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은 왜 ‘옛 대우빌딩’을 무대로 삼았을까
매회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는 드라마,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돌파한 만화책. <미생>의 열풍 뒤에는 ‘일이 전부인 삶’을 사는 직장인이 있었다. 선명한 갈등이 없는 스토리, 히어로도 아닌 주인공이 직장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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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호] 승인 2014.11.08 11:19:01 |
서울역 앞, 옛 대우빌딩은 서울의 첫인상이었다. 자로 잰 듯 흐트러짐 없는 간격의 창문과 육중한 외관은 쉽게 곁을 주지 않으려는 대도시의 인상을 닮아 있었다. 소설가 신경숙은 <외딴방>에서 ‘그날 새벽에 봤던 대우빌딩을 잊지 못한다. (…) 거대한 짐승으로 보이는 저만큼의 대우빌딩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엄마와 외사촌과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다’라고 묘사했다.
2014년 tvN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이 건물로 출근한다. 삼켜질 것 같은 압도적 위엄의 적갈색 건물에 뚜벅뚜벅, 무표정하게 들어간다. 극중에서는 ‘원인터내셔널’이란 이름의 대기업 건물이다. 26년간 바둑만 붙들고 살았지만 프로 바둑기사 입문에 실패한 장그래는 ‘낙하산’ 인턴으로 들어가 계약직 사원이 된다. 고졸 출신인 그는 정사원을 목표로 영업3팀의 오 과장, 김 대리와 일하며 성장해 나간다. 드라마는 누적 조회수 10억 건을 올린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드라마 <미생>은 1회 시청률 1.6%에서 출발해 3회 만에 3%를 넘겼다(닐슨코리아). 4회 시청률은 3.6%로 매회 자체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9권짜리 책으로 완간된 <미생>은 10월26일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돌파했다. 연재가 끝난 지 1년. 웹툰에는 여전히 댓글이 달린다. 출판사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미생 라디오’는 새로운 회차가 나올 때마다 예술 분야 1위에 오른다.
드라마 <미생> 등장인물은 외모도 원작의 주인공을 빼닮았다. 위부터 장그래(임시완), 오상식(이성민), 김동식(김대명), 안영이(강소라). |
드라마 방영 이후 <미생>은 모든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예스24’에 따르면 <미생> 구매자 중 30대가 49.5%로 거의 절반이고 그중에서도 30대 남성의 비중이 28.4%로 가장 높다. 출판사 측은 “만화로서는 희귀한 사례다. 만화를 전혀 보지 않는 독자층이 열광했다. 웹툰으로 따지면 중고생이 가장 많이 보고 20대가 다음이고 출퇴근 직장인이 그 다음 순서다. <미생>은 출퇴근 직장인이 제일 많이 봤다. 배경이 상사다 보니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100만 부라는 폭발력은 주 수요층이 책 사는 데 주저함이 없는 30대 직장인이라는 점 때문인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드라마는 20대 여성 시청률이 4.2%로 가장 높았고, 40대 여성(4.0%), 30대 여성(3.6%) 순서로 집계됐다(시청률 조사 회사 TNms).
< 미생>은 대기업 ‘상사맨’들의 일상을 살핀다. 이전까지 보기 힘든 소재였다. <미생>을 연구한 김수환 한국외대 교수(러시아학과)는 논문 ‘웹툰 <미생>이 말하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들’에서 이제까지 본격적으로 조명된 적 없는 특정 부류의 삶을 전면적으로 무대화했다는 점을 <미생>의 새로움으로 꼽았다. ‘노동하는 인간, 그중에서도 대기업 종합상사 회사원의 삶’이다. 극중 배경에 불과하던 화이트칼라의 사무실이 샐러리맨의 전투장으로 변했다. 윤태호 작가는 연재 초반 언론 인터뷰에서 ‘인재 몇 명이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싫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서울에 이렇게 많은 빌딩이 왜 필요하고, 많은 창문과 책상은 왜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대기업 회사원을 다루지만 공감하는 이들은 직장인 전반이다. 작품 속 오 차장(드라마 속 오 과장)의 ‘붉게 충혈된 눈’이 상징하는 것처럼 ‘일이 전부인 삶’을 사는 오늘날의 샐러리맨이 <미생>에 응답했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9권으로 완간된 <미생>은 10월26일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돌파했다. |
‘나는 왜 일에 의미를 부여했을까’라는 질문
웹툰 속 오 차장은 말한다. ‘나는 왜 일에 의미를 부여했을까. 일일 뿐인데.’ 김수환 교수는 일에 너무 진지하게 임해 조직 내에서 곤경에 처한 그의 이 대사가 만화의 핵심 질문이라고 설명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과연 제대로 살 수 있는지 만화는 묻는다. ‘삶의 거의 전부를 잠식하고 있는 노동의 일상 안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길 원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고 그 반응이 <미생> 열풍으로 이어진 셈이다.
< 미생>에는 현실과 판타지가 적절히 섞여 있다. 최유연 편집장은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만 했더라면 피로가 커서 사람들이 외면했을 거다. 영업3팀은 판타지 같은 공간이다. 장그래 같은 팀원도, 오 과장 같은 상사도 현실에는 거의 없다. 현실을 조명하는 것 같지만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약직 신분을 벗어나기 어려운 장그래. 이
ⓒ시사IN 신선영 |
김낙호 만화연구가는 <미생>에 대해 ‘공감의 힘은 디테일’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인턴끼리의 긴장되는 프레젠테이션 경쟁, 사람 좋은 게 결코 득이 되지 못하는 현실 등 디테일의 힘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의미다. 윤태호 작가는 연재 전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조직 생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을 부려보고 상사에게 핍박받아본 경험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취재만 3년이 걸렸다. 무지에 대한 공포가 치밀한 취재를 낳았고 디테일한 장치로 이어졌다.
드라마 <미생>의 미덕은 웹툰 <미생>을 그대로 구현한다는 점에 있다. 등장인물의 외모부터 빼닮았다. 제작발표회에서 김원석 <미생> 감독은 “시청자들이 원작과 똑같다고 느끼면 성공한 거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대로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드라마에서는 직장 생활을 바둑의 세계와 비유하는 내용이 덜 들어가고 코미디 요소를 강화했다. 기획 단계부터 함께한 이재문 PD는 <미생>을 드라마로 만들자는 김원석 감독의 제안에 처음에는 반대했다. “만화를 재밌게 봤지만 드라마화하면 웹툰의 좋은 가치가 파괴될 거라고 생각했다.” KBS 출신인 김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케이블 드라마를 만들면서 기존 관습을 깨고 싶었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찾았다. <미생>은 그에 손색이 없었다. 문제는 원작이 일화 중심이라는 점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좋지만 선명한 갈등이 없었다. 주인공이 의지가 없다. 히어로가 되는 이야기도 아니고. 시청자를 어떻게 납득시킬지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원작의 힘을 믿고 갔다.”
대신 캐릭터에 공을 들였다. 각각의 인물이 사랑받을 만한 캐릭터가 되어야만 에피소드가 분절되더라도 감정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은 그럴 때 러브라인을 장치로 쓴다. 윤태호 감독도 밝혔지만 지상파 PD들은 대체로 이 러브라인을 포기하지 못했다. 원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다. 김 감독은 예외였다. 대신 일하면서 켜켜이 쌓인, 묵은 감정을 가져가기로 했다. 가령 오 과장이 최 전무에게 90도로 인사하는 게 왜 그토록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는지 뒤로 갈수록 풀리는 식이다.
아이돌 출신 배우 임시완은 <미생> 팬들의 우려를 깨고 과하지 않은 열정과 근성을 가진 무표정한 장그래 역을 잘 소화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다른 축인 오 과장 역의 이성민도 코믹함과 진지함의 반전을 담아 드라마적 재미를 만들고 있다. 그는 장그래에게 내내 퉁명스러우면서도 결정적일 때 도움을 준다. “버틴다는 것은 ‘완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그의 대사는 작품을 응축한다. 미생(未生)은 바둑 용어로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다. 완생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요즘 현장에서 배우들은 고무되어 있다. 이 PD는 “배우 이성민씨와도 얘기했는데, 다들 각박한 처지에서 나보다 더 못난 것 같은 불쌍한 장그래가 그래도 버텨줬으면, 끝내 웃었으면 하는 마음들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드라마 제작진은 <현시창> <피로사회> 같은 한국 사회를 다룬 책을 많이 읽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사치라는 얘기를 접하며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 세대의 현실을 어설프게 다루면 모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르치려는 태도는 버렸지만 현학적인 부분은 가지고 간다. 원작이 하고 싶은 질문을 드라마도 한다.
오늘도 그들은 각자의 바둑을 두고 있다
웹툰은 각자의 스크롤 속도가 다르다. 맘에 들지 않으면 읽다 포기해도 그만이다. 드라마의 시간은 절대적이다. 동일한 반응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다. 제작진은 말한다. “만화 <미생>에 비해 받아들이기 편하게 되어 있다. 만화가 너무 현학적이거나 부담스러운 분은 드라마가 편할 거다. 그리고 작년 가을과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이 또 다르다. 큰 사건도 겪었고 감정적 울림이 훨씬 크다. 장그래를 너무 슬프게 다룬 거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는데 영상이 좀 더 공격적으로 사람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20회로 끝난다. 웹툰 <미생>은 내년에 시즌2를 연재할 계획이다.
지금은 서울스퀘어로 이름이 바뀐 옛 대우빌딩 13층에서 드라마 <미생> 촬영이 진행 중이다. 따로 세트가 있지만 옥상 신 등 외부 촬영은 이곳에서 진행된다. 이 건물을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재문 PD는 “외환위기 이전 대우그룹의 본산이었고 상사의 전성기를 몸으로 겪어낸 건물이다. 한국 경제의 상징 같은 건물인데 해외 자본으로 넘어갔다. 서울역 앞에서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지만 외로워 보인다. 직사각형으로 정직하게 지은 건물인데 안쓰러움이 느껴질 때도 있다. 거대한 성 같다.” 서울시내 풍경이 이어지는 동선도 고려했다. 적갈색의 성, 불 밝힌 창문 너머, 오늘도 장그래·오 과장·김 대리가 각자의 바둑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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