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한·일 갈등’에 대처하는 미국의 속내 - 日 불매운동과 오버랩되는 《봉오동 전투》의 “대한독립만세”

일취월장7 2019. 8. 17. 10:01


‘한·일 갈등’에 대처하는 미국의 속내
  • 김원식 국제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6 17:00

본질은 사라지고 ‘지소미아’만 남아…겉으론 ‘창의적 해법’ 강조, 사실상 일본 손

“미국이 지금 다소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단지 한·일 갈등이 완화되기를 기다리는 것일 뿐이다. 미국은 절대로 ‘지소미아(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가 파기되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 관계에 관해 워싱턴의 유력한 보수 싱크탱크의 한 관계자가 내놓은 말이다.

한·일 갈등에 관해 미국이 겉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지만, 한국이 ‘지소미아’ 파기 카드를 꺼내들자 내심 한국을 압박하며 일본 편을 들고 있다는 워싱턴의 기류가 그대로 드러난다. 사실 한·일 갈등은 미국이 가장 바라지 않는 시나리오 중 하나다. 상호 수출규제 등 양국의 경제적인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은 별도로 하더라도, 자칫 안보적인 측면에서도 대립한다면, 북·중·러 연합을 견제해야 하는 한·미·일 연합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장 상징적인 이슈가 바로 지소미아의 연장 여부다.

워싱턴 정가와 외교가는 이미 日에 기울어

2016년 11월에 체결된 이 협정은 특히,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관한 정보를 법적으로도 한·일이 상호 공유할 수 있도록 한 군사협정이다. 양국이 특별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이상 1년 단위로 자동 연장되지만, 올해 7월 일본이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하면서 양국 관계가 얼어붙자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이 신뢰 부족을 이유로 수출규제 조치를 단행하자, 한국도 신뢰가 없는 국가와 군사협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며 지소미아 파기 가능성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만나 협정 유지를 강하게 요구한 데 이어, 최근 방한한 마크 에스퍼 미 국방부 장관도 우리 정부에 협정을 파기하지 말 것을 강하게 압박했다. 한·일 간의 갈등이 악화하고 여기에 더해 군사·안보적인 측면으로까지 확대돼 한·미·일 삼각 공조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절대 방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워싱턴 정가나 외교가도 겉으로는 한·일 갈등이 확대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이미 일본의 논리에 기울어진 상황이다. 특히 지소미아 문제가 불거지자, 한·일 갈등의 본질적인 원인 규명은 사라지고 단지 한국의 대응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지일(知日) 싱크탱크인 사사카와 평화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는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출신 제임스 줌월트는 ‘미국의소리(VOA)’에서 “한국이 지소미아 협정을 파기하면 동북아 역내 미국의 이익에 심각한 피해를 입힐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일본을 넘어 미국의 이익에도 피해를 줄 것이라고 경고한 셈이다. 더 심각한 것은 지한파 싱크탱크도 마찬가지 기류라는 점이다. 대표적인 지한(知韓) 싱크탱크인 한미경제연구소의 부소장을 맡고 있는 주한 미국 부대사 출신 마크 토콜라도 이 매체에서 “지소미아가 한·일 갈등 상황에서 테이블에 올라와서는 안 된다”면서 “이 협정은 한·미·일 3국에도 모두 유용한 만큼 계속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어정쩡한 자세를 보이던 미 행정부도 지소미아 문제만큼은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나섰다. 지난 8월3일, 미 국무부 당국자는 언론이 이 문제에 관해 질의하자 “현재 한·일 간의 긴장이 한·미·일 협력의 모든 측면에 적용되지 않는다”면서 “한·미·일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상실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며 서로를 방어하는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다소 정제된 목소리지만, 한국의 대응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또 “이 관계가 무너지면 미국의 안보와 이해관계도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라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발언도 내놨다. 한국과 일본을 담당하는 마크 내퍼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도 지난 7일, “3개국(한·미·일)은 특히, 북한과 러시아, 중국이 제기한 공동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면서 “이들은 한·일 관계의 최근 갈등을 이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더는 우리 3개국 사이에 끼어들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속내를 밝혔다.

“사실상 일본 편?” 질문에 美 국무부 ‘침묵’

이에 더해 8월초에는 미 국무부 정책기획국의 고위 인사가 직접 한국 외교부를 방문해 지소미아 파기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이 서로 창의적인 해법(creative solutions)의 공간을 찾기 바란다”는 공식적인 입장의 뒤편에서 사실상 한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지난 8월12일, 필자가 “미국이 최소한 관여(engagement)라도 한다면, 무엇이 창의적인 해법인지는 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미 국무부에 질의하자, 한 관계자는 “할 말이 없다”라며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필자가 재차 “속으로는 일본 편을 들면서 겉으로만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아닌가”라고 질문을 이어가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필자의 전화를 먼저 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분명한 입장을 밝힐 수도 없는 난처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에 대해 워싱턴의 한 보수 싱크탱크에 속한 한반도 전문가는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다”면서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1965년 체결된 한·일 협정이 흔들리고 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마저도 흔들리는 상황을 싫어한다”고 잘라 말했다. 쉽게 말해 한·일 양국에 현재의 판을 깨지 말고 ‘현상 유지’를 하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은 현실적으로 이번 한·일 갈등에 관해 일본의 손을 들어주고 있지만, 다만 이를 대놓고 공식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을까봐 한국 눈치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최근 한국에서 반일 감정이 폭발하고 있는 것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미국이 공식적으로는 자제하고 있지만, 이미 한국 정부와 막후나 물밑 대화를 통해 한·일 공조를 깨지 말라고 강한 압력을 넣고 있다는 얘기가 정설로 통하고 있다. 한·미·일 삼각 공조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지소미아 문제에 유독 미국이 완강한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日 불매운동과 오버랩되는 《봉오동 전투》의 “대한독립만세”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승인 2019.08.17 10:00


국난 위기 누가 극복했나…역사의 주역 ‘민초’ 사극 통해 재조명

최근 사극은 잘 가보지 않았던 시대로의 여행을 떠나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 시대 중 단연 주목되는 건 구한말이다. 일제강점기와 연결되면서 우리에게는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시대. 과연 지금 사극들은 그 시대의 민초들을 어떻게 담아내려 하고 있을까.

지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특별했던 건 지금껏 사극들이 자주 담으려 하지 않았던 구한말을 배경으로 가져왔다는 점이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시기가 사극의 소재가 되지 않았던 건 여러모로 논쟁적인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제와의 대결구도를 그려내면 자칫 지나친 ‘민족주의적’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구한말을 배경으로 근대화 과정의 신문물과 신여성, 댄스홀 같은 걸 소재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과거 KBS 《경성스캔들》은 독립운동과 멜로라는 코드를 접목하려 했지만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건 작품이 그 균형을 맞추지 못했다기보다는 아직까지 대중 정서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호명된 의병, 동학군 그리고 독립군

《미스터 션샤인》은 과감하게도 멜로와 의병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엮어냈다. 고애신(김태리)과 유진초이(이병헌)의 멜로를 이제 막 신문물이 들어오는 구한말을 배경으로 담아내면서도, 남모르게 의병활동을 하는 고애신을 통해 의병들의 불꽃 같은 삶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유진초이, 구동매(유연석), 김희성(변요한)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특히 전혀 의병과는 무관해 보이는 인물들이 의병이 되어 가는 과정을 담았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미국으로 도망쳤다가 미군이 되어 돌아온 유진초이, 백정의 자식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낭인이 되어 돌아온 구동매 그리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주의 자식이지만 친일 행각을 벌이는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김희성. 멜로의 사적 관계가 의병 같은 대의를 추구하는 공적 관계로 확장되어 가는 인물들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저잣거리에서 인력거를 끌거나 빵을 만들거나 양장점에서 옷을 만들고 전당포를 운영하는 민초들도 눈앞에서 쓰러져가는 이웃들을 보며 하나둘 의병이 되어 갔다. 구한말을 지나치게 낭만적 풍경으로 담아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 《미스터 션샤인》은 그럼에도 의병이라는 존재에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큰 성과를 거뒀다. 역사 교과서에 박제된 사진 한 장 정도로 남아 있던 의병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 장면은 의병들이 색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민초들의 초상이라는 걸 얘기해 줬다.

최근 종영한 SBS 사극 《녹두꽃》은 지금껏 사극이 잘 다루지 않았던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가져왔다. 당대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최무성)이 등장하긴 하지만, 드라마는 백이강(조정석)이라는 동학군의 별동대장을 주인공으로 세워 그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서자로 태어나 이방인 아버지 명에 따라 동네 사람들을 수탈하며 살아가던 그는 전봉준을 만나면서 삶의 전기를 맞게 된다. ‘거시기’로 불리며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살아가던 그는 동학군의 별동대장이 되면서 비로소 ‘사는 맛’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가 된 우금치 전투는 무려 2만여 명이 죽음을 맞이했지만 드라마는 이들이 왜 기꺼이 그 죽음을 향해 달려갔는가를 백이강이라는 인물을 통해 감동적으로 담아낸다. 하루를 살아도 사람처럼 살다 가겠다는 뜻이었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울림을 보여줬다.

영화 《봉오동 전투》 역시 이 전투의 영웅으로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홍범도 장군을 전면에 세우지 않는다. 대신 항일대도를 휘두르는 황해철(유해진), 발 빠른 독립군 분대장 이장하(류준열) 그리고 황해철의 오른팔인 백발백중 저격수 마병구(조우진)가 주인공들이다. 실제로 1920년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패시킨 이 역사적 전투는 전투의 현장에서 죽기 살기로 뛰어다닌 인물들에 의해 생생한 생명력을 얻는다. 여기서도 독립군은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아닌, 자발적인 민초들이었다.

사극이 되살린 구한말 민중들, 그리고 지금

우리 역사에서 국난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나라를 구해 낸 건 민초들이었다. 임진왜란은 물론 구한말 때도 우리는 동학군, 의병, 독립군이라는 이름으로 민초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우리네 강토 곳곳에서 초개같이 제 한 목숨을 던졌다. 물론 역사는 이들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자들의 이름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최근 사극들은 역사가 소외시킨 실제 역사의 주역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아니라 어느 집 애기씨로 태어났으나 ‘꽃’이 아닌 ‘불꽃’의 삶을 살겠다며 의병이 된 이와 그를 지키려다 제 목숨 또한 불꽃으로 기꺼이 던져버린 또 다른 의병이다. 《녹두꽃》 주인공은 동학농민운동을 전면에서 이끌었던 전봉준이 아니라 서자로 태어나 ‘거시기’로 불리며 살다가 제 이름을 찾아 짧지만 사람다운 삶을 살고 간 동학군 별동대장이다. 마찬가지로 《봉오동 전투》 주인공은 홍범도 장군이 아니라 어쩌다 나라 잃은 세상에 살다보니 독립군이 된 인물들이다.

구한말이라는 사극에서 그간 잘 그려내지 않던 지점을 선택하고, 그 안에서 영웅이 아닌 민초의 역사를 재현해 내려는 노력이 지금 이뤄지고 있는 건 우리가 ‘대중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녹두꽃》의 동학농민군들이 들었던 횃불은 최근 광화문을 채우는 촛불의 연원지처럼 여겨지고,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들이 외치는 “대한독립만세”는 아베 정권이 만들어낸 경제전쟁에서 ‘불매운동’을 통해 들려오는 ‘경제 독립’의 목소리로 들린다. 역사는 결국 몇몇 영웅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 당대의 민초들의 힘이 모여 만든 것이라고 이들 사극은 말하고 있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영롱하게 빛났던 한·일 교류의 순간

일본 외교관 호슈는 성실과 신의로 조선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통역사 현덕윤은 일본인을 배려하다 곤장까지 맞았다. 일본이 먼저 성신(誠信)의 정신을 회복해야 하겠으나, 우리 또한 두 인물의 자취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8월 16일



조선시대에 일본으로 파견된 공식 사절을 두고 통신사(通信使)라고 부른다. 조선 초기에도 그 이름이 나타나긴 하지만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일본 쇼군의 교체 때 보낸 사신단을 일컫지. 조선으로서는 일본 내부를 들여다볼 기회였고, 일본으로선 조선의 조공 사절로 선전해 막부의 권위를 드높이는 행사이자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통로였어.  

도쿠가와 막부에게 조선 통신사는 최고의 빈객이었단다. 막부는 1년 치 예산보다 많은 돈을 조선 통신사 접대에 쓸어 넣을 때도 있었어. 조선 통신사가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를 지나 에도(도쿄)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일본인이 몰려들어 글씨를 얻고, 시를 받고, 이런저런 문화 교류를 하면서 유행이 바뀔 정도였다고 하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조선도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게 있는데 고구마가 대표적이야. 영조 때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조선으로 가져온 거거든.

ⓒ고베박물관 소장
일본 에도 시대 중기의 조선 통신사 행렬 모습.
양국 모두에 굵직한 역사적 흔적을 남긴 조선 통신사지만 전면적인 인적·문화적 교류로 이어지지는 못했어. 일본인들은 조선 통신사를 쇼군 즉위를 축하하는 ‘이벤트성’ 조공 사절단으로 보았고, 전쟁으로 인해 가슴 깊숙이 적개심을 품고 있던 조선 사람들은 일본의 변화와 발전을 목도하면서도 그저 감탄하거나 애써 외면할 뿐이었지. 지피지기, 즉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려는 노력에는 부지런하지 못했던 거야.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주는 인물로 신유한이라는 선비가 있어. 그는 1719년 일본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의 일행으로서 <해유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겨. “높은 양반들은 용모와 거동이 사람 같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 (···) 부귀를 누리고 있지만 천박하고 어리석어 모두 흙으로 빚은 우상에 불과한 자들이다. (···) 사람 씀이 이러하고 체통이 이러하고도 부강하고 오랜 안락을 누린다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와 행색과 풍속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폄하와는 별개로 그렇게 못난 사람들이 “부강하고 오랜 안락을 누리는” 현실에 대해서는 그저 “알 수 없다”는 탄식으로 끝내버리는 조선 선비의 완강함이 엿보이지 않니.

<해유록>에는 특이한 일본인 하나가 끊임없이 등장한단다. 우삼동(雨森東)이라는 세 글자의 조선식 이름까지 지닌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였지. 일본 사가현 출신으로 의학과 성리학을 두루 공부하다가 나이 스물둘에 에도에 있던 대마도 번주와 인연을 맺게 돼. 이후 4년 뒤에는 대마도에 들어가 외교관으로 활약하고 학자로서 후학을 길러내며 평생을 보낸 사람이야. 그는 조선에 건너와 부산 초량 왜관에 거주하면서 조선어를 배웠는데 경상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썼다고 해. 조선 통신사를 두 번이나 치러낸 호슈는 1711년 조선 통신사의 정사(수석 사신)였던 조태억이 그를 두고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하고 백가의 책을 외운다”라며 찬탄을 금치 못할 만큼 영특한 사람이었어.

ⓒ연합뉴스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의 초상.
조선에 건너와 부산 초량 왜관에 거주했다.
이 유능한 일본 외교관과 자의식 강한 조선 선비 신유한은 서로 우의를 나누면서도 여러 차례 부딪친다. 대마도주 앞에서 절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격렬하게 다퉜던 그들은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호칭을 두고 또 한 번 날을 세운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호슈는 신유한에게 왜 조선인들은 일본을 왜(倭)라고 일컫느냐고 따졌고 조선인들이 왜국이니 왜적이니 부르는 것을 일본인들이 불쾌해한다고 지적했어. 신유한은 임진왜란 때 그렇게 당했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며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터만 봐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더라고 받아쳤지. 호슈는 이렇게 반박해. “그건 그러리라. 하지만 사신의 수행자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반드시 왜라 하니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 아랫사람들을 단단히 타일러서 일본 사람이라고 부르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해유
록>).” 잊기 어려운 과거를 지녔으나 어쨌든 이웃 나라에 우의를 다지고자 파견된 통신사 일행이 말끝마다 ‘왜놈’ ‘왜인’ 하고 다녔던 셈이니 외교적 결례라 할 만하지.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와 풍습을 무시하고 일본의 관점으로만 생각하면 편견과 독단이 생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교린제성>)”라고 후배들을 가르친 호슈로서는 작심하고 항의했을 거야.

임진왜란의 상처는 또 한 번 호슈와 통신사들 간의 충돌을 가져온단다. 풍신수길이 지은 절이라고 알려진 호코지 방문 문제였지. 일본인들은 역사서까지 들이대며 그 절이 풍신수길이 아니라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원당이라고 주장했지만 종사관 이명언은 끝까지 방문을 거부했어. 그러자 호슈는 칼을 뺄 듯 흥분하며 조선 통신사들을 압박했다고 해. 이런 일을 겪은 신유한은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호슈를 “위인이 음험하여 겉으로는 말을 꾸미고 안으로는 칼을 품은 자”라고 경계한다. 호슈는 자신의 저서 <교린제성>에서 통신사에게 호코지 방문을 압박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으며 천박한 발상이었다고 반성해. 또 일생 동안 조선과의 관계에서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로써 교류하는 성신교린(誠信交隣)을 강력하게 주창했지. ‘성신’을 위해서는 먼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해야 했어. 호슈는 이렇게 얘기했다는구나. “하인들이 가짜 수염을 달고 다니는 것을 조선은 이상한 짓이라고 여긴다. 조선인이 상중에 소리 내서 우는 것을 일본인이 보면 비웃는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그 차이를 알아가는 일이야말로 이해의 출발점이다.”

대부분의 조선 통신사들은 일본을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지만 성신의 의미에 적극 공감한 이도 있었어. 통역사 현덕윤은 1711년 조선 통신사의 역관으로 호슈를 직접 만나기도 하지. 그는 부산 초량 왜관에 부임한 뒤 일본인들이 머무는 시설이 형편없이 낡은 것을 보고는 사재를 털어 이를 개축했어. 그곳에 성신당(誠信堂)이라는 편액을 걸었지. 현덕윤은 초량 왜관 재임 중에 일본인들의 처지를 지나치게 배려한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맞기도 하지만, 일본인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공정하게 처리해 조선 백성이 공적비를 세워줄 정도로 제 소임을 다하는 공직자였어.

그런 현덕윤과 어떤 일본인보다 조선을 이해하려 노력했던 호슈는 십수 년 만에 부산에서 재회하게 되었어. 현덕윤이 사비를 털어 번듯하게 지은 성신당 앞에서 감격한 호슈는 성신당기(誠信堂記)를 써 현덕윤에게 주었단다. “경치 좋은 곳에서 경치를 찾지 않고 성신이라 이름한 뜻이 가상하다. 교린(交隣)의 길은 성신에 있고, 지금은 물론 훗날에도 그리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당을 보고 교린의 책임자가 된 사람, 그를 깊이 생각하노라(<국제신문> 2015년 6월2일).”

일본인들을 배려하다가 곤장까지 맞았던 조선인 통역사와 조선을 무시하고 얕보는 일본인 사이에서 성실과 신의로 조선을 대해야 한다고 외치던 일본인은 아마 그날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퍼마시지 않았을까. 아마 그 순간은 성신보다는 배신이, 이해보다는 불신의 기간이 훨씬 길었던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지점으로 남을 것 같구나. 성신의 정신을 먼저 절실하게 회복해야 하는 쪽은 역시 일본이겠으나 우리 또한 현덕윤과 호슈의 자취를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