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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경쟁으로 인해 배우지 못하는 것들 - 다산 정약용은 신부였다

일취월장7 2019. 9. 20. 09:36


입시경쟁으로 인해 배우지 못하는 것들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 교육을 새롭게 정의하자
2019.09.20 03:20:38

"나는 곧 18살이 되지만 세금, 집세, 보험 등에 대해 모른다. 그러나 시를 분석하는 데는 능하다. 그것도 4개국 언어로" -Naina K.

몇 년 전 인터넷에서 화재가 된 트윗이다. 독일의 17살 청소년 Naina가 쓴 이 짧은 트윗은 불과 며칠 만에 수 만 번 리트윗 되었고, 다른 언어로도 번역되며 퍼져나갔다. 이는 한국에도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Naina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교와 교육 제도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학교는 분명 많은 것을 가르치지만 거기에 청소년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부족하다. Naina의 트윗이 한국에서도 많은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비단 독일뿐 아니라 한국의 교육에도 똑같이 존재하는 문제점이다. 

한국 교육, 어딘가 이상하다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과거의 기억 때문일까, 우리 사회는 학교 다니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는 졸업해야 한다고 여기고, 자퇴 등의 이유로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않는 것을 터부시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학교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치고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내용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 다니며 머리 아프게 배운 내용들을 졸업 이후 대부분 잊어버린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 중 대다수는 졸업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잡한 수학공식이나 빽빽한 연표 들을 과연 평생 써먹을 일이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비대해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입시경쟁교육이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은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등급'을 가르기 위한 변별력의 도구로서 이용된다. 학교에서 가르칠 내용은 전부 국가가 정한다. 어떤 과목을 몇 시간이나 가르칠지, 단원별 주제와 핵심적인 표현까지, 교육과정에서부터 교과서까지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초중고 12년을 차례로 거치며 같은 내용을 배운다. 그렇게 배운 내용으로 시험을 치고 점수를 내서 등수과 등급을 매긴다. 매 학기 누적된 내신 성적과 단 하루의 수능 시험은 학생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평가를 매긴다. 너는 1등급 너는 9등급. 

삶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실용적인 지식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지식을 배워야만 하는 모순적인 교육체계의 가장 큰 문제는 정작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꼭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학교에서 배울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 그러나 살면서 꼭 필요한 지식들에 대한 교육 부담은 청소년 개인에게, 가정과 사회에 전가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걸 알려주는 것은 학교가 아니라 부모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Naina 또한 "네가 그런 걸 모르는 것은 너희 부모가 무책임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비난의 말을 들었다. 분명 많은 부모들이 필수적인 많은 지식들을 자식들에게 전달하며, 많은 청소년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찾고 배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배움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 고학력 부모를 가진 청소년들은 학교 밖에서도 다양한 경험과 기회를 통해 필요한 것들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인 청소년들은 학교 교육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학교 교육 외의 교육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학교 교육의 내용과 질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 청소년의 삶과 괴리될수록,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에 있어 꼭 필요한 내용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할수록, 사회적 배경의 차이가 야기하는 교육의 차이는 커질 수밖에 없다.

교육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육은 누구나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성장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누구나 학교 교육을 통해 우리 사회의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교육 당국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필수적인 교육을 제공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러나 현재 학교의 교육 과정을 보자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면면을 보자면 과연 학교는, 국가는 이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이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들이 배우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노동계약서는 무엇이며 작성 시 무엇을 유의해야 하는지,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노조는 어떻게 만들고 사측과 현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월세와 전세의 차이는 무엇인지, 집은 어떻게 구하고 계약하는지, 적금과 예금은 무엇이며 은행 거래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는 어딜 가서 호소해야하는지, 정부에 민원은 어떻게 넣는지, 안전한 섹스와 피임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재난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이스피싱 같은 사기는 어떻게 예방하고 대처해야하는지, 위급 상황에서 나와 내 주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응급처치법은 무엇인지, 결혼식장과 상갓집에서의 예절은 무엇인지, 학교는 알려주지 않는다. 

민주시민 양성이 교육의 목표라고 하지만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시민과 같은 언어들은 외워서 시험 볼 때나 의미 있는 죽은 언어일 뿐이다. 논리적인 토론방법, 민주적인 회의방법, 정치인들의 헛소리를 비판적으로 듣는 법, 정당에 가입하고 활동하기 위한 방법 같은 건 학교에서 배울 수 없다. 올바르지 않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나의 주장을 알리고 행동해야하는지 또한 학교는 알려주지 않는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허울 좋은 말이 무색하게 학생들은 학교 운영 과정에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학급회의, 학생회 등 학내자치제도는 대입스펙 도구로 이용되고, 학교운영위원회 등의 중요한 자리에 학생들은 배제되곤 한다. 

교육을 새롭게 정의하자 

보다 높은 성적, 보다 많은 명문대 입학생을 좇는 맹목적인 경쟁 교육 속에서 정작 교육은 무엇인지, 학교는 어떤 교육을 제공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실종되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과도한 입시경쟁교육을 시킬 권리, 교사가 복종하지 않는 학생을 처벌하고 징계할 권리 따위에 교육권이란 모순적인 단어가 붙는다. 교육의 목적을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한다. 학생의 입장에서, 학생의 욕구에 맞게, 학생의 필요에 따른 교육을 고민해야 한다, 학생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 자신이 배울 내용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 원하는 교육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서 교육권을 정의하고 이를 기반으로 교육 체계와 학교를 바꿔 나가야 한다.

교육은 양방향적이어야 한다. 국가의 필요와 쓸모에 따라 일방적으로 청소년들에게 지식을 주입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자신이 받는 교육의 내용, 자신이 사는 사회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배우는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전혀 개입할 수 없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배우는 교육과정에 대해 학교 현장에서 논의하고, 실제로 교육과정이 만들어지고 결정되는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청소년들은 어떤 과목들을 얼마나 배울지, 교과서는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정할지,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하고 만든 내용을 그저 전달 받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청소년의 참여 자체를 배제하는 지금과 같은 체계 속에서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국정역사교과서 논란과 같은 사건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Naina가 한국의 학생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무리 온라인에서 큰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한 들 현실의 어른들은 '우선 좋은 대학부터 가고 네가 높은 사람이 되어서 바꿔라' 같은 말이나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독일 사회는 17살 청소년의 트윗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불과 며칠 만에 TV 인터뷰 프로그램에서 Naina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교육부 장관과 교사 단체는 지적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해 보겠다고 밝혔다. 우리 사회가 Naina와 같은 청소년을 감당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보다 나은 교육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다산 정약용은 신부였다
[최재천의 책갈피] <파란>

1836년 2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세상을 떴다. 부고를 들은 처가 쪽의 먼 친척 홍길주가 말했다. "그가 죽다니, 수만 권의 서고가 무너졌구나."

다산은 가톨릭 신부였을까. "그렇다." 저자 정민의 답이다.

1786년 조선, 가톨릭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이승훈은 10명의 신부를 직접 임명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인 없이 임의로 신부를 임명하면서 교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교회사 용어로는 '가'성직제도라 하는데, 가는 '임시'라는 뜻.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10인의 명단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공식 확인된 명단은 권일신 등 5인뿐이고, 별도의 기록에 두 사람이 더 보인다. 나머지 확인되지 않은 세 사람은 누구일까.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이다. 두 사람은 조선 교회의 출범 당시부터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 다산은 신부였다."

저자는 어쩌자고 이런 '과격한' 주장을 드러냈을까. 서문을 인용하는 것이 유용하다. "지금까지 다산 연구에 중간은 없었다. 천주교 측에서는 다산이 한때 배교했지만 만년에 회개해서 신자로 죽었고, 국학 쪽에서는 신자였다가 배교한 뒤로는 온전한 유학자로 돌아왔다고 했다. 다산의 천주교 신앙은 일반적인 범위를 훨씬 상회하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의 배교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진실은 중간에 있는데 전부냐 전무냐로 싸우면 답이 없고, 다산의 정체성만 흔들린다. 사람이 이랬다저랬다 할 수는 있어도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 

사람들은 다산에게서 완전무결한 지성을 보려 하고, 일말의 흠집조차 용인치 않으려 든다.

10년 전 강진에서 열린 다산 학술 행사에서 저자가 겪었던 일화다. 발표 중에 '다산초당 시절 다산이 풍을 맞아 마비가 왔을 때 두었던 소실댁과 그녀와의 사이에서 난 딸 이야기'를 잠깐 했다. 행사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어떤 이가 정색을 하고 내게 말했다. "그만 좀 해두시지요. 뭔 좋은 소리라고 그런 말을 합니까?" 저자는 신화화된 미신을 바라지 않는다. 저자는 살아있는 다산, 우리와 같은 인간적 흠결을 지닌 다산을 만나고 싶어 한다.

다산은 세 차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천주교와 정조, 그리고 강진이다. 다산의 생애는 유배 이전과 유배 시기, 그리고 해배 이후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흥미롭게도 청년 시절, 강진 유배, 해배 후가 각각 18년이다. 책은 다산의 청년 시절, 천주교와 정조를 만났던 열여덟 해를 치밀하게 직조했다. 고맙도록 멋진 책. 

▲ <파란1, 2>(정민 지음) ⓒ천년의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