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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5.18

일취월장7 2018. 1. 13. 10:08

36년 전의 외침"광주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작은책] 내가 겪은 5.18 ①
2017.12.30 10:55:44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 운전사>(장훈 감독, 2017)가 관객 1000만 명을 넘겼다. 나는 5.18 현장에 있었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고, 화가 났고, 슬펐다. 택시운전사를 연기한 송강호와 기자 힌츠페터 역을 맡은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감동이었다. 그때 내가 겪었던 장면을 잘 재현했다.

역에서 송강호에게 주먹밥을 주는 장면을 보면서 불현듯 우리 작은언니가 생각났다. '36년 전에 우리 언니도 저렇게 시민군에게 주먹밥과 물을 주었는데….' 주마등처럼 그 당시 일이 떠올랐다. 

1980년 5월 17일 토요일 오후에 나는 광주 도청 앞 전일빌딩 1층에 있는 전일다방에서 친구를 만나서 커피 마시면서 수다를 떨었다. '헬기 기총사격이 있었네, 마네' 하는 얘기로 요즘 유명한 전일빌딩은 내가 자주 가던 곳이다. 고등학교 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 때는 전일빌딩에 있는 전일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했는데, 새벽에 일찍 가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친구와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나가 봤더니, 전남대 학생들이 "전두환이 물러가라"고 시위를 하며 행진을 했고 계엄군은 이들을 양쪽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살벌해서 친구와 헤어져 그냥 집에 들어왔다.

▲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에 모여든 시민과 차량 시위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월 18일에 나는 점심을 먹고, 어제 본 광경이 궁금해 금남로로 나갔다. 저 멀리서 공수부대원들이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두들겨 패는 것을 보았다. 곤봉으로 패고 발로 차고 질질 끌어서 트럭에 던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서 골목으로 숨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무섭든지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당시 내 친구가 전남대병원 간호사였는데, 그날 밤에 터지고 깨져 숨넘어가는 중환자들로 대학병원이 초만원이었다고 했다. 환자가 하도 많아서 조선대병원과 기독병원에 보냈다고 했다. 

내 친구 여동생은 카톨릭센터 앞을 친구와 걸어가는데, 공수부대원이 젊은이들은 쫓아와서 무조건 잡아가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제일 가까운 가게로 들어가 숨었다. 주인이 학생들을 보호하려고 셔터를 거의 다 내리는 순간에 어떤 여학생이 가게로 들어왔는데 공수부대원이 쫓아와서 셔터를 올렸다가 탁 내려서 그 여학생은 허리를 다쳐서 그대로 쓰러졌다. 공수부대원은 그 안에 있던 젊은이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군인 트럭에 짐짝처럼 싣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내 친구 동생은 다행히 다음날 무사히 집에 왔는데, 그 뒤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결혼해서 미국에 가서 살고 있다. 

시민군이었던 남편이 나중에 5월 18일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 일 끝나고 자전거를 타고 계림동 광주고 앞에 있는 집에 가려고 대인동 시외버스터미널 부근까지 갔는데, 대로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도깨비방망이로 사람을 마구잡이로 때려서 개구리 뻗듯이 죽어가는 것을 직접 보고 너무 무섭고 떨려서 골목으로 숨었단다. 때려죽인 사람을 짐짝 던지듯 차에 싣고,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나 무조건 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찍고 군홧발로 밟고 수십 명을 차곡차곡 싣고 가는 것을 보고 벌벌 떨며 집에 갔다고 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다음날 시위대에 합류했다. 시민군이 되어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광주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서울에 알려야 한다고 서울 가는 진입로까지 갔는데, 계엄군이 "가까이 오면 발포한다"고 해서 나주 쪽으로 갔다. 나주 사람에게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제발 시위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고, 그런 시민군들 덕분에 광주뿐 아니라 함평, 목포, 순천, 여수 등 전라도 지방에서도 다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집에 있기에는 도저히 궁금해서 나는 다음날도 버스도 안 다니는 십리 길을 걸어 시내로 나갔다. 그때까지 우리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됐다. 그 당시 광주사람 거의가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다. 대학생들이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쳤는데, 우리는 그 전날 이미 김대중이 보안사에 끌려갔다는 것을 몰랐다. 광주 사람들은 이번에 꼭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정치판이 이상하게 돌아가서 화가 나던 때였다.


"전쟁 난 것도 아닌데, 광주에 관()이 바닥 났다"
[작은책] 내가 겪은 5.18 ②
2018.01.07 10:29:55


전두환이 "광주 놈들은 싹 다 죽여 버려!"라고 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수천 명의 시민이 금남로에 모였다. 나도 시위대에 섞여서 구호를 외치면서 앞으로 나갔다. 시위대 맨 앞에 학생과 청년들이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 우리도 따라 부르면서 행진했다.

공수부대원들은 돌멩이가 날아가도 안 피하고 그대로 맞으면서 돌진했다. 지휘관이 "앞으로 돌격!" 하고 외치면, 공수대원들은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시위대를 곤봉으로 때렸다. 마치 살인 면허라도 받은 듯 그들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도로는 삽시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고, 다들 살려고 이리저리 골목길로 도망 다녔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덜덜 떨며 집에 들어왔다. 엄마가 "어제 그 일을 겪고도 오늘 또 나갔냐. 제발 앞으로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라고 하셨다. 당시 대학생이던 동생이 5월 3일 군에 입대하면서 엄마가 큰 걱정을 덜었는데, 막내딸인 내가 그러고 다니니 심정이 어땠을까.

하지만 다음 날, 걸어서 또 금남로에 나갔다. 텔레비전 <9시 뉴스>에 광주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코미디와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깔깔거리는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 1980년 5월 비닐하우스 전용 투명비닐로 희생자 시신을 처리했다. ⓒ광주적십자병원=연합뉴스


석가탄신일인 5월 21일,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그날 공수부대원들은 수만 명의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아 댔고 심지어 헬기로 기총사격을 했다. 나도 수만 명 틈에 끼어 있다가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도청 뒷골목에 있던 반이비인후과 병원 앞까지 도망쳐 한쪽에 서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남학생이 픽 쓰러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허벅지를 맞은 것이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해 '방금 내가 죽을 수도 있었어. 내가 살아야 민주주의도 있지' 하면서 걸음아 나 살려라 골목으로 도망쳐 집에 갔다.

지금도 당시 상황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마다 너무 고통스럽다. 나중에 들으니까 친구 아버지도 그날 가톨릭센터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다가 헬기에서 쏜 총알을 맞고 그대로 사망했다. 결국 시민군들이 무기를 탈취해 '광주는 우리가 지킨다'며 똘똘 뭉쳐 맞서자, 겁을 먹은 공수부대가 일단 물러갔다. 

다음 날 아침, 시민들은 밤사이 피로 물든 거리를 청소했다. 나도 청소를 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왜 지금 내가, 이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에 이러고 있는 거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일터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각자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금남로를 청소하고 있다니 기가 막혔다. 도대체 전두환은 어떤 사람이기에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광주를 이 지경으로 만드는지…. 속에서 분노가 끓었다. 시민군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한 대형 화분, 공중전화 부스, 시내버스 표지판 등도 여기저기 쓰러지고 깨지고, 정말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양동시장에서 시민군에게 밥을 해서 준다는 소문을 듣고 나도 그곳에 가 보았다. 상인들은 아침부터 솥을 걸고 밥을 해서 밤새 경계근무를 선 시민군에게 먹였고, 지난밤 있었던 야간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생매장당했는지, 또 다친 채 어디로 끌려갔는지에 대한 소식을 주고받았다. 상인들에게 감사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지갑에 있던 돈 2만 원을 드리면서 쌀값에 보태라고 했다. 엊그제까지 주먹밥 해서 날랐던 우리 언니 생각이 났다. 순간 '언니네도 쌀값 참 많이 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새삼 언니가 자랑스러웠다.

도청 앞 광장 맞은편 상무관에도 가 봤다. 강당과 그 앞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내가 태어나서 시신을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꺼 번에 그 많은 시신을 보고는, 토하고 울고 난리가 났다. 처음엔 시민들이 즉석에서 모금해 나무 관(棺)을 사 거적에 싸인 시신을 입관하고 태극기를 덮어 놓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광주 시내 장의사에 있는 관이 바닥이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관도 없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 생각이 가끔 떠오를 때면 너무 괴롭다. 

5월 25일 자정이 넘어 장갑차와 탱크가 '따다다다' 콩 볶듯이 상무대에서 시내로 진격했다. 우리 집이 그때 광주 외곽에 있어서 상무대와 가까웠다. 초여름 밤인데 창문도 못 열고 창마다 두꺼운 이불로 가렸다. 엄마, 아빠가 총소리를 들으면서 "6·25전쟁 때 인민군도 이러지 않았어야. 인민재판을 해서 처단을 했구만, 세상에나 국민을 지키라는 군대가 이렇게 무고한 시민들을 많이 죽인다냐" 하셨다.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총소리가 너무 커서 놀랍고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아서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새벽에 진압군이 광주공원에 집결했고 26일 자정 넘어서 광주 도청은 완전히 진압됐다. 도청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시민군들은 끌려가거나 죽었다. 당시 광주 시민이 80만 명 정도였는데, 투입된 군인이 2만 명이었다니…. 우리 광주 사람을 국민이 아닌, 죽여 없애야 하는 존재로 알았던 것이다. 

< 택시운전사>(장훈 감독, 2017) 영화에서와 달리 당시 금남로 현장에는 외신기자도 드문드문 보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고맙다고 했다. 그들이 광주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려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미군이 전두환 편을 들며 군의 광주 투입을 승인했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반미(反美)' 감정은 아마도 그때 싹튼 것 같다.

한때 우리끼리도 광주 이야기는 금기였다. 1990년대에 와서야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트라우마였다. 다시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단'을 구성한다고 하니, 그동안 밝히지 못한 진상을 다 파헤쳐서 수없이 죽어 간 광주 사람들의 한을 풀어 줬으면 좋겠다. 



'광주'는 왜 지역 문제로 축소되었나?

[기고] <광주백서>의 의미와 관련하여
2018.01.12 16:26:29 
    
2016년 10월부터 시작돼,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탄핵 판결로 마무리된 촛불 혁명은 민주주의 복원과 도약의 기회를 가져온 것은 물론, 80년 5월 광주 항쟁의 진상 규명의 새로운 전기를 밝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촛불 혁명은 1주년을 맞았다. 뜻있는 많은 이들에게는, 문재인 정권 하의 개혁이 더디고, 느려 보인다.  그나마, 제 속력을 내고 있는 것은 광주 항쟁의 진상 조사인 듯하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어지간히 아는 사람들은 이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항쟁은 무려 37년 전에 일어났고, 그 동안 왜곡과 천시에 시달려왔다. 쉼 없이 진상요구 투쟁을 행한 광주 시민과 민주 시민들이 있었으나, 사실상 진상 규명과 학문적 연구는 역설적으로 1996년 전두환 노태우 구속 이후 답보 되었다.

지역 문제로 축소된 '광주' 

돌이켜 보자면, 광주 항쟁 진실 투쟁의 두 개의 기둥, 즉, 역사적 평가와 진상규명 그리고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은 분리해서 진행했어야 했다. 다시 말해, 피해자 보상과 명예 회복은 몇 가지 원칙 아래, 새로운 대상자들이 나올 때마다 꾸준히 해야 하고, 역사적 평가와 진상규명은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시행해야 했다. 그러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이 본격 시작한 김영삼 정부는 피해자 보상과 명예 회복을 대가로 진상 규명을 피해가자는 것으로 틀을 잡았다. 1993년 5월 13일에 발표한, 5월 항쟁에 대한 김영삼의 특별 담화는 그 시작이었고, 1995년 전-노 구속은 사법부의 힘을 빌린 이 기본 틀거리의 정점이라면, 1997년 전-노의 사면의 그것의 완성이라 할 수 있겠다. 

▲<광주백서>(소준섭 대표 기록, 어젠다 펴냄) ⓒ어젠다

말하자면, 군부와 정치권을 비롯한 한국의 집권 엘리트는 광주를 지역의 문제로, 사법적 처리 대상으로 가둬 버렸다.

2017년 하반기에 들어서, 광주 항쟁 관련 뉴스가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광주항쟁의 진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대부분의 뉴스가 일종의 리사이클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신군부의 광주 폭격 준비설부터 광주 교도소 암매장 그리고 그 엄청난 탄환 소요까지 88년 5공청문회 정국 이후 한 번쯤은 드러나고, 한 번쯤은 보도된 내용들이다.

결국, 보상을 통해 광주를 달래고, 진상 규명을 유보한 것은 한국 현대사 가운데 가장 찬란한 민중항쟁을 지역 문제로 축소시켰다. 발포 명령자 규명을 포함한 진상 규명을 계속할 구조는 없고, 동력은 약하니 정체됐고, 대중의 의식에서도 희미해졌다. 또한 9년 보수정권 기간 내내, 극우들의 광주 항쟁의 왜곡이 가능했다. 그래서 촛불혁명이 열어준 정치 공간, 2017년, 우리는 광주의 대한 집단 이해는 심화되지 못하고, 안타까운 복기와 복습을 거듭하고 있다.  

<광주백서>의 의미와 관련하여 

나는 이 복잡한 사정의 피해자 중의 하나가 소준섭의 <광주백서>(이하 "백서")라고 생각한다. 알려진 대로, 1982년 비합법 출판물로 출간된 "백서"는 항쟁 이후, 광주의 진실을 인쇄물로 알리는 최초의 시도였다. 소준섭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학생운동으로 수배 중인 저자가 김상집을 비롯한 10여 명의 항쟁 참가자에서 증언을 청취, 토론 후 이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광주백서"는 1985년 풀빛출판사에서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넘어")의 골격을 제공했다. 이 책은 나와 닉 마마타스(Nick Mamatas)가 "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로 편집 번역하여, UCLA Monograph Series로서 1999년에 미국에서 출간됐다. 그 후 2016년, 5.18 기념 재단이 판권을 영구히 확보해 새로 출간됐다.   

"넘어넘어"가 사실상, 광주 항쟁의 성전으로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는 사이, 이 책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백서"는 거의 빛을 보지 못했다. 나는 이 불행한 사실이 위에서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한 광주의 지역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80년 5월 항쟁 10일 동안, 광주는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그 고립은 군사적이며 물리적이었다.  그 후 광주의 고립은 정치적이며, 지역적이었다.  그 정치적 지역적 고립 속에서, 광주는 광주 외부에서 이뤄진 "백서"라는 공헌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탓에, 지난해에 "넘어넘어" 증보판이 출판되었건만, 역시 "백서"의 가치는 여전히 온전히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소준섭의 <광주백서>의 재출간은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을 끝내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 믿는다.  
 
설갑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G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5.18 기념재단: 2017)의  편집 번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