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전쟁 불장난으로 재선 챙기려는 트럼프

일취월장7 2020. 1. 9. 14:39

전쟁 불장난으로 재선 챙기려는 트럼프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비례의 원칙' 버린 미국의 대이란 강공책


이즈음 국제정치에서 가장 큰 뉴스는 이란-미국 사이의 긴장 관계이다. 이란 쿠드스군(이란혁명수비대 정예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 소장을 드론으로 폭격해 암살한 사건(3일)은 이란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란 현역 장성이자 군부 실세라 일컬어지는 인물 암살이 트럼프 미 대통령의 독단적 결정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다시금 놀랐다.

후폭풍이 불어 닥쳤다. 이란 현역 장성이자 군부 실세라 일컬어지는 인물을 겨냥한 암살사건이 터지자, 이란 전국에선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죽음을!"이란 구호가 메아리쳤다. 이란 사람들은 피의 보복을 바랬고, 실제로 이라크 안의 미군기지 두 곳에 지대지 탄도미사일 수십 발을 쐈다(8일).  

이에 질세라 트럼프는 이란 공격할 후보지로 52곳을 꼽았다. 페르시아 문명의 유산을 지닌 이란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공격 목표에 들어 있다는 전쟁 범죄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보복이 또 다른 보복 공격을 낳는 지금의 갈등 상황은 미국-이란이 전면전을 향해 치닫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중동을 넘어 세계에 전쟁의 먹구름을 드리운 상황이다.

새해 초부터 왜 이런 긴장 상황이 벌어지게 됐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몇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미국의 대통령이 이란 현역 군 장성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 정당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트럼프는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극단적인 대이란 강공책을 밀어 붙였을까. 지금의 위기 상황을 이용해 트럼프와 그의 동맹자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사적인 이득을 챙기려 드는 것은 아닐까.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일(현지 시각)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이란 군부 실세인 거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이란혁명수비대 정예군) 사령관을 미군이 공습 살해한 것과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스러운 극단적 결정  

솔레이마니 암살 사건은 이라크의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하시드 알사비)가 바그다드 주재 미 대사관을 돌과 화염병으로 공격한지 사흘 만에 벌어졌다. 미 대사관이 공격을 받아 바깥으로 노출된 경비초소가 불탔지만, 피해는 보잘 것 없었다. 대사관 외벽에다 스프레이로 '미군 철수'와 '대사관 폐쇄'를 요구하는 반미 구호를 남기고 시위대는 물러났다. 대사관 미국 쪽의 인명 피해는 없었다.  

미국이 이란 현역 장성을 암살한 것은 트럼프가 주장하듯 '적절한' 행위가 아니다. 이미 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대로, 트럼프가 솔레이마니 암살을 지시하자, 미 정부 고위 관리들조차 "너무 극단적인 조치가 아니냐"며 걱정했다고 한다. 미 대사관이 공격을 받았다고 이란의 현역 장군을 죽이다니! 한마디로 '트럼프스러운 결정'에 따른 암살이라고밖에 달리 말하기 어렵다.  

신학자 아퀴나스, "비례의 원칙 지켜져야" 

전쟁 연구자들이 '정의로운 전쟁'(just war)를 말할 때 내세우는 기준 가운데는 비례(proportionality)의 원칙이 빠지지 않는다. 내가 받은 공격보다 훨씬 센 공격을 벌여 사상자를 마구 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선 그런 일들이 걸핏하면 벌어져 왔다. 하마스(Hamas) 대원이 이스라엘 군인 한두 명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고, 그 보복으로 민간인 주거지역을 마구 포격해대는 것은 비례의 원칙을 어기는 전쟁범죄 행위다.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들로부터 되찾는 성스러운 전쟁(holy war)이었다. 거꾸로 이슬람교도들에겐 십자군의 침입을 격퇴하는 것이 지하드(jihad)였다. 오늘의 많은 역사가들은 십자군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이라고 일컫지 않는다. 교황이나 일부 기사들이 종교의 이름 아래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고 피가 피를 부르는 학살을 거듭했기에, '더러운 전쟁'이란 비판마저 받는다.

십자군전쟁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13세기 기독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게 전쟁이란 (초기 기독교도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언제나 죄악은 아니었다. 이교도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기독교 공동체가 위협을 받는다는 논리에서였다. 아퀴나스에게 정의의 전쟁이란 이교도들 때문에 흔들린 평화를 되찾으려는 노력이었다.

기독교적 정의의 전쟁론을 폈던 아퀴나스도 전쟁에서 '비례의 원칙'이 지켜져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그런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행동한 것이라면 불법은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될수록 살려고 애쓰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비례적이 아니라면 불법이 될 수도 있다"라고 썼다.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폭력보다 훨씬 더 센 폭력을 휘두르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 아퀴나스의 생각이었다.  

아퀴나스에게 '올바른 의도'는 '비례의 원칙'과 더불어 정의의 전쟁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적을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적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져선 안 되며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폭력보다 훨씬 더 센 폭력을 공격자에게 휘둘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사악한 의도를 지닌 채 전쟁을 벌여나간다면, 그 전쟁에 참전한 국가나 병사는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고, 그 죄에 대한 징벌은 하느님이 내린다고 아퀴나스는 믿었다. 

미국 대사관이 돌과 화염병 공격을 받았다고 이란 현역 장성인 솔레이마니를 폭사시키는 것은 (앞서 아퀴나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비례의 원칙을 어기는 짓이고, '사악한 의도'를 품지 않고는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일이다. 미국은 솔레이마니가 미국에게 테러 행위를 계획한다는 구체적인 물증도 없이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는 중이다. 

불장난으로 사익 챙기려는 트럼프와 네타냐후 

그렇다면 트럼프는 왜 그러한 강공책을 펴며 세계 평화를 어지럽히는 것일까. 한마디로 그런 결정이 자신에게 여러 모로 이롭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올해 11월 3일 치러질 미국 대선을 앞두고 있는 트럼프다. 그를 옥죄어 온 탄핵 국면을 돌파하고, 이란과 긴장 국면에서 보수층 결집을 노린다는 속셈이 깔려있다고 보인다. 그의 지지기반 가운데 하나인 군산복합체, 보다 구체적으로는 군수업체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미국 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재선 고지를 넘는 데 유리하다고 여기는 모습이다. 

트럼프의 노림수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도 보인다. 실제로 미 언론에서 탄핵 관련 보도가 확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탄핵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트럼프로부터 내팽개쳐지듯 경질 당했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상원에서 소환장을 보낸다면 출석해 증언하겠다"고 나서는 등 여러 불편한 상황이 그를 기다리는 중이다. 앙심을 품은 볼턴이 지난날의 주군에게 치명상을 안길 폭탄 증언을 할지 어떨지가 궁금해진다.

미국-이란 사이에 전쟁이 터지길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라는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다. 트럼프의 잇단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2019년에 치른 두 번의 총선 뒤 연립내각을 새로 구성하지 못했다. 검찰로부터는 뇌물 수수와 사기,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가 된 위기의 정치인이다. 오는 3월 2일 총선을 앞둔 네타냐후가 그리는 구도는 미-이란 긴장 상황이 더욱 악화됨으로써 이스라엘 총선 정국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쪽이다. 

정치군사적 긴장 상황은 권력자들을 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역사적 보기들은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박정희 유신독재는 한반도의 긴장 상황을 핑계 삼아 펼쳐졌다. 그러다가 끝이 좋지 못한 경우들이 생겨나곤 한다.  

1980년대 초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자 레오폴드 갈티에리 장군은 민주화 요구와 민생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려 포클랜드 전쟁(말비나스 전쟁, 1982년)을 벌였다. 하지만 영국군에게 패하는 바람에 군사정권은 무너졌다. 트럼프나 네타냐후가 전쟁의 불장난으로 이득을 챙기려 들어도, 그들에게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이란 전쟁 벌일까 

최근 미-이란 사이는 양쪽이 치킨게임을 벌이듯이 대충돌의 국면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다가 전쟁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마저 품는다. 갈등 양상이 증폭되다가 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미 정치학자 로버트 저비스(콜롬비아대 명예교수)는 나선 이론(spiral theory)으로 풀이한다.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나라 사이의 갈등을 외교나 협상으로 풀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여러 정치군사적인 이유로 상대국의 위협과 적대감을 부풀리다가 끝내 전쟁에 이르게 된다는 이론이다.

나선 이론의 구체적인 보기로, 저비스 교수는 제1차 세계대전을 꼽는다. 1914년 7월 말 전쟁이 터졌을 때, 유럽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이번 전쟁은 우리가 곧 이길 것이고, 다가올 크리스마스엔 가족과 함께 지낼 것이다"라고 병사들을 전쟁터로 몰아댔다. 4년 넘게 끌면서 사망자 1500만(군인 800만, 민간인 700만)을 낳았던 제1차 세계대전은 다름 아닌 인재(人災)였다. 다시 말해서, 정치 군사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대재앙이었다.

저비스 교수는 나선 이론과 더불어 억지 이론(deterrence theory)으로도 전쟁을 풀이한다. A국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B국이 하려고 할 때 (이른바 레드 라인을 넘으려 할 때) "그럴 경우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입히겠다"고 위협함으로써 레드 라인을 넘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B국의 행동이 막판에는 "더 이상 양보하지 않겠다"는 A국의 경고를 무시할 경우 끝내 전쟁에 이르게 된다. 영국이 나치 독일에 유화정책을 펴다 끝내는 전쟁으로 이어졌던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가 그러했다.  

나선 이론이든 억지 이론이든 어디까지나 책상 위의 이론일 뿐이다. 상대국의 의지와 의도를 정확히 읽어내고, 어느 정도의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려 드는지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더구나 합리적 이론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인간(그리고 집단)의 이해관계와 감정적 요인이 뒤엉켜 전쟁의 벼랑 끝으로 치닫는 모습을 우리는 역사에서 흔히 본다. 미국-이란 갈등이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질 수도 

트럼프는 입으로는 평화를 바라지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란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즈음 펼쳐지는 두 나라 사이의 보복 공격을 보고라면, 무력 충돌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전쟁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는다. 평화를 바라는 우리 인간의 의지와는 달리 전쟁으로 휩쓸려 들어간 사례는 인류 전쟁사에서 셀 수 없이 많다.

< 전쟁론>을 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전쟁은 정치적 행위이다. 최강 군사력을 지닌 미군이 이란군과의 전투에서 질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전투에서 이긴다고 전쟁에서 이기라는 법은 없다.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둘러싼 제2차 중동전쟁(1956년)에서 이집트군은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연합군에게 전투에서는 패했다. 하지만 수에즈운하를 돌려받음으로써 이집트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는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겼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란 현역 군장성을 암살하는 극단적 결정을 내린 트럼프의 정치군사적 도박이 그의 노림수와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미국이 전투에선 이기고도 전 세계적인 비판 여론 때문에 전쟁에선 지는 결과로 이어질지, 그로 말미암아 11월 미 대선에서 트럼프의 패배로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안타깝게도 2020년 새해 초부터 중동 하늘은 전쟁의 먹구름에 덮였다. 석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약삭빠른 이해타산이 몸에 밴 트럼프다. 11월 대선을 앞둔 그가 "이란과의 협상보단 전쟁이 나의 재선에 더 이롭다"며 강공책을 고집한다면, 세계는 결코 평화로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