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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신민'으로 가는 길 - 우리가 '천황'이라고, 있는 그대로 불러준다면?

일취월장7 2019. 3. 6. 14:38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황국신민'으로 가는 길

[기고] 조선 땅의 일본육군훈련소를 생각한다


"우리나라 국방의 전위지대인 조선에 지원병제가 시행되어 지원병 훈련소에서 용감무쌍한 인적 자원을 육성하게 되자 전 조선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혈서로 지원병이 되기를 원하는 충정 넘치는 미담과 이미 성전에 참가하여 장렬하게 호국의 혼이 된 용사들도 탄생하니 이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이 인용문은 1940년 일본 잡지 <모던일본> 조선판에 실린 지원병 훈련소 방문기의 첫 문장이다. 

1937년 일본은 중국을 침공한다. 1938년에는 '이등 국민'인 조선인에게도 천황과 대일본제국에 충성할 기회를 주겠다며 조선 지원병제도를 운영한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제국주의 전쟁의 도구로 충당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1930년대 중반은 일본이 조선 통치에 대한 자신감을 갖던 시기였다. 1919년 3월 항쟁 이후 불꽃처럼 타올랐던 반일 투쟁의 기세가 수그러졌다고 판단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안정적 지배 기반을 토대로 중국과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 전쟁을 노골화했다. 조선의 지도층이라 불린 사람들은 독립을 허무맹랑한 이상으로 치부했다. 정재계에서 문화예술계까지 한때 '반일'을 이야기하던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일본에 투항했다. 

독립의 가능성을 1919년 3월 항쟁에서 찾은 '3.1 키즈'들의 상당수는 만주와 시베리아, 상해와 모스크바까지 오가며 힘을 쏟았으나 조선에서의 기반은 점점 위축되었다. 그 대신 일본의 집요한 점령 정책은 점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다. 조선인들, 특히 청년들은 내지가 아닌 반도 출신의 한계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 1940년 모던일본 조선판에 실린 기자의 조선지원병훈련소 탐방기사


일제가 장악한 교육 과정은 조선의 열등한 역사를 한탄하고 일본의 지배가 당위이자 행운이라는 약육강식의 이론을 내면화 시켰다. 조선은 2등 국민이라는 근원적 한계가 있지만 차라리 일본에 붙는 게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메꾸는 현명한 길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군대와 경찰, 언론과 문학, 미술과 영화까지 총동원된 결과였다. 

3.1항쟁 때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갓난 아기였던 1940년대의 젊은이들이 통과한 시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끔 조성된 시간이었다. 굶주림을 면하고 더 나아가 출세라도 할라치면 일제가 조선에 용인한 제도권의 밑바닥이라도 차지해야 했다. 

많은 조선 젊은이 들은 일제가 열어준 그 작은 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던졌다. 조선인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모집 정원보다 몇 배나 많은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1940년 지원병 훈련소를 방문한 기자에게 훈련소 주임교수인 우미다 대령은 3000명 모집에 8만 3000명의 지원자가 쇄도했다며 훈련소 중축 계획까지 말할 정도였다.  

야욕에 불탔던 사범학교 출신 한 조선 젊은이는 학교 교사직을 때려치우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혈서를 만주군관학교 지원서에 함께 넣기까지 했다. 조선인 지원병은 일본군으로서 목숨을 거는 대신에 특혜도 보장받았다. 비로소 조선인보다는 내지인에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도록 참정권 등 내지인만이 누리는 시민권의 일부가 당근으로 제시되었다. 

비루한 식민지 백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신분 상승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일본군이 된다는 것은 성공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지원병이 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라고 부추기는 일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분위기 메이커들은 쟁쟁한 조선의 문인, 학자, 재계 인물들이었다. "군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데 이 같은 새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2300만 명이 모조리 통과해야 할 필연, 당연의 과정인가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천황께 바쳐서 쓸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목소리 높인 이는 1939년 <모던일본사>가 만든 제1회 조선예술상 수상자 춘원 이광수다. "군대 갔다 오면 사람 된다"는 말의 원작자는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이광수였다.   

중일 전쟁이 일어난 1937년부터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까지 일본은 거침없는 질주를 하던 시기였다. 조선의 해방 같은 일은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출세의 시대였지만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고난의 시대요 조선 백성들에겐 암흑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제 지원병 훈련소를 찾아가 보자. 성동역에서 <모던일본> 기자는 지원병 생활을 그린 영화 <승리의 정원> 마지막 촬영에 나선 영화감독 방한준과 함께 열차를 탔고 또 우연히 일본에서 돌아오던 중이던 훈련소 주임교수 우미다 대령을 만났다. 성동역은 1939년 7월 25일 사설철도로 개통된 경춘선의 출발역이었다. 성동역은 지금의 제기동 한약방 거리 입구 쪽에 있었다. 성동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연촌-퇴계원-마석-청평-가평-춘천으로 이어진 철길을 달렸다. 또 이들 역 사이에 작은 간이역들을 설치했는데 이용자가 많은 경성에 가까울수록 촘촘했다. 
 

▲간이역 묵동역으로 시작했던 신공덕역 사진 - 개발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던일본>기자 일행을 태운 열차는 성동역을 출발해 고성전, 월곡을 지나 묵동역에 도착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훈련소는 묵동역 남쪽 10정 정도 앞쪽 낮은 언덕 위에 위치했다고 한다. 10정이면 약 1.1킬로미터 거리의 길이다. 당시 주소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북덕리이고, 현재 주소는 서울시 노원구 화랑로 574, 지번 주소로는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 230-30이다. 이 주소는 바로 대한민국 육군 사관학교이다.  

공릉동은 공덕리와 태릉의 이름을 합성해 만든 지명이다. 묵동역은 일제말기 신공덕역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용산에서 이어지는 경의선에 공덕리역이 있었기 때문에 중복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지원병 정원이 400명에서 600명으로 1940년에는 3000명으로 늘었다가 태평양 전쟁 이후인 1942년에는 4500명, 1943년에는 5000명으로 늘었다. 전세가 불리할수록 조선지원병 정원은 확대되었고 묵동역 훈련소로 향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은 늘어만 갔다. 

광적인 선전은 조선 청년들의 등을 떠밀어 사지로 내모는데 한몫했다. "징병제는 내선 관계에 가장 중대한 약속을 하는 것이며, 드디어 양 민족의 운명이 좋게 접하는 것이다. 장차 많은 동포가 천황폐하를 위하여 피를 흘리며 생명을 바치는 일을 기다릴 것도 없이, 조국이라는 뜨거운 핏줄 속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조광> 1942년 7월호에 실린 소설가 이석훈의 글이다.  

시인 노천명은 <조광> 1942년 3월호에 '승전의 날',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등의 시로 조선 청년을 전쟁터로 내모는 응원단이 되었다. 이 같은 광기의 백미는 미당 서정주가 1944년 발표한 시 '오장(하사) 마쓰이 송가'였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의 둘째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 공격대원."

<모던일본> 1940년 조선판 첫머리에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와 기자의 대담이 실려 있다. 기자를 앞에 둔 총독의 육성을 들어보자.  

"이제 조선은 우리 일본의 대륙을 향한 전진 병참기지라네. 이를 설명하자면 두 가지 요소가 있어. 첫째는 인적자원의 배양과 육성, 반도 민중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 두 번째는 국방 생산력의 획득 촉진이지."  

미나미 총독은 대담 시작부터 지원병제도야말로 조선의 일본화를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라고 기자에게 자랑했다. 

묵동의 조선 지원병 훈련소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가 된다. 1946년 6월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1948년 9월에는 육군사관학교로 다시 바뀐 뒤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다짐했던 자리에서 해방된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젊은 정예 장교를 양성했다.  

해방 이후의 한반도는 무엇 하나 제대로 챙길 수 없는 가난의 땅이었다. 당장 군대를 꾸려도 번듯한 막사 하나 갖출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일본이 버리고 간 군사시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 땅이 가진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군을 주도했던 이들의 상당수는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만주군이나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훈련도 일본식이었고 군가도 일본 곡조에 가사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장교들끼리는 일본어로 소통하기도 했다. 

냉전의 최전선이 된 한반도에서 군대와 경찰은 친일을 세탁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반공의 깃발은 적과 우리 편을 나누는 가장 선명한 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 질곡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더욱 깊어졌고 70년을 넘게 달려왔다.  

▲조선지원병 훈련소 선전영화 <승리의 뜰> 광고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빨갱이로 상징화된 이념 대결을 뛰어넘고 친일 잔재를 청산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고 선언했다. 친일 잔재의 청산과 이념 대결의 극복은 남북의 통일을 위해서도, 일본의 책임 있는 사과를 위해서도,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수 십 년간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기 때문에 친일 잔재는 유형으로 무형으로 도처에 남아있다. 만약 민족정기란 것이 존재하고 제대로 발현되었다면 일본군 조선인 훈련병이 아침마다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쳤던 땅에서, 해방된 조국의 젊은이들이 조국 수호를 다짐하는 일이 이토록 오랜 시간 지속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태릉의 육군사관학교를 옮기자는 말이 아니다. 경복궁 앞의 조선총독부를 해체하는 것이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과업이라면 조선 땅의 일본 육군훈련소가 어떤 의미였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기억되어야 하고 잘 모르고 지냈던 것들은 발굴되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잘못을 교정해 나가는 것이 후세를 사는 자들의 자세가 아닐까.  

▲징병이 사랑하는 자식을 지키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가 자연스럽게 통용되었던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사는 청산되지 않았다



우리가 '천황'이라고, 있는 그대로 불러준다면?
[우수근의 '아시아 워치'] 한일 관계, 보다 더 "당당하게" 풀어가려면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에 해당하는 뜻깊은 해다. 그럼에도 부침을 거듭해 온 한일 관계는 또다시 깊은 터널 속에 갇힌 채 도무지 빠져 나오질 못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과 같은 미진한 과거사 청산에서 비롯된 문제에 더해 최근에는 초계기 위협 비행 등과 같은 새로운 문제들도 등장하며 양국 관계를 더욱 경색시키고 있다.

그런데 어떤 증상이든 그 이면에는 반드시 그 증상을 야기시킨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근본 치유를 위해선 먼저 그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양국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악화라는 증상에만 너무 치우칠 게 아니라 그 원인들을 찾아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 힘써야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반복되게 하니까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일 관계는 과연 어떨까? 최근 한일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최대 원인 중 하나로는,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폭주를 들 수 있다. 그 중심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있다.

그는 집권 이래 전례 없이 노골적으로 군사력 증강을 도모해 왔다. 그러한 그에게는 북한의 도발 등이 매우 유용한 구실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북미 양국이 접촉을 시작하면서부터 북한이라는 '오리발'의 효용도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다급해진 일본의 극우 세력은 북한을 대체할 새로운 구실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일본 극우 세력은 북한과 눈길을 주고받고 있는 '얄미운 당신'인 미국을 구실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칫 잘못하면 더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는 중국 또한 건드리기 쉽지 않다. 결국 남은 것은 한국이었다. 한국을 상대로 다양한 갈등을 더 유발하며 자신들의 극우 노선을 계속 추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반발하고 있다. 사실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 '일왕 사죄' 등을 쏟아내며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결국 아베 세력에 휘둘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웬만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철한 일본인들에게 있어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이질적이고 천박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반발의 강도를 높일수록 아베 일파의 의도를 잘 모르는 일본 민심은 강한 반발이라는 표면만 보고 우리로부터 그만큼 더 멀어지게 된다. 이에 쾌재를 울리는 극우 세력은 또 다른 도발 거리를 찾아 우리를 또 살살 긁는다. 이로 인해 우리가 또 쉽게 확 달아오르면, 이는 곧 아베 정권의 극우화에 효자손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격이요, 한일 관계는 그 만큼 더 악화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고 만다. 이처럼,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아베 세력에 의해 이용당하는 모습을 계속 반복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들보다 더 냉철하고 스마트해져야 한다. 일본 극우파들의 전횡에 대해 그들이 움찔하며 당혹하게 하는 새로운 대응전략 등을 다양하게 구사해 나가야 한다. 예를 들면, 일본 극우파 세력과 결을 달리하는 일본 사회의 건전한 양식 세력들과의 보다 더 다각적이며 긴밀한 연대의 강화 등이 그 하나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아닌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극우파 좀비 정치인 세력을 일갈하고 계도하도록 이끌며 협력해나가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소 황당하게 들릴 듯한, 아울러 이를 듣고 또 쉽게 달아오를 사람도 없지 않을 듯한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우리가 일본에서 "천황(天皇, 덴노)"이라 불리는 존재를 "일왕(日王)"이 아닌 일본 천황으로 호칭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한일 관계를 새롭게 다져 나가는 하나의 획기적인 모멘텀으로도 활용해 나가자는 것이다.

"일왕"을 "천황"으로 호칭해 주자는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무엇보다도 우리가 21세기 중견강국으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일본 천황을 일왕으로 호칭하기 시작한 이면에는 불행했던 과거사 등으로부터 기인한 저들에 대한 우리의 콤플렉스와 열등감 등도 없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재의 우리는 초라하고 왜소하기만 했던 과거와는 현저히 달라졌다. 일본의 극우 세력들이 유독 우리에 대해 도발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 대해 과거와 같지 않은 그들의 처지"에서도 비롯된 측면 또한 없지 않다. 이처럼, 최빈국 당시와는 비교조차 무색할 정도로 강성해진 우리가 아직도 과거의 그 열등감 등에 젖어 있을 이유는 없다.

다음으로, 일본에 대한 우리의 당당함의 표상이다. 냉정히 생각해보자. 우리는 중국의 국가주석(國家主席)이나 대만의 총통(總統), 혹은 홍콩의 행정장관(行政長官) 등에 대해서는 그들이 사용하는 한자어와 호칭 등을 그대로 다 불러주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 천황에 대해서만 굳이 일왕으로 격하해 부른다는 것을 일본인들이 알게 된다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세 번째로, 천황이라는 세계 유일한 한자어 명사의 의미 등을 감안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호칭해 주는 것이 맞다. 천황이라는 한자어는 전 세계에서 오로지 한 사람만 지칭하는 명사이다. 일본 천황은, 일본 신화에 나오는 일본의 조상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부터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자랑하는 일본 신화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여겨져 왔다.

또한 정치적 실권은 없더라도, 일본 헌법이 명시한 국가의 상징이며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서 일본 사회에서 폭넓게 존경받는 유일한 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 어느 한자어로도 그 상징하는 의미를 있는 그대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 사회의 역학 관계를 잘 활용하자는 의미도 있다. 현재 일본사회에서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위상은 "내가 국가다!"라는 발언으로 "너가 루이 14세냐?"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는 아베 총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히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천황은 과거사 등에 대해서도 아베의 극우파 정권과 차원을 달리한다. 그는 그 동안 일본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 사실상의 사과를 적잖이 해왔다. 예를 들면, 1990년에는 일본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슴 아팠던 과거에 대해 겸허히 돌아봐야 한다며 스스로 '통석(痛惜)의 염(念)'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반성했고 1998년에는 방일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다'며 재차 사과하기도 했다.

2005년엔 사이판에 있는 한국인 위령탑을 찾아가 묵념하였고 2017년엔 사이타마현에 있는 고구려 신사를 일부러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 12월 재위 기간의 마지막 탄신 기자회견에서는 16분 동안 과거에 대한 반성과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몇 번이나 울먹이기도 했다.  

이처럼 현재의 아키히토 천황은, 일본 극우 세력의 불만과 견제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대해 겸허하며 진솔한 자세를 견지해 왔다. 그러다 보니, 아베 세력은 천황이 퇴임후에 한국을 방문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지난 1월 일본의 주간지 <슈칸 겐다이>(週刊現代)에는 "아베 총리는, 아키히토 천황이 퇴임 후 상황(上皇)이 되어 그와 다른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더 많이 할까봐 걱정하고 있다.(중략) 폐하는 과거 일본의 지배지에 가서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이와 관련한 심각한 우려는 폐하가 상황이 된 뒤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한일관계 속에서, 상황이 방한하여 사죄 등을 한다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외교 정책은 송두리째 바꿀 필요가 생긴다"고 보도했다.

이를 보더라도 일본의 극우 세력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일본의 상징이요 일본 사회의 얼로서 대다수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일본 천황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 나가야 할지 어렵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안은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정서와 아베 정권의 저급한 행태 등을 고려할 때, 우리 사회의 공분만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극우파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아니 저들과 같은 단순저급한 이분법적 '이기고 지고'식 사고를 넘어 이웃나라 일본과의 건전한 상생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우리만이라도 더 관대하고 냉철해질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민심에 정서적으로 울림이 있게 다가섬과 동시에 일본 사회의 양식에게도 힘을 더해주는 가운데 한일 관계의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나가자. 해 줄 것은 겸허하게 해주고 요청할 것은 당당하게 요청하며 맞설 것은 강력하게 맞서나가자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담대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자세를 통해 한일관계가 터널의 출구를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가 추동하는 건 어떨까.  


3·1운동과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민미연 포럼]
2019.03.06 13:56:47

3·1 절이 며칠 지났다. 올해는 100주년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그 뜻을 기리는 크고 작은 행사가 많이 열리는 것 같다. 그동안 우리 민족이 안팎의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나오며 한 세기가 흘렀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3·1운동이나 그 한 달 전에 일본 도쿄에서 한 2·8선언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이 민족해방의 단초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1919년의 파리 베르사유강화회의에서는 일본과 같은 전승국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아무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패전국들의 영토와 식민지들을 전승국들이 나누어 먹었을 뿐이다. 식민지 입장에서는 민족자결주의는 별 의미가 없었고, 당연히 한국인들의 기대도 배반을 당했다. 그러면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을까? 

미국은 1914년에 시작된 1차 세계대전에 처음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19세기 미국의 전통적인 고립주의 외교 노선인 '먼로주의'에 따라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튀르크를 중심으로 한 동맹국이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 양측에 전쟁 물자를 팔며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영국이 우세한 해군력으로 독일을 해상봉쇄하고, 또 독일이 거기에 대응하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펴게 되자, 중립을 지키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1915년 4월에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한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에 탔던 미국인 118명의 사망도 중립 노선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국은 1917년에 4월 6일에 마침내 독일 측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는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참전을 결심한 것은 전후 국제정치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물질적 생산력을 보유하게 된 이상 미국이 국제 정치에서도 발언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은 것이다. 미국은 곧 대규모 징집과 함께 군수 생산도 늘려나갔다.

1917년 11월의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세력은 1918년 3월에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빠졌다. 막 시작한 사회주의혁명을 지키기 위해 독일에게 영토를 크게 할양하고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 연합국에서 러시아가 빠지자 크게 용기를 얻은 독일은 미군이 유럽에 상륙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1918년 3월에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1918년 8월부터 미군의 대병력이 유럽에 상륙하여 연합군 편에서 공세를 취하자 전세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병력이나 물자가 점점 고갈되어 가던 독일군은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결국 킬 군항에서 일어난 해군 수병들의 폭동이 전국으로 퍼지며 독일은 11월 11일 조건 없이 항복했다. 1차 세계대전은 결국 이렇게 끝났다.

윌슨은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18년 1월 8일, 전쟁 목적과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한 지침으로 이른바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그리고 거기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면 민족자결주의는 윌슨이 처음으로 주장한 것일까?  

19세기 후반 민족자결주의를 처음 주장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다.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민족자결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의 볼셰비키 대표자인 레닌은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1916년 3월에 완성한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자결의 원리>라는 글에 요약했는데, 그가 억압적인 체제에서 벗어날 인민의 권리로 정의한 민족자결의 원리는 자본주의-제국주의적 세계 질서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러시아의 구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혁명에 대해 러시아 내 소수종족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1917년 3월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레닌은 바로 종전을 외치며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으면, 강화조건 안에 '식민지해방과 함께 예속되어 있고 억압받는 비주권적 인민의 해방'이 들어갈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 1917년 11월의 볼셰비키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외무 인민위원 트로츠키는 작은 민족들의 자유를 보증하기 위해 싸운다는 연합국들의 주장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하고,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네 제국 내의 소수종족들을 억압하면서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제 러시아에서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의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그러니 영국이나 미국이 맞대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사실 민족자결 이야기를 처음 한 사람은 윌슨이 아니라,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이다. 그가 1918년 1월 5일에 런던의 영국노조연맹회의에서 전후의 영토 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자결권'에 대한 연설을 했다. 윌슨이 이에 자극을 받고 자신이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가진 인사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1월 8일에 부랴부랴 미국 하원에서 '14개 조항'을 끄집어낸 것이다.

'14개 조항'은 비밀조약이 아닌 공개 외교, 공해상의 자유항행과 무역의 자유, 군비 축소, 큰 국가나 작은 국가나 똑같이 정치적 독립과 영토적 완결성을 보증할 국가들 사이의 연맹 창설 등과 함께 전후 러시아·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튀르크·폴란드의 영토 문제 처리를 다루고 있는데 민족자결의 취지는 들어가 있지만 그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가 민족자결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은 2월 11일 하원 연설에서이다.

윌슨의 민족자결 주장은 1918년 중반 이후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됐고, 그래서 전 세계의 피억압 종족들이나 식민지인들은 윌슨의 이런 주장에 크게 고무되었다. 전쟁이 끝나면 혹시 민족해방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은 것이다. 한국인들이 파리 베르사유강화회의가 열리던 시기에 3·1운동을 일으킨 것도 그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한 것이다.

그러면 윌슨은 정말로 큰 나라 안의 피억압종족들이나 식민지들을 해방시키려 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는 사실 민족자결에 대해 모호하게 이야기했고 민족이 무엇이지, 자결에 무엇이 필요한지도 잘 몰랐다. 종족성을 넘어서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가치가 민족을 만든다고 보아 종족성이 민족 정체성의 바탕이 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니 이런 인식으로는 긴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형성한 여러 종족들이 한 제국 안에 동거하고 있는 동유럽 여러 나라의 상황에 대응하기에 무리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단순한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대한 태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독일과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선전 포고를 1917년 12월까지 미뤘다. 미국이 이 나라와 당장 이해의 충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전쟁에 돌입한 후에도 가능하면 이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비밀교섭을 통해 단독강화를 하려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독일과 분리시켜 군사적 부담을 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예속 종족들이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독립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단지 자율성만 가지면 된다고 주장했다. 비밀교섭이 실패로 끝나고 전쟁 말기에 이들 종족들의 민족주의 운동이 더 커지자 미국은 다른 연합국들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은 그에게는 군사적 고려가 정치적 고려보다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럽의 민족들을 부적절하게 이해한 것은 미국식의 시민적 민족의 개념에 길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유럽의 소수종족들이 왜 민족자결 원리에 따라 반드시 독립을 하려고 하는지, 왜 미국 사람들과 같이 다른 종족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시민적 권리를 가지고 하나의 민족으로 합쳐져 살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후회를 하고 있다. "내가 모든 민족은 자결의 권리가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매일매일 우리가 부딪치는 (많은) '민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다. 당신은 내 말이 수백만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희망의 결과로 내가 경험한 불안을 모를 뿐 아니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그러니 우드로 윌슨같이 질이 안 좋은 인종주의자가 식민지인의 민족자결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졌을 리가 있었을까? 3·1운동 이후 파리까지 찾아간 우리 대표들이 문전박대를 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