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가 나타나 미국을 구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 7월 8일, 프린스턴대학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딘 애치슨 전 국무장관은 이번 분쟁은 "우리의 논지를 입증했다(proved our thesis)"면서 "코리아가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Korea came along and saved us)"고 발언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한국전쟁이 있었기에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 계획(NSC-68)의 실천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냉전의 숙적 소련에 대한 압도적 힘의 우위를 달성됐으며, 이로써 미국의 세계 전략이 완성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한국전쟁 기간 미국의 국방비는 3배 이상, 군수물자 생산은 약 7배 늘어났다. 또한 육군 병력은 300만 명, 공군력은 비행단 95개로 각각 2배 씩 강화됐다. 한국전쟁이 미국의 전면적 재무장에 대한 미 의회 및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이끌어냈기에 가능해진 결과다.
한국전쟁의 영향은 미국의 재무장에 그치지 않는다. 2차 대전의 적국 서독과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미국의 하위 동맹국으로 끌어들인 것도 한국전쟁 덕분이었다. 미군이 서유럽과 동아시아, 중동 등 지구 도처에 영구 주둔하게 된 것도 한국전쟁의 영향이다. 즉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 군사력은 세계 곳곳에 미칠 만큼 비약적으로 강화된다. 이렇게 강화된 군사력이 미 세계전략의 핵심 동력이 된다.
한국전쟁은 2차 대전 이후의 세계사에서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미국의 외교, 군사정책을 반공 군사주의로 고착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군사력을 앞세워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봉쇄하는 한편 미국식 체제의 확산을 밀어붙인 것이다.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유럽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2차 대전의 적국 서독과 함께 군사동맹(NATO)을 결성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프랑스는 2차 대전 때 독일에 5년간이나 점령당했고 영국 또한 독일의 공습으로 고초를 겪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서독의 재무장은커녕 경제 재건에도 극력 반대했다.
당초 미국의 전후 계획은 독일을 유목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을 뿌리 뽑기 위해 독일의 전쟁 역량은 물론 산업 능력까지도 박탈하려 했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소련과의 대결이 본격화되면서 이전까지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자랑했던 독일의 산업을 부흥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독의 재무장이 긴급해졌다. 서유럽을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한반도의 국지적 사건이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의 세계적 팽창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즈음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은 영국, 프랑스 외무장관을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불러 폭탄선언을 했다. 서독을 나토의 틀 안에서 전면 재무장시킬 것이며 미 육군 4개 사단을 서유럽에 영구 주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1949년 4월 창립됐으나 유명무실했던 나토가 실질적 군사동맹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유린당했던 프랑스의 거센 반발도 소용없었다. 소련의 세계 적화 음모를 막으려면 이 길밖에 없다는 미국의 주장을 꺾을 수 없었다.
당초 미국은 마셜플랜(1948~52년)을 통해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꾀했으나 공화당 등의 퍼주기 반발 등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게다가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지고 10월 공산 중국이 탄생하면서 미국의 위기의식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대대적 재무장을 통해 소련에 대한 힘의 우위를 달성하는 한편 서유럽 등 우방에 대해서는 대규모 군사원조를 통해 경제 부흥을 이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50년 4월 작성된 국가안보회의 문서 68(NSC-68)이 그것이다.
NSC-68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공산화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막으려면 당시 국방비의 3-4배 증액이 필요하다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물론 의회나 국민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그런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한반도의 국지적 사건이 아니라 소련에 의한 세계 적화 음모의 시작으로 간주됐다. 즉 한국전쟁이 NSC-68에 대한 미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NSC-68의 작성을 주도한 이가 바로 애치슨이다. "코리아가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는 애치슨의 발언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NSC-68이 실행됐고 이로써 미국이 영구 전쟁국가로 변모한 과정은 지난해 2월 18, 19일 <프레시안>에 게재된 다음 글에 수록돼 있다.
(1) 영구 전쟁국가의 탄생: NSC-68과 한국전쟁 <상> (2018년 2월 18일)
(2) '군복 입은 케인스', 미국을 만들다: NSC-68과 한국전쟁 <하> (2018년 2월 19일)
그런데 위의 두 글은 유럽에서의 냉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동아시아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2차 대전 후 동아시아의 냉전은 유럽과 전혀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유럽의 '긴 평화'
유럽에서는 2차 대전 이후 군사 대치 속의 평화가 지속된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까지 30년 전쟁(1945-75년)이 이어졌다. 냉전이 '긴 평화(Long Peace)'의 시기였다는 서방의 인식은 유럽에만 해당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중남미에서는 미국과 소련을 대신한 열전이 계속됐다.
영국 언론인 마틴 워커의 말을 빌리자면 "유럽에서 백인들 간의 싸움으로 시작된 냉전의 대가를 갈색, 검은색, 노란색 피부를 가진 제3세계 사람들이 치른" 셈이다. (<냉전의 역사>, The Cold War : A History, p.60)
냉전 시절의 유럽에서는 분단 독일을 경계로 삼엄한 군사적 대치가 지속됐으나 무력 투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유럽의 냉전에서 가장 큰 위기의 진원지는 베를린이었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와 베를린 장벽 건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미국과 소련은 무력 대결을 회피했다. 작은 무력 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만큼 유럽의 냉전은 안정적이었다.
베를린 봉쇄(1948년 6월 24일-1949년 5월 12일)는 냉전 후 유럽에서의 최초의 위기였다. 1948년 3월 미국과 영국은 서독의 점령지역을 통합하는 한편 독자적인 통화개혁을 실시했다. 이를 미국의 일방적 독일 분단으로 판단한 스탈린은 동독 내 위치한 베를린에 대한 육로 교통을 봉쇄했다. 미국 주도의 독일 분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일종의 실력 행사였다. 소련은 단일하며 중립화된 독일, 그리고 독일로부터의 전쟁 배상을 원했다.
연합군 점령 지역인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 내에 있었다. 따라서 철도, 도로를 봉쇄하면 생활물자 공급이 차단되고 결국 미국이 서베를린을 포기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독일 분단은 막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서베를린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미국의 신뢰도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서베를린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동원할 수도, 그렇다고 서베를린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군사력 동원에는 전면전의 위험이 따르고, 서베를린 포기는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신뢰도에 중대한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1949년 9월까지 1년여간 무려 27만7000회의 공수 작전(62초당 항공기 1대꼴)으로 서베를린에 물자를 보급함으로써 베를린 봉쇄를 무력화시켰다. 미국의 압도적 경제력이 스탈린의 도발을 꺾은 셈이다.
1961년 8월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건설했을 때 미국은 백악관 차원에서 소련에 대한 전면 핵 공격을 검토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한편 1953년 출범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공산국가의 해방을 위한 반격(Rollback) 정책을 천명했지만 1956년 일어난 헝가리 반공 봉기에 개입하지 않았다. 반격은 말뿐이었고 실제로는 트루먼 행정부의 봉쇄(Containment) 정책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 역시 소련과의 군사 충돌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유럽에서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때까지 실제 무력 충돌이 없었다.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라는 군사동맹을 통해 각각의 하위 동맹국들을 통제하며 안정적 대치 상황을 유지했다.

▲ 한국전쟁 당시 38선 경계표시판 ⓒ프레시안 자료사진
동아시아의 '30년 전쟁'
반면 동아시아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우선 1931년 만주 침략 이후 중국과 동남아에 대한 군사 정복을 계속해온 일본의 패배로 이 지역에는 거대한 힘의 공백이 생겼다. 여기에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피압박민족의 반제, 반식민 투쟁이 벌어졌다. 2차 대전 후 터져 나온 민족 해방의 거대한 흐름을 미국도 소련도 통제할 수 없었다. 유럽의 냉전이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서구 식민 지배에 대한 피압박 민족의 독립투쟁이 기본적인 양상이었다.
전후 동유럽의 공산화는 기본적으로 소련의 군사적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반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자생적 민족해방투쟁은 주로 공산혁명의 형태로 나타났다. 동유럽의 공산화가 외부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무장 독립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민족자결을 위한 운동이었다.
미국은 2차 대전 참전의 주요 목표로 '민족자결'을 내세웠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민족해방운동을 민족자결로 보기보다는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인식했다. 중국, 인도차이나, 말라야 등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을 자생적 운동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오판이 전후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낳은 배경이다.
당초 미국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전후 동아시아의 핵심 파트너로 상정했다. 그러나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면서 미국의 구상은 어그러졌다. 결국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한국전쟁은 남한과 대만을 미국의 동맹권 안에 편입하게 만들었고, 미국의 베트남 군사 개입을 촉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결국 중국 공산당의 승리와 뒤이은 베트남 등 피압박민족의 독립투쟁(중국은 1950년 1월 세계 최초로 호찌민의 베트남독립독맹을 공식 정부로 승인) 등은 미국의 군사적 일방주의를 초래했다. 북한의 남침, 베트남의 독립투쟁을 중국 공산 세력의 팽창으로 파악한 미국은 이를 군사력으로 저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배경이다.
전후 동아시아 구상의 파탄
중일전쟁 이후 미국은 중국의 대일 항전을 적극 지원하면서 전후 세계 경영에서 일본 대신 중국을 새로운 파트너로 삼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미국, 영국, 소련과 함께 중국을 전후 세계 안보를 책임질 4대 강국(Four Policeman)의 일원으로 지목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1943년 중국과의 기존 불평등 조약을 파기하는 한편 12월 1일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비롯한 대(代)일본전의 기본 방침을 천명했다. 카이로 회담에 장개석 총통이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참석한 것은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한층 높아진 것을 반영한다. 또한 1941년부터 조셉 스틸웰,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을 차례로 중국에 파견해 국민당 정부의 대일 항전과 국공 내전을 도왔다.
중요한 것은 스탈린도 루스벨트의 이러한 방침에 동조했다는 점이다. 1944년 8월 덤바튼 오크스 회의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하는 데 동의했고,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에는 장개석 정부와 중소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했다. 즉 스탈린도 국민당 정부의 중국 석권을 예상했고 인정했다는 얘기다(당시 국민당 병력은 공산당의 5배였고, 그해 12월까지만 해도 5만 명의 미 해병이 중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심지어 1949년 4월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려 수도 난징을 포기하고 광동으로 이전할 때는 오직 소련 대표부만이 국민당 정부를 따라갔을 정도다.
1945년 말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 장군을 중국에 특사로 보내 1년여간 국민당을 주축으로 하는 연립정부 구성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1946년 말이 되면 트루먼 정부는 국민당의 승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수십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미국의 대규모, 지속적 군사 개입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미 국민의 동의를 얻어내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1946년 11월 미 해병이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군사 개입을 포기하고 경제적 지원만을 계속한다. 국민당의 패배가 임박한 1949년 8월 미 국무부는 1100여 쪽에 달하는 '중국백서(The China White Paper)'를 발간해 국민당 패배의 원인을 소상히 밝힌다. 국민당의 패배가 미국 책임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중국의 상실'은 이후 민주당과 국무부가 매카시즘 등 공화당의 집요한 반공 공세를 당하는 주요 빌미가 된다.
미국의 일본 점령 정책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은 미국 단독으로 운영됐다. 독일에서는 미소영불 등 점령 4개국의 공동통치가 이루어진 반면 일본에서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가 전권을 휘둘렀다. 뒤늦게 참전한 소련은 홋카이도 점령을 원했으나 간단하게 무시당했다. 영국조차 발언권을 가질 수 없었다. 영국과 호주 등 영연방 소속 군인 4만 명은 미 8군 예하로 배치됐다. 일본 헌법을 제정한 것도 미군이었다.

▲ 얄타 회담(1945년 2월) 당시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위키미디어커먼스
미국의 초기 일본 점령정책의 핵심은 '일본이 다시는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해체하는 대신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했다.
1945년 9월 22일 미 국무부는 '항복 후 미국의 초기 대일방침'이라는 문서를 통해 "일본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공업시설 등 경제적 기초는 파괴되며 재건하지 못한다." "일본인의 생활 수준은 그들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생활 수준보다 높지 않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피침략국에 대한 전쟁 배상도 계획했었다. 1945년 11월 일본의 전쟁 배상을 위한 현지 조사를 수행한 에드윈 폴리 위원장은 '미국의 배상정책은 일본 경제에 필요한 최소한도 이외의 모든 것을 제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1946년 6월 일본을 다시 방문한 폴리 위원장은 '일본의 화학공업 시설을 아시아 각지에 이전시켜 인공비료를 증산시킬 것'이라면서 '대일 배상의 근본은 일본의 전쟁능력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군사, 경제 측면에서는 가혹한 응징을 하면서도 정치, 사회적으로는 공산당 합법화, 노조 활동 권장 등 민주화 조치를 단행했다. 항복 2개월 후인 1945년 10월에는 종교, 정치, 시민권에 대한 모든 통제를 해제하고 여성 참정권을 허용하며,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1947년 냉전이 본격화되고 중국 국민당의 패배가 확실해지면서 미국의 대일본정책은 급선회한다. 일본의 경제, 군사적 재기를 봉쇄하는 가혹한 응징을 포기하고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삼는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로 전환된 것이다. 중국 대신 일본이 동아시아의 핵심 맹방으로 간택된 셈이다.
무엇보다 경제 안정이 시급한 과제였다. 경제가 안정되지 못하면 일본 자체가 공산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패전 이후 1947년 초까지 일본의 경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점령 직후 맥아더는 본국에 식량 350만 톤이 긴급하게 필요하다고 보고하면서 '빵을 보내 달라, 아니면 총탄을 달라'고 할 정도였다. 1945년 말 일본의 산업 생산은 1940년의 16% 수준으로 격감했다. 1945년 한 해 동안 산업 생산은 64% 감소했으며 1946년에도 38%나 줄어들었다. 1947년 15% 증가로 돌아섰으나 1934년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1947년 봄 노조가 과격화하면서 총파업을 선언하는가 하면 5월에는 사회당 정권이 수립되자 본국에서는 맥아더가 일본에 사회주의를 도입하려 한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일본 정부의 보유 쌀은 겨우 4일 치에 불과했다. 결국 점령 당국은 노조 파업을 금지하고 재벌 해체를 포기하는 등 역코스로 선회한다.
미 동아시아 전략의 초점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옮겨간 것은 1947년 초부터였다. 1월 29일 신임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딘 애치슨 차관에게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남한 경제를 일본 경제에 연결시킬" 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1946년 마셜은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 국공 합작을 추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로써 미국은 중국에 대한 희망을 접고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삼기로 한 것이다.
이어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던 3월 12일, 국무부는 "적극적인 경제 프로그램"을 통해 1950년까지 일본 경제를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역동적인 경제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미 점령정책의 전환은 1948년 1월 6일 케네스 로열 육군부 장관의 다음 발언에 분명히 드러난다.
"일본이 순수한 농업국가로는 자립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자영업자와 수공업자들이 더해진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정 정도의 대규모 산업생산이 부활되지 않는다면 일본의 경제적 곤경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일본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민주국가로 만들 것이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고 충분히 안정된 국가로 만듦과 동시에 앞으로 극동지역에서 생겨날 전체주의 세력의 도전을 막아낼 수 있는 방파제로 만들 것이다."
즉 경제 부흥을 통해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48년 3월 국무부의 조지 케난과 윌리엄 드레이퍼 육군부 차관(은행가 출신으로 전후 서독의 경제고문이었다)이 일본 현지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4월 26일 보고서를 통해 일본 경제에 대한 가혹한 정책을 완화하며 노조 활동을 통제하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 부흥을 추진해야 한다는 방침을 포레스탈 국방장관에게 보고한다.
이 같은 미국 정부의 계획은 1948년 10월 9일 NSC-13/2(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권고)로 공식화됐다. 이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의 번영은 서방 진영의 자산이며 향후 미국의 정책 목표는 '민주적 일본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탱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로서 자유세계에 참여토록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 보고서는 일본 경제의 부흥은 미국의 안보 이익 다음으로 중요한 사항이며 이를 위해 첫째 일본의 대외 교역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둘째 민간 기업의 회생을 촉진하며(재벌의 해체를 포기), 셋째 생산 확대를 통해 수출의 증대(즉 파업을 금지)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당초 해체하기로 했던 대기업 325개 중 불과 19개만이 해체됐으며, 한때 5천5백 개 노조와 88만 당원을 보유했던 공산당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1948년 11월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트루먼은 12월 디트로이트의 은행가이자 전 미국 은행협회 회장인 조셉 닷지를 일본경제 재건의 책임자로 지명해 일본에 파견한다. '경제 황제(economic czar)'로 불렸던 닷지는 정부의 복지 예산을 축소하고 공무원 25만 명을 해고하는 한편 1949년 4월 통상산업성(MITI)을 창설해 일본 경제를 '정부 주도의 수출지향형 경제'로 만들어냈다. '발전국가' 또는 '일본주식회사'로 불리는 오늘날 일본 경제의 원형은 바로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닷지는 일본의 수출 진흥과 경제 부흥,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이 서로 연관된 것으로 보았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일본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간 세계적 충돌의 최전방 전선이 될 것이며, 이념적으로 서방과 결합되고 상업적으로는 아시아와 연결된 일본이야말로 공산권의 범아시아 적화 음모를 격퇴할 수 있는 보루라는 것이다. 그는 1950년 초 의회 청문회에서 미국은 일본을 통해 "미국의 극동 지역 원조를 위한 물자를 공급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동양과의 관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동남아지역의 중요성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일본이 중요했던 이유는 아시아 유일의 산업 국가였기 때문이다. 미국 세계 전략의 핵심은 산업 역량을 가진 국가들을 우방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산업 역량이야말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복원은 물론 전쟁 역량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에는 5개의 산업 지역이 있었다. 미국, 영국, 서유럽, 소련, 일본이 그것이다.
만일 일본이 공산진영으로 넘어간다면 미국은 아시아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산업 역량을 확보한 소련의 경제 및 군사 역량이 비약적으로 강화되게 된다. 한마디로 아시아 전체가 붉게 물들여지는 셈이다. 결국 중국의 공산화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핵심 국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전쟁 이전 일본 자본주의는 조선과 만주라는 배후지가 있었기에 번영할 수 있었다. 즉 만주와 조선이 원자재 공급처 및 일본 제품의 시장 역할을 했던 것이다.
중국의 공산화로 전통적 배후지를 상실한 일본이 살길은 두 가지였다. 중립을 표방하며 중국, 소련 등과 교역하든가, 아니면 새로운 배후지를 확보해야 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과 공산 진영과의 경제 교류는 허용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핵심 동맹으로서의 일본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새로운 배후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곳이 바로 동남아지역이다. 석유, 고무, 주석 등 동남아지역의 풍부한 원자재, 그리고 시장이 없다면 일본 경제의 자립화는 불가능할 터였다.
1948년 5월 작성된 중앙정보국(CIA) 보고서는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와의 교역이 필수적이며, 만일 중국 공산화로 이것이 불가능해진다면 동남아 및 필리핀과의 교역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미 정부는 일본과 동남아의 경제 통합을 추진하면서 이를 아시아판 '마셜 플랜'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대동아공영권'의 부활을 외치는 목소리도 있었다. 문제는 당시 인도차이나와 말라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등 동남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강력했다는 점이다. 중국 혁명의 영향이었다.
1950년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의 향방은 지극히 불투명했다. 공산화의 가능성이 오히려 컸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미국 언론인 조셉 알솝과 스튜어트 알솝 형제는 1949년 8~9월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동남아 공산화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중국 공산화 이후 소련이 동남아에 '공산주의 공영권'의 건설을 획책하고 있으며 만일 동남아가 공산화된다면 일본은 결국 소련 세력권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스튜어트 알솝은 1950년 3월 11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기고한 글 '우리는 빠른 속도로 아시아를 잃고 있다(We are losing Asia fast)'에서 섬뜩한 경고를 내놓았다. 일본 공산당 지도자 노사카 산조가 시베리아에서 기니에 이르는 지역에 긴 호를 그리고는 "커다란 미소"와 함께 "머지않아 이 광대하고 새로운 러시아 제국에" 일본이 흡수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지키기 위해 동남아의 공산화를 막아야 했다. 도미노이론이 탄생한 배경이다.
한국전쟁,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완성
한국전쟁은 전후 동아시아의 불확실한 상황에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즉 미국의 즉각 군사 개입으로 동아시아 대(大)분단의 대치선이 확정되는 것과 함께 30년 전쟁의 본격적 시발점이 된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은 미국 등의 대대적 재무장을 가능케 함으로써 서방의 경제 재건과 군사동맹 결성을 완성시켰으며 이로써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우위를 달성했다.
한반도 차원에서는 1949년 6월 철수했던 미군을 다시 불러들임으로써 분단 고착화와 미군 영구 주둔의 길을 열었다. 당초 미국은 소련의 전면전에서 한반도는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철수했으나 6.25를 계기로 한미 군사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또한 미국은 대만에 제7함대를 파견해 군사적 보호에 나섰고 베트남에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한다. 이로써 미국은 공산 중국과 정면 대립하게 됐고 베트남에서는 이후 20여년간 군사 개입을 하게 된다.
미국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대만 장개석 정권의 교체를 전제로 대륙 정권과의 수교를 고려하고 있었다. 이른바 차이나 로비, 즉 미국 공화당 등에 대한 막강한 로비를 통해 '본토 수복'을 고집하는 장제스 정권의 제거를 전제로 공산당 정부와의 수교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실제로 영국은 1950년 1월 마오쩌둥 정부를 승인했으며 미국에 대해서도 수교를 촉구했다. 또한 미국의 현지 외교관들도 모택동 정부가 소련의 하수인이 아니며 소련보다는 미국과의 협력을 원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6.25 발발로 이 가능성은 무산된다. 미국의 대만 방어에 이어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이 처참한 패배를 당하면서 이후 1972년까지 미국과 중국은 극단적 대립을 지속한다.
또한 6.25 이전까지 미국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전쟁에 경제 지원을 했으나 군사 개입은 삼갔다. 식민지 해방을 내세운 처지에서 과거 식민지를 유지하려는 시대착오적 전쟁을 도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지원한 것은 서유럽 냉전에서 프랑스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자 베트남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은 전쟁에 직접 뛰어든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은 사실상 6.25와 함께 시작된 셈이다.
일본 경제의 부흥
동아시아 차원에서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 부흥과 미일 군사동맹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미군이 전쟁물자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현지 조달했기 때문이다. 6.25 특수의 영향으로 일본의 제조업 생산은 이미 1950년 10월이 되면 전쟁 이전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말대로 6.25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전쟁 기간 미국은 의회 승인 없이 군부 재량으로 물품을 구입하는 특수공급(Special Procurement)이라는 제도를 통해 약 35억 달러 상당의 전쟁 물자를 일본에서 구매했다. 이는 마셜 플랜을 통해 서독 경제에 투입된 액수와 같다. 1950-52년 일본 수출의 70%가 미국의 군수물자 구매였다.
또한 전쟁 특수를 통한 외화 수입이 전체 외화(달러) 수입의 30%가량을 차지했다. 일본 외무성이 1955년 집계한 바에 따르면 전쟁 첫해 전쟁 특수에 의한 수입은 1억4800만 달러로 전체 외화 수입의 14.8%였다. 1951년에는 5억9000만 달러, 26.4%로 껑충 뛰었고, 1952년 8억2400만 달러로 36.8%, 1953년 8억900만 달러로 38.1%가 된다.
1951년 3월 제조업 생산은 전년 대비 50% 증가했으며 1952년이 되면 생활 수준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다. 1953년 제조업 생산은 1949년의 2배가 된다.
미국은 1946년 일본의 조선업을 완전 폐기할 계획이었으나 6.25를 계기로 소생한 조선업은 1956년 세계 조선의 26%를 차지하면서 한 세대 동안 부동의 세계 1위를 차지한다. 재벌 해체는 없던 일이 돼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3대 재벌이 부활한다. '코리아가 나타나 일본을 구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이러니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미국이 전후 불과 5년 만에 바로 그러한 경제권(공산 중국을 제외한)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냉전의 논리는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의 경제 부흥에 직접 나서도록 만든 것이다
중국의 상실로 일본의 부흥이 시작됐고, 일본의 부흥은 북한의 남침을 촉발했으며, 한국전쟁은 일본뿐만 아니라 남한, 대만도 미국의 전략적 자산으로 격상시켰고, 궁극적으로 지구 반대편 서독의 재건까지 미국이 떠맡도록 만들었다.
보다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자면 1854년 일본을 개항시켰고 1904년 러시아의 동진을 막기 위해 일본을 지원했던 미국이 2차 대전 때는 일본의 동아시아 정복을 막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았고, 전후 중국이 공산화되고 소련과 동맹을 맺자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이번에는 일본을 도와 동남아 경제와의 연결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추구했던) 추진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도 미국에게는 단 하나의 일관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아시아를 미국의 이익에 맞게 문호 개방시키는 것이다. 미국 역사가 월터 라페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시아를 개방적이며 지구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일관된 목표였다. 이 목표를 위해 일본과 싸워야 했다면 싸웠고,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고 다른 아시아 경제와 통합시켜야 했다면 그렇게 했다. 일본의 문화는 흥미롭고 강했지만, 미국이 보기에 얼마든지 변형 가능했다. 미국의 세계관에 봉사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미국에게 일본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다. 미국 대외 정책의 보다 넓은 지역적, 세계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었다."(<충돌 : 역사 속의 미일 관계>, The Clash: U.S.-Japanese Relations Throughout History, p. 271)
한편 6.25는 전범 등 일본 보수세력 재기의 기회가 된다. 일례로 미군 점령 당국은 6.25 발발 직후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에서 공산당원 및 동조자 70명을 해고한 데 이어 가을에는 <아카하타>를 무기 정간시키고 언론계 전체에서 공산당 동조자 700명을 축출한다. 반면 1951년에는 전후 군국주의자로 분류돼 추방됐던 보수파 언론인 351명을 복직시킨다.
나아가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해임 이후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리지웨이 장군은 전범 등으로 정계에서 추방된 인사 중 25만 명을 복권시킨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이후 첫 선거인 1952년 10월 총선에서 당선된 중의원 중 42%가 추방 해제 인사였다. 전범 세력의 화려한 복귀가 이루어진 것이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 전략
1951년 9월 8일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단독 강화를 통해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키는 한편 미일 군사동맹을 공식화 한다.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체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이날 체결된 두 개의 조약에서 명명된 것이다. 하나는 2차 대전 때 맞서 싸웠던 일본과 48개 '연합국' 간에 맺어진 다자간 평화조약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일본 양자 간 안보조약으로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에 "일본 및 인근 지역에 군사력을 보유할" 권리를 허용했으며,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고 촉구했다. 두 개의 조약은 1952년 4월 28일 발효됐으며 이날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이로써 일종의 동아시아 안보체제가 형성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나 이는 항구적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자간 평화조약은 일본과 미국 및 미국의 우방국들 간의 평화를 약속한 것인 반면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을 미국의 군사기지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일 미군기지는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의 공산세력과의 군사 대결을 위한 것이었다. 즉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미국의 우방국에게는 평화를 약속한 것이었지만, 공산 적대세력에게는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는 일본 군국주의 침략의 최대 희생자인 남북한과 중국, 대만이 초대받지 못했다. 즉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와 전쟁 책임에 대한 단죄가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러한 역사 청산의 부재, 그리고 이에 따른 영토분쟁은 오늘날 동아시아 불화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소련은 평화협상에는 참여했으나 조인을 거부했다. 일본의 미군 기지화에 반대해서다. 한편 인도는 초대받았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미국에 의한, 미국만을 위한 일방적 동아시아 안보체제인 셈이다.
화려한 평화조약, 초라한 미일 안보조약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의 화려한 오페라하우스에서 미국 등 48개국 대표가 모여 평화조약 조인식을 가졌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됐다.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외곽의 미 육군 제6군 기지 내의 부사관 클럽이었다. 제6군은 필리핀 등에서 일본군과 싸운 뒤 전후 일본을 점령한 군대다. 안보조약의 미국 측 서명자는 애치슨 국무장관과 덜레스 평화협상 대표, 그리고 2명의 상원의원 등 4명인 반면 일본 측은 요시다 시게루 총리 단 한 명뿐이었다.

▲ 1951년 9월 8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미 국무부
국가 간의 조약 체결식에 이런 불균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점령군 기지 내의 장교 클럽도 아닌 부사관 클럽에서 체결식을 갖는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1946년 외무차관을 역임한 데라사키 타로는 "너무나 인상적이지 않은가? 부사관 클럽에서 안보조약에 서명한 것은 요시다 일행과 일본 국민에게 패전국의 처량한 신세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는 1941년 12월 미일 개전 당시 외무성 미주국장으로 미국과의 전쟁에 적극 반대했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자주노선을 견지했던 외교관이다.
사실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동아시아의 평화가 아니었다. 일본을 대소 군사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미국 측 협상 대표로 일본을 방문한 존 포스터 델레스는 1951년 1월 26일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기간만큼 주둔시킬 권리를 어떻게 확보하는가”가 근본문제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목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체결 이후인 1952년 2월 28일 조인되고 4월 28일 발효된 미일 행정협정에 의해 달성된다. 기존 미군기지의 계속 사용, 미군 관계자에 대한 일본 법 적용 배제(치외법권) 등 점령 기간 중 미군의 기존 권리를 거의 대부분 인정한 것이었다. 사실 독립국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이를 조약으로 정할 경우 의회나 국민의 반발이 예상됐으므로 비밀 행정협정의 형태로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데라사키 타로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일본이 편입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평화조약, 안보조약, 행정협정 순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 순서가 거꾸로 이루어진 것이다. 미일 행정협정을 위한 안보조약이었고 안보조약을 위한 평화조약이었다. (중략) 즉 당초 목적은 맨 나중의 행정협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미군의 무제한 주둔을 허용하는 행정협정이 핵심이며 안보조약과 평화조약은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미 군사력의 해외 발진기지
미국 역사가 존 다우어에 따르면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 보호는 세 번째 이유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의 전략가들에게 주일 미군을 유지하는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시아 본토 및 러시아에 대한 미 군사력의 해외 발진기지로서의 역할. 둘째,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는 일본이 보다 자율적이 되거나 군사주의로 치달을 경우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이러한 주장은 미국 등 서방측에서 일본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던 1950년대, 그리고 미·중 관계가 정상화된 1970년대에 자주 제기됐다). 셋째, 미군의 일본 주둔을 옹호하는 이유로 제기하는 것으로 (1951년 안보조약 1항에 있는 대로) 주일 미군이 '극동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며 외부 침략으로부터 일본의 안보를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주일 미군기지의 가장 중요한 쓰임새는 일본 외에서 진행되는 미군의 전투 임무를 지원하는 것이다. 주일 미군기지는 6.25전쟁 당시 북한에 대한 공습의 핵심 발진기지였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1965년부터 1972년 사이에 일본의 미군기지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에 대한 치명적 공습의 발진기지로 이용됐고", "특히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2001년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위한 지원기지로(폭격을 위한 발진기지로는 이용되지 않았으나) 이용됐다”고 말한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적들과의) 전쟁을 위한 체제였던 셈이다.
분리된 평화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의한 평화는 '분리된 평화(separate peace)'였다. 당연히 강화협상에 참여했어야 할 국가들이 배제됐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의 공산 정권은 물론이고 대만으로 망명한 국민당 정권도 샌프란시스코 강화 협상에 초대받지 못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중국은 일본의 침략과 점령에 의해 커다란 피해를 입은 핵심 당사자라는 점에서 이는 충격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남한과 북한도 배제됐다. 한반도 주민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가혹한 식민 지배와 징병, 징용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데도 말이다. 한편 소련은 강화협상에 참여했지만 조약 서명을 거부했다. 중국 공산 정권이 강화협상에서 배제된 것, 그리고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자국의 냉전 전략에 활용한 것 등이 그 이유였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단독 강화라 부르는 이유다.
결국 이처럼 주요 당사국들이 배제된 '분리된 평화'는 일본을 가장 가까운 이웃국가들인 중국과 한반도로부터 떼어놓는 배제적 시스템의 단초가 됐다.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 수개월 동안 미국은 일본에 대해 대만의 국민당 정권과 별도의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그리하여 국민당 정권을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사실상 인정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미국의 요구를 듣지 않을 경우 미 의회가 평화조약을 비준하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과 함께. 이 협박이 통하지 않자 미국은 미군의 일본 점령이 무기한 계속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초 경제적 이유 때문에 공산 중국과의 수교를 원했던 일본은 1951년 12월 24일의 저 유명한 '요시다 각서'를 통해 결국 이를 포기한다(이 각서는 요시다가 덜레스에게 보낸 것으로 돼있지만 실상은 덜레스가 써준 것이다). 1952년 4월 28일 일본은 대만 국민당 정권과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같은 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및 미·일 안보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민족 자결의 부정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상 당시 일본은 중국, 소련과도 평화조약을 맺고 비무장 중도노선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냉전이 격화되고 미국에 점령된 상태에서 이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결국 중국 공산 정권의 배제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일본의 독립과 미국의 안보 보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대가는 일본의 외교 주도권 상실이었다.
1954년 12월 요시다 총리가 퇴진하고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성립한다. 요시다 퇴진의 가장 큰 이유는 재무장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3일 맥아더는 요시다 총리에게 경찰예비대 7만 5000명, 해상보안청 요원 8000명의 증원을 허락했다. 실상은 재군비 요구였다. 그러나 요시다에게 군사력은 뒷전이었다. 경제 재건이 우선이었다. 헌법 9조를 앞세워 안보는 미국에 맡긴다는 속셈이었다.
1953년 닉슨 부통령은 일본의 전쟁 금지를 규정한 헌법 9조는 '명백한 실수(an honest mistake)'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후로도 미국은 일본에 대해 끊임없이 군사적 공헌을 요구하고 있다. 1991년 걸프전 당시 일본은 130억 달러의 전쟁 비용을 대고도 미국으로부터 '전투 병력을 보내라(Show me the flag)'는 핀잔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
하토야마는 1946년 4월 10일 점령 후 최초의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내각 구성을 앞둔 5월 4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공직 추방 명령으로 정계를 떠나야 했다. 총리 직은 요시다 시게루에게 넘겨주었다. 요시다가 대미 협조, 경군비(輕軍費), 경제 중시인 반면 하토야마는 자주외교, 자주헌법, 자주방위라는 대조적 입장을 취했다. 하토야마가 1946년 공직 추방을 당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하토야마 내각은 나름 독자적인 외교안보 노선을 추구한다. 예컨대 1955년 7월 미국에 대해 놀라운 요청을 한다. 2010년에 밝혀진 외교문서에 의하면 1955년 7월 하토야마 내각은 기존 안보조약 대신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상호방위조약'의 시안을 작성해 미국에 교섭을 요청했다. '서태평양'에서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고, 일본이 방위력을 증강하는 한편, 미 지상군을 6년 내 철수하며 해군과 공군도 지상군 철수 이후 6년 안에 철수하기 위한 교섭을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은 8월 29-31일 워싱턴을 방문해 덜레스 국무장관과 교섭을 벌였으나 덜레스는 진지하게 교섭할 시기가 아니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1956년 10월 19일, 하토야마 내각은 소련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유엔 가입에 성공한다. 소련이 기존의 반대 의사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평화조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당시 양국은 문제의 북방 4개 섬을 각기 2개씩 나눠 갖는 방안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이는 사실 합리적 방안이었다. 왜냐하면 소련의 대일 참전을 확정한 얄타 회담, 그리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도 북방 4개 섬 중 쿠릴열도에 속하는 에토로후와 구나시리는 소련 영토라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홋카이도에 속하는 하보마이와 시코탄을 회복하는 것으로 평화조약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북방영토의 일부라도 소련에 양보한다면 오키나와를 미국령으로 만들 것이라고 위협해 평화조약을 무산시켰다. 나아가 덜레스는 구나시리와 에토로후가 소련에 넘어간다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국은 일본과의 조약을 모두 부정할 것이라고 압박을 가했다. 결국 소련(러시아)과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평화조약을 맺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방해와 압력은 미국 자신이 주창해온 민족 자결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일본과의 예속적 군사동맹이 미국에게는 사활적 국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2009년 9월 총리에 오른 그의 손자 하토야마 유키오는 우애의 정치를 내세우며 동아시아 공동체를 주창했으나 취임 9개월만인 2010년 6월 실각한다. 오키나와현 헤노코에 있는 미군 기지를 현 바깥으로 옮기려던 계획이 미국의 반발을 초래한 때문이다. 특히 그의 실각은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사태로 남북한, 미중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때 일어났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미일 군사동맹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다.

▲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연합뉴스
영토분쟁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정적 유산 중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영토분쟁이다. 다우어 교수에 따르면 이 영토분쟁은 "무관심이나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냉전 전략의 일부로 영토 분쟁의 소지들을 조약 곳곳에 심어 놓았다.
예컨대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상을 위한 미국의 초기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명기돼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인 1949년 12월 미국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입장을 바꿨다. (6.25전쟁 직후인) 1950년 8월경 미국의 초안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 자체가 모두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조약은 한국의 독립을 애매하게 언급했으며, 일본의 영토 범위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조약이 체결되기 한 달 전인 1951년 8월,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한다고 통보했다. 2010년 이후 중국과 일본 간에 분쟁이 격화되고 있는 댜오위다오(센가쿠열도) 문제도 마찬가지다.
과거사 청산
또한 미흡한 과거사 청산도 동아시아의 화해를 가로막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맺음으로써 양국 관계를 정상화했다. 중국과 일본은 1972년 9월 29일의 공동성명을 통해 국교를 회복했으며, 1978년 8월 12일이 돼서야 평화 및 우호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군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동아시아 화해 및 평화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일본 점령으로 한 편의 일본과 다른 편의 중국 및 한국이 서로 멀어지게 된 것이 가져온 장기적 결과는 매우 유해한 것이었다. 2차 대전 후 유럽에서의 서독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 화해하거나 지역공동체를 이룩할 수 없었다. 평화 만들기가 지연됐던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침략, 그리고 착취가 낳은 쓰라린 상처와 뼈아픈 유산들은 곪아 터질 때까지 방치됐다.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대처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문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표면상 독립국가가 된 일본은 자신의 안보와 국가로서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태평양 너머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종속국가 일본
문제는 최근 들어 미중 간에 무역 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이 미국에 대한 '종속국가'라는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동아시아와 세계는 커다란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미-일-중 동아시아 3강 체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과 중국이 확실한 자주 국가인 반면 일본은 (미국에) "예속된 독립국가”라는 점이다. 냉전 초기 중국은 소련의 괴뢰로 인식된 반면 일본은 자유세계 미국의 동맹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중국은 분명한 자주 국가가 자리 잡은 반면 일본은 여전히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예속적 독립국가로 뒤처져 있다.
다우어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피후견국가인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미국이라는 '전쟁기계'의 부속품이 되는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이다. 미국이라는 전쟁기계는 특정 시점과 특정 지역에서 평화를 지키기는 했으나 이와는 반대로 자원을 낭비하고, 군비경쟁을 촉발시킨 것은 물론, '핵무기' 선제공격을 위협하고, 학살을 자행하며(민간인 살해나 고문 행위 등),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엄청난 파괴와 피해를 낳았다. 피후견국가 일본은 미국의 덜 군사적이기는 하지만 근시안적이고 소모적인 외교정책에 대해서도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야 했다. 또한 피후견국가라는 지위는 일본이 지정학적으로 유연한 정책을 택하거나, 대국적인 정책을 취할 모든 가능성을 가로막았다".
결국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획득하지 못한 일본은 미국의 군사주의 정책을 추종할 수밖에 없는 신세인 것이다.
■ 참고
1. 존 다우어, '동아시아의 불화, 그 근원은 미국'
2. The San Francisco System: Past, Present, Future in U.S.-Japan-China Relation, John W. Dower
매카시즘, 미 노동인구의 20%를 사상 검증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은 민주주의 수호가 명분이었다. 2차 대전 참전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결정적 계기였다. 진주만 기습은 1930년대 이후 강화돼온 미 국민의 고립주의, 반전 정서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렇다면 냉전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어떻게 확보했을까?
전쟁이 끝난 후 5년도 안 돼 새롭고도 기나긴 전쟁(냉전)에의 돌입을 미 국민이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2차 대전 이후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주적으로 돌리고 교전 상대였던 독일과 일본을 우방국으로 끌어들인다는, 외교정책의 180도 표변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대공황을 통해 자본주의의 폐해를 절감하고, 뉴딜을 통해 개혁과 정의를 추구하며, 반파시즘 전쟁에서 소련과의 연대를 경험했던 국내의 평화진보 세력은 트루먼 행정부의 반공군사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기에는 미 국민과 평화진보세력을 향한 대대적인 사상 탄압, 즉 빨갱이 사냥이 있었다. 매카시즘이 그것이다.
2차 대전은 미국 자본주의를 소생시켰다. 뉴딜도 해결하지 못한 대공황의 극복을 전쟁 특수가 해냈다. 그로부터 5년 후 미국은 영구 전쟁국가로 변모한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소련과의 무한 군비 경쟁, 군사 대결에 돌입한 것이다.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인구의 6%에 불과했지만 세계 경제의 50%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 자본주의가 유지되려면 미국의 잉여 생산을 소비할 시장 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즉 미국식 체제를 세계에 확산시켜야 했다.
하지만 전후 세계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열기가 분출하고 있었다. 윌슨이 주창한 민족 자결이 실현된다면 미국식 체제의 확산은 불가능할 터였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군사주의다. 미국은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해 행동의 자유를 확보했다. 즉 소련의 견제를 무시하고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둘째로 군사원조와 군사동맹을 통해 자본주의 핵심국가인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마지막으로 제3세계의 혁명운동을 제압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위해서는 군사주의가 불가피했으며, 군사주의를 위해서는 외부의 적이 필요했다. 그 적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소련이다. 미국은 소련을 모든 혁명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스탈린을 제2의 히틀러로 악마화 하면서 소련에 대한 군사적 봉쇄를 강화했다.
NSC-68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며 미국의 군비 강화를 정당화했다.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2차 대전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소련이, 2차 대전을 통해 더욱 강력해진 미국을 상대로 어떻게 군사 정복을 꾀한단 말인가. 소련이 미국의 주적으로 간택된 것은 미국의 군사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반공군사주의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한 두 가지 작업이 필요했다. 하나는 2차 대전의 동맹이었던 소련이 전쟁 이후에는 미국 안보의 최대 적이라는 점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930년대 이후 꾸준히 성장해온 국내 진보평화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뉴딜주의자들을 비롯해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반전평화주의자 등으로 구성된 이들 세력은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소련의 동조 세력, 즉 빨갱이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패권 확보를 위해서는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외부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하는 동시에 국내 진보 세력의 척결이 필요했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는 "정복국가는 적국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만큼이나 자국 신민들과도 전쟁을 한다"고 갈파했는데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상황이 바로 이러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트루먼 행정부가 외부의 적 소련과의 대결에 전념했다면 야당인 공화당은 국내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과 척결에 앞장섰다. 트럼프 행정부가 소련에 대한 군사적 봉쇄에 열중하는 동안 공화당은 국내 진보세력에 대한 빨갱이 사냥에 집중했다. 이른바 '매카시즘'이 그것이다. 특히 1933년 이후 10년 이상 권력을 잡지 못했던 공화당은 집권 민주당에 대해 '공산당에 유약하다'며 집요한 정치 공세를 퍼부었다. 중국 공산화가 빌미였다.
한국전쟁이 종결될 무렵 미국에서는 반공군사주의가 초당적 합의로 정착된다. 이에 따라 뉴딜에서 2차 대전까지 미국 정치를 주도했던 급진주의-자유주의 블록은 해체되고(급진주의의 몰락) 자유주의-보수주의 블록이 형성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민주당은 '공산당에 유약하다'는 치명적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고 이것이 훗날 베트남전의 실패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된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1947년에서 1950년대 말까지 미국에서는 대대적 사상 검증과 빨갱이 사냥이 벌어지면서 모든 국민의 마음을 전쟁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를 통해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의 안보를 지킨다'는 반공주의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실상은 다양한 세력이 서로 다른 동기에서 벌인 정치투쟁이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의 자유주의적 제도와 가치를 지키려 했다면, 공화당은 무엇보다 정권 탈환이 우선이었고 (그들의 눈에는 사회주의로 보였던) 뉴딜의 성과를 해체하려 했다. 또한 기업과 남부 인종주의자들은 노동운동과 인종차별철폐 운동을 공산주의로 몰아붙였다.
한 마디로 이 기간은 이념적 내전의 시기였다. 그 결과 대다수 미국인 마음속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깊게 뿌리내렸으며 미국의 진보평화세력은 크게 위축된다.
연방공무원 충성도 심사
매카시즘이란 적법한 증거 없이, 오로지 공산주의자라는 의심만으로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 행태를 말한다. 이 말은 1950-54년 빨갱이 사냥에 앞장섰던 공화당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시대는 이보다 훨씬 먼저 시작돼 훨씬 더 오래 지속됐다. 대략 1947년에서 1950년대 말까지다.
1947년 3월 트루먼 행정부가 모든 연방공무원에 대한 충성도 심사를 시행하고, 10월 미 하원이 영화계에 대한 공산주의자 색출에 나선 것이 그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연방공무원에서 시작된 빨갱이 사냥은 이후 영화, 방송, 언론, 대학, 노동 등 사회 각 분야로 확산돼 수 백 명이 투옥되고 수 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 때문에 한 연구자는 이 시기 미국인들은 '정신적 예비 구금 상태'에 있었다고 진단한다. 언제라도 사상 검증에 의해 빨갱이로 낙인찍혀 사회에서 추방될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 살았다는 것이다.
1947년 봄부터 미 행정부와 의회가 빨갱이 색출에 나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의회 권력의 교체, 다른 하나는 소련과의 냉전 본격화다. 우선 1946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했다. 1932년 이후 12년만의 의회 권력 탈환이다. 훗날 매카시즘의 선봉이 되는 리처드 닉슨과 조셉 매카시가 의회에 진출한 것도 바로 이 선거였다. 닉슨은 캘리포니아주에서, 매카시는 위스콘신주에서 반공을 앞세워 각각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한편 3월 12일 트루먼은 트루먼 독트린 발표를 통해 소련과의 냉전을 공식화한다. 이때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4억 달러의 원조를 의회에 요청했다. 그런데 연방정부의 돈줄은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쥐고 있었고, 공화당은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척결을 요구했다. 결국 트루먼은 외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위해 내부의 공산분자를 척결하자는 공화당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9일 후인 3월 21일 트루먼 대통령은 연방공무원에 대한 충성도 심사를 의무화 하는 내용의 대통령령 9835호를 발표했다. 연방정부에 침투한 공산당원 등 불충분자들을 색출해 제거한다는, 미 정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조사프로그램이었다. 구체적으로 연방공무원 중 "전체주의와 파시즘, 공산주의, 그리고 위헌적 수단으로 미국의 정부 형태를 바꾸려 하는" 조직들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동조자들까지 가려내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연방공무원에 대한 충성도 심사는 트루먼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2차 대전 기간 동안 공직심사위원회(CSC, Civil Service Commission)를 통해 나치당원 등 불순분자들을 가려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요구, 그리고 소련과의 냉전 수행을 위해 트루먼은 충성도 심사를 받아들였다.
충성도 심사, 즉 연방공무원에 대한 사상 검증은 연방수사국(FBI) 주도로 진행됐다. 연방정부의 각 기관들은 FBI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소속 공무원들을 심사했다. 이를 위해 FBI의 수사요원은 1946년 3559명에서 1952년 7029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문제는 충성도 심사가 매우 자의적이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해 FBI가 공산주의자, 또는 동조자로 규정하면 이를 피해 갈 수 없게 돼있었다. 존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은 보안을 이유로 정보제공자(밀고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불충분자로 찍힌 사람은 누가 자신을 신고했는지, 심지어 자신의 혐의가 뭔지도 알 수 없었다. 변호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던 셈이다.
1947년에서 1956년까지 10년간 500만 명 이상의 연방공무원이 충성도 심사를 받았으며 이 가운데 2700명이 '충성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해직됐고 1만 2000명이 사직했다. 여기에 공무원이 되려다 충성도 심사에서 탈락한 구직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밖에 수 만 명은 재심사 끝에 구제되기도 했다. 충성도 심사에서 탈락한 공무원은 공산주의자라는 낙인 속에 장기 실업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에도 불구하고 충성도 심사를 통해 소련의 간첩으로 적발된 연방공무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미 정부 내에 소련 첩자가 다수 침투해 있다'는 공화당의 주장이 허구였음을 드러낸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소련을 위한 미국인 첩자는 약 3백 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미국과 소련이 동맹국이었던 2차 대전 때 활동했다.
헐리우드 텐과 블랙리스트
한편 하원 비미국행위위원회(HUAC)는 1947년 10월 헐리우드 영화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1930년대 이래 진보적 이념 확산의 진원지로 영화계를 지목한 것이다. HUAC은 1938년 정부의 경제 개입, 노동권 신장 등 뉴딜 정책에 반대하는 의원들에 의해 출범한 위원회다. 이들은 뉴딜을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적이라고 보았다.
위원회는 당시 배우노조 위원장이었던 로널드 레이건과 월트 디즈니, 개리 쿠퍼 등 이른바 우호적 증인들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감독, 작가, 배우 등 10명을 추려내 워싱턴으로 소환했다. 이들이 바로 '헐리우드 텐'이다.
의원들은 의회 청문회에서 이들에게 "당신은 현재 미국공산당원이거나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상 검증에 해당된다. 더구나 공산당은 합법적 조직이었다. 행동을 통해 공공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한 단지 사상을 이유로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연방공무원들이 공산주의자, 또는 그 동조자라는 이유로 해직 당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공산주의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곧 정치적 자살과 다름없었다.
결국 헐리우드 텐은 언론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를 들어 묵비권을 행사했고, 이 때문에 의회모독죄로 기소돼(11월 24일, 346 대 17) 10명 전원이 6개월에서 1년의 실형을 살았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월 25일 에릭 존스턴 영화협회 회장은 헐리우드 텐의 영화계 퇴출과 함께 "공산주의자이거나 미국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조직의 구성원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블랙리스트의 시작이다. 이로 인해 약 3백 명의 영화계 인사가 퇴출됐다.
지난 2016년 개봉된 영화 <트럼보>는 헐리우드 텐 중 한 명인 작가 달톤 트럼보의 삶을 다룬다. 1939년 <자니, 총을 들다>(Johnny Got His Gun)란 반전 소설을 써내기도 했던 트럼보는 영화계 퇴출 이후 익명의 시나리오 작가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면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두 번이나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는다. <로마의 휴일>(1953년)과 <용감한 사람>(Brave one, 1956년)이 그것이다. 1947년 영화계에서 추방된 트럼보가 명예를 회복한 것은 1960년이다. 이 해 개봉된 <엑소더스>, <스파르타쿠스>에 비로소 자기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역사가 하워드 진은 빨갱이 사냥이 미국 사회에 가져온 변화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일반대중으로 하여금 공산당원을 두려워하고, 공산당에 대한 단호한 조치-국내에서는 투옥하고 국외에서는 군사행동-에 익숙해지게 만들려는 시도는 확실히 성공을 거뒀다. 문화 전반에 반공주의가 스며들었다.
1948-54년 <나는 공산당원과 결혼했다> <나는 FBI를 위한 공산당원이었다> 등 40편 이상의 반공영화가 제작됐고 잡지들은 '공산당원들은 어떻게 세력을 확대할까' '공산당원들이 당신의 아이를 노리고 있다' 등의 기사를 게재했다."
중요한 것은 충성도 심사와 블랙리스트가 연방정부와 영화계를 넘어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됐다는 점이다. 주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와 심지어 기업에서도 충성도 심사가 시행됐다.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한 민간 조사기관이 번창했으며 이들은 대상자들의 정치 성향과 사생활, 그리고 소속 단체를 조사했다. 심사 대상자는 변호사 없이, 자신을 고발한 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조사를 받아야 했다.
1958년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노동인구의 20%가 충성도 심사를 받았다. 1962년 미 정부의 인사 관련 책임자는 1950년대 초 충성도 심사를 통해 해직된 공무원 중 90%는 현재 기준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공산주의, 사회주의 단체와 개인을 고발하는 책자들이 넘쳐났다. 예컨대 1950년 6월 <카운터어택>이란 잡지는 <레드 채널 : 라디오, TV에 침투한 공산주의자에 관한 보고서>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배우, 감독, 작가, 제작자, 음악가, 방송인 등 151명이 적시됐다. 그리고 이들이 참여한 방송 프로그램에 광고를 주는 기업에 대해서는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1951년이 되면 주요 라디오, TV방송국은 자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의심스러운 인물의 방송 참여를 봉쇄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도 강화됐다. 1947년 트루먼의 거부권에도 불구하고 개정된 태프트하틀리법은 노조 간부에 대해 반공 선서(나는 공산당원이 아닙니다)를 의무화 했다. 거부할 경우 전국노동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했다. 그 결과 1930년대 크게 위세를 떨쳤던 산업별회의(CIO)에서 공산당 소속 노조 간부가 대거 축출됐고 노동운동은 크게 약화됐다.
또한 기업과 남부 인종주의자 등 보수 세력은 민권운동 등 정치적 반대세력을 공산주의로 공격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예컨대 전쟁 이후 수요 급감으로 불황에 허덕이던 항공산업은 군부, 정치인과 함께 외부의 군사 위협을 과장하면서 고용 창출, 방위력 증강, 이윤 확대를 추구했다. 그 결과 1948년 이후 항공기 주문은 크게 늘어난다.
남부의 인종주의자들은 흑백통합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인종분리적 생활양식을 지키려 했다. 한편 버지니아대학은 1947년 말 공산주의는 "버지니아대학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위협하는 치명적 적대세력"이라고 규정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은 미국 사회에서 보수파가 진보세력을 제압하는 만능의 부적이 된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 충성도 심사와 영화계 블랙리스트는 빨갱이 사냥의 서막에 불과했다.
1950년 2월 9일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국무부 내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암약하고 있다'는 폭탄선언을 한 이후 1954년 12월까지 약 5년간 미국 정치계는 빨갱이 사냥의 광기에 휘둘리게 된다.
매카시의 등장과 미국 정치의 암흑시대
미국의 대외정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입안되고 있으며 국무장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은 근거 없는 선동이었다. 초선 의원이었던 매카시는 자신의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 재료로 '공산주의자의 미 정부 침투'라는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언론의 반응은 매카시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그가 휠링을 떠나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네바다주 리노, 노스다코타주 휴런을 거쳐 2월 20일 워싱턴에 복귀할 때까지 공항에는 기자들이 몰려들어 명단 공개를 요구했다. 언론은 그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명단 공개 요구에 대해 매카시는 205명, 57명, 81명 등 수시로 말을 바꿨다. 그리고 워싱턴에 돌아와서는 국무부 내 선량하며 애국적인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국무부의 '철의 장벽'을 뚫고 마침내 어두운 비밀을 밝혀냈다고 떠벌였다. 이와 함께 1947년 시행된 국무부 충성도 심사 서류의 복사본 100장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충성도 심사 서류에는 조사 대상의 이름이 적시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명단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매카시는 이 서류의 내용을 왜곡, 날조, 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3월 8일 매카시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상원 특별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장을 맡은 민주당 소속 밀라드 타이딩스 상원의원은 "공청회 사흘이면 매카시가 상원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마거릿 체이스 스미스 등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 7명이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공직자에 대한 근거 없는 중상모략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한 트루먼 대통령은 "냉전이 수행되고 있는 지금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방은 실제 전쟁 시 우리 병사의 등 뒤에서 총질을 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7월 14일 타이딩스위원회는 최종 보고서를 통해 매카시가 제시한 명단의 인물들은 공산주의자도 동조자도 아니며 국무부는 효율적인 안보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이것으로 매카시가 초래한 빨갱이 광풍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중간선거직전인 9월 민주당 지배 의회가 매카란국내안보법을(법안을 발의한 패트릭 매카란 의원은 민주당 소속) 통과시킨 것이다. 이 법은 국내 안보 위기가 있을 경우 불순분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예비검속 할 수 있게 한 악법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법안이 "1798년의 선동금지법 이래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라며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공화당에 가세해 거부권을 무력화시켰다.
나아가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에서 28석, 상원에서 5석을 늘리는 대승을 거두었다(195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1948년 민주당에 빼앗긴 다수당 지위를 탈환하지는 못했다). 특히 매카시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결론 내렸던 타이딩스 의원은 공화당 후보에 패배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매카시가 직접 나서 타이딩스가 "공산주의자들을 보호하고" "반역자들을 엄호"했다고 비난한 때문이었다.
이로써 매카시는 언터처블이 되었다. 미국 유권자가 매카시의 손을 들어준 때문이다. 공화당 입장에서 매카시는 당의 총선 승리를 가져온 보배로운 존재가 됐다. 공화당 내에서는 누구도 매카시에 공개적으로 도전할 수 없게 됐다.
심지어 트루먼 대통령조차도 빨갱이 사냥의 광풍을 거스를 수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행정명령 10241호를 통해 공무원의 해직 조건을 넓혔다. 즉 안보 상 중요한 정부기관에서는 충성도 심사를 통과했더라도 안보 위험을 이유로 소속 공무원을 해고할 수 있게 했다. 예컨대 동성애자, 알콜중독자 등은 이 사실을 밝히겠다는 공산주의자의 협박에 못 이겨 간첩 행위를 할 수 있으므로 안보상 위험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너무 많은 조사대상자들이 재심을 통해 구제된다는 매카시의 불만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같은 달 대법원은 충성도 심사가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또한 의회도 공법 733 제정을 통해 안보 위험을 이유로 한 공무원 해직을 합법화 했다. 이로써 미국의 입법, 행정, 사법부 모두가 빨갱이 공포에 굴복한 셈이다.
매카시즘이 가능했던 세 가지 이유
매카시즘이란 정치적 광기를 만들어낸 원인은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1947년 이후 꾸준히 증대해온 국내외 공산주의에 대한 미 국민들의 공포, 둘째 1933년 이후 백악관을 장악하지 못한, 특히 1948년 대선에서 예상 밖의 패배를 당한 공화당의 무분별한 정치 공세, 마지막으로 유력 정치인의 발언이라면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전달하는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 행태 등이다.
사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마케팅은 민주당도 공화당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민주당은 소련이라는 외부의 위협을, 공화당 국내 공산주의의 위협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1그런데 1949년이 되면서 공산주의의 위협은 점점 더 현실적이 돼갔다. 8월 소련의 핵실험과 10월 중국의 공산화가 그것이다.
미국은 자신의 핵 독점이 10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불과 4년 만에 깨졌다. 동아시아 지배의 핵심 파트너로 지목했던 국민당 정권도 대륙에서 패퇴했다. 이로써 전후 미국의 세계 전략에 중대한 차질이 발생했다. 미국의 핵 패권이 무너지고 지역 파트너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일반 국민들은 핵무기의 공포를 실감하게 됐고 정책담당자들은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의 상실을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이 아무리 세계 최강국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외부 정세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공화당을 비롯한 미국의 보수 세력이 자신들의 소망과는 다른 세계정세 변화의 원인을 내부 배신자의 소행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이들은 소련이 예상보다 빨리 핵무기를 갖게 된 것도, 중국이 공산화된 것도 국내의 배신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50년 1월부터 내부 배신자 색출이 본격화 된다. (이때 민주당은 소련의 도전을 제압하고 미국의 세계 전략을 관철시키기 위한 청사진 마련에 들어간다. NSC-68이 그것이다.)
1950년 1월 25일 전 국무부 관리 앨저 히스의 유죄 확정이 결정적 전환점이다. 1948년 8월 간첩 혐의로 기소된 히스는 두 차례 재판 끝에 이날 위증죄로 5년 형을 선고받고(간첩죄는 공소 시효가 지남) 이후 44개월을 복역한다.
뉴딜주의자인 히스는 유엔 창설에 깊게 관여한 인물이다. 유엔 창립을 논의한 1944년 덤바튼 오크스 회의에서 집행 간사를 맡았고 1945년 4-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창립총회에서 사무총장을 맡았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 참여했으며 이전에는 코델 헐 국무장관의 극동담당 특별보좌관인 스탠리 혼벡의 보좌관으로 중국정책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간첩 혐의와 관련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은 공화당의 '내부 배신자 프레임'을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히스의 유죄 확정을 전후해 핵무기 비밀과 관련한 두 건의 간첩 행위가 발각됐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독일계 영국 물리학자 클라우스 훅스가 영국에서 체포됐고, 미국에서는 줄리어스와 에델 로젠버그 부부가 체포됐다. 훅스의 정보 유출은 소련의 핵개발을 2년 정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중대한 간첩 행위였다.
반면 평범한 시민이었던 로젠버그 부부의 경우는 평가가 엇갈린다. 남편인 줄리어스만이 간첩 행위에 가담했으며 그나마 소련이 이미 알고 있던 정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당시 아인슈타인과 러셀 등을 비롯해 세계적인 구명운동이 있었으나 이들 부부는 1953년 6월 사형을 당한다. 미국에서 평화 시 간첩죄로 사형 당한 최초의 민간인이다.
당시 담당 판사는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에 원자탄 비밀을 넘겨줌으로써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을 가능케 했고, 미군 5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으며, 앞으로 수 백 만 이상의 선량한 시민들이 그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이들의 행위는 "살인보다 더 나쁜 죄"라고 비난했다.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
또한 1950년 1월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Who Lost China?)' 논쟁이 본격화된다. 보수파 언론인 조셉 알솝이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발표한 같은 제목의 3부작 칼럼이 기폭제였다. 요지는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한 것은 미국 정부가 충분히 돕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국무부가 국민당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국민당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것으로 정확한 진단은 아니었다.
2차 대전 당시 중국에서 활동했던 존 페이튼 데이비스와 존 스튜어트 서비스 등 국무부 관리들은 연안의 중국 공산당과도 접촉했고 이미 1944년부터 공산당의 승리를 예견했다. 또한 민족주의 성향의 중국 공산당은 소련보다는 미국과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보고했다. 즉 마오쩌둥은 아시아의 티토가 될 수도 있으며 미국은 공산 중국과의 제휴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후 트루먼 행정부는 1946년 마셜 장군을 특사로 보내 국민당 주도의 국공 합작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1947년 초가 되면 사실상 중국을 포기한다. 국민당의 집권을 위해서는 수십만의 미 지상군을 파견해야 하는데 이는 미국의 국력으로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국무부 관리들의 중국 정세 분석은 정확했고, 중국의 공산화는 미국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중국 포기는 불가피했으며 사실 현명한 정책 판단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보수 세력은 트루먼 행정부와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들은 미국 정부가 얄타회의 때부터 소련에 지나치게 양보해 동유럽과 중국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러한 양보는 국무부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얄타밀약설'이다. 보수 세력의 이러한 음모론에는 공화당 등 보수 정치인들에 대한 중국국민당의 엄청난 뇌물 공세도 한몫을 했다. '차이나 로비(China Lobby)'가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매카시가 '국무부 내 공산주의자 침투'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이다. 미국의 핵 독점 상실이 내부 첩자의 간첩 행위 때문인 것으로 드러나고 전직 국무부 관리가 소련의 첩자였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내부 배신자에 대한 미국인들의 공포는 그야말로 극에 달했다. 중국의 상실도 내부 배신자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트루먼의 재선과 공화당의 반공 공세
여기에 1948년 대선 패배에 대한 공화당의 깊은 좌절감이 더해졌다. 이 선거는 미국 대선 역사상 최대 이변으로 꼽힌다. 공화당 후보 토마스 듀이의 승리가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트루먼이 간발의 역전승을 거두었다. 투표 4주일 전 미국의 저명한 정치 기자 50명 전원이 듀이의 승리를 예상했다. 모든 여론조사, 모든 정치평론가도 같은 결과를 예상했다. 선거 다음 날 '듀이 당선'이 보도된 신문이 있을 정도로 트루먼의 승리는 예상 밖이었다. 그만큼 공화당은 좌절도 컸다.
1948년 대선 때까지 공화당은 트루먼 행정부에 대한 직접적 공격은 삼갔다. 그러나 예상 밖의 패배를 당한 이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면 공격에 나선다. 16년간 백악관을 장악하지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백악관 탈환에 실패한 좌절감이 폭발한 것이다. 그것은 비이성적이고도 무책임한 정치 공세였다. 매카시가 그 포문을 연 셈이다.
공화당 하원의원 닉슨은 히스의 유죄가 확정된 데 대해 이는 "미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충격적 간첩 행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윌리엄 힐 하원의원은 "공산주의자들이 고위 공직에 대거 진출했음을 확인했다. 이는 확실하게 입증됐다"고 선언했다.
칼 문트 하원의원은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 "미국의 대외정책을 망치고 있는 친소 성향의 연방 공무원을 색출하라"고 요구했다. 해롤드 벨데 하원의원은 소련 첩자가 미국 전역을 휘젓고 다니고 있다고 주장했고 로버트 리치 하원의원은 애치슨 국무장관이 스탈린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시사했다.
공화당은 또한 1950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채택한 당 강령을 통해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면서 "공산주의 성향 공무원들에 대한 현 정부의 유약한 태도"를 비판했다.
"애치슨도 마셜도 빨갱이다"
심지어 매카시는 1951년 6월 14일 상원 연설에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인이자 공직자인 조지 마셜 국방장관까지 공격했다. '중국의 상실'은 마셜의 책임이며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음모로, 이 추악한 음모의 전모가 밝혀질 경우 그 주모자는 모든 선량한 시민의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극언을 퍼부었다. 마셜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육군 참모총장 출신으로 전후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또한 마셜플랜을 통해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이룩한 공로로 195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실 애치슨과 마셜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 전략을 완성했고, 이 때문에 냉전 시대의 '현인들(Wise men)'로 추앙받는다. 미국 패권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 광기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애치슨은 공산주의에 가장 강경했던 사람으로 압도적 군사력으로 소련을 봉쇄한다는 NSC-68은 그의 주도 아래 작성, 추진됐다. 봉쇄 전략의 주창자인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조지 케난이 냉전의 군사화에 반대하자 그를 해임한 것도 바로 애치슨이었다. 애치슨이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비판한 매카시에 대해 '원시인의 공격'이라고 경멸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1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공화당의 주장은 미 국민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1952년 공화당이 백악관을 장악한 이후에도 매카시즘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매카시즘이 무책임한 정치공세라는 사실을 알 만한 공화당 정치인들조차 이를 방조하고 묵인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공화당의 양심이라는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도 침묵을 지켰다. 매카시즘이 공화당에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1944년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존 브리커는 매카시를 "지뢰밭을 누비는 멧돼지"에 비유하면서 "조, 자네는 정말 진짜 개새끼일세. 하지만 추잡한 일을 위해선 개새끼가 필요할 때가 있지"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 공화당 정치인들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도 한몫을 했다. 언론은 유력 정치인의 발언이라는 이유로 매카시 등의 폭언을 아무런 검증 없이 그대로 받아 적기에 바빴다. 당시 미국 언론은 빨갱이 사냥의 나팔수였던 셈이다. 매카시의 전성시대는 미국 정치의 암흑시대였고 미국 언론의 치명적 오점이었다.
매카시의 몰락
매카시의 무차별 빨갱이 사냥에 대해 최초로 진지한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 것은 CBS의 방송인 에드워드 머로였다. 그는 1954년 3월 9일 방영된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에 대한 한 보고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매카시의 발언을 검증했다. 예컨대 민주당 집권 기간(1932-52년)은 '반역의 20년'이었고, 시민단체 미국민권연맹(ACLU)은 공산당의 전위조직이라는 매카시의 비난은 과연 근거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머로는 결론 부분에서 "매카시의 주요 업적은 대중으로 하여금 외부 공산주의의 위협과 내부 공산주의의 위협을 혼돈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견이 곧 불충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비난이 곧 그가 잘못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잘못에 대한 처벌은 증거와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하며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공포에 휘둘려 비이성의 시대로 떠밀려가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매카시가 빨갱이 사냥의 첫 포문을 연 후 무려 4년 1개월 만에 처음으로 언론의 진지한 대응이 나온 것이다. 2006년 개봉된 조지 클루니 감독의 <굿 나이트 앤 굿 럭>은 매카시즘에 대항한 언론인 머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매카시는 한 달 후 같은 프로그램에서 반론을 펼쳤으나 담당 기자를 소련 첩자로 몰아붙이는 등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게다가 이 해 봄부터 미 육군에 대해서까지 빨갱이 색출을 위한 청문회를 벌이면서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1954년 1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매카시 지지 50%, 반대 29%였으나 6월에는 지지 34%, 반대 45%로 역전됐다.
1954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을 탈환하면서 매카시는 이제 공화당의 보배가 아니라 짐이 됐다. 1954년 12월 2일 의회는 "상원의원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매카시에 대해 견책 처분을 내렸다(65대 22). 청문회에 출석한 군 장성을 모욕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반공주의가 견책의 이유는 아니었다. 즉 의회의 견책으로 매카시즘이 극복된 것은 아니었다.
매카시는 1957년 5월 2일 과도한 음주에 의한 간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1950년 2월부터 1954년 12월까지 5년 가까이 빨갱이 사냥을 무기로 미국 정치를 뒤흔들었던 매카시는 공화당과 대중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쓸쓸히 퇴장했다.
매카시즘, 미 대외정책을 동결시키다
"미국도 소련처럼 정치적 숙청을 감행"
매카시즘의 부정적 유산은 넓고도 오래 지속됐다. 1950년 2월 그의 첫 폭로 이후 매카란국내안보법, 이민및국적법(1952년), 공산주의통제법(1954년) 등 악법들이 잇달아 제정됐고, 의회에는 기존 하원 비미국행위위원회에 더해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1950년)와 상원 영구조사소위원회(53-54년 매카시 위원장) 등이 생겨나 빨갱이 색출에 나섰다. 1949-54년 의회는 모두 109회의 공산주의 조사 활동을 벌였으며, 비미국행위위원회는 1970년대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953년 4월 행정명령 10450을 통해 공무원 충성도 심사를 다시 한 번 강화했다. 특히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미국인 직원에 대해서도 충성도 심사를 벌여 국제기구의 자율성을 훼손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편 FBI는 1951-55년 이른바 '책임 프로그램'을 통해 수많은 교사, 변호사 등을 축출했다.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관한 익명의 문서(blind memoranda)를 HUAC 등 의회와 주정부 등 지방정부에 제공해 해고토록 한 것인데, 이는 정상적인 법 절차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FBI의 정보를 행정부 이외의 기관과 공유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FBI는 당시 유일하게 충성도 심사의 피해자를 변호하던 전국변호사협회(National Lawyers Guild)의 사무실을 14차례나(1947-51년) 불법 침입해 이들의 변론 전략을 빼내기도 했다.
매카시즘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상 검증과 탄압을 일상화시켰다. 미국의 독립언론인 I. F. 스톤은 1956년 4월 "소련보다는 덜 가혹하지만 우리 역시 '숙청'을 감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직까지는 공산주의자들만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수 천 명의 시민들이 2등 시민으로 강등되고, 모욕을 당했으며,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내부 망명객이 됐다. 생계와 명성을 잃었고, 대중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이는 스탈린이 정치적 반대파를 다루는 방식이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매카시즘에 중독됐다"
또한 매카시즘은 미국의 대외정책, 특히 아시아정책을 마비시켰다. '중국의 상실'을 이유로 민주당과 국무부가 맹공격을 받은 결과 아시아 및 중국에 대한 합리적이고 유연한 정책을 펼 수 없게 된 것이다.
베트남전쟁 패배의 원인을 심층 취재한 언론인 데이비드 할버스탐은 "1950년대 미국의 아시아정책은 매카시즘이라는 독에 중독"됐다면서 "매카시즘은 미국의 중국 및 아시아정책을 동결"시켰다고 지적했다. 1960년대 케네디 및 존슨 행정부가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베트남에 군사 개입한 것은 '제2의 중국 상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 관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최고의 엘리트들>, The Best and The Brightist)
미국의 공직 기관 중 매카시즘의 최대 피해자는 민주당과 국무부였다. '중국 상실'을 빌미로 한 공화당의 정치 공세로 민주당은 공산주의에 유약한 정권, 국무부는 공산주의자가 활개 치는 조직으로 낙인 찍혔다. 따라서 민주당으로서는 중국에 이어 또 다른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곧 정치적 자살을 의미했다.
케네디, 존슨이 베트남 군사 개입을 계속한 이유
매카시즘 이후 미국 정부는 자신이 내세운 반공이라는 수사의 포로가 됐다. 국민들을 냉전에 동원하기 위해 공산주의의 위협을 극단적으로 과장한 결과 정부 스스로도 반공주의의 포로가 된 것이다. 이제 어떤 정부도 '제2의 중국 상실'을 초래해선 안 됐다. 이런 경직된 태도가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직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베트남을 잃는다는 것은 곧 정권을 잃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한때 애치슨은 베트남전쟁을 프랑스의 어리석은 식민전쟁이라고 폄하했지만 매카시즘 이후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으로 용납될 수 없었다. 이제 베트남전쟁은 반식민 전쟁이 아니라 반공 전쟁이어야 했다. 한국전쟁 이후 호치민은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소련과 중국의 지령을 받는 공산주의자로 비쳐졌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각 민족의 해방투쟁이 아니라 소련의 음모에 의한 세계 공산화의 전초전이었다. 나아가 중국 공산혁명의 세계적 팽창이었다. (1953년 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연설)

▲ 1965년 미군 헬기가 남베트남의 베트공 기지를 공격하고 있다.ⓒAP=연합뉴스
사실 '중국의 상실'이란 생각 자체가 대단히 미국 중심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이 말은 '중국은 미국 것'이란 생각의 반영이다. 윌슨 대통령 이후 민족 자결을 대외 정책의 원칙으로 천명해온 미국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자기기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어떤 외국이 어느 일방을 지원했던가. 미국이 남북전쟁을 통해 국가를 통합했듯이 중국 역시 내전을 통해 자기 민족의 미래를 결정했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 내전에서는 미국의 대대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패배했다는 점이다. 즉 외세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민족 자결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국공내전에 지상군 개입을 삼간 것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군사개입을 위한 미 국민의 동의를 얻어내기도 어려웠고, 산업화가 뒤쳐진 중국은 전략적 가치가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외교관은 소신 대신 복종, 학자들은 비판 대신 침묵
그런데 공화당은 중국의 공산화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외교관들을 비난하고 숙청했다. 마치 이들이 중국 공산화를 주도한 주범인 것처럼. 숙청 당한 외교관들에게 죄가 있다면 중국의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했고 정직하게 보고했다는 것뿐이다. 이런 양심적이고 유능한 외교관들을 처벌함으로써 이후 국무부에서는 아시아 및 중국 정책에 대해 소신 있게 발언하는 외교관이 사라졌다. 미국의 아시아정책도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할버스탐은 "합리성을 내세웠던 케네디 행정부가 미국의 대외정책 중 가장 불합리한 중국 및 아시아정책을 고수한 것은 아이러니"라고 지적한다. 매카시즘이 만들어낸 반공이라는 굴레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상대한다는 합리적 접근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들라이 스티븐슨, 체스터 보울스 등 측근들이 중국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케네디는 그저 웃으며 "맞아요, 바보 같은 정책이죠. 하지만 재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도 중국 문제는 사적으로만 논의돼야 했다. 중국 문제를 고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카시와 같은) 원시인들을 분노케 할 것이므로.
이러한 사정은 학계도 마찬가지였다. 매카시즘에 따른 사상 통제 때문에 아시아 전공 학자들은 정부 정책을 비판할 수 없었다. 1950년 출범한 미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SISS)는 국공내전 당시 중국정책에 관한 미 정부 고문 역할을 맡았던 오웬 라티모어를 불러내 무려 1년이나 조사를 벌였다. 그가 '중국의 상실'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팻 매카란 소위 위원장은 라티모어에 대해 "소련 음모의 의도적이고도 세련된 실행분자"라는 극언을 퍼부었다. 라티모어는 1952년 위증죄로 기소됐고 1955년이 돼서야 무죄가 확정됐다. 그가 활동했던 태평양관계연구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는 해체됐다.
1960년 로스 코엔은 <미국 정치 속의 차이나 로비(The China Lobby in American Politics)>라는 책을 통해 매카시즘 이후 처음으로 미 중국정책의 문제점을 짚었다. 장개석 정권의 로비로 미국의 아시아정책이 왜곡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민당과 미 CIA가 중국 본토 회복을 위한 비밀공작 자금 마련을 위해 마약 거래까지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책은 발간 직후 10년 이상 사실상의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차이나 로비의 압력으로 출판사가 4000부를 자진 회수해 파기했고 800부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오히려 미국의 반공세력은 1963년 <붉은 차이나 로비>(Red China Lobby)라는 책으로 역공을 펼쳤다. 중국 공산당의 로비로 미 국무부가 국민당을 배신한 것이 중국 공산화의 원인이며 마약 거래는 공산당 소행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1970년대 초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코엔의 책이 정상적으로 유통된 것은 닉슨의 방중 이후인 1974년이다. 그 정도로 미국 내에서 중국 정책에 대한 비판은 철저하게 봉쇄되고 억압됐다.
당연히 미국의 아시아 학자들은 1960년대 말까지 정부에 순종적이었다. 1960년대 말 이후 미국의 각 대학에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자발적 강연회(teach-in)가 열렸을 때도 아시아 전공 학자들은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미국의 아시아 학자들이 베트남전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일도 없었다. 아시아학에 관한 한 학문과 양심의 자유가 억압됐던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학 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68년 '관심 있는 아시아 학자 위원회(Committee of Concerned Asian Scholar)'가 결성된 이후다.
냉전 이후 적어도 20년 이상 미국에서 아시아 문제에 관한 담론과 정책은 매카시즘이 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매카시즘이 초래한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강고했다. 공산 중국과의 역사적 화해를 이룬 인물이 빨갱이 사냥의 선봉장이었던 닉슨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닉슨 외에는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이 아니라 후버리즘이다!
사실 매카시즘의 주역은 매카시가 아니었다. 제1의 주역은 존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이었다. 이른바 불충분자에 대한 모든 정보는 FBI가 제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중요한 인물은 리처드 닉슨이다. 후버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정치 거물 앨저 히스의 유죄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국내 정치 투쟁에서 공화당은 민주당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 다음 등장한 인물이 매카시다. 그는 '지뢰밭을 누비는 멧돼지'처럼 미국 정계와 사회를 들쑤셔 '빨갱이 공포(Red Scare)'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미국의 반공 체제를 확립한 후버
미국에는 두 차례 빨갱이 공포의 시대가 있었다. 첫째는 1차 대전 이후(1917-1920년), 둘째는 2차 대전 이후(1947년-1950년대 말)다. 1890년대 이후 꾸준히 성장하던 미국의 진보평화세력은 미국의 1차 대전 참전과 함께 정부의 탄압으로 크게 위축된다. 대공황에서 2차 대전에 이르는 동안 재기에 성공했으나 2차 대전 이후 매카시즘에 의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다.
두 차례 빨갱이 공포의 시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후버(1895-1972년)다. 그는 미국의 1차 대전 참전 직후인 1917년 22살의 나이로 법무부에 들어간 이래 죽을 때까지 55년간 반공의 최전선에 섰으며 48년간은 FBI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미국적 생활방식'에 반대하는 모든 인물은 공산주의자라는 신념 아래 빨갱이 색출을 위해 불법 감청과 가택 침입, 불법 구금과 체포를 서슴지 않았다. 특히 2차 대전 이후에는 대통령에게도 맞서 공산주의자 척결에 앞장섰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철저한 반공국가로, 외부의 적을 상정해야만 존립할 수 있는 배타적 국가로 만든 최대의 공로자라 할 수 있다.
<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의 역사가이자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팀 와이너의 저서
미국 최초의 비밀 정보기관, FBI
우선 와이너는 후버에 대해 '미국 정보기관의 창설자', '현대 사찰 국가(surveillance state)의 설계자', '여론 조작의 달인'이라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FBI는 사후에 범죄자를 잡아 처벌하는 사법 집행기관이 아니라 사전에 테러분자와 첩자를 색출하기 위한 비밀 정보기관이다. 독일 게슈타포나 일본의 특별고등계와 같은, 미국 최초의 비밀경찰(secret police)이다. 대상자의 행동 이전에 사상이 문제가 되며, 사상 파악을 위해서는 불법 감청과 수색, 불법 체포와 구금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FBI의 전신인 수사국(Bureau of Investigation)은 1908년 7월 26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창설됐다. 전임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가 1901년 9월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된 이후 대통령에 오른 그는 외국 출신의 과격분자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의회의 반대를 우회해 법무부 산하에 수사국을 창설했다. 19세기 말 이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에서 들어온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안보를 해친다는 판단에서였다.
연방수사국(FBI)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35년, 금주령 이후 각지에서 창궐한 조직범죄 소탕에 나섰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FBI가 각 주의 경계를 넘어선 연방범죄를 다루는 수사기관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FBI의 조직범죄 수사는 극히 예외적이었다. 이 같은 오해는 금주령 당시의 활약상이 널리 홍보된 탓이다.
제1차 빨갱이 공포
후버는 조지워싱턴대 졸업 직후 1917년 7월 26일 법무부에 들어가 전쟁비상국 소속으로 외국인 적성분자 색출과 테러공격 사전 탐지의 임무를 맡았다. 미국의 1차 대전 참전 3개월 후, 국내 반전평화세력에 대한 탄압과 해외 첩자 및 테러분자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한창인 때였다.
미국의 참전 결정 당시 수사국은 미국 내 거주 독일인 중 정치적 성향이 의심스러운 인물 1400명의 명단을 갖고 있었는데, 이 중 98명은 즉시 체포됐고 1172명은 미국 안보의 위협 인물로 분류됐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구금한다는 뜻이다. 후버의 첫 사회활동이자 죽을 때까지 필생의 과업은 바로 정치 사찰이었다.
입사 후 그는 밤에도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는 부지런함과 영민함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23살 때인 1918년 수용소에 예비 구금된 독일인 6200명을 감시하고, 45만 명을 사찰하는 책임자가 됐다. 1919년 8월 1일 신설된 급진국(Radical Division)의 국장이 됐고, 1921년에는 2인자, 1924년에는 최고 책임자가 된다. 그의 나이 29살 때다.
그가 24살의 나이에 초대 급진국 국장이 된 1919년 8월은 빨갱이 공포가 최고조에 이른 때였다. 그 과정을 살펴본다.
미국은 1917년 4월 참전 결정과 함께 방첩법을 제정해 반전세력에 재갈을 물린다. 방첩법에 따르면 미국 안보에 불리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에 반대하는 의견을 "발설, 집필, 출판, 발행"하는 것도 범죄로 처벌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방첩법에 의해 처벌 받은 1055명 중 간첩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이 전쟁 반대가 이유였다. 즉 행동이 아닌 사상에 대한 처벌이며, 이는 미국 헌법의 최고 이상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반전 연설을 이유로 10년 형을 선고 받은 사회당 당수 유진 뎁스는 "나는 평화 시에나 전쟁 시에나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고 믿는다. (중략) 방첩법이 유지된다면 미국의 헌법은 사망한 것"이라고 갈파했다.
대규모 빨갱이 사냥의 시작
1차 대전 중인 1918년 수사국은 두 차례 일제 단속을 벌인다. 하나는 조합원 10만 명을 거느린 전투적 노동조합 조직인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에 대한 것. 이들은 미국의 참전에 대해 전쟁 반대 결의안으로 맞섰다. 수사국은 전국 24개 도시의 IWW 사무실과 간부들의 가택을 무차별 침입해 수백 명을 체포했다. 이중 노조 지도자 165명이 방첩법으로 기소돼 최대 20년 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IWW 지도자들이 적성국 독일의 자금 지원을 받는 하수인으로 "연방정부는 이들 반역 음모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상은 전쟁을 빌미로 급진 노동운동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918년 9월 3일부터 사흘간 징병기피자를 대거 단속한 것이다. 뉴욕에서만 5만-6만 5000명이 체포됐으나 이 가운데 기피자 또는 탈영병으로 판명된 것은 1500명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영장 없는 마구잡이 체포 구금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나 법무장관과 수사국장이 사임하게 된다. FBI의 무차별 체포 관행은 이때 이미 시작된 것이다.
한편 1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윌슨 대통령은 러시아에 미군 1만 4천명을 파병해 러시아혁명에 대한 군사개입에 나선다. 그는 또 측근들도 모르게 레닌 등 러시아혁명 지도자들이 독일의 자금 지원을 받는 하수인이라는 내용의 가짜 문서를 공표케 한다.
러시아 백군 측이 위조한 가짜 문서를 대통령이 공표케 함으로써 미국의 빨갱이 공포는 증폭된다.
종전 2개월 후인 1919년 1월에는 리 오버맨 상원의원 주도로 공산주의 위협에 관한 청문회가 열린다. 월가 변호사 출신의 자칭 공산주의 전문가인 한 증인(아치볼드 스티븐슨)은 공산주의는 "현재 미국이 직면한 최대의 위협"이라고 주장하면서 역사가 찰스 비어드를 비롯해 사회운동가, 교수, 목사 등 수 백 명을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
해결책이 뭐냐는 오버맨 상원의원의 질문에 스티븐슨은 "외국 출신의 선동가는 추방돼야 하며 혁명을 옹호하는 미국 시민은 처벌돼야 한다"고 답했다. 이로써 대대적 빨갱이 색출의 단초가 열린 셈이다. 또한 청문회에서는 법무부(수사국)가 확보한 위험분자 명단과 의회가 각 부처로부터 보고 받은 명단을 교환하기로 한다. 이것이 이후 후버의 최대 무기인 개인정보파일의 기반이 된다.
와이너는 1919년 1월의 이 청문회가 미국 사회에 빨갱이 공포를 증폭시켰으며 30여 년 후의 매카시 청문회를 예감케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당시 24살의 애송이 수사관이었던 후버는 30년 후 FBI 수장으로서 대대적인 빨갱이 공포를 기획, 연출한다.
1차 대전 직후 미국은 격렬한 사회 갈등에 휩싸인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주요 원인이었다. 오버맨 청문회가 시작되던 1919년 1월 21일 시애틀 조선소 노동자 3만 5000명이 작업장을 떠난 것을 시작으로 파업은 탄광, 철강, 섬유, 전화 교환수, 경찰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확산됐다. 연방 군대를 동원해 진압해야 할 정도였다.
그 원인은 미국 내부에 있었다. 1차 대전이 끝나면서 전시 생산에 동원됐던 노동자 900만 명이 졸지에 실직 위기에 몰렸다. 생활비는 전쟁 기간 2배 오른 반면 파병 병사 400만 명이 귀환하고 있었고 노동자 400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노동과 자본이 이처럼 첨예하게 대립한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가 측은 사회 혼란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자 했다. 외국에서 들어온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등의 음모 때문이라고 믿었다.
근거는 4월 말에서 6월 초에 걸쳐 적발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요인 암살 음모 였다. 4월 29일 무정부주의자추방법(Anarchist Exclusion Act: 1903년 제정, 약식 조사만으로 해외 과격분자 추방) 개악에 앞장선 전직 상원의원의 집에서 폭탄이 터진 것을 계기로 모두 36건의 우편물 폭탄 테러 음모가 발각됐다. 대상에는 A. 미첼 파머 법무장관을 비롯해 올리버 웬델 홈스 대법원장, 다수의 의원, 록펠러와 모건, 뉴욕 시장과 경찰청장 등 정계와 사법부, 경제계의 거물들이 포함돼 있었다. 6월 2일에는 파머 장관 자택에 대한 자살폭탄 테러가 있었다.
파머 레이드와 양심세력의 반격
이 사건을 계기로 파머 법무장관은 8월 1일 급진국을 창설하고 후버를 책임자에 앉혀 대대적 빨갱이 색출 작전에 돌입한다. 후버는 군 정보기관, 국무부, 백악관 경호실, 이민국, 우체국, 경찰, 사설탐정, 반공 민간기구 등 모든 관련 기관에서 과격분자들의 정보를 취합한다. 일종의 중앙정보기구의 역할을 한 것이다. 심지어 외국 대사관에 침입해 암호 전문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3개월 후 약 6만 명의 명단을 확보한다.
9월 7일 시카고에서 미국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후버의 첩자 5명 이상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을 통해 대회 내용을 소상히 파악한 후버는 다음 날 의회에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폭력에 의한 미국 정부 전복"이라고 보고했다. 후버는 공산당은 물론 무정부주의 조직, 노동조합 등에 프락치를 심어두고 내부 사정을 손바닥 보듯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 무렵 전국에서 파업 물결이 일었다. 9월 9일 보스턴에서는 경찰 인력의 4분의 3이 노조 결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고(당시 매사추세츠 주지사 캘빈 쿨리지는 파업 경찰 1117명 전원을 해고하는 초강수로 파업을 분쇄했다. 그는 1920년 부통령에 이어 1923년 하딩 대통령 사후 대통령에 오른다), 9월 10일에는 철강 노동자 27만 5000명 이상이 8시간 노동과 단체교섭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러시아혁명 2주년인 11월 7일, 드디어 후버가 칼을 빼들었다. 러시아계 이민노동자들로 구성된 러시아노동자연맹(Union of Russian Worker)에 대한 일제 단속을 나선 것이다. 이 조직이 첫 번째 타격 대상이 된 것은 미국공산당의 주력부대였기 때문이다. 18개 도시에서 1,182명을 체포했으나 이중 국외 추방된 사람은 199명이었다(12월 21일). 천 명 가까운 사람이 무고하게 체포된 셈이다. 국외 추방된 사람 중에는 저명한 무정부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 여성주의자였던 엠마 골드만이 있다.
후버에게 공산주의자는 미국을 파괴하기 위한 범죄자 집단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 나라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무정부와 불법, 부도덕의 상태로 몰아갈 것"이라는 게 후버가 일생동안 간직한 신념이었다.
두 달 후인 1920년 1월 2일부터 7일까지 엿새에 걸쳐 전국에서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이 벌어져 6000-1만 명이 공산주의 용의자로 체포됐다. 악명 높은 파머 레이드(Palmer Raid)다. 법무장관 미첼 파머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실제로 이 일제 단속의 계획과 실행은 전적으로 후버가 담당했다.
그러나 파머 레이드로 실제 처벌 받은 사람은 800명이 채 안 됐다. 외국인 591명이 추방됐고 미국인 178명이 방첩법 또는 선동금지법 유죄 판결을 받았다. 특히 미국의 양심세력은 일제 단속의 불법성 즉 영장 없는 수색, 영장 없는 체포였음을 밝혀냈다. 후버의 빨갱이 사냥이 역풍을 맞게 된 것이다.
1월 말, 필라델피아의 수석 연방 검사 프랜시스 케인은 윌슨 대통령에 공개서한을 보내고 사임했다. 그는 "현재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습격을 강력히 반대"한다면서 "대다수 개인들에 대한 무차별 습격은 현명치 못하며 불의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애틀에서는 연방 이민국 관리가 워싱턴의 상급자에게 수사국이 극소수 용의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선량한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한다고 보고했다.
한편 보스턴에서는 연방 판사 조지 앤더슨이 후버의 빨갱이 사냥에 대한 공개적 도전을 촉구했다. 그는 "이른바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전쟁'이 끝난 이후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안전해지지 못한 것 같다"면서 "지난 2년간 친독일분자의 음모라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냈던 인물과 언론들이 이제 와서 이른바 '공산주의 테러'를 선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버드대의 젊은 법학 교수 펠릭스 프랑크푸르터가 구속자들의 변호사로 나서 일제 단속의 적법성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앤더슨 판사는 구속자 13명을 보석으로 석방했다. 그는 수사국의 행위는 불법이고 위헌이며 연방정부가 시민들 간의 "신뢰와 연대를 파괴하고 증오를 부추기는" "스파이 시스템"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했다. 법무부는 항소를 포기했다. 불법성을 자인한 셈이다.
한편 4월 10일 노동부 차관보 루이스 포스트는 법무부가 추방을 요구한 외국인 구속자 1400명 중 1000명에 대한 추방 승인을 거부했다. 즉 체포된 4명 중 3명은 무고한 피해자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후버의 빨갱이 사냥이 불법적이고 무리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다.
원래 파머가 후버의 빨갱이 사냥을 승인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을 휩쓸었던 빨갱이 공포에 편승해 공산주의자들을 일망타진한다면 1920년 대선에서 자신이 민주당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양심세력의 역공으로 일제 단속의 불법성이 드러나면서 파머는 정치적 곤경에 몰렸다.
4월 29일, 수세에 몰린 파머는 메이데이에 요인 암살, 주요 시설 파괴 등 대규모 테러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후버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5월 1일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자 '메이데이 봉기'는 "파머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조롱을 듣게 됐다.
후버의 다음 대응은 포스트 차관보를 중상 모략하는 것이었다. 그는 포스트가 좌파 세력들과 한패이며 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라는 정보를 의원들에게 퍼뜨려 포스트를 견제하려 했다. 자신이 가진 정보를 이용해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는 후버의 국내 정치 사찰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5월 7일 의회는 청문회를 열어 포스트 차관보의 증언을 들었다. 그는 구속자 중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 범인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100명에 1명꼴도 안 된다,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영장 없는 체포와 강요된 자백에 의한 처벌은 미국식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고 증언했다. 10시간 증언 끝에 하원은 포스트의 결정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한편 시민세력은 '법무부의 불법적 관행에 관해 미국 국민들에게 드리는 보고서'를 통해 영장 없는 일제 단속은 미국 헌법의 가장 고귀한 원칙에 대한 침해라고 비판했다.
의회는 파머의 반론을 듣기로 했다. 파머는 6월 1일 오전 10시부터 다음 날 오후까지 24시간 이상 잠시도 쉬지 않고 후버가 작성한 성명을 읽어 내려갔다. 후버가 꼬박 사흘을 걸려 작성한 3만 단어 분량의 성명은 미국이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원들을 설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로써 파머의 대통령 꿈은 무산됐다. 빨갱이 공포도 끝이 났다. 그러나 후버는 파머 레이드가 자신의 소행임을 부인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공 성전에 대한 자신의 소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차 빨갱이 공포 이후
후버는 1920년 9월 급진국을 일반정보국(General Intelligence Division)으로 개칭한다. 급진분자에 대한 사찰에서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사찰하겠다는 의미다. 그는 "범죄에 대한 사후 처벌 방식으로는 현재의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법률은 미국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약하다. 오직 비밀정보만이 좌익의 위협을 감지해내며 이들의 공격으로부터 미국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후버는 자본과 노동의 싸움을 반공투쟁의 핵심으로 봤다.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과격분자들의 행동은 언제나 노동 상황과 연관돼 있으며" "공산주의를 노동 상황과 분리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파머 레이드를 계기로 1차 빨갱이 공포는 끝났지만 후버의 경력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21년 수사국의 2인자로, 1924년 5월에는 드디어 수사국장으로 승진한다. 당시 그는 할란 피스크 스톤 법무장관에게 "수사국은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를 문제 삼지 않을 것"이며 "오직 행동, 미국 법률에 위배되는 행동에 대해서만" 수사할 것이란 서약과 함께 수사국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이 서약은 공허한 약속이었다. 이후 48년간 수사국장으로 재임하면서 사상 검증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1차 빨갱이 공포는 2차 빨갱이 공포의 기반을 마련했다. 과격분자들에 대한 기본 정보가 확보됐고 정보 수집 방법 등이 이때 확립됐다. 1차 빨갱이 사냥은 노자 대립 등 국내 사회 갈등의 원인을 외국 출신의 과격분자에서 찾았고, 수사국이 이들을 직접 체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 불법성이 드러나면서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1차 빨갱이 공포의 원인이 국내의 노자 대립이었다면 2차 빨갱이 공포는 소련의 핵실험 성공, 동유럽과 중국의 공산화 등 미국에 불리한 외부 정세의 변화가 원인이었다. 반공주의자들은 국내의 배신자들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믿었고 이들을 척결하려 했다.
이번에 후버가 택한 전략은 FBI는 배후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야당과 언론으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까지 소련의 첩자로 지목했고 닉슨을 내세워 이를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략은 대성공이었다.
미국의 광풍 "유엔 설립자도 IMF 기획자도 빨갱이다"
1947년 3월 26일 존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이 하원 비미국행위위원회(HUAC)에 출석해 공개 증언을 했다. 연방공무원 충성도 심사가 시작된 지 닷새가 지난 후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 해 11월 중간선거에서 14년 만에 다수당이 된 공화당과 후버의 압력에 못 이겨 충성도 심사를 수용했다.
FBI 국장의 의회 공개 증언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대한 노림수가 있었다. 정치인과 언론을 이용해 빨갱이 사냥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1920년의 파머 레이드에서 드러난 것처럼 FBI가 직접 빨갱이를 잡아들이는 방식은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FBI가 확보한 공산주의자 관련 정보는 미국 사법제도의 검증을 통과할 수 없었다.
FBI 정보의 대부분은 사법 집행에는 사용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전향 공산주의자와 프락치 등 밀고자(정보원)의 증언은 신뢰할 수 없었고, 영장 없는 감청으로 얻은 정보는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될 수 없었으며, 소련 측 암호 전문을 해독해 얻어낸 정보(베노나 프로젝트)는 공개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후버는 정치인과 언론을 앞세워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 여론 재판을 통한 공산주의 척결이다. 팀 와이너가 후버를 '여론 조작의 달인'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후버의 전략에 적극 동조한 정치인이 바로 닉슨과 매카시다. 이들은 FBI가 제공한 정보를 발판으로 이후 10여 년간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이념적, 정치적 내전의 선봉장이 된다.
팀 와이너에 따르면 이날을 기해 후버는 백악관과 결별했다. 그의 의회 증언은 트루먼 행정부에 대한 모반의 시작이었다. 이에 앞서 후버는 해리 덱스터 화이트, 앨저 히스 등 일부 민주당 고위 관리를 소련의 첩자로 지목했으나 트루먼은 그의 경고를 무시했다. 후버의 모반은 이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후버는 대통령의 지시도 자신의 뜻과 다를 때는 무시했다.
3월 26일 후버 증언의 요지는 국내 공산주의의 위협이 심각한 반면 트루먼 행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HUAC의 반공 투쟁에 지지를 보내며 FBI와 HUAC는 한 팀이라고 선언했다. FBI가 비밀리에 반역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 HUAC은 이를 바탕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세력을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날 후버와 닉슨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34살의 초선 하원의원 닉슨은 후버에게 국내 공산주의의 위협이 가장 큰 분야가 어딘지 물었고, 후버는 대학, 방송, 영화 등을 꼽으며 특히 정부 내 침투한 공산주의자가 큰 문제라고 답했다. 닉슨의 열의에 깊은 인상을 받은 후버는 청문회가 끝난 후 측근에게 "저 젊은이는 누구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겠는데"라고 말했다.
캘리포니아 시골 출신의 닉슨은 10년 전 로스쿨을 졸업하고 FBI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바 있다. 그는 하원의원이 된 직후인 1947년 2월 볼티모어의 반공 가톨릭 신부 존 크로닌을 통해 FBI와 연을 맺었다. FBI 요원은 그에게 미국 공산주의의 실태와 소련의 간첩 행위에 대한 FBI 수사 내용과 방식을 일러주었다.
크로닌 신부는 노동운동에 침투해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온 인물로 1946년 중간선거에 앞서 '미국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침투'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 상공회의소는 이 보고서 40만 부를 전국에 배포했고, 보고서가 일으킨 반공 열기는 공화당의 총선 승리에 일조했다.
트루먼과 후버의 정치적 내전
트루먼이 대통령에 오른 지 열흘 후인 1945년 4월 23일, 후버는 트루먼을 처음 만났다. 후버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 공산주의와의 수 십 년에 걸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세계를 아우르는 새 정보기관의 수장이 돼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후버의 FBI는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막강해졌다. 1940년 이후 인력은 5배, 예산은 3배가 늘었으며 인력과 예산의 80%를 안보 부문에 투입했다. 1939년 6월 26일에는 FBI와 육군 및 해군 정보기관 등이 부처간정보위원회를 결성했고 후버가 영구 위원장을 맡았다.
이어 2차 대전 발발 직후인 9월 6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앞으로 FBI가 "간첩 행위와 관련된 수사를 전담하게 될 것"이며 경찰, 검찰 등 모든 사법 관리들은 "간첩, 테러, 전복 행위 등과 관련해 취득한 모든 정보를" FBI에 넘기라고 명령했다. 즉 후버가 사실상 미 정보기관들의 수장이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패권 확보가 확실해지면서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정보기관의 필요성은 분명해졌다. 후버는 FBI가 그 역할을 맡길 원했다. 반면 윌리엄 도노반, 알렌 덜레스 등 동부 금융가들은 전시 중 창설한 전략정보국(OSS)을 중앙정보국(CIA)으로 개편하려 했다. 하지만 후버가 보기에 OSS는 햇병아리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FBI는 이미 1940년 7월부터 남미 국가들을 대상으로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었다(Special Intelligence Service : SIS). 나머지 지역은 육군과 해군 정보기관이 담당했다.
이러한 후버의 꿈은 트루먼과의 첫 만남에서 깨졌다. 트루먼은 대놓고 후버를 냉대했다. 자신의 측근인 해리 본을 후버에게 소개하면서 앞으로 필요한 사항은 본과 상의하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트루먼은 FBI를 혐오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5월 4일 트루먼은 예산담당 책임자 해롤드 스미스에게 후버가 "일종의 게슈타포를 만들려 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5월 12일 일기에는 "우리에겐 게슈타포나 비밀경찰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FBI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사생활을 염탐하고 대놓고 협박하기도 한다. (중략) 이런 짓은 반드시 멈춰야 한다"고 적었다.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앨저 히스
1945년 11월 27일 후버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는 대통령과 법무, 국무장관에게 보낸 비밀 보고서('미국에서의 소련의 간첩활동')에서 재무부 관리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전 국무부 관리 앨저 히스를 소련의 첩자로 적시했다.
화이트는 국제통화기금(IMF)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는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영국 케인스의 안을 물리치고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켰다. 히스는 유엔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즉 전후 미국의 세계 전략을 위한 정치, 경제 분야 국제기구를 만든 인물들이다. 이 두 사람이 소련의 첩자라는 애기는 미국의 세계 전략이 소련에 놀아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두 사람은 소련과 우호적인 편이었다. 화이트는 소련에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미래를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히스에 대해 그의 공평함과 공정함에 탄복했다고 말했다. 열렬한 뉴딜주의자인 히스는 1934년 나이위원회의 수사관으로 일하면서 1차 대전 당시 군수물자생산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금융가 버나드 바루크와 군수기업 듀퐁의 경영진을 조사했다. 이 때문에 보수 세력에 미운 털이 박혔다. 후버 또한 리버럴과 뉴딜주의자를 증오했다.
2차 대전 동안 미국과 소련은 동맹국이었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민감한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 간첩 행위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반역자가 미국의 중요 대외정책을 결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후버의 보고서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트루먼으로서는 보고서 내용을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여서도 안 됐을 것이다. 트루먼은 보고서를 무시했고, 1946년 1월 23일 화이트를 IMF의 미국 측 이사로 지명했다.
이때부터 후버는 트루먼을 적대시했다. 그가 확보한, 국내 정치인들에 대한 방대한 정치 정보가 그의 최대 무기였다. 대통령인 트루먼도 감히 공개적으로 도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946년 5월 29일 후버는 트루먼과 법무장관에게 두 번째 비밀 보고서를 제출했다. 미 정부 내 상당 수 고위공무원이 간첩 행위에 연루됐다면서 이번에는 딘 애치슨 국무 차관과 존 매클로이 전 전쟁부 차관보를 명시했다. 보고서를 받은 프랜시스 비들 법무장관은 자신도 FBI의 감시 대상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훗날 공화당 의원들이 애치슨을 공산주의로 공격한 것은 나름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후버가 제공한 정보가 근원이었다.
애치슨은 물론이고 매클로이를 소련 첩자로 지목한 것은 그야말로 편집증의 발로다. 매클로이는 '의장 각하(Mr. Chairman)'으로 불리며 냉전 시대 "현인들(Wise Men)'의 맏형 역할을 했던 동부 기득권(The Establishment) 출신의 국제주의자다. 한 마디로 이 시기는 후버의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리는 이념적 내전의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1946년 6월 트루먼은 FBI 수사 요원 600명을 삭감했다. 전체 요원의 7분의 1이다. 증원을 요구하는 후버의 요구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후버의 요구가 거부된 것도, 요원이 삭감된 것도 FBI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이제 후버에게는 미국 정보기관 장악과 장기간의 냉전 수행이라는 두 가지 목표 외에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트루먼과의 정치 투쟁이 그것이다. 결국 후버는 공화당 의원들과 손을 잡는다.
닉슨, 히스의 유죄를 이끌어내다
1947년 3월 연방공무원 충성도 심사로 시작된 빨갱이 사냥은 1948년 8월 앨저 히스와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하원 비미국행위위원회(HUAC)에 소환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민주당 고위 관리에 대한 빨갱이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앞서 후버는 1930년대 소련 첩자로 활동했다 전향한 미국인 엘리자베스 벤틀리와 휘태커 체임버스를 각각 7월 31일과 8월 3일에 증인으로 출석시켜 증언을 들었다. 8월 13일 청문회에 출석한 화이트는 증언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사흘 뒤 두 번째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에 앞서 화이트는 1947년 6월 19일 미 정부가 자신에 대한 공식 수사를 시작하자 바로 당일 IMF를 사직했다. 화이트의 가족들은 현재까지 그의 간첩 행위를 부인하지만 미 정부의 공식 견해는 그가 소련 첩자였다는 것이다.
한편 8월 5일 첫 출석한 앨저 히스는 간첩 행위를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두 번의 재판 끝에 결국 1950년 1월 21일 배심원에 의해 유죄가 평결됐고 1월 25일 위증죄로 5년형이 확정된다. 그의 간첩 행위는 1938년 이전의 일로 공소 시효가 지났다. 히스 역시 죽을 때까지 간첩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미 정부의 공식 견해는 그가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육군 방첩사령관 출신으로 당시 트루먼의 안보담당 보좌관이었던 스티븐 스핀간은 "후버는 제 멋대로 일을 했다. 트루먼을 비롯해 누구로부터도 명령을 받지 않았다. 하물며 법무장관 정도야"라고 말했다.
히스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닉슨이다. 닉슨은 이미 5개월 전부터 FBI의 관련 자료를 비밀리에 넘겨받아(이는 연방범죄에 해당된다) 사건을 면밀히 연구했으며, 히스에 대한 조사 소위 위원장을 자원해 히스의 유죄를 이끌어냈다. 공산주의자로 공직에 앉아 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부도덕할지언정 죄가 되지 않지만,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것은 처벌 대상이라는 게 닉슨이 주목한 지점이었다.
히스의 유죄 확정은 매카시 빨갱이 사냥의 도화선이 됐고, 닉슨에게는 출세 길을 열어 주었다. 닉슨은 그해 중간선거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2년 후에는 부통령이 된 다. 정계 입문 불과 6년만이다. 닉슨은 부통령이 된 후 후버와 매일 두 차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정보를 공급받았다고 한다.
반면 민주당에게는 치명적 악재가 됐다. 히스의 재판에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데이비스, 1952년 대선 후보 아들라이 스티븐슨, 대법관 펠릭스 프랑크푸르터 등 쟁쟁한 인물들이 증인으로 나와 그를 옹호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히스의 유죄 평결 다음 날 애치슨 국무장관이 "절대로 히스에게 등을 돌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억울함과 결백함의 호소였겠지만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이후 수많은 국무부 외교관들이 숙청을 당했기 때문이다.
트루먼과 후버의 정치적 내전은 히스의 유죄 확정으로 끝이 났다. 후버의 압승이었다. 이후 1950년대 말까지 미국의 반공주의는 최고조에 달했으며 후버는 국가 안보에서 민권운동에 이르기까지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됐다.
한국전쟁과 후버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후버의 편집증적 우려가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미국인들은 북한의 남침을 소련에 의한 세계 정복의 시작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FBI의 권한은 대폭 확대됐다.
7월 24일 트루먼은 FBI가 미국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 수집, 사보타지, 전복 행위 및 기타 관련 사안들을" 조사할 권한을 갖는다고 공표했다. FBI는 2차 대전 때보다 더 큰 권한을 갖게 됐다.
8월 24일 후버는 트루먼에 특급 비밀 보고서를 제출했다. 조만간 소련이 미국에 핵 기습 공격을 가할 것이며 지하에서 잠복해 있는 수만 명의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그 선봉에 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전향한 미국 공산당원과 20년간 암약했던 소련 첩자 등 10명의 매우 믿을 만한 소식통의 정보를 취합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전쟁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소련 지도자들은 세계 정복을 위해서 무슨 수단이든 쓸 것"이며 "미소 간 분쟁이 발생하면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봉기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를 파괴하려 할 것"이다. 군대에 침투해 반란을 선동하고, 흑인들을 선동해 인종 폭동을 일으키며, 파업과 태업으로 경제를 마비시키고, TV와 라디오를 장악해 흑색선전을 퍼뜨릴 것이다. 한 정보원에 따르면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미국의 주요 산업 시설을 모두 조사"했고 "전쟁이 일어날 경우 전략적 지점들을 장악하거나 파괴할 것"이다.
또한 "소련은 자살 폭탄 테러를 포함해 미국에 대한 핵 공격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원폭을 장착한 비행기의 자살 폭격, 소규모 폭탄을 휴대한 대규모 낙하산 부대의 자살 테러가 이어질 것이다. 이미 러시아에서는 수백만의 10대 어린이들이 낙하산 부대 요원으로 훈련 받고 있다.
원폭과 수폭 부품들을 몰래 미국에 들여와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특공대원들이 원격조종에 의해 폭발시킬 것이며 "전쟁이 일어나면 2만 명의 골수 미국 공산당원들이 소련의 지령에 따라 공격에 나설 것"이다.
후버가 이 보고서를 제출한 날은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원폭 비밀 유출죄로 기소된 지 딱 1주일 뒤였다. 즉 미 국민들에게 내부 배신자가 소련이 공격에 호응할 것이란 공포를 심어주기에 적절한 시점이었다.
핵 카미가제, 하늘에서 침투하는 10대 낙하산 부대 등 최악의 전쟁 시나리오는 미국 정부를 겁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버 또한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 실제로 벌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30년 이상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주시해온 최고전문가, FBI 국장의 예언은 쉽사리 무시될 수 없었다.
게다가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이 패퇴하면서 이러한 예언은 현실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12월 9일 트루먼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마치 3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리는 대처해야 하며 그렇게 할 것이다."
반공의 내면화
미국의 반공주의는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FBI의 영향력이 거의 모든 정부 부처에 미쳤다. FBI 요원이 백악관, 국방부, 합참, 국가안보국(NSA), 중앙정보국(CIA), 국무부, 의회, 그리고 6개 해외 미 대사관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육군 정보부대 등에 상주했다.
이제 후버는 국가안보회의(NSC) 정규 멤버로서 국가 안보에서 민권운동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거의 모든 정책과 전략을 수립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백악관에게 후버의 보고서는 소련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문서가 됐다.
미국의 반공주의는 195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한다. 대법원이 무분별한 사상 검증을 제한하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예컨대 1955년 대법원은 연방공무원 충성도 심사는 안보와 직접 관련된 부서에만 적용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1957년에는 하원 비미국행위 위원회 등 의회 조사위원회의 권한을 제한하는 판결을 내렸다. 나아가 1959년에는 익명의 증언은 증거 능력이 없으며, 또한 조사 대상자는 자신을 고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와 대질심문의 기회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매카시즘은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은 반공 의식과 소련에 대한 공포심을 남겼다. 1950년대 미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압도적 최강국이었지만 국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미 국민의 반공 의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앨저 히스를 유죄로 만든 닉슨은 1960년 대선에서 패배한 데 1962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그 직후인 1962년 11월 11일 앨저 히스는 ABC방송 한 프로그램에 '닉슨의 정치적 사망선고(The Political Obituary of Richard M. Nixon)'란 주제의 코너에 출연했다.
아마도 닉슨의 두 차례 정치적 패배가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히스는 이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유죄로 몰아간 주범으로 후버와 담당 판사, 배심원들, 그리고 특히 닉슨을 꼽았다. 그러나 방송 직후 시청자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광고가 끊어지면서 이 프로그램은 다음 해 6월 문을 닫아야 했다.
1% 독트린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에서는 '1% 독트린'이란 말이 유행했다. 미국의 안보에 1%의 위험성만 있어도 실제 위협인 것처럼 초기에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체니 부통령이 주장했다고 해서 '체니 독트린'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원칙은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 때 처음 공식적으로 천명됐다.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은 '실제 핵 버섯구름을 보기 전에'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을 차단해야 한다며 이라크 침공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라크 핵개발은 거짓임이 드러났고 대중동지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아직까지 미국은 그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최악의 시나리오에 바탕을 둔 미국의 과잉 군사대응이 대중동지역의 혼란을 불러온 것이다.
아마도 '1% 독트린'의 창시자는 체니가 아니라 후버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1차 대전 이후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극단적으로 과장해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은 해외에서는 과도한 군사 개입, 국내에서는 불법적인 시민 사찰과 탄압을 일삼았다. 실제로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래 미국은 이란에서 베트남, 쿠바에 이르기까지 해외 도처에 군사 개입과 비밀공작을 일삼으면서 세계를 혼란에 몰아넣는다.
'위기를 팝니다' 미국의 '죽음 행상꾼'들
1950년, 야당인 공화당이 국내 빨갱이 사냥에 골몰해 있는 동안 집권 민주당은 대외 패권의 확보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1950년 4월 작성된 NSC-68은 핵전력 및 재래식 군사력의 대폭 강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두 달 후 발발한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대대적 재무장에 돌입할 수 있었고 1952년 말이 되면 영구 전쟁국가로 탈바꿈한다. 국방 예산은 1950년 이전에 비해 3-4배 늘었고 핵무기와 재래식 군사력이 대폭 증강됐다. 특히 2백만 명 가까운 상비군 체제가 정착되면서 수 십 만 명의 미군이 서유럽과 동아시아 등 세계 도처에 상시 주둔하게 됐다.
상비군 체제와 미군의 해외 상시 주둔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건국 이래 미국은 상비군 보유를 극력 꺼렸다. 군대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미군의 해외 주둔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상비군 제도와 미군의 해외 주둔은 건국 이래 미국의 역사적 전통에서 벗어나는, 매우 엄청난 변화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중요한 계기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충격만으로 전쟁국가를 완성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득시켜야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NSC-68은 기획 단계부터,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이견과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고립주의 성향의 공화당은 결사 반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하버드대 총장을 비롯한 일단의 지식인들이 대국민 설득 작업에 나섰다. 이들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하며 이는 미국의 안보에 대한 '현존하는 위험(Present Danger)'임을 각인시켰다. 즉 소련의 군사력이 미국인의 생명, 자유,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음을,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해냈다. 그 결과 1952년 말에는 '반공군사주의(Containment Militarism)'가 확고한 국민적 합의로 정착된다.
훗날 역사가들은 1950년 당시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인의 의식 속에서 소련은 세계를 군사 정복할 의도와 능력을 가진 위험한 집단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서유럽 등 자유세계의 대대적 재무장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형성될 수 있었다. 월터 리프먼이 말한 '동의의 조작(Manufacturing Consent)'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작업을 해낸 조직이 바로 '현존위험위원회(Committee on the Present Danger: CPD)'다.
대학 총장과 고위 언론인, 전직 관료와 기업가 등으로 구성된 민간 로비 조직인 현존위험위원회는 1950년 12월부터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내세워 미국 및 서유럽의 재무장을 적극 옹호했다. 이를 통해 야당인 공화당의 반대를 무력화하고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미국의 군사주의를 영속화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이후에도 미국에서는 중요한 고비마다 새로운 '현존위험위원회'가 나타나 평화국가로의 전환을 가로막아 왔다. 1976년 11월에는 두 번째 CPD가 결성돼 닉슨과 키신저가 시작한 데탕트를 좌초시켰다. 2004년에는 과격 이슬람세력에 대항하는 세 번째 CPD가, 급기야 올해 3월에는 중국을 주적으로 삼는 네 번째 CPD가 출범해 활동 중이다.
CPD는 2차 대전 이후 미 대외정책의 패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가상의 적, 또는 과장된 외부의 위협을 이유로 내부를 통합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그 요체는 군사주의다. 이 때문에 제리 샌더스라는 연구자는 CPD를 '위기를 파는 행상꾼들(Peddlers of Crisis)'이라고 부른다. 위기를 내세워 자신들의 목표, 즉 군사주의를 관철시킨다는 뜻이다. 그가 1983년에 펴낸 같은 이름의 책을 바탕으로 첫 번째 CPD 활동을 살펴본다.
한국전쟁 위기 속 출범한 1차 현존위험위원회
첫 번째 CPD는 1950년 12월 12일 공식 출범했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미국이 큰 위기에 몰렸을 때다. 이에 앞서 11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탄 사용을 시사했다가 영국의 반대로 물러선 바 있다.
이날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대 총장과 트레이시 부어리스 전 육군부 차관, 과학계의 거물 바네바 부시 등 CPD 창립 멤버 세 명은 워싱턴 윌라드호텔에서 창립 성명을 통해 "소련의 침략 음모"야말로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소련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재무장이 시급하며, 미국은 보다 많은 병력과 물자와 원조를 유럽에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미국의 18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병역 의무를 지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이날 뉴욕타임스는 애치슨 국무장관이 나토 장관회의 참석을 위해 곧 브뤼셀을 방문할 것이라면서 "미국 정부는" 북한의 남침이 핵심지역인 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돌리려는 소련의 술책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다음 날인 12월 13일 CPD는 국방부에서 오프더레코드 브리핑을 듣고 국방부 관리들과 안보문제에 대해 비공식적인 논의를 했다. 이날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 지도자들을 불러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이 높아졌다면서 국방비 증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2월 14일 트루먼 대통령은 51회계연도의 네 번째 추가 국방예산(NSC-68/4)을 요청하는 한편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날 애치슨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군부가 원하는 규모의 병력을 모두 확보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유럽 우방국들이 원하는 원조를 모두 해준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기들을 모두 생산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총동원 체제를 갖춘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며 상황의 엄중함을 강조했다.
12월 15일 트루먼은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국가,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중대한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이 위험은 소련 지배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지만 실제로는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들도 역시 중대한 위험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현존하는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군 병력을 350만으로 늘려야(CPD가 요구한 수치) 하고, 무기 생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며, 서유럽 동맹국들과 군대를 통합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2월 20일 트루먼은 당시 콜럼비아대 총장이던 아이젠하워를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에 앞서 유럽을 방문한 애치슨이 서유럽 국가들과 함께 유럽 통합 방위력 구성에 합의한 데 따른 조치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국방예산(1951 회계연도)은 당초 135억 달러에서 482억 달러로 3.6배 늘어난다. 그런데 늘어난 국방예산의 대부분은 한국전쟁보다는 유럽 재무장에 사용됐다. 일례로 1950년 후반 서유럽에 대한 군사물자 원조는 전년 대비 2배로 늘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이 위기에 빠졌지만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 우선 순위는 미국 및 유럽의 재무장과 유럽에 대한 대대적 군사지원, 그리고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트루먼 행정부에게 한국전쟁은 대대적 재무장의 빌미였을 뿐이다.
CPD의 활동 목표 역시 한국전쟁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 그리고 서유럽에 대한 대규모 미군 병력 파견과 군사 원조가 목표였다. CPD에는 하버드대를 비롯해 프린스턴, 브라운, 버클리, 미시간대 등 10여 개 명문 대학의 총장들이 중심적 역할을 했다.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대 총장이 CPD 의장이었고, 미국대학협회 회장이자 브라운대 총장인 헨리 리스턴은 집행위원이었다.
미국 최고 교육기관의 수장들이 당면한 한국전쟁을 제쳐놓고 미국과 서유럽 군사동맹 결성을 적극 설득하러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총장들이 대국민 설득에 최적임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 자체의 수행보다는 미국 및 서유럽의 대대적 재무장과 나토 결성을 더 중요시했다. 후자야말로 미국 세계 전략의 핵심이었다. 재무장에는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투입돼야 한다. 하지만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미 국민에게 더 많은 피와 땀을 제공하라고 설득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공화당의 매카시즘 공세로 국무부는 빨갱이들의 소굴로 낙인 찍혔고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당에 유약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결국 NSC-68의 실천을 위해서는 저명한 민간 인사들에 의한 대국민 설득 작업이 필요했고 하버드의 코난트 등 명문 대학의 총장들이 앞장을 선 CPD가 그 역할을 해낸 것이다.
1951년 4월 미군 10만 파병이 의회의 승인을 받고, 10월에는 기존 경제 원조(마셜 플랜)를 군사 원조로 대체하는 상호안보법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이러한 목표는 이뤄진다. 이로써 1949년 4월 출범했으나 서류상 조직에 불과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명실상부한 군사동맹으로, 그리고 미국의 반공군사주의는 완성된다. CPD 창립에 이르는 과정을 되돌아본다.
유럽의 중도주의를 봉쇄하라
이미 1949년 초부터 트루먼 행정부에게는 '현존하는 위험'이 있었다. 그것은 소련의 군사력이 아니었다. 서유럽의 이탈 가능성이었다. 1948년부터 시행된 마셜 플랜에도 불구하고 경제 재건이 늦어지면서 서유럽이 중도주의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서유럽의 이탈을 막기 위한 대책이 대대적 재무장이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의 군사력을 '현존하는 위험'으로 대중에게 제시한 것이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가장 중요한 대외정책 문서로 불리는 NSC-68은 딘 애치슨과 폴 니츠의 작품이다. 애치슨은 1949년 1월 21일 국무장관으로 승진했고, 1950년 1월 조지 케난 대신 니츠를 국무부 정책기획단장에 기용했다. 니츠는 NSC-68을 실제 작성했다. 둘 다 월가의 국제변호사 출신으로 대기업의 이익이 곧 미국의 국익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미 대외정책에서 군사력의 역할을 중시했다.
그런데 1949년 초까지 서유럽의 경제 부흥이 지지부진하면서 서유럽의 향배가 이들의 근심거리였다. 중도주의로 기울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서유럽으로서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웃, 소련과 대결하기보다는 화해하고 교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게다가 공화당과 국민 대다수는 퍼주기라며 마셜 플랜을 반대했다.
서유럽은 전후 세계 자본주의 복원의 핵심 파트너였다. 서유럽이 이탈한다면 미국의 세계 전략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유럽을 미국의 세력권에 묶어놓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그 핵심이 군사주의였다.
즉 대대적 재무장을 통해 첫째, 소련의 견제를 무력화 시킨다. 다시 말해 미국의 행동의 자유를 확보한다. 애치슨은 이를 '힘의 우위(Position of Strength)'에 바탕을 둔 협상이라고 표현했는데, 실상은 미국식 일방주의다.
둘째, 군사 원조의 형태로 서유럽에 대한 경제 지원을 강화한다. 경제 지원에 대한 미국 여론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한 꼼수다. 이를 위해서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크게 부풀릴 필요가 있다.
셋째, 군사동맹을 통해 서유럽을 미국 세력권 안에 묶어 놓는다. 즉 미국의 봉쇄정책은 소련이라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을 막는 것과 함께 서유럽이라는 내부의 이탈을 막는다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봉쇄정책은 이중 봉쇄(Dual Containment)라고도 불린다.
미국 및 서유럽의 재무장과 군사동맹 결성이라는 책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미국의 안보에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점을 미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그래야 대대적 재무장에 필요한 자금과 인력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NSC-68의 핵심 논지다. 애치슨은 이미 1949년 1월부터 이러한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국무장관 취임 직후 국방 예산에 대해 "턱없이 부족하다...미국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에 비해 너무나 적다"고 불평했다. 대공황 이후 2차 대전까지 20년간 계속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연간 국방예산 상한을 135억 달러로 대폭 낮춘 데 대한 불만이었다.
애치슨의 불평에 동조한 이가 폴 니츠다. 그는 1949년 봄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성을 가지려면 국방예산이 300억-400억 달러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군사력을 증강해야만 소련을 겁 줄 수 있고 서유럽을 미국 편에 묶어둘 수 있다는 얘기다. 소련의 첫 핵실험 6개월 전, NSC-68 작성 1년 전이다. 흔히 미국의 재무장(NSC-68)은 소련 핵실험 및 중국 공산화에 대한 대응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이전, 1949년 초부터 검토가 시작된 것이다.
니츠는 1949년 여름부터 국방예산에 대한 제약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과 소련 경제의 비교 연구를 통해 미국은 대규모 군비 증강을 감당할 충분한 경제력이 있으며, 오히려 군비 투자가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른바 군사케인스주의다.
1949년 9월 소련의 핵실험 사실이 밝혀지고 10월 중국 공산화가 확정되면서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갑자기 증폭된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월 30일 수소탄 개발을 결정하는 한편 국무부와 국방부 합동으로 대외 정세의 급변에 대한 대응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NSC-68이다.
조지 케난 vs. 딘 애치슨
이로써 미국의 대외정책은 조지 케난의 봉쇄(Containment)에서 애치슨-니츠의 봉쇄군사주의(Containment Militarism)로 바뀐다. 두 정책의 결정적 차이는 군사력의 역할에 있다. 케난은 군사력을 대외정책의 보조적 요소로 본 반면 애치슨-니츠는 군사력, 특히 핵무기를 결정적 요소로 파악했다.
봉쇄정책의 창시자 케난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가 말하고자 한 봉쇄는 소련의 정치적 위협에 대한 정치적 봉쇄였지, 군사적 위협에 대한 군사적 봉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서방에 대한 소련의 위협은 정치, 경제, 외교적 차원'이며 '설사 군사적 위협이 있다 해도 그것은 특정한 분쟁지역의 제한적인 군사적 도전으로, 미국의 기존 군사력으로 대처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케난은 핵무기 사용에 반대했다. 1950년 2월 17일 자 메모에서 그는 "미국의 전쟁 계획에서 현재의 핵무기 의존을 즉각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련이 재래식 군사력으로 서유럽을 침공하면 자동적으로 핵무기로 대응한다는 핵 인계철선(nuclear tripwire) 전략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는 재래식 군사 공격에 대한 미국의 핵 반격은 외교적 참사로 이어질 것으로 봤다. 핵무기의 파괴력으로 적을 굴복시키기보다는 국제여론의 반발을 살 것이라는 얘기다. 나아가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한 상황에서도 중국의 공산화나 소련의 동유럽 장악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핵무기의 정치, 외교적 효용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애치슨은 소련의 핵실험에 대해 수소탄 개발로 맞서는 등 핵무기의 가치를 높게 봤다. 니츠 역시 NSC-68을 통해 "즉각 사용할 수 있는 총 군사력의 우위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봉쇄'정책은-이는 계산된 점진적 강제라고 할 수 있다-허풍에 불과할 뿐"이라면서 특히 전략 핵무기에서의 우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애치슨-니츠의 반공군사주의 노선은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도, 트루먼 행정부 내의 다수 의견도 아니었다. 국무부 최고의 소련 전문가인 케난과 찰스 볼렌은 NSC-68의 대대적 재무장 계획에 대해 그야말로 경악했다고 한다. 우선 소련에게는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능력 자체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은 1958년 이전까지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조차 갖지 못했다.
애치슨은 1950년 1월 케난을 정책기획단장에서 해임한 데 이어 남미로 장기 출장을 보냈고 볼렌은 프랑스의 미국 대사관으로 유배를 보냈다. NSC-68을 작성하는 동안(2월 중순-3월 말) 이들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도 국방비를 일거에 3-4배 증액하는 데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특히 재정 보수주의자인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결사 반대였다. 즉 트루먼 행정부 내에서도 대규모 재무장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야당인 공화당, 그리고 일반 국민을 설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매우 거대한 선전 장치'
NSC-68 추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대국민 설득이었다. 즉 국민들에게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각인시켜 대규모 재무장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예컨대 1950년 2월 17일 국무-국방부 정책검토위원회에서 백악관 경제자문회의 의장 레온 케이설링과 전 전쟁부 차관보이자 금융가인 로버트 로벳은 '국방 예산 500억 달러 돌파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미국 경제력은 국방예산 500억 달러를 감당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문제는 국방비를 단숨에 3-4배 인상하는 데 대한 대중들의 저항을 어떻게 무마하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매카시즘 열풍으로 양당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트루먼 행정부가 대국민 설득에 나서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3월 10일 같은 회의에서 록펠러재단의 체스터 바나드 의장은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국가적 노력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정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렵다"면서 "신망 있는 민간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그러한 인물로 아이젠하워(당시 콜럼비아대 총장), 제임스 코난트(하버드대 총장), 로버트 스프롤(버클리대 총장) 등을 꼽았다.
이어 3월 16일 회의에서 로버트 로벳은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국내외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매우 거대한 선전 장치를 갖춰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망 있는 민간 인사들의 활동이 대통령 임명에 의해 추진되는 모양새는 좋지 않다"고 경고했다. 대중들이 보기에 (그러한 선전 작업에) 정부가 개입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NSC-68 추진세력들은 계획 작성 단계부터 대국민 설득 방안을 치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사실 미국 정부는 냉전 초기부터 공포 마케팅을 적극 활용했다. 1947년 3월 냉전을 공식화한 트루먼 독트린 발표 당시 아서 반덴버그 상원의원은 "대통령이 직접 의회에 가셔서 온 나라에 확 겁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국무차관이었던 애치슨은 보통사람들에게 대외정책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단순, 과격, 무식한 방법으로 요점을 강조해야" 하며 "진실보다도 더 선명하게" 핵심을 부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을 위해서는 소련의 위협을 실제보다 과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NSC-68에 대해서도 이 계획의 목표는 정부 고위지도자들의 집단지성에 강력한 충격을 가해 대통령이 (대규모 재무장에 관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물론 이 결단이 실행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의 군사력을 의도적으로 과장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애치슨은 1950년 초 정부 내 최고 소련 전문가인 조지 케난과 찰스 볼렌을 워싱턴에서 쫓아내면서 NSC-68 작성을 관철시켰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대통령을 설득해 즉각 군사 개입을 결정했고, 7월에는 전쟁 수행을 이유로 106억 달러 규모의 추가 국방 예산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60억 달러가 유럽에 대한 군사 원조였다.
재정 보수주의자인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국방비 증액, 특히 유럽에 대한 군사원조에는 결사 반대였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9월 12일 존슨 국방장관을 전격 해임하고 전 국무장관 조지 마셜을 그 자리에 앉혔다. 특히 주목할 것은 국방 부장관에 로버트 로벳을 기용했다는 점이다.
로벳은 NSC-68 작성에 관여하면서 재무장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는 '매우 거대한 선전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국방장관 존슨의 해임과 마셜, 로벳의 기용은 애치슨-니츠 라인의 승리였다. 즉 트루먼 행정부 내의 재무장 반대 세력이 제거된 것이다.
존슨 국방장관 경질 사흘 후인 9월 15일, 애치슨은 뉴욕에서 서유럽 외무장관들과 만나 미국의 대규모 군사 원조 및 미국-서유럽 군사동맹 결성에 관한 미국의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냈다. 이제 다음 과제는 미국 국민들에게 대대적 재무장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부어리스와 코난트
CPD 출범은 1950년 8월 두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트레이시 부어리스 전 육군부 차관과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대 총장이다. 부어리스는 NSC-68 찬성파로 서유럽에 대한 경제지원과 군사원조를 통합하자는 '부어리스 리포트'를 작성한 인물이다. 마셜 플랜에 대한 공화당의 거센 반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안보를 전면에 내세우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서유럽으로 하여금 군사물자를 생산케 하고 이를 미국이 사들이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리포트로 존슨 국방장관의 노여움을 사 차관직을 사퇴했다.
1950년 8월 부어리스는 코난트를 만나 안보 상황의 엄중함을 호소했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 미국의 안보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음에도 국민은 물론 의회도 이러한 위기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7월 트루먼이 의회에 요청한 국방예산 증액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소속 존슨 국방장관의 반대에 부딪힌 상황이었다. 유럽에 대한 군사원조가 문제였다.
부어리스의 호소를 들은 코난트는 "저명인사들을 불러 모아 계획을 세우고 대중들에게 제시합시다, 대중들이 의회에 편지를 보내 상황의 엄중함을 일깨워야 합니다. 귀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지금 미국은 잠들어 있군요. 깨워 일으켜야만 합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부어리스는 "총장께서 그런 위원회의 리더가 돼주실 수 있습니까?"고 요청했다.
훗날 코난트는 자서전에서 "당시에는 몰랐지만 바로 그때 우리는 CPD 창설을 시작한 것이다. CPD는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용한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부어리스가 코난트에게 협력을 요청한 것은 그가 미국 최고 명문 대학의 총장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상아탑 속의 학자가 아니었다. 1차 대전 때부터 미국의 전쟁 노력에 적극 동참한 정부 내 핵심 인사였다. 화학자였던 그는 1차 대전 당시 화학무기 개발에 참여했고, 2차 대전 때는 바네바 부시와 함께 원자탄 개발 등 미국 과학기술계의 연구 업적을 전쟁 역량으로 실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일본에 대한 원자탄 공격을 결정한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의 일원으로서 사전 경고 없이, 인구밀집지역에 원자탄을 투하한다는 결정을 주도했다. 나아가 2차 대전 이후 원자탄 사용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고, 미국의 안보를 위해 보편복무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해 코난트는 군사주의의 신봉자였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NSC-68 작성에 관여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코난트는 자문위원이었고 부어리스는 검토위원회 위원이었으며 NSC-68 실현을 위한 보고서(부어리스 리포트)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CPD 회원의 절반 가까이는 2차 대전 이후 국방부, 국무부의 고위 관리를 역임했거나 미국의 대외 개입을(2차 대전 참전, 마셜 플랜) 위한 각종 시민 로비 조직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들은 CPD가 정파를 초월한 중립적 인사들인 것처럼 소개했지만 실제로는 트루먼 행정부의 핵심 인사들이자 미국의 군사화를 지지하는 인물들이 대다수였다.
CPD의 주요 멤버는 의장 제임스 코난트, 부의장 트레이시 부어리스를 필두로 로버트 패터슨(전 육군부 장관), 윌리엄 클레이튼(전 국무부 차관보), 윌리엄 도노반(전 OSS 국장), 줄리어스 옥스 아들러(뉴욕타임스 부사장), 헨리 리스턴(브라운대 총장, 미국대학협회 회장) 등이다.
코난트는 부어리스와의 만남 이후 당시 미국대학협회 회장인 헨리 리스턴 브라운대 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때부터 대학 총장들이 CPD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저는 유럽에 100만 미군 병사를 빨리 배치할수록 좋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병력 규모를 300-500만으로 늘리기 위해 즉각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제 생각에 지금 필요한 것은 보편복무제도를 위한 장기적이고 건전한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앞으로 수 개 월내에 만일 대학 총장들께서 이러한 계획을 제출하신다면 대단히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내부자들의 '시민회의'
1950년 9월 28일 '시민회의(Citizen's Conference)'라는 이름의 비밀회의가 열렸다. 참가자는 일반 시민들이 아니라 학계와 언론계, 그리고 재계의 거물급 인사 약 50명이었다. 제임스 코난트(하버드대), 헨리 리스턴(브라운대) 등 7개 대학 총장이 주최한 이 모임에는 뉴욕타임스의 줄리어스 옥스 아들러 부사장을 비롯해 제네럴 모터스의 알프레드 슬로언 회장, J.P. 모건의 조지 휘트니 회장, 존 D. 록펠러,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윈스롭 올드리치 총재 등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여했다.
당시까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NSC-68의 내용을 공유하고 12월 현존위험위원회(CPD) 출범 때 발표될 창립 성명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극비문서였던 NSC-68의 내용이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75년이다)
이날 모임에서는 당시 콜럼비아대 총장 아이젠하워가 기조연설을 했다. 그는 "첫째, 소련의 목표는 세계 정복이다. 이를 위해 소련 지도자들은 기꺼이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다" "둘째, 미국 국민은 현 위기 상황에 대해 책임이 있다.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국민들은 병사들을 고국으로 데려오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지금 그(때 이른 군비 해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군사비 지출을 대폭 늘리고 18세 이상 모든 남성들의 군 복무, 즉 보편복무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소련은 미국 안보에 현존하는 위험이며, 미국은 이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며 미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군인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대단한 설득력을 갖는다. 시민회의 주최자들도 바로 이러한 점을 노리고 아이젠하워를 발제자로 내세운 것이다. NSC-68을 일반 국민들에 설득하기에 앞서 오피니언 리더들의 동의를 구한 것이다. 즉 CPD 출범에 앞선 사전 정지 작업이었던 셈이다.
10월 초 코난트는 로벳 국방 부장관을 만나 CPD 출범을 논의했다. 2차 대전 당시 과학계를 대표해 국립국방연구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 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로벳은 물론 마셜 국방장관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이어 코난트는 마셜에 서한을 보내 그의 의견을 물었다. 마셜이 CPD가 하려는 일을 긍정적으로 판단한다면 11월 중간 선거 후 1951년 초 의회가 열리기 전 기간에 "위기의 시기에 취해야 할 조치들에 관한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활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마셜은 "여러분들의 제안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며 환영했고, 11월 20일 자신의 국방장관 집무실에서 코난트 등을 접견했다.
이처럼 CPD는 태동부터 실제 활동까지 트루먼 행정부와의 긴밀한 공조 아래 진행된 것이다. CPD는 1950년 12월부터 소련의 위협을 내세워 미국과 유럽의 대대적 재무장을 선동했으나 공화당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1951년 1월부터 약 6개월 동안 CPD는 의회 증언, 대언론 성명 발표, 라디오 연설, 소책자 발간 등을 통해 대중들의 위기의식을 고조시킴으로써 공화당의 고립주의, 그리고 아시아우선주의를 격파하고 개입주의, 유럽우선주의를 관철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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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의 반격과 CPD의 대응
1951년 1월 5일 아이젠하워는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현지 실태 조사를 위해 유럽으로 떠난다. 같은 날 공화당 출신의 전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미군의 유럽 추가 파병은 "또 다른 한국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며 나토 결성을 강력 반대한다.
후버는 공군과 해군력만으로 미국을 지킬 수 있다면서 유럽이 스스로를 지킬 의지가 있음을 확인한 이후에 군사원조와 미군 파병을 단행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유럽을 잃는다 해서 우리 안보나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잃고 히스테리에 빠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공화당의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도 이날 2시간 30분에 걸친 의회 연설을 통해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의회 승인 없이 미군의 해외파병이 가능한가? 둘째, "러시아가 유럽을 공격할 의도가 있다"는 증거가 있는가? 셋째, 유럽에 미군을 파병하면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하는 것 아닌가? 등이다.
사실 해외 파병은 의회 승인 사항이다. 그런데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남침을 막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경찰 행동(police action)이라는 이유로 의회 승인 없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그런 전례가 반복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또한 미군의 유럽 파병은 오히려 소련을 자극해 전쟁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지적이다.
그는 "평화에 대한 최대의 현존하는 위험은 트루먼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의 행동, 특히 미국인 장군 아이젠하워가 지휘하는 통합 유럽군대의 창설"이라면서 대규모 미군의 유럽 파병은 "엄청난 재정적자와 인플레, 미국의 병영국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생존해 있는 유일한 전 대통령과 공화당의 양심으로 불리는 태프트 의원의 경고는 대중들의 여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다음 날인 1월 6일 부어리스는 워싱턴에서 CPD 회의를 소집해 "유럽에 대한 미 군사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후버 전 대통령의 제안이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의 제안을 지지하는 편지가 의회에 쇄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월 7일 CPD는 유럽은 "소련이 노리는 다음 먹잇감"이라고 맞받아쳤다. 소련이 유럽을 먹는다면 이는 "2억 명, 그것도 대부분 고도로 산업화된 주민들이 미국에 대항하는 공산 제국에 흡수되는 꼴"이라는 것이다. CPD는 "미국의 성공적 방어는 유럽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이를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뒤늦게 깨달았다"면서 트루먼의 유럽 파병을 적극 옹호했다.
1월 8일 트루먼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발표했다. 그는 "남한 침략은 세계를 단계적으로 접수하려는 소련 공산 독재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서유럽이 소련 침공에 무너지면 소련의 석탄 생산량은 2배, 철강 생산량은 3배로 늘어날 것"이며 "미국이 유럽을 외면하면 소련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소련이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국가들을 집어삼키면 미국으로서는 감당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리를 압박해 올 것"이며 "그런 상황이 되면 소련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강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서는 제한전을 수행하는 한편 지구적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한국전쟁의 승리보다는 핵심 산업지역인 서유럽과 일본의 재무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우리는 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 그 원조는 이제 그들의 국방 건설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2월 7일 코난트는 전국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미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 분명히 군사적 위협이다. 우리는 즉각 국가적 위험에 대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모든 국민들은 의회와 행정부에 대해 현 위기 상황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적절한 대응 조치를 취할 것을 청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결국 상원 외교위와 군사위는 유럽 파병에 관한 합동 청문회를 개최한다. 2월 20일 청문회에서 마셜 국방장관은 미군의 유럽 파병은 이미 1950년 9월 트루먼 대통령이 군부의 조언을 받아 결정한 사항이라면서 4개 사단 증파 방침을 기정사실화 했다. 이에 대해 후버 전 대통령은 2월 27일 증언에서 "미군의 유럽 파병은 러시아와의 승산 없는 지상전, 그리고 미국 청년들의 학살"로 이어질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의회에서 찬반 양론이 팽팽한 가운데 CPD는 3월 4일부터 매주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국민 직접 설득에 나선다. 국민들의 의식을 바꿔 의회 반대파들을 압도한다는 전략이다. 3개월간 지속된 방송 캠페인의 첫 번째 연사는 과학계의 거물인 바네바 부시였다.
부시는 이제 소련과의 대결에서는 "모든 군사력에서의 우위"가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소련의 핵개발 이전까지는 미국의 핵 독점으로 소련의 군사행동을 억지할 수 있었으나 핵 독점이 무너진 이후에는 핵무기 및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NSC-68의 핵심 요지로 이후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독트린이 된다. 즉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대외정책을 이끌어가겠다는 것이다. 1996년 클린턴 행정부가 천명한 '전방위 지배(Full Spectrum Dominance)'는 바로 이러한 정책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어 3월 11일에는 로버트 패터슨 전 전쟁부 장관이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응책은 전면적이고 신속한 대외 군사 원조"라면서 아이젠하워가 주도하는 나토 결성을 전폭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월 18일에는 윌리엄 도노번 전 OSS 국장이 심리전 등 비밀공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CPD는 라디오 연설 내용을 소책자로 발간하는 한편 '쫄면 죽는다(The Danger of Hiding Our Head)'라는 제목의 만화 10만부를 배포하고 '현대 무기와 자유인(Modern Arms and Free Men)'이라는 선전영화를 제작했다. 기업계는 이러한 선전 책자를 확대 보급했다.
CPD의 대국민 선전 작업은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의 우호적인 보도 덕택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부어리스 부의장은 자체 평가를 통해 전국 라디오 연설은 "CPD의 활동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국민들에게 우리가 처한 위험을 일깨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고 밝혔다.
결국 1951년 4월 5일 의회는 10만 미국 병사의 유럽 파병을 승인하는 한편 대통령에게 대외 및 군사정책에 대한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한다. CPD의 대국민 선전이 이뤄낸 개입주의의 승리였다.
맥아더 해임
그런데 바로 이날 또 하나의 폭탄이 의회에서 터진다. 하원 공화당 원내대표 조셉 마틴 의원이 중국 본토 공격을 주장하는 맥아더의 편지를 공개한 것이다. 중국 국민당 병사 80만을 동원해 중국 대륙에 대한 제2전선을 열자는 것이었다. 즉 한국전쟁을 중국대륙으로 확대해 중국 공산정권까지 무너뜨리자는 것이다.
그는 유럽의 운명은 아시아의 반공전쟁에서 결정된다면서 "공산주의 음모가들은 아시아를 세계 정복의 주전장으로 택했다. 우리 군인들은 이곳에서 유럽을 대신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곳의 외교관들은 여전히 말싸움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극동에서의 전쟁에서 패한다면 유럽의 상실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맥아더는 1월 중순경 중국군을 저지하고 반격하기 위해 만주에 원폭 공격을 가하는 한편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동원해 중국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고 정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이미 제한전 방침을 굳힌 트루먼 행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유엔 결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 단독으로 확전을 결정할 수도 없었다. 유엔 결의에 참여한 유럽 국가들이 3차 세계 대전을 의미하는 확전에 동의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승리를 포기한 정부 방침에 분노한 맥아더는 자신의 복안을 야당에 알리면서 사실상 항명 행위를 한 셈이다. 4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 해임을 발표한다. 이로써 미국의 대외정책 논쟁은 개입주의 대 불개입주의에서 유럽우선주의 대 아시아우선주의로 바뀐다.
전쟁 도중 지휘관을 교체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인데 유럽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고 군사원조를 한다? 대중들은 분노했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지금은 전면전을 치를 수 없다. 준비가 안 돼 있다'며 제한전 방침을 고수했다. 미국과 서유럽의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951년 당시 미군 지휘관들은 소련과의 전면전에서 승리를 낙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맥아더 서한이 공개되면서 공화당은 총공세에 나섰다. 태프트 상원의원은 한반도에서 유화정책을 버리고 승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선택은 "애치슨인가 맥아더인가...애치슨을 해임하고 국무부 내의 공산주의 동조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나라의 단합은 없다"고 역설했다.
윌리엄 제너 상원의원은 "오늘날 우리나라는 소련의 지령을 받는 비밀요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우리는 즉각 우리 정부 내의 암적 음모 집단을 통째로 들어내야 한다. 트루먼 대통령을 탄핵하고 우리나라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보이지 않는 정부를 색출해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닉슨은 트루먼 대통령을 견책해야 한다면서 '맥아더 해임은 세계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책'이라고 주장했다. 매카시는 트루먼에 대해 '개새끼(son of bitch)'라고 막말을 퍼부으면서 이제 온 나라가 붉게 물들 것이라고 개탄했다. 4월 12일 공화당 하원 정책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뮌헨을 능가하는 거대한 유화책이 트루먼-애치슨-마셜에 의해 준비되고 있는가?"라고 공격했다.
5월 3일, 이른바 맥아더 청문회가 시작된다.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이 정당한가를 따지는 청문회였다. CPD는 교묘한 여론전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부어리스는 맥아더 해임 논쟁으로 공산주의의 위험이 새롭게 부각된 것은 오히려 좋은 징조라면서 여론전을 지휘했다.
우선 4월말 <뉴욕타임스>를 통해 무엇보다 국민적 단합이 중요하다면서 유럽 우선이냐, 아시아 우선이냐는 부차적 문제라고 물타기를 시도했다. 특히 미국이 한국전쟁을 우선시 할 경우 유엔과 나토의 단합이 무너져 자칫 미국 혼자 반공 성전에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5월 14일부터 세 차례에 걸친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맥아더의 주장을 무력화시킨다. 첫 번째 방송에서 부어리스는 맥아더 휘하 극동사령부의 2인자인 클라크 아이첼버거 장군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대응은 적절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유럽 방위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그리고 5월 20일의 두 번째 방송에서 결정적 한 방을 이끌어낸다. 이날 출연자는 맥아더의 절대적 지지자인 두 명의 반공 신부였고 그중 한 명은 매카시에게 빨갱이 사냥에 나서도록 권유한 에드먼드 월시 신부였다. 그는 맥아더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으며 맥아더가 "자신의 극동 전략이 아이젠하워의 유럽 동맹 결성을 소홀히 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다른 이의 증언을 통해 맥아더의 본심을 뒤바꿔버린 것이다.
이것으로 사실상 논쟁은 끝이 났다. 맥아더는 내심 유럽보다는 아시아를 우선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나토 결성보다 한국전쟁에서의 승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공을 위해 단합해야 하며 아시아 우선이냐, 유럽 우선이냐는 부차적 문제라는 CPD의 원론적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결국 의회는 "맥아더 해임은 대통령의 헌법적 권리에 속한다"며 트루먼의 해임 조치를 추인했다.
이로써 1951년 1월 시작된 미 대외정책의 대논쟁은 유럽에서의 반공을 우선하는 개입주의의 승리로 사실상 끝이 났다. 또한 1951년 10월 10일 유럽에 대한 경제 원조를 군사 원조로 대체하는 내용의 상호안보법이 통과되면서 CPD는 자신의 모든 임무를 완수한다. 이 법은 사실상 CPD가 주도해서 만들었다. 군사 원조 위주의 상호안보법이 제정됨에 따라 1952년 미국의 대외원조는 73억 달러로 늘어난다. 1948-51년 마셜 플랜에 따른 연간 원조액 40억 달러의 두 배 가까운 수치다. 즉 서유럽에 대한 원조 확대로 이들 국가들을 미국 진영에 묶어둘 수 있게 된 것이다.
1951년 말 CPD는 모든 임무를 완수했으나 실제 해산은 1953년에 이루어진다. 첫째 이유는 너무 일찍 해산할 경우 소련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CPD가 주창한 반공군사주의를 실천할 지도자로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당선을 돕기 위해서였다. 결국 1차 CPD는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당선 이후 해체된다.
그리고 CPD 의장 제임스 코난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독일 고등판무관으로, 부의장 트레이시 부어리스는 나토 국방보좌관 겸 해외조달(Offshore Procurement) 책임자로 발탁된다. 즉 NSC-68의 반공군사주의를 홍보했던 사람들이 이의 집행에도 참여한 것이다.
고등판무관은 미국의 독일 점령에서 민간 부문 최고 책임자로 재무장과 경제 통합에 관한 정책들을 담당한다. 해외조달 책임자란 나토 병력을 위해 유럽에서 생산된 군수물자를 미국 돈으로 구매하는 역할을 한다. 즉 유럽 기업에 일감과 함께 달러 수입을 제공함으로써 대서양동맹을 강화하자는 취지다. 또한 미 의회와 국민들의 퍼주기 논란을 피하기 위한 꼼수다. 1954년 유럽에서의 해외 조달 액수는 23억 달러에 이른다.
반공군사주의의 확립
1947년 냉전이 본격화된 이후 미국에서는 두 가지 빨갱이 공포가 성행했다. 하나는 공화당 우파가 유포한 것으로 '공산주의 일반'의 위협을 앞세워 국내의 반대파 척결에 나섰다. 아시아, 유럽 등 해외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은 그 다음이었다. 다른 하나는 집권 민주당에 의한 것으로 '소련 공산주의'의 서유럽에 대한 위협을 강조했다. 민주당은 매카시 등의 빨갱이 사냥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으나 NSC-68을 관철해냄으로써 반공군사주의 체제를 확립한다. 요컨대 미국의 두 정치세력 모두가 '빨갱이 공포'를 정책 수행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역사가 멜빈 레플러는 2차 대전 이후 민주당과 공화당은 반공을 매개로 냉전 합의를 이룬다고 말한다. 즉 트루먼은 공화당이 자신의 대외정책을 지지해준다면 공화당 요구대로 국내의 이른바 '체제 전복 세력'과 맞서 싸울 용의가 있었다. 반면 공화당은 (국내에서의) 반공을 위해 마셜 플랜과 나토 창립, 독일 및 일본의 재건과 미군 해외 주둔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반공군사주의는 미 대외정책의 초당적 합의로 굳어지고 이 합의는 1960년대 말 베트남전쟁 때까지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빨갱이 공포가 내면화됐다는 점이다. 1950년대는 미국의 국력이 역사상 최강, 세계에서 절대적 우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내면에서는 공포가 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 측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직장에서는 소련의 핵공격에 대비하는 민방위훈련이 실시됐고 1957년에는 폭격기 갭, 1960년에는 미사일 갭 등 미국의 군사력이 소련에 뒤진다는 불안감이 끊임없이 환기됐다. 바로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미국의 군사주의를 유지, 확대하는 자양분이 됐다.
미국은 나토 창설 당시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그 이유로 들었다. 또한 독일이 통일될 당시 소련에게 나토가 단 1인치라도 동쪽으로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동유럽 거의 모든 나라를 나토에 가입시켜 러시아를 포위하고 있으며 1990년대에는 유고슬라비아 해체에 나토를 동원했다. 미국의 군사주의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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