삶을 덧붙이고 싶다. 내 가족, 이웃, 국가, 나아가 인류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의 영역을 점점 더 넓혀가는 것이 홍익이다. 기왕 태어난 인생, 이웃과 공동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참된 행복이자 성공 아니겠나.

정리·김은남 기자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이미 왔습니다”

교육 문제의 정점에 입시 경쟁 구조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모두가 이 문제에 답이 없다고 손 놓고 있을 때,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결과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진짜 대안은 ‘피해 당사자’인 부모에게서 나온다.

  조회수 : 11,639  |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2014 등대지기 학교’ 마지막 시간.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그 어느 강의 때보다 긴장된다”라며 강단에 섰다. 등대지기 학교는 이 단체가 2010년부터 매년 개최해온 부모교육 강좌다. 이 강의를 듣고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젊은 날의 열정을 되찾았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부모들은 무엇에 감응한 것일까? 10월28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noworry.kr)에서 진행된 마지막 강좌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본다.

개인적인 사연부터 얘기하겠다. 1992년 서울 봉천동의 한 카페에서 이마가 넓고 눈썹이 갸름한 한 여자를 만났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아내와의 첫 만남이다. 당시 상담을 공부하던 아내는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꿈꿀 수 없는 세상이 싫어요>라는 시집이다. 알고 보니 그 시집은 ‘장하다’라는 학생이 고3 막바지에 전주 모악산에서 음독자살을 하기 직전 남긴 것이었다. 입시 경쟁의 고통 속에서 더는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살 수 없어 힘든 생을 내려놓기로 했다면서 그는 자기가 쓴 시를 친구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그에 따라 아버지가 펴낸 유고시집이 이 책이다. 이 중 ‘어른들에게’라는 시 일부를 읽겠다. “아, 어느새 가을이군요/ (중략) 어른들은 늘 바쁘다고 하니까 이 계절을 느낄 여유가 없을 테죠// 그래요/ 좋아요/ 어른이 된 당신들에게 시간이 없다면/ 장차 우리들도 똑같아지겠군요// 그럼 어른이 되기 전에 지금 바로 우리들에게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자유를 주세요/ 헤세와 셰익스피어를 만나고 싶어요/ 국어 영어 수학 그런 단세포적인 책 표지는 이런 계절에 어울리지 않아요.”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윤무영</font></div>송인수 공동대표(사진)가 설립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창립 때부터 입시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민간 교육부’를 자임했다.  
ⓒ시사IN 윤무영
송인수 공동대표(사진)가 설립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창립 때부터 입시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민간 교육부’를 자임했다.
그가 시를 읽게 하고 싶었다던 친구들은 지금쯤 마흔넷, 마흔다섯 살이 되어 있을 것이다. 24년이 지난 지금, 이 친구들이 장하다 학생을 추모하며 “참 안됐다. 그 시절만 해도 입시 경쟁이 정말 참혹했지. 네가 조금만 견뎠더라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입시 경쟁은 갈수록 더 치열해지고 있다. 우리 교육 문제의 정점에 입시 경쟁 구조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나도 너무 고통스러워 이 문제만은 피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교사 생활을 시작한 것이 1989년인데 그때만 해도 학교 현장에 촌지나 불법 찬조금 관행이 남아 있었다. 이를 거부했다가 학년부장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교무실 아닌 지하 보일러실에서 근무했던 적도 있다. 이렇게 홀로 잘못된 관행과 맞서 싸우는 식으로는 한계가 있겠다 싶어 1995년 ‘좋은교사운동’이라는 교원단체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2002년부터는 상근자로도 일했다. 이 단체가 교원단체 중 최초로 교원평가제도를 수용하는 등 나름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여기서 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교사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췄지 입시 경쟁 구조는 외면했다. 한마디로,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고민이 깊어진 것은 상근자 임기(5년)가 끝나가던 2007년 무렵이다. ‘임기 마치면 뭘 하지? 출판사를 해볼까?’ 궁리하던 어느 날 박상진 장신대 교수가 내게 말했다. 이젠 입시 경쟁 구조를 해결하는 일에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게 가능할까? 반신반의하면서 ‘대학입시제도 개혁 민간운동 제안서’라는 걸 시험 삼아 만들어봤다. 그리고 교육운동을 하면서 평소 뜻이 잘 통하던 윤지희 선생(전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회장)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윤 선생이 뛸 듯이 기뻐하며 답장을 보내왔다. 내 제안을 뼈대로 ‘사교육’을 키워드로 내세우면 대중과 소통하는 교육운동을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이런 반응을 접하고 내가 기뻤을까? 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입시 경쟁 구조라는 게 얼마나 복잡한가? 교육 내부적 요인(△대학 및 고교 입시제도 △학교 시험방식 △학교 교육의 부실 등)뿐 아니라 외부적 요인(△학벌에 따른 사회적 차별과 ‘좋은’ 일자리 부족 △입학생 성적 중심의 대학 서열화 등)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게다가 입시 문제는 거의 전 국민이 이해 당사자다. 최근 서울교육청이 몇몇 자사고의 지정을 취소하자 이들 학교 학부모들이 해병전우회처럼 교육청 정문을 돌파하려 드는 모습을 여러분도 보셨을 거다. 학원업자는 물론 학부모까지 가세한 이런 이해당사자들의 극한 대결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아무리 따져봐도 답이 안 나오는 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소중한 인생을 답이 안 나오는 일에 낭비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입시 문제는 거의 전 국민이 이해 당사자다. 7월25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전국자사고학부모연합회 소속 학부모들이 ‘자사고 폐지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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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문제는 거의 전 국민이 이해 당사자다. 7월25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전국자사고학부모연합회 소속 학부모들이 ‘자사고 폐지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그즈음,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님이 중·고등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게 됐다. “얘들아, 힘들지? 너희들이 힘든 건 입시 때문이란다. 그런데 왜 입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지 알아?” 순간 속으로 반감이 들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교육운동 십수 년 해온 나도 답이 없어 고민 중인데…’ 싶었다. 그런데 그분 말씀이 이랬다. “그건 이 문제를 필생의 과제로 끌어안고 자기 인생을 바친 사람이 대한민국 역사상 한 명도 없어서 그래.” 아, 그 말씀이 왜 아이들 아닌 나한테 꽂혔던 건지(웃음). 정말 그 말이 맞구나 싶었다. 이제껏 입시 경쟁 구조를 개혁하는 운동에 모든 것을 건 개인이나 단체는 없었다. 그저 여러 문제들 중 하나로 거론할 뿐이었다. 결국 마음을 굳히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단체를 출범시킨 것이 2008년 6월12일이다.

2022년이면 입시교육이 사라질 수도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 놀라운 건 우리가 상상하고 꿈꿔온 일들이 거의 이뤄지더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처음 창립할 때부터 입시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민간 교육부’를 자임했다. 윤지희 선생과 나, 간사 1명, 이렇게 3명으로 시작하면서도 꿈은 원대했다. 교육부 인원이 518명이라니 우리도 그 10% 수준까지는 인력을 충원해 제대로 된 대안을 내놓겠다고 다짐했다. 현재 스태프가 27명이니 그 절반까지는 온 셈이다. 매달 우리 단체를 후원하는 회원도 3000명을 넘어섰다. 평균 후원액은 월 2만5000원. 국내 시민단체 중 이만큼 충성도 높은 후원회원을 거느린 곳도 드물다고 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이렇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제도와 의식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우리는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을 넘어 결과(outcome)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자니 목표도 구체적으로 세웠다. ‘학교 성적으로 인해 비관 자살하는 학생을 현재의 연간 200명 수준에서 0명으로 떨어뜨리기’ ‘연간 20조원 수준인 사교육비 규모를 0원으로 떨어뜨리기’가 우리의 최종 목표다. 이를 위해 7가지 영역별로 10개년 계획도 수립했다. 이대로 실현되면 현재 초등학교 3학년이 고등학생이 되는 2022년 입시교육은 사라질 것이다.

꿈같은 얘기라고? 이미 몇 가지는 현실이 되었다. 우리 단체 등이 중심이 돼 끈질기게 문제 제기를 한 결과 외고 입시가 대폭 개선됐다. 덕분에 초등학교 3~4학년부터 영어능력검정시험(TEPS)을 준비해야 했던 잘못된 관행이 사라졌다. 특목고 전문학원 중 문을 닫은 곳도 생겨났다. 대학별 논술고사도 그 전보다 쉬워졌다. 고교 과정을 뛰어넘는 문제를 낼 수 없게끔 압박했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는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으로 인해 최소한 학교 교육과 대학 입시에서만은 선행학습이 발붙이지 못할 근거가 마련됐다. 다만 사교육 시장이 선행학습 규제 대상에서 빠진 것은 매우 아쉽다. 이 부분은 계속해서 보완을 촉구할 계획이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분명한 목표로 삼았고, 이에 따라 나쁜 법과 제도를 고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이것만으로도 사교육 유발 요인의 상당 부분을 금지하고 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 제도 개선만으로 우리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의식을 바꾸는 일이다. 흔히 사람들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똑똑한 사람들이 대안을 내놓겠지’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전문가·대리인 운동으로는 결코 운동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끌어낼 수 없다. 보행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모 표시 개수로 알려주는 교통 신호등이 있다. 이 신호등을 만든 사람은 누굴까. 푸른 신호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길을 건너다 즉사한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내 아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집념이 이런 신호등을 가능케 한 것이다. 입시 경쟁의 대안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피해 당사자인 우리 부모들이 나서야만 진짜 대안이 나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의식의 변화가 결국 생활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런데 개인으로 보자면 부모는 한없이 이기적이다. 아이가 100점 맞아왔다고 자랑하면 칭찬에 앞서 “너 말고 100점 맞은 애가 몇 명인데?”라고 묻는 게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어미의 본능이다. 이런 나쁜 의식을 바꾸지 않고는 법과 제도를 고쳐봐야 헛일이다. 곧 나쁜 법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 해야 할 최초의 행위는 내 안의 잘못된 의식과 대면하고 이를 바꿔나가는 일인 것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초창기부터 등대지기 학교라는 교육 강좌를 운영해온 것은 이 때문이다.

의식이 바뀐 부모들은 정말 놀라운 일을 해낸다. 사교육이나 경쟁교육을 조장하는 우리 주변의 나쁜 관행들을 신고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일이 있다. 당시 어느 회원이 한 초등학교 정문에 걸린 플래카드를 사진으로 찍어 신고했다. “6학년, 목숨 걸고 공부하는가”라고 쓰인 플래카드였다. 훗날 이 플래카드를 내건 교장 선생님이 징계를 당해 평교사로 강등됐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우리가 낸 보도자료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성적순으로 급식을 배식한 초등학교 얘기가 세간에 화제가 되었는데, 이 또한 회원이 제보한 내용을 우리가 언론에 알린 것이다. 고등학교 교장들이 입시학원 원장을 초청해 입시 설명회를 한다는 제보를 받고 문제 제기를 한 것 또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아마 제보자들도 과거에는 이런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도 무심코 지나치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식이 바뀌면서 더는 이를 간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주력하고자 하는 것은 학교 현장의 줄 세우기 관행을 타파하는 일이다. 줄 세우기를 조장하는 언론·방송 모니터링 운동도 전개하려 한다. 심지어 <중앙일보>는 학업성취도 평가 순위를 공개한다면서 초등학교까지 성적 중심으로 줄을 세우던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시민 모니터링을 실시해 그 결과를 공개하려 한다. 특목고-자사고-일반고 순서로 위계화한 고교 체제를 개편하고, 잘못된 영어 조기교육을 근절하는 일도 당면한 관심사다.

의식의 변화는 결국 생활과 관점 그리고 가치의 변화로 이어진다. 경쟁과 생존, 남과의 비교 따위 낡은 가치를 내려놓고 협력과 대화, 타인에 대한 배려 등 새로운 가치로 무장한 부모들이 등장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원했던 세상이 완전히 오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행복감을 맛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데 나는 주목한다. 이런 가치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세상도 바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이미 왔습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정리·김은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