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멘토

'노무현·제정구의 꿈' 민주당 김부겸 전 의원

일취월장7 2014. 1. 24. 16:05

"박근혜 이기려면 이빨 단단히 깨물어야"

[열린 인터뷰] '노무현·제정구의 꿈' 민주당 김부겸 전 의원

기자- 윤태곤, 기자- 이명선, 기자- 박세열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7.17 10:14:00

'서울대에서 가장 연설 잘하는 운동권'부터 시작해 35년간 한국 정치사를 관통해 온 인물이 있다. 김부겸이다. '천생 야당'이던 그는 85년 이철 전 의원 선거운동에 뛰어든 후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92년 3당 합당에 반대해 YS와 결별한 후 노무현, 제정구와 함께 '꼬마 민주당'을 꾸렸다. 언제 시련이 없었냐만은 '3당 합당'이라는 한국 정당 역사상 초유의 '야합'은 은 그의 정치 인생에 있어 시련기의 시작이었다.

95년 DJ가 은퇴 선언을 번복한 후 돌아와 지방선거 승리에 도취된 야당의 틈을 파고들었을 때, 그는 제정구, 노무현과 함께 DJ의 반대 편에 서야 했다. 그러나 결국 노무현은 야권 후보인 김대중에게 갔고, 제정구와 함께 김부겸은 YS와 결별한 여권 후보 이회창에게 갔다. 김부겸의 표현대로라면 "한국 정치 인물들 중 '엑기스'(정수)"들이 갈림길에 선 계기였다. 2000년 총선에서 유선호 전 의원을 꺾고 군포에서 당선된 그는 한나라당의 '왼쪽 날개'를 맡아 활동했지만, DJ의 대북 송금 특검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고립되자 탈당하고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노무현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른바 2002년 '독수리 5형제' 사건이었다.

김 의원은 군포에서 내리 3선을 했다. 열린우리당, 민주당 의원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혹독한 야당 생활'을 동료들과 함께 감내했지만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 그가 "대구에서 야당 이름으로 당선되겠다", "지역주의의 벽을 깨겠다"며 지난 4.11총선에 대구에 내려갔다. '한나라당 출신'인 그가 민주당의 아픈 곳을 건드리며 경종을 울렸다. 40.42%. '대구의 강남'이라는 수성구에서 새누리당 실세 이한구 원내대표를 상대로 거둔 성적이다. 비록 떨어졌지만 새누리당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이었다.

매주 월요일, 마포구 합정동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열리는 '월요살롱'의 첫 '열린 인터뷰' 주인공으로 김부겸 전 의원이 지난 9일 <프레시안> 독자들을 만났다. 그는 특유의 입담으로 자신의 정치 인생과 민주당의 미래에 대해 거침없이 얘기했다.

다음은 김부겸 전 의원의 '열린 인터뷰' 전문이다.

▲ 김부겸 전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김부겸 의원에 대한 설명을 잠깐 해보자. 58년 1월 경북 상주 생이고, 경북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흔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TK 사람(대구경북 사람)이라고 불린다. 16대, 17대, 18대 국회의원이었고 경기 군포에서 내리 3선을 한 뒤에 지난 4.11총선 때 대구로 내려갔다.

김부겸 : 저는 여의도의 패거리 짓는 정치에 익숙한 캐릭터가 아니다. 항상 조금 늦다. 제 생김새대로 굼뜨다.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시를 다 치룬 마지막 세대인데, 중학교 재수, 고등학교 재수를 했다. 그래서 '사람이 때가 되면 되겠지' 하는 낙관적이고 미련한 게 몸에 뱄다. 누구와 각을 세워 '맞짱'을 뜨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열린 인터뷰 주제가 '노무현 제정구의 꿈'이라고 얘기했는데, 사실 저는 정치를 시작할 때 꿈이 있었다. 출세하고 권력을 잡고 하는 정치도 정치지만, 처음에 던졌던, 작은 약속일지 몰라도 그 약속을 지키는 데 인생의 승부를 걸고싶었다. 그것을 정치의 장에서 해보고 싶다는 그런 고집스러운 게 있었다.

프레시안 : 58년생이다. 70년대 후반 학번이다. 486세대보다 조금 윗 세대이고, 민청학련 세대보다 아래 세대인 '낀 세대'일 수 있다. 유시민, 심상정과 비슷하게 대학을 다녔다.

김부겸 : 여기에서 변명을 드리자면, 제가 58년생은 아니고, 아버님이 조혼해서 고등학교 때 결혼하셔서, 고등학교 때 저를 낳았다. 제가 56년생들과 같은 또래다. 학교는 55년생들과 같이 다녔다.

"가만히 있었는데 한나라당 됐다가, 대북 특검 반대하고 뛰쳐 나왔다"

프레시안 : 요즘은 어린 게 유리하다. (웃음)

김부겸 : 그런가? 진작에 얘기하지. 제가 학교 다닐 때, 긴급조치 1호, 2호, 3호, 4호라는 게 나왔고, 인혁당 사건도 있었다. 사회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월남전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체제에 대한 비판이나 도전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운동권'이라는 게 딱히 없었다. 선배들이 후배들 몇 명을 보고 그럴듯한 친구들 데려다가 기독교 선교하듯 꼬인 것이다. 막걸리 사준다고 따라갔다가 운동권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는 변혁 운동을 공부한 세대는 아니다. 당시 읽을만한 책이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가 있었는데, 그 한 권만 읽어도 우리는 충격을 받았던, 그런 세대다. 그런 그룹들이 2학년 쯤 돼 이른바 의무감을 갖게 된다. 3학년 쯤 되면 투사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80년을 맞게 됐다.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위해 자기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일이 벌어졌다. 80년대를 지나오면서도 변혁 운동을 공부하지 않았으나 우리의 동지적 연대가 깨진 적이 없다. 어느 순간 운동권을 권력화된 것처럼 얘기할 때 들으면 속으로 좀 분하다.

프레시안 : 486이 조금 더 과학적, 전략적이라고 한다면 그 전 세대는 낭만적인 소명 의식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김 전 의원은 운동권을 벗어나 현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고 변하게 된 계기가 어떤 게 있었나?

김부겸 : 사실 당시 운동권이 정치 기웃거리는 것은 나쁜 놈이라고 했다. 당시 야당 국회의원들이 더러 보좌관이나 비서관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면 '야 임마 너 인생 버리려고 하느냐' 고 말렸다. 변혁 운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반독재 운동을 하던 중, 85년 2.12총선이 있었다. 당시 이철 선배가 성북구에 나갔다. 선거를 도와달라고 해서 갔다. 과거 전두환 정부를 비판하는 '찌라시'를 뿌릴 때는 잡혀갈 각오를 해야 했는데, 선거 유인물에 후보 소개 조금 하고 전두환 비판을 잔뜩 써서 뿌리니까 경찰이 잡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것 뿌린다고 길거리에서 박수를 치지 않나. 거기에서 내 눈이 뒤집어졌다. 아, 이런 공간이 있구나.

그 때부터 저도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청문회 스타 노무현이 어떻게 탄생했나. 88년 총선 때 집권 민자당이 135석 밖에 안됐다. 야당 세 당이 합치니, 야당의 힘이 세졌다. 야당이 연합해서 국회의장, 부의장, 상임위원장을 다 가져가려고 하니까 당시 여당이 깜짝 놀랐다. 그래서 야당이 그 부분을 양보하고 받아낸 게 5공 청문회다. 거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민의 울분을 대신 쏟아내니까 국민들이 노무현을 알게 됐다. 정치라는 게 이런 것이더라.

▲ "80년대를 지나오면서도 변혁 운동을 공부하지 않았으나 우리의 동지적 연대가 깨진 적이 없다. 어느 순간 운동권을 권력화된 것처럼 얘기할 때 들으면 속으로 좀 분하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한나라당에 어떻게 가게 됐나?

김부겸 : 3당 합당이 있고, 이른바 '꼬마 민주당'이 생겼다. 노무현, 제정구, 저 등이 3당 합당에 반대해 이기택 씨를 대표로 내세우고 따로 떨어져 나왔다.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다 95년 선거에서 야당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겼다. 조순 시장이 서울시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은퇴한 뒤 다시 돌아온 김대중 총재가 그 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든다. 그게 저에게 있어 인생의 가장 굴곡진 상황이었다. 그 때 김대중을 안 따라간 사람들, 노무현, 김원기, 제정구, 이부영 등이 있었다.

김대중 총재가 제정구 의원을 불러 '어이, 제 동지. 당을 깨고 같이 가자. 정치는 내가 잘 알어. 내 판단을 따라줘' 했지만 제 선생이 '국회의원 한번 했으면 됐다'면서 '마, 이제 됐심다. 사랑은 깨지고 역사는 끝났는데'라면서 거절했다. 이후 제 선생 등은 조순 서울시장을 모셔왔고, DJ는 DJP 연합을 했다. 그리고 YS와 결별한 신한국당 이회창과 조순의 민주당이 합당을 한다. 그래서 만든 게 한나라당이다. 제 의원과 이부영 전 의장, 저는 한나라당으로 가고, 노무현, 김정길 등은 김대중 총재와 결합을 했다. 가끔 한나라당 출신이라고 욕을 얻어먹지만, 나는 가만히 있는데 한나라당이 됐다. (웃음) 당시 DJP 연대라는 게 JP의 보수적 이미지가 있었고, 그래서 사실 정치 하는 사람들, 지식인들 상당수가 '야합이 아니냐'고 하는 차에 이회창 씨에 대한 기대도 있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프레시안 : 이후에 열린우리당 시절, 한나라당에서 5명이 '독수리 오형제'로 탈당해 왔고, 여당 의원이 됐다.

김부겸 : 잘 알다시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소수파 리더였다. 대통령이 됐는데, 이 사람 가슴 한 편에는 '어떻게 하든 영남 민주 세력을 복원하고 경쟁 있는 정치 구도를 만들겠다'는 꿈이 포기된 적이 없다. 호남의 헤게모니가 압도적으로 관철되고, 호남의 지역 맹주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 옛날의 새정치국민회의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대통령 후보 되고 몇 달 동안 '생고생'을 했다. 당 대표가 돈을 안 줘 전국을 거렁뱅이처럼 돌아다녔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여당을 재구성하려고 했다. 당을 깨느니 마느니 해서 몇 달을 끌고 있었다. 그 때 대북송금 특검 문제가 터졌고 한나라당이 특검법을 통과시켰다.

생각해보라. 당시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의 위험이 없다고 하는 단계까지 왔다. 김 전 대통령은 민족사에 있어서 하나의 숙제를 해결한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 더러운 거래는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방방 뛰었다.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특검법안을 상정했지만 나는 아니라고 봤다. 본회의장에서 반대를 눌렀는데, 웅성웅성해서 보니까, 저만 빨간불이고, 나머지는 찬성표, 기권표다. 뒤에서 '어이 김부겸 의원 정신 차려'라는 목소리가 들리더라. 대북송금특검법에 대해 유일하게 제가 반대했다. 이것을 정확히 알고 나중에 격려해준 분은 김대중 선생님 밖에 없더라. 그 이후에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나라당 의원이 다음날 찾아와서 한다는 얘기가 '김 의원, 어제 평양에서 전화 받았지? 김정일한테 수고했다고 전화 안 왔더나'라는 것이었다. 그 후 사사건건 왕따를 시켰다. 당 모습은 변화하지 않고, 사사건건 노무현 전 대통령 발목을 잡으니까 결국 탈당을 했다. 원래는 원희룡 전 의원을 포함해 11명이 탈당을 하자고 뛰고 있었는데, 마지막 결심을 하려고 하니까 5명이 나오더라.

프레시안 : 축구팀이 될 뻔했는데 농구팀이 됐다.

"대구 사람도 대한민국 국민…대구 사람 눈높이 고려해야"

▲ "대선 때 노무현-이회창 대결에서 40~50만 표 차이가 났다. 대선에서 대구는 중요하다. 대구에서 야권 지지율 5%, 거저줍는 게 아니다. 대구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대구의 미래를 고민하게 해줘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대구 이야기를 좀 해보자. 김 전 의원 말 중에 '제정구 전 의원이 초선 했으면 됐지, 한번 더 하면 뭐하나' 하는 얘기를 했다고 했는데, 김부겸 전 의원도 대구에 출마할 당시 인터뷰에서 '3선 했으면 됐지, 4선 하면 뭐 있나'라고 얘기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대구에 가서 취재를 해보니 동네 분위기 상당히 좋긴 한데, 문제는 '김부겸, 사람도 좋고 참 당선됐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나는 아니고 남들이 많이 찍어줘야지'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딸 윤세인 씨도 인상적이었다. '대구에서 국민 장인이 됐다'는 얘기도 나오더라. 대구 얘기 좀 해달라.

김부겸 : 사람들이 너무 많이 격려를 해 줬다. 제가 내려갈 때, '한 세 번 해먹었으니 쉴 때도 됐고, 충전할 때도 됐다'는 생각도 들긴 하더라. 조금은 의무감 비슷한 것도 있었다. 대구 경북 정치인들이 '임명직 국회의원'이라는 말도 듣는데, 열린우리당 시절에는 꽤나 괜찮은 후보들이 있었다. 단순히 탄핵 바람 때문이 아니라 '물이 고이면 썩는다'는 게 소리들이 많아 민심이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동네에는 이른바 '스펙'이 되는 사람들이 노크를 안 하더라'고 한다. 이대로 가면 큰일 나겠다 싶었다. 제가 내려가기로 했다. 보좌관들 밥 빌어먹을 것 눈에 뻔한데 (저 따라서) 가고 싶겠어요? 그런데, '가자. 이렇게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스스로도 국회의원 한 12년 하니까 머리가 백짓장처럼 깨끗해지더라.

내려가서 보좌진들과 함께 여론조사를 했다. 그러니 '변화'라는 컨셉이 나왔다. 다만 '체제를 바꾼다'는 데는 부정적이더라. 그래서 '기분 좋은 변화'라는 컨셉이 나왔다. 폼 나지는 않지만 '기분 좋은 변화' 얘기가 되더라. 선거할 때 상대편이 얼마나 웃기는가 하면, 처음에는 '김부겸, 전라도 출신이 여기 왜 왔는가' 이렇게 소문을 내더라. 그 오해가 풀리니, '저 사람은 멀쩡한데 민주당은 와 있는고'라는 말이 나왔다.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렇게 하니까, 나중에는 적어도 적대감은 보이지 않더라. 딸 얘기를 하면, 딸과 집사람을 여성들 많이 가는 곳에 집중 배치했다. 마침 아이가 드라마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가난한 엄마의 효녀 딸 역할을 했다. 그게 대구 여성분들에게 딱 콘셉이 맞는 것이다.(웃음) 나는 농담이 아니고, 내 기대보다 3% 정도 덜 얻었다. 변화의 계기를 만들었는데, 아쉽기는, 이한구 씨가 간담이 좀 서늘하게 만들려면 제가 조금 더 따라붙어야 했다.

프레시안 : '지역주의 혁파'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김부겸 의원이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하면서 한 말 중에 기억이 나는 게 '보편성을 얻는 게 내 정치다'라는 말이었다. 지역주의를 깨야한다고 하기보다 '대한민국의 보편성이 깨진 것'을 회복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김부겸 :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대구 사람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상대적으로 수도권에 비해 대구는 척박하다. 다 못살고 북적대기는 마찬가지다. 수도권에 비해서 피폐됐다고 하면 '조금 어려운갑다'고 생각하죠. 대구가 그렇다보니 문화적, 여러 자각으로부터 점점 뒤쳐져 간다. 그러면 인간의 상상력에 있어서 고갈을 가져온다. 외고집만 남는 것이다. 문형열이라고 제 친구 중에 시인이 있다. 이 친구 얘기는 과거 대구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20년 전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대구를 기반으로 창작 활동을 했다. 이상화, 현진건, 현제명이 있었다. 대구가 그런 곳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점차 피폐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가난한 상태로 돼 가고 있더라. 그래서 '이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해 호소를 했다. 대구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대학 졸업하고 취직할 자리가 없다. 겨우 경제가 유지될 뿐이다.

박근혜 의원 욕한다고 그 사람들이 '박근혜 미워 죽겠어' 이렇게 하겠나. 아니다. 다만 '대구가 광주 때문에 못 살게 됐느냐', '산업 시설이 대구에 안 온 이유가 김대중 정부 때문이냐', '당신들이 기대하는 혁신도시, 그나마 노무현이 했다'고 호소했다. 구체적인 자신들의 이익과 현실에 대해 설득해 들어가야 한다. 대선 때 노무현-이회창 대결에서 40~50만 표 차이가 났다. 대선에서 대구는 중요하다. 대구에서 야권 지지율 5%, 거저줍는 게 아니다. 대구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대구의 미래를 고민하게 해줘야 한다.

"민주당, 말 뒤집지 말고, 솔직해지면 민심 얻는다"

프레시안 : 민주통합당이 출범한 지가 6개월이 됐다. 출범 직후만 해도 '정권 다 찾아왔다'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꾸로다. 문제가 뭘까?

김부겸 : 저는 민주통합당이나 범진보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겸손해져야 국민들이 기회를 준다고 본다. 제가 선거에 나섰을 때, 민주당에 대한 반감은 '민주당은 호남당'이라는 편견 때문만은 아니더라. 결국 민주당에 대한 그들의 불신이 문제였다. 먼저, '민주당 사람들은 말을 자주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다. 두 번째, '싸가지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다. 세 번째, '자기 이익이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더라. 상당 부분 편견이지만, 상당 부분 사실이다. 앞으로는 정말 신중해져야 한다. 발언 하나 하나, 신중하고 믿음 가게 해야 한다. 우리라고 별난 사람 아니지 않나.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극단적인 불신을 깨야 한다.

우리 당은 선거를 사실 공학적으로 봤다. 그런 사고가 굳어져 버렸다. 이명박 씨 때문에 민주당이 1당 된다고 까불었을 때, '박근혜가 되도 새로운 권력 교체'라고 만든 이 분위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우리는 책임이 없나? 또 하나, 소위 운동권 출신 지식인들은 야권 연대만 하면 다 이길 것처럼 이야기했다. 우리 국민이 그렇게 단순한가? 최고위원이 돼 지도부에 들어가보니 한다는 말이 '우리가 일당이 되면 이런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승리하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더라. 내가 질렀다. 'OOO 최고위원, 우리가 1당 된답니까? OOO최고위원, 국민들이 1당 만들어 준답니까?' 우리가 착각을 한 거다.

거칠게 보면 한국에서 보수, 진보는 55대 45다. 범 보수는 지킬 게 많거니와, 그 기득권이 간단치 않다. 국민들이 세상을 뒤집어야 한다는 결심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음을 줘야 한다. 그 믿음을 주지 못하지 않나. 그러니까 값이 떨어진 것이다. 막말로 안보 문제, 우리가 건드리면 큰일 나나. 안철수 교수는 시원시원하게 말하는데 우리는 안보 문제 얘기하면 누가 우리에게 '수구 꼴통'이라고 비난하나? 국민들의 답답함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을 해줘야 한다. 남북을 평화적인 분위기로 가져가고,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이끌 수 있도록 다양한 준비를 하고,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북한 인권 문제를 말 할수 있는 방법, 얼마든지 있다. 저도 솔직히 말해 40% 얻은 게 멍에다. 도망도 못 가게 표는 줬는데 (웃음) 그 분들의 태도는 아직 '느그 하는 꼬라지 보고'라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뭐 느그들 믿을 수 있겄나' 하는 것이다. 제가 6월에 보훈 단체 좀 다녔다. 그 분들이 '김 의원, 이런 데까지 오고 고마운데, 김정일한테도 그렇게 잘 했는가'라고 한다.(웃음) 그러면 내가 '김정일하고는 전화가 안 돼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말았다.

▲ "저도 솔직히 말해 40% 얻은 게 멍에다. 도망도 못 가게 표는 줬는데 (웃음) 그 분들의 태도는 아직 '느그 하는 꼬라지 보고'라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뭐 느그들 믿을 수 있겄나'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총선 때 양 진영 모두 근거 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민주당은 'MB가 다 해주실 것이다'라는 것이었고, 새누리당은 '민주당은 안돼. 결국 자기들끼리 싸우다 망할 것이다'라는 것이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결과만 보면 새누리당의 '근거 없는 믿음'이 맞아 떨어졌다. 어찌됐든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한 후에 민주당 대선 주자들 움직임만 보면 '비판' 만으로 안 되는 것을 느끼고 뭘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나?

김부겸 : 결국 후보가 다섯 분이 될 것 같은데, 이 분들이 인신 공격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인신공격 해야 누가 듣지도 않는다. 손학규 후보, '저녁이 있는 삶' 괜찮죠. 김두관 후보, '이장에서 청와대까지' 좀 진부한데,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내면 좋겠고, 문재인 후보, 공수부대 가고 '식스팩' 자랑하는 것 같은데, 인간 문제에 진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다 동의한다. 그것을 넘어 노무현을 어떻게 넘을지 보여주길 바라고, 정세균 후보나, 조경태 후보 등 모두 다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 비판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프레시안 : 야당의 잠재적 후보라 불리는 안철수 서울대 교수도 있다.

김부겸 : 그 과정에서 안철수 교수에게도 '우리 당 들어오기 싫으면 오지 말라. 그러나 당신 스스로가 이 시기에 결심을 하겠다면 보여 달라는 것이다. 왜 안철수가 우리와 함께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지 얘기 해야죠. 이제 국민 앞에 당당히 나설 때 되지 않았나. 지금까지 따뜻한 아랫목에 있었다면 이제 시베리아로 나와야죠. 시베리아에서 살아 남아야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프레시안 : 대구에는, 대구가 '정치적 기반'처럼 돼 있는 박근혜 의원이 버티고 있다. 그렇게 '틈'이 없나? 민주당은 어떻게 해야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김부겸 : 우리 후보들이 어설프게 박근혜 씨에 대해 박정희의 딸이다. 유신의 공주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것 웃기는 거예요. 어쩔 것이냐. 세상에 나와 보니까 아버지가 대통령인데. 물론 자기 아버지 시절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적절한 시기에 박근혜 후보가 역사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화해가 된다. 박근혜 후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데,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한나라당 대표를 할 때, 국가보안법 사실상 폐지하고 민주질서보호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박근혜 의원이 결국 국가보안법의 사실상 폐지에 동의했었다. 여러분 잘 모르죠? 이부영-박근혜가 합의한 것이다. 그것을 우리 당이 깼다. 열린우리당 명분론자들이 깨버렸다.

우리 대선 후보들, 이분, 저분 깨기보다는 스스로 이빨 단단히 깨물어주기 바란다. 늘 하는 캠페인대로 웃고 현장 방문하고, 이런 것으로는 승부가 안 된다. 그 동안 우리가 떠들었던 경제민주화, 복지, 말만 하면 뭐하나 박근혜도 떠드는데. 대구 경북, 무상급식 하는 비율이 30%밖에 안 된다. 사람들이 청원하는데도 안 된다. '왜 부자집 아이까지 공짜로 밥을 주느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라고 한다. 이 분들에게 '보편적 복지'라고 하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얘기해줘야 한다. 보편적 복지를 하려면 어디에서 재원을 확보해야 하는지, 있는 사람이 세금 더 내야 하고, 탈세한 사람 내게 해야 하고, 쓸데없는 예산 낭비를 줄여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해줘야 한다. 구체적으로 와 닿는 것을 가지고 한번 붙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판이 그렇게 어그러지지 않을 것 같다.

▲ "우리 대선 후보들, 이분, 저분 깨기보다는 스스로 이빨 단단히 깨물어주기 바란다. 늘 하는 캠페인대로 웃고 현장 방문하고, 이런 것으로는 승부가 안 된다." ⓒ프레시안(최형락)

"반대편 저주하면 문제 해결되나?…'상생'은 내 정치 화두"

프레시안 : 트위터로 들어온 질문이 있다. '매니'라는 분이 대구지역 정서와 관련해 김부겸 의원님 하는 말씀에 절대 공감한다고 했고, '안지영'이라는 분은 '김부겸이 말하는 상생의 정치가 뭔지 궁금하다. 군포에서 대구 수성으로 갔다고 상생은 아니지 않느냐'고 묻는다.

김부겸 : 상생이라는 말이 사회에 화두가 된 지 몇 년 안 된다. 상생이라는 용어 자체가 종교적 용어다. 불교 등에서 많이 쓰는데, 이를 정치 용어로 만든 게 제정구 전 의원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이 분이 본인이 암이라는 것을 알았죠. 서강대 대학원 마지막 강연에서 제 의원이 '죽음이 구체적으로 와 닿으니까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모든 사람, 사물이 귀한 게 되더라'고 하더라. 손수건, 돌부리에게도 '헤어질 때 인사하는 기분'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일상적인 사람과 사물을 잘 살펴보고 일방적으로 상대를 이용하거나. 취할 것만 취하고 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정도의 얘기를 했다.

종교적, 철학적 훈화 정도 될 텐데, 이 분이 당시 투병생활을 하신다고 시흥시 계수동 골짜기에 황토집을 짓고 생활을 했다. 호흡도 가쁘고 폐도 먹어들어갈 때인데, 이 분이 나에게 '니는 정치 왜 할라카노' 하더라. 이 분과 제가 만난 게 80년인데, 그 때는 이 양반이 투사였고, 좌고우면이 없었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그런 양반이 죽음을 앞두고 '이제는 이래 가면 안된데이. 상대편을 찌르고 누르고, 이런 것 가지고는 세상 문제 해결 못한데이. 적어도 상대편과 내가 공존할 수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안되면, 세상 못 바꾼데이' 이렇게 말하더라. 그 무렵은 사회주의가 이미 몰락했고, IMF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던 시기다. 그 때 '앞으로 정치하려고 하거든 상대편을 발로 찍어누르려고 하지 말라. 그런 고민을 하면서 정치하라'고 하더라. 제가 깊은 철학을 다 이해 못하지만 당시 '상생'을 화두로 던지신 것이다. 제가 그걸 흉내 낸다고, 상생을 제 정치의 화두라고 말하고 다닌다.

프레시안 : 이번 대선에서도 본선에 들어가면 상대방을 공격해서 우리 편을 결집시키는 방향으로 갈 공산이 높아 보인다. 상생의 정치, 참 쉽지 않을 것 같다.

김부겸 : 거꾸로 제가 질문을 던지겠다. 그러면 이대로 진영끼리 대결해서 문제가 풀릴까? 여야가 그런 식으로 치열하게 싸워서 제대로 해결된 문제가 있나. 없다. 결국 계층 문제 해결 못했다. 부모 잘못 만난 아이의 미래 열어줬나. 못 열어줬다. 우리가 도입하고 있는 이 정도의 복지 체계 조차도 어설프지만 여야가 타협해서 온 것 아닌가요? 남북 관계 문제는 저들이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한 게 있지만.

우리 지지층에서 기본적으로 동의가 된다면 상대편 지지자들도 마지못해서라도 따라오게 만드는 것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대한민국은 51대 49의 팽팽한 사회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갈등의 몇 가지 축이 있다. 과거에 미디어법도 그렇고, 보면 우리가 끝까지 싸워서 하나도 바꾼 게 없다. 하나 서글픈 게 있다면 그 갈등의 축 가운데에서 타협하면 지금보다 조금 나아졌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내 강경파들이 '그렇게 하면 우리가 지지층의 비판을 받는다'고 해서 못 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면서, 타협을 외면했다. 그 때 몇 가지 해결했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현실이 만들어졌을 텐데, 솔직히 그런 부분이 제일 부끄럽다.

그러면 앞으로 정치 이렇게 할 것인가. 우리가 집권했을 때 우리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면 공동체가 나아지나? 노무현 정부가 특별히 무능해서 개혁에 실패했나? 누가 이런 식으로 화두를 끌고 가나. 부동산 문제, 노무현 정부 내내 끌고가서 갈등을 일으켰는데, 나아졌나? 얼마 전 신문에 어느 지역 부동산이 평당 3000만원 아파트 가격이 떨어져 난리가 났다는 보도가 있었더라. 어느 기자가 '정부가 부동산 살려야 한다'고 하더라. 아파트값이 현실화되고 거품이 가라앉고 있는 과정이다. 그런데 정부가 '경창륙이 되고, 은행이 무너진다'고 한다. 누가 이런 식으로 화두를 끌고 가나. 그런데 민주당은 대답을 해 주나? 진보진영이 대답을 해주나? 평당 3000만 원 아파트가 2500만 원으로 떨어지면 진짜 한국 경제가 무너지나? 이런 이슈들을 민주당이 제기할 수 있도록 내공을 쌓아야 한다.

"대구도 대한민국 역사다…보편성 회복이 지역주의 극복"

청중 질문 : 저는 고향이 대구라서 김 전 의원을 보러 왔다. 현재 대구 경북 유권자들의 인식이 이를테면 전두환이 대구공고를 나왔다고 해서 지지를 해주는, 그런 식이 많다. 대구에서 민주당이 국회의원 한 석을 하려면, 26대 총선, 27대 총선은 돼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김부겸 의원 말고 다른 분들이 대구에 오시겠다고 하는 분은 없나?

▲ 김부겸 전 의원과 함께 한 <프레시안> 열린인터뷰 ⓒ프레시안(최형락)

김부겸 : 대구 경북 살았던 분이니까 처절하게 얘기하시는 것 같다. 유독 대구 경북이 심한 이유 중 하나를 이렇게 본다. 해방 직후 사회 변혁의 의지가 가장 높았던 곳이 대구 경북이다. '대구 10.1사건'이 있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 김종필 씨의 장인 된 분(박상희)이 연관이 깊다. 박정희 정권의 한복판에서 야당이 선거에 당선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대구에는 변화의 큰 폭풍이 지나간 적이 없다. 대구 사람들은 일단 눈치를 본다. 어떤 사안이 있을 때, '당신 생각은 뭔데' 하면 '누구는 어떻게 생각한다고 하대'라는 식으로 되묻는다. 그래서 '당신 생각을 말하라' 하면 '에이, 좀 보고'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자기 책임 하에서 뭔가 일을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가고 하는 경험이 좀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비극적으로, 우리 민족사의 비극인 광주 항쟁 때 시민들에게 총을 쏜 당사자인 전두환, 노태우가 대구 사람이다. 남한이 6.25 때 인민군 치하에서 몇 달을 보냈는데, 당시 이런 저런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에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가게 된다. 이 사람들이 박정희의 후원을 입어서 하나회가 되고, 군을 장악하게 된다. 원래 대구 경북은 중앙정치에서 소외된 선비들이 많았던 고장인데, 현대 사회에서 잘못된 정치 오리엔테이션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역주의 문제를 정리해보겠다. 알다시피 내 고장을 사랑하고, 내가 태어난 고장에 애착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현대 국가 시민이나 국민으로서 사고가 아니라 우리끼리, 우리편끼리라는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게 지역주의가 된다. 과거 그 막강한 정보, 돈, 군사력을 가진 박정희가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되니 '유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영구 집권을 획책한 것이다. 광주 항쟁 때도, 서울에서 처음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듣고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왔다. 애국가 논란이 시끄러운데, 87년에 다양한 직업, 계층의 사람들이 묶여서, 마침내 전두환 정권을 후퇴하게 한 것은 결국 '애국가'였다. 대한민국 공동체는 헌신, 배려, 연대였다. 이 역사를 잘 염두해야 한다. 민주당은 지금보다 훨씬 겸손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