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총선은 '한일전'이 아니다

일취월장7 2020. 4. 9. 12:56

총선은 '한일전'이 아니다

경제위기, 기후위기, 성착취에 맞선 대안에 투표를


반복되는 '한일전' 프레임


이번 총선이 '한일전'이라는 얘기가 있다. 이는 미래통합당(구 자유한국당)이 친일 세력이고, 민주당은 애국 세력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한국 사회가 여전히 '친일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으니 '대한독립'을 위해 민주당에 투표하자는 얘기다.


미래통합당이 일제강점기 친일파 엘리트 세력을 뿌리로 삼고 있다는 주장은 몇 가지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김무성 등 대표적인 정치인들이 친일 행적을 밟은 가족과 연결되어 있고, 나경원 등의 소속 의원들이 과거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에 참석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또한 미래통합당 등 한국의 극우 정당들은 일본 정부와의 관계 설정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도 '묻어두고 넘어가자'는 식의 포지션을 취해왔다. 이런 사실이 국제 정세의 변화, 국내외 민족주의의 흥기와 맞물리면서 '친일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해왔다.


이런 프레이밍에 대한 소위 보수세력의 반응은 부인부정, 위악, 똥물 튀기기 세 가지로 나뉜다. 전통적으로 미래통합당은 부인과 무반응으로 일관해왔다. 한편 웹툰작가이자 유튜버 윤서인 같은 극우인사들은 자신의 '친일' 논리를 노골적이고 위악적으로 설파해왔다. 하지만 이런 대응은 고작해야 고정된 지지자들로부터만 인정받을 뿐 판세를 뒤집지 못한다. 그 때문에 '친일'이라는 프레임은 언제나 미래통합당 계열의 정치인들에게 불리한 것처럼 인식돼 왔다.


똥물 튀기기


그래서 나온 보수의 대응 전략이 '똥물 튀기기'다. 예컨대 나경원 의원은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자신을 향한 '친일파 비난'이 정쟁일변도이고 악의적이라며, "친일파 후손은 민주당에 더 많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민주당의 전 원내대표 홍영표 의원의 조부 홍종철(창씨개명: 洪海鍾轍, 코우카이 쇼와다치)은 일제강점기 전라도 지방의 관료이자 기업인으로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협조하는 등 친일 행적을 펼친 바 있다.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홍종철은 "현금과 미곡 등을 기부해 1915년 다이쇼 천황과 1928년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1930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됐다. 그는 "1941년 9월 전시 최대의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 때 전라북도 발기인"이었고, "1944년부터 고창군 부안면장으로 재직하면서 무리한 공출과 선산의 목재를 군용으로 벌채하여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고 한다.


▲미래통합당 서울 동작을 나경원 후보가 7일 오후 사당역에서 열린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해 11월 노무현재단 전북지역위원회가 창립8주년을 기념해 전주교육대에서 연 시민학교 대담에서 검찰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표적 친문 인사이자 유튜버 유시민 역시 친일 경력의 가족을 두고 있다. 부친 유태우는 일제시기 만주국 역사 교사였으며, 백부는 지방 관료로 일한 바 있다. 장관 재직 시절 이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자 그는 "1943년 2월부터 1945년 7월까지 만주국 통화성 폐대무자촌 국민급학교에 재직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인정했다. 민주당 전신 열린우리당에서 의장을 역임했던 신기남 전 의원 역시 친일파 후손으로 지목된 대표적 정치인 중 하나다. 그의 부친 신상묵은 일제강점기 헌병 오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바 있다. 2005년 이 사실이 알려지자 신기남은 의장직에서 사퇴했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는 "21대 총선은 한일전"이란 선전 문구가 빗발치고 있다. 민주당의 열성적 지지자들이 지난해 '한일 갈등'의 여파에 힘입어 만든 프레임인데, 이것이 유리하다는 판단과 더불어 '미래통합당=친일', '민주당=애국'이라는 공식을 대입한 것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가장 널리 퍼지고 있는 한 이미지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이 있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더불어민주당은 독립운동가들을 모태로 삼는 정치세력이 아니다. 오늘날 민주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은 친일인사와 지주층이 결성한 보수정당인 한국민주당으로, 광복 이후 냉전체제에 기생한 보수 기득권이다. 이들은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에 극렬히 반대했으며, 야당이면서도 이승만 독재와 협력했다. 한마디로 21대 총선이 '한일전'이라면,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 중에는 찍을 정당이 없는 셈이다.


이런 문제를 떠나, 이번 총선이 과연 '한일전'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오히려 이런 허황된 전선이 우리가 진짜 냉정하게 직시해야 하는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전선은 단순명쾌하지 않다


오늘날 사회는 결코 단순명쾌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전선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사회는 여전히 복잡한 쟁점들 위에 존재하며, 시민들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대안을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이번 21대 총선에서는 무엇이 투표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한일전'이라는 프레임 뒤에 숨어있는 진정한 쟁점들은 무엇이 있는가? 나는 세 가지 이슈를 통해 우리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민주노총이 코로나19 재난 상황 해고금지 요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프레시안(최용락)


첫째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경제위기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 이후 세계 경제는 지표상 현저한 추락을 맞이했고, 국제 질서 역시 크게 요동칠 것이 예견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 국가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고 치솟고 있고, 이로 인해 특히 미국에서는 전무후무한 실업대란이 발생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바이러스 대응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는 평가가 있으나,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들이 경고하고 있듯, 아직까지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교문은 여전히 닫혀 있고, 각급 학교는 온라인 수업을 예고하고 있다. 상당수 대학들은 이번 학기 수업을 완전히 온라인으로 이어갈 예정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에 확인했듯 위기에 가장 취약한 집단은 재벌이나 건물주가 아니라, 평범한 국민들이다. 노동자들은 무급 휴업이나 해고 등 위협에 처해있고, 영세 자영업자들의 곡소리는 끊일 줄 모른다. 일본 아베 정권의 대책 없는 코로나 대응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갖는 것은 문제의 현상만 쫓으며 위안 삼는 어리석은 일이다. 구체적 현실에 대한 대안이 될 수도 없다. 그 때문에 재난기금에 대한 대안들이 시민사회와 정치권, 지자체 등에서 빗발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무근별한 해고 조치에 맞서 '일자리 보호'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누가 건물주가 아니라 영세 자영업자의 시선으로 과감한 대안을 내놓고 있는지 지켜봐야 한다.


▲지난달 26일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근본적 해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둘째는 '성폭력'이다. 최근 언론의 보도로 세간에 알려진 'N번방 성착취 사건'은 우리를 경악케 했다. 이 사건은 성폭력 및 포르노가 어떤 권력구조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고, 그것이 극단화되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줬다. 시민사회는 이것의 방어막이 되지 못했고, 정치는 제도적인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간 무수히 많은 비판과 요구가 있었음에도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은 정치의 잘못이 크다. 그렇다면 투표용지 위의 정당들 중 어느 정당이 이런 기만에 함께 해왔는지, 반면 어느 정당은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지 편견을 버리고 직시해야 한다. 예컨대 N번방 사태에 경악하고 비판하면서, 성추행 전력으로 인해 낙마한 전직 국회의원(혹은 유튜버)가 주도하는 기이한 꼼수 정당에 투표하는 건 아무래도 이율배반적이다. 따라서 '성폭력'이란 쟁점은 이번 총선에서 상식 있는 시민이 살펴야 하는 두 번째 기준이 된다.


▲기후위기비상행동 관계자들이 27일 오전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 앞에서 열린 '포스코 주주총회 대응 기자회견'에서 온실가스 배출하는 석탄화력발전 건설 철회를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기후위기'다. 지구가 마주한 기후위기에 대해 우리는 이미 과학자들과 시민운동가를 가리지 않고 강력한 경고를 들어왔다. 하지만 이에 대해 분명하고도 실효적인 대안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지 않다. 정부는 겉으로는 기후위기에 대처하겠다고 말하면서도, 탄소 배출이 높은 나라들 중 가장 뒤쳐지는 대안만을 제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후악당'이란 악명까지 얻을 정도다.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수준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런 식으로는 향후 수십 년 안에 심각한 수준의 생태 위기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다음 세대가 보다 좋은 삶을 누리길 바라지만, 기후위기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그런 약속을 할 수 있겠는가. 기후위기 비상행동과 그린피스 등은 정의당과 녹색당의 기후 정책에 대해 후한 평가를 준 바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당면한 기후위기에 대해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을 주목해야 한다.


'양자택일' 논리에서 벗어날 때 진짜 정치가 시작된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총선은 매우 혼란스러운 형국이다. 위성정당이 판치고 있고, 유치찬란한 적자-양자론 까지 나오고 있다.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위성정당'을 만들어 개정된 선거법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시민들은 "정당 명부 비례대표 투표 용지에 왜 '1번'과 '2번'이 없느냐"고 묻고 있고, 생전 처음 보는 정당들을 보며 어디가 '진짜'이고 어디가 '가짜'인지 묻고 있다. 그러다보니 원칙을 고수한 정의당 등은 오히려 크게 손해를 보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다시 반등하고 있긴 하지만, 선거 결과가 나오기 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선거 판세가 이렇다보니 '정치권 하는 꼬라지가 다 싫고 지긋지긋해 투표하기 싫다'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나는 심정적으로는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정치에 대한 냉소로 인한 개별적인 '보이콧'은 오히려 꼼수를 자행하는 정치세력에게 득으로 돌아갈 뿐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4월 15일에 투표소로 가야 한다. 아무리 세상이 파탄을 거듭하고 악무한을 거듭하고 있을지언정 우리 삶과 사회를 덩달아 포기할 순 없지 않나.


우리나라 정치는 항상 'A'와 'B' 사이의 선택을 강요해왔다. 2004년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인사들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게 던지는 한 표가 전략적으로 '사표'가 될 것이라며 저 유명한 '사표론'을 다시 끄집어냈다. 하지만 당시 민주노동당이 획득한 표는 '진보정치'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고, 당선을 만든 한 표보다 더 귀중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심상정과 노회찬은 그렇게 해서 여의도로 입성했다. 가장 나은 대안에 던지는 한 표는 결코 사표가 아니다. 오히려 21대 총선의 사표는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정’을 받을지조차 걱정해야 하는 '위성정당들'에게 던지는 한 표가 될지도 모른다. 이번이야말로 양자택일의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두를 위한 민주적인 사회는 일하는 사람의 권리가 보장되는 일터와 좋은 정치를 기반으로 한다. 선거는 보통 사람들이 '제도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이고, 그것은 '사이다'가 아니라, '숙고'와 '좋은 질문'을 통해 만들어진다. 누군가가 묻지 않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어떤 기준으로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내가 바라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시민의 한 표 역시 하나의 정치 행위이고, 이는 우리 각자의 기억 속에 남는다. 시민 스스로 떳떳하고 정당한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다. 시야를 흐리는 기준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우리 삶을 결정지을 기준과 근거를 갖고, 투표해야 한다.


역사적 괴물 집단과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아버린 집단은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시민들에게는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없다. 경제위기와 기후위기, 성폭력에 맞서 제대로 된 대안을 내놓는 후보와 정당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세상은 이전보다 혼란스러워졌지만, 적어도 우리 자신에게 떳떳한 선거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소하지만,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