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한광수 미래동아연구소 소장

일취월장7 2020. 1. 6. 17:16

"할퀴며 껴안는" 미중, 21세기 지구 최대 이익공동체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①] 한광수 미래동아연구소 소장
2020.01.06 15:49:02

미중 대결시대, 한국의 활로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최근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G2 시대 한국의 생존전략>(한겨레출판 펴냄)을 펴낸 중국 전문가 한광수 전 인천대 교수는 미중 관계의 본질이 전쟁이 아닌 경쟁이라면서 한국은 '친미냐, 친중이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중은 현재 지구 최대의 이익공동체로서, 서로 대립하면서도 협력할 수밖에 없는 '협력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또한 최근 6년간 한국이 대중국 수출 1위를 지켜오는 등 한중은 '자연스런 무역 파트너(Natural Trade Partner)'이며 중국과의 경제협력은 한국경제의 필수 요소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막연한 반공의식에 기초한 중국 혐오는 위험하며 중국을 제대로 알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광수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대학원 경제학과를 거쳐 베이징대학교 경제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9년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중국경제 연구를 시작했다. 1991~96년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의 경제 발전을 현지에서 관찰했고 주중 한국대사관, 무역협회, SK, 한솔제지, 현대건설의 현지 고문으로 일했다. 귀국 후 인천대 교수를 지냈으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중국 고문, <KBS 스페셜> 중국 프로그램 자문 등을 맡았다. 현재는 미래동아시아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12월 13일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진행된 한광수 교수와의 인터뷰를 두 차례로 나누어 연재한다. 1부는 미중 관계 외 중국경제의 발전 과정, 2부는 미중 대결 시대 한국의 진로에 관한 내용이다. 인터뷰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이 맡았다.  

▲ 한광수 미래동아연구소 소장. ⓒ프레시안


1부 
미중 관계의 본질은 전쟁이 아닌 경쟁

프레시안 : 책 제목이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이다. 또한 미국과 중국이 '21세기 지구 최대의 이익공동체'라고 했다. 무역전쟁 등 미중 갈등을 강조하는 일반적 인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사드 배치나 남중국해 문제 등으로 미중 간 안보 갈등도 심화하고 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인데, 이와도 사뭇 다르다. 미중 관계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나?

한광수 : 최근 미중 양국 간 갈등이 이전보다 거칠고 험악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쟁은 아니다. '전쟁'은 함부로 써도 되는 용어가 아니다. 양국이 지난 수십 년 간 벌여오고 있는 대립과 타협의 반복은 전형적인 '경쟁'의 필수 구성 요소다. 

미중관계를 이해하는데 멀리 갈 필요가 있는가? 한국은 미중 양국 관계에 접근하는 데 가장 좋은 사례일 것이다. 우리처럼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나라는 없다. 최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미중 무역 갈등으로 작년 우리 국내총생산(GDP)이 0.4%포인트 감소하는 영향을 받았다고 추산했다. 

하지만 미중관계를 갈등이나 대립 위주로만 보면 위험하다. 사실이 아니다. 대립과 협력의 양면을 모두 살펴야 한다. 그들의 협력 규모는 거대하며, 트럼프의 관세 폭탄 속에서도 협력의 틀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당장 우리가 그들 양국관계의 틈새를 활용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지난 40년 동안 우리의 중요한 생존 방식은 한편으로 한미동맹을 목청껏 부르짖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시장에 올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인당 GDP 3만 달러에 올라섰다. 물론 순조롭지는 않았다. 한쪽은 '한중밀착'을 겨누고, 다른 한쪽은 '한미동맹'을 겨눈다. 그 바탕에 적대적 남북 분단이 가로놓여있다. 한반도 분단의 현상유지가 미중화해의 사전 밀약 사항이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1971.10). 그들에게는 그들의 관계발전이 우선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미국의 첨단무기도 들여와야 하고 중국시장 눈치도 봐야 한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곡예다. 우리는 그들 탓에 1997년 외환위기 같은 국가적 재앙도 감수했다. 안타깝게도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앞으로 중국의 추격이 진행될수록 미국의 견제는 가열되겠지만, 그것은 어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풀어줄 매듭이 아니다. 

격변기일수록 큰 그림과 큰 흐름을 놓치기 쉽다. 17세기 명청 교체기와 19세기 일본의 발흥 등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격변기를 오판하여 재앙을 불러들인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한 전과가 즐비하다. 현재 한국의 주류적 상황 인식도 자칫 위험의 경계를 넘나든다. 허술한 인식 탓이다. 서로 '할퀴면서 껴안는' 희한한 모습의 미중 양국관계를 편협한 시각으로 보는 것은 금지된 장난이다. '중국을 갈기갈기 찢어야 한다'며 관세 폭탄을 휘두르는 트럼프 미 정부는 최근 시진핑 중국 정부와 1단계 무역합의에 도달해가고 있다. 왜 그들은 할퀴면서 껴안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걸까?  

사실, 1940년대 이래 미중관계는 불안정한 롤러코스터를 벗어난 적이 없다.  2차 대전 때는 연합하여 항일전쟁을 치른 그들이지만, 한국에서는 무력으로 충돌했다. 1972년 화해 이후에도 앞에서는 창과 방패를 번뜩이지만 뒤에서 우회 전략을 찾아 협력을 모색했다. 그것이 미중관계의 기본 틀이다. 화해 이전보다 성숙해졌다.  

그들은 이익을 앞에 두고 대결만 일삼는 바보들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엄청난 구조적 보완 잠재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상호 의존구조도 깊이 자리 잡았다. 세계 최대 선진국 시장과 최대 개도국 시장의 만남이 아닌가? 신냉전을 꿈꾸는 것은 일부의 생각일 뿐이다.

미중 협력은 가속화하는 글로벌 경제의 이익을 배분하는 거대한 통로다. 이익 배분의 열쇠는 무엇인가? '직접투자'라는 카드다. 지금까지, 미중 양국은 근 4천억 달러의 상호 직접투자에 집중해왔다. 거대 규모다. 이런 협력에는 치밀한 전략이 있기 마련이다. 단순한 장터가 아니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방의 침략으로 백년 이상 잿더미가 되었던 악몽을 지닌 나라다. 중국이 강요당한 불평등조약만 2천 개가 넘는다. 잠들지 못한 영혼들이 대륙을 떠돌았다. 전쟁은 곧 파멸로 통한다. 미국이 냉전을 앞세워 대륙을 봉쇄하자 중국은 3차 대전 불가피론을 내세워 맞서왔다. 그것을 '가피론'으로 바꾸는 데 열쇠가 된 것이 해외직접투자다. 상대국가 영토 안에 수천 개의 자국 기업 공장들이 즐비하다면 전쟁은 불가능하다. 서방에서도 해외직접투자 시대가 열린 것은 2차 대전 이후부터다. 탐욕으로 빚어진 두 차례 대전의 참상에 대한 반성의 산물이 직접투자였다. 단순한 상거래가 아니다. 미중화해에 맞추어 상하이국제문제연구소가 이점을 상세하게 정리하여 밝혔다.  

직접투자는 개혁개방의 이론적 주춧돌이 되었다. 전쟁과 투자를 맞바꾼 것이다. 누가 전쟁을 좋아하는가? 그러나 지금도 동아시아 지역은 시도 때도 없이 첨단무기를 과시하며 군사적 긴장을 이어가는 현장이다. 미국은 연간 국방예산의 60%, 3600억 달러 이상을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이 지역에 쏟아 붓고 있다. 중국도 미국의 포위 전략에 굽히지 않고 맞선다. 전쟁은 아니더라도 그 그림자는 지속적으로 어른거릴 것이다. 그것은 약자가 치르는 대가이며, 강자로 가는 시험대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이제 전쟁이 아니라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의 부상에 박수치는 서방국가는 없다. 그러나 그들 중에 중국시장을 외면하는 나라도 없다. 중국이 택한 직접투자 유치를 놓고 과거 한국의 정부 차관을 연상하면 안 된다. 차관은 한국 정부가 외국 돈을 빌려와 정부 책임 아래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방식인 반면, 직접투자는 외국인 투자기업이 직접 손익을 챙기는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의 말처럼, 처음 중국은 가공임 정도를 얻는 소박한 전략으로 출발했다. 그것이 곧 오늘날 가공무역을 토대로 한 글로벌 밸류 체인 네트워크로 발전해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결과 세계시장을 휘젓는 미국의 초국적기업들이 2천억 달러가 넘는 투자로 중국에 공장을 짓고 밀려들었다. 그리고 중국을 미국 소비자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생필품 조달을 위한 하청공장으로 삼았다. ‘세계의 공장’이라는 이름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중국시장에 1조 달러가 넘는 직접투자가 유치된 지도 시간이 제법 흘렀다. 중국이 벌어들이는 무역흑자의 태반도 이들 직접투자의 주역인 미국 초국적기업의 몫이라고 미국의 금융 황제 그린스펀이 일찍이 지적했다. 미국은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대통령 빌 클린턴도 같은 입장이었다(이 책의 5장). 중국의 추격이 가시화되기 전까지 미국은 이처럼 느긋했다. 문제는 무역적자가 아니다. 추격이다. 

21세기 초, 미국은 중국에 두 차례 협력을 요청하는 희한한 일을 벌였다. 하나는 2001년 9.11 뉴욕 테러이고, 다른 하나는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다. 두 사건 발발 직후, 미국 정부는 즉각적으로 중국정부에 손을 내멀었다. 하나는 미증유의 군사적 위기였고, 또 하나는 경제적 위기였다. 중국은 미국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 글로벌 경제의 2인자로 올라서는 기회를 잡았다. 이처럼 위기에 서로 손잡고 협력하면서도 '패권전쟁'이 가능할까?? 

미중은 이 거대하고 치열한 경쟁을 위해 수많은 대화 채널을 가동 중이다. 그들에 따르면, 크고 작은 대화 채널이 거의 100개에 이른다. 그것은 경쟁을 위한 것이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빈번한 정상 간 접촉 이외에도 안보, 경제, 사이버, 인문 등 각 분야별로 대화가 번창하고 있다. 한국도 미국과 중국에 대해 이런 대화 채널을 가동하고 있는가?

미중 양국은 공동 군사훈련도 실시 중이다(책 2부 참조).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도 양국 군 최고 수뇌부가 나서서 협력한다. 남중국해의 군사적 긴장에 대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안전 관리 시스템을 가동한다. 

그들은 글로벌 질서를 바꾸어간다. 일부 원하는 세력도 없지 않겠지만 냉전시대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그들은 '할퀴고 껴안으며' 그들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다. 경쟁이다.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 마오쩌둥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미국을 동경했다. ⓒ위키백과


조지 워싱턴을 존경한 마오쩌둥 

프레시안 : 책의 1부는 지난 100년간 미중 관계와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을,  2부는 현재의 미중관계를 다루고 3부는 미중 대치의 최전선인 한국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 미국을 사랑한 100년'이란 제목의 1부에서 중국의 국부인 마오쩌둥이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을 존경했고, 이미 1944년 무렵부터 미국과의 협력을 공개적으로 열망했다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미중 관계는 1972년 2월 닉슨의 방중을 경계로 대립에서 협력으로 전환했다고 보는 일반적 인식과는 차이가 있다. 

한광수 : 좋은 지적이다. 미국 정부와 중국공산당이 처음 손을 맞잡은 것은 1944년이었다. 중국국민당에 염증을 느낀 루스벨트 정부가 제안했다. 스탈린과 협의를 거친 결과였다. 미중 화해 28년 전 일이다. 협력의 명분은 항일전을 위한 연합전선이었다. 당시 대통령 4선을 앞둔 루스벨트는 중국공산당에 기대를 거는 국내 여론을 의식하며 행동했다. 4선을 이룬 루스벨트는 곧 서거했다.  

후임자는 텍사스 석유 재벌들이 끌어올린 해리 트루먼이었다. 백악관에 들어선 그는 곧바로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이어 중국 내전과 미군의 대륙 철수, 냉전 선언과 마셜플랜, 마오쩌둥의 건국, 그리고 한국전쟁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잠시 동안의 미중 협력 뒤를 이은 이 사건들이 기존의 세계 질서를 송두리째 뒤엎는 대격변의 단초였음은 물론이다. 유럽 열강이 잿더미로 변하자, 빈자리는 새롭게 떠오른 미국과 소련이 차지했다. 그들은 새롭게 재편되는 동아시아에 군침을 흘렸다. 혁명을 등에 업은 중국 대륙이 이들 양국에 맞서기 시작했다. 미-중-소 3각 관계에 불이 붙었다.  

당시는 미국 정부가 파시즘과의 대결을 위해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연합했던 시절이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개인적으로도 절친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세계 구도를 짜기 시작한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중국에 대해서 공동 관리로 방향을 잡았다(한반도 분단의 씨앗이기도 했다). 접근 방식은 간단했다. 스탈린이 장제스와 손잡고 루스벨트는 마오쩌둥과 연합하여 대륙 양분을 도모했다. 양국의 음모는 항일전 막바지에 구체화되었다.  

루스벨트는 '국공연합정부'라는 명분으로 중국공산당과 연합했으며(1944~46), 소련은 종전 이전부터 장제스와 준비해온 군사우호협정을 일본 항복 전날 맺었다(1945.8.14.). 양국이 심혈을 기울인 대륙 분할의 꿈은 3년간의 국공 내전에 달려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은 마오쩌둥이 이끈 ‘양쯔강 도하작전’의 성공으로 종료되었다. 

유의해야 할 또 다른 하나는,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의 영웅들에 심취했다. 마르크스보다 워싱턴을 먼저 알았고 존경했다. 당시 중국 젊은이들의 풍조이기도 했다. 중국혁명 내내 마오가 조지 워싱턴의 게릴라 전략을 가슴에 품었다고 <뉴욕타임스>의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는 술회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의 유명한 발언도 조지 워싱턴을 염두에 뒀다. 무장 게릴라 투쟁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데 감명 받았다. 1944년 옌안을 찾아온 미국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옌안의 모든 사정이 너무 낙후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마치 조지 워싱턴의 사령부가 초라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외국인들이 만약 워싱턴의 사령부를 보았다면 승리를 외치는 워싱턴의 주장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워싱턴은 비록 기계설비나 전기시설이 전혀 없었지만 올바른 정치사상으로 인민이 무장하면 총구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현대 게릴라전의 새로운 학설을 창안했습니다." 

마오쩌둥이 우리에게 반미주의자로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 참전 탓이다. 그에게 친미 반미는 전략이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이나 소련을 진정한 친구로도, 진정한 적으로도 보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중국주의자'였다. 
  
마오의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한다. 1944년 미국 사절단의 옌안 방문 당시 미국인 통역이었던 시드니 리텐버그는 마오가 가장 좋아한 나라는 미국이었다면서 "마오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알기 전에 프랭클린과 제퍼슨을 연구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오는 공산주의를 접하기 이전에 미국식 실용주의에 심취했었다. 1920년 5월에는 당시 중국을 순회 중인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강연을 상하이에서 직접 듣기도 했다. 듀이의 제자인 후스와도 좋은 관계였다. 훗날 그는 "우리 중국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1947.7)거나 "러시아의 혁명 열정과 미국의 실용 정신을 결합해야 한다"(1959.2)고 강조했다.  

미국은 1943년 12월부터 중국 공산당과 접촉을 시작했고 전략첩보국(OSS, CIA의 전신)의 수장인 윌리엄 도노반은 옌안의 마오쩌둥을 직접 만났다. 미국 정부는 1944년 7월, '딕시 사절단'이란 이름의 공식 사절단을 옌안으로 보내 항일전 수행을 위한 국공합작을 추진했다. 당시 중국 현지의 미국 외교관들은 본국 보고에서 공산당의 정권 장악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고 마오쩌둥과의 협력을 건의했다. 마오쩌둥은 워싱턴을 방문하여 루스벨트와 회담하고 싶다는 의사를 1944년부터 여러 차례 밝혔다. 미국과 국교를 맺으면 소련과 관계를 끊겠다는 의사까지 밝혔지만 마오의 워싱턴 방문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마오가 닉슨과 만나 화해한 것은 1972년 2월, 그가 서거하기 4년 전이었다. 젊은 시절 그가 좋아한 미국과 마침내 화해하여 오늘날 미중시대의 초석을 남기고 떠났다. 마오 이후, 지금까지 중국 지도자들 중에 미국을 중시하지 않는 지도자는 없다. 

▲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단순히 경쟁 구도로 재단할 수 없다. 둘은 '할퀴며 껴안는' 사이다. ⓒpxhere.com


소련 붕괴에 환호한 중국 지도부 
  
프레시안 : 책에서는 중국의 경제 발전을 세 번의 계기로 나누어 설명했다. 1978년 12월의 개혁개방 결정, 1992년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도입,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그것이다. 미중은 1972년에 화해했지만 정작 수교는 6년이 지난 1979년 1월 1일에나 이루어진다. 중국의 문화혁명, 미국의 워터게이트, 대만 문제 등 등 여러 사정 때문이었다.   

첫 번째 계기에서 중국의 개혁개방 결정이 미중 수교 협상 타결 직후에 나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1978년 12월 15일 덩샤오핑의 결단으로 수교의 마지막 장애물이었던 미국의 대만 무기 판매를 용인한 바로 다음 날(중국 시간 12월 16일 오전 10시) 중국은 양국 수교 방침을 발표했다. 이틀 후인 12월 18일 덩샤오핑은 중공 11기 3중 전회에서 "당의 노선을 계급투쟁에서 경제발전으로 바꾸고, 개혁개방으로 체제변혁을 착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즉 미중 수교로 미국의 안보 위협이 사라졌다는 확신이 서자 곧바로 개혁개방 결정을 통해 경제 개발에 본격 나섰다. 

미중 수교는 중국이 경제 개발에 나설 수 있게 만든 가장 주요한 외부적 요인이었다. 역시 안보가 확보된 이후에야 경제개발을 할 수 있다는 철칙이 확인된 셈이다. 중국, 베트남과 달리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서지 못하는 것도 바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이뤄지지 못한 때문 아닌가. 이와 함께 대만에 대한 미국의 무기 판매를 감수할 정도로 중국 지도부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대단히 중시했음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의 대만 무기 판매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임에도 덩샤오핑은 이를 받아들였다.

둘째는 1992년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도입이다. 책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소련 붕괴(1991년 12월 25일) 24일 후인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36일간 우한, 선전, 주하이, 상하이 등을 순회하며 시장경제를 역설했다(남순 강화). 이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1992년 10월 14차 당대회에서 채택됐고, 1993년 3월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에 명기됐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떠오른다.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와 그해 가을 동구권 붕괴로 위기에 처했던 중국 지도부가 1991년 12월 소련 붕괴에 환호했고, 그 직후 시장경제 도입을 결정했다고 했는데 소련이라는 존재가 중국의 개혁개방에 그토록 중요한 변수였나?

한광수 : 중소 관계는 본래 좋지 않았다. 소련의 스탈린은 미국과 손잡고 장제스를 지원하며 중국 분할을 꿈꾸었던 인물이다. 중소관계가 틀어진 결정적 계기는 핵무기였다. 마오쩌둥의 핵 개발 지원 요청을 소련의 흐루쇼프가 거절했기 때문이다(1954.10.3).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거의 모든 교류가 중단됐다. 1964년 중국의 핵실험을 막기 위해 소련은 핵공격을 계획했고, 급기야 1969년에는 중소 국경에서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한마디로 중국과 소련은 사이가 좋았던 적이 거의 없다. '사회주의 형제'는 서방에 보여주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 1991년 12월, 구소련체제가 붕괴하자 중국 입장에서는 4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중소 국경 방위 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미국과 직접 소통하는 길이 열렸다. 중국 지도부에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서방 언론들은 중국 공산당의 미래도 소련처럼 어둡다는 기사를 경쟁적으로 내보냈다. 실상과 거리가 먼 '가짜 뉴스'였다. 소련 국기가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에서 내려진 1991년 12월 25일, 베이징 자금성 옆 중난하이에서 중국 지도부와 고위 관리들은 손에 손을 잡고 환호하며 감격했다. 이는 당시 중난하이 현장에서 함께 환호했던 한 고위 관리가 내게 전해준 내용이다. 소련의 붕괴로 중국은 중요한 안보 부담 하나를 덜게 된 것이다.

중국,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30년간 시장경제 준비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중국의 시장경제 도입이 임기응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과 서방은 중국의 시장경제 도입을 당면한 체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미봉책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동안 준비해오던 시장경제를 공식화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장경제를 향한 중국의 노력은 결코 짧지 않았다. 하버드 대학의 에즈라 보걸 교수의 지적처럼, 대약진의 재앙을 수습하던 1960년대 초 마오쩌둥 치하에서 당시 당 서기장이었던 덩샤오핑의 주도로 시장경제를 향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덩은 1961년 '공업 17조'의 이름으로 선진국 교류와 경제발전을 제창했다. 그 후, 덩은 문화혁명으로 잠시 실각했지만 1973년 국무원 부총리로 복귀해 자신의 시대를 열어 나갔다. 수많은 덩샤오핑 지지자들은 모두 처절하게 낙후한 현실을 직시하는 실용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중국의 시장경제는 1961년에서 1975년까지 15년의 힘겨운 기초 작업과 1978년 개혁개방에서 1992년까지 상품경제라는 이름의 15년 과도기를 거쳤다. 도합 30년의 준비를 거친 결실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정부가 매서운 눈총을 보내는 '중국제조 2025'도 그보다 50여 년 전인 1961년에 수립한 '공업 17조'에서 출발했다. 시장경제는 결코 우연히, 또는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그 같은 시각은 중국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다. 키신저가 중국을 "하청공장 대하듯 하지 말라"고 강조한 배경이기도 하다.   

▲ 중국은 2001년 WTO 체제에 편입하며 고속 성장의 전기를 마련했다. ⓒwto.org


프레시안 : 중국 경제발전의 셋째 계기로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을 들었다. WTO 가입이 중국의 경제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국제 시장에 참여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한광수 : WTO 가입으로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경제권에 참여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었다. 그 통로의 열쇠를 쥔 미국을 설득하는 협상이 3년 반에 걸친 미중 무역협상이었다(1996∼1999). 이후 중국 경제는 대외무역과 해외직접투자의 가속화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국내 암적 존재였던 거대 국유기업에도 개혁의 채찍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WTO에 가입한 중국의 미래를 낙관했다. 중국을 미국의 '말 잘 듣는 영원한 하청기지'로 치부하는 한편, 중국이 결코 미국의 경쟁상대나 위협이 될 수 없다는 견해가 상식으로 통했다. 그러나 WTO 가입을 토대로 중국은 시장규모를 빠르게 확장해 나가면서 미국을 추격권내로 끌어들였다. 이런 추격이 WTO 가입 18년을 지나는 중국의 현주소다.  

중국이 걸어온 가시밭길 중에 미국과의 'WTO 가입을 위한 무역협상'을 소개한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난항이었다. 가입을 원하는 중국이 보유한 무기는 인내였다. 비상식과 조작, 경멸이 판치는 속에서 중국은 마침내 1999년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에 대한 미국의 폭격도 감수해야 했다. 가입 신청으로부터 무려 15년이 걸린 일이다. 1986년에 WTO의 전신인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입을 신청하여, 1999년 11월 15일, 클린턴 정부가 협상을 완료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협상은 마무리되었으나, 2001년 집권한 조지 W 부시 정부는 중국의 WTO 가입에 부정적이었다. 당초 부시는 대선 후보였을 때만 해도 중국의 WTO 가입에 찬성 입장이었다. 하지만 집권하자 '중국 길들이기'로 태도를 바꿨다. 

2001년, 중국 부상의 결정적 계기 

그런데 집권 첫해 미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9.11 뉴욕테러가 터졌다. 그 전에 미 첨단 정찰기의 하이난도 불시착 사건도 있었다. 부시는 태도를 바꿔 곧바로 중국과 손을 잡았다. 중국의 WTO 가입을 지지하는 한편, 반테러 전쟁에 중국의 협조를 얻어냈다. 그리고 아프간-이라크 전쟁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미국의 정책 변화가 중국의 경제 부상에 순풍을 안겨주었음은 물론이다.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된 미국은 중국 견제가 어려워졌다. 2001년 이후는 중국의 '나 홀로 성장'이 시작된 시기다. 반면 미국의 과도한 군사비 지출은 2008년 금융 위기의 촉매로 작용했다. 미국 전문가들은 이라크에 퍼부은 전쟁 비용이 4조7000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에서 아프간-이라크 전쟁 종식을 공약하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2011년에 이라크 전쟁 종식을 선언했다. 

'더러운 전쟁'에서 빠져 나온 오바마는, 곧바로 중국 포위작전에 착수했다.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라는 이름이었다. 미국의 전략 목표를 중동에서 중국으로 다시 바꾼 것이다. 오바마는 미국이 자랑하는 항공모함을 앞세워 중국 포위에 연간 국방예산의 60%를 할당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중국 대륙, 급부상하는 경제 대국인 중국을 전면적으로 포위하겠다는 웅대한 계획에 착수했다. 마리오 쿠오모 뉴욕 주지사의 말처럼 '힘센 사춘기 소년 같은 나라'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트럼프 정부도 오바마 정부의 중국 포위작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트럼프 정부가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이 그 연장선이다. 중국의 추격에 가장 초조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이 중국과 동아시아에 총력을 쏟아 붓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키신저는 말했다. "중국의 발전은 운명이다." 그리고 "견제보다 협력이 미국의 국익에 이롭다"고 덧붙인다. 


"한국은 미국도, 중국도 못 버린다...외교력 키우자"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②·끝] 한광수 미래동아연구소 소장
2020.01.07 09:29:24
미중 대결시대, 한국의 활로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최근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G2 시대 한국의 생존전략>(한겨레출판 펴냄)을 펴낸 중국 전문가 한광수 전 인천대 교수는 미중 관계의 본질이 전쟁이 아닌 경쟁이라면서 한국은 '친미냐, 친중이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중은 현재 지구 최대의 이익공동체로서, 서로 대립하면서도 협력할 수밖에 없는 '협력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또한 최근 6년간 한국이 대중국 수출 1위를 지켜오는 등 한중은 '자연스런 무역 파트너(Natural Trade Partner)'이며 중국과의 경제협력은 한국경제의 필수 요소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막연한 반공의식에 기초한 중국 혐오는 위험하며 중국을 제대로 알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광수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대학원 경제학과를 거쳐 베이징대학교 경제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9년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중국경제 연구를 시작했다. 1991~96년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의 경제 발전을 현지에서 관찰했고 주중 한국대사관, 무역협회, SK, 한솔제지, 현대건설의 현지 고문으로 일했다. 귀국 후 인천대 교수를 지냈으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중국 고문, <KBS 스페셜> 중국 프로그램 자문 등을 맡았다. 현재는 미래동아시아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12월 13일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진행된 한광수 교수와의 인터뷰를 두 차례로 나누어 연재한다. 1부는 미중 관계 외 중국경제의 발전 과정, 2부는 미중 대결 시대 한국의 진로에 관한 내용이다. 인터뷰 진행은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이 맡았다.  

▲ 서울의 야경. 한국의 기적적 성장은 지난 수십년 간 이어온 미중 두 나라 사이의 줄타기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 어느 나라도 버릴 수 없는 처지다. ⓒ위키백과


2부: 한국의 경제성장, 중국 경제 발전의 모델 

프레시안 : 저자는 한국의 경제 성장 모델이 중국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한광수 : 이를 설명하기 위해 '중국 시장 경제의 총설계자'인 덩샤오핑을 거론해야 한다. 그는 개혁개방 선언 전부터 한국 경제를 주목했다. 1978년 가을, 그는 미국의 권유로 일본을 방문했다. 신일본제철 회장 이나야마 요시히로를 만난 자리에서 중국에 포항제철(포스코)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나야마 회장은 "중국에는 한국의 박태준과 같은 인물이 없지 않느냐"며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다. 이 무렵, 덩샤오핑은 이미 한국 경제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3년 동안 한중수교를 극비리에 준비한 사람도 덩샤오핑이었다. 2003년, 중국 국무원의 싱크탱크인 중국발전연구중심은 박태준 회장을 중국 고문으로 위촉했다. 3인의 고문이 헨리 키신저와 리콴유, 그리고 박태준이었다. 나는 박 회장의 요청으로 그의 중국고문을 맡아 그가 서거하기 전까지 그의 광화문 사무실에 8년 간 왕래했다. 학생 때, 반독재 시위로 밤낮을 보낸 나로서는 아이러니였다.   

다음은 중국의 경제원로 쉐무차오의 한국 시각 얘기다. 한중수교 이듬해 늦은 봄, 나는 처음으로 자금성 옆의 중난하이를 방문할 수 있었다. 스승인 조순 교수를 모시고 간 자리였다. 우리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중국 계획경제의 원로이자 위안화를 창안한 쉐무차오였다. 그는 시장경제에도 앞장서서 계획과 시장의 교량을 잇는 안전판 역할을 했다. 소련의 개혁 실패와 확실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그는 덩샤오핑과는 1904년생 동갑이자 평생 혁명동지였다.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국무원 발전연구중심의 책임자인 마홍 주임이었다. 마홍의 스승인 쉐무차오 노인은 그 발전연구중심의 고문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우리도 한국처럼 발전하고 싶다"고 터놓고 얘기했다. 그 후, 마홍 주임은 한국의 재벌 체제를 벤치마킹하며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의 한국 왕래는 오늘날 수많은 중국 '기업집단'으로 결실을 맺고 있다. 소탈하기 그지없는 마홍 주임은 한국을 좋아했다.    

덩샤오핑의 후계자인 장쩌민은 한국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는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중국 국가주석이다. 1995년 당시, 자동차 전문가인 그는 서울 거리를 메운 자동차가 대부분 한국산이라는 데 놀랐다. 한국을 완전히 미국화한 나라로 생각했던 선입견이 깨진 것이다. 장쩌민은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을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한국연구소조'다.  

한중 양국은 가정 전형적인 '자연적 무역 파트너(Natural Trade Partnership)' 관계에 있다.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그리고 산업구조까지 한국처럼 중국과 밀접한 나라는 과거 침략을 자행했던 일본 정도다. 미국, 일본보다 훨씬 늦게 중국과 수교했지만, 시장규모가 작으면서도 수출은 그들을 압도하는 게 한국이다. 실제, 지난 6년 연속 한국은 중국 수출 1위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국가 부주석 왕치산은 대단한 한류 팬이었다.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해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소개하며 한국을 향해 "드라마에 영혼이 실려 있는 나라"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들은 회의를 열고 한국 문화를 벤치마킹하려면 제도부터 고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모옌도 참석한 회의였다. <인민일보>의 한류에 대한 십여 년에 걸친 일관된 평가는 중국의 한류에 대한 시각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자료다. 

우리 기업들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언하자마자 홍콩을 통해 중국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미수교 상태에서 엄청난 양의 우리 섬유제품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고전하던 관련 업계에 힘이 되었다. 1990년대 과잉 중복투자로 위기에 직면했던 석유화학공업도 중국 특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세계 반도체 생산 1위 국가다. 그리고 중국은 반도체 수입 1위 국가다.  

서방은 일찍부터 중국경제가 부상하면, 한국이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으로 전망했다. 1980년대 초,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앞장서서 짚어냈다. 같은 맥락에서 2007년 미국 골드만삭스는 한국이 중국시장 활용으로 '2050년에는 1인당 GDP가 9만 달러를 넘어 미국을 이은 세계 2위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중관계가 한국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고 싶으면 서해안 일대를 가보면 된다. 인천 송도에서 평택, 당진, 군산, 새만금, 목포를 거쳐 제주도까지 미국의 군사 기지와 중국을 겨냥한 생산 및 무역 기지가 뒤엉켜 있다. 

평택에는 중국을 바라보는 세계 최대의 미군기지와, 중국시장을 향하는 세계 최대의 반도체 삼성전자 공장이 있다. 목포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중국 전문 자유무역항이 들어선 곳이다. 제주도는 중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인가 하면, 해군기지를 서둘러 만든 강정마을도 있다. 서해안의 이런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이 딜레마인가, 기회인가? 전쟁인가, 경쟁인가?  

▲ 한국은 미중 두 나라 각축의 전시장이다. 미군의 해외 군사 기지 중 최대 규모인 평택 기지. ⓒ연합뉴스


한중은 자연스런 무역 파트너 

프레시안 : 이 같은 미중 관계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도 클 수밖에 없다. 당장 지금 한국 여론은 반미-반중으로 크게 갈라져 있다. 신중국 건설부터 1972년까지는 미중 대결의 시대였다. 당시 미중은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은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중국은 미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각각 막았다. 한반도 분단의 현상 유지가 그 결과물이다. 

이후 미중의 화해와 대립은 한국의 진로에 영향을 미쳤다. 1979년 10.26, 1997년 외환위기, 2016년 사드 배치 등도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1972년 미중 화해에 대한 남과 북의 대응은 남북 화해가 아닌 독재 강화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박정희 유신독재가 10.26 정변으로 이어졌다고 봤다. 

한광수 : 미중 화해는 남북 화해를 위해 다시없는 절묘한 기회였다. 그러나 남과 북은 그 기회를 외면했다. 남북이 내놓은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 화해가 아니라, 각기 독재 권력의 영구화로 이어졌다. 분단을 명분으로 태어난 정권들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1972년 가을, 그 야합의 뒷거래 과정을 포착한 미국은 분노했다(6장 참조). 그리고 70년대 내내 한미관계는 어두운 터널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미중 양국이 수교한 1979년 어느 가을 밤, 궁정동 안가에서 현직 대통령의 심장을 겨눈 총성이 울렸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적었다. "국제정세에 대한 참모들의 무지가 대통령을 죽였다." 이런 기사도 나왔다. "1979년 미국외교는 한국에서 빛나고, 이란에서는 실패했다."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을 지적한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업적은 '반공 근대화'의 성공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1960년대 케네디 정부가 개도국들의 공산화 확산을 막기 위해 채택한 세계전략의 일환이었다. 우리의 어두운 근대화 여정은 '식민지 근대화'에서 바로 이 반공 근대화로 이어졌다. 미중 화해 당시 박 대통령은 백악관에 반공 친서를 보내 설득을 꾀하기도 했다. 학생이 스승을 가르치려 한 것이다. 반공이 권좌를 보장하는 시대는 '10월 정변'으로 끝났다. 이를 눈치 챈 신군부는 공산권 국가들과 접촉에 열을 올리는 북방정책에 팔을 걷었다. 그들에게도 반공보다는 권력이 중요했다.        

이제 시대는 바뀌어 냉전시대가 가고 미중시대가 불을 뿜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반공 의식은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건재하다. 영화 <공동금지구역 JSA>의 마지막 총격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거리를 쏘다니는 무의식 반공 꼰대들에 대한 경고였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 때, 중국에 대한 한국의 거부감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반중 시위가 열렸다. 이것이 중국 수출 1위인 '자연적 무역 파트너' 국가의 모습이다. 앞으로도 한중교류의 길에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 미국과 중국은 '핑퐁외교'로 대표되는 관계 정상화 후 끊임없이 대립과 협력을 반복해왔다. 한국은 두 강대국의 이 같은 정세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chinadaily.com.cn


1997년 외환위기, 미국의 중국 견제가 원인 

프레시안 : 1997년 외환위기의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우리는 천민자본주의, 정실자본주의 등 국내적 요인에 집중하지만, 저자는 홍콩 반환을 계기로 터진 미중 자본전쟁의 와중에 미국이 한국을 신자유주의 체제로 강제 편입시킨 사건이라고 했다. 

한광수 : 한국에 대해 미국이 가장 껄끄럽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한중 밀착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동맹국인 한국이 중국과 지나치게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으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강제 편입은 이런 미국의 속내가 여지없이 드러난 재앙이었다. 한국전쟁을 능가하는 경제 손실을 입었고, 중산층이 통째로 무너졌고, 지금도 그 악취가 살아 숨 쉬는 대재앙이었다.  

한국이 외환위기에 걸려든 것은 한중수교 5년이 지나는 시점, 1997년이었다. 한중관계가 무역과 투자, 관광 등에서 막혔던 봇물이 터진 것처럼 대성황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냉전 시대의 대결과 단절은 먼 망각 속으로 사라진 듯했다. 미국인들은 이런 양국의 모습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미국이 이런 한중관계에 급브레이크를 건 시점은 홍콩 반환 전후였다. 2016년 사드 배치 발표가 한중FTA 발효 6개월을 지나는 시점이었다는 점과 비교된다. 공통점은 더 이상의 한중 밀착을 사전에 견제하는 조치였다는 것이다. 

IMF 강제 편입의 원인을 두고, 그동안 우리는 내부 취약점들에 집중하면서  천박한 한국 자본주의를 반성하는데 열을 올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반성하는 자들이 대부분 그 발전의 수혜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한술 더 뜬 사람이 당시 IMF 총재였던 미셀 깡드쉬다. 그는 당시 한국 경제를 두고 "정부와 대기업과 은행이 근친상간했다"고 기고만장하게 몰아붙였다.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IMF 강제 편입 협상 당시, 미 재무부의 서머스 부장관은 협상장과 가까운 조선호텔에 진을 치고 협상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마음에 안 들면 불러서 다시 지시하곤 했다. IMF 협상 대표들은 미 재무부와 긴밀하게 연결된 수하 직원들이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정보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부작용을 주목해온 컬럼비아 대학의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의 폭로였다. 그는 개발경제학의 대가로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내고,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은 남미가 아니"라고 외쳤다. 한국인 학자로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미국은 마치 군대가 진주하듯 한국을 몰아붙이는가?" 왜 미국은 이런 따가운 비난이 뻔한 속에서도 IMF를 앞세워 한국의 경제주권을 앗아갔을까?  

▲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는 한국의 기본 체제를 바꿨다. 한국은 오랜 기간 부정 부패 등 내부 문제를 되돌아봤지만, 한광수 소장은 큰 틀에서 미중 패권 경쟁의 파편을 한국이 맞은 사태로 외환위기를 해석한다. ⓒ조선일보 지면 캡처.


우선, 당시 IMF 사태에 중대한 외부 요인으로 작용한 미중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중국처럼 중요한 상대는 없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이웃인 한국을 잘 컨트롤하는 것도 중국 전략의 일환이다. 클린턴 미 정부도 그랬다. 

1997년 7월 1일로 예정된 홍콩 반환이 가까워지자 미중 양국은 서로 긴장했다. 덩샤오핑이 홍콩 반환을 4개월 앞두고 서거했다. 그는 "머리카락 한 올의 오차도 없이 홍콩 귀속을 완수하라"며 그의 유해를 홍콩 앞바다에 뿌리도록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영국과 중국 간에는 반환 협의가 진작 끝났지만, 미국은 심사가 어지러웠다. 순조로운 홍콩반환이 중국의 부상에 새로운 활주로가 되는 것을 막으려면 홍콩 금융의 주도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홍콩 인근 동남아 지역은 5조 달러 이상의 거대한 화교자본이 축적된 화교경제권이다. 이대로 두면, 서방의 금융센터였던 홍콩이 중국 대륙과 이들 동남아를 잇는 금융 및 투자의 교량으로 엄청난 시너지의 핵심 센터가 될 것이다(최근의 홍콩 사태에 미국이 관심을 갖는 배경도 이런 시각으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사춘기 힘센 소년' 같은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이 자랑하는 헤지펀드들이 팔을 걷었다. 그들은 홍콩 반환 두 달 전인 1997년 5월부터 일제히 홍콩 달러 공격에 착수했다. 조지 소로스가 앞장섰다. 미 재무부는 달러 강세를 내세워 헤지펀드의 공격을 지원했다(과거 아편전쟁 시기, 미국 해군은 청나라를 상대로 한 아편 밀수에 상인들을 지원했었다. 미국 정부, 군대와 기업은 전통적으로 한 몸이다).  
  
이 소식을 접한 중국 부총리 주룽지는 곧바로 로버트 루빈 미 재무 장관을  전화로 찾았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가 그간 사들인 미 재무부 채권을 모조리 매각하겠다"고 통고했다. 그러자 헤지펀드는 공격 대상을 홍콩의 앞마당 격인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로 돌렸다. 홍콩 반환 바로 다음 날인 7월 2일부터 이 공격은 시작됐다. 앞마당을 쓸고 다시 홍콩을 공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 자본전쟁을 주도한 이는 당시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서머스 부장관, 립튼 차관, 가이스너 차관보 등이었다. 루빈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파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국경제에 대해서도 각종 문제를 제기하며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IMF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한국 금융권은 홍콩에서 단기 외채를 빌려 중남미에서 고금리 장사로 재미를 보는 '금지된 장난'에 빠져 있었다. 황당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홍콩에 주재한 한국 금융사 지점이 78개에 달했다. 홍콩이 반환되면 홍콩에 가기 어렵다는 가짜 뉴스가 우리 관가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홍콩 달러를 빌리는 값은 하늘로 치솟고, 덩달아 한국의 단기 외채도 급증했다. 그래도 원화는 고환율을 지속하며 해외여행 붐의 뒤를 떠받치고 있었다. 매의 눈으로 한국 상황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던 미국 정부와 금융가는 한국 경제 손보기에 착수했다. 먼저 모건스탠리가 바람을 잡았다. '아시아를 떠나라'는 보고서가 나간 후, 뒤 이어 홍콩 페레그린증권이 '지금 당장 한국을 떠나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처럼 분명한 신호탄이 나가자 한국에 대출했던 각국의 단기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후 헐값이 된 한국 주식과 부동산을 미국계 자본이 쓸어 담은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당시 스티글리츠 교수는 중남미와 달리 한국 외환위기의 원인은 재정적자가 아닌데도 IMF가 중남미에 실시했던 살인적인 고금리와 재정 지출 축소 등의 처방을 내린다면 경기 위축으로 한국경제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하준 교수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도 미국식 경제모델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유독 한국에만 신자유주의 모델을 강요하고 한국식 산업정책을 포기토록 압박한다고 비판했다. 미국 재무부가 그걸 몰랐을까? 
  
이른바 '1997년 동남아 외환위기'는 그 명칭을 '미중 금융전쟁'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 동남아는 희생양일 뿐이었다(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미국 정부의 행태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한국도 '기획된 재앙'에 얻어 걸렸다. 시간이 흐르자 IMF는 모호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 추락한 신용에 대한 상업적 대응이었다. 미국으로서는 '과도한 한중밀착'을 견제해야 했다. 한국이 중국 부상의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과제는 앞으로도 이름을 바꾸어 계속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드처럼.  

▲ 지난 2017년 4월 26일 사드 장비를 실은 차량이 성주골프장으로 진입하는 모습. 미국은 한중 밀착을 견제하기 위해 사드 배치를 추진했다. 사드 논란은 중국의 한한령 보복을 낳았다. ⓒ연합뉴스


한중 FTA와 사드 배치  

프레시안 : 미중 관계로 인해 한국이 충격을 받는 사태는 지금도 일어난다. 2016년에 발표한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가 대표적이다. 

한광수 : 사드 배치는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이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요즈음 우리의 중국에 대한 관심은 '시진핑이 한국을 방문하면 (사드 배치로 인한) 한한령이 풀릴까?'에 쏠리고 있다. 최근, 베이징에서 만난 한중 정상도 사드 얘기를 되풀이했다. 시진핑이 '타당하게 해결되기 바란다'고 말하자 문 대통령은 '비핵화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전 정부의 입장이었던 '(사드는) 북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라는 입장에 아무런 변함이 없다.  
 
사드 배치는 한미동맹과 중국시장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곡예를 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드 배치 발표 직전 황교안 당시 총리가 중국 방문에서 외교적 실례를 범했다는 비난을 받았다(당시 그는 중국 지도부에 사드 배치 계획이 없다고 공개 발언했으나 일주일 후 한국 정부는 사드 배치를 발표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불안한 곡예를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어두운 사례다.    

실제 사드 배치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사드 배치에 대해 미 고위층이 처음 입을 연 것은 2013년 6월이었다. 당시 국무장관이자 차기 대선의 유력한 주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골드만삭스 임직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손에 넣는다면 (...) 우리는 미사일 방어망으로 중국을 에워쌀 것이다." 중국 정부가 즉각 반발했다. "사드의 한국 배치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사드 배치는 기습적으로 강행되었다. 당시 한국 정치는 탄핵과 대선이라는 초비상 상황이었다. 동맹국의 이름으로 미국은 사드 배치를 위해 총력을 집중했다. 백악관과 의회가 앞장서고 이름 있는 정치인, 학자와 군인들이 줄지어 서울로 몰려왔다. 사드로 인해 여론이 극심하게 갈라진 분열 상황에서도 한국 정치계는 사드보다 선거에 집중했다. 사드 반대는 현실을 모르는 소리이며, 그러면 정권 창출이 어렵다는 소리도 들렸다. 결국,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 속에 사드는 성주의 시골길을 밀고 들어왔다.    

사드 배치 다음의 난제는 미 중거리미사일 배치  

모든 면에서 세계 최강인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데 군사적 수단과 경제적 수단을 최대한 현란하게 활용한다. 그 틈새에 한국이 있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자 중국의 가장 가까운 경제 파트너다. 반도체를 비롯하여 한국과 중국은 최상의 경제 이웃이다. 골치 아픈 딜레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중국 부상을 지원하는 중요한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한국은 미중 두 강대국 사이에서 군사적 완충 기능과 시장 경쟁 기능의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전자가 냉전의 산물이라면, 후자는 중국 시장경제의 산물이다. 

이 두 기능을 염두에 두고 FTA라는 시장 카드를 보자. 한중 FTA는 사드와 어떤 관계일까? 한미 FTA가 한국 국회에서 비준(2011.11)된 다음,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했다(2012.1). 이 때 후진타오는 한중 FTA 협상 개시를 요청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한미 FTA와 한국 시장을 어떻게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줬다. 당시 한중 FTA 진행에는 우리 기업인들의 요청과 함께 중국 정부의 강력한 요구가 크게 작용했다. 미국을 의식한 우리 정부는 한발 물러나 있었다. 사드 배치 발표는 한중 FTA가 발효(2015.12)되고, 6개월 만에 서둘러 터져 나왔다.  

이제 한국은 미중 양국의 FTA 각축장이다. 한미 FTA가 광우병 파동으로 시끄러웠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중 FTA가 발효되자 한중 양국은 장밋빛 미래 협력을 그리며 환호했다. 그것은 한중 협력의 신시대 이정표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중국 CCTV는 한국을 찾는 유커가 향후 5년간 세 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 무렵 한중 관료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통상 분야의 중국 관리는 한국 관리에게 "중국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소비재를 다양하게 발굴해 더 많이 만들어 달라"고 말하곤 했다. 한국이 질 좋은 소비재를 만들기만 하면 중국이 모두 사주겠다는 얘기였다. 이처럼 한중 밀착이 가속화하는 시점에 미국이 주도한 견제 카드가 바로 사드다. 사드 배치로 한중 협력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미국의 첨단 무기가 한중 경제 협력에 제동을 걸게 된 것이다.   

미국 언론과 정부는 말한다. 한중협력은 이해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밀착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 속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들어있다. IMF 강제편입과 사드 배치는 모두 한국과 동아시아를 향한 미국의 작품이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왔는가? 제대로 된 인식이 선행되어야 제대로 된 대응도 가능하다. 사태의 원인 파악도 안 된 채로, 땜질 처방으로 상황이 개선되기만 기다리는 것은 정부의 자세가 아니다. 다음 파도는 중거리미사일 배치라는 얘기가 솔솔 나오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두고 최근 왕이 중국 외교부장도 다녀갔다. 미국도 바쁘게 움직인다. IMF처럼, 사드처럼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눈을 비비고 팔을 걷을 것인가? 

프레시안 : 사드 배치로 중국은 한한령 보복을 가했다. 그런데 이 시기 오히려 한중 상품무역량은 증가했다. 저자는 한한령을 두고 '제한적 보복'이라고 했다. 

한광수 : 사드가 배치된 해에도 한중 무역량은 증가했다. 한한령은 두 나라 무역의 빠른 증가 추세에 제동을 거는 정도였다. 이처럼 중국이 한국을 상대로 제한적 보복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 입장에서도 한국과의 경제협력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 당시 중국 일각에서 미국의 전략에 말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온 것도 그런 이유다. 중국에 한국은 예로부터 중요한 국가였다.  

그렇지만 중국은 언제든지 한국을 더 싸늘하게 대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드 배치 이후 한국을 향한 중국의 분위기가 얼마나 싸늘한지는 직접 중국을 돌아다녀 보면 안다. 한국에서도 대 중국 인식에 변화가 크다. 한중 사이에 거리가 생기는 것을 바라는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시장을 멀리하고도, 아니면 한미동맹의 끈을 느슨하게 풀고도 우리가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런 불안정한 곡예가 이어지는 동안, 한반도의 미래를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느냐를 시험받게 될 시기는 쉼 없이 다가오고 있다.  

▲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한광수 지음) ⓒ한겨레출판


한국은 미국도 중국도 버릴 수 없다 

프레시안 : 저자는 G2 시대에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문제라면 균형 외교가 가능하겠지만, 현재 한국은 안보 분야에서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중간자적 태도를 취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나.  

한광수 : 그동안 한국은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여러 뼈아픈 사건을 겪으면서도 경제 발전에 상당한 도움을 받아왔다. 앞으로도 저들 거대 국가의 어느 한쪽도 피할 길은 없다. 

유의할 점은 두 시장이 서로 독립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파국을 향해서 대결에만 몰두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중은 서로 거대한 보완 잠재력과 깊은 상호 의존으로 이어져있는 시장이다. 나는 이 책에서 지난 80년 미중관계의 얼개를 이런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짧은 지면 안에서 최대한 노력했다.  

오늘날 우리 수출의 상당 부분도 중국에서 한 차례 가공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연결 구조에 들어 있다. 그들의 거친 대립이 불가피한 협력의 부산물임을 잊으면 곤란하다. 미국의 월스트리트를 보라. 그들은 백악관의 강경파들 위에 군림한다. 결국 권력은 시장의 힘을 벗어나기 어렵다. 말의 잔치에 현혹되면, 가서는 안 될 길을 선택하는 과거 우리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하기 쉽다.      

우리 경제의 지상과제 중 첫째는 미중 양대 시장 활용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미중 두 나라를 더 잘 알아야 한다. 시대 인식이 전면적으로 미흡하다. 얼마 전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을 만나고 온 우리 국회의원들 중에 "미국 의원들은 한국을 잘 모르더라"며 혀를 차는 의원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위험한 태도다. 미중 양국은 초강대국이다. 우리에게 그들이 중요한 만큼, 그들은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국론 분열은 방치되고 있고, 어디에도 국민의 열망을 수렴하여 초당적 대외 전략으로 응집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구한말 이른바 우리 선각자들도 협력보다는 서로 죽일 듯이 대결에 몰두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국제적인 분쟁지역이 갖는 고질병인가?     

우리는 미중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독일의 중국 외교를 보자. 메르켈 총리는 임기동안 최근까지 중국을 열 번 방문했다. 쉬뢰더나 슈미트 등도 비슷했다. 한국 외교는 어떤가? 마주하는 중국 관리를 보는 시각도 문제다. 한국 고위 관리 중에는 중국 관리를 두고 "단순해서 대화가 안 된다"고 혹평한 사람도 있다. 위키리크스에 뜬 얘기다. 같은 중국 관리를 두고 미국에서는 "그들은 한결같이 우수하다. GM, 포드의 최고경영자와 같은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누구 말이 맞겠나?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한국은 외교역량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나라다. 더구나 오늘날 외교는 외교관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의 입장과 비전을 미국과 중국 각계각층에 허심탄회하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소극적인 외교, 의존 외교, 외국어가 서툰 외교가 오늘날 우리를 '불안한 곡예'로 몰아넣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물어보자. 우리가 정말 한반도의 앞날을 주도할 의지를 갖고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외교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프레시안 : 최근 중국 경제가 성장률 둔화를 겪는 등 위험이 커진다는 지적이 대두한다. 국유기업 부실과 부정부패 문제도 고질적이다. 여기에 미국은 무역전쟁을 통해 중국 경제를 계속 압박하고 있다. 과연 중국이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한광수 : 지난 40년 동안 중국의 놀라운 발전은 서방의 중국붕괴론이나 중국위협론 같은 폭탄성 전망이 난무하는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국의 발전을 마냥 좋아할 나라가 어디 있겠나?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은 중국 정부는 미국과의 무역전쟁보다 국유기업 부실 등 국내 경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국유기업 부실은 거대한 난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중국 정부가 이 문제에 얼마나 진지하게 대처하는가를 제대로 추적하기보다는, 이를 '중국 때리기'에 더 요긴하게 이용하곤 한다.  

중국 경제가 힘겨운 것은 사실이지만 국유기업 개혁은 착실히 진행 중이다. 지금 중국 정부는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제2의 문화혁명'이 진행 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철저하게 대응하고 있다. 왕치산을 국가 부주석으로 다시 선출한 것도 "파리건 호랑이건 때려 잡겠다"는, 반부패에 대한 그의 경륜과 능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중국을 자주 가는 편이지만, 갈 때마다 중국 관료들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참고로 시진핑도 본래 사정 전문가다. 상하이방을 정리한 그의 능력으로 후진타오의 결정적 신임을 얻었다. 시진핑과 왕치산은 어릴 적부터 친구이기도 하다.   

"서방이 전하는 중국 얘기는 하나도 믿지 말라" 

중국 밖에서 중국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2005년 사스가 유행할 때, 베이징에서 끝까지 공장을 지켜 주목을 받은 LG의 노용학 부회장은 귀국 후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방이 말하는 중국 얘기는 하나도 믿지 말라." 우리는 서방 정보를 거를 줄 아는 식견을 단단히 갖출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핵심은 정보 전쟁이다.   

중국의 성장률이 6%에서 아슬아슬해지자, 일각에서는 곧바로 중국 경제의 폭락을 점친다.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서방의 예측대로였다면, 그동안 중국은 수십 번 망했어야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중국 경제가 장기간에 걸쳐 연착륙 중이라고 평가한다. 중국 정부 내에서는 이미 지난 1990년대부터 연 5% 성장을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6% 이상의 성장을 이어왔다. 박태준 회장은 즐겨 말했다. "왜 이렇게 중국 걱정이 많아요? 우리 일이나 잘하지!" 

트럼프가 중국을 관세로 한창 공격하던 2018년 여름에도 세계적인 경제전문기관들은 한결같이 중국의 지속 성장을 전망했다. IMF를 비롯하여, HSBC, 골드만삭스 등이 그랬다. 그들은 일제히 중국의 시장규모가 2030년에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한다. 종합 국력으로 보면, 중국은 아직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실질구매력 기준으로 시장 규모를 보면, 중국은  2014년에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 2018년 현재 구매력 기준으로 중국의 GDP는 23조 달러인 반면 미국은 20조 달러 수준이다(이상 IMF 발표). HSBC는 2030년 중국과 미국 GDP가 각각 26조 달러, 25조2000억 달러로 역전될 것으로 내다봤다(국제환율 기준).  

그리고 이들 전문기관들은 일제히 한국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전망한다. 21세기 중반에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을 능가하는 경제 강국으로 올라선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필수 기본 전제조건이 있다. 중국 시장 활용과 남북협력이다.   

▲ "미중 신냉전은 없다. 두 나라는 앞으로도 '할퀴고 끌어안으며' 경쟁의 공존을 이어갈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지난 2017년 7월 8일 G20 회의에 참석해 독일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모습. ⓒAP=연합뉴스


세계 역사의 새로운 패러다임, '공존' 

프레시안 : 중국이 이처럼 성장한다면 결국 미중 두 나라의 패권은 충돌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격화하는 미중 경쟁의 와중에서 한국의 활로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한광수 : 동양과 서양이 다르듯이, 중국과 미국의 DNA도 다르다. 군사력이 월등한 미국은 간단하게 중국을 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도 방어에는 충분한 군사력을 보유한 상태다. 오늘날 전쟁으로 모두가 파멸하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국은 세계제국인 미국과 갈등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미리 알아서 수그리는 나라는 전혀 아니다. 중국인들이 원하는 바는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다. 이것은 1940년대 마오쩌둥 시대부터 이어져온 중국 지도부의 기본원칙이다. 미국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 장제스는 대륙에서 쫓겨나지 않았는가?  

중국은 WTO 가입 협상에서 미국에 혹독한 값을 치렀다. 협상이 진행 중인 과정에서 미국은 유고의 중국대사관을 폭격하기도 했다. WTO 협상장에서는 "우리 미국에서 중국 고기는 개도 안 먹는다"는 얘기도 들어야 했다. 참기 힘든 굴욕이었다. 이처럼 중국의 발전에는 인내가 무기로 작용한다. 인내가 미국과의 협력을 지켜왔다. 중국이 발전하고 나면 중국의 위상은 자연스레 올라갈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중국편이라는 것이다.   

역사상 세계제국은 모두 군사력으로 올라섰다. 로마제국과 대영제국, 그리고 미국이 그랬다. 그러나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천년 동안 중국이 중화제국으로 군림한 배경은 무력이 아니고 무역이었다. 주력 상품은 청화백자였다. 지금 중국이 내세우는 일대일로 전략도 과거 실크로드의 현대판이다. 그것은 상인의 길이었지 군사용 도로가 아니었다. 앞으로 중국으로 일부 시장 주도권이 넘어간다 해도 그것은 패권이 아닌 부분적인 경제력의 이동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같은 권력 이동은 없었다.  

중국은 앞으로도 미국과의 군사적, 경제적 충돌을 피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양국이 공존하는 글로벌 다원화 시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세계 역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는 것이다. '공존' 말이다.   

격변기에 부화뇌동은 금물이다. 우리는 지난 40년 동안 각종 시행착오를 범하면서도 일관되게 미중 양대 시장을 활용해왔다. 지금은 세계 각 나라마다 실리를 찾는 데 몰두하는 세상이다. 우리와 가까운 동남아 각국도 미중 사이에서 철저히 실리 위주로 움직인다. 냉전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눈 감고 어느 한쪽에 붙는 것은 '금지된 장난'이다.

더구나 우리는 분단국이다. 그것도 적대적 상태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힘든 아킬레스건이다. 그 배경에 앞서 말한 미중 밀약이 있다. 앞으로도 북미 양국은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아직 동아시아 전략을 안정화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을 수용하는 데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초조하고 힘센 패권국의 모습이다. 

유감스럽게도, 대립과 협력으로 뒤얽힌 미중관계가 그대로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현재의 움직임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중국은 롤러코스터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시장 전략을 줄기차게 이어갈 것이다. 경제발전은 중국의 지상과제다. 미국의 달러 패권을 유지시켜 온 페트로 달러(석유 달러) 시스템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세계 원유의 생산과 무역구조가 이전과는 다르게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러와 위안화는 대립보다 협력의 길을 걸을 것이다(5장 참조). 그들은 상호 이익에 섬세하게 행동한다. 이미 그 첫 단추가 미국 재무부 채권을 매개로 안정적으로 꿰어져 있다.  

이제부터 미중 양국은 서로의 DNA가 다름을 인식하는 단계로 서서히 접어들 것이다.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갈등의 시행착오를 가능한 한 줄이는 게 중요한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협력과 갈등이 겹쳐진 이 시대를 새로운 안목으로 인식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거기서부터 우리 한국의 앞날이 열린다. 우리처럼 동서 문화의 교차로 역할을 하는데 가장 적절한 위상과 경험, 역사, 그리고 역량을 지닌 나라는 없다. 미국에는 2백만 동포가 있고, 중국에도 그에 상응하는 동포가 있다. 남북은 그들과 엇갈린 동맹이자, 엇갈린 적이었다. 손을 맞잡으면 된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해내야 한다.       

일찍이 김구 선생은 문화대국의 비전을 제시하셨다. 거기에 미국과 중국을 함께 끌어들이면, 다원화한 글로벌 문화의 교차로로 거듭 나는 길이 열린다. 행운은 누가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친미도, 친중도, 남북의 화해 협력도 그 틀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