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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은 왜 ‘옛 대우빌딩’을 무대로 삼았을까 - <미생>이 보여주지 않은 또 다른 '미생' 이야기

일취월장7 2014. 11. 29. 17:36

 

미생은 왜 ‘옛 대우빌딩’을 무대로 삼았을까

매회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는 드라마,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돌파한 만화책. <미생>의 열풍 뒤에는 ‘일이 전부인 삶’을 사는 직장인이 있었다. 선명한 갈등이 없는 스토리, 히어로도 아닌 주인공이 직장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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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호] 승인 2014.11.08  11:19:01

서울역 앞, 옛 대우빌딩은 서울의 첫인상이었다. 자로 잰 듯 흐트러짐 없는 간격의 창문과 육중한 외관은 쉽게 곁을 주지 않으려는 대도시의 인상을 닮아 있었다. 소설가 신경숙은 <외딴방>에서 ‘그날 새벽에 봤던 대우빌딩을 잊지 못한다. (…) 거대한 짐승으로 보이는 저만큼의 대우빌딩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엄마와 외사촌과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다’라고 묘사했다.

2014년 tvN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이 건물로 출근한다. 삼켜질 것 같은 압도적 위엄의 적갈색 건물에 뚜벅뚜벅, 무표정하게 들어간다. 극중에서는 ‘원인터내셔널’이란 이름의 대기업 건물이다. 26년간 바둑만 붙들고 살았지만 프로 바둑기사 입문에 실패한 장그래는 ‘낙하산’ 인턴으로 들어가 계약직 사원이 된다. 고졸 출신인 그는 정사원을 목표로 영업3팀의 오 과장, 김 대리와 일하며 성장해 나간다. 드라마는 누적 조회수 10억 건을 올린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드라마 <미생>은 1회 시청률 1.6%에서 출발해 3회 만에 3%를 넘겼다(닐슨코리아). 4회 시청률은 3.6%로 매회 자체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9권짜리 책으로 완간된 <미생>은 10월26일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돌파했다. 연재가 끝난 지 1년. 웹툰에는 여전히 댓글이 달린다. 출판사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미생 라디오’는 새로운 회차가 나올 때마다 예술 분야 1위에 오른다.

   
 
   
 
   
 
  드라마 <미생> 등장인물은 외모도 원작의 주인공을 빼닮았다. 위부터 장그래(임시완), 오상식(이성민), 김동식(김대명), 안영이(강소라).  
드라마 <미생> 등장인물은 외모도 원작의 주인공을 빼닮았다. 위부터 장그래(임시완), 오상식(이성민), 김동식(김대명), 안영이(강소라).
웹툰 <미생>의 댓글 게시판은 과거 트위터의 ‘출판사 옆 대나무숲’ 계정을 연상케 한다. 좀 더 범위가 큰 ‘직장 옆 대나무숲’이다. 야근을 당연시하는 상사 때문에 속 끓는 부하 직원, 한 달 넘는 연속 근무로 병원에 못 가서 병을 키우는 회사원, 장그래 같은 열정이 없어서 고민인 신입사원, 직장 내 왕따 사연 등 직장인의 토로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회사 화장실에서 웹툰을 보다가 눈물을 흘렸다는 사연도 있다. <미생>의 열풍 뒤에는 이들, 직장인이 있다.

드라마 방영 이후 <미생>은 모든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예스24’에 따르면 <미생> 구매자 중 30대가 49.5%로 거의 절반이고 그중에서도 30대 남성의 비중이 28.4%로 가장 높다. 출판사 측은 “만화로서는 희귀한 사례다. 만화를 전혀 보지 않는 독자층이 열광했다. 웹툰으로 따지면 중고생이 가장 많이 보고 20대가 다음이고 출퇴근 직장인이 그 다음 순서다. <미생>은 출퇴근 직장인이 제일 많이 봤다. 배경이 상사다 보니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100만 부라는 폭발력은 주 수요층이 책 사는 데 주저함이 없는 30대 직장인이라는 점 때문인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드라마는 20대 여성 시청률이 4.2%로 가장 높았고, 40대 여성(4.0%), 30대 여성(3.6%) 순서로 집계됐다(시청률 조사 회사 TNms).

< 미생>은 대기업 ‘상사맨’들의 일상을 살핀다. 이전까지 보기 힘든 소재였다. <미생>을 연구한 김수환 한국외대 교수(러시아학과)는 논문 ‘웹툰 <미생>이 말하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들’에서 이제까지 본격적으로 조명된 적 없는 특정 부류의 삶을 전면적으로 무대화했다는 점을 <미생>의 새로움으로 꼽았다. ‘노동하는 인간, 그중에서도 대기업 종합상사 회사원의 삶’이다. 극중 배경에 불과하던 화이트칼라의 사무실이 샐러리맨의 전투장으로 변했다. 윤태호 작가는 연재 초반 언론 인터뷰에서 ‘인재 몇 명이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싫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서울에 이렇게 많은 빌딩이 왜 필요하고, 많은 창문과 책상은 왜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대기업 회사원을 다루지만 공감하는 이들은 직장인 전반이다. 작품 속 오 차장(드라마 속 오 과장)의 ‘붉게 충혈된 눈’이 상징하는 것처럼 ‘일이 전부인 삶’을 사는 오늘날의 샐러리맨이 <미생>에 응답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위즈덤하우스 제공</font></div>9권으로 완간된 <미생>은 10월26일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돌파했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9권으로 완간된 <미생>은 10월26일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돌파했다.
최유연 위즈덤하우스 편집장은 “직장인들의 경우 자신의 하루를 소중하게 조명한다는 고마움이나 기쁨이 컸던 것 같다. 하루하루 쳇바퀴 돌듯 돈 벌기 위해 회사를 다니지만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워했다”라고 말했다. 모처럼 복사 심부름을 맡았는데 하필 A4 용지가 떨어져 우왕좌왕하는 신입 직원 장그래부터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하루하루 지쳐가는 선 차장, 알 수 없는 내공을 지닌 부장과 전무 등 2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아우른다.

‘나는 왜 일에 의미를 부여했을까’라는 질문


웹툰 속 오 차장은 말한다. ‘나는 왜 일에 의미를 부여했을까. 일일 뿐인데.’ 김수환 교수는 일에 너무 진지하게 임해 조직 내에서 곤경에 처한 그의 이 대사가 만화의 핵심 질문이라고 설명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과연 제대로 살 수 있는지 만화는 묻는다. ‘삶의 거의 전부를 잠식하고 있는 노동의 일상 안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길 원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고 그 반응이 <미생> 열풍으로 이어진 셈이다.

< 미생>에는 현실과 판타지가 적절히 섞여 있다. 최유연 편집장은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만 했더라면 피로가 커서 사람들이 외면했을 거다. 영업3팀은 판타지 같은 공간이다. 장그래 같은 팀원도, 오 과장 같은 상사도 현실에는 거의 없다. 현실을 조명하는 것 같지만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약직 신분을 벗어나기 어려운 장그래. 이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  
ⓒ시사IN 신선영
건 현실이다. 고졸 출신의 대기업 상사맨과 품성과 능력 면에서 거의 완벽한 상사. 이건 판타지다. 이 판타지 덕분에 <미생>은 노동 중독 사회의 현실을 미화한다는 지적도 받았다.

김낙호 만화연구가는 <미생>에 대해 ‘공감의 힘은 디테일’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인턴끼리의 긴장되는 프레젠테이션 경쟁, 사람 좋은 게 결코 득이 되지 못하는 현실 등 디테일의 힘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의미다. 윤태호 작가는 연재 전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조직 생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을 부려보고 상사에게 핍박받아본 경험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취재만 3년이 걸렸다. 무지에 대한 공포가 치밀한 취재를 낳았고 디테일한 장치로 이어졌다.

드라마 <미생>의 미덕은 웹툰 <미생>을 그대로 구현한다는 점에 있다. 등장인물의 외모부터 빼닮았다. 제작발표회에서 김원석 <미생> 감독은 “시청자들이 원작과 똑같다고 느끼면 성공한 거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대로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드라마에서는 직장 생활을 바둑의 세계와 비유하는 내용이 덜 들어가고 코미디 요소를 강화했다. 기획 단계부터 함께한 이재문 PD는 <미생>을 드라마로 만들자는 김원석 감독의 제안에 처음에는 반대했다. “만화를 재밌게 봤지만 드라마화하면 웹툰의 좋은 가치가 파괴될 거라고 생각했다.” KBS 출신인 김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케이블 드라마를 만들면서 기존 관습을 깨고 싶었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찾았다. <미생>은 그에 손색이 없었다. 문제는 원작이 일화 중심이라는 점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좋지만 선명한 갈등이 없었다. 주인공이 의지가 없다. 히어로가 되는 이야기도 아니고. 시청자를 어떻게 납득시킬지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원작의 힘을 믿고 갔다.”

대신 캐릭터에 공을 들였다. 각각의 인물이 사랑받을 만한 캐릭터가 되어야만 에피소드가 분절되더라도 감정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은 그럴 때 러브라인을 장치로 쓴다. 윤태호 감독도 밝혔지만 지상파 PD들은 대체로 이 러브라인을 포기하지 못했다. 원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다. 김 감독은 예외였다. 대신 일하면서 켜켜이 쌓인, 묵은 감정을 가져가기로 했다. 가령 오 과장이 최 전무에게 90도로 인사하는 게 왜 그토록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는지 뒤로 갈수록 풀리는 식이다.

아이돌 출신 배우 임시완은 <미생> 팬들의 우려를 깨고 과하지 않은 열정과 근성을 가진 무표정한 장그래 역을 잘 소화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다른 축인 오 과장 역의 이성민도 코믹함과 진지함의 반전을 담아 드라마적 재미를 만들고 있다. 그는 장그래에게 내내 퉁명스러우면서도 결정적일 때 도움을 준다. “버틴다는 것은 ‘완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그의 대사는 작품을 응축한다. 미생(未生)은 바둑 용어로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다. 완생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요즘 현장에서 배우들은 고무되어 있다. 이 PD는 “배우 이성민씨와도 얘기했는데, 다들 각박한 처지에서 나보다 더 못난 것 같은 불쌍한 장그래가 그래도 버텨줬으면, 끝내 웃었으면 하는 마음들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드라마 제작진은 <현시창> <피로사회> 같은 한국 사회를 다룬 책을 많이 읽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사치라는 얘기를 접하며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 세대의 현실을 어설프게 다루면 모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르치려는 태도는 버렸지만 현학적인 부분은 가지고 간다. 원작이 하고 싶은 질문을 드라마도 한다.

오늘도 그들은 각자의 바둑을 두고 있다

웹툰은 각자의 스크롤 속도가 다르다. 맘에 들지 않으면 읽다 포기해도 그만이다. 드라마의 시간은 절대적이다. 동일한 반응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다. 제작진은 말한다. “만화 <미생>에 비해 받아들이기 편하게 되어 있다. 만화가 너무 현학적이거나 부담스러운 분은 드라마가 편할 거다. 그리고 작년 가을과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이 또 다르다. 큰 사건도 겪었고 감정적 울림이 훨씬 크다. 장그래를 너무 슬프게 다룬 거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는데 영상이 좀 더 공격적으로 사람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20회로 끝난다. 웹툰 <미생>은 내년에 시즌2를 연재할 계획이다.

지금은 서울스퀘어로 이름이 바뀐 옛 대우빌딩 13층에서 드라마 <미생> 촬영이 진행 중이다. 따로 세트가 있지만 옥상 신 등 외부 촬영은 이곳에서 진행된다. 이 건물을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재문 PD는 “외환위기 이전 대우그룹의 본산이었고 상사의 전성기를 몸으로 겪어낸 건물이다. 한국 경제의 상징 같은 건물인데 해외 자본으로 넘어갔다. 서울역 앞에서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지만 외로워 보인다. 직사각형으로 정직하게 지은 건물인데 안쓰러움이 느껴질 때도 있다. 거대한 성 같다.” 서울시내 풍경이 이어지는 동선도 고려했다. 적갈색의 성, 불 밝힌 창문 너머, 오늘도 장그래·오 과장·김 대리가 각자의 바둑을 두고 있다.

 

 

<미생>이 보여주지 않은 또 다른 '미생' 이야기

[초록發光] 대우인터내셔널과 버마의 눈물

조보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2014.11.28 07:41:47

 

'미생'이 보여주지 않은 또 다른 '미생' 이야기

드라마 <미생>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다. 회사라는 공간 안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이야기들을 통해서 회사원의 많은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등장인물의 좌충우돌이 왠지 열심히 사는 나의 모습처럼 느껴지면서 조금은 뿌듯하고 조금은 위로받는 느낌까지 들게 된다.

이러한 인기는 드라마의 무대인 종합상사에 대한 선망을 심어주기도 하고, 더불어 직접적으로 모티프가 된 기업의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겐 오히려 그것이 드라마를 보는 중간 중간 불편함과 마주해야만 했던 이유였다. 왜냐하면 많은 기업들이 그들의 성공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불편함을 조금 덜어내기 위해 드라마 <미생>이 아닌 또 다른 '미생'의 이야기를 꺼내려한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드라마 <미생>의 무대는 대우인터내셔널이라는 현실의 종합상사와 겹친다. 그러나 이번에 드라마가 인기를 끌기 전까지 대우인터내셔널을 들어본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 몰락한 대우그룹의 흔적 중 하나로 인식하는 이들은 있을지 모르겠다.)

반면 해외,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대우인터내셔널의 이름은 꽤 알려진 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가 참여한 컨소시엄은 2000년 미얀마 서부 해역 가스 개발을 위해 미얀마석유가스회사와 계약을 채결했다. 그리고 이어진 평가정 시추에서 미얀마 해상 쉐(Shew) 지역에서 가스층을 발견했다.

쉐 가스전은 한국 기업이 외국에서 발견한 가스전 중에 가장 큰 규모로 해외 에너지 자원 개발의 성공 사례로 손꼽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부터 미얀마 지역 공동체와 주민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 시작 되었다.

당시 미얀마는 군부 독재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고, 쉐 가스 개발 사업은 미얀마 정부의 지원 없이는 성공이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결국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는 자국민을 억압하는 독재 정권과 손을 잡게 되었고, 군부가 자행한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침묵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가스전 사업에는 많은 군인이 동원되었다. 해상 가스전 주변 어민들의 어업을 중단시키고, 중국으로 향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 위해 주민을 내 쫒았다. 지역 주민의 토지와 가축을 약탈하고 강간과 강제 노동, 폭행 등의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전해졌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성공적인 해외 자원 개발은 미얀마의 '군사화'를 심화 시켰고, 버마인들은 희생을 강요당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대우인터내셔널이 정부의 허가 없이 미얀마에 1600억 원대 포탄 제조 설비와 전략 물자 등을 수출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군부의 무기상으로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처벌은 매우 가벼웠다. 드라마에서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선임이 나서 팀원의 비리를 밝혔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비리와 악습이 무역과 자원 개발 영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지만 현실에서 드라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미얀마 가스전 사업은 정부의 '해외 자원 개발 성공 불융자'를 활용한 대표적 사례라는 것이다. 성공 불융자란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되 성공할 경우 원리금과 특별 부담금을 징수하고 실패하면 원리금 일부 또는 전부를 탕감해주는 제도다. 결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민간 기업의 국제 도박의 노잣돈을 챙겨준 샘이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을 조장하고 방조한 정부와 기업은 미얀마에서 자행된,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비극의 결과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관련 기사 : "버마의 비극, 대우인터내셔널·가스공사 책임 크다")

ⓒch.interest.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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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유사한 사례들이 많다. 제철기업 포스코는 (현실의 대우인터내셔널은 2010년부터 포스코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다.) 인도 오디샤(Odisha) 주에 일관제철소를 건설 중이다. 포스코는 8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는 부지 약 1123만9669제곱미터(약 340만 평)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강제 이주, 토지 몰수 등이 인도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민간 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1년 아름다운 섬으로 신혼부부의 발길을 잡는 필리핀 세부에서 한국전력이 200메가와트 대형 화력 발전소를 건설했다. 지역 주민은 이 사업이 실제 필요한 사업이 아니라 한국 기업과 필리핀 정부가 결탁하여 진행된 사업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은 기존의 화력발전소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추가적인 화력 발전소 건설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한국전력은 지역 주민이 요구한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고, 환경 문제, 주민 보상 문제 등의 책임을 도외시 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대부분의 저개발 국가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경제 성장이 시급한 국가들은 외국 기업의 투자를 간절히 원한다. 그리고 그들 역시 한국 정부나 한국 기업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그들이 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돕는다. 그런데 아직 사회, 경제, 정치적인 시스템이 안정기에 도달하지 못한 저개발 국가의 경우 돕는다는 목적으로 권력을 이용하여 민중의 땅을 빼앗고, 강제 이주와 노동을 시키고 폭압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죽이는 인권 유린의 형태로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한국 기업들도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지만 그것은 그들의 일, 혹은 그 나라의 일로 치부해 버린다. 더 이상 산업혁명 이전의 식민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 21세기 자본을 통한 식민 통치는 계속 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당연한 행태쯤으로 넘겨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민간 기업을 감시하고 이들을 강제하기 위한 강력한 기구를 만들어야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다른 접근을 해보자.

얼마 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한 매체가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공공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국가 중 꼴찌를 기록했다. 이들은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에 한국인들의 가치관을 이유로 꼽았다. 한국은 '경쟁', '성공'이 가장 중요한다고 생각한 반면, 공공성이 높은 국가들에게서 나온 '관용', '연대', '평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은 모두가 각자의 경쟁을 통해 성공해야한다고 믿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가 아니면 경쟁 대상이고 내가 아니면 성공의 걸림돌이 되는 세상이다. 이러한 가치관 속에서 한국 정부, 한국 기업이 자국의 발전과 기업의 이윤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당연시 된 것은 아닌가 고민해 본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길을 생각하게 된다. 평등과 관용을 중심으로 한 연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밀양 할머니들의 손을 잡았듯, 농민과 노동자, 노동자와 환경, 환경과 여성으로 이어지는 연대는 씨실과 날실이 되어 사회를 변혁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대가 동아시아로 아시아 전역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제 미생들의 공생을 위한 사회 전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