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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실록소설 '행군

일취월장7 2019. 9. 27. 16:58

"참혹한 일제시기와 해방공간의 모순은 현재진행형"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재수록에 부쳐
2019.09.12 02:26:57

작가의 말: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재수록에 부쳐


한일 관계가 어느때보다 긴장관계에 있다. 일본과의 관계가 언제건 매끄러웠던 시기가 있었을까만, 근자에 들어 그 강도가 '국교단절론'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일본이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일본은 우리 정치ᐧ경제ᐧ사회ᐧ산업 전반의 지배체제, 즉 기득권 체제를 유지한 기둥이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그런데 망각의 강을 건너다 보니 그들이 저질렀던 과거를 잊은 것 같다. 더러는 그 시절이 그립고,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었다는 칭송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교과서적인 진단으로, 일제강점기 우리는 그들로부터 온갖 수탈과 고난을 겪었다. 항일투사 체포와 처형,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근자에는 독도 영유권 주장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라는 고문서만 해도 150종이 넘는데, 일본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우겨대는 지경이다. 혈맹이라는 미국은 분쟁지역으로 묶어두려는 관망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만행에 대해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일본군 위안부는 프랑스군의 BMC(Bordel militaire de campagne:프랑스 야전 종군 매음굴)를 본뜬 군 공창(公娼)이라고 우기는 일본 극우론자와 국내 극우론자가 있다. 그러나 열다섯 살 먹은 소녀가 몸 팔러 군위안소에 취업했다는 기록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수십 만명의 일본군 위안부 중에 그런 여성이 몇몇 있을 수 있다. 그런 특별한 몇 명을 가지고 일반화시키는 역사 모독을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고 있다. 프랑스 위안부는 자발성이라도 있겠지만, 조선의 일본군 위안부는 꾐에 빠졌을망정 자발적으로 간 소녀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궤변이 나온다.  

일본과 대한민국의 어느 학자는 1937년-1945년 시기 쌀 수탈을 대대적으로 감행한 현실도 조선으로부터 '수입'했다고 역설한다. 아사자가 늘고, 근근히 초근목피하던 시절 조선 반도에 쌀이 남아돌아서 수출한다? 데라우치 총독이 쌀 수탈을 제대로 하지 못해 쫓겨난 이후 대대적인 수탈이 자행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일제의 조선반도 지배정책이 기본적으로 남농북공(南農北工)이었고, 농업을 삼남지방에, 공업을 북한 지역에 두고 빨대를 들이댔다. 이중 평야지대가 많은 호남지역이 주 수탈대상지역이 되었다(식량 자급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것이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중반 통일벼가 대대적으로 재배되던 때의 일이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일본의 직업관료 집단이 침략적인 해외 식민지 침탈에 대한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또다른 지배정책을 편 것인데, 근본적으로는 더 악랄했다. 식민지 백성끼리 이간질하도록 분열시키고, 지식인 사회를 변절로 분탕질한 추악한 식민통치정책을 폈다. 대동아전쟁이 격화하면서는 더 야만적인 식량공출과 착취, 강제 징용과 어린 소녀들을 잡아다가 젊은 군인들의 병영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더 큰 죄악은 일본이 물러가면서 분단국가라는 가장 잔혹한 범죄를 남기고 떠났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는 미 태평양사령부와의 패전 관리 협상에서 남북 분단의 모든 단초를 제공했다. 그것을 우리의 지도자들이 모르고, 반목과 대결로 통일기반을 무화(無化)시키고 말았다. 이런 뼈아픈 역사 과정을 우리 후세들은 너무도 모른다.

요즘 일본에 비판적이면 국가주의자, 국수주의자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치부된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또 알게 모르게 좌파주의자로 규정된다. 민족주의란 애초에 보수의 가치인데 한국에선 이상하게 왜곡되어 '진보의 아이콘'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런 황당한 논리는 일본 등 외세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다. 우리의 이른바 보수 기득권자들은 일제 시기는 물론 해방관리 시기에 나라의 주류로 우뚝 서 권력ᐧ자본ᐧ정보ᐧ인사권을 독점, 배분해왔고, 그것이 지난 70년 체제를 뒷받침한 기둥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익을 본 세력들이 역사를 희화화하거나 굴절시키고 있다.  

분단 구조는 해방 공간에서 조선총독부와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장난에서 나온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불행히도 현재진행형이다. 남북이 분단되고, 서로 피흘려 대결하는 사이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책략이고, 분쟁지역으로 남겨두겠다는 것이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정책이다. 

그런데 일본의 아베 정권의 '경제침탈' 이후 잠자던 우리의 민족의식이 일깨워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의 극우정권이 우리의 잊었던 과거를 소환하고, 현실과 미래를 내다보게 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제대로 우리 현대사를 들여다보자는 욕구가 생겼다. 까맣게 잊혀진 해방공간의 역사를 되살려보자는 것이다. 돌아볼수록 안타깝고 뼈아픈 역사들이다. 우리가 제대로 역사에 충실했다면 분단의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지 않았을까....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국방일보에 최갑석, 장지량, 채명신 장군의 이야기를 인물전기로 연재하면서 주변 인물들을 취재한 것이다. 그중 아까운 청춘들이 시대적 광기의 제물이 되었다. 일본 육사 마지막 기인 오일균 조병건 홍승화 이재일 김재곤 이성구 생도가 대표적이다.  

4.3 제주 항쟁 시 제주 포로수용소장으로서 좌익으로 몰려 처형된 오일균 소령 이야기는 필자에게 어떤 부채감을 안겨주었다. 그가 1945년 2월 일본 육사 1학년에 들어가던 때는 19세의 나이다. 그리고 처형되던 때는 23세 때다. 그런 그가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고,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알면 얼마나 알았을까.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이념의 제물이 되었다. 

오일균은 해방이 되어서 귀국한 뒤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고, 제주 4.3이 터지자 부산 5연대 대대장으로서 제주에 응원군으로 파견되어 김익렬 9연대장의 핵심 참모로사 4.3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숨은 역할을 했다. 그는 이념과 상관없는 모범적인 군인이었으나 제주 주민을 학살하는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행패를 보고 분노해 주민의 편에 섰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그의 일본 육사 동기들 또한 민족주의적 이상국가를 꿈꾸다 좌익으로 몰려 행불이 되거나 처형되었다. 일본 육사 출신 하면 모두 친일파로 규정되는데, 그런 재단이 일정 부분 허구라는 점도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당시 일본 육사 1,2학년 생도들은 해방이 되자 민족의 성원으로서 독립국가의 간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새롭게 민족의식에 눈뜬 젊은이들이었다. 전승국 미국과 패전국 일본이 야합하여 친일파 재등용 등 한반도 해방 관리를 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것은 아니다, 하고 고뇌하는데, 이것이 족쇄가 되었다. 그리고 정국은 이념투쟁과 헤게머니 쟁탈전으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상이 가중된다. 대구 10.1항쟁, 제주 4.3항쟁, 10.19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이들이 한결같이 좌익으로 몰려 사라진다. 일본이 패망 후 보복을 당할까봐 가장 경계했다는 한반도가 반신불수가 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독재시절을 살아오면서 평화, 분단극복, 민족이란 말을 함부로 꺼내지도 못했다. 자기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자학하면서 외세지향적인 태도를 갖는 것, 그러면서 대결적이고 호전적인 강제된 정서에 매몰되었다. 미국과 일본을 추앙하는 태도들이 세련된 세계 시민인 양 인식되었다. 일본을 주군으로 맹신하면서 구질서 아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착각이 모범적인 삶인 양 포장되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이런 아픈 현실을 돌아보고자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을 쓰게 되었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는 대중들로부터 더많은 공감지수를 얻기 위한 일환이다.   

이 연재물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기자적 현장성과 작가적 상상력, 증언과 기록을 중심으로 엮은 해방 공간의 스토리 텔링인데, 표현 양식은 논픽션 형식을 빌었다. 인물들이 20대 초반 일찍 사라진 관계로 자료가 절대 부족해 캐릭터들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들에 대한 군 기록물도 거의 없다. 갓 20대 연령대라는 한계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자료를 파기한 흔적도 보인다. 인용 자료 중 부분적으로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출처를 찾지 못했거나 작가가 녹여서 쓴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았는데, 이 점 널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연재 과정에서 계속 수정 보완할 것이다.  


<1> 일본 육사 생도 귀에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가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1>
2019.09.12 02:27:40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8.15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대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의 장교단과 사관후보생 전원이 대강당에 모였다. 교정은 이날따라  활시위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전부터 스피커 방송을 통해 전 교관단과 육사 생도는 낮 12시 정각 대강당으로 모이라는 특별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육군사관학교는 도쿄시 남쪽 외곽 지역인 가나카와(神奈川)현 자마(座間)의 숲속에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어서 얼핏 보면 숲 공원처럼 보였다. 연합군의 폭격에 대비하여 교직원과 학생 전원이 나가노(長野) 현으로 이동해 한동안 휴교 상태에 들어갔으나 이들은 최근 다시 이 교정으로 돌아왔다.  

어디선가 공습경계 사이렌이 길게 울리고, 잊은 듯 아련하게 포성이 울리고, 일본군의 비행편대가 창공을 베듯 쏜살같이 날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교정은 날씨마저 후텁지근하고 눅진눅진한 열기 속에 갇혀있어서 뭔가 불쾌하고 불길한 예감이 진하게 감돌았다. 지난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9일에는 나가사키에 또다시 투하되었다. 식자층은 패망을 짐작했지만 철저한 보도관제 속에 국민은 잘 알지 못했고, 알더라도 믿지 않으려 했다. 

일본 제국 군대는 그럴수록 전의를 드높이고 있었다. 만주벌판에서, 태평양제도에서, 인도지나반도에서, 자바에서, 남중국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방송보도가 이어졌고, 그것을 모두들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였다. <황국 신민>은 제국 군대가 밀린다고 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집단 최면에 걸려있었다.  

일왕(日王) 히로히토의 육성 방송이 예고돼 있었지만, 예상치 않은 방송예고 때문에 마음 졸인 사람들이 많았다. 이윽고 낮 12시. 정오 시보가 울리자마자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방송 멘트가 전과 완전히 달랐다.   

“지금부터 중대방송이 있겠습니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모두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천황폐하께서 전 국민에 대하여 황공하옵게도 몸소 칙서를 말씀하시겠습니다. 지금부터 삼가 옥음(玉音)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나운서의 울먹이는 듯한 침울한 멘트에 이어 곧바로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흘러나왔다. 전례없는 일이었다. 실물도 아니고, 하다 못해 동상도 아닌 라디오 기계 앞에서 모두 기립해 부동자세를 취하고 기미가요를 들으라니? 상식이 있는 사람으로 보면 정신나간 일이었지만 반신반인(半神半人) 천황폐하의 옥음이니 지시하는대로 따르는 것이 지당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기미가요를 따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반도는 그런 전체주의적 집단 최면에 감염된 지 수십 년째였다. 
  
키미가요와 치요니 야치다이니 君(きみ)が代(よ)は 千代(ちよ)に八千代(やちだい)に 
천황의 시대는 천대고 팔천대고 
사자레이시노 이와오토나리테코케노무스마데 さざれ石(いし)の 巌(いわお)となりてこけのむすまで  
자그마한 조약돌이 암석이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장중한 기미가요가 끝나자 뒤이어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생각하건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 공영의 낙을 같이함은 황조 황종의 유범으로서 짐의 권권복응하는 바 전일에 미·영 양국에 선전한 소이도 또한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전을 서기함에 불과하고 타국의 주권을 배하고 영토를 범함은 물론 짐의 뜻이 아니었다.  

연이나 교전이 이미 사세를 열하고 짐의 육·해 장병의 용전, 짐의 백료유사의 정려, 짐의 1억 중서(衆庶)의 봉공이 각각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은 필경에 호전되지 않으며 세계의 대세가 또한 우리에게 불리하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여 차해에 미치는 바 참으로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상 교전을 계속하게 된다면 종래에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결국에는 인류의 문명까지도 파각하게 될 것이다. 여사히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하며 황조황종의 신령에 사할 것인가.  

이것이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게 한 소이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종시 동아해방에 노력한 제 맹방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에 죽고 직역에 순하고 비상에 패한 자 및 그 유족에 생각이 미치면 오체가 찢어지는 듯하며, 또 전상을 입고 재화를 만나 가업을 잃어버린 자의 후생에 관해서는 짐이 길이 진념하는 바이다.  

생각하면 금후 제국의 받을 바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다. 그대들 신민의 충정은 짐이 선지하는 바이나 짐은 시운의 돌아가는 바 심난함을 감하고 인고함을 인하여서 만세를 위해서 태평을 고하고자 한다. 짐은 여기에 국체의 호지함을 얻어 충량한 그대를 신민의 적성에 신의하여 항상 그대들 신민과 함께 있다. 만약 정에 격하여 사정을 난조하여 혹은 일명 배제하여 서로 시국을 어지럽게 하고 대도를 그르치게 하여 신의를 세계에 잃게 함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바이다.  

모름지기 거국일치 자손상전하여 굳게 신국의 불멸을 믿고 각자 책임이 중하고 갈 길이 먼 것을 생각하여 총력을 장래의 건설에 쏟을 것이며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튼튼케 하여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도록 노력할지어다. 그대들 신민은 짐의 뜻을 받들어라.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선언문 전문> 
 
히로히토의 육성을 듣기는 처음이었고, 방송도 최초의 일이었다. 열악한 음질과 ‘황조황종’ ‘유범’ ‘권권복응’ ‘백료유사’ ‘정려’ ‘중서’ 따위의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용어, 그리고 히로히토 특유의 웅얼거리는 듯한 분명치 않은 발음 때문에 듣는 사람은 얼핏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다.  

내용에는 항복을 한다든지 패전을 했다든지 잘못을 시인한다는 내용이 없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동아의 안전이라는 목적을 위함이었는데, 연합군이 잔학한 폭탄을 투하하여 무고한 백성을 살상했다’는 뜻으로 억울해한다. 포츠담선언 수용에 대해 '동아시아 해방에 노력한 제 맹방에 대하여 유감'이며, 굳게 신국(神國)의 불멸을 믿으라는 것으로 세계평화를 위해 선언을 받아들였으니 다시 힘을 키우자고 말한다. 항복인지 격려인지 푸념인지 문맥만으로는 헷갈렸다. 다만 분위기로 보아 항복하는구나 하고 느낄 뿐이었다. 

육사 강당은 히로히토의 방송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들끓어 올랐다. 무릎 꿇고 엎드린 자세로 방송을 듣고 있던 교관단이 목을 놓아 흐느끼고, 생도들의 울음소리가 장송곡처럼 울려퍼졌다. 그것은 교정 전체로 감염돼 일제히 울부짖는 곡성으로 변했다. 흐느끼던 장교 몇 명이 격정을 못이긴 나머지 군도를 뽑아들어 스피커의 전선을 토막내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최후의 1인까지 천황폐하를 수호한다! 적과 맞서 싸운다! 쳐부수러 가자!” 
“황성(皇城)으로 가자!”
“우리도 따른다! 가자!” 

일단의 장교단이 집총한 채 칼을 휘두르며 쏜살같이 연병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따라나선 자가 수십 명이었다. 그들은 드리쿼터에 차례로 분숭해 도쿄 시내의 궁성으로 달려갔다. 이들을 이끈 장교가 제3중대 구대장 우에하라 대위였다.  

그는 한달음에 궁성 수비사단(근위대)에 이르렀다. 궁성을 에돌고 있는 인공 운하의 수중 다리 앞에서 저지하던 초병들을 간단없이 제압하고, 근위대 본부 부관실로 뛰어들었다. 

“나는 대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 제3중대 2구대장 우에하라 대위다! 근위대장을 만나러 왔다! 면담을 부탁한다!” 
근위대 사단장 부관이 놀라며 들이닥친 이들을 가로막았다.

“사전 연락도 없이 이게 뭔가. 용건이 무엇인가.” 
“부관이 알 필요없다. 시간없다. 빨리 근위대장을 대면시키라!”
“용건을 말하라! 내가 보고하고 응낙하시면 모시고 나오겠다.”
“근위대장 각하에게 직접 말하겠다! 근위대장을 대면시키라! 시간없다!”

근위대장실에서 일왕의 육성을 들은 뒤 그 역시 처연한 심정으로 실내를 서성거리고 있던 고노에 사단장이 밖의 소란스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두운 얼굴로 부관실로 나왔다.

“부관, 무슨 일인가?” 

우에하라 대위가 단번에 부관을 제치고 그의 앞으로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사단장각하! 저는 육군사관학교 제3중대 구대장 우에하라 대위입니다. 천황폐하의 옥음방송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취소하도록 조치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노에 사단장은 놀라지 않고 여전히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 우국충정으로 달려온 육사 교관단의 애국적 행동은 헤아리고도 남았다. 하지만 천황의 발언은 바로 하늘의 말씀이 아닌가. 하늘의 말씀을 되돌릴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또 전투 상황도 종료되었다. 이미 끝난 일이다. 모든 신민이 천황폐하를 위해 옥쇄(玉碎)의 각오로 오늘에 이르렀듯이, 이제 천황폐하의 뜻을 충성스럽게 떠받들어야 할 뿐, 번복할 수 없는 것이다. 

“안된다. 끝난 일이다. 돌아가라.” 
“옥음방송은 결단코 천황폐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음모입니다! 항복이라니요?” 
“이미 늦었다. 돌아가기 바란다.”
“안됩니다. 취소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건 단연코 음모입니다!”
“천황폐하의 옥음을 거역할텐가? 반역할텐가?” 

그제서야 고노에 사단장이 짜증 섞어 화를 냈다. 제국 신민은, 특히 군인은 천황폐하에 대한 충성이 최고의 가치이자 덕목이 아닌가. 죽으라면 죽는 신국의 도구가 아닌가.

“사단장 각하! 이것만은 안됩니다. 세계 최강의 제국군대가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집니까. 기개가 시퍼런 육사생도들을 보십시오. 저들이 도대체 무엇이 되겠습니까.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저들더러 자결하란 말입니까? 안됩니다! 천황폐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우에하라 대위는 울부짖고 있었다.  

“뜻은 알겠다. 그러나 천황폐하의 뜻을 거역하면 대역죄인이 된다. 대역죄인이 어떤 길을 가는지 잘 알지 않는가? 철없이 굴지 말라! 물러가라! 절대로 안된다!”
“뭣이?” 

그와 동시에 고노에 사단장의 두상이 바닥에 굴러 떨어져 나뒹굴었다. 우에하라가 군도를 뽑아들어 얏! 하는 기합과 함께 허공을 세차게 가르자 순식간에 사단장의 두상이 야자열매처럼 톡 떨어져 바닥에 나뒹군 것이다. 목이 베어진 그것은 피를 홀린 채 하찮은 돌멩이처럼 쓸쓸하게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부관이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책상 옆 벽면에 붙어있는 비상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1초소! 2초소! 3초소! 여긴 사단장 부관실이다! 모두 부관실로 출동하라!”
“가자!”  
주춤하던 우에하라가 머뭇거리지 않고 교관단과 생도들을 향해 외쳤다.
“돌아가자!” 

그는 교관단을 이끌고 다시 육사 교정으로 돌아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은 흥분 속에 휩싸여 있던 강당은 우에하라 일당이 들이닥치자 더욱 비탄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우에하라가 교단에 올라서서 외쳤다. 

“나는 이 전쟁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절대로 우리는 질 수 없다.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와, 하는 함성이 일었다. 그것은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기어린 집회와 같았다. 강당은 이미 집단광기로 변질돼가고 있었다. 우에하라가 다시 외쳤다.

“생도 여러분, 내가 황성 근위대장 목을 치고 왔다. 천황폐하의 옥음방송을 막지 못한 죄를 물은 것이다! 우리는 굴복할 수 없다. 우리 갈 길에 훼방꾼은 없다! 있다면 단호히 처단한다. 나는 여러분의 기개를 믿는다. 최후의 일각까지 대일본제국을 위해 나가 싸우라! 천황폐하를 위해 한 목숨 초개처럼 버리라! 천황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 대일본제국군대 만세!”

그리고 그는 허리춤에서 군도를 뽑아들어 얏! 하는 기합과 함께 자신의 배를 갈랐다. 내장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쓰러져 숨을 거두면서도 그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 모든 것이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교정은 더욱 혼란과 비탄과 절망의 절규로 요동치고 있었다. 

이때 강당의 한쪽에서 또다른 흥분한 생도가 두 손을 높이 쳐들면서 만세를 불렀다.  

“조선의 독립이다! 조선의 해방이다! 하하하! 만세, 만세, 만세!”

눈물 범벅이 되어 외친 사람은 3학년 조선인 생도 김재곤이었다. 항일 투쟁의 본산이라고 자부하던 부산 동래고보 출신이었다. 그것을 남다른 자긍심으로 여기던 그가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채 환희에 젖어 엉엉 울면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패전의 쓰라림으로 통한의 눈물을 삼키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압제와 핍박에서 벗어났다는 감격의 눈물을 쏟고 있다. 너무도 극적이고 대조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 양극단의 장면은 곧 일시에 무너졌다.  

“뭣이? 빠가야로! 개자식!” 

한발의 총성이 빵! 하고 실내를 울리고 김재곤이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흥분한 소속 구대장이 권총을 뽑아들어 김재곤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쓰러진 김재곤의 하얗게 치뜬 눈엔 여전히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고, 숨은 멎었지만 얼굴은 기쁨에 젖어있었다. 

김재곤은 이렇게 조국의 해방과 독립의 벅찬 감격을 패망에 광분한 일본 육사 교관의 분노와 맞바꿔버렸다. 스물한 살의 젊은 생을 마감한 김재곤의 죽음은 조선인 생도들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몸짓이었다. 일본군대의 군율을 지켜야 하는 현실과 조국을 생각하는 식민지 청년의 고뇌, 그런 내면의 이중성으로 사관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어느 한 순간 일본 패망이 확인되자 저 가슴 속 깊이 숨겨졌던 독립의 열망이 화산처럼 용솟음친 것이다. 

오민균은 김재곤이 쓰러지자 앞으로 뛰쳐나가려다 말고 제 자리에 우뚝 섰다. 

“야, 멈춰!” 

2학년 생도대의 장지성과 조병헌이 오민균을 향해 거칠게 손을 가로젓고 있었다. 자중하란 뜻이다. 오민균의 정의감과 의협심을 모르지 않는 그들은 필시 그가 일을 낼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광란의 복판에서 자칫 개죽음을 당할 수 있다. 오민균은 1학년 생도 가운데 준수한 미남에다가 제식훈련, 마라톤, 축구, 검도와 각 학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낸 모범생도였다. 그래서 벌써부터 지도자급 생도로 인정받고 있었다. 일본인 생도들로부터도 명성이 높았다. 

오민균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총성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 강당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살기의 광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분을 못이긴 일본인 생도 몇 명이 스스로 자기 배를 가르거나 팔뚝에 자해하다가 피를 흘린 채 부축돼 나갔다. 강당은 어떤 무엇도 삼켜버릴 것같은 분위기로 치달았다.  

일본 내각은 바로 전날 오전 내각회의를 열고 포츠담선언 수락을 결정했다. 그리고 15일 정오 일왕의 라디오 특별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하기로 결의했다. 

포츠담회담은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두달여 후인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영국·중국·소련이 수뇌회담을 열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대일본 처리방침에 관한 공동 커뮤니케를 발표했다. 이 커뮤니케에서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규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는 1943년 11월 27일 발표한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3대 연합국(미·영·중) 카이로선언문’을 1년9개월이나 늦은 해방 다음날(1945.8.16.) 보도했다. 이는 조선의 독립국임을 국제적으로 재확인하기 위한 그나마 발빠른 행보였다.  

1940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가 강제 폐간된 뒤로 매일신보는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일간지로 남아있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으나 해방이 되자 카이로선언을 보도하면서 재빠르게 변신을 모색했다.  

-루즈벨트미국대통령, 蔣介石 중화민국주석 및 처칠 영국수상은 각 군사사절 및 군고문과 함께 1943年 11月27日 북아프리카 에집투의 수도 카이로에 회합하여 일본국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고 다음과 같은 일반적 성명을 발표하였다. 

각군사 사절단은 일본국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3대 동맹국은 해로 육로 및 공로에 의하여 야만적인 적국에 대하여 가차없는 탄압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 탄압은 이미 증대하고 있다. 3대동맹국은 일본국의 침략을 정지시키며 이를 벌하기 위하여 今次 전쟁을 속행하고 있는 것이다. 右同盟國은 자국을 위하여 하등의 이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또 영토를 확장할 아무런 의도도 없는 것이다.  

右同盟國의 목적은 일본국으로부터 1914年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일본국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膨湖島)와 같이 일본국이 淸國人으로부터 盜取한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국은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前記 3대국은 朝鮮人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맹서코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결의를 갖는 것이다. 이와같은 목적으로써 3대동맹국은 연합제국 중 일본국과 교전중인 제국과 협조하여 일본국의 무조건항복을 촉진재래(促進齎來)함에 필요한 중대차 장기한 행동을 續行한다. 

보도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 선언문은 중국의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내용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렇더라도 ‘맹서코 한국의 독립’을 확약했다. 그러나 일본이 카이로선언을 거부하고 계속 침략야욕을 확대해나가자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소련도 일본의 패망이 임박해지자 일본과 맺었던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대일 선전포고를 선언하면서 붉은 군대를 동원, 만주 관동군을 공격했다. 극동 제1방면군 제25군은 한반도 동북부로 진격해 8월 9일 함경북도 경흥, 11일 웅기, 12일 나진, 14일 청진ᐧ나남을 점령했다. 미국은 이보다 한달 늦은 9월 8일 미 24군단의 사단 병력이 인천에 상륙했다.

소련군이 거침없이 한반도로 진격한 것은 미국이 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이 막강하다고 오판한 데서 불러들인 결과였다. 또한 일본 관동군세가 지리멸렬했기 때문에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 38 이북을 손쉽게 접수했다. 극동에 배치된 소련의 붉은 군대는 제대로 훈련받은 병력이 아니었다. 현지의 소년병, 불량배 따위를 쓸어모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일본 관동군은 주력이 전황이 불리한 태평양과 남양군도, 인도차이나반도, 중국 남부로 대거 투입돼 만주는 진공상태에 빠져있었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선 만주에는 간도특설대 등 특수부대가 비적과 게릴라 색출작전을 벌이는 정도였다. 매복·잠입·미행·감시 따위 밀정을 동원한 첩보활동 위주로 조선인 항일투사를 잡는 데 국한돼 있었다. 

관동군의 주력이 만주에 남아있었다면 일본군이 허무하게 소련군에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일본군은 조선에 19사단(함북 나남)과 20사단(서울 용산)이 주둔했다. 조선 내부의 저항세력은 헌병대와 일부 군 병력으로 제압이 가능했고, 그래서 이들 병력은 주로 수송과 병참을 맡고 있었다.  

그에 비해 중국의 동북 3성과 몽골에는 엄청난 화력을 갖춘 관동군이 주둔했다. 일본 본토에는 도쿄에 동부군 52사단, 오사카에 중부군 53,54사단, 후쿠오카에 서부군 사령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만주로 빼돌렸다. 이중 가장 북쪽에 주둔한 병력은 하이라얼의 관동군 제6군이었고, 가장 남쪽에 주둔한 병력은 광저우에 배치된 중국파견군 제23군이었다. 거리만도 수만 리였다. 이때 만주관동군은 최고 120만명까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전황이 불리해진 남태평양과 인도차이나반도, 중국 남부로 긴급 투입되었던 것이다. 이에따라 일본군 중에서도 막강 군대였던 관동군은 정작 만주에 없었다.  

만약 미국이 관동군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소련을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또 만약 먼저 진격한 소련군이 미국이 제시한 38도선을 경계로 한 분할 통고를 무시하고 남쪽까지 내려 왔다면? 그 역시 한반도 지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소련군은 고작 한반도의 2백km 안에 있었지만, 미군은 수천km 밖에 있는 데다 한반도에 대한 준비가 없었으니 소련이 마음만 먹었다면 소련의 의지대로 굴러갔을 가능성이 높다. 쿠릴열도 4개섬을 소련이 점령한 뒤 지금까지 러시아령이 된 것을 보아도 그렇다.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을 몰아낸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그래서 더 큰 분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도 가능하다. 

미·소 양국은 유럽전선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큰 틀에서 협조적이고 우호적이었다. 냉전 대결로 맞짱을 뜨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여기서 가설을 하나 더 붙인다면, 만약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련이 이틀 뒤 대일선전포고를 할 필요도 없었고, 따라서 한반도에 진격할 명분도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련은 그동안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 미국의 끈질긴 참전 독촉에도 침묵했다.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통고한 2주전의 포츠담회담에서도 소련은 참전 독려에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일본과 맺은 불가침조약을 지킨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핵폭탄 하나로 일본 패망이 앞당겨지자 언제 그랬더냐 싶게 재빨리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이런 ‘사소한 인연’의 잔상들이 한반도 운명을 갈랐다. 힘이 없으면 하찮은 우연에도 나라의 운명이 비참하게 찢기고 만다는 교훈을 주었다. 힘이 없으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역설이다.

어쨌든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사면초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8월 14일 내각회의를 열어 무조건 항복을 의결했다. 다음날 정오, 항복방송을 위해 히로히토는 14일 밤 늦게 NHK 제작진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군복을 차려입고 2차례 녹음했다. 녹음은 철저하게 기밀에 붙여졌다. 강경 군부의 반발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게 되면 단연코 반발할 것이다. 호전주의자들은 진격의 관성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항복 문서는 몇 번의 문구 수정을 거친 끝에 14일 밤 11시 20분 녹음했다. 히로히토는 “첫번째 녹음이 시원찮다”며 재차 녹음했고, 두 번째 것이 채택되었다. 방송시간은 4분30초였다. 이 녹음 SP판을 도쿠가와 의전비서관이 보관했는데, 어떻게 기밀을 알아챈 육군 강경파 장교단이 SP음반 탈취사건을 벌였다. 이들을 간신히 빼돌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항복 방송 직후 일본육사 우에하라 구대장의 궁성 난입은 막지 못했다.    

오민균은 피를 흘린 채 숨진 김재곤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이런 황망함이 있나. 선배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그는 김재곤의 죽음을 씹듯이 되새겼다. 일본의 압제를 벗어난 희열. 그런데 쓸쓸한 주검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뭔가 조국의 앞날을 예고하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조국은 준비되지 않은 해방과 독립을 맞이하고 있었다. 

기간병사들이 단상의 우에하라 구대장과 단 아래 김재곤의 시체를 거둬 단가에 싣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후 김재곤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일부 기록에는 단순히 ‘김모, 종전 직후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고, 창씨개명된 일본명 金光秀雄으로 이름이 나와 있는 정도다. 金光秀雄이란 이름도 김재곤의 동명이인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극도의 혼란 상황이었고, 일본의 입장에서 초상집에서 만세 부른 격이어서 배신감으로 일본 육사가 그를 불명예자로 기록에서 지워버렸을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우리 스스로 그를 방치했다는 것은 독립국가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조선인 생도들만이 그날의 그를 아련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도 지금 자연사했거나, 민족군대의 이름으로 해방 공간의 모순과 싸우면서 숙군 과정에서 대부분 처형당해 그의 억울한 죽음을 대변해줄 사람들조차 사라진 상황이다. 

1945년 8월 현재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는 모두 4,720명이었다. 학년당 정원이 1,500명이지만 편입생 및 전시 충원을 위해 탄력적으로 인원을 운용했기 때문에 전시엔 대개 정원보다 초과되었다. 장교보급 계획에 따라 학년제는 2년제, 3년제, 4년제 등 다양하게 운용됐는데 당시는 3년제였다.  

생도들은 1학년 예과를 마치고 2학년으로 올라가 육사 본과와 항공사관학교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숫자상으로는 육사 배정이 압도적이어서 주류를 형성했다. 전체 생도 중 일본 본토 출신은 90%에 달했다. 나머지 10% 중 5%는 중국 출신이고, 그 나머지 5%는 조선 대만 필리핀 버마 태국 출신 등이 차지했다.  

일본 육사는 1868년 창설되어 1945년 제61기로 폐교되기까지 총 5만7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중 조선인은 제11기(1886) 박유굉을 시작으로 제61기 오민균까지 모두 114명이다. 만주군관학교 예과 출신으로 일본육사 본과에 편입하여 졸업한 27명까지 더하면 141명이다. 졸업생 총수 5만7천명의 0.3%에 준하는 수치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현대사에 끼친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 학교 조선인 졸업생 중 노백린 이갑 박승훈 유동열 김광서(김일성) 지청천 등은 일본군 장교 복무 중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독립운동을 벌였고, 일본 반혁명사건(혁명일심회)에 연루되어 처형된 졸업생도 있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귀국해 항일투쟁을 벌인 중국의 장제스(21기)와 비슷한 경로를 밟은 인물들이다. 반면 일제 군국주의 체제 아래서 핵심적인 일본군 장교로 변신한 졸업생도 많다.  

1945년을 기준으로 조선인 출신은 졸업반 생도 3명, 2학년 6명, 1학년 8명이다. 만주군관학교에서 편입한 생도들을 합해도 일본 육사 조선인 출신은 학년당 8명을 넘지 않았다. 일본 육사는 조선인 청년들에게 입학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군사 교육기관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차별이라고 할 정도로 인색했다. 엘리트 집단이자 특수조직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여지지만, 근본적으로 반도인에 대한 차별에서 초래된 결과다. 

어쨌든 이들은 출신 고보에서 교련선생과 교장선생을 통해 엄격하게 성적·신체조건·품성이 걸러진데다 본고사에서도 어려운 관문을 뚫었기 때문에 수재 중의 수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 육사는 일본 황실이 직접 관장하는 교육기관(복장·총검·학습도구를 포함한 모든 로고는 황실을 상징히는 국화 문장을 사용)이었지만, 생각보다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었다. 군사학과 군사훈련을 주로 배웠으나 철학 세계사 물리 화학 어학(독어·불어·러시아어 중 택일)도 집중적으로 배웠다. 독학으로 생소한 몽골어를 공부하는 학생도 있었으며, 학문적으로 맑스 엥겔스를 읽는 생도도 있었다.  

초중등학교 시절 전체 조회와 수신시간에 외던 천황폐하 칭송문 따위는 생략되었다. 대신 깊이있는 사상 서적 탐독까지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일제를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머리 좋은 학생들이 입교했으니 상투적인 정치적 선전선동을 주입시킬 필요가 없었으며, 대신 고급 교육커리큘럼을 통해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장하라는 교육관이 있었다. 그런 교육 커리큘럼 때문인지 생도들의 인문학적 상상력은 풍부했다.  

특히 조선인 생도의 경우 정체성이 명료한 가운데 민족의식이 내면화한 경우가 많았다. 일본육사 출신은 모두 친일파라는 기계적인 등식은 피상적이라는 분석도 이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김재곤의 죽음이다. 조국의 해방을 갈망하고 있었음을 그의 격정적인 행동을 통해 실펴볼 수 있다. 일본 황실의 지원으로 월급까지 받아가며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근원적으로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희구해왔던 내 안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 육사에 입교하기 전에는 민족의식이나 애국심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육사를 다니면서 역설적으로 민족의식이 체화한 세계관을 가졌다. 즉 다른 차원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던 존재였던 것이다. 이는 엄격한 군율 속에서도 열린 학풍의 산물이었다. 

절망에 빠져있는 육사 교정은 김재곤의 죽음 이후 조선인 생도에 대한 태도가 돌변했다. 일본인 생도들로 급조된 극단적 과격파 동구대가 조선인 생도들을 살해의 대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폐교와 함께 생도들이 수용소에 수용된다는 괴소문이 돌아 이들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인 생도들은 해방의 기쁨을 맛보긴커녕 또다른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 자식들, 대일본제국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그들 조국 독립만을 꿈꾸던 배신자들이었어. 그들이 적국 미국놈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김재곤에게 모욕을 당한 듯 그들은 조선인 생도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의감을 품고 다녔다. 그중 타깃은 청주고보 출신 이성유 생도였다. 8월 23일 밤 일본인 생도들이 이성유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비밀문서 창고를 자주 드나들었으니 제국 군대 비밀을 많이 알고 있고, 김재곤과 가깝게 지냈으니 이적행위를 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들은 관동대지진(대진재)과 다를 바 없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지진 재앙의 보복극으로 근거없는 재일 조선인을 표적 삼아 살인을 저지른 사건을 또다시 범하려 한 것이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시즈오카·야마나시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은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탔으며,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총 40만 명에 달했다. 

이로인해 혼란이 극심해지자, 일본 정부는 국민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한국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괴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격분한 일본인들이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경찰과 헌병들과 함께 조선인을 눈에 보이는대로 체포·구타·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적게는 2천 명, 많게는 6천 명의 조선인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조선인 생도들은 하나같이 잘 생기고 의젓하고 대륙적 풍모를 지녔다. 품격에도 범접할 수 없는 근엄함이 있었다. 그런 것도 은연중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지도자가 되어 일본에 보복할지도 모른다. 김재곤 사건으로 볼 때, 그들은 황실의 국비로 제국 군대의 정신을 익힌 것이 아니라 그들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희구하고 있었지 않았는가. 동구대는 그런 논리를 만들어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성유 그 자가 공부한다면서 군사기밀을 빼내 적과 내통하려고 했던 거야! 배신자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쳐줘야 돼.”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은 격동의 혼란기일수록 기승을 부린다. 그리고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언제나 강경파가 상황을 주도해나간다. 그것이라야 내용의 진위 여부를 살필 것도 없이 조직을 결속시키는 힘이 있다. 예상대로 “없애버리자!” 라는 방침이 정해졌고, 디데이는 8월 23일 밤이었다. 패전의 분풀이를 어떤 식으로든 분출하고 싶은 그들에게는 이렇게 폭발의 출구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자 2학년 동기생 오카다가 이성유를 찾았다. 오카다는 그가 정말 배신자인가를 알고 싶었다. 동구대원들이 배신자가 확실하다고 방방 뜨니까 그는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이성유를 불러내 연병장 귀퉁이로 이끌었다.  

“너 나 믿나?” 

이성유는 오카다의 갑작스런 질문이 의아했지만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새삼스럽게 왜?” 

이성유는 오카다의 고향도 함께 여행한 사이였다. 오카다는 일본으로 귀화한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였다. 그러나 그를 조선인 출신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김재곤과 나눈 대화들이 반동이란 거 모르나?” 
“반동? 그와 무슨 말을 나눴는데?”
“그건 니가 더 잘 알 것 아닌가.” 
“고향 얘기하고, 장래 얘기하고, 부모님 얘기를 했다. 너하고 얘기한 것과 비슷하게.”
“내가 널 배신한다면?” 

오카다가 엉뚱한 얘기를 했다. 

“네가 날 배신할 친구인가. 네가 만일 날 배신하더라도 난 너를 배신할 수 없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하다.” 
“군사 기밀을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맥아더 태평양사령부 알고 있나?”
“잘 알고 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나.”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일본 함대사령부가 진주만 습격을 한 것은 맥아더에게 보복할 빌미를 제공했다. 석유보급로를 확보한다고 했지만 엄청난 오류를 범했다.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그들 편이었고....” 
“뭐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오카다는 소문대로 이성유가 정체불명의 생도라고 생각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 전사 이후 전열을 재정비했어야 했다. 전선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추슬러서 선택과 집중을 했어야 했다. 공격 대 공격, 확전 대 확전만 거듭하다 수습도 못하고 역공을 자초했다. 역습은 역공을 가져온다. 난 군사(軍史)와 전술, 그런 쪽에 관심이 많다. 전쟁은 벌여놓은 것보다 수습이 더 중요하지.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 거친 탐욕이 패인을 불러온다.” 
“그럴싸한 말이다.” 

오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그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성유는 의문의 여지없이 진지한 학구파였을 뿐, 이적행위를 한 친구는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가능하다면 빨리 이곳을 떠나라. 분위기가 살벌하다. 폐교가 결정됐잖나?”

전승국은 패전의 상징으로 사관학교부터 폐교한다고 포고했다. 그래서 더욱 비탄과 자조와 절망의 절규가 들끓었다. 이런 때 누군가 희생양이 요구되는 것이다.  

“고맙다. 하지만 나 홀로 피할 수 없다. 내가 탈출하면 다른 동포 생도들이 위험하다. 난 동포생도들과 생사를 함께 할 거다. 비록 내가 잘못된다 해도... 그리고 너와의 우정은 평생을 지고 가겠다. 잊지 않을 것이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알았다.”

그들은 굳게 악수를 나누고 어둠 속에서 헤어졌다.  

2학년 생도 장지성은 사토 구대장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다. 뒤숭숭하게 나날을 보내던 그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긴장감이 엄습해왔다. 조국이 해방과 독립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인신(人身)은 구속되어 있는 상태다. 자유의 몸은 커녕 또다른 위협 속에 노출돼있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구대장실을 찾았다. 사토 구대장 앞에 서자 사토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돌아가겠느냐, 남겠느냐.” 

고국으로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일본에 남겠느냐는 질문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장지성은 잠시 망설였다. 장교단이 오히려 더 거칠고 강경하다. 말 한마디가 목숨과 바꾸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를 해치기 위한 질문이라면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어느것이 정답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장지성은 정직하게 짧게 대답했다.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간다고?” 사토가 더 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돌아간다고? 네가 일본에 남는다면 대학을 보내주고, 취업을 원한다면 취직시켜 줄 수 있다. 학교 방침이 그렇다. 학교에서 그렇게 결정했다. 어떤가?” 
“아닙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서 뭘 할 건가.” 
“신생 조국에서 우리 군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보복하기 위해서인가? 일본이 적국이 될텐데?” 
“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갑자기 허리에 찬 군도를 뽑아들었다. 60cm 정도 되는 긴 칼이다. 그는 칼날에 손을 대더니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장지성은 순간 현기증이 났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사토가 칼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휘두를 때마다 칼날이 번쩍거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일본 무인은 전통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다. 사무라이 정신 그대로 그들이 믿는다고 하면 그대로 결행하는 기질이 있었다.  

사토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테이블로 가서 서랍을 뒤졌다. 권총을 꺼내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갑자기 장지성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장지성은 일순 숨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후 의외로 담담해졌다.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면 도리어 의연해지는 것이다. 사토가 천천히 말했다. 

“이것은 내가 소위 임관 때 장만한 것이다.” 

그는 권총을 장지성에게 내밀었다. 장지성은 무슨 뜻인지 몰라 한동안 멈칫거렸다.

“이건 너의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허물어지자 장지성은 머릿속이 하얗게 새버린 느낌이었다. 

“사나이로서 자기 조국을 지키겠다는 것은 옳다. 너는 너의 조국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것은 정당하다. 너는 괜찮은 생도다. 다른 놈은 위기를 벗어나고자 얼버무리는데 너는 사나이다. 그런 네가 내 생도답다. 나는 네가 일본에 남아 혼도 없이 살아갈 것이 두려웠다.”

사토가 장지성에게 다가와 칼을 손에 쥐어주었다. 칼집도 풀어서 건넸다.

“패전국인 나는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 무장해제가 되었다. 그래서 네가 내 대신 맡는 거다. 지금 사회가 불안하고 민심이 흉흉한데 신변을 보호하라. 일본은 지금 전국적으로 패닉상태에 빠졌고, 극도의 카오스 사회가 되었다. 자살자가 속출하고 조선인·중국인·대만인에 대한 폭력이 도처에서 감행되고 있다. 무사히 일본을 빠져나가야 한다. 지금 목숨을 잃으면 개죽음이다. 내가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그는 권총집과 권총도 내주었다. 장지성은 선 자리에서 소리내어 울었다. 사토 구대장은 한동안 그를 지켜보다가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리며 말했다. 

“조선인 생도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그러기 전에 스스로 지켜야 한다. 일본은 걷잡을 수 없는 패닉 상태다.” 

장지성은 숙소로 돌아와 권총과 군도를 침낭 속 깊숙이 숨겼다. 룸메이트는 잠들어 있었지만 그는 밤 깊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절대적 위기에 우정은 꽃핀다고 했던가. 일본 무관의 배려는 그의 가슴 속 깊이 진한 감동으로 남았다. 국가나 사회는 몰이성적으로 광분해있는데, 개인은 이런 사람도 있다.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미래, 사토 구대장과 일본인 생도들, 그리고 조선인 생도들을 생각했다. 동구대의 극단주의자들 얼굴도 떠올랐다. 따지자면 그들은 호전적인 장교단에 놀아난 것이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더욱 이성이 마비된 광란에 빠져있었다.    

밖에서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뒤이어 장지성, 장지성 하고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침낭에서 권총을 꺼내 옆구리에 찔러넣었다. 방문을 열자 동기생 이성유가 문앞에 서있었다.  

“잠깐 나가자.” 

그는 어둠침침한 복도 끝으로 장지량을 이끌더니 말했다.

“잘 됐다.” 
“뭐가 말인가.”
“오카다가 나를 구출했다. 오카다는 동구대 멤버잖나. 오카다가 나를 만나고 가서 그들을 설득한 모양이다. 오해에서 풀려났다.” 
“오카다가 널 변호했다니 다행이다. 그래도 안심이 안된다. 이곳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알아.” 
“뭐라고 말했다든?”
“응, ‘이성유는 내가 잘 안다. 학구파 청년이다. 해칠 만한 친구가 아니다. 기밀문서를 탐독했던 것은 학구열 때문이고, 자신이 이성유를 만나 경위를 알아보았는데 변함없이 순수한 청년이다. 그런 그를 해치겠다는 것은 우리 뜻을 잘못 전파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거지.”
“그렇지. 무턱대고 분풀이하면 끝이 없지. 그들 후사도 좋지 못하고 말이야.”
“그런데 내 대신 오민균을 타격하자는 모의를 했다는 거야.”
“1학년 생도 오민균?” 

장지성이 놀라서 물었다. 오민균은 일본인 생도들에게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인물이었고, 부정의 눈으로 보면 위험인물이었다. 정의감이 있고, 사리분별이 분명한 생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 생기고 늠름하고 생도로서의 기개와 품위를 잃지 않은 청년이다. 그는 전승국의 일원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면 만행을 저지른 일본에 대해 보복할지도 모른다고 일본애들은 벌써부터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늘 일본의 폭력성을 비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보복할 수 있다. 과격파들은 스로 설정한 도그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오민균을 만나러 가자.”

1학년 생도반은 연병장 끝머리에 있었다. 오민균도 자신이 테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까짓 새끼들 한 주먹감도 아니니까요.”
“넌 너무 용감해서 탈이다.” 
“제2의 장제스, 노백린, 이갑, 김일성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성유가 걱정했다. 장제스가 일본 육사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 항일전선을 편 것을 일본인 생도들은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제26기 김광서도 그랬다. 일본군을 탈출해 김일성이란 가명으로 만주벌판에서 신출귀몰하며 일본군을 타격한 영웅으로, 그들에게는 대일본제국의 반역자였던 것이다. 노백린 이갑 지청천도 마찬가지다. 오민균도 그중 일원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독일의 예에서처럼 육사 생도는 모두 사살된다는 풍문이 유포되자 교정은 갈수록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절망감을 못이기고 스스로 할복해 목숨을 끊은 생도도 나왔다.

“나는 도쿄를 벗어나 센자키현에서 소형 선박을 마련해서 탈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오민균이 의외의 말을 했다.   

“탈주계획이라고?” 
“그렇습니다.”

오민균은 며칠 전 자신을 따르는 일본인 동급 생도에게 제의했다. 동급 생도는 부친이 센자키 현에서 배를 여러척 가지고 있는 어선단의 주인이었다. 

“가능할까. 난 도요카 읍내에 있는 유우키씨 집에 집결해 귀국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장지성은 장씨 성을 가진 유우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장지성의 먼 일가뻘 되는 재일동포였다. 아버지가 힘들면 찾아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우키의 집으로 가서 준비를 한 다음 니가타에서 폐선박을 구입해 해안을 타고 아래로 내려와 현해탄을 건너 부산항에 입항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험한 파도를 건너야 했지만, 대신 육지와 가까운 코스를 택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계획을 세웠으면 빨리 떠나자.” 

그러나 모든 길은 차단돼있고, 민심은 흉악해지고 있었다. 그는 도쿄 시내 이시하라 상을 생각했다. 이시하라 상은 사찰계 경찰로부터 감시받아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이 바뀌었으니 감시망이 사라졌을 수 있다. 어쩌면 이제 그의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일본 패전이 그에게는 더 안전할지 모르고, 그래서 그가 그들의 신변을 보호해줄 적임자일 수도 있었다. 이시하라 상은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면서, 그 대안으로 아나키즘 사회를 꿈꿔온 사람이었다.  

“이시하라 선생 계속 만나나?” 

장지성이 물었다.  

“공습이 심해서 요즘 댁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민균은 주말 외출 시 늘 이시하라 선생을 찾았다.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그것은 그의 이상과 합치되는 부분이 많았다.  

“모임 장소는 두 곳 중 하나다. 유우키씨 댁과 이시하라 선생 댁...”

센자키 방향은 일단 접기로 했다. 그들은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호에 계속>


<2> 일본의 야만, 그리고 일본의 양심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2>
2019.09.14 12:37:29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1944년 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입교식이 끝나고 몇 주 지나서였다. 제57기 생도 졸업식에 참석하고 저녁을 마치고 일석 점호도 끝나고 잠자리에 들 무렵, 조선인 출신 졸업생 두 명이 갓 입학한 제60기 장지성 생도를 찾아왔다. “이성유 조병헌을 불러내라.” 이성유 조병헌은 장지성과 함께 입학한 동기 생도들이었다. 제60기로 들어온 조선인 생도는 모두 6명이었다. 이중 장지성 이성유 조병헌은 구대는 달랐지만 같은 중대 소속이었다. 그를 불러낸 졸업생은 경성 제일고보(경기고보) 출신 김영수와 김호량이었다.  

“연병장 건너편 관목 숲으로 와라. 외길 숲속 구렁창이다.” 

낮게 말한 두 사람은 곧바로 사라졌다. 운동복 차림으로 옷을 바꿔입은 장지성은 이성유와 조병헌을 찾아갔다. 

“운동 나가자.”  

눈치를 알지 못한 두 사람은 일석 점호도 끝났는데 무슨 운동? 하며 잠시 쭈볏거렸지만 함께 뛸 시간이 주어진 것과 사사로운 얘기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장지성을 뒤따랐다. 운동이라면 무엇이든 좋아서 그들은 상쾌한 기분으로 연병장을 뛰었다. 관목 숲에 이르니 그쪽에서 먼저 알아차리고 손을 흔들며 방향을 알려주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동기생 두 명이 벌써 와있었다. 모두 빙 둘러서자 김영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졸업생 중 박정희랑은 본래의 주둔지인 만주로 어제 떠났다. 그들은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너희들에게 전해달라고 하고 떠났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해주었다.  

“우리는 내일 새벽 남양군도 전선에 배속된다. 레이테도 쪽이 될 것이다. 너희를 만나 우리 뜻을 전달하는 것은 우리만의 전통이다. 그러니 말을 잘 새겨들어라. 이것은 육사 선배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피를 나눈 형제가 하는 말로 새겨라.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 지금 그 길로 가고 있다. 조국을 찾을 때를 대비하라. 철두철미 군사학을 익히고 지식을 쌓아라. 그리고 꼭 살아남아라. 살아남는 자만이 승자가 된다. 우리의 영도자를 위해 죽을 때가 올 것이다. 조국을 되찾을 때 그때 죽어도 여한이 없다. 조국을 위해 태울 한 몸이니 건강 잘 지켜라.” 

머리가 쭈볏 서는 발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보 시절에 이르기까지 줄곧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목숨을 던지자는 세뇌교육을 받아온 그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 목숨 바칠 날이 오다니, 정말 꿈 같은 이야기였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심장이라는 육사 교정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고국에서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태평양에서, 남양군도에서, 만주벌판에서 전승 메시지가 군가의 후렴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패망하게 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일본 패망 얘기가 나오는 자체가 불경이고 이적으로 몰리는 시대였다. 육사의 학풍이 자유롭다고는 해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패망 얘기를 할 정도로 기강이 해이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듣는 자체가 살 떨리는 일이었다.  

“절대로 기밀을 지켜라. 누설되면 다 죽는다. 그리고 자존감을 지켜라. 화랑의 후예답게 신체단련하고 학과에 충실하라. 일본인 생도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된다. 일당백이다. 나라를 되찾으면 우리 군대를 만들 것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에 안녕을 고하고 총통제든 공화제든 대통령제든 입헌군주제든 우리 국체를 정해 우리나라, 우리 국토를 지킬 것이다.” 

이 말을 듣자 모두들 머리가 쫑긋 서는 비장감을 느꼈다. 피로 맺은 동지적 결속력과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엄숙한 발언이었다(그러나 김영수는 1944년 6월 필리핀 레이테도 전투에서 전사했고, 김호량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전사했다). 오민균이 제61기생으로 입학한 뒤 1945년 2월 생도졸업식이 있었다. 두 조선인 생도가 졸업식을 마치고 부대 배속을 받아 떠나기 전날, 그들도 똑같이 선배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입학 생도들을 일석점호 후 관목숲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역시 똑같은 말을 했다. 오히려 내용은 1년 전보다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이었다. 오민균은 일본 패망의 기류를 감지하긴 했지만 막연히 느낄 뿐이었다. 여전히 군율과 군기는 엄격했고, 라디오방송은 연일 승전 소식이어서 거기에 알게 모르게 순치되어 있었다. 신입생으로서 학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선택받은 사람들 아닌가.  

“히틀러는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대패한데다 러시아진격사령부 총사령관마저 소련에 투향했다. 최후의 일전을 위해 연합국 군대는 노르망디에 집결중이라고 한다. 추축국 중 일본제국 군대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도 잔명이 다했다.” 
“사실입니까.”  

이렇게 묻자 졸업생도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메모를 하나 줄 테니까 메모가 가르킨대로 찾아가도록 해라. 우린 내일 새벽 떠난다. 언제나 최후를 대비하라. 조국을 위해 이 한 몸 원없이 쓸 때가 올 것이다. 옥체를 잘 간수하라.” 

그것도 부족했던지 다른 선배가 덧붙였다.  

“발설되면 밀고자도 누구도 다 당하게 돼있다. 조선인은 결국 이용당하고 죽는다. 배신자가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된다.”  

기밀을 지키라는 선배가 준엄히 말하고,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어둠 속에서 연필로 뭔가를 적어서 오민균에게 내밀었다.  

“이학년 생도인 장지성 이성유 선배가 인도할 것이다.”  

말을 마치자 그들은 소리없이 밤안개가 가득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잠자리에 들었어도 오민균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국, 강토, 인민, 해방,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선배들을 만난 얼마 후 영친왕 이은이 조선인 입학생들을 왕궁으로 초청했다. 입학축하 다과회였다. 왕궁에서 만난 이은은 일본 육군중장 복장을 하고 있었고, 부인 이방자 여사는 기모노 차림이었다. 이은은 일본 육사 29기(1915년) 출신이었으니 오민균보다 32기가 앞선 대선배였다. 그는 말수가 적은데다 우리 말이 서툴렀고 기력이 쇠해보였다. 힘이라고는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요요기연병장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날 그의 모습에 오민균은 실망과 비애를 느꼈다. 우리의 왕이 저렇게 초라하게 낯선 손님처럼 연병장에 서있어야만 하는가.  

요요기 연병장에서는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엄청난 규모의 관병식이 열리고 있었다. 그 엄청난 규모의 신무기들과 하늘을 찌를 것같은 열병 함성, 지축을 울리는 탱크부대와 창공을 수놓은 기세 좋은 제로센 비행편대, 그 규모와 짜임새로 보면 어떤 나라도 밟고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가 감히 덤빌 것인가, 문자 그대로 무적의 군대였다. 거기에 비해 무기력한 회색분자로 보이는 우리의 왕은 너무도 초라하고 처량했다. 그를 보더라도 조선의 독립은 상상이 안되었다. 왕비 이방자 여사가 센베이 과자와 오차 한잔씩 따라주는데 돌멩이도 소화시키는 청년들에게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대접이었다. 그만큼 청년들의 정서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오민균은 고향의 따뜻한 숭늉과 누릉지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한결같이 투덜대었다.  

“왕이 일본인이야, 조선인이야?”  
“글쌔, 중간자도 아니고...” 
“우리를 초청해주신 것만도 고맙다고 생각하자.”  
“센베이 과자가 그렇게 중요한가. 보리밥 한그릇보다 못해. 왕은 완전 일본인이야. 하긴 아기 때 일본으로 끌려왔으니 보고 배운 것이 어쩌겠나.”  

생도들은 저마다 실망하고 돌아왔다. 일요일 봄날의 아침. 오민균은 장지성과 함께 외출증을 끊어 도쿄로 나가 해안선이 길게 펼쳐진 만을 걸었다. 장지성은 입학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오민균을 눈여겨보았고, 둘은 곧바로 친해졌다. 일년 선후배 사이였지만 동지 같았다. 가는 도중 이정길 조병헌과 합류했다. 교정에서는 각자 따로 행동을 했다가 시내에서 조우하는 길을 택했다. 교내에서부터 단체로 움직이면 오해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메모지가 가리킨대로 만의 뒷골목을 따라 움직였다.  

“눈이 부시군.”  

이시하라 상이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사십대 초반쯤 돼보이는 그는 머리칼이 하얗게 새어있어서 생각보다 나이 들어 보였다.  

“시내에서 합류해서 왔습니다.”  

오민균이 메모쪽지를 펼쳐보이면서 말했다.  

“잘 왔소. 이정길 군은 누구인가요.”  

그는 일행을 하나씩 훑듯이 살펴본 뒤 물었다.  

“접니다.”  

이정길이 앞으로 얼굴을 내밀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렇군. 형이 이정남씨랬지요?”  
“그렇습니다.” 
“지금 서울에 계시지요?”  
“네.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내가 형의 주오(중앙)대학 선배요. 활동을 같이했소. 지금 몽양(여운형) 선생 밑에서 일하고 있다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생도들은 그가 이정길의 형과 가까운 사이라고 하자 더 가깝게 느꼈다. 그러나 청년들 모두 몽양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은 학과공부에만 충실한 청년들이었다. 

“내가 보기로는 몽양 선생의 방향이 옳은 것 같은데....”  

생도들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말을 바꾸었다.  

“나를 따라오시오.”  

그는 생도들을 안방 안에 있는 또다른 미닫이문을 열고 깊숙이 자리잡은 서재로 안내했다. 서가에는 수천 권의 책이 사방 벽을 둘러싸고 있었고, 한쪽 면 서가엔 체호프, 고리끼, 톨스토이, 도스또옙스키 등 러시아작가 전집이 꽂혀 있었다.  

“나는 일본 군국주의가 망해야 세계평화가 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오.” 

뜻밖의 발언이었다. 그는 방안의 다기를 풀어 차를 끓여 내놓은 뒤 말을 이어갔다. 

“이정남 동지 동생이 찾아올 거라는 연락을 받았소. 이 동지는 몽양 밑에서 선전부 일을 보고 있다는데 여러분은 잘 모르고 있군. 그는 깨어있는 사람이는 사람이라서 존경하오.” 

벽에 걸려있는 머리를 박박 깎은 죄수복 차림의 액자 사진 속 청년의 눈매가 날카롭고 강인해보였다. 그의 젊었을 적 사진이었다.  

“어느 민족이든 자국의 체제와 문화로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소. 여러분은 일본패망 뒤를 대비하시오. 일본이란 나라의 광기의 결말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인류문명사가 말해주고 있소. 로마제국, 오스만제국의 전쟁, 십자군전쟁이 다 그렇소. 오만의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결과로써 말해줄 것이오. 여러분은 무지개보다 찬란한 조선의 청춘들이오. 조국해방의 내일을 짊어지고 나갈 주인공들이란 점 명심하시오.”  

일본의 패망, 조국해방, 그리고 빛나는 무지개 계절을 사는 청춘.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뜨겁게 덥혀져왔다. 생도들은 그의 짙은 눈썹과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에 압도되었다. 

“일본 패망을 말씀하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이정길이 물었다. 그로서는 일본 패망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탐욕의 질주는 끝내 패망을 가져오게 되어있소. 그중 진주만 습격이 패망을 자초했소.”  
“패망하기 위해 진주만을 습격했다구요?” 

젊은 생도들은 일본이 왜 진주만을 습격하고, 왜 미국과 싸워야 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명쾌하게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 대일본제국이 하는 일은 모두 옳았고, 대국을 밟았다는 데 자부심을 주었고, 그렇게 하여 열도가 열광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 병탄, 러일전쟁, 청일전쟁, 만주사변, 난징사변, 진주만 습격 모두 승리했소. 패배를 모르는 불패제국이라는 명망을 얻게 되었지. 그러나 그것은 자멸을 자초하는 출발점이었소.”  

1930년 전후 일본의 기술 산업은 세계 정상급이었다. 서구의 전투기보다 성능이 뛰어난 전투기를 생산하고 있었고, 전함과 항공모함을 건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보병은 배부르게 먹고, 절도있는 전쟁 실습으로 가는 곳마다 불패의 위력을 과시했다. 해군은 태평양 해역과 러시아·중국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런 능력은 두 말할 것없이 엄청난 자본의 힘 덕분이었다. 그 자본은 식민지에서 조달했다. 조선과 대만 만주 등 식민지의 생산물을 수탈해 고스란히 군수산업에 투입했다. 자국도 마찬가지였지만, 놋그릇 숟가락은 물론 깨 파마자 잔디씨 송진까지 식민지 산하에서 훑어갔다. 젊은 군인들의 성욕을 채워 사기를 세워주기 위해 식민지 처녀들을 잡아다가 각 부대에 배분했다. 아닌게 아니라 병사들은 욕구를 충족하며 사기가 충천했다. 그러나 인류사를 통해서 볼 때 가장 치욕스럽고 더러운 전쟁이었다. 씻을 수 없는 인류의 모독이었다. 군사의 치오르는 사기에 힘입어 일본군은 중국의 동북 3성과 몽골까지 침공해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본토를 잠식했다. 그들은 6개월 정도면 중국 전역을 장악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주요 도시는 점령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넓은 면적의 농촌과 산간지역은 점령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오쩌뚱이 이끄는 홍군의 지구전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장제스의 국부군과 토착 유격대가 도처에서 출몰해 장기전으로 변모했고, 그것은 끊임없이 소탕작전을 펴도 솜이불에 박힌 이처럼 중국 군대와 게릴라들은 제거되지 않았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험한 지형과 깊은 종심으로 일본군은 수렁에 빠져들어 되돌아 나오기도 힘들었다. 일본군대는 전선 경계가 불분명한 게릴라전에 익숙하지 못했으며, 공세 지속력이 한계에 부딪쳐서 지구전을 감당하는 데 몹시 힘에 부쳤다. 광활한 영토에서 지구전의 성패는 안정적인 군수물자 보급에 있고, 그 핵심은 식량과 석유자원인데, 그중 석유 조달이 쉽지 않았다. 본토는 물론 그들이 장악한 식민지에서는 석유 한방울 나오지 않았다. 대안을 찾다 보니 동남아 유전 지역을 점령해 조달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말레이반도 인도차이나 반도는 서구 열강이 먼저 들어가 깃발을 꽂은 곳이었다. 다행히도 그 무렵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독일에 패배해 식민지 관리에 헉헉거렸다. 일본에게는 기회였다. 그런데 말라카 해협이 문제였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국 태평양사령부가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으니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데 목에 가시가 걸린 것같은 기분이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미곡과 석유자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미 태평양사령부가 말라카 해협을 장악하고 있으니 자유로운 내왕이 쉽지 않은 것이다. 미국은 그들대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끝 모르게 이어지자 일본의 팽창 정책을 억제해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뒤늦게 유럽전쟁에 개입해 유럽 전선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다른 한 발은 태평양에 걸치고 있어서 전선이 이분화되어 있었다. 유럽 서부전선을 공략하기 위해 태평양을 사이에 둔 일본과는 충돌 없이 지내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미국 내에는 이민의 나라답게 많은 일본인이 미국에 들어와 큰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요 정치ᐧ행정조직에도 참여해 우호 관계가 깊었다. 그러나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외교적으로 가까운 중국 본토를 침공하자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끝없는 탐욕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미국은 어느날 일본에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석유가 있어야 탱크와 수송차량을 굴리고 함대와 전투기를 띄우는데, 석유 공급이 차질이 생기자 일본은 독자적으로 에너지 공급선을 찾아나섰다. 일본이 점령한 조선과 중국 동북 3성, 내몽고는 넓은 영토와 인구, 여타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석유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중국 대륙의 종심까지 깊숙이 들어간 일본군은 석유 보급이 없으면 전쟁을 치르나 마나였다. 일본군은 군사비밀문건을 통해 ‘중국을 점령하려거든 만주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려거든 중국 대륙을 정복해야 한다’고 군사들을 고무했다. 그 결과 만주에 이어 중국 대륙을 거의 집어삼키는 막바지에 있는데, 미국이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해버린 것이다. 일본군의 군사작전은 차질을 빚고, 종심으로의 진격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가설을 붙인다면, 만약에 만주에 석유가 풍부하게 매장되었더라면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쉽게 무너졌을까. 또 만약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미국과 공존이 유지되었다면 한반도는 물론 만주, 중국본토까지도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일본군 수뇌부는 중·일전쟁의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미 태평양사령부의 본부인 진주만을 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말라카 해협을 뚫는 길이고, 동남아시아 지역에 매장된 석유자원을 확보하는 첩경이었다. 그래서 결단코 말라카 해협을 확보해야 했다. 이에따라 이 해역을 맡고 있는 태평양사령부 심장을 치기 위해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해군연합함대사령부가 진주만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미국은 한동안 혼비백산했다. 필리핀까지 올라온 맥아더 태평양사령관은 호주로 도망쳤다. 말라카 해협을 뚫은 일본은 여세를 몰아 미얀마 라오스 중국 남부 내륙을 접수하고, 보르네오 스마투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 상륙했다.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도 접수했다. 이제 전쟁은 일본군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여러분이 열광했던 진주만 습격은 벌써 3년 전의 일이 되었군.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과 필리핀·말레이 반도를 동시에 공격했던 것이지. 일본 군국주의가 진주만을 공격한 목적은 미 태평양함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중부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전역을 장악하고, 이 일대에서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자는 것이었지. 그 지역은 3모작이 가능한 쌀생산지와 석유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으니까 이기면 일거삼득인 셈이지.”

450대의 항공기를 실은 6척의 일본군 항공모함이 하룻만에 미 태평양함대를 격침시킴으로써 세계를 경악시켰다.  

“진주만에 주둔해 있던 미해군의 전함 7척 가운데 5척이 격침되고, 200여 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니까 한마디로 일방적 승리 전과지. 맥아더가 주둔했던 필리핀에서도 공습을 받고 절반 가량의 항공기 손실을 입었소. 싱가포르에서 영국 공군력이 초토화되고, 괌, 레이크도, 홍콩 등지에서 연합군 기지들이 차례로 파괴되었소. 가는 곳마다 야마모토 해군은 연전연승이었소.”  

일본군은 침공 6개월만에 태평양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상륙전에서도 25만 명의 연합군 포로를 획득하고, 인구 2억이 넘는 인구의 점령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시하라 상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의 전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군인으로 평가하지 않소.”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라고 하면 일본 국민에게 천황 다음으로 우러르는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원수 계급이 추증되고, 신화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이시하라 상은 그를 평가하지 않는다. 전쟁영웅을 단칼에 잘라버린다는 것은 육사 생도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도들은 어느 일면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저희는 야마모토 장군의 위대한 전술과 군인정신을 배웠습니다.” 
“그래요? 자, 한번 봅시다. 야마모토 제독은 세계전쟁사에 기록될 전과를 올린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그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관망자 입장에서 당사자로 돌아서게 한 수훈갑이 되었소. 그게 전쟁 영웅인가? 세상을 보는 소양이 그렇게도 부족하단 말인가?” 

야마모토는 미국 유학파였고 주미 일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주미대사관 시절 미국의 산업생산력과 과학기술력을 직접 지켜보았다. 미국의 산업생산량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어떤 나라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내다본 사람이었다. 

“야마모토는 초기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도조 히데키 육군 강경파에 맞서 전쟁을 반대했소. 고노에 수상이 승리 가능성을 묻자 만약 이기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1년이라고 했소. 이 발언 때문에 강경파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소. 그런데 신념을 꺾었소. 그들에게 굴복하고 변신했소. 그의 예측대로 결과가 빤한데 왜 끝까지 전쟁 반대를 관철시키지 못했나? 그런 반대가 무슨 의미가 있소? 이중적이지 않은가?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자기정신을 끝내 관철시켰고, 죽어서 나라를 건졌지만, 야마모토는 전사하고 패배했소. 소신도 버리고 목숨까지 잃었소. 비전이 없는 기능적 전쟁기술자와 세상의 철리를 아는 장군과의 차이요. 과연 그가 영웅으로 칭송받을 자격이 있소?”  

생도들은 그의 풍부한 군사정보, 상황을 분석하는 날카로운 논지에 차츰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선배들이 가르쳐준대로 그는 폭넓은 시국관을 갖고 있었다. 천황폐하 만세만을 외치는 그들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야마모토는 중부 태평양에서 미군을 몰아내고, 호주와 미국의 병참선을 끊기 위해 과달카날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가 만 명이었소.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이 기백 명이오. 노임 한 푼 받지 못하고 목숨까지 잃었으니 원혼인들 왜 할 말이 없겠소? 이런 야만이 어디 있소? 한 맺힌 귀곡성은 하늘에 닿고, 그래서 가해자는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지. 그들의 원성이 제로센 전투기 날개에, 엔진에 침투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그래서 야마모토부터 잡아간 거요.”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일본군 전선과 비상 활주로 건설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과달카날 섬 시찰에 나섰다. 이때 미군사령부는 일본군 사령탑의 동태를 파악하는 암호를 해독해놓고 있었다. 미군은 야마모토가 라바울 상공을 시찰한다는 암호문을 해독하고, 호위기 편대와 공격기 편대를 편성했다. 호위조가 일본군 호위기들과 공중전을 벌이는 사이 공격조가 야마모토의 전용기에 집중적으로 기총소사를 퍼붓기로 하고 출격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야마모토 전용기는 시퍼런 태평양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2억의 식민지를 새롭게 장악하고 태평양 제해권을 확보했으니 오만이 극에 달했지요. 그들의 남은 문제는 광활한 점령지역을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소. 일으키는 것보다 끝내기가 어려운 것이 전쟁의 속성인데, 그들이 그럴 능력이 있는가. 열강들이 암암리에 휴전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해왔는데도 오만이 극에 달해 계속 내달리다가 폭망하게 되었지. 공격의 관성은 그렇게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오. 암호문자 하나로 패망의 길로 들어서는데 말이오. 우리는 불패제국의 허상을 보고 있소.”  
“미군이 어떻게 암호문을 해독했습니까.” 

오민균이 물었다.  

“미국은 영국이 개발한 레이더 기술과 암호해독 기술을 지원받은 거요. 독일군 정보탐지를 위해 개발한 것을 미국에 기술 이전을 해준 것이오. 레이더와 애니악컴퓨터를 이용한 암호해독 기술이었소. 일본 해군은 신식 항공모함 5척을 이끌고 당당하게 미군함대를 향해 진격했는데 미군은 일본의 공격 날짜와 시간, 장소, 전함과 병력 규모를 모두 간파했소. 미군 항모는 진주만에서 다 깨지고 고물 2척밖에 없었지만 대신 레이더 장치로 수평선 너머로부터 진격해오는 일본 함대의 동향을 손금보듯 꿰뜷어 보면서 미드웨이섬에 도달하기 전에 전투기로 정밀 타격했소. 폭탄을 가득 싣고 오던 일본 함대가 미군기의 공격으로 폭발해 항모전단을 모두 잃었소. 이렇게 해서 태평양의 제해권은 다시 미국으로 넘어갔지. 호주로 퇴각한 맥아더가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일본 본토 진격계획을 세웠소.” 
“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정보들을 알고 계시나요?”  
“감옥에 있으나 사회에 있으나 나는 경계 없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졌소. 인간의 영감은 놀랍소. 그 부분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시오.”  

이시하라 상 특유의 안광이 다시 빛났다.  

“나는 일본이 난징대학살을 자행하면서 패망의 길로 가는구나, 단정했소.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나라가 온전히 버틴 역사가 있소? 독재자가 영원히 길을 열어간 역사가 있소? 침략으로 세운 문명은 결국 멸망했소. 호전성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오. 짧게는 몇개월에 머문 경우도 있소. 그 시기를 산 백성들만이 고스란히 희생을 강요받는데 그 원혼인들 가만있겠냐 말이오. 이건 미신이 아니오. 사람을 죽이면 미치게 되어있소. 이런 미친 전쟁에 선량한 백성들이 끌려가 이유도 없이 죽어갔소. 조선의 백성들이 끌려가 죽었소. 난징에선 아버지와 어머니를 멋모르고 따라간 어린아이들을 물건처럼 구덩이에 집어던지는 게임을 했소. 누가 멀리 던지나 내기를 하면서 웃었소. 누가 많이 찔러죽이나 내기를 했소.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신이 필요하겠소? 종교가 필요하겠소? 양심이 필요하겠소? 농사짓는 선량한 농부를 데려다가 죽도록 일을 시키고, 돈 한푼 주지 않고 죽이거나 쫓아버리니 이런 도둑놈의 새끼들이 온전하겠소?”  

그는 어느새 선동가처럼 열을 뿜었다.  

“제군들이 군인이 되려는 것은 전쟁광이 되려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이 나라엔 그런 미치광이들이 수도 없이 많고, 그런 전쟁광을 배출하려고 난리요. 나라를 위한다고 분식하고 미화해서 수천명, 수만명의 미치광이를 만들어내고 있소. 당신들도 어느 사이에 전쟁광의 도구가 되어 함께 미쳐갈지 모르겠소. 하지만 힘을 가지고 욕망을 배설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산다는 것 명심하시오. 아무리 좋은 전쟁도 나쁜 평화보다 못하오. 아무리 비싼 평화도 싼 전쟁보다 염가요. 사람을 죽여야 평화가 온다는 것은 문명사가 가르친 배덕일 뿐이오. 나폴레옹이 이겼다고 한 세기를 갔나, 히틀러가 이겼다고 20년을 갔나? 당대의 무고한 백성들만 희생시켰을 뿐 남은 것은 처절한 자기파괴와 자기부정 뿐이오. 난징대학살의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지요?”  

생도들은 난징 학살사건을 잘 알지 못했다.  

“난징대학살을 보고 국제연맹은 물론 일본내 양심세력도 침묵하지 않았소.” 

국제연맹은 일본제국이 원래 가지고 있던 조선반도와 대만의 영유권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더 이상 중국과 여타의 나라를 침공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오히려 더 잔혹하게 아시아 곳곳에서 침략 학살을 자행했다. 석유를 얻어서 대동아공영권, 즉 팍스 저페니스를 달성하려는 야욕이었다.  

“지금 분명 광기의 시대요. 그래서 내가 살 길을 생각해낸 것이 아나키스트운동이오.” 

그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도들은 알았다. 하지만 열아홉 살의 모범청년들은 아나키스트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것이 뭐길래 일본 군국주의를 증오하고 저주하는가. 오민균은 그가 조선인보다 더 반일감정이 강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일본을 반대하신 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일본인이신데요.” 

그러자 이시하라 상이 희미하게 웃더니 정색을 했다.  

“나는 일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오. 군국주의 범법자들을 욕하는 것이오. 배웠다는 사람이 죽은 지식 팔아서 뭘하게? 하긴 먹고 살기야 쉽겠지. 하지만 고귀하게 얻은 지식을 그런 사사로운 것과 맞바꿔먹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 영혼입니까. 자, 보세요. 1923년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때 조선인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소. 지진이 난 후 도쿄, 요코하마, 사이타마, 이바라기 등지에서 지진 여파로 각처에 불이 나고 건물이 타고 사람이 죽자 관청 놈들이 조선인이 저지른 만행으로 날조했소. 자기들 구호의 실책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서 증오심을 촉발시킨 거요. 일본 우익 군경과 자경단(自警團)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어 일본인을 죽였다‘, '조센징이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있다’고 벽보를 붙이고 조선인 사냥에 나섰소. 일본 정부가 민심을 돌리려고 유언비어반, 공작반, 타격반을 조직해 이 짓을 한 것이오. 공권력이 그런 것이오. 헌데 그것을 누가 고발한 줄 아시오? 양심을 가진 일본 지성들이 했소. 이건 인간의 짓이 아니다, 사기 치지 말라, 선량한 사람을 부려먹고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게 인간이 할 짓이냐, 그만두라고 고발했소.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니요? 조선인이 건물에 불을 질렀다니요? 조선인이 약탈을 했다니요? 그들은 숨죽이며 불쌍하게 살았을 뿐이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증오를 심어서 재해의 분풀이로 삼았소.” 

청년들은 비감해졌다. 관동대진재의 참상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이 이토록 처참하게 타격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 현실 같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일본인으로부터 들으니 더욱 씁쓸했다.  

"군경과 자경단이 무기를 들고 돌아 다니는데, 조선인이다 싶으면 몽둥이로 패죽이고, 끈으로 결박해서 매달아놓고 장작불에 태워죽였소. 어떤 상점 주인이 조선인 하인이 불쌍해서 몰래 도망가도록 도와주는데 자경단이 뒤쫓아가서 쇠갈고리로 그의 등을 찍어서 눕히고 칼로 배를 도려내고 창자를 끄집에내 빨랫줄에 걸었소. '고국에 아내가 있고 나는 아무 짓도 안했습니다. 일본에서 일만 하고 있어요‘라고 서툰 일본어로 끊임없이 사죄하며 무릎 꿇고 빌던 조선인의 목을 베었다는 소녀의 목격담도 있습니다. 이런 비극을 누가 고발했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용기있는 조선인은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자구대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고발한 사람들이 일본의 양심들이에요. 왜? 인류가 지향하는 가치에 위배되니까. 그들이 주로 사회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 노동맹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타격 대상이 되어서 체포, 구금되었소. 양심적인 일본의 문사들도 글로 썼지요. 당시 11살이던 시노하라 교코(篠原京子)가 소설로 상점의 조선인 하인이 살려달라고 서툰 일본어로 끊임없이 빌면서 사죄했지만 청년들에게 칼로 난도질 당하던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벼랑에서 바다에 던진 조선인이 헤엄쳐 다른 쪽 기슭으로 올라오는데 나오려고 하면 다시 바닷물로 집어넣고 또 집어넣고, 종당에는 몽둥이로 머리를 쳐서 물속에 영원히 가라앉힌 참상도 일본인 시인이 고발했소. 어느 여류학자는 ’남동생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소방대가 지니고 다니는 쇠갈고리 막대를 나에게 쥐어 줬다. 동생은 이것을 조선인에 대한 호신용으로 쥐어준 것이라고 했는데 동생도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독기를 품고 쇠갈고리를 들고 다니면서 조선인을 해쳤다고 했다’고 고백했소. 그런데 조선인은? 조선의 시인 작가 문사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저들의 행태는 지금도 진행중이오. 그런데 조선의 양심가들은? 학자들은? 종교인은? 지금 뭐하고 있소?“ 

그가 말을 마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도들 역시 절망감에 빠져서 우두커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민균은 이시하라 상의 사상적 기저를 머릿속으로 탐색했다. 약소민족의 비애를 대변하는 저 담대한 시선...  

“선생님, 아나키즘운동이 그렇게 용기를 주시나요?” 한참 후 조병헌이 물었다. 이시하라 상이 예의 조용히 웃다가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통제되어서 제한된 지식밖에 유통되지 못했으니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하지. 그렇게 군국주의 체제가 음해하고 이적시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인류가 지향해야 할 최선의 가치 중 하나요.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오. 인문학적 사유의 사상적 체계라기보다 말 그대로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생활철학이자 실천운동이오. 공동체가 평화롭게 제도법 이전의 규범으로, 관습법으로 사는 것.... 바로 인디안의 생활방식이오. 조선의 제주도에 그런 제도가 있소. 바로 아나키스트의 이상향이오.” 
“인디안의 생활방식이 제주도에도 있다구요?”  
“그렇소. 아나키즘이란 인디안의 삶의 족적을 더듬어 가는 사상이오. 좀더 설명하자면,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 평등의 세상을 꿈꾸는 사상이오.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지만 나는 철저하게 그런 그들과는 선을 긋고 있소. 폭동을 선동한 바쿠닌과 같은 극단적 혁명주의자가 있지만, 우리는 톨스토이와 같은 인본주의적 가치를 이상으로 삼고 있소. 낭만적이지만 실천가능한 사상이오. 일본 군국주의가 인간본성과 양심을 파괴하는데, 그래서 수탈과 억압을 경험한 조선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저항의 이름으로 아나키즘을 이용하고 있는데 근본정신은 민족주의 저항정신과는 개념이 다르오. 제주도는 그런 이념 체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 수단으로써 체득하고 있는 생활방식이어서 이상적이오. 아나키즘과는 우연의 일치겠지만, 중앙정부로부터 혜택은 못받고 소외받고 차별받고 착취 당하니 자구의 수단으로 자기들끼리 더불어 사는 약속인 향약 같은 것을 지키며 사는 방식, 얼마나 아름답소. 소외된 사람들이 스스로 결속하고 유대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간다는 것, 바로 인디안 정신 아니겠소? 국가단위로서는 규모가 작아서 수용이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런 작은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 모이면 국가 단위가 되겠지. 제도폭력이 난무하니 생각해보는 사조요. 그런데 그런 것일수록 쉽게 강자에게 밟힌다는 것이 한계지.” 

이시하라 상은 1911년 처형된 고토쿠 슈스이를 스승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고토쿠 선생님은 메이지시대를 대표하는 반군국주의자로 모반사건의 주모자로 몰려서 처형당한 일본의 양심이었소.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비전론(非戰論)을 제창하셨는데 바탕은 자유 민권이라는 사상적 지향에서 나온 것이었소. 대역사건은 구체적인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런 신념 때문에 처형된 것이오. 그를 따르는 열한 명의 제자도 함께 처형되었지. 뿌리가 뽑힌 것 같지만 빌라도 밑의 갈릴리 사람들처럼 숨어서 한숨지을 망정 뜻을 이어온 사람들이 있소. 옳은 가치는 탄압을 받을수록 힘있게 이어가는 줄기찬 에너지가 있지요. 우리의 아나키스트가 그렇소. 군국주의 파쇼가 탄압하니 오히려 생명력이 유지되는 거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의 울림이 되어 심장이 와박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뭔가 공허하고 허기가 졌다.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목가적 레토릭만으로 이상세계를 실현할 수 있는가. 그가 거듭 말했다.  

“나 역시 그의 정신을 따라 '나의 양심은 나의 것이고, 나의 정의는 나의 것이고, 나의 자유 또한 나의 최고의 가치'라고 선언했던 푸르동과, 민중을 신뢰하고 사랑했던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따르려 하고 있소. 인간 자체를 사랑해야지 살상을 자행하는 무기를 사랑할 수 없는 것 아니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조병헌이 이의를 제기하자 이시하라 상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차이는 있으나 적이 될 수 없지. 그런데 세상은 차이가 있으면 적으로 돌려버린단 말이오. 그렇다면 왜 그렇소?”  
“악에 대한 복수의식이 솟아납니다. 정의의 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가치로 어느 세월에 그런 복수가 가능하겠습니까. 한가한 도덕적 이상으로 폭력적인 세상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성직자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현실적 대안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물을 복수의 관점으로만 보시는가? 일차적으로 보면 그건 맞소. 어설픈 관용은 역습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 나처럼 인간이겠거니 하는데 그가 짐승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그런데 무엇으로? 힘이 없는데 무엇으로? 그런데도 또다른 복수를 준비하자고? 그러나 이길 수 있소? 그래서 양심이 상처받지만 양심으로 이기자는 것이오. 그것이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건가?”  
“그런 말씀은 인격자면 누구나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결국 패자가 됩니다. 그걸 지키는 시간을 이용해 힘 가진 자들은 반칙으로 세상을 지배합니다. 양심을 지키다 그마저 빼앗기라고요? 그들은 어떤 무엇을 해도 이기는데, 결국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패배하고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반동의 역사는 더욱 힘을 얻지요.” “그래서 일본전쟁광들처럼 맞서자는 건가?”  
"요순시대나 가능한 건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폭력을 이길 수 있는 무기가 있소?”  
“선생님의 정신만으로는 힘들다는 것이지요. 준비하지 않는 자는 무너집니다. 저희 선현 중에 이율곡 선생이란 분이 계십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에 대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했는데 기득 사대부가 묵살해버려서 왜란을 겪었습니다. 구한말엔 군량미에 모래를 섞어서 군졸에게 지급했다가 종당에는 일본식민지로 전락했고요. 준비를 모르는 민족이었습니다. 조국의 앞날이 암담한 이때 현실적 방안이 무엇이냐를 따져야 할 상황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의 말씀은 한가한 도가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조 생도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하오. 그러나 전쟁을 위한 엄혹한 동원체제와 권력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이상주의는 합치되고 있소. 다만 나는 영감을 갖자는 것이지.”  
“양심과 정의 앞에 서라. 사랑과 평화와 진리를 구하라. 공맹과 석가모니 예수가 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도덕적 실천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까.” 
“오늘은 토론하는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시하라 상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곡해하는 것같아서 오민균은 마음이 언짢았다. 이시하라 상이 오민균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는 아나키즘을 부활시킬 거요. 야만의 시대가 아닌 공동의 이해, 공동의 규범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숭고하지 않소? 동원체제적 정치 프로파간다에 의한 애국심을 봅시다. 나는 그것이 미신적 맹신의 결과이며, 그런 애국주의란 야수의 본성이라고 보는 사람이오, 광란이자 허구라고 주장하신 고토쿠 슈스이 스승님 말씀에 적극 공감하오. 군국주의와 애국주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요. 그런데 거기엔 함정이 도사리고 있지. 지배자가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관점이오. 권력이 어떠한 짓을 해도 굴종하게 만드는 국민 사기극이오.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쳐놓은 덫이요. 전쟁을 끌어들여서 백성을 불구덩이에 몰아넣고 자신들은 그 위에서 즐기는 사디스트들... 어찌보면 그들의 광기가 나쁘다기보다 백성들이 무지한 게 더 나쁘지. 깨어있지 못하니 백성은 금수 취급받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에게 돌팔매질하는 유대 사람들처럼 말이오. 강자는 어떤 무엇을 해도 이겨요. 그러나 약자는 어떤 무엇을 해도 패배하지. 그런 가운데 강자를 추종하는 노예들이 나와서 밥벌이를 하는데, 그래 자신들을 탄압하는 권력자를 향해 경배하고 지지하고 스스로 노예를 자청하다니. 그래서 예수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며 날뛰던 군중을 향해 ‘주여 저들은 모르나이다’ 하고 절망하지 않았소? 권력의 주술에 넘어간 줄도 모르는 백성들이 불쌍하지 않소?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인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깨우쳐 알려야지. 그것이 종국에는 더 빠를 수 있소. 그러면 어떤 컨텐츠로? 연대요. 바로 세계주의와 향토주의의 결합이오. 아나키스트의 길이고, 보편적 가치에 충실하는 길이오.“  
“세계주의와 향토주의...” 
“인디안과 제주도의 생활방식이오.“  
“인디안에게 세계주의가 있다는 겁니까?” 
“일면의 진실만 보는데, 그건 올바른 인식체계가 아니오. 그들의 세계관은 우주에 가닿아 있소. 주술주의가 아니오.”  
“급박한 현실에 정말 한가합니다.” 

이정길이 이의를 달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 때문에 감옥 가고 처형되고 그랬소. 제국주의·군국주의·애국주의의 허상에 사로잡힌 포로가 되니 볼 것을 제대로 못보고 있소.” 

그는 어떤 신념에 차있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천황폐하에 대한 경례는 필수다. 거부하면 국가를 반역했다고 잡아가둔다. 그러나 경배를 거부할 수 있소. 왜? 사기니까. 그런데 우리는 쉽게 동화되고, 회의론자는 좌절하고 절망하오. 그런 면에서 50년 전의 고토쿠 슈스이 선생이 앞서간 인물이오. 자, 현실을 봅시다. 일본 제국주의 왕권이 지배하면 미래는 난망이오. 백성들은 동원체제적인 그물망에 갇혀 개미처럼 일하지만 사고는 천박한 수준일 거요. 그렇게 그들은 길들여져 왔소. 그리고 일본이란 나라의 실체에 대해서 지적하고 싶소. 일본인 개인은 착하고 정직하고 도덕적인데, 집단화하면 부도덕하다고 했지요? 천만의 말씀이오. 일본인이란 약한 자의 소를 잡아먹고 고양이 잡아먹었다고 강아지 뼈 내놓는 족속이요. 그러나 강자에겐 고양이 잡아먹고 호랑이 잡았다고 호랑이 가죽을 바치는 자들이오. 그렇게 살아온 민족이오. 잘 살피시오.” 

꽉 막힌 오민균의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웠다. 독백인 듯 독백 아닌 독백 같은 레토릭. 모든 것이 헷갈렸다. 그것이 바로 해방 여섯 달 전의 일이다. < 다음호에 계속>


<3> 폐허에 피어오른 사랑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3>
2019.09.20 03:19:25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3장 폐허에 피어오르는 사랑 
                  
모두 이시하라 상 집으로 모이기로 모의했는데 사고가 터졌다. 항공사관학교 3년 생도 홍태화가 종적을 감춰버린 것이다. 그가 사라졌으니 남아있는 생도들이 힘들게 되었다. 홍태화는 장지성과 같은 광주고보 1년 선후배 사이였다. 장지성이 몇 살 늦게 초등학교를 들어가서 나이는 그가 더 많았다.  

조선인 생도들은 동구대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다. 그래서 뭉쳐있지 않으면 위험했다. 엉뚱하게도 패전 보복의 타깃이 되어있는 것이다. 극단주의자들의 행동이 불안한데 홍태화가 사라지니 장지성에게 의혹의 시선이 쏟아졌다. 동구대원 두 명이 찾아와 그에게 따졌다.

“그의 소재지를 대라.” 
“나도 찾고 있는 중이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며 위협했다.

“앉아있어. 대지 않으면 네가 다친다.” 

그들이 방안을 샅샅이 뒤지는 동안 장지성은 꼼짝 못하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서투른 짓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자를 데려다 놔. 조선인 몇 놈 사라진 것 알고 있을 거야. 그자를 데려다 놔.” 

뚜렷한 물증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들이 이렇게 위협하고 사라졌다. 며칠 뒤 오카다가 찾아왔다. 

“홍태화가 여학생 집으로 도망갔다.” 
“뭐, 여학생? 지금이 어느땐데 연애질이야?”
“여학생 어머니가 편찮다는 말을 듣고 나갔댄다.” 

그가 낭만주의자라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매사 어려운 일도 쉽게 보는 친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오카다가 말했다. 

“너희들 어떻게든 학교를 빠져나가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도쿄 시내도 안심할 수 없으니 조심해. 동구대가 시내에도 뻗쳤다는구나. 폭력 갱단이 돼버렸어.”
“그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하지 않는 게 낫겠어.” 

장지성은 생도 기숙사에 눌러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소노 아사코의 집은 미군기의 폭격으로 지붕 한쪽이 날아가고 그녀 어머니는 허리가 다쳐 움직이지 못했다. 병원은 부상자들로 넘쳐났고, 어머니는 대기자 중에서도 한참 뒷줄에 서있었다. 모든 환자들이 절박한 상황이어서 중간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얘야,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집에서 치료하는 것이 더 쉬울 거야.”

통증을 참으며 어머니가 말하자 아사코는 미나미 여사를 부축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한 여름인지라 어머니의 허리 환부는 괴사가 진행중이었다. 파괴된 집과 널부러진 가재도구, 통증을 못이긴 엄마의 신음소리로 인해 아사코는 절망상태였다. 상황을 헤쳐 나가기엔 열일곱 살의 소녀로서는 힘겨운 일이었다. 휴교령이 내려져서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지만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태화 짱, 집으로 와줘요. 집은 폭격을 맞았고, 엄마는 부상으로 움직이지 못해요. 간호가 힘겨워요. 

그녀는 홍태화에게 구호 요청 편지를 보냈다. 홍태화는 편지를 받자마자 숲속 교정 뒷담을 뛰어넘어 그녀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발이 묶였다. 그가 돌아오지 않자 조선인 생도들이 인질이 되어버렸다. 홍태화가 돌아올 때까지 교내 기숙사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홍태화가 아사코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오빠가 학교에 다녀오면 안되겠니?”
“그러겠어요? 하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죠? 무서워요.” 
“물론. 붕대랑 소독제랑 구비해놓았으니까 어머니 상처는 조금씩 진정될 거야. 생도들 데리고 나올게. 힘들면 유우키 씨한테 알려.” 
“센베이집도 문 닫았잖아요.”

그녀 집은 유우키 씨 집과 조그만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완만한 언덕은 잡초와 키작은 잡목이 우거져서 편안함을 주었고, 그래서 산책 코스로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 언덕에서 아사코는 홍태화를 만났다. 홍태화는 장지성을 따라 유우키 씨 집에 놀러갔다가 황혼녘, 언덕에 올랐었다. 그 언덕에서 둘은 운명적으로 만났다. 

학교로 되돌아간 홍태화는 동포 2세 오카다를 불러냈다. 일본인 생도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조선인 생도들도 그를 믿었다. 말하자면 그가 브릿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장지성을 불러달라.” 
“일이 벌어졌다. 너희들은 더욱 감시받고 있어. 너희들 때문에 동구대원들끼리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지.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한 거야. 그래서 지금 살벌해. 누군가 걸려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거야. 위험한 짓은 안하는 게 좋아.” 
“마지막 부탁이야. 앞으로 이런 심부름 시킬 일도 다신 없지 않겠어?”

그는 귀국하면 두 번 다시 일본에 오겠나 싶었다.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 기숙사로 돌아갔다 나온 오카다가 변소 뒤로 가라고 알리고 사라졌다. 그곳에 장지성이 와있었다.

“당장 귀교해.” 

장지성은 그를 만나자마자 호통부터 쳤다. 

“불가피한 일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여학생이나 만나러 다니고. 단체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 알고 있지? 다른 생도들 생각도 좀 하라구.”   

엉뚱한 생각을 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자유인. 그래서 본의아니게 오해를 사는 친구였다. 

“여학생 데리고 구경다닌 것이 아니야.” 

그때 불쑥 몇 놈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 새끼들, 여기 숨어있군.” 

경단 동구대원들이었다. 순찰을 돌다 두런거리는 소리에 덮친 것이다. 장지성은 기숙사로 돌아가고, 홍태화는 학교 영창에 갇혔다. 학교 무단이탈 죄목이었다. 조선인 생도들의 탈출 시도는 좌절되었다. 며칠 후 장지성은 밤늦은 시각 오민균을 찾았다.  

“이시하라 선생 댁을 집결지로 삼는다. 내일 결행할테니까 오 생도가 일학년 생도를 인솔해오도록.” 
“그 시간 홍태화 선배가 석방되겠습니까.”
“홍태화가 잡혀있으니까 결행하는 거야. 그놈들은 홍태화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지. 그걸 이용하는 거야.”
“선배를 볼모로 잡고 나가는 건 의리없은 일 아닙니까?” 
“그는 무슨 수를 쓰든 빠져나올 친구야. 그 때문에 우리가 묶여있다는 건 더 말이 안돼. 내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석점호 시간대 어수선한 틈을 타서 빠져나가자구. 개별행동이야. 일차 목표지점은 이시하라 선생 댁이고. 만약을 대비해 유우키씨 집을 이용하자.”

다음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일석점호가 시작되었다. 각방에서 관등성명을 대느라 시끌벅적했다. 그 시간 오카다가 칼을 맞았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중첩자 노릇했다는 것이고, 밀대에 대한 응징이라고 했다. 교내가 더욱 어수선했다.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장지성은 권총을 옆구리에 찌르고 군도를 배낭에 숨겨넣은 뒤 창문을 뛰어넘어 관목 숲으로 내달렸다. 숲 가장자리에 이르러 돌담을 가볍게 타고 넘었다. 이시하라 선생 댁에는 벌써 이성유가 당도해 있었다.  

“다른 생도들은?” 
“각자도생이야. 오카다가 칼을 맞았다는 말을 듣고 그냥 결행했지.”

서재에 있던 이시하라 상은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보다시피 동이 트기 전이 어둡소.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니 각자 신변에 신경써야 할 것이오. 치안이 극도로 취약해졌소. 패전을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소. 귀국선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정기 여객선은 안되니까 밀선을 구하려고 합니다.”

이정길이 여자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여자 옷차림으로 변장해도 어울렸다.

“그렇게까지 하고 올 필요가 있었나?” 
“다 빠져나가니 경계가 심해서 감시망 뚫기가 어려웠지. 몇 명이 다쳤을 거야. 포기한 생도들도 있어. 난 식당 아줌마 옷을 빌려입고 왔어.” 

오민균은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나가이 군, 스기하라 대장은 시내 본부에 있나?” 

오민균은 신주쿠의 나가이 집을 찾아갔다. 나가이는 오민균과 같은 구대 소속의 벗이었다. 동구대 멤버였으나 조직이 폭력화하자 탈퇴했다. 2년 선배 스기하라는 동구대 대장이었다.

“그래. 요즘은 학교보다 시내 본부에 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어떻게?” 
“폭력조직과 연결되고 있다. 야쿠자 조직들이다.”
“스기하라 대장을 만나게 해다오.” 
“왜?”
“인사하고 떠나야지.” 
“허튼 짓 하지 마라. 어제 조선인 생도를 제압했다는 얘길 들었다. 습격을 했다가 도리어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데리고 가야지. 그가 조병헌이야.”
“친구의 의리를 철칙으로 알지만 나설 때 나서라.” 

나가이는 오민균과의 의리를 생각했다. 육사에 갓 입학하자 20km 단축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모두들 다퉈 달리다가 나가이가 15km 지점에서 쓰러졌다. 헉헉거리기만 할 뿐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저만치 앞서 달리던 오민균이 뛰다 말고 되돌아와 그를 부축하고 뛰었다. 힘겨워하는 그를 부축하고 오민균은 끝내 완주했다. 등수에 관계없이 성취해냈다는 것이 화제가 되어 이 소식이 육사 교내에 널리 회자되었다. 의리와 전우애는 군의 최상의 가치이자 덕목이라는 평가 아래 오민균이 표창을 받았다. 그 이후 둘은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다. 

“조선인 생도들이 무사히 귀국해야 한다. 그도 데리고 나가야 할 것 아닌가.”
“동구대 본부는 메이지 신궁 옆 숲에 있다.” 
“입구까지만 안내해달라.”

나가이는 메이지 신궁 뒷골목 숲으로 오민균을 안내했다.

“너는 이쯤에서 돌아가라. 데려다 준 것이 화근이 될 수 있으니까.”

그도 오카다가 밀대 혐의로 칼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가이를 돌려보내고 그는 동구대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절로 들어섰다. 사찰은 폭격을 맞아 대웅전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가 황량했다. 대웅전의 대(臺)에 있는 촛대, 놋그릇, 천불상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겁도 없군.”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손톱깎이로 손톱을 밀고 있던 스기하라가 실내로 들어서는 오민균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그는 오민균의 위아래를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장교복을 입고 허리에 군도를 찬 것이 벌써 장교가 된 행색이었다. 하긴 몇 개월 후면 임관을 앞두고 있는 처지인데, 무조건 항복을 한 바람에 졸지에 장교가 나가리가 되어버린 처지다. 나라의 패망과 함께 장교 자리가 무위로 돌아갔으니 가짜 장교로라도 행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일본 육사 생도들은 장교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어두침침한 귀퉁이 소파엔 세 명의 대원이 서로 붙어앉아 졸고 있었다. 뒷골목의 양아치 쯤으로 보이는데, 밤새 놀음을 했거나 갈보 집에서 몸을 탕진하고 돌아온 건달들일 것이었다.   

“스기하라 선배님, 조선인 생도를 찾으러 왔습니다.” 

오민균이 꼿꼿이 선 자세로 말했다.  

“우리가 데리고 있다고? 근거가 있나?” 
“스기하라 대장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조병헌 생도가 붙잡혀 왔습니다.”
“조 세이또! 소노 이누노 코가 후자케루?(조 생도? 그런 개자식이 까불어?)”
“우리의 갈 길을 막는 것은 전승국 포고령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해방이 되었으니 우리는 자유의 몸입니다.” 
“포고령? 그딴 것도 있나? 조 세이또가 우리를 습격했다. 용서할 수 없다.”
“봉변을 당한 조선인 생도가 여럿입니다. 그것을 멈추라고 찾은 것입니다. 트집을 잡아 패는 것은 비겁합니다.” 
“이제 육사 생도가 아니잖나. 건달일 뿐이야!”
“육사생도건 아니건 조선인들이 당하고 있습니다. 나도 타격 대상이 돼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굴에 들어왔다?” 
“조병헌 생도를 내놓으십시오.”

오민균은 어려운 것일수록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믿었다. 험하고 힘들지라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나서야 한다.   

“돌아가라.” 

스기하라가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려앉았다.  

“조 생도를 내놓으세요. 그는 어떤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일본제국에 반역을 했던 거야? 대일본제국 세금으로 학교 다니고 책과 공책을 지급받고, 월급까지 받고, 그렇게 천황폐하의 은총을 받은 놈들이 반란을 꾸몄던 거야? 위선자고 배신자 아닌가. 대가를 치러야지. 무사히 돌아간다는 것이 말이 돼?”

스기하라가 다시 몸을 돌려앉더니 오민균을 노려보았다. 

“조선민족이 대일본제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바친 희생은 큽니다. 그렇다고 어떤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닙니다. 이제 제 자리에 돌아왔으니 우린 자유롭게 조국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당연한 절차고 순서입니다.” 
“해방? 독립? 그리고 신생정부를 차린다? 웃기는 놈이군.”
“원점으로 돌아갔으니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니까요. 우리 가는 길을 막는 것은 전승국 포고령에 위배됩니다. 그것을 주지하고 경고합니다!” 
“빠가야로! 포고령, 포고령하는데 뭘 믿고 떠드냐? 그건 나와는 상관이 없다. 좋게 말할 때 나가라. 내 말 못알아 듣겠나?” 
“뒷골목 조무래기들 데려다 놓고 무슨 짓입니까. 육사 생도가 깡패 두목이 되는 겁니까?”

건너편 소파 쪽에서 모욕을 느꼈던지 대원 중 한놈이 대번에 달려왔다.

“너 우리를 뒷골목 조무래기라고 했나?” 

그와 동시에 그가 달려들어 주먹을 뻗었으나 오민균이 먼저 가라테 일격으로 그를 쓰러뜨렸다. 그가 개구리처럼 죽 뻗었다. 그러자 다른 두 놈이 달려왔다. 오민균은 단도를 든 한 놈을 잡아 바닥에 매다꼰고, 다른 놈을 하이킥으로 걷어차 눕혔다. 일시에 그는 사무실을 평정해버렸다. 오민균은 청주고보 시절 검도 대표였고, 유도와 가라데 유단자였다.   

“못난 놈들, 물러가라!” 

스기하라가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대원이 일어나 비실비실 빈 구석쪽으로 가는데 한 놈이 기분 나빴던지 뒤돌아 서서 다시 달려들었다.  

“멈춰 서!” 
오민균이 끄떡없이 버티고 서서 소리치자 공격하려다 말고 그가 제풀에 자리에 멈춰섰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스기하라가 그에게 다가가 발길로 걷어찼다.

“못난 새끼, 나가!”  

그들이 입구 쪽으로 물러났다. 스기하라가 오민균을 노려보더니 옆구리에 찬 칼을 뽑아 책상에 내리찍었다. 꽂힌 칼이 파르르 떨었다. 오민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버티고 서있었다.  

“네 실력은 안다만 여기가 어디라고 객기를 부리나?” 
“불의를 피하면 생도가 아닙니다.”
“건방진 자식! 조센징한테도 정의감이 있나?” 
“저를 욕해도 되지만, 민족은 욕하면 참을 수 없습니다!”
“네가 일학년 생도들의 리더라는 말은 알고 있다만 이렇게 건방진 줄은 몰랐다. 죽기 싫으면 돌아가라! 너의 용기를 생각해서 돌려보내준다.” 
“그렇게 못합니다! 조병헌을 내놓십시오.”

그러면서 책상에 꽂혀있는 단도를 뽑아들었다. 스기하라를 공격하는 줄 알고 입구쪽에 서있던 대원들이 각목을 들고 쫓아왔다.  

“추태 보이지 마라. 물러나라.” 

스기하라가 그들을 제지했다. 그는 오민균의 실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몽둥이를 들어도 이길 수 없는데, 게다가 오민균은 지금 칼을 쥐고 있다.   

“무기 내려놓아라.” 

오민균이 스기하라의 말을 묵살하고 자신의 손을 책상에 올려놓고 손등을 내리찍었다. 배짱은 배짱으로 맞선다. 피가 솟구쳤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고 버텼다. 

“저는 선배님이 우리를 놓아주기 전에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무모한 짓 거두어 주십시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스기하라가 다가오더니 그의 손등에 꽂힌 단도를 뽑아 구석으로 던졌다.

“나가이와 친하나?” 
“친구입니다.”
“과연 듣던대로다. 역시 육사 생도답다. 니가 내 자존심을 지켰다. 육사 생도의 기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일본 놈 열 놈이 조선놈 한 놈을 당하지 못한단 말이 맞구나. 대신 일본 놈 한 놈이 조선 놈 열 놈을 이긴단 말이야, 하하하...” 

스기하라가 커다랗게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가 책상으로 가더니 서랍에서 붕대와 아까징키를 가져와 내밀었다.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아라. 네 뜻 알겠다. 조 생도는 비겁하게 먼저 센팅을 날렸다. 남자들 세계에서는 완력의 사용이 본능 속에 숨어 있지. 승자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휘슬이 울리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감행하지. 그러나 그건 일본 육사생도에게선 찾아볼 수 반칙이다. 그 자는 뒷골목 조무래기 수준의 똘마니를 먼저 공격했다. 육사 선배로서, 그리고 사나이로서 용서할 수 없지. 그래서 잡아두었다. 너 정도였다면 놓아주었을 것이다. 너를 보고 풀어준다. 데리고 가라.” 

그는 승복할 것은 깨끗이 승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남자의 기질을 그런 결단을 통해 과시하고 있었다. 오민균은 지하실에 감금되어있는 조병헌을 데리고 나왔다.       
  
“태화 짱, 많이 기다렸어요. 어떻게 빠져나왔어요?”

소노 아사코가 마당으로 달려나와 홍태화의 목에 감기듯이 엉겼다. 

“석방되었어. 어머니는?” 

그는 미나미 여사의 부상이 걱정이었다. 

“엄마는 여전해요. 차도가 없어요. 하지만 태화짱을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방으로 들어서니 지붕이 뚫리고, 하늘이 환히 내다보였다. 햇살의 미립자가 방안으로 뻗어내려 무수한 먼지가 떠있었다. 처음 보았던 그대로 벽체는 허물어져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다다미는 헤지고 미닫이 문도 망가져있었다. 일본집의 미닫이 문은 안방과 뒷방 사이에 형식적으로 칸막이한 문이라서 본래 튼튼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택의 골조는 망가지지 않았다. 목조건물은 콘크리트 집보다 내구성이 강해서 폭격이 휩쓸고 지나갔어도 형체는 온전했다. 미나미 여사가 누웠던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앉았다. 

“아사코 짱이 우리 태화 짱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어머니, 그대로 누워 계세요.”
“글쎄, 나야야 할텐데.... 통증이 심해요. 학교가 폐교되었다구요?”
“네. 폐교되었습니다. 항복 조인에서 맨먼저 조인한 항목입니다. 교내에서 사고가 빈발하자 긴급 교무위원회를 열고 학생들을 묶어두지 않기로 결정하고 우리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생도들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일이라 당장 갈 곳이 없을 테니까.... 조선인 생도들 모두 나왔겠지요?”
“각자 행동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먼저 탈출한 생도들도 있었구요.”

잔류자 모두 도쿄역으로 출발했지만 그는 일행으로부터 빠져나와 아사코 집으로 왔다. 

미나미 여사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새파란 사십대의 중년인데 눈 주변이 다크 서클처럼 검은 것이 내려앉아 있어서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누렇게 뜬 피부로 인해 그동안 급식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모두 전쟁이 남겨준 상처라고 생각하니 홍태화는 가슴이 저렸다. 그는 그녀를 보살펴주고 떠나리라 마음 먹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군인의 길을 가지 않아도 되니 아사코가 안심이에요. 나도 그렇고요.”

미나미 여사는 벌써 그를 사위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홍태화는 애초에 군인의 길을 가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사를 꿈꾸었다. 그런데 광주고보 담임 선생님이 진로를 결정했다. 성적 좋고 신체 건강하니 일본 육사를 지망하라고 했다. 옷을 제공하고, 월급까지 주는 국비장학생이니 상급학교에 진학시켜줄 경제력이 못되는 집안에서는 그 길이 최상의 길이라고 했다.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진학한 것이 아니라 특전이 있기 때문에 일본 육사에 진학한 셈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맞았다. 해방과 독립. 처음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제 자리에 돌려지고 마는데도 왜 이렇게 모두 총동원되어 처절하게 망가지고 파괴도욌을까. 돌이켜보니 그간의 과정이 꼭 소꿉놀이한 것 같고, 어느 먼 행성에 갔다 온 기분이었다.  

얻은 것이 무엇인가. 무슨 행복을 주었나. 승전의 기쁨은 한때의 마약과 같은 것, 그러나 지금은 패전의 내상(內傷)과 허무 속에 모두가 넋을 잃고 있다. 아시아 평화를 위해 전쟁을 했다고?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야마토다마시(大和魂)를 위해? 그 이름으로 끊임없이 희생을 강요했다? 주술 치고는 도무지 섞갈리는 주술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길 거부하고, 짐승으로 살도록 몰아가는 사기 행위다. 그런데도 성전이라고 외친다.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면 도리어 범죄가 된다. 살육을 말하면 범죄자로 몰아 처단한다. 이래저래 죽는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이지? 누가 이런 사기의 그물을 깔았을까. 

그런데 문제는 패전이 신민 자신들의 과오 때문에 온 것처럼 그들 스스로 죄송하고 황송해한다. 적을 더 죽이지 못하고, 식민지 백성을 더 약탈하고 성노예로 보내지 못했다고 후회한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억울해한다. 그래서 ‘덴노헤이카(천황폐하)’에 끝없는 불충을 저지른 것만 같다. 내 목숨 내놓지 못해 미안하고, 타인의 목숨을 불구덩이 속에 더 쳐넣지 못해서 또 미안하다. 패배는 오직 내 탓이고, 덴노헤이카는 위대하며, 터럭 끝도 다쳐선 안되는 영험한 성상이자 불사신이다.  

일본군은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도츠케키!” 부르짖으면 모든 적은 도망간다고 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반자이 어텍’을 믿었다. 그러나 자고 나니 일본군 시체가 쌓였다. 반자이 어텍이 계속될수록 시체는 수북히 쌓였다. 식민지 백성들이 총알받이가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체가 쌓일수록 천황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이런 사기극이 어디 있나. 새파란 젊은이와 식민지 청년들이 죽음의 행진을 하면서도 미안하다니? 지구보다 무거운 무게의 목숨을 스스로 내던지고도 미안하다니? 시체가 층층이 더 쌓이지 못해서 미안하다니? 더 많이 목숨을 내놓지 못한 게 패배를 불러왔다고 엎드려 통곡하다니? 그들 심리의 근저에 무슨 마귀가 붙었길래 이런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가. 

그런데 지금 집단 허무에 젖어서 공황 상태에 빠져있다. 사기 친 천황과 그 부역자들을 끌어내 토막내 죽여도 부족할 판에 여전히 그들에게 황공하다며 패닉 상태에 빠져있다. 이것이 사람이 지배하는 국가인가. 합리적 사고인가. 더많이 잡아다 죽인 식민지 백성을 향해 ‘통석의 념’을 가진다는 수사적 레토릭 하나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가. 이런 개같은 위선이 어디 있나.  

한꺼풀 벗기면 금방 들통날 위선을 그들은 왜 정당화하며 슬퍼할까. 미친 듯이 패배를 괴로워할까. 괴로워하면서 이빨을 무는 저 모습은 무엇인가. 마구 내달리던 누우떼들이 그 관성으로 모두 강물에 뛰어들듯이 집단 투신하는 저 자해의 모습은 어디서 연원하는가. 그것이 ‘야마도다마시’라는 것인가. 그것이 자부심인가. 그것이 제국주의 팽창 야욕의 거울인가. 그러면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것을 정당화하며 그 짓을 반복할 것인가. 기회가 오면 언제든지 다시 불장난을 저지를 것이라는 암시를 내외에 천명하는 것인가.  

홍태화는 한동안 함정에 빠진 듯 고뇌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몸부림을 쳤으나 뚜렷이 머리에 남는 것은 없었다. 다만 꼭 어린아이 소꿉장난을 하다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사랑하는 소녀의 상처받은 영혼과 몸의 부상으로 신음하는 그 어머니가 있다. 그의 실존의 모든 것이 되어있다.      

“집이 누추해서 미안해요. 내가 집을 잘못 건사해서 미안하군요.” 

미나미 여사가 생각에 잠겨있는 홍태화에게 부끄럽다는 듯이 말하고 자리를 내주었다.  

“그건 어머니 잘못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집을 멋지게 수리해드릴 게요.”

그녀에겐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 긴요하다. 그래서 집을 새롭게 단장해주고 싶었다.   

“오빠가 집을 고쳐준다구 했나요?” 

사과를 깎던 아사코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릴 거야.” 

그는 아사코와 함께 그들이 처음 만났던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길 양옆으로 잡초가 무성해 바람이 지날 적마다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폐허 위에서도 언덕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잡초를 헤치고 커다란 스기나무가 서있는 그늘 아래 앉자 아늑한 보금자리에 숨어든 것같다. 아사코는 홍태화에게 몸을 맡겼다. 열일곱의 향기가 그의 코에 스쳤다. 그는 그녀 허리를 안았다.

“난 언덕에 올라오면 슬퍼져요.” 

그녀의 가냘픈 입술이 꽃잎과 같았다. 

“오빠와 헤어질 것만 같은 운명인 것 같아서 숨이 막힐 때가 있어요.”

홍태화는 아무말없이 그녀를 안았다. 사실은 그 역시도 미래가 불확실했다. 이 험난한 시기, 어떻게 이 소녀를 조선 반도까지 데려갈 것인가...   

아사코는 홍태화를 만난 일을 되짚었다. 유우키 씨는 센베이를 구워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내 폭격이 심한 이후부터 일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먹을 수 있을만큼 센베이를 구워 비상식품으로 쓰고 있었다. 아사코 집도 별도로 식사준비를 할 수 없어서 유우키 씨 댁의 신세를 졌다. 폭격이 거듭될수록 시장을 보아오는 일이 힘들어서 언덕의 풀숲을 헤치며 유유키 씨 집으로 찾아갔다. 어렵게 가져온 센베이를 분말 우유를 물에 풀어서 찍어먹거나 다꾸앙과 함께 먹으며 나날을 견뎠다. 모녀는 그렇게 힘겹게 연명하고 있었다. 

그날도 아사코는 유우키 씨 집에서 네 펙의 센베이를 구해 언덕을 올랐다. 잡초가 무성한 언덕을 오를 때면 아사코는 웬지 눈물이 났다. 풀더미 속에 묻혀 실컷 울고 싶었다. 폭격기가 무섭게 허공을 가르고 쏜살같이 지나가면 어디선가 쿵 대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산너머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그런 다음 무서울 정도로 적막이 흐른다. 폭격기가 하늘에 남긴 흰 띠가 묽어지면서 사라지는 모습이 한없이 슬펐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쏟아지는 햇살들, 흡사 빛의 폭포수 같은데 그 빛속에 잠겨있는 도시는 너무도 황막하다.  

아사코는 언덕을 오르다 말고 홍태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홍태화는 언덕 위에서 피부가 하얗고 코가 우뚝 선 소녀가 눈물 머금은 채로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꼭 서양 인형 같구나.” 

그가 말하자 아사코가 놀라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애들이 아이노코라고 해요.”  
“그래? 집이 이 근방이니?”
“저 아래예요.” 

그녀가 올라온 반대 방향의 언덕 아래를 눈으로 가리켰다.

“슬픈 일이 있니?” 

그녀는 대답 대신 홍태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툭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그냥 슬퍼요.” 
“일루 와. 풀밭에 같이 앉자.”

그녀가 스스럼없이 그의 요구를 따랐다.  

“아이노코라고 했지?” 
“네. 일미(日美) 혼혈이에요.”

홍태화는 아이노코란 말에 스민 차별의식과 요즘 유독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일본사회를 생각했다. 근래에 아이노코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일본은 본래 혈통을 중시하는 민족이 아니었다. 때문에 혼혈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하체가 짧고 안짱다리에 치아가 고르지 못한 토종에 비해 아이노코는 키가 크고 하체가 길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다. 그래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이란 나라는 성윤리나 문화의 수용 측면이 개방적이고 모방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외향성이 짙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의 예에서처럼 혈통이 강조되는 민족주의 정서가 만연했다. 귀축영미(鬼畜英美)라는 전쟁 현실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아사코는 본의아니게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배척되고, 왕따 당했다. 

“너희 나이 때는 모든 것이 슬프고 아프고 아름답지. 웃음도 많고....”

홍태화는 그녀의 슬픔을 소년기의 감수성으로 받아들였다.

“육사 생도세요?” 

그의 제복을 보고 아사코는 그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슬펐던 감정들이 사라지고 홍태화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풀밭에 앉은 그녀 시야에 어느새 평소에는 그냥 스치고 지나쳤던 풀꽃들이 새삼스럽게 소담하게 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를 의식하자 잊었던 풀들의 존재도 새로워지는 것이었다. 발 아래 덩굴을 끌고온 나팔꽃이 잡초들을 붙들고 어디론가 뻗어나가고 있고, 이곳저곳에 쑥부쟁이 쇠무릎 패랭이꽃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세상에나. 그동안 보지 못했던 들꽃들이 여기저기 생명력을 지니고 피어있는 것이 너무도 새로웠다. 저런 여린 풀들도 꽃을 피우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데, 내가 이게 뭐람.

“육사 생도 럭비대회에 응원을 간 적이 있어요. 요요기연병장에요.”
“그래? 그럼 넌 나도 보았겠구나.” 
“보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러나 삼사천 명의 생도 중 그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순진한 아사코는 사실로 믿고, 그리움의 대상을 만난 것처럼 금방 그에게 끌렸다. 감수성 예민한 나이엔 어떤 무엇에도 감격하고 눈물짓는다. 아사코는 들고 온 센베이를 풀어놓았다. 

“이거 비상식량일텐데 먹어도 되니?” 

그가 호주머니에서 씨레이션 건빵과 초콜렛을 내놓았다. 포장을 뜯자 부스러기부터 쏟아져나왔다. 아끼느라 호주머니에 며칠째 넣어 다녔으니 바스라졌을 것이다.

“비상식품은 아껴야지. 내일을 알 수가 없잖니.” 

그가 건빵가루를 손에 쏟아 입에 그대로 털어넣었다. 언제 그랬더냐 싶게 그녀가 그 모습을 보고 깔깔 웃었다. 아사코는 초콜렛을 아끼듯이 입안에 녹였다. 그는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학교로 돌아갔다. 아사코는 그날부터 그를 몹시 기다렸다.  

“엄마가 우릴 만나게 해주었어요.” 

그들은 키가 웃자란 풀숲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허리까지 자란 풀들을 쓰러뜨려 눕히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아사코가 아이처럼 뛰어들어서 자리에 풀석 앉았다. 쓰러지지 않은 풀들이 보초를 서듯 둘러서 있는 게 마치 장난치기 좋은 구석진 방에 들어온 것 같다. 포근하고 평화롭고 아늑한 고요. 언덕 아래 폭격을 맞아 까맣게 불에 탄 집들이 풀들 사이로 보였고, 그런 집들 사이로 키 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당기자 아사코가 그대로 그에게 안겨들었다. 몸은 의외로 가벼웠다. 손가락은 길고 허리는 가늘었다. 전쟁 통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시달린 나날을 몸이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은 솟아있었다. 그는 그녀 입에 입술을 갖다 대고 길게 키스했다. 입술이 꽃잎처럼 부드러웠다. 키스하다 말고 그녀가 물었다.

“태화 짱은 꼭 고국으로 돌아가시겠죠?” 
“그래. 전쟁은 이제 안녕이야. 영원히.”
“슬퍼요. 이별이라는 것이요.” 

그는 다시 아사코의 몸을 깊게 안았다. 그녀 가슴이 새의 심장처럼 할딱거렸다. 눈은 젖어있었다. 그녀가 그의 품을 파고들면서 조그맣게 울었다. 

“이별은 정말 슬퍼요.” 
“걱정하지 마. 난 아아코 곁에 있을 거야.”
“꼭 그렇게 해야 해요. 태화 짱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난 숨을 못쉴 것같아요.”
“만나게 될 거야. 살아있는 한 우린 만나는 거야.” 
“이별은 무서워요. 아버지와도 영영 이별했잖아요. 그 슬픔을 아시나요?”
“아버지가 왜?” 
“미국인 아버지가 미국과 싸우다 죽었어요.”
“미국인 아버지?” 
“아버진 귀화한 미국인이에요. 나보다 엄마가 더 슬퍼해요.”
“그래, 남편 잃은 엄마들이 더 슬프겠지.” 
“우리 반 애들 반 이상이 아버지 삼촌 오빠를 잃었어요. 언니가 전선으로 끌려가서 소식을 모르는 애도 있어요.” 
“우린 전쟁이 나쁘다는 걸 몰랐어.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알았으니 우린 지진아인가 보지?”
“그래요. 전쟁은 모든 걸 아프게 만들어요. 저기 봐요. 꽃과 나무와 풀과 새의 조화들. 이걸 부정하며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저는 문학을 포기했어요. 시 한 줄이 안나와요. 매일 방공호로 뛰어들고 비상식품 구하느라 쩔쩔매는데 무슨 시를 생각하겠어요?”
“문학은 그런 세상을 얘기하는 거야. 나무, 숲, 푸른 바다, 높은 하늘, 오색 무지개만이 시가 되는 건 아니지. 현실을 외면하면 문학이 의미가 없어...” 
“그래요. 세상은 전쟁중인데 매화꽃이 어쩌고 난초꽃이 어쩌고, 무지개가 어쩌고, 그게 말이 되나요? 풀잎의 생명력과 이슬의 영롱함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보다 더큰 세상의 의미가 있는데...” 

그녀가 자조하듯 말하며 동의했다. 모든 사람들이 전선에서 이겼다고 환호하는데 결말은 가족 누구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안겨준다. 그런데도 괜찮다 괜찮다 말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지로 몰어넣고도 신이 되어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엄마는요, 살아있다는 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해요. 일본여자로 태어난 게 저주스럽다고 해요. 밤이면 천지 사방에서 곡소리가 들려온다고 해요. 모두가 선택하고 모두가 영광이고, 모두가 즐겁게 맞이한 전쟁이라는데, 왜 그럴까요. 눈만 뜨면 황국의 자랑스런 신민, 덴노헤이카를 외치며 두 팔 번쩍 올려 만세를 부르죠. 그런 것들이 지금 생각하면 우스워요. 태화 짱은 그런 군인이 왜 되려고 해요?” 
“글세. 굳이 말한다면 그 길밖에 없었으니까.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곳에 갈 수도 있는 게 인생이지.” 
“그래도 전쟁은 사람을 악마로 만들잖아요. 모두를 돌게 하잖아요.”
“맞아. 사실 우린 미친 줄도 몰랐지. 헌데 이 자리에 서고 보니 꼭 야수처럼 날뛰었던 것 같아. 그 길이 아닌데도 미친 짐승처럼 날뛰었어. 너처럼 순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보이는데, 그게 악마의 짓이란 걸 아는데 우린 장님이 되어버렸어. 오히려 영광으로 알았지. 돌아보니 누군가에게 사기당한 기분이야. 시시하고 우스운 마술에 빠져들었다가 나온 것 같애. 싸구려 인생 같아.” 
“학교에선 늘 일본인은 정직하고 질서를 잘 지키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자부심을 가지라고 얘기해요. 조센징은 더럽고 야비하고 훔쳐먹고 물건을 팔면서도 남을 속인다고 조롱해요. 나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더 못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더 큰 악마는 왜 볼 줄 모르지?”

그는 파괴된 도시를 내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타도어와 데마고기는 어린 소녀의 영혼에게도 검은 망토를 씌운다.  

“그런 구분들이 무서워요. 안아줘요. 그냥 슬프기만 해요.”

홍태화가 아사코를 깊숙이 끌어안자 그녀는 그의 품에서 다시 소리죽여 울었다.  

“난 그렇게 갈라놓는 말들이 무서워요. 두려워요. 난 태화 짱과 헤어지면 죽어버릴 거예요.”
“우린 헤어질 수 없어. 영원히, 영원히...” 
“그래요. 영원히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바람이 스쳐지날 적마다 풀들이 물결처럼 출렁거렸고, 하늘은 평화롭게 푸르렀다.   

이시하라 상이 조선의 청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순전히 자기 정신의 실천력 때문이었다. 생도들이 별다른 부담없이 그의 집을 찾은 것도 이런 편안한 환대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루로 나와 정오의 한때를 즐겼다. 배만 준비하면 떠난다. 그들은 조를 짜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그때 오민균과 조병헌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된 거야?” 

오민균의 한쪽 손이 붕대로 감겨져있는 것을 보고 장지성이 놀라서 물었다. 오민균은 대답없이 웃기만 했다.  

“무슨 일 저지른 거야?” 
“스기하라를 만났죠.”
“동구대 대장을? 그래서?” 
“치기를 좀 부렸죠.”
“그 친구한테 치기가 통하나.” 
“그들도 지리멸렬합니다. 내부토론 투쟁의 의제를 하나 주고 왔습니다. 약소민족에 대한 오만은 이제 맞지 않는 것이라고. 육사 생도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충고해주고 왔습니다.”
“그런 충고가 통할까?” 
“시정잡배처럼 나가진 못할 겁니다.”

이런 혼란기엔 저런 용기도 필요하다. 밀리고 두려워하면 더 밟는 것이 그들의 속성이다. 

“자, 모두 서재로 들어오시오.” 

이시하라 상이 생도들을 서재로 불러들였다. 모두 서재로 들어가 둘러앉았다.

“조선 청년들을 헤아려주시는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만 조금은 불안합니다.”

조병헌이 예를 갖춰 머리를 숙인 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오. 여러분들이 내 뜻에 공감하니 그것으로 나는 족하오. 하지만 제군들, 걱정이 되지 않소? 준비 없이 해방을 맞았으니 불안하지 않아요? 나로서는 군국주의가 멸망하는 것이 기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소. 무정부상태가 더 무서운 거요.” 
“선생님, 왜 이렇게 대일본제국을 미워하고 조선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나요?”

그가 웃으면서 답했다. 

“개인적인 연분부터 말할까요? 제주도 구좌리에 내 아내가 있소. 내가 감옥에 있을 때 고국으로 돌려보냈소. 그후 만나지 못했지. 꼭 그런 사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내 사상의 실천 현장이 조선에 있다고 보는 사람이오. 나는 일본제국에 핍박당한 조선, 조선에 핍박당한 제주도, 이런 걸 아나키즘과 연관시켜 보아왔소. 흥미롭지 않소? 그런데 지금 한반도에 이보다 더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소.” 
“힘든 일이라니요?”
“나진 청진 웅기 함흥에 벌써 소련군이 진주했다지요? 그러면 복잡해지는데... 또다시 외세라니...” 

귀국하면 미래가 환히 펼쳐질 것 같은 기대를 안고 있는데 소련군이 먼저 진주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때 홍태화가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서는 그를 향해 모두들 힐난했다. 

“도대체 또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여학생에게 완전히 녹아버렸군.”
“일본에 눌러앉을 모양이지?” 

그러나 홍태화는 대꾸하지 않고 머쓱한 표정으로 한 곳에 앉으며, 이시하라 상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선생님께 센베이 과자를 가지고 왔습니다.” 
“유우키 씨, 지금도 센베이를 굽던가?”

장지성이 금방 표정이 달라져서 물었다. 

“그래. 안녕들 하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있을 일이 아니다. 귀국선이 준비될 때까지 일을 좀 해야겠어.” 
“노동을 해서 노자를 벌자고?”
“폭격을 맞은 집이 많아. 그중 힘없는 모녀가 사는 집인데 집이 파괴되었어. 부인은 크게 부상 당하셨고. 소녀는 어리고... 귀국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느니 그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돕자구.” 

이시하라 상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것 잘된 일이군. 나는 감옥에서 목공기술을 배웠소. 그 기술로 의자를 만들고 책상, 서가를 만들었소. 그걸  나누어주니 감옥생활이 즐거웠지. 만기 출소하는 날짜도 잊어먹을 정도였소. 봉사는 그렇게 기쁨을 주오. 나에게 연장통이 있으니 가지고 가서 쓰시오. 아름다운 기회요.” 

다음날 그들은 홍태화를 따라 아사코의 집으로 향했다. 조병헌이 대번에 폭격을 맞은 지붕에 올라가 서까래가 드러난 곳에 판자를 덧대 못질하고 점토를 발랐다. 장지성은 부숴진 문짝과 복도의 다다미를 손질했다. 이정길은 주방의 싱크대를 고쳤다. 이렇게 모두들 나서자 조금씩 집꼴이 되어갔다.  

“온돌방이 좋은데 일본 사람들, 다다미방을 고집한 이유가 뭘까?”

이성유가 궁금해서 이정길에게 물었다. 

“일본의 여름은 덥고 습기가 많아서 환기가 잘 되도록 목조 집을 짓고 다다미를 까는 거야. 또 산에 나무가 많고, 대신 지진이 많기 때문이지. 벽돌집보다 목조건물이 더 내구성이 있다는군. 벽돌집은 지진이 나면 와르르 무너지는데 목조건물은 서로 붙잡아주는 성질이 있어서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야.”  
“화재엔 취약하잖나?”
“그래서 쪽바리 놈들 주의력 하나는 왔다지.” 

기품있는 집안인지 방안에는 도코노마(床の間)가 차려져 있었다. 안방에 별도로 방바닥을 반자 정도 높여 단을 만들고 족자를 걸고 자기와 화병을 세워놓는 공간이었다. 난과 매화그림이 그려진 족자가 파괴되어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아랫목에 미나미 여사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민균은 손의 부상으로 힘든 일을 하지 못하는 대신에 방안의 흩어진 가재도구들을 챙겼다. 미나미 여사를 내려다보던 오민성은 문득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5남 4녀의 자식을 낳은 어머니. 방학이 되어 고향집을 찾을 때마다 어머니는 늘 배가 불러있었다.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갔다가도 어느새 부엌으로 들어와 그릇들을 달그락거렸다. 그런 가운데 밥상이 차례대로 차려졌다. 배를 뒤뚱거리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할아버지 밥상, 아버지 밥상, 그리고 형제들의 밥상을 차렸지만 막상 어머니의 밥그릇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언제 밥을 먹는지를 그는 본 적이 없었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리 불목, 석수정, 갈골.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남산,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이 수려하고 인자해서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어머니 또한 그것을 구체적으로 믿었다. 잘 생기고 총명하고 또래 아이들보다 몸도 큰 맏아들이 그 주인공이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담뱃대를 문 동네 할아버지가 지나가면서 “그놈 참 왕자 같구나. 인물이 훤해”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충만감이 가득 찼다. 그는 어머니의 자존감의 전부였다.   

오민균은 그런 어머니 생각으로 부끄러운 듯 홑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누워있는 미나미 여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 옆구리가 보였다. 헐어서 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꼼짝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 바르게 엎디어 보세요.” 

놀란 그가 미나미 여사 곁에 다가앉았다. 미나미 여사가 움직이는 듯 마는 듯하며 홑이불을 젖히며 가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불 깃으로 환부를 가렸다.

“방치하면 큰 일 납니다. 괴사가 심합니다.” 

그가 이불을 제치고 환부를 세심히 살폈다. 상처는 짓무르고 덧나있었다. 누런 고름이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환부를 유심히 살피던 그가 거즈로 상처 부위를 눌러 고름을 씻어내더니 환부에 입을 갖다 대 빨기 시작했다. 그가 어렸을 적 무릎이 깨져 덧나서 고름이 흘러내릴 때 어머니가 입으로 빨아서 고름을 빼주고 된장을 발라주던 생각이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그 며칠 후 무릎은 거짓말같이 말끔히 나았다.  

미나미 여사가 부끄러운 듯 몸을 움츠렸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가 하는대로 몸을 맡겼다. 그녀가 머리맡에 있는 타월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타월을 받아 빨아낸 입안의 것을 뱉어냈다. 그러기를 몇 차례. 그런 다음 멸균 거즈로 피부 표면을 깨끗이 닦아내고 소독제를 발랐다. 알콜 성분이 함유되어있기 때문에 바를 때마다 환자가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곧바로 바른 자세를 취했다. 치료해주는 사람에 대한 예의로 통증을 견뎌내고 있었다. 

“외부 세균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줘야 합니다. 아카징키가 마를 때까지 말려둬야 합니다. 그러니 피부를 노출시켜야죠. 피부에 지속적으로 아카징키를 발라도 안됩니다. 딱지가 앉는 것을 봐가면서 소독해주어야 합니다.” 

그는 학교에서 비상치료법 시간에 배운대로 상처 치유법을 설명했다.

“고마워요. 태화 짱의 친구인가요?”  

미나미 여사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저는 일학년 생도고, 홍태화 선배는 3학년입니다. 홍 선배가 아사코 양의 집이 망가졌다고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저희는 귀국선이 마련되는대로 고국으로 떠납니다. 시간이 남아서 달려왔습니다.” 
“나 좀 일으켜 세워줄까요?”

오민균이 그녀 등에 팔을 넣어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그녀 몸은 마른 수수깡처럼 가벼웠다. 벽에 등을 기댄 그녀가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어머, 눈부신 청년이군요.”   

미나미 여사가 눈에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 눈엔 어떤 쓸쓸함과 슬픔이 배어있었다. 한때 폭풍처럼 다가왔던 청춘의 열정이 시들어버린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 남편도 미남이었죠. 깎아놓은 듯이요. 헌데 한줌의 재로 돌아왔어요.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을 가서 끝내 재로 돌아왔어요. 누구를 위해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가서 그리됐어요. 유골함을 부여안고 나는 사는 것 같지가 않았죠. 남편이 죽고 보살펴주는 사람은 없고, 돈도 떨어지고, 폭격은 계속되고, 비참한 나날이었죠. 인생의 진지함이란 찾을 수 없는 삶,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자로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가, 그래서 누운 채로 영영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치료도 포기하고 몸을 내버려두었던 것인가. 불행한 시대를 사는 현실이 괴로워서 마음도 몸도 쇠약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녀만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누구나 불행을 달고 이 시대를 살고 있다. 

“좋아질 거예요. 용기를 내십시오. 예쁜 따님이 계시잖아요.”
“저 아이도 상처받을 텐데요. 태화짱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아이에게 희망이 있겠어요?”
“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지척지간입니다.” 
“마음으로는 더 멀지 않나요? 행성과 행성처럼. 우리가 조선 민족에게 너무도 가혹한 짓을 했잖아요. 그러면 적이 될텐데.... 모든 이에게 상처를 주는 이런 전쟁을 왜 하죠?”

오민균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명제는 지금 이 순간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너무 크고 무거우면 그 질량감을 알 수 없듯이. 다만 그녀를 위로해주는 것밖에 없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간밧떼 구다사이(힘내세요)!” 
“네, 생도님도 간바레(힘내라)!”
“감사합니다.” 
“정말 조선 청년들이 용기를 주네요. 이렇게 선량한 젊은이들인데... 고마워요. 생도님의 따뜻한 치료가 나를 곧 일으켜 세워줄 거예요.” 

그녀가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앙상한 팔을 들어올려 눈으로 살피다가 웃었다. 희망의 기운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여사님을 보고 저희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다쳤을 때 꼭 그런 방식으로 치료를 해주셨지요.” 
“그래요. 세상에 그런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홍태화가 망치와 못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미나미 여사를 치료해주고 있는 오민균을 바라보더니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어머니, 민균 짱 보기만 해도 듬직하시죠? 민균 짱이 치료했으니 금방 나을 거예요.”
“그래요. 고마운 청년이에요. 태화 짱과 마찬가지로.....” 
“이웃집에서도 집 고쳐달라고 찾아왔네요. 아래쪽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집에서도요. 이러다 우리 여기 건축 토목업으로 눌러앉는 것 아닌가? 하하하”

그들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다음호에 계속> 


<4> 1945년 8월과 9월, 서울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4>
2019.09.21 10:32:57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4장 1945년 8월과 9월, 서울 

몽양 여운형의 계동 집에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청년들은 선전부장 이정남의 부름을 받고 찾았는데 주로 전문학교 학생들이었다. 몽양은 응접실에서 마당과 방을 왔다갔다 부산나게 움직이는 청년들을 바라보면서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젊은 날, 쓰라림을 안고 일본으로, 중국으로, 시베리아로 정처없이 헤매면서도 오직 희망을 안고 지냈던 지난날들이 오버랩되어 가슴을 덥혀오고 있었다.  

“이정남 동지, 젊은이들을 응접실로 잠깐 들어오도록 하게.”

건준 선전부장 이정남이 곧바로 청년들을 응접실로 불러들였다. 몽양이 의자에 먼저 앉고 청년들이 뒤따라 앉았다. 사각모를 쓴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날이 오니 정말 기쁩니다.” 
“그래, 앞으로 할 일이 많이 있을 거야. 경성방송국 경비하랴, 밀려오는 손님 접대하랴....”
“선생님께서 연설하시는 것 보고 심장이 뛰었습니다.” 

청년은 며칠 전의 감격이 아직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휘문고보 운동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 교문 밖 길바닥은 물론 안국동 로터리까지 인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는 3.1운동 이후 가장 많은 인파였다고 했다. 이날 몽양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나는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았습니다... 이 땅에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갑시다!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합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입시다. 세계문화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칩시다. 이미 전문부학생·대학생·중학생의 경비대원이 주요 시설에 배치되었습니다. 이제 곧 여러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1945년 8월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 연설>  

명 연설가답게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열변은 호소력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안광, 그리고 폭포수처럼 내쏟는 달변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방과 독립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연설이 있던 날 아침 몽양은 동생 여운홍을 불렀다. 

“지금 빨리 집으로 와야겠다.” 

여운홍은 부랴부랴 원서동 집을 나와 형님 집이 있는 계동으로 달려갔다. 일찍부터 부르는 것이 급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형님 집으로 들어섰는데 몽양은 의외의 말을 했다.

“지금 경성방송국을 접수해야겠다.” 
“방송국이라니요?”
“아침에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을 만나기로 했어.” 
“뭐 또 시비걸 일 있나 보죠?” 
“아니야. 일본이 치안권을 넘기겠다는 의사를 보였어.” 
“네? 치안권을 넘겨준다고요?”
“오늘 일본이 항복을 한다. 그래서 재류(在留) 일본인 무사 귀환을 상의하자고 만나자고 하는 거야.” 
여운홍이 감격했으나 방송국부터 접수한다는 것이 이치에 안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방송국을 접수한다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해방과 독립을 맞으면 맨먼저 우리말은 물론이요, 영어로도 방송을 해서 전 세계 인민에게 알려야 할 것 아닌가. 그런 다음 치안을 맡아야 하지.”

여운홍은 형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정남을 불러 당부했다. 선전활동을 확대하는 한편 청년들을 모아 주요 기관 경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몽양은 해방정국을 주도해나가고 있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벌써 방해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내부의 보수단체들이었다. 그래서 오늘 고위 인사회의를 소집해놓았다.   

“제군들, 오늘도 경성방송국으로 나가봐야지?” 
“선생님, 선생님의 경호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왜?” 
“요즘 돌아가는 정세가 불안합니다.”

그러자 특유의 환한 얼굴로 몽양이 말했다.  

“쓸데없는 말이야. 신생조국에서 나를 해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왜놈들한테도 견딘 목숨인데... 좌우간 외부 세력이 침투하지 않도록 방송국 경비나 잘 서게!”

권력의 진공상태인 지금 사실은 그의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요근래 비토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개의치 않았지만 상황은 유동적이었다.  

“방송국 인근 설렁탕 집에 말해두었으니까 점심때 가서 배부르게 먹게. 이제는 잘 먹고 일해야지. 그리고 내 걱정일랑은 접어, 천하에 나를 해칠 사람은 없어, 하하하.”

몽양은 모든 사물이나 인간관계를 로맨틱하게 보았다. 사람들도 그를 소탈하고 솔직한 성격을 칭찬했을지언정 탓하지는 않았다.     

회의 참석자들이 하나둘 마당으로 들어섰다. 민세 안재홍을 비롯 최근우 정백 이만규와 그의 동생 여운홍 등 측근들이었다. 청년들이 그들을 안내한 뒤 모두 각자의 일을 위해 밖으로 나가고, 방문 인사들이 응접실 의자에 앉았다. 녹차가 나오자 최근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건준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이올시다.” 
“누가요?”
“고하지요.” 

고하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이었다. 몽양은 고하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정하고 나오니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간의 조직체인 건국동맹을 해방이 되자 건준으로 확대 개편했고, 자리를 깔아놓았으니 모두 한 자리에 모이면 되는 것이었다.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하고, 민족 자치를 바탕으로 국가 틀을 짜면서 외세를 활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하는 거부했다.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고집이었다.     

며칠 전,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 엔도로부텨 치안유지권을 물려받았다. 이때 그는 치안유지 절차를 밟아나가면서 국가 구성을 펼쳐나가면 된다고 내다보았다. 그것이 정권을 인수받는 데 자연스런 수순이다. 이미 깔아놓은 자리에 모든 단체, 모든 기구, 모든 인사가 참여하면 성대하게 국가 인수 기구가 발족하는 셈이었다. 거기에 무슨 이론(異論)이 있을 것인가.   

몽양은 1940년대 초 탄압을 뚫고 조선건국동맹(건국동맹)을 결성했다. 국내 독립운동이 지리멸렬한 가운데 국내 및 해외독립운동 단체들간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 창구로 건국동맹을 결성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건준)라는 정부 인수기구로 확대, 개편했는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을 수 있는 대응 기구였다.  

이런 발빠른 조치는 누구로부터도 외면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없어도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판에 이미 존재했고, 또 누군가는 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조직을 확대 개편해 건국준비 기구로 구성했던 것이다. 이을 인식하고 엔도 정무총감도 만나자고 하면서 정부 인수 절차를 제의해왔던 것이 아닌가.  

그가 몽양을 만나자고 요청한 것은 일본인이 제재를 받지 않고 한국땅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일 때문이었다. 몽양은 그를 만나 준비해간 메모를 내밀었다. 

“5개항의 요구사항이올시다. 첫째 정치범 석방, 둘째 3개월 식량 확보, 셋째 치안 유지와 건설산업 불간섭, 넷째 학생훈련, 청년조직 불간섭, 다섯째 전 조선 각 사업장 노동자들의 민족 건설산업 협력이오.”  

엔도가 메모를 읽고 난 다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어떻게든 우리 일본인이 다쳐서는 안됩니다.” 

일본인이 무사 귀국할 수 있도록 돕기만 한다면 어떤 요구도 거부하지 않겠다는 자세가 분명했다. 그만큼 그들은 떨고 있었다. 저지른 죄가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중 두려운 것이 보복이었다. 재산 다 내놓고, 자리도 내놓고, 세간살이까지 내놓고 갈테니 무사히 몸만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애걸하는 입장이었다.  

어차피 떠나가는 마당이라면 그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도 선심쓰는 효과가 있다.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몽양이 이같은 합의사항을 발표하자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었다. 해방과 독립, 자주국가 건설을 눈앞에 두고, 이를 실감하는 순간, 누구도 감격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린 수순이라면 총독부 접수, 신생국가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우가 그간의 묘하게 삐걱거리는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최근우에 따르면, 엔도는 몽양을 만나기에 앞서 8월14일 동아일보 사장 고하 송진우를 만났다. 

“고하 사장, 재류 일본인이 무사히 떠나가도록 치안을 보살펴 주시오.”

고하는 단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패망해서 떠나가는 놈이 무슨 치안유지를 부탁하고, 재류일본인의 안전을 당부한단 말인가. 엔도는 나름으로 그간의 친교를 무기 삼아 그에게 치안을 부탁했는데 이맛살부터 찌푸리는 것이 내내 섭섭했다. 국내 인사 중 영향력 있는 동아일보 사장이 치안을 맡아주면 좀더 안심하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장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다. 엔도는 한동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하 선생, 우리에게 필요한 조치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는 거요.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방지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나는 적임자가 아니오.”
“존경받는 고하 선생이 치안 문제를 받아주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적임자가 아니라니요?” 

고하는 충칭에 가있는 임시정부가 있는데 굳이 자신이 정권을 인수할 당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새로 들어오는 연합군과 협상할 내용이지 패망한, 이른바 썩은 동아줄을 잡고 흥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일제가 식민지 민중에 가한 가혹한 탄압정책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서 뒷바라지해달라는데 민족 지도자로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고하 사장이 인수하기 어렵다면 적임자를 추천해 주시오.”

엔도는 어떻게든 고하를 붙들고 싶었다. 법도와 질서와 품위를 지키는 보수 우익 지도자 고하는 누가 봐도 존경받는 인격자였다. 일본유학파로서 일본 입장에서도 대화가 통하는 적임자였다. 그런데 뿌리치고 돌아가버렸다. 송진우가 돌아간 뒤 엔도는 총독부 조사과장인 최하영을 불렀다.  

“고하가 거부하고 있소. 최 선생이 맡아줄 수 없소?” 

최하영 역시 난색을 표했다. 최하영은 동경제대 출신으로 덕망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총독부 고급 관료라는 한계가 있다면서 대신 박석윤을 소개했다. 박석윤(1946년 월북) 역시 동경제대 출신으로 육당 최남선의 매제였으며, 외교관과 사업가로서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선이 닿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은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박석윤은 몽양과도 친했다. 박석윤은 엔도에게 불려가 건국동맹(건준 전신)의 몽양을 추천했다. 건국동맹에 그 역시 참여하고 있었다.

“몽양 여운형을 찾으시지요. 그라면 일본인 무사귀환을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 실체로서 건국동맹을 결성해 조직을 이끌고 있으므로 이 기구를 활용하면 일본인 무사귀국은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건국 조직으로 전환하면 순조로운 권력 이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치안유지협력회 사람들은 어떻소?” 
“곤란합니다. 일제의 어용 조직이라면 당장 반발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해방된 나라에서 그런 조직은 정통성 문제와 함께 화를 불러올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몽양은...” 

엔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몽양과 친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중국 유학파였고, YMCA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펼쳐오고, 중국과 시베리아를 누비며 항일운동을 한 인물이라는 점이 거슬렸다.   

“그러나 그는 유연합니다. 꼭 만나보십시오.” 

박석윤의 간곡한 권유로 엔도는 부랴부랴 몽양을 만났는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다. 이 소식을 들은 고하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지하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하고 전국 각지에 건준 지부를 조직했다고? 물러가는 일본에 대한 보복을 방지해주는 대가로 실권자로 나선다고? 이게 프랑스 페탕의 비시 정권과 무엇이 다른가?”  

고하는 건준을 나치 지배 시절의 프랑스 비시 정권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충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 것이 선결과제이고, 전승국인 미국으로부터 통치권을 인수받아야 하는 것이 순서인데 건준이 나선다고? 몸서리처지는 일제로부터 권력을 이양받는다는 것은 그 기구 또한 의심해볼만 하다. 꼬장꼬장한 우파의 원칙주의자 고하는 이런 이유로 몽양을 비판했다.  

“그래도 형님, 몽양 쪽 사람 만나서 협의는 해봅시다.” 

낭산 김준연이 사무실을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는 고하에게 조심스럽게 주문했다. 고하보다 몇 살 아래인 동경제대 출신의 판단력 빠른 낭산은 고하 밑에서 동아일보가 1941년 폐간되기 전까지 논설위원과 주필직을 맡아오고 있었다. 

“자네, 정신 있나? 일본놈한테 정권을 물려받으라고?” 

그러나 낭산의 생각은 달랐다. 갑작스런 항복으로 정신이 없는 저들이 애가 닳아 목숨을 구걸하고 있을 때, 선심쓰듯 받아들이면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권력을 이양받는 것도 전략 중 하나다. 굴러온 호박을 이런저런 명분으로 거부하면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권력의 현실적 실체로서 조선총독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숨돌릴 시간 여유를 확보하면 나중 무슨 꾀를 낼지 모른다. 일본의 기질 중에는 언제나 뒤통수를 치는 습관이 있다. 그런 뒤통수칠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 것도 전술 중의 하나다.  

“형님, 저놈들은 패망했다지만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목밖에 없습니다. 저들이 철수하면서 조선인들을 쏘고 떠나지 말란 없도 없습니다. 우리 민중은 보복의 자세로 저놈들을 칠 수도 있고요. 서로 싸움질이 벌어지면 더 큰 일 아닙니까. 저들이 인수인계 절차를 밟자고 요구할 때 응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것은 몽양의 생각이기도 했다. 서로 진영은 달랐지만 몽양의 생각과 낭산의 생각은 같았다. 둘은 기본적으로 타협주의자였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타협주의 정신이 국면 타개의 힘이 되었을 수 있다.   

한반도는 전승국도 아니고 패전국도 아닌, 어찌 보면 2차 세계대전의 손님이자 객이었다. 전승에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발언권이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이럴 때 취해야 할 자세는 기회가 왔을 때 재빨리 붙들어 매야 하는 것이다. 국익 우선의 기본 전제는 실리를 챙기는 일이다. 현실은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이었지만, 전승국인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역시 전범국가다. 이때 전쟁 피해국의 입장을 전달하고, 전후(戰後) 처리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그 일원이 되어야 한다. 그 전제는 발빠른 판단력과 유연성과 순발력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분열하고 대립하고 있다. 주도권 쟁탈로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도자기는 굳기 전에 작가의 솜씨가 발휘되어야 작품이 나온다. 놀고 싸우다 시간을 허비하면 조악품이 되거나 폐품이 된다. 해방 공간의 기회와 시간을 살리지 못함으로써 나라를 치유할 수 없는 불구상태를 만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절망과 좌절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그리스 신화에 이런 것이 있다. 

내가 벌거벗고 있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쉽게 눈에 띄기 위함이고, 
앞머리가 무성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뒷머리가 대머리인 것은 내가 지나가면 다시 붙잡지 못하도록,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있는 것은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내 이름은 카이로스다.  
바로 기회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것. 그것을 지도자들은 알고 있을까. 해방공간을 제대로 관리하느냐 못하느냐가 민족의 미래를 여느냐 못여느냐의 기로에 섰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런 기회비용은 초기에는 염가일 수 있다. 그러나 굳어지면 영영 분단의 고통 속에 갇히게 된다.  

굳이 말한다면, 고하나 몽양의 시국관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 성격의 차이만 있을 뿐, 차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차이가 적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철천지 원수처럼 적으로 돌아섰다.  

조선조 유생의 깐깐하고 원칙주의적인 품성을 지닌 고하에 비해 몽양은 나이브한 돌파형이다. 고하 입장에서 몽양은 미더워 보이지 않았다. 사는 방식이나 품성, 그리고 이념의 경계가 모호하다. 자유분방하니 엄격한 유교적 도덕주의자 눈으로 볼 때는 미심쩍고 신뢰가 가지 않았다. 반면에 몽양은 고하가 답답하고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는 꽁생원이다. 권위주의가 만연해 사고의 유연성이 없다. 

몽양과 고하는 정치인이었지만 모두 언론인이었다. 두 사람은 1941년 강제 폐간 당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장 자리에 있었다. 두 매체는 민족지로서의 경쟁의식이 있었지만 사세는 동아일보가 월등했다. 그래서 고하는 알게 모르게 몽양을 무시했다. 

‘매일신보(총독부 관영지) 사장은 자가용타고, 동아일보 사장은 인력거 타고, 중앙일보 사장은 걸어서 다니네’라는 시중 잡답(雜沓)의 언어 그대로 조선중앙일보의 몽양은 재정적으로 늘 허덕였다. 걸어서 출퇴근하는 건 소탈하고 호방한 성격을 말해주지만 당시 궁핍한 세상에서는 가난이 청렴이 아니라 무시의 대상이었다.  

고하의 주변엔 인촌 김성수를 비롯해 김병로 이인 백관수 장덕수 김준연 등 기라성 같은 일본 유학파 수재들이 포진해있었다. 운동가라기보다 테크노크라트 중심의 인재풀이었다. 

반면에 몽양 주변엔 빛나는 스타들일지라도 사회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동가숙서가식하며 모여들었다. 대체로 지사적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건준을 꿰차고 정권을 인수할 시물레이션을 하고 있다. 거기에 몽양의 휘문고보 연설회에 서울 시민의 반이 모였다고 할 정도로 대성황이었다고 하니 솔직히 배알이 뒤틀렸다. 
머리 좋고 잘 생기고 장래가 약속된 친구라도 식객 노릇을 하면 업신여기기 십상인데, 몽양이 그랬다. 인품과 학식이 없었다면 잘생긴 얼굴을 밑천으로 대처를 나대는 난봉꾼 신세가 될 사람으로 볼 만했다. 난세의 영웅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젊었을 적 식객 노릇하던 자가 훌쩍 커서 세상을 호령하는 처지가 되니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고하는 근래 몽양이 엔도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괴소문까지 떠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엔도가 고하를 묶어두기 위한 고도의 공작 음모일 수도 있었지만, 고하는 그것을 믿는 모양이었다. 인간은 본시 반대파의 나쁜 정보는 그대로 믿고 증폭시키고, 좋은 정보는 부정하거나 비트는 습성이 있다.  

“사람이 쓸개가 있지, 망해가는 놈들의 뒷돈을 받아서 그 자식들 귀향 편의를 봐준다고? 염치없는 일 아닌가.” 

고하는 도리어 낭산더러 진상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몽양은 낭산의 전화를 받고 최근우를 대신 만날 장소로 보냈다. 몽양의 심복 최근우는 낭산과 대학 동문이었다. 낭산은 최근우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동경 유학시절부터 친구 사이로 지낸데다 이념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 두 사람은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경력이 있었다. 몽양은 고하의 심뽀와는 상관없이 그를 어떻게든 건준에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쉬울 것 같지 않소.” 

최근우로부터 몽양의 뜻을 전달받은 낭산은 고개부터 살레살레 저었다.

“도대체 고하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소? 어차피 건준이 조직되었으니 함께 참여해 일하는 것이 좋은 일 아니오?” 

낭산도 불만을 갖고 있는 듯했지만 고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고하는 미군정과의 협력이 긴요하다는 것이야. 통치권을 물려받는다면 연합국으로부터 받아야 하고, 그 경우도 국민대회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지. 임시 정부가 들어오면 그때 정권을 인수하도록 역할하면 된다는 것이야.”  

절차상으로 보면 맞는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수인계할 구심체가 있어야 했다. 미국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니 내부적 결속력을 갖추고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우가 사무실로 돌아와 고하측과 접촉한 과정을 상세히 보고하자 몽양이 평가했다.

“시간이 없네. 인수 기구를 갖춰 대비해도 시간에 쫓기는데, 임정을 무작정 기다리라니... 쇠뿔은 단 김에 뽑으라고 했잖는가. 대책도 없이 미군사령부를 맞이한다면 그들 뜻대로 끌고갈 수 있고, 왜놈들이 끼어들어 분탕질할 수 있네. 왜놈들 성질 모르는가? 정권 인수인계 과정에서 일본놈들이 농간을 부릴 수 있단 말이지. 조선 지도자들이 미군사령부와 연이 닿아있지 않은 마당이라면, 협상 때 우리도 이런 정부 인수기구가 있다 하고 당당히 나서야 할 것이란 말일세.” 

건너편 자리의 정백이 나섰다.   

“그런데 말이지요, 저자들이 우리더러 총독부 자금을 받아 쓴다고 악선전하고 있습니다.”
“정백 동지도 그런 소문을 들었소?” 

몽양이 언성을 높였다. 

“들었습니다.” 
“고하가 나더러 총독부 돈을 받았다고 음해해? 나를 시중잡배로 몰다니! 용서할 수 없소!”

그의 손이 떨렸다. 몽양은 조선인들의 안위를 걱정해 비폭력주의에 입각해 일본인을 보내준다는 것이고, 그런 다음 권력을 인수받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돈받아먹고 후사를 도모해준다고 모해하다니.... 다른 회동자들도 비분강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놈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더 이가 갈리지. 그들은 대접받고 살았지만 우리는 매번 당하고 살았잖소. 핍박당한 우리보다 그자들이 더 방방 뛰니 우리가 매국노가 돼버린 꼴일세, 허허 참.” 
“설사 돈 받으면 어떤가. 지들처럼 우리가 총독부에 놀아날 사람들인가. 이건 치욕이다. 지놈들이 쌀밥만 먹고 살아서 남의 배고픈 것을 모르고, 이렇게 함부로 씨부리는 거야.”
“이것은 배신행위보다 더 나쁜 거요! 함께 하지 않겠다는 흉계요.”

모두들 흥분하자 몽양이 다시 주변을 정리했다. 

“여러 말 할 것없이 우리가 치안유지한 상태에서 미군정을 받아들이고, 상해 임정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니겠소. 우리가 먼저 임시정부 귀국환영회를 준비합시다.”

몽양은 선제적으로 임정을 환영하자고 했지만, 배석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몽양과 백범 김구간에 감정의 앙금이 있었다. 그것을 배석자들은 알고 있었다. 몽양이 상하이 임정시절 중국에 들어가 함께 활약할 때, 징계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국민대표회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해 김구 노선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모스크바를 찾아 레닌을 만나고 쑨원을 만나고, 장제스를 만나는 등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것이 임정의 눈에 거슬렸다. 경계 구분없이 종횡무진 활동하는 것이 임정으로서는 독단적인데다 그의 정체가 불분명했다. 그런 연유로 징계도 받았던 것이다. 

이때 몽양은 동아일보 통신원과 러시아의 타스통신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상하이 주재 통신원은 고하의 주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고하는 임정을 보는 시선과 노선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음해까지 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이렇게 자잘한 시비에 말려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 협잡꾼으로 모는 것은 어이상실이야.” 

몽양은 경기도 양평 부호의 후예였으며, 구한 말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수용하면서 노비들을 해방시킨 사람이었다. 돈에 연연하지 않고 양심의 소명대로 정의롭게 살아왔다고 자부해왔다. 풍류객으로서의 기질은 있었지만 남의 돈을 부정하게 탐해본 적은 없었다. 

해방 전후의 정치지도자 인기도로 보면 몽양은 단연 민중의 스타였다. 여론조사에서 몽양이 늘 1위였고, 2위 이승만, 3위 김구 순이었다. 따지고 보면 고하는 손 아래 급이었으며,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소탈한 성격 그대로 그와도 스스럼없이 동지로 지내고 있었다.  

“자고 나면 세상이 바뀌는데 임정이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고, 또 돌아올 때까지 한가롭게 기다린다는 것은 두 손 놓고 있자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기회가 있을 때 빨리 붙잡아야지 미적거리다가는 다 놓쳐요. 임정봉대론, 좋습니다. 그럴려면 기구를 만들어서 맞아야지요. 이것저것 갖추지 않으면 또 일본놈 밥이 되고 말 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일본놈들이 벌써 연합군과 밀통(密通)을 주고 받는다는 풍설도 있소이다. 조선인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벌써부터 모략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조직을 강화하고, 건준으로 하여금 임정 귀국환영회를 열지요.” 

회동은 이렇게 결론이 났다. 건준은 산하의 보안대를 건국치안대로 개편하고 청년학도들을 중심으로 관공서ᐧ경찰서ᐧ금융기관ᐧ방송사 등 주요 건물 보호에 나섰다. 전국 시·군·읍ᐧ면 단위에 광범위한 지부 조직을 결성했다. 전국 145개 지부가 설치되어 9월1일 전국건국준비위원회가 열렸다. 이렇게 발빠르게 국내 유일의 정치결사체로 모습을 갖춰나갔다. 여세를 몰아 9월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조직기본법을 채택하고 인민위원을 선출해 신정부를 구성했다. 

조각 명단을 보면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교부장 김규식, 재정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경제부장 하필원, 서기장 이강국, 기획부장 최근우가 지명되었다. 대회에서는 임정환영준비회 및 미군환영회도 구성하기로 결의했다. 

인공이 출범했지만 갑자기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일제에 쫓겨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 벽돌공장에서 노동자로 숨어지내던 박헌영이 나타난 것이다. 몽양은 그와 제휴해 조직 기반을 확대해나갔다. 어떻게든 세를 결집하여 나라의 미래를 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박헌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장안파, ML파, 화요회로 분열되어있는 3파의 공산당 조직을 하나로 통합해 인공에 합류했다. 결집력이 강한 그들이 어느결에 건준 조직의 중심부를 장악했다. 이를 보고 부위원장 안재홍 등 민족진영이 이탈했다. 몽양은 사회 여론을 중시해 좌우 합작을 꾀하는 것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지만, 중도 우파들이 이탈해 그의 조직 장악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사람 좋은 그는 누구나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놓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이 무렵 원세훈 조병옥은 조선민족당, 안재홍 허정 윤치영 윤보선은 한국국민당, 송진우 김성수 백관수 김병로 김준연은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는데, 이중 한민당이 막대한 호남 자본력을 바탕으로 우파 주류로 등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주산업이 농업이고, 호남은 곡창지대였으니 한국 자본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한민당은 김구, 이시영이 이끄는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는다는 방침 아래 9월 7일 한민당 발기대회를 열었다. 이때 서울에는 174개의 정당이 난립했는데 그 중에는 1인 정당도 있었다. 

몽양은 분열을 막기 위해 양 진영의 통합을 전제로 재차 고하에게 협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하는 여전히 건준을 부정했다. 임시정부가 있는데 또다른 정부기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그것은 일단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였다. 그러나 몽양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태도가 본질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었다.  

분열이 내면화한 한국민의 기질 때문에 대립은 일상화되었다. 대의를 위해 소아를 버리는 것이 대인(大人)의 풍모라는 정신을 외면했다. 기왕 설치된 기구를 통해 임정봉대론을 펴고, 임정이 귀국해 기구를 흡수, 확대해 나가면 된다는 것이 평범한 시민들의 기대인데 지도자들은 그런 단순방정식 대신 소소한 대립 문법으로 부딪치는 것을 일상화했다.

고하가 한민당을 창립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임정 봉대론을 편 입장에선 모순이다. 고하의 한민당은 정당의 하나이고, 정당은 기본적으로 집권을 목표로 하는 기구다. 임정 세력은 별도로 한독당을 창당했다. 그 역시 권력 쟁취를 위한 정당으로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한민당과 한독당은 대립적 위치에 있지 통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정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자는 것은 앞뒤가 안맞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대 조선 인식은 제 정당이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총독부는 조선 지도자들의 내분과 분열이 심화하자 한결 여유를 갖고 즐기는 입장이 되었다. 손안대고 코를 푸는 격이 된 것이다. 자고 나니 시간은 그들 편이고, 그래서 패망 직후 쩔쩔 매던 것이 창피할 지경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건준이 조직 확대를 꾀하자 조급한 김에 허용하는 듯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한국 지도자들끼리 피 터지는 쟁투를 벌이면서 여유를 찾게 되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다시금 통치의 희열을 맛볼 수 있다고 보았다. 뭉치면 대적하기 힘든데, 그래서 갈라놓는 정책을 식민지정책의 주요 의제로 설정했는데 개입하지 않아도 서로 진흙밭의 개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개미 두 마리가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을 한다. 약한 개미가 먼저 희생된다. 그러나 승리한 개미도 물린 상처로 인해 결국은 죽게 된다. 먼저 죽느냐 나중 죽느냐의 차이일 뿐, 두 개미는 결국 죽는다. 이렇게 끝내 둘 다 나가떨어지는 치킨 게임의 처절한 모습은 물러가는 조선총독부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통쾌한 관전 포인트였다.

건준 지도부는 조선총독부의 감독을 받는다는 것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건국의 기치를 내걸고 시가행진을 벌이고 관공서, 신문사, 방송국, 경찰서, 기업 등 주요 기관 경비를 명분으로 삼아 접수했다. 상대방이 힘 떨어질 때 밀어붙이는 것은 정당하고 당연한 전술이었다. 빼앗긴 것을 되돌려 받기 때문에 도둑질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것이니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조선총독부가 몽양에게 치안권을 위임했다면 건준을 당연히 정권인수 기구로 인정한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총독부는 어느날 권력이양을 약속한 바가 없다고 포고문을 발표했다. 역시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다음과 같이 사태를 분석했다.

-고하 세력은 8.15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책이 상책이라고 보고 있다. 
몽양은 고하의 인식과 반대로 8.15 상황을 신속하게 대처하고 긴급하게 움직이고 있다. 
두 세력은 정파주의에 빠져있다.  
조선총독부는 미군정과 협상하여 조선반도 관리 일정을 연장할 수 있다. 연장이 용이치 않으면 총독부 의지대로 환경을 조성해나간다.  
기회는 조성되고 있고, 연합군과의 협상 채널은 다양하게 확보되어 있다.

그 진단은 정확하게 맥을 짚고 있었다. 고하는 건준을 조선총독부에 협력하는 괴뢰정권이라고 공격했다. 건준은 고하가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면서 한민당을 창당한 것이 모순이라고 공격했다. 이것 모두 총독부가 이간질하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일본의 조선군관구사령부와 경찰은 이를 보고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   

-당국의 지시에 따라 생업에 종사하고,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기를 요한다. 
민심을 교란시키고,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일이 있으면 군과 경찰은 단호히 조치를 취할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더 나아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맹성을 촉구한다’람는 담화를 발표했다.

-건준의 본래의 사명은 총독부 행정의 치안유지에 협력하는 것인데, 본래 사명을 일탈하는 점이 많다. 건준 활동 및 의지 발표를 보면 생명 재산의 보증, 정규 군대의 편성, 식량물자 운영, 통제기관의 장악 등이 포함되어 있고, 행정 기관의 접수를 촉구하는 등 정치적 의지 표시, 또는 독립 정권 획득의 준비 공작 등의 표명으로 인하여 심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이같은은 일탈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엄하게 단속, 조치할 것이다. 

건준의 명칭도 조선총독부가 지시하는 취지에 맞게 바꿀 것을 요구했다. 국내 세력이 조선총독부에 손을 써 건준 명칭을 바꿔 쓰도록 요청까지 했으니 조선총독부로서는 국내 유일의 건국기구를 무력화시키는 데 더할 수 없는 힘의 탄력을 받고 있었다. 일본의 힘을 빌어 이익을 취하려는 국내 세력들 역시 힘을 받아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8.15 해방과 독립은 기록상일 뿐, 현실은 일제 치하나 다름이 없었다. 몽양에게 협력을 요청했던 조선총독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수많은 정파와 군벌이 난립하지만 내버려 두어도 그들끼리 충돌해 끝내는 자멸한다. 이걸 지켜보며 식민지 관리를 여유있게 연장할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미군정과의 네트워크를 활발히 작동해 일본의 복안대로 남한을 물려주고 퇴각하면 된다. 인적 물적 손실 하나 없이 제2의 친일국가를 구성하고 떠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를 지켜본 오카 조선총독부 정무국장은 “자식들”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조선놈들은 재미있단 말이야. 지들끼리 진흙탕을 뒤집어쓴 채 깃발을 꽂으러 언덕에 기어 오르는데, 꽂을만 하면 밑엣놈이 바짓가랑이를 끌어내려 진흙구덩이에 쳐박아버린단 말이야. 그렇게 서로 진흙탕에 나뒹군단 말이야. 하여간에 재미있는 종들이야.”

이런 가운데 조선총독부는 일본 군사 3천명을 경찰로 전속, 배치했다. 일본군은 무장해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써먹어야 할 마땅한 곳을 찾던 중이었는데, 다행히 불안한 정국이 전신의 계기가 되었다. 치안유지 명목으로 미군으로부터 일정 기간 통치를 위임받을 수 있다. 이러니 해방과 독립은 개뿔, 여전히 일제의 연장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우리만 모르고 있었다. 오카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면서 다른 성명서를 준비했다.

-현재의 정세는 대일본제국이 미ᐧ영ᐧ중ᐧ소 4개국과의 전투 행위를 일시 정지한 것에 불과하며, 조선의 사태는 금후 일본과 공동선언의 상대국과의 사이에 이루어질 합의에 의하야 비로소 통치권의 수수(授受)가 이루어질 것이다.  
고로 그 때까지는 조선에 있어서의 제국의 통치권은 엄연히 조선총독부에 존재하며, 그 사이 조선총독부에 통치의 모든 권한과 책임이 있다. 즉, 사태는 직접 전투행위가 정지된 것에 불과하다.  
조선의 문제도 금후의 조약 내지 법제적 수속이 진행된 이후의 일이다. 
누가 조선통치의 책임 있는 지위에 설 것인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조선통치의 책임과 그 통치를 위한 시설 일체는 현재 역시 조선총독부 자체의 수중에 있다. 고로 치안을 교란시키는 일이 있으면 총독부는 그 책임으로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실제로 기마병이 일본 군도를 차고 위협적으로 서울 중심부를 순찰을 돌고, 행인이 오인을 받아 기마경찰이 쏜 총에 쓰러져 죽었다. 기마경찰의 채찍을 맞고 부상당한 시민도 부지기수였다. 경찰은 용산역 앞에서 항의하는 의과전문학생을 경찰진압봉으로 때려죽이고, 시민을 곤봉으로 갈기면서 잡아가두었다. 민중들은 해방을 실감하지 못했다. 

조선군관구사령부의 담화는 그것을 잘 말해준다. 

-소위 정식 정전 협정은 금후 대일본제국과 연합국 당국간에 진행될 것이다. 
…조선은 여전히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 있으며, 그 통치권은 조금도 움직임이 없다. 
항간에 떠도는 신정부의 인물 구성과 같은 것은 일부 망동자의 흑색선전에 불과하다는 것이 시일의 경과와 함께 명백해지고 있다.  
일부 책동분자가 지도권을 획득하려고 기도한 일시적 파문은 군관의 적절한 조치에 의하야 즉각 진정될 것이다.  
일부 책동분자의 암약은 아직 근절되지 않았으며, 기회를 보아서 재발하리라 예상되기 때문에 충분한 경계심을 필요로 할 것이다. 

곧 진주할 미군 태평양사령부는 조선총독부가 취한 전후 조선반도 관리 정책을 인정하고, 독려했다. 미군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대화할 한국의 파트너 역시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것을 조선총독부가 대신했고, 한국의 지도자는 관여하지 못했다. 

미군 태평양사령부는 조선의 지도자를 아는 사람이 전무했으며, 대한반도 정책 또한 뚜렷이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치안을 유지하는 근간을 조선총독부와 일본 군경에 위임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군 제17방면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또다시 9천명의 군인을 경찰관으로 전속시켜 특별경찰대를 편성했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피터지는 싸움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공작반이 해왔던 분열 책동을 조선의 지도자들 스스로가 나서서 찢고 가르고 있었다.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인민공화국으로 건국 기구를 개칭하면서 세를 확장해가던 몽양의 세력은 조선총독부에게는 최대 걸림돌이었다. 보아하니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등 항일투쟁 세력이 중심이 된 건준이 정부 기구로 등장하면 일본에게 우호적일 리 없는 정부가 된다. 다른 정파들과의 갈등 때문에 몽양 세력이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유일 건국 기구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다음과 같이 몽양 세력을 견제할 방침을 정했다.   

-여운형 등의 정치 공작이 당국과 충분한 사전협의 없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상황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정치운동 단속요령」을 발표한다. 
(1)현저히 저하된 경찰력을 보강하여 종래와 같이 조선총독부 스스로가 치안을 확보한다 
(2)건준에 의해 접수된 중요 시설 및 공공기관을 탈환한다 
(3)이 과정에서 발생될 조선인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한을 행사한다. 

요약하면 건준 활동을 통제하고, 끝내 불허한다는 방침인 것이다. 이후 건준 사무실 주변에 경찰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여운형의 좌우 합작을 위한 조직 체계는 우익세력과 총독부의 탄압과 협공으로 뚜렷하게 동력을 잃었다. 동시에 좌우파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좌파로부터는 기회주의자, 또는 친미파로, 우파로부터는 좌익빨갱이, 친소파라는 공격이었다. 일본인은 저절로 즐기는 입장이 되었다. 오카는 “조선인은 시키지 않아도 갖춰진 기구마저 부숴버리는 재주가 있군” 하고 속으로 웃었다.   
    
1945년 9월 8일 미 24군단장 존 리드 하지 중장이 사단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했다. 그는 미군정 사령관으로서 38 이남 지역에 미군정을 선포하면서 조선총독부의 통치 체제를 존속,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으로서는 한반도 처리에 관해 독립할 때까지 신탁통치를 고려하고 있었을 뿐, 한국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미 군정은 조선총독부의 자문을 받아 통치체제를 승계하는 정책을 펴나가는 것으로 일단 방침을 정했다. 군정을 이끄는 하지 중장이나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은 전쟁만을 아는 직업군인이어서 뚜렷한 신생 독립국 건설 철학을 갖고 있지 못했다. 신생국의 민족성이나 역사, 전통, 인민의 생각과 고민에 대한 식견을 미리 숙지하거나 인문학적 세계관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세계 패권국가로 부상한 미국 정부 자체가 그러했다.   

이런 가운데 10월 16일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는 좌우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를 구성했다. 이 기구는 상징적 존재였을 뿐 실체는 없었다. 11월 23일과 12월 2일엔 충칭 임시정부 요인이 1,2개조로 나뉘어 차례로 귀국했다. 모두 개인자격이었다. 임정은 정통 정부임을 내세워 기성 정당을 외면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며, 한독당을 창당했다. 임정봉대론을 내세웠던 한민당과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셈이 되었다. 

임정은 조각을 하면서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국방부장 김약수, 총참모장 유동열, 광복군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임명했다. 건준이 전국인민대회에서 발표한 조각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해외 세력의 귀국으로 국내 정정은 더욱 복잡해졌고, 미 군정은 건준-인민위원회(인공)와 충칭 임정 모두 불법화했다. 대신 정당 활동의 자유는 허용했는데, 이로인해 어느새 200여개의 당 깃발이 거리에 나부꼈다. 이들 당은 자고나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소소한 명분으로 대결을 일삼았다. 첫 단추를 잘못 뀀으로써 건국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피를 부르는 내전의 중심부로 달려가는 형국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아사코의 집 개보수작업을 마치고 생도 일행이 이시하라 상 집으로 돌아오자 밤이 깊었다. 모처럼 일을 한 보람으로 생도들은 피곤했지만 저마다 기쁨에 넘쳤다.

“우리가 방공호를 파고 진지 보수공사를 한 노역이 이렇게 먹힐 줄 몰랐네. 노가다나 데모도로도 먹고 살 수 있겠어. 우리 여기 그대로 눌러앉아? 토건업이면 금방 부자가 되겠어.”

장지성이 농담하며 구릿빛으로 그을린 팔을 들어보였다.

“다른 집들도 수리해달라고 아우성인데, 이를 어쩌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인지상정이오. 귀국선이 준비될 때까지 좋은 일 하고 가시오. 사람들이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오.” 

이시하라 상이 청년들을 격려하고 말을 이었다.  

“그것이 사실은 아나키즘의 정신이오. 아나키즘은 미래에 다가올 평화를 내다보는 사상이오. 그 실현을 위해 풀뿌리 공동체를 형성하자는 것인데, 진정한 지방자치의 모습이오. 거기 가장 현실적으로 가닿은 곳이 제주도지. 거기가 나의 실험장이고 실천현장이고, 이상향이오. 부단히 실험하고 응용하고 실천해갈 곳이오.” 

생도들은 또 아나키즘 선전인가 해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오민균이 물었다. 

“왜 제주도가 실험장이고 실천장입니까?” 
“거기에 아나키즘의 원형이 살아있다는 거요. 중앙정부의 통제권 밖이고 혜택도 없으니 스스로 더불어 살아가자는 방식의 룰, 바로 자생적 공동체의 모습이오. 그들의 서로를 위한 헌신성은 놀랍소.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중앙정부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이웃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와 헌신이오. 그게 바로 인디안 정신이오.”

그는 식은 차를 후루룩 마신 뒤 다시 설명했다. 

“조선의 아나키즘은 아나키즘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왔소. 국제주의 기준에는 맞지 않지만 나는 그걸 이해하오. 민족주의는 영토와 국경을 확장하는 침략적인 제국주의로 나타나기도 하고, 타민족의 간섭을 배제하는 민족해방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두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활용해왔소. 그 정신에는 정당성이 있소.”

일본의 일극주의만을 생각하고 있던 오민균은 그의 지적이 새로웠다. 그는 지적 호기심이 발동해 개인의 자유를 갈구했던 아나키스트들이 걸어간 삶이 어떤 것인가를 그려보았다. 신생조국에 그 접목이 가능할까.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에게서는 민족주의 냄새가 나오. 그들이 독립을 위해 아나키즘을 이용했으니까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 그런데 경찰이 그들을 결박했소. 본래는 무저항주의인데, 일부 무력사용자를 걸고 무자비하게 탄압했소.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아나키즘은 밥상의 밑반찬과 같은 거요. 어떤 사조도 충돌없이 수용할 수 있소. 차별없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상이오. 폭력을 정당화하는 아나키스트는 극소수요. 나는 철저하게 그들과는 선을 긋고 있소. 헌데 누구로부터도 동의받지 못했소. 왜 그런가. 경찰이 괴물로 만들어 제압했으니까. 그들로 인해 군국주의자 제국주의자는 물론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들로부터도 외면받았소. 이런 음모와 조작을 이길 수 있소?” 

장지성이 받았다.  

“하지만 그런 사조는 격동기의 세상에서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이 될 순 있지만 힘이 되진 못하죠. 그리고 악법도 법이라고 따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소크라테스도 그랬잖아요. 악법도 법이니 따르겠다면서 독배를 마셨으니까요.”

오민균이 이의를 달았다. 

“악법도 법이라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는 위선자입니다. 어떻게 악법을 만든 자를 용서하고, 그가 만든 악법도 법이라고 독배를 마십니까. 그는 결국 압제자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그들을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성인도 법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마셨다... 압제자는 얼마나 대중 조작의 도구로 선전하겠습니까. 악법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마실 것이 아니라 독배를 던져버려야지요. 어차피 죽는 것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해야지요.”
“좋아요. 그렇게 좋은 생각들을 해봅시다. 여러분들에게 나눠줄 것이 있소.“

이시하라 상이 등사물을 돌렸다. 이시하라 상 옆에 생도들이 둘러앉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 줄 아시오?” 

이시하라 상이 화두를 던졌다. 

“귀신 같은 그런 사물을 말씀하신 겁니까?” 

이정길이 물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란 뜻으로 내가 직접 대답하지요. 제일 무서운 것은 귀신도, 짐승도, 그렇다고 빈곤도 질병도 아니고, 다름아닌 삶의 권태와 허무라는 거요. 이건 마키아벨리의 말인데, 권태와 허무란, 무엇인가를 해도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무력감. 내 삶의 근원적 이유를 찾지 못한 데서 오는 권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좌표도 방향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허둥대는 것을 말하지요. 전쟁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갔지만 막상 전쟁이 끝나니 남는 허무감, 그동안 사회를 위해선지 국가를 위해선지, 혹은 자신을 위해선지 모르는 것에 맹렬히 질주했으나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망감. 그런데 여러분은 작은 실천으로 이런 권태와 허무를 극복했소. 그 안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소. 조그만 실마리가 그들의 생명력을 일깨워준 것이오. 절망 가운데서 인종과 국경을 넘어 인간애를 실천한 청년들을 보고 비로소 그들은 인간의 실존을 확인한 것이오.”

그는 청년들이 아사코와 그 이웃집 사람들에게 배려해준 것이 권태를 이기는 길이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런 작은 희망이 평화의 등불이 된다고 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허무와 권태와 좌절은 지금 조선 민족에게 당면한 과제가 되었소. 게다가 남북이 갈라졌으니 그 심도는더욱 깊어질 것이오. 하나로 결집시키지 못하는 비애. 분열에는 능하지만 단합의 기제들이 부족하니 어느새 증오까지 겹치게 되었소. 그게 왜 그러는지 아시오?” 

청년들이 대답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 같았다.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분열 책동 때문이오.” 
“저는 우리의 나쁜 왕조 질서가 나라를 망가뜨렸다고 봅니다.” 이정길이 응대했다. “우리의 왕조는 지나쳤습니다. 역모죄는 3대를 멸했으니까요. 그런 후과로 국민적 자생력이 사라졌다는 것이죠.” 
“그거야 다른 왕조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럴 수 있겠군. 그래서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오. 같은 사안이라도 표독스런 왕조가 있고, 인자한 왕조가 있지. 방향이 좀 다른 이야긴데, 나는 오스트리아를 주의깊게 보고 있소. 그들은 독일 제국인 양 일본과 마찬가지로 주변국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자국의 번영을 추구한 나라였소. 주변국이 오스트리아라면 치를 떨지요. 이 때문에 연합군이 오스트리아를 4분할했소. 그러나 그들은 외부적 통제를 뚫고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국가로 나설 것이오. 외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냉철한 자기 반성과 내부 검열을 통해 힘을 결집해서 방향을 잡아 길을 만들고 통일의 길로 나아갈 거요. 그러나 조선은 동질성을 파괴하는 파쟁의 행진만 벌이고 있소. 반대와 배제의 기제가 중심이 되고 있소. 그중 정치인이 가장 타락했고, 다음이 언론이고, 지식인이오. 그러니 통일은 난망하지 않나 싶소. 그들은 분단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할 것이오. 그것으로 기득권을 쌓아가는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공동체의 공동선이라는 것이 없지. 구한말의 지도자들처럼, 철저하게 이익의 자기화, 손실의 사회화를 지향하는 지도층이오.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소.” 
“외부세력이겠죠.”

오민균이 답했다. 

“그렇지. 모양만 다를 뿐 다시 식민지가 되는 거요.” 
“선생님,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조국을 찾겠노라고 상하이에서, 만주에서, 시베리아에서 우리 선각자들의 분투가 있었습니다. 독립투쟁의 자산이 있습니다. 저희의 허무와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안락과 이익을 기꺼이 희생한 분들입니다. 저희 조국은 빛나는 선구자들의 이름으로 점철된 역사 그 자체입니다. 그들에 의해 깨끗한 조국이 들어설 것입니다. 선생님은 우리 민족성을 얕잡아보시는 것 아닙니까?”

조병헌이었다.  

“그중 어느게 문제라고 보시오?” 
“파편화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민족성일 수는 없습니다. 외부적 영향으로 온 것이지만 이젠 내부적 결속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를 바라오. 하지만 문제는 언론이요. 일제 강점기 언론 스스로 부역자를 자임했소. 나치에 점령된 프랑스 비시 정권 하의 언론보다 더한 변절 신문들이오. 신문과 전파는 오늘도 내일도 미래도 편파 왜곡, 조작으로 여러분을 분열시킬 것이오. 20세기 문명은 배운 자, 가진 자들이 인민을 눈멀게 하여 이익을 챙기는 시대요. 그들이 더 악질이오. 그들부터 처단해야 하는데 그들 힘이 크니 다른 방도가 없소. 그들이 제 소명을 다했다면 세상이 이리 됐을까?... 나 역시 옳은 일을 한다고 하는데 그들에 의해 악마가 되었소.”

그는 계속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면 세기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단 말인가요?”

장지성이 물었다. 

“그렇소. 예로부터 한국엔 노론, 근자에는 친일파 세력이 주도했는데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 게 언론이었소. 한마디로 썩었지. 지도자의 헌신성은 사라지고 누구보다 타락하면서 사익을 취 한자의 편에 섰소. 언론이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데, 더많이 썩어버렸소. 일본 천황을 신처럼 떠받드는 신문이 일본에서보다 조선의 신문에서 나왔소.”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청년들은 놀라고 있었다. 

“민중이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무지하고 힘이 없소. 여러분의 역할이 중요해요. 여러분부터 힘을 기르시오. 뭔가 만들어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백성을 깨우쳐야 해요.”
“결사체를 만들라는 뜻입니까?” 
“지도자는 궁극적으로 선을 지키기 위해서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오. 일본제국주의가 폭력으로 세상을 흐려놓을 때,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면 이런 엉터리 광기는 없었을 것이요. 아무리 악한 지도자라도 누군가 견제했다면 못된 짓은 크게 저지르진 못했을 거요. 그 역할을 언론이 해야 하는데 그들이 함께 썩고 기득권에 편집되었으니 광인에게 칼을 쥐어준 격이 되었소.”  

생도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따지고 보면,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조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소. 미나미 총독이 독립운동가의 뿌리를 뽑아버린 탓일까? 외관상 그런 것 같지만, 그게 아니오. 일본인 경찰보다 더 잔혹한 조선인 경찰들 때문이오. 미행하고 감시하고 잡아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고.... 이런 마당에 독립운동가들이 배겨낼 수 있겠소? 그 정도로라도 명맥을 유지했던 것은 목숨 걸고 나선 그들의 헌신성 때문이었소. 밥먹는 것조차 해결하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활동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지. 나는 경찰 토벌대에 사살된 조선의 독립투사 위장에서 나무뿌리만 나왔다는 말을 듣고 한없는 슬픔에 젖은 적이 있소. 그를 조선인 경찰이 사살했소. 해방이 되었다고 해도 그런 경찰이 나라의 주역이 되고 있으니 권태와 허무감은 말할 수가 없소. 그들의 수법 모르오? 억지와 포악성... 거기에 독립운동 세력보다 친일세력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도 권태에 빠지게 하고 있소. 그들은 권력ᐧ자본·정보·휴민트·지배의 노하우를 갖고 있소. 새로운 식민지를 확보한 미국은 일본의 자문을 받아 그들을 이용할 것이오. 조선의 사정은 알 바도 아니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총독부가 제공한 통치 노하우로 조선반도 통치기반으로 삼을 것이오. 그중 경찰이 중심이 되겠지. 경찰국가를 유지하는 데는 그만한 충성 도구가 없으니까.”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경찰조직을 신생조국의 치안책임자로 앉힌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오민균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 세력은 친일 세력을 이기지 못해요. 숫자에서나 화력 면에서나. 거기에 미 점령군이 있지. 그들에게 시대정신과 영혼의 유무는 의미가 없소. 이익을 위한 충성만이 자원일 뿐이오.” 
“그런 놈들은 부숴야지요.”

오민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몽양 선생에게 그 뜻을 전하겠소. 귀국하면 찾으시오. 거친 세상에 유연한 그가 화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오. 여러분은 몽양 선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한 것 알고 있지요?”
“형님으로부터 소식은 듣고 있습니다.” 

이정길이 응답했다.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도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오. 조선총독부로부터 그런 교시를 받았다고 하오. 그리고 송진우의 한민당은 미군정에 의한 잠정적인 훈정기가 필요하다고 보고, 미군정을 도와서 장차 정부수립 때 필요한 절차를 밟자고 하는 모양인데, 민족세력이 거부할 거요.” 
“왜 그렇습니까.”
“미군정은 그런 민족주의자들이 귀찮아요. 미군정에 충성하겠다는 세력도 배제할 거요. 결국 조선총독부가 자문하는 프로그램대로 국정을 운영할 거요. 그러면 제2의 일제가 시작되는 거요.” 
“그럼 민족세력은 배제된다는 것입니까”
“나쁘게 말하면 이용되고 말 것이오. 말 잘듣는 충성자들이 필요하고, 그런 세력이 차고도 넘치니까.” 
“그럼 몽양 선생도 고하 선생도, 이승만 박사도 김구 선생도 버림을 받는단 말씀입니까.”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불행히도 그들은 그렇게 이용당한다는 것을 몰라요. 고루한 자기확신편향에만 차있소. 그건 오만이지. 그들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운데. 그런데도 사고는 조선조의 훈구파의 것이고, 노론파의 것이오. 세계관이 옹졸하오.” 
“그것은 모욕입니다.”

조병헌이 즉각 반발했다. 지금까지 그를 존경해왔지만 조국의 지도자들을 이렇게까지 폄하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하, 그렇게 화를 내니 내가 반갑소. 당연히 화를 내야지요. 왜 화를 내지 않았나 했지. 살아있는 젊은이들을 만나니 기쁘오.” 

일하는 아주머니가 술상을 차려왔다. 

“여러분의 충정과 조국을 바라보는 태도를 보니 내가 즐겁소. 높은 이상과 냉철한 현실인식, 넓은 세계관을 갖기를 바랍니다. 나도 곧 제주도로 떠날 거요. 아내를 만나야 하거든.”

술이 몇순배 돌자 갑자기 조병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독립군들이 불렀던 노래를 선생님께 헌정합니다. 용진가입니다.”

그리고 힘차게 부르자 생도들이 따라불렀다. 

요동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쳐보세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적에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청년 사관생도들의 가슴이 파동을 치는 것 같았다. 이정길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사관생도들은 며칠째 아사코 집으로 향했다. 청년들이 달려들자 대번에 집의 꼴이 잡혔다. 허물어진 지붕과 망가진 벽체, 굴뚝을 바로 세우고, 다다미방, 화장실을 고쳤다. 마을사람들이 아사코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후리소데 기모노를 차려입고 찾아온 여인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절망에 젖어있는데, 조선인 청년들이 찾아와 삽과 망치를 드니 제 정신이 드는 것이었다.   

“아사코 짱 집이 새 집이 된 게 무엇보다 기뻐요. 두 모녀가 힘들었는데....”

여자들이 말끔하게 정돈된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미나미 여사도 환한 얼굴로 벽에 몸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았다. 

“정성이 모이면 어떤 무엇도 이루는군요. 나도 몸이 나아졌답니다.” 

그 고마움을 모찌, 무시모노, 히가시를 쟁반에 담아 표시했다. 기모노 차림의 아주머니가 투명한 젤리 같은 것으로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을 그려넣은 와가시를 한 손으로 받쳐들고 오민균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드셔보세요. 행운이 따른답니다. 돌아갈 건가요?” 
“네. 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릴 적으로 돌리겠지요? 우리가 저지른 죄업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그러면 아사코 짱이 어떻게 되나요?” 
“무슨 걱정을... 구원(舊怨)을 딛고 양국이 가까워질 텐데요,”
“그렇게 될까요. 조선인들이 묵과할까요. 저지른 죄가 너무 많은데...”
“오민균 짱이 병원 의사들이 못한 일을 했답니다. 고름이 흐르는 상처 부위를 입으로 빨아내서 소독하고 낫게 해주었답니다.” 

미나미 여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나, 어떻게 그런 고마운 일을...” 

여인들이 한결같이 놀랐다. 

“어머니가 그렇게 제 상처를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 훌륭한 어머니시군요. 형제들은 어떻게 되나요?”
“제 어머니는 9남매를 낳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전처이신 큰 누나까지 합하면 열 명의 자식을 건사하셨습니다.” 
“전처의 딸자식까지?”
“네. 아버님의 전처는 큰 누나를 낳고 산후통으로 일주일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새 장가를 들어 어린 신부에게 신생아를 맡긴 것이지요. 이웃마을에 열여덟 살 먹은 가난한 집 처녀를 데려왔는데, 그분이 제 어머니이십니다. 어린 처녀가 시집와서 전처의 딸을 키우고, 또 아홉명의 자식을 낳아 기르신 거죠. 그래서 도시로 나가 중학을 다니다가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언제나 어머니는 배가 불러있었지요. 어머니가 배가 불러있는 것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아버지는요?”
“제 아버님은 한학을 하신 완고하신 분입니다. 어머니가 고생을 하셨지요.”
“그래서 이렇게 번듯한 청년을 두셨군요. 절도있고 예의바르고... 고국에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하실 건가요?” 
“군인이 되겠습니다. 나라를 잃은 게 군대를 제대로 기르지 못한 데서 온 비극입니다.”

그러자 모두들 서먹서먹해졌다. 미나미 여사가 말했다. 

“제 개인적으로라도 사과하고 싶군요.” 
“그럼 사과해야죠. 아사코를 위해서라도.”

다른 여인이 받았다. 

“아사코 짱이랑 태화 짱이 안보이네요?” 

두 사람은 벌써 황혼넠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5>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 누구 짓인가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5>
2019.09.27 13:42:27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5장 귀국선 우키시마호 (1) 

교토현 가라쓰 만에 면한 조그만 어촌마을.  

새벽이면 짙은 안개가 해적선처럼 소리없이 스며들어 바닷가를 휘감고 있고, 물결소리마저 잠잠했다. 멀리 마이쓰루(舞鶴) 군항에는 산덩이 같은 군함들이 웅크리고 있고, 제비처럼 날렵하게 생긴 함선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지만, 저만치 멀리 만의 끝쪽에 굴딱지처럼 낮게 엎디어 있는 어촌은 딴 세상처럼 조을 듯이 평화롭다.  
마이쓰루만 시모사바가 앞바다는 절벽같은 산이 바다에 맞닿아있으나 그곳으로부터 이어진 이십 리쯤 떨어진 마을 바닷가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 활처럼 길게 뻗어있다. 
미후라 상은 새벽이 되자 여느때처럼 일어나 바닷가로 나갔다. 새벽 바닷가를 거니는 것은 소년시절부터 노인이 된 지금까지 일관된 그의 습관이었다. 긴 해안선을 따라 몽환처럼 펼쳐진 안개낀 바다를 거닐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때로 바닷가로 밀려온 고기들을 주울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좋았다. 어떤 때는 상어가 모래톱에 올라와 숨을 할딱거린 경우도 있는데, 어느핸가 돌고래를 한 마리 건져올린 적도 있었다. 그걸 바라고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부수입도 간간히 생겨서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백사장을 걷는 행복감에 젖었다.
이날도 그는 멀리 마이쓰루 산 중턱에 솟은 가라쓰성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머리를 숙여 절하면서 행운의 하루를 바라고 바닷가 모래톱으로 나갔다. 마이쓰루 군항은 학이 날개를 펴고 춤을 추는 지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만 깊숙이 자리한지라 요새였고, 미항이었다. 청일전쟁 승리 배상금으로 건설한 항구였다. 요코스카(橫須賀), 구레(吳), 사세보(佐世保)와 함께 일본 4대 군항 중 하나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나 비밀리에 운영됐기 때문에 인근 주민들과도 별로 인연이 닿지 않은 항구였다.   
미후라 상은 모래밭을 걷다 말고 저 멀리에 떠있는 검고 흰 물체를 발견했다. 큰 물고기 같은 물체들이 바닷가에 밀려와 모래밭에 얹히거나 얕은 바닷물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무슨 고기가 저렇게 떼로 밀려왔나. 그는 들뜬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곧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물체는 하나같이 사람들의 시체였던 것이다. 다가갈수록 어린아이, 아녀자, 나이 먹은 노인은 물론이고 중년노무자 복장의 사체들이 바닷물에 밀려와 있었다. 밤새 떠밀려온 모양이었다.  
바다 가운데서 파도에 출렁거리며 떠밀려오는 시체도 있었다. 미후라 상은 탄식하듯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겁이 덜컥 나 돌아서서 마을을 향해 뛰었다. 뒷골이 땅겨서 그는 초주검이 된 상태로 달려 마을의 초입 공회당에 이르러 외쳤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빨리 나와 보소! 바닷가에 시체들이 널려있다!”

절규에 가깝게 외치자 아침을 준비하던 아낙네들이 뛰쳐나오고 어망을 손보던 어민들이 뛰어나왔다. 
 
“바닷가, 바닷가!” 

그는 더 이상 말문을 잇지 못하고 같은 소리만 외쳤다. 마을 사람들이 바닷가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모두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에 넋을 잃었다.

“저 아이는 엄마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죽어있군요.” 
“저쪽 보세요. 남정네가 여자를 끈으로 동여맨 채 밀려와 있어요.”
“어허, 이게 무슨 변고입니까. 어허.... 일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왜 이런 변고를 당했을까요.” 
“배가 난파된 게 아닐까요?”
“이 많은 사람들이 탔다면 작은 배가 아닐텐데, 그런 배가 어찌 사고를 냈을까요. 바람도 드세지 않았는데....” 
“차림새들이 모두가 초라하군요. 불쌍해서 어쩔까나.”

저 멀리서 물결에 떠밀려오는 것이 거적대기거니 여기는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머리가 물위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시체들이었다. 다른 방향으로 떠밀려가는 사체도 보였다.

“건져내서 혼이라도 달래주어야지요. 불쌍해서 어찌 그냥 두겠소.”

마을 사람들은 시체들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체는 200구가 넘었다. 그들은 해안선 한쪽에 시체들을 모아두었다가 소각했다. 여름의 한 복판인지라 시체 썩는 냄새가 고을에 진동해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래도 일부 성한 사체들은 태우지 않고 이불 호청이나 삼베, 거적으로 덮었다.  
행정 당국은 이때까지 얼굴을 내비친 사람이 없었다.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는 모습이 뚜렷했다. 나라의 패망과 함께 그동안 잘 짜여진 조직체계가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자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패닉상태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중절모를 눌러쓴 남자가 이시하라 겐조 상 집 마당으로 황급히 들어섰다. 거리낌없이 들어서는 것으로 보아 이 집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뒤에는 얼굴이 새까만 청년이 륙색을 메고 뒤따르고 있었다. 

“이시하라 상 계십니까.” 

이시하라 상의 집은 젊은 사관생도들이 빠져나간 뒤라서 집안은 썰렁할 정도로 적막했다. 그래서 중절모의 목소리가 터무니없이 컸다. 서재에 묻혀있던 이시하라 상이 귀를 기울이다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니, 강태선씨 아니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이시하라 상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그래, 때맞춰 잘 왔소. 도선(渡船) 때문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어서 들어오시오.”

그러나 강태선은 마루로 들어서지 않고 엉뚱한 얘기를 했다.

“선생님, 난리가 났습니다. 배가 두 동강이가 났습니다.” 
“배가 두 동강났다고? 어디서?”

강태선이 말을 잇지 못하더니 뒤따라온 청년을 향해 말했다.

“현용대씨가 인사하고 말씀하시게. 말씀드리던 이시하라 선생님이시네.”

청년이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는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강 사장, 무슨 일이 있었소?” 

이시하라 상이 답답해서 물었다. 

“허허.”  

강태선은 돌하르방이란 별명을 가진 제주도 출신 사업가였다. 소형 선박을 가지고 제주-일본을 오가며 무역을 하고 있었지만, 한때는 제주-오사카 항로를 운항하던 구룡환 주주 중 한 사람이었다.  
제주와 오사카 간의 직항로는 황금항로였다. 독점 항로라서 일본인 선박업자는 멋대로 승선료를 인상하는 횡포를 부렸다. 제주도 사람들은 서울보다 오사카·고베·후쿠오카·시모노세키를 더 빈번하게 내왕하고 있었다. 본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섬놈이라고 업신여기고 차별이 심했다.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제주도로 부임해온 관리들도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주민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제주는 육지의 또다른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다. 그런 차별의식이 몸에 밴 그들은 본토 대신 일본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본도 차별이 있었지만 육지 사람이나 똑같이 차별을 받아서 상대적 박탈감은 적었다. 
서울 한번 가려면 목포나 부산으로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열 몇 시간을 가야 했지만 일본땅은 배 한번 타면 도착하니 이웃과 같았다. 마음의 거리도 육지보다 훨씬 가까웠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장사가 잘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생업이 돼오다시피 했던 제주-일본 간의 중간무역이 활발했다.  
도민들 중 상당수가 일본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들은 항만 하역작업 등 노가대로, 여성들은 방직공장, 과자공장, 해녀는 물질을 하거나 어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제주도의 어획물, 즉 방어 감성돔 해삼 멍게 낙지 문어 등 생물을 일본에 내다 팔고, 대신 신발, 의복, 모자 등 생필품을 들여와 고향에 팔았다. 일부 선박들은 목포 여수 마산 부산까지 드나들며 중간무역을 했고, 여객선을 이용한 보따리장수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정기여객선이 배 삯을 갑절로 올려버렸다. 독점사업이라서 꼼짝없이 선사가 요구하는대로 승선료를 내고 일본을 드나들 수밖에 수 없었다. 강태선은 불만을 가진 제주도민들과 함께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여객선 구룡환을 취항시켰다. 값은 일본인 선박보다 반값을 받았다. 그러자 일본인 선박업자가 승선료를 더 인하해버렸다. 구룡환을 도산시킬 목적으로 가격경쟁을 한 것이었다. 제주 도민의 자치선은 적자운영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임대기간도 연장되지 않았다. 결국 이년만에 도산하고 일본인 선박의 독점운항이 다시 시작되었다. 일본인 업자는 승선료를 다시 배 이상 인상해버렸다.  
강태선은 조합원들을 이끌고 오사카 부두의 일본인 선박회사를 습격했다. 그는 사장을 반죽음이 되도록 두둘겨 패고, 사무실 집기를 부수는 등 분풀이를 했으나 현장에서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고 감방신세를 졌다. 이때 이시하라 상을 만났다.   
강태선은 이시하라 상의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고 만민 평등을 주창하는 지식인이었다. 자신의 신념 때문에 감옥을 사는데 일가붙이가 없는지 옥 뒷바라지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강태선은 면회온 고향의 처녀를 소개해주었다. 제주 처녀 양영자는 군수품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었다. 이시하라 상은 그녀와 옥중결혼 했다.  
만기 출소한 뒤 이시하라 상은 사상계몽운동을 폈고, 강태선은 소형선박을 이용해 제주-일본을 오가는 조그만 무역 사업을 폈다. 이시하라는 무명 사상가이자 철학자였지만 어떤 누구보다 조선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고마워서 강태선은 여윳돈이 생기면 활동 자금을 지원했다. 

“우키시마호라는 해군 수송선이 폭침되었습니다. 교토 인근 마이쓰루 군항에 입항하다가 폭발했답니다. 조선인 승선자가 적게는 8,000명, 많게는 10,000명이라고 합니다.”
“뭣이라고? 팔천명 내지 만명이라고?” 
“그렇습니다. 승선자 대부분 징용자나 그 가족이라고 합니다. 이천 명 정도만 어찌어찌 살아남고, 육천 내지 팔천 명이 바다에 빠져죽거나 불에 타거나 배에 갇혀 수장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언제쩍 일이요? 사고가 났다면 방송에도 나고, 신문에도 나야하지 않겠소?”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아서 이시하라 상은 거푸 물었다. 

“열흘 전 일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왜 열흘 전 일이 이제야 알려졌소?”
“보도관제가 된 것이지요. 어제 신문에 조그맣게 났습니다. 저는 이 청년이 찾아와서 알게 됐고요. 제주도가 고향인 청년입니다.” 
“나쁜 놈들!” 

이시하라 상이 누구에겐가 저주의 눈빛을 보내며 한숨을 꺼져라 토해냈다. 현용대는 마치 잘못인 것처럼 목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사고가 열흘이 지나서 신문에 나다니. 그게 말이 되오? 이건 분명 흑막이 있는 것 같소.”
“그렇습니다. 세계 해난사고 사상 최악의 사고가 났는데도 쉬쉬하고 있으니, 그리고 가만 있으라... 그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죽었는데도 가만 있으라, 세상에 알려지는 것 귀찮으니 가만히 있으라, 구조하지 않은 것이 들통나니 가만 있으라, 일본인 피해가 아니니 가만 있으라... 이거 말이 됩니까. 희생된 사람들이 모두 귀국선을 탄 조선사람들이라는군요.”
“천벌을 받을 놈들!” 

이시하라 상이 무릎을 꿇고 한동안 기도를 올렸다.   

교토현 마이쓰루 군항 앞 해상에서 조선인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폭발한 것은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30분경이었다.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군항에서 출발한 지 이틀만이었다. 배가 폭발해 선체가 심하게 꿀렁거리며 요동쳤다가 화염에 싸여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은 시각은 그로부터 세시간 반 후인 밤 아홉시경이었다.  
배가 완전 침몰하기까지 세시간 여 시간이었다면 거리상으로 700m쯤 떨어진 마이쓰루 군항에 주둔해있던 일본군 타이라 해병단 병력이 출동해 조난자를 구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태풍이 분 것도 아니고, 한 여름이었기 때문에 물위에 떠있기만 하면 보트를 저어가 조난자를 건져올릴 수 있었다. 군이 구조 매뉴얼대로만 움직였다면 희생자를 훨씬 더 줄일 수 있었다. 민간 어선들이 노를 저어가 조난자를 구하고, 외출나온 수병과 어촌마을 청년들이 작은 배를 타고 가서 구했지만 마이쓰루 군항에 주둔해있던 타이라 해병단의 구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조 명령이 하달되지 않아 의도적으로 회피한 인상이 짙었다. 그러나 구조 명령이 떨어지든 떨어지지 않든, 아군이든 아니든 난파선을 먼저 구해놓고 보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해방이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조선 귀국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기쁨에 젖어 오미나토 군항으로 몰려들다 보니 정원이 훨씬 초과되었다. 소문을 듣고 홋카이도, 사할린 4개 도서에서 온 징용자들까지 포함되어서 승선자는 배에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승선자들이 밑창까지 빼곡이 들어찬 배 안은 한 여름 더운 열기와 지독한 땀 냄새로 숨막힐 지경이고, 먹고 자는 것, 배설에까지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불편이야 수많은 날의 강제노역에 비하면 하잘 것이 없었다. 그저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희망과 환희에 젖어 그런 불편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  
귀국자들은 배가 부산으로 가는지 원산으로 가는지 행선지를 알지 못했지만,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확신만으로 기쁨에 젖었다. 해군 승조원들의 말이 섞갈렸어도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만은 분명했기 때문에 가슴 부풀어 있었는데, 항해 이틀만에 폭발해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뒤늦게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우키시마호는 연합군이 해난 사고가 잦다는 이유로 연안 항로로 운항할 것을 지시해 마이쓰루 군항으로 잠시 들어가던 도중 해상에 설치한 미군 기뢰에 의해 폭발했다. 이 사고로 한인 승선 인원 3,735명(일본 해군 255명) 중 524명이 사망하고, 일본인 희생자는 해군 25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승선 인원이 전연 체크되지 않아 그 숫자를 믿을 근거가 없었을 뿐아니라 사고의 편린이라도 제공하는 행정책임자 하나 없었으니 누구나없이 장님이 어둠속을 헤매는 꼴이었다. 항로 변경 이유, 폭발(폭침) 원인, 승선 인원과 희생자 수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으니 의혹만 증폭되었고, 신문 보도도 간단히 해난사고가 났다는 정도만 나올 뿐이었다. 당시 보도 통제는 일본 군국주의를 위해 무한 허용되었고, 패망했어도 그 기조는 유지되었다. 일본 당국의 발표가 미진한 것이 많았지만, 의문을 품거나 후속 보도로 진상을 밝히려는 신문사는 없었다.   
우키시마호가 운항 허가를 받은 것은 1945년 8월 19일이었다. 일본 해군성 수송본부로부터 출항 허가를 받은 오미나토 해군경비부는 출항준비를 서둘렀고, 현지 한인과 가족들에게 “부산으로 가는 귀국선은 이번 뿐이다. 승선하지 않은 조선인은 앞으로 가는 길이 차단되고, 배급도 없을 것이다“라고 가두방송하면서 귀국선에 모두 승선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인 가족들은 앞뒤 살펴볼 것없이 다투어 배에 올랐다. 
1945년 8월 22일 19시20분 일본 해군 운수본부장이 우키시마호 선장에게 내린 ’항행금지 및 폭발물처리’ 관련 전보 문서에 따르면, △1945년 8월 24일 18시 이후 출항중인 모든 배는 항행 금지하라 △각 폭발물의 처리는 항행 중인 경우 무해한 해상에 투기하라 △항행하지 않은 경우 육지 안전한 곳에 폭발물을 넣어두라(격납고)”고 지시했다. 
우키시마호는 폭발물을 처리하지 않은 채 8월 22일 밤 10시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항을 출항했다. 그리고 8월 24일 교토 마이쓰루 만 해상에서 대형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사고가 난 지 47년이 지난 1992년 김문길 우키시마호폭침 한국인희생자추모협회 고문은 한 일본인으로부터 우키시마호 ‘발신전보철(發信電報綴)’이라는 일본 방위청의 문서를 받아보고, 이를 토대로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 작업에 나섰다. 
김 고문은 “그 발신 전보철에는 (선내에)폭발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유족들이 한결같이 부르짖는 폭발설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 문서는 우키시마호 유족 등이 1992년 일본 법원에 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해 진행된 재판과정에서 증거 자료로 제출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 문서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배상 소송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원고 패소 판결로 결론났으나 이와 관련된 여러 소송은 현재 진행중이다.<http://blog.daum.net/ksk3609/12400088/일부 인용> 
  
세계 해난사고 사상 최악의 우키시마호 폭발 사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극비의 기밀 사항처럼 무덤속 같은 침묵에 잠겨버렸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은 수명을 다했고, 살아있다 하더라도 어떤 상처로, 그리고 감추는 자의 치밀한 회피책과 관련 자료를 찾지 못해서 망각의 세월 속에 묻혔다. 뜻있는 사람들이 밝혀낸다고 해도 진실의 한 조각일 뿐, 전모가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 최악의 해난사고는 1912년 4월 14일 밤 11시40분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뉴욕 항으로 가던 타이타닉호가 대서양 뉴펀들랜드 해역을 항해 중 부류빙산(浮流氷山)과 충돌하여 2시간40분 만에 침몰한 사고다. 이 사고로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우키시마호는 그보다 최소 네 배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엄청난 선상 폭발사고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상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해방공간의 서울은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피해상 어떤 한 가지도 풀어줄 능력과 의지가 없었다. 미군정과 조선총독부 사이에 해방 정국 관리 대책이 추진되고 있는데도 나라의 주인인 지도자들은 협상자로 나서지 못한 채 엉뚱하게 서로 피투성이 싸움만 벌이고 있었다. 한반도 운명의 주인이 남의 잔치집에 온 손님처럼 신생조국의 설계 테이블에 나서지 못하고 궁벽하게 싸우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키시마호 폭발사고 같은 최악의 해난사고가 났어도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를 지켜본 조선총독부 오카 정무국장은 헛웃음을 쳤다. 먹을 것 없는 생선뼈다귀 하나 놓고 싸우는 고양이 꼴을 보고 가소롭기만 했다. 나라가 패망하던 날, 기를 쓰고 도망가려고 했던 지난 날의 일들이 창피할 정도였다. 쩔쩔맬 이유라곤 없는데 놀라서 허둥댔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 반도가 두 토막이 났다. 반신불수의 처지에 서로 으르렁거린다. 이런 상황을 관리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우키시마호 같은 대형 해난사고도 묻어버려도 끄떡없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미군 태평양사령부와 긴밀히 협조하면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물러날 준비를 했다. 그동안 조선에서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너무도 행복한 귀국길이었다.

“조선은 미 제국주의 식민지가 아닌가. 우리 식민지로 그대로 남아있었더라면 분단도 막고, 그대로 영토를 보존했을텐데 반 토막이 나버렸으니 병신이 돼버렸어. 아마도 우리가 지배했던 시절을 그리워할지 모르겠어. 종당에는 지들끼리 내전 속에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질 것이고....”  

오카는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속으로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오민균과 조병헌, 장지성이 외출에서 돌아오자 우키시마호 폭침 소식을 들었다. 시내에서 소문을 들었지만 배에 직접 승선했던 현용대를 만나고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배가 어느 크기입니까.” 
“5천톤(4,740t)급 일본 해군 군함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일본 전범의 재판과 관련해 일어날지도 모를 재일 조선인들의 폭동을 우려해 조선 노동자들을 부산으로 송환하던 중 일어난 사고라면서요?” 
“내막은 잘 모릅니다. 다만 고국으로 보내준다고 해서 허겁지겁 달려가 승선했을 뿐입니다.”

사고를 당한 당사자는 사고의 내막을 잘 알지 못한다. 보고 느낀 조각만 아는 정도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승조원이 있을 리 없고, 은폐하는 것을 능사로 알았기 때문이다.  

“연안을 타고 남하하면 되는데 왜 마이쓰루 군항으로 들어갔습니까.”
“승조원들이 일본 연해를 타고 남하한 것은 유류와 물,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배가 출항하게 되면 생필품은 미리 준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고 원인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만내(灣內)에 부설한 기뢰와 충돌해서 폭침되었다고 일본측이 주장하는 것이 사실일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배에 있는 폭탄 등 물질을 방치해서 일어난 폭발설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다 책임이 따르죠. 현용대씨, 현장에 폭발물 같은 게 없었습니까?”
“선실이 비좁아서 갑판에 올라가 있었지요. 한 수병이 배 밑창까지 전기선이 늘어져있는 걸 보고 절단하려고 했지요. 얼기설기 어지럽게 깔려있는 전기선이었습니다. 그런 얼마후 배가 폭발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개새끼들!”

조병헌이 비분강개했다. 보나마나 빤한 것이다. 폭탄을 탑재하고, 위험물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징용자를 방치한 것이다.   
일본은 항해 지휘부가 남하하던 배의 진로를 바꾼 것은 미국 점령군의 정선(停船) 명령에 따른 것이며, 배가 침몰한 것은 미군이 부설한 기뢰 때문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조선인 승선자 3,725명, 이중 사망자 524명, 실종자 미상으로 발표했으나, 조난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은 바닷가에 떠밀려온 시신만도 1,000구가 넘는다고 했다. 조선인 생존자들은 2,000명 정도였으며, 승선자는 7,000명에서 10,000명으로 정확한 숫자가 잡히지 않았으나 배 밑창까지 빼곡이 들어찬 것을 보더라도 최소 8,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승선자 명단이 없었습니까?” 
“워낙 많이 밀려드니 명부 작성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나 역시 명부를 작성하지 않았고, 승선하라고 하니까 탔을 뿐입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운항 시 한두 번의 위험신호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이상징후가 없었나요?” 

이시하라 상이 물었다. 

“배가 오미나토 군항에서부터 이상한 말이 들려오긴 했습니다. 배가 조선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요. 조선인들은 며칠전부터 부둣가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천여 명에 달했지요. 숙박업소는 만원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뒷골목에 골판지 박스를 깔아놓고 기다린 것입니다. 배를 놓치면 영영 고국에 못간다는 말에 모두들 그렇게 오미나토로 나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폭발했던 상황이 그려지지 않나요?”
“배가 불쑥 물 위로 치솟았다가 가라앉을 때, 고래가 물 위로 솟았다가 떨어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본능적으로 사고다 여기고, 마스트로 올라가 버티다가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다에 빠졌는데 물이 회도리치는 지점에서 대부분 수장되었습니다. 나도 빨려들어가 허우적거리는데 요행히 물속을 박차면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동안 익힌 수영 솜씨가 나를 살려냈습니다. 바다에 깔린 까만 기름 띠를 뒤집어쓴 채 헤어나지 못한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육지로 올라오자 숲속에서 지키고 있던 일본 해병이 우리를 체포했지요. 생존자들은 모두 마이쓰루 군항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승조원들은 구조 작업을 펴지 않았습니까.”
“승조원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리 보트를 타고 마이쓰루 군항으로 들어갔지요.”

이시하라 상이 나섰다. 

“승조원은 배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기본 수칙 아닌가? 침몰한 배에서 그릇을 건져 팔아먹는 자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건지지 않다니. 세계 최강의 일본 해군이 이건 말이 안되지. 그런데 총각은 어떻게 해서 아오모리까지 진출했소?”
“홋카이도로 끌려가서 오미나토 비행장에서 강제노역했습니다. 3년 동안 일했지요. 그곳에서 고향 출신 해녀를 만났는데 지금 그 사람과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그보다 다섯 살 나이가 많은 여자였다. 아오모리 해안에서 해녀로 일하던 고길자가 귀국선의 소식을 듣고 오미나토 부둣가로 나왔다. 현용대는 그녀가 메고 있는 테왁을 보고 단박에 고향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이 재질인 테왁은 다른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생김새를 가진 제주 해녀만의 부력(浮力) 기구였다. 이들은 며칠 함께 지내는 사이 고향에 가서 살림을 차리기로 약속했다. 

“길자씨도 헤엄쳐서 나왔는데 지금은 수용소에 갇혔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사고가 났습니다. 수십 명이 폭사했습니다.” 
“뭐라고? 거기서도 사고가 났다고?”
“네. 생존자들은 모두 타이라 해병병단 부로수용소에 수용되었지요. 수용인원은 천여 명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인 모를 폭발사고가 났습니다. 30여명이 폭사하거나 불에 타죽고, 부상자도 오십 명이 넘습니다.” 

이 사고는 우키시마호 폭침사고에 묻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사고 또한 컸다. 
수용소 주변에는 다이나마이트, 총포탄 등 위험물질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것이 관리되지 않았다. 절도있다는 일본군의 기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부대는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다. 절규가 수용소를 울리는데도 적극적으로 구조에 나선 병사들이 없었다.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몸을 건졌는데 육지에서 불에 타 죽을 것같았다. 그는 식당으로 쓰는 반달집(퀀셋)으로 달려갔다. 식당에는 고길자가 취사반에 투입되어 있었다. 고길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용대씨 빨리 나가서 이 소식 알려. 돗도리 항에 고향사람들이 살고 있어. 이러다 다 죽어.”

현용대는 밤이 되자 뒷산 절벽을 타고 넘어 수용소를 탈출했다. 

“해난 사고에 비해 부로수용소 화재는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본놈들은 조선인을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된다는 태도야. 그 새끼들은 패전의 책임회피를 그런 식으로 하는 거야. 나쁜 새끼들이 책임회피하는 거야.” 

조병헌은 씁쓸한 비애를 맛보고 있었다. 약소민족의 수모와 고통은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이시하라 상이 말했다.  

“일본군은 생화학무기로 생체 실험을 하고, 학살 고문 따위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이오. 그자들은 어떤 짓도 하는 자들이오. 방치로 학살을 방조하는 것이오. 나쁜 놈들. 731부대나 난징대학살은 잔혹성의 한 조각일 뿐, 그보다 더한 야만성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소. 일본의 막부 이후 살육의 시대로 접어든 건 여러분들이 잘 알겠지. 인륜의 깊이가 없는 왕이란 자는 전쟁 장난만 하다가 신이 되었는데, 그것이 이번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핵폭탄을 맞은 원인이 되었소. 그것으로 아시아에서 저지른 광란의 범죄행위를 갚기엔 너무나 가벼운 징벌이오.” 
“존경스럽습니다.”

이성유가 감격한 나머지 고개를 숙였다.   

“승선자는 여전히 노예이고, 그런만큼 미물처럼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좋다는 중세 영주의 못된 주인의식이 그들에게 있소. 하인 하나 죽여도 끄떡없다는 사고방식. 승선자 모두 순박하고 무지한 그들의 소유물이니까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괜찮다는 태도요. 조선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요. 지구적 재앙을 당하고도 침묵하다니, 이것이 지도자들인가? 제국주의자자들은 앞으로 계속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할 거요. 그런 식으로 식민지 관리를 해왔으니까. 언론은 협력자요. 조선은 규명을 요구할 힘도 없고, 지도자도 없으니 경황없이 넘어갈 거요. 억울한 사람들을 대신할 지도자가 없다는 게 더큰 충격이오. 여러분, 스스로 자기 생명 보호할 수밖에 없소.” 

이시하라 상이 갑자기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얼굴을 찡그렸다. 수형생활 때부터 바늘 같은 것이 뇌를 콕콕 찌르는 증세가 있었는데, 충격을 받으면 증세가 재발되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겠소.” 

그가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있더니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수형생활 얘기를 할까요?” 

그는 도피생활 중 어느날 몰래 집으로 숨어 들어갔다. 젊은 아내는 며칠씩 사라졌다가 숨어들어온 그를 향해 의심한 나머지 물었다. 

“당신 도둑질 하다가 감옥에 들어갔었군요? 난 도둑과 살 수 없어요. 신고할 거예요.”
“말해줄 수 없지만, 나는 아니야.”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그는 황망히 집의 뒷담을 타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남편 어디다 숨겼나?” 
“몰라요.”
“우리가 모를 줄 아나? 남편 행선지를 대지 않으면 잡아간다.”

실제로 경찰은 그녀를 경찰서 유치장에 잡아가두었다. 일주일, 또는 열흘동안 감금되었다. 경찰은 이시하라를 잡기 위해 어린 아내를 인질로 잡아두고 있었다. 그는 갇힌 아내를 끄집어내기 위해 자수했다. 그리고 3년형을 언도받고 만기 출소했다. 벌써 세 번째 수형생활이었다.  

“경찰국가의 통치 기법이 뭔지 알겠소? 민심이 불안하면 늘 양심세력을 역도로 몰아 일망타진 캠페인을 벌이지. 민중이 깨어난다 싶으면 더 큰 시국사건을 만들어 위협하오. 그렇게 폭력적으로 인민을 묶소. 공포감의 야만이 시중을 지배하오. 그러나 관리하고 싶지 않은 것은 또 방치하지. 우키시마호도 그렇고, 부로수용소 폭발사건도 마찬가지요. 노예를 얌전히 실어다준다는 예의는 그들에게는 없지. 패망도 받아들일 수 없는데 노예를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게 불쾌하지 않겠소?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일본 해군이 이런 사고를 냈다는 것은 믿기지 뭘 말하겠소. 귀찮으니 버린다는 것이오. 방관하고 침묵하면 이런 만용은 반복될 것이요.”
“원인이 규명되고, 책임소재가 분명해지고, 희생자 명단이 공개되고, 피해보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따져야지요.” 

오민균이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만, 저들은 벌써 은폐에 나섰소. 한줄 난 신문기사 보면 알지 않겠소? 자, 봅시다. 일본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국의 신이오. ‘신의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는 일본국 헌법 제1조에 있소. 신이라니?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는 모욕적 상징조작 아니겠소? 그는 수백 만명을 희생시킨 전범자이자 사디스트일 뿐이오. 나는 그런 자를 용납할 수 없소. 내 양심이 가르치는 바, 따를 수 없소. 우키시마호 침몰사고를 보고 더욱 절실하게 느꼈소. 그는 광인이오. 그런 자에게 열광한다? 열광의 대가가 패망의 길로 쳐박았는데도 열광한다? 천황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상징조작으로 식민지 백성을 끌어다 짐승 부리듯 해왔소. 사전적 정의로 말하면, 주어진 자기 땅에서 나뉨없이, 다툼없이 평화롭게 사는 것이 아시아 공영권 아니겠소? 그런데 전쟁목표를 달성하는 소모품으로 사용했단 말이오. 그래놓고 전쟁이 효용성이 사라지니까 나 몰라라 한단 말이오. 어디서 무슨 사고가 나고, 목숨을 잃어도 관심 사항이 아니오. 이제는 그들 자신의 무지로 책임을 돌리오. 왜 그들이 무지한데? 교육받을 기회 박탈하고 축생처럼 부려먹은 책임이 없소? 한반도의 수난은 그들로부터 나온 것이오. 만행이 자행됐음에도 상응한 조치와 진상조사 하나 요구하지 못하는 무지가 생겼소. 지금이라도 눈을 뜨지 못하면 계속 당하게 되어있소. 현재 조선의 지도자들 보시오.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가. 시대의 장님들이오. 결국 젊은 여러분이 나설 수밖에 없소.”

그의 거침없는 말 가운데는 이념과 국경이 없었다. 조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생도들은 확인했다. 그가 더 조선인 같았다. <다음호에 계속>


<6> 귀국선 우키시마호 침몰은 '자폭'이었을까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6>
2019.09.28 10:05:22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제5장 귀국선 우키시마호 (2) 

장지성은 안주머니에 권총을 찔러 넣고 행장을 꾸렸다. 오민균 이성유 조병헌도 단도 따위로 무장했다. 그들은 도쿄역으로 나가 교토 행 기차를 탔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젠 나약하고 측은한 식민지 백성이 아니다.    

“임무를 마친대로 돗토리 항으로 나오시오. 돗토리 항 3번 게이트에 배를 정박시켜 놓겠소.”

이 말을 남기고 강태선 사장이 중간에 내렸다. 오민균이 현용대를 향해 물었다.

“빠져나온 지점을 파악할 수 있지요?” 
“안내할 테니 고길자씨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앞장서기만 하면 됩니다.” 

생도들이 탄 기차는 동해 연안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돌이킬수록 우키시마호의 선내 폭발과 부로수용소의 폭발사고는 의문투성이었다. 우키시마 호가 미군 기뢰에 의한 격침이 아니라 선내의 폭발물에 의한 폭발이라는 근거는 여러 생존자들의 증언에서도 나왔다. 설사 기뢰 폭침이었다고 해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기뢰가 존재하는 걸 알고도 일본 해군이 무리하게 출항했다는 것 자체가 책임질 문제였다. 
미군은 태평양전쟁 시 일본 근해 주요 항구의 바다에 기뢰를 공중 투하했다. 기뢰의 기폭장치는 최대 10일간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기뢰가 마지막 투하된 8월 8일에서 열흘이 지난 8월18일 이후에는 기폭장치가 소멸되어 폭발 위험은 사실상 제로인 상태였다. 우키시마호가 마이쓰루 만에 들어갔을 때는 선박들의 왕래가 잦았고, 연합군으로부터 항행 금지를 받은 일본 해군 함정도 움직이고 있었다. 항행 금지였다고 했지만 일본 군함들도 자유 항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기뢰 폭발이라면 폭발과 함께 수십 미터의 물기둥이 솟아올라야 하는데 생존자들이 물기둥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잖아. 기뢰는 한 번 폭발하는 거지만, 연속적으로 폭발했다는 것은 기뢰가 아닌 걸 말해주는 거지. 저 자들은 미군의 기뢰폭발로 몰아가지만 왜곡하는 거야. 미군 기뢰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고발하려는 의도도 담겨있는 거야. 자기들도 피해자라는 면피성 발언이야.” 

장지성이 선내 폭발로 결론짓자 대부분 동의했다. 

“연근해가 기뢰로 위험하다고 경고했다면 더 멀리 바다 가운데로 나가야 했잖나. 조선으로 들어가는 빠른 항로는 동해를 횡단하는 것이야.” 
“애당초 부산으로 갈 의도도 없었다는군.”
“시모사바가(下佐波賀) 앞바다까지 들어간 것은 의문이야. 동해로 다시 돌아 나오기가 불편한 항로였으니까.”  

따질수록 의문 투성이였다. 
일본 정부의 사고처리문서 ‘수송함 우키시마호에 관한 자료(1953년 12월)’에 따르면, 승선한 한국인은 노무자 2,838명과 그 가족 897명 등 총 3,735명이었다. 일본 해군 승조원은 255명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인 524명과 해군승조원 25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정원초과는 없었다. 그러나 승선자 명부를 작성하지 않아서 정확히 몇 명이 승선했는지는 그들도 알지 못했다.   
일부 증언자는 승선자가 최대 12,000명이라고까지 주장했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정원(3,800명)에 맞게 승선했다는 발표는 꿰맞춘 인상을 주었다. 큰 객실은 해군병사 250여명이 점유하고, 조선인 탑승객은 탄약고와 기관실, 갑판, 창고 등 발디딜 틈없이 들어차 있었으며,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평형수나 자갈을 싣는 배 밑창에도 널빤지를 깔고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우키시마호 소속사인 오사카 상선은 침몰 선박을 사고 발생 5년 후인 1950년 3월 인양을 시도해 선미 부분을 건져 올렸다. 회사는 인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침몰 원인을 캐내는 작업을 수행하지 않았다. 인양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선박 재사용 여부를 확인했으며, 이에따라 배 안에 남아있는 유골ᐧ유물을 방치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의 고철 값이 폭등하자 오사카 상선은 1954년 1월 두 번째 인수작업을 벌여 선수 부분을 인양했는데, 이때도 침몰 원인을 캐지 않고 선박을 해체해 팔아치웠다. 단연코 증거인멸인 셈이었다.  
우키시마호는 해로와 수중 탐색이 가능한 해군 수송선이었다. 따라서 정밀 조사를 해서 원인 규명을 해야 했다. 그런데 누가 접급할세라 부랴부랴 선박을 해체해버렸다.
이때 수습한 유골이 103구였다. 이 유해를 사고 때 임시로 매장했던 153구의 유골과 함께 256구를 화장하고 이미 발표한 사망자 숫자에 맞춰 524위로 분골·합장했다가 1971년 도쿄 유텐사(祐天寺)로 유골을 옮겨 안치했다. 이렇게 저렇게 꿰맞추려는 흔적이 역력해 의구심을 낳고 있었다.<조선일보 2010.12.26.일자 보도> 
일본 정부는 2차 대전 패망과 함께 앞으로 전개될 전범재판 과정에서 고통당한 한국인 징용자들이 악행을 고발하는 등 적극 행동에 나설 것을 우려했다. 저지른 악행들이 폭로되고, 노예로 취급당했던 죄상들이 전범재판소에서 속속들이 드러나면 세계 양심으로부터 배척받으며, 배상 요구와 함께 보복이 나올 것이며, 이때 패전국 일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라는 우려의 중심에 있었다. 식민지 백성이 전승국의 일원이 되어서 공격하면 미군에게 항복한 데 이어 종으로 부렸던 조선인으로부터도 시달리게 된다는 것은 두고두고 수모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무장해제된 총 대신 문서부터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강제 징용자, 강제 동원한 위안부 기록일수록 신속히 소각하도록 전 부대에 하달했다. 세계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인권유린 사례가 많은 관할 부서의 문서부터 태우도록 긴급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연합국의 지시를 신속히 이행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인 징용자부터 본국 송환하라는 명령을 군에 내렸다. 한국인 징용자는 춥고 지형지세가 험악한 일본 북부지방 탄광과 항만·도로·비행장 건설에 집중 투입되었다. 해방이 되었으니 유독 고통을 겪은 이들이 앙심을 품고 항의하거나 고발할 것으로 일본은 우려했다. 그래서 항복 선언하자마자 연합군 조사반을 피해 본국 송환작업을 서두른 것이다. 우키시마호가 대표적 사례다. 우키시마호 승조원들은 한국으로 들어가면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공포에 싸였다. 출항 전 승조원들이 한국행을 거부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한국으로 들어가면 조선 사람들한테 묶여서 영영 못나오는 것 아닌가?”
“맞아 죽을지도 몰라. 우리가 보복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명령을 거부하자.”
“평양에선 일본인들이 옷이 할랑 벗겨져 거리에서 쫓겨나고, 일본 여자들이 소련군에게 집단 겁탈 당하고 있다는데, 우리라고 온전하겠나.” 

그러나 일본 정부는 승조원들의 불만보다 조선인을 가능한 빨리 자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고 송환작업을 강행했다.  

“명령을 어긴다면 항명으로 처단하겠다.” 

일본군은 명령불복종과 하극상을 최대의 범죄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일사불란한 군사문화를 만들고, 세계 최강의 군대를 유지하는 근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승조원들은 “전쟁에 동원된 인력을 지체없이, 그리고 안전하게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연합국의 항복 문서 명령에 따라 징용자 송환 작업을 벌였으나, 여전히 지배자의 태도를 보였다. 노예로 살아온 삶의 자세 그대로 송환자들은 변함없이 순하고 복종적이다. 몽둥이에 길들여진 탓일까,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굴종하는 모습이다. 그들에게는 자유인, 해방자란 인식이 없었다. 저런 것들을 “지체없이, 안전하게 제 자리에 돌려놓는다”는 것이 가당치 않다고 본 일본군은 패전국 신분 변화에 상관없이 오만을 부렸다. 송환자의 착하고 굴욕적인 품성이 그들의 오만을 더 키워준 셈이었다.     
  
“빠가야로! 어디다 소변보는 거야? 짐승같은 놈들!”

갑판원들이 몽둥이로 송환자를 후려갈겼다.  

“조센징은 어딜 가나 개돼지처럼 산단 말이야!” 

그들은 선내 환경을 번연히 알면서도 채찍을 휘둘렀다. 승조원 눈에는 여기저기 비위생적으로 배설하고 먹고 자고, 아무데서나 쭈그려 앉아 토하는 모습이 꼭 미개한 토인들과 같았다.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일본군 특유의 책임감은 사라지고, 될대로 되라는 식의 관리도 선내 질서를 어지럽혔다. 해군 승조원 중 패망의 절망에 빠져 바다에 투신한 자도 있었으니 그들 자신 삶의 의욕도 없어보였다. 이 결과 중화기와 폭탄 같은 위험물질도 방치했다. 
무슨 사고가 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본군의 기강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해이와 나태와 무질서였다. 꼭 난파로 가는 절차처럼 보였다.  
 
일본 패망과 함께 조선인 귀국 수송대책은 한국에 주재했던 일본인 귀환 시책에 비해 완전 방치 수준이었다. 그 무렵 이키 섬 북부의 가쓰모토 해안의 귀국선 침몰과 이키 섬 동쪽 아시베만에서 귀국선의 난파로 인한 십수 건의 조난 사고가 발생했다. 그것 또한 방치와 방관의 인재였다. 관리 소홀, 구조 회피로 귀국자들이 흔적도 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덮는 자는 침묵을 지키니 혼란한 시기 완전 범죄가 성립되었다.     
이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조국이 없으니 그저 모멸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귀국자의 선택지였다. 권력을 인수받은 미군정은 주재민의 안전관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패전국의 폭력성이 드러났는데도 원인 규명과 사후책이 없었다. 가해자가 은폐하는대로 시간이 흘러갔고, 그래서 조작하고 지울 수 있는 시간만이 무한대로 열려있었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우키시마호 격침을 수중에 부설한 기뢰에 의한 전과(戰果)로 본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이 뿐이라니, 도대체 우리에게 조국이란 무엇이지?” 

오민균은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돌아온 답은 없었다. 사람 값을 구할 수 없는 나라. 사람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나라. 희생자가 무수히 나왔어도 속수무책인 나라. 모든 것을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무책임성. 그래서 개인의 팔자는 민족의 운명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인가. 혼란과 권태와 나태 속에 졸고 있는 조국.... 
기차는 이름 모를 역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떠났다.  

“부로수용소 뒤편으로 산이 있다고 했지요?” 

오민균이 현용대에게 물었다. 

“네. 언덕을 깎아서 건물을 앉혀서 뒤편은 절벽입니다. 뒷산을 넘으면 미야즈 시나 아미노 읍내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곧 바닷가에 닿을 수 있습니다. 돗토리 항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센자키 근방이지요.” 

현용대는 고길자를 구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현용대씨가 노역에 동원되었던 곳이 조선인이 그렇게 많았습니까?”
“많았습니다.” 

승선자들은 대부분 군사요충지 시모키타반도 일대에 강제징용. 강제징병된 사람들이었다. 센다이 인근 비행장건설, 해군시설부 군항과 방공호 파기와 보수 작업에 동원되었다. 징용을 마치고 돈벌이를 위해 일시 눌러앉은 노동자들도 있었다.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어린 처녀도 흘러들어왔다.  

“막노동에 시달리면서 맞지 않는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했지요.”

일본군은 시모키타 반도에서 대대적인 철도 부설과 터널·부두·비행장 공사를 시작했다. 시모키타 반도는 산세가 험난해서 대부분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지형이었다. 일본인들은 접근을 꺼려해 조선인들이 난공사에 투입됐다. 험한 지형공사를 조선인 징용자들이 마무리했다. 그러나 대우가 형편없었다.  
강제징용자들은 굶주림, 중노동, 폭력에 시달렸다. 말 그대로 지옥과 같았다. 무 한 조각이 반찬의 전부였고, 끓인 바닷물국과 보리밥이 식사의 전부였다. 배가 고파서 돼지에게 주는 꿀꿀이밥을 훔쳐 먹었다. 이런 생활을 견디다 못해 탈출한 징용자들을 감독관이 잡아와 천장에 매달아놓고 장작불을 피워 본보기로 태워 죽였다. 탈출하면 이런 꼴을 당한다는 위협이었다.  
불만을 가진 자들은 영하 3,40도의 사할린 혹한 지역으로 축출되었다. 쓰러지는 노동자 중 더이상 노동력으로 써먹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없애버렸다. 일하다 죽으면 그 자리에서 묻거나 수백 길 되는 낭떠러지 폐광에 버렸다. 굴 속에서 해골들을 자주 발견했는데 그런 연유로 죽은 조선인들이었다. 징벌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징용자들은 가족을 부르며 절규했고, 터널 암벽에 부모 처자의 이름과 배고픔을 손톱으로 새겼다. 그런 징용자들이 해방과 함께 희망을 품고 우키시마호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다가 바닷 속에 영원히 수장되었다.  

“개새끼들!” 

오민균은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마이쓰루 역에 내리자 생도들은 가판대에서 며칠 분의 신문부터 샀다. 해난사상 최악의 사고를 열흘 늦게 보도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조그맣게 단신성 기사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사고원인과 배경, 사망자 명단은 물론 현장사진 한 장이 없었다. 

“후속 기사 한줄 없으니 신문기자란 놈들도 공범이야. 보도관제가 풀렸는데도 이 모양이야.”
“해난사고가 보도관제와 무슨 상관이야? 그 새끼들이 의도적으로 지우려는 것이지.”

이성유가 신문을 찢어 날렸다. 승선자 가운데서 우키시마호에 화학물질과 탄약들이 실려있었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해군승조원 200여명이 폭발 직전 구명정을 타고 하선했다는 증언도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이런 의혹을 파헤친 언론은 없었다.

“국가 동원체제적인 군국주의에 체질적으로 순응한 언론들의 한계야. 권력의 선전대일 뿐이지. 언론이라고 할 수 없어.” 
“그렇더라도 이건 아니지.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을 덮고 간다는 건 언론이길 포기한 거야. 희생자 중엔 애절한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 기적같이 살아나온 생존자도 있었을 건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을까. 보도경쟁이 있었을 법한데...”

비슷한 시기 발생한 일본 중부 하치고선(八高線) 열차 충돌사고는 대서특필되었다. 열차가 선로를 이탈해 십수 명이 죽은 사고였다. 우키시마호에 비하면 작은 사고였다. 그런데 열차 사고는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지방신문은 호외까지 발행했다. 이처럼 두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이는 식민지 백성을 보는 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것이었다. 

“헤엄쳐서 육지로 올라온 생존자들도 잡히면 죽을까봐 산과 개울로 숨어서 도주했다니까요.”  

현용대의 말이었다. 살아남은 것도 죄가 되는 것이었다. 조난자를 보호하고 조사한다는 차원이었지만, 생존자를 포로로 잡아가두고, 거기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수십 명 희생자를 냈으니 따지고 보면 송환자를 안전하게 송환해야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오민균은 산 위에서 쌍안경으로 타이라 해병단 본부를 살폈다. 숲속에 붉은 벽돌건물들이 들어앉은 병영은 여자대학 캠퍼스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건물들은 아름다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뢰, 총포, 폭탄 등 군사무기를 보관해놓은 창고들이었다. 
오민균으로부터 쌍안경을 받아들어 시내를 살피던 조병헌이 낮게 말했다. 

“벽돌건물도 조선의 징용자들이 지은 거야.” 

그런 건물이 30동 쯤 되었다. 초등학교 같은 건물이 일자로 길게 늘어선 곳이 해병단 본부였고, 그 옆 숲속에 병사동이 숨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기 건물들 중에 귀국자들이 수용돼 있을 거야. 조선인이 지은 건물에 조선인이 갇혀있는 거야.” 

마이쓰루는 요코스카, 사세보와 함께 일본 해군장교를 양성하는 군항이었다. 청일전쟁 승전 전리금을 받아 건설한 군항인만큼 유서가 깊었다.   

“두 조로 나눕시다. 우리 조는 본부를 찾을 테니 조병헌 조는 현용대씨와 함께 부로수용소로 가세요. 역할 분담하는 게 좋습니다.” 

1조와 2조로 나누어 부대로 다가가자 산에서 바라볼 때와 달리 병영에는 사람들이 꽤 움직이고 있었다. 군인 가족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침울했다. 패망의 그늘이 누구나없이 얼굴에 담겨있었다. 해병단 정문의 보초병도 총을 거꾸로 메고 풀밭에 쭈구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초병!” 

오민균이 불렀지만 초병은 귀찮다는 듯 팔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때리더니 다시 졸았다. 군율이 엄격한 일본군이 이렇게도 지리멸렬할 수 있나. 
1초소를 지나 본부를 향해 걸어갔다. 아취형 현관 입구에는 스리쿼터가 한 대 서있고, 그 옆에 근무병이 큰 나무에 등을 기대고 퍼질러 앉아 있었다. 오민균은 근무병을 무시하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본부 사무실엔 민간인인지 병사인지 구분이 안되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잡담을 계속하고 있을 뿐 방문객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한쪽 책상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던 군조 계급의 병사에게 오민균이 다가갔다.  

“우린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다. 지휘관을 면회하고자 한다.”

그가 말없이 일어나서 따라오라는 듯 앞서 걸었다. 부관실로 안내한 군조 계급은 다시 말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오?” 

해병단장실의 부관은 중위 계급을 달고 있었다. 

“수송선의 침몰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타이라 해병단의 화재사고도 접하고 왔습니다.”

부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육군사관 생도들입니다.”
“사관생도가 무슨 일로?” 
“사건을 알아보고 상부에 보고할 게 있소. 군사부에 의해 감찰명령을 받았소. 해병단장 어디 계시오?”   
“단장 각하는 소환돼 해군본부로 갔소.”

오민균은 그가 해병단 화재사고로 소환된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부책임자를 불러주시오.” 
“귀관들 소속이 뭐라고 했소?”
“사고가 났다면 누구에게든지 설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육국사관 생도들입니다.” 
“육군사관학교가 폐교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부관이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살폈다. 

“부관께서 알다시피 육사는 폐교되었습니다. 연합군으로부터 맨먼저 폐교와 무장해제 명령이 떨어졌으니 폐교된 것입니다. 해병단도 해체 코스를 밟게 될 것입니다. 학교는 생도 인력을 풀어서 각 부대 현장을 감찰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키시마호가 폭침되고, 해병단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해 수용된 조난자 수십 명이 불에 타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파견된 것입니다.” 

오민균의 거짓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다가 그래도 미심쩍었던지 물었다.

“다시 묻겠다. 여기 온 것은 공적인가 사적인가?” 
“둘 다요.”
“알겠소. 잠시 기다려주기 바란다.” 

부관이 벽에 부착된 비상전화 부스로 가더니 누군가와 한동안 통화를 한 뒤 돌아왔다.

“부단장과 담당 장교가 올 것이다. 기다리기 바란다.” 

창 밖으로 병사들이 나무그늘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맥빠진 모습들이었다. 잠시 후 중좌 계급의 부단장과 대위 계급의 장교가 들어왔다. 

“나카무라 부단장님이시다. 이쪽은 정훈장교 후쿠야마 대위다.”

부관이 소개하자 오민균과 이성유가 두 사람을 향해 경례를 붙였다.

“우리는 우키시마호 침몰사고와 해병단 화재사고를 접하고 왔습니다. 사고원인과 구조대책에 대해 알고자 합니다.” 
“일본정부가 공식 발표한 것이 전부다. 그런데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여기 온 거냐? 신분이 불확실하다. 나가라.” 

단번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오민균이 신분을 소개하고 방문 목적을 말하자 그는 단번에 부정했다. 

“폐교된 육사는 폐교되었을 뿐, 어떤 권한도 부여하지 않았다. 나가라!”

그제서야 오민균이 버티며 큰소리로 말했다.  

“우린 피해자 가족 중 한 사람입니다. 조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귀국선이 침몰했다면 사고 원인과 피해자 상황, 구조 상황, 사후대책을 알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군은 당연히 브리핑을 해야 하고요.” 
“군 발표 기관은 따로 있다. 혹 우리가 발표할 권한이 주어졌다고 해도 제군들에게 말해줄 의무는 없다. 귀관들은 누구로부터도 임무가 부여된 것이 아니니, 나가라.”

오민균이 밀리지 않고 가슴을 내밀며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지금부터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말하겠소. 지금 일본은 무장해제가 됐소. 그 권총부터 내려놓으시오. 해병단장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소환되었소. 일본 해군은 연합군의 명령에 따라 귀국선을 안전하게 조선으로 보낼 의무와 책임이 있소. 그런데...” 

그러자 나카무라 중좌가 재빨리 그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너희는 연합군 소속이 아니다. 같은 일본군으로서 패배했다. 우린 조난자를 보호 중이다. 추가 조사도 필요하다. 정 원한다면 브리핑하겠다.” 

그러면서 곁에 서있는 부관을 향해 자시했다. 

“이들이 원한다니 귀관이 상황을 브리핑하라.”  

후쿠야마 대위가 옆구리에 낀 각반의 노트를 펼치더니 읽어나갔다. 

-1945년 8월 24일 17시 우키시마호가 식수 공급과 연료를 보충할 목적으로 마이쓰루 항으로 입항중이었다. 연합군이 부설한 기뢰에 선수가 접촉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마이쓰루 만에는 미군이 부설한 기뢰 삼십 여기가 수중에 설치돼 있었는데 자기(磁氣) 기뢰에 대해서는 우키시마호 자체의 장비로 탐색이 가능하고, 음향 기뢰는 소해정이 음향발신기로 위치를 파악하게 되어있다.  
우키시마호는 마이쓰루 항으로 들어가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기는 했으나 명령 전달 과정에서 혼동이 일어나 길을 안내하는 소해정들이 제 때 마중나오지 않았다. 우키시마호는 기다리지 않고 마이쓰루 만으로 들어갔다가 두 기뢰가 설치된 수역으로 진입하여 폭발하였다.
  
후쿠야마 대위는 여기까지 읽고 덧붙여 우키시마호 해군지도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승조원과 승선자를 함선의 데크(갑판)로 유도했기 때문에 피해가 적었다고 설명했다. 
사고 원인을 기뢰 폭발로 규정했는데, 기뢰폭발에 의한 사고라고 주장하는 직접적 근거로는 침몰한 우키시마호의 상태가 상부 구조물이 파괴된 것이 아닌 배 밑바닥의 선체가 파괴된 흔적이 있다는 점, 선상의 부품이 날아간 것이 없다는 점, 사망자들의 사체가 화상을 입지 않은 점 등을 들었다. 그리고 미군이 이 사건을 수중에 부설한 기뢰에 의한 폭발 전과(戰果)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도 증거라고 주장했다.  
어찌됐건 이는 타의에 의해 귀국자들이 희생됐다는 얘기가 된다. 일본이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전쟁 수행중인 것도 아닌 때에 일어났으니 더욱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고가 난 지 9년이 지난 시점에 침몰한 배를 인양할 때도 선체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는데 침몰 때 선체를 조사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조사를 했더라도 객관적으로 조사팀을 구성해 나섰어야 했다. 해군이 일방적으로 조사하고 일방적으로 발표한다는 것은 진실을 의문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짓말 마시오.” 오민균이 소리지르며 그의 설명을 가로막았다. “우리는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직접 여기에 왔소. 우키시마 호의 승조원들은 배가 부산에 도착할 경우 분노한 한국인들에게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부산으로 가라는 명령에 불복하고 항명했소. 그리고 해군이 우키시마 호에 실린 폭탄 처리에 대한 뚜렷한 방안도 제시하지 않고 귀국선을 운항했다는 말을 들었소. 그래서 자폭설도 나왔던 것이오. 우키시마호가 출항 당시 얼마 되지 않은 연료를 가지고 출항했다는 승무원의 증언은 우시시마호가 애당초 부산항까지 항해할 목적과 계획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니오?” 
“모르는 일을 예단하지 말라. 추론은 금물이다.”
“왜 모른다고 막나.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우키시마호가 출항하기 전 오미나토 군항 일대의 일본인들이 우키시마호가 제대로 조선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폭침되기 직전 승무원들이 갑판의 한국인들을 강제로 선내로 몰아넣고, 200여 명의 일본해군 승조원들이 탈출 후 폭발했다는 점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은 마이쓰루 군항으로 후송된 해군 병사들이다.”
“그들을 불러와 대면시켜 달라.” 
“모두 다른 부대로 분산, 배치됐다.”
“의도적 회피다. 당신들은 미군이 설치한 기뢰 접촉에 의해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라고 우기고 있지만, 마이쓰루 군항으로 들어오는 항로는 기뢰 기능이 이미 끝난 안전한 항로였다. 한 해군장교는 우키시마호가 마이쓰루 항에 입항하기 전 경비대로부터 ‘소해 완료’라는 사인을 받고 입항했다고 증언했다.” 
“알고 싶거든 해군 수사반을 찾아라.”

후쿠야마 정훈장교가 발을 뺐다.   

“아니, 해병단 해상에서 벌어진 사고를 해병단이 모른다니 말이 되는가. 현지주의에 입각해 사건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부대가 무조건 구조하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군 수칙이다. 그것을 모르고 작전을 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해난사고는 사고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경찰이나 부대가 나서서 구조활동을 벌이고 원인 파악을 한다. 사고 전후 과정을 조사하는 것도 현지의 경찰과 군 수사기관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구조하지도 않았고, 수사도 하지 않았다. 사명감을 기망한 것이다.” 

나카무라 중좌가 나섰다. 

“귀관의 지적은 뼈아픈 교훈을 주고 있다. 변명하자면, 해병병단은 패전후 누구나 없이 자포자기 상태다.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정신적 충격이 크다. 절망과 좌절, 패배감에 젖어서 술에 의존하는 병사들이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무장해제가 하달되니 모두 손을 놓고, 군기가 빠지고, 상실감에 빠졌다. 자살자도 속출하고 있다. 이것이 사후대책을 세우지 못한 요인이다. 이 점 변명의 여지가 없다.” 

고뇌에 찬 표정이 그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졌다. 초소병들의 흐트러진 모습들이 오민균의 뇌리에 스쳤다.   

“생존자들이 선내에서 폭발음을 수차례 연속적으로 들었다고 했는데, 폭뢰에 따른 것이라면 이런 현상이 나올 수 없습니다. 물기둥이 솟구쳐 올라야 하는데 없었다고 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오민균이 곁에 서있는 현용대를 앞세웠다. 현용대가 말했다. 

“배가 폭발해 사람들이 튕겨져 나갔습니다.” 

오민균이 다시 나섰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희생되었습니다. 구조된 조선인이 타이라 해병단에 수용된 뒤 원인모를 화재 폭발로 수십 명이 죽지 않았습니까.” 

정훈장교 후쿠야마가 그의 얘기를 빠짐없이 수첩에 받아 적고 있었다. 

“병영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일본군대에서 있을 수 없는 치욕입니다. 사고원인이 무엇입니까.” 

부단장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할 말이 없었다. 관리소홀 아니면 의도된 방치, 둘 중 하나였다. 일본 군대가 계획된 인간 도살로 이끈 것이라고 우겨도 해명할 방법이 없었다. 군기 우선의 해병단에서 이런 사고가 난 것은 누가 뭐래도 수모 그 자체였다.  
밖이 소란하더니 조병헌 조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할린에서 온 징용자의 얘기요. 에수토루란 마을에서 조선인 집단학살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들 패망했다구 뭣대로구만?” 
“에스토루란이라니?”

사할린 서북부 에스토루 지역에는 징용자를 비롯한 조선인이 10,000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일본 패전 후 5,0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인구가 하룻 사이에 반 이상 감소한 것은 도망간 사람도 있지만 일본의 처치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병헌 뒤를 따르던 사람 중의 하나가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악에 받쳐있었다.

“소련 국경과 인접해 있는 사할린 가미시스카 지역에 일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소. 철도와 도로, 비행장 건설을 위해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붙들려온 곳이오. 소련군의 진격이 시작되자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조선인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사살했소.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첩자 노릇을 한다,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맞고 있다, 조선인들 밀대 역할을 하고 있다, 라는 소문을 퍼뜨리더니 8월 18일 일본 헌병들이 가미시스카 경찰서 유치장에 조선인들을 잡아 몰아넣고 불을 질렀소.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 사살했소. 피난 차량에 조선인을 태운 후 차량과 함께 수장시키기도 했소. 그중엔 종군위안부 처녀들도 있었소. 나는 도망쳐서 홋카이도로 건너와서 아오모리를 배회하다 우키시마호를 탔소.”

이성유가 부단장의 얼굴을 가격했다. 후쿠야마 대위가 달려들었으나 나카무라 부단장이 제지했다. 

“가만 두라!” 
“개새끼들아, 우린 생사를 버리고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목숨 바치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런데 이게 뭐냐!” 
“이 생도, 진정해요. 여기서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오민균이 그를 제지했으나 부단장이 말했다. 

“당신들의 분노를 이해하오. 이렇게 해서라도 분풀이가 된다면 내 뺨을 열대라도 내놓겠소. 나 역시 가해자요.” 
나카무라 중좌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이성유의 얼굴에는 그 사이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1945년 제2차 대전 후 대일 점령 정책을 실시하기 위하여 도쿄에 설치했던 일본 주둔 연합군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는 승전 직후 연합군총사령관 각서를 발표하고 일제 식민지 백성들의 지역과 직업별 귀국 순위를 정했다. 지역별 순위는 (1)하카다, 시모노세키 (2)오사카 고베 (3)기타지역으로 나누었다. 귀국자 직업별로는 (1)군인 (2)강제노역 노동자 (3)기타 등으로 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행정상의 구분일 뿐 제대로 지켜진 것이 없었으며, 각서에 근거한 송환은 묵살되었다.  
일본 전역에 있던 한국인이 250만명에 이르렀으니 수송이 어려웠다. 잔류 희망자도 많았지만 백여 만 명 이상이 귀국을 희망했으니 수송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패전국 일본은 연합군과의 패전 협정을 따른다고는 했으나 제대로 이행된 수송대책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노예들인데 얌전히 제 자리에 갖다 놓는다는 것이 짜증나는 일이었다. 패망한 것도 불쾌한데, 그들을 얌전히 제 자리에 갖다놓다니... 그래서 행정 지시가 내려와도 하부(下部)에서 무시하거나 묵살했다. 현지 지도 명목으로 귀국자를 탄압했다. 전승국은 이를 방관했다. 결국 급한 사람들은 소형선박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로 변을 당했다. 

우키시마호 사건을 단순한 해난사고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일본의 지성들에 의해 제기된 것은 사고 발생으로부터 30년이 지난 1976년 전후였다. 일본의 양심적 인사들은 ‘우키시마호 침몰사고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 해군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한국인 강제징용자에 대한 학살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1960년대 말부터 사이토 사쿠치 시모키타지역문제연구소장, 아키모토 료지 아오모리 대학교수, 와시오카 코쇼, 나루미 겐타로 씨 등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을 폈다.  
반면 국내에서는 간간히 언론보도를 통해 사건의 존재만 알려졌을 뿐, 심층적으로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은 없었다. 사건에 대해 자료를 갖고 있는 우키시마호 연구가 사이토 사쿠치 상이 한국측 유가족들에게 일본측 자료를 제공하면서 한국내에서도 1990년대 이후 진상조사에 나섰다.  
일본 지식인 사회가 먼저 움직인 계기는 해난사고가 난 마이쓰루 만 주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를 매년 지내면서부터였다. 이들이 일본 여론을 각성시킨 것이었다. 그 결과, NHK가 1977년 8월 13일자로 다큐멘터리 ‘폭침’을 탐사 취재해 방영했다. 
방송은 일본측 자료를 인용해 “조선인과 조선인 해군 군속들이 빨리 고국으로 보내줄 것을 항의하는 등 불온한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라는 등 일본 정부 관점으로 보도했으나, 참혹한 폭침의 과정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일본 여론을 움직인 계기가 되었다. 탐사보도를 통해 사회여론을 환기시키고, 누구나 합리적 의문을 갖게 한 시간들이 주어진 것이다.  
우키시마호 승무원이었던 하세가와 모토요시 이등병조는 증언에서 “승선인원이 6천 명에서 8천 명이었다”고 회고했다. 조타장이었던 사이토 츠네지 상등병조는 “우키시마호가 세이칸(靑函) 연락선과 대체했을 때, 배 밑바닥에 4천 명을 태운 적이 있는데, 오미나토 항에서 탄 조선인은 더 많이 탈 수 없을 정도로 빼곡이 들어차서 그보다 2천 명은 더 되었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일본 정부는 한 자료에서 생존자가 3,211명이라고 밝혔다. 6,000명 이상 승선했다는 하세가와와 사이토 증언을 토대로 한다면 승선자 6000명 중 3200여명의 생존자를 빼면 사망자 숫자는 최소 2,700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일본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524명보다 다섯 배가 많은 수치다. 수치가 오락가락해 신빙성을 기대할 수 없지만 일본 정부가 말한 공식 사망자 숫자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승선자를 한국 당국과 크로스 체크하면 그 정확성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생략되었다. 
기록을 중시하고 수치를 정확히 맞추는 일본인이 우키시마호에 관한 한 ‘숫자 백치’를 내보이고 있는 것은 ‘의도된 은폐‘라는 의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일본이 희생자 명단을 작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본이 말하는 사몰자 명부 작성 시기는 사고 발생 7일만인 1945년 9월1일이었다. 그러나 신속하게 사망확인서, 호적말소 통지서 사본이 첨부된 사망자 명부를 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는 일이다.  
승선자 명부가 존재해도 교차 확인절차와 시일이 요구되는데 명부가 없는 가운데서 사몰자 명부가 일방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수치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다에 가라앉았거나 선체에 갇혀있는 유해가 얼마인지 확인되지 않은 시점이고, 전 가족이 사망했거나 독신자가 사망해 신고하지 않은 경우도 수다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귀국자가 탑승한 바람에 나중에 승선자 명단 작성 자체를 포기한 상태였던 것이다.   
우키시마호 기관장이었던 노자와 다다오 소좌는 “출항명령이 내렸을 때 함장, 항해장 등 몇 사람이 도중에 어느 일본 항구에 입항하는 것을 협의했다. 작전에 관한 것은 기관장에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듣지 못했으나 도중 어느 항구에 입항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며 마이쓰루 행은 우연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라고 말했다. 
조타장 사이토 상등병조도 “우리는 처음부터 부산에 갈 생각은 없었다. 배의 항로는 출항 후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가 결정되면 항로를 정하고 그 항로로 운항한다. 우키시마호는 부산으로 가는 항로가 아닌 일본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항로로 갔고, 그것은 일본 항구에 들어가는 항로이다. 출항 때부터 마이쓰루 항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도중에 항로를 변경하는 그런 항해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을 다룬 책 <アイゴーの海(비극의 바다)·1992>에는 당시 여러 자료를 근거로 자폭이라는 추론을 내렸다. 이 책의 한 대목이다. 

-폭발은 기관실에서 일어났다. 군인들 대부분은 이미 갑판 위에 있다가 폭발과 동시에 구명정을 타고 도망가버렸다. 귀국 노동자들과 가족은 비명을 지르며 선실에서 갑판으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사다리는 하나밖에 없었고 배가 침몰하면서 승선자들의 시체가 파도 위에 뜨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인으로 일본 해군 헌병 중위였던 백일남(白一南·충북 출신)이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어 '저놈을 죽여라!'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3명의 일본 수병이 그를 쫓아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온 몸이 바다에 뜬 기름으로 범벅이 돼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어서 그는 살아났다.  
왜 일본 수병들이 그를 죽이려 했는가. 그가 배 안에 폭발물이 놓여있고 전선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동포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1978년 ‘우키시마호 순난자추모회’가 폭침 현장인 마이쓰루 만 시모사바가에 추모비를 세웠다. 이후 해마다 8월 24일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규명위원회(1995년·천안), 우키시마호폭침 한국희생자 추모협회(2010년·부산) 등이 발족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을 펴고 있다. 희생자추모협회는 2012년부터 부산에서 ‘우키시마호 폭침 희생자합동위령제 및 추모제’를 매년 열고 있다. 
그러나 사건은 여전히 미제다. 희생자추모협회는 “일본은 초고령으로 접어든 생존자들이 타계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때가 오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시치미를 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민간단체의 활동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정부나 국제기구가 나서서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가능하다면 남북 합동으로 대응하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북한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살아있는 령혼들, 2001)>을 제작, 상영했다. 2003년에는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 남북합동토론회가 평양에서 열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와 일본정부에 보내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일본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은폐하고 있다. 숨기는 자가 범인이듯, 그들 스스로 내놓고 범죄자로 배짱있게 나서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잡아 책임을 묻는 것은 피해자가 나서서 추궁할 수밖에 없다.
<출처 http://www.geocities.jp/k_saito_site/doc/tango>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