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죽지세 시진핑 군단, 중국의 운명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개헌을 통해 막후 원로 정치를 차단하고 당·정·군에 ‘시자쥔(시진핑 사람들)’을 대거 중용했다. 신설된 국가감찰위원회를 중심으로 사정기관도 장악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국가주석직을 2회 이상 연임하지 못하게 한 기존 헌법 조항(제79조 제3항)을 삭제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과 동일하게 국가주석직을 종신 연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의 임기가 끝나는 2023년 초반 이후에도 합법적으로 중국 국가주석을 연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중국에서는 시진핑 1인 독재 시대로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SNS상에서 ‘이민’이 검색어 1위로 떠오를 만큼 불안감이 표출됐다. 시 주석의 정치적 의지와 성격, 그간 정치 행보를 보면 개헌은 충분히 예견되었다.
과연 개헌의 배경과 시진핑 주석의 복안은 무엇이며, 향후 전망은 어찌될까?
먼저 수정된 헌법 내용과 특징을 살펴보자. 서언, 총강, 공민의 기본 권리와 의무 등 총 4개 장 138개 조항으로 구성된 기존 헌법 가운데 이번에 수정되거나 새로 만들어진 게 21개 조항이나 되어 총 143개로 늘어났다.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대목은 헌법 정신이나 철학적·사상적 토대를 제시하는, 우리 헌법의 전문에 해당되는 서언이다. 서언에서는 국가의 지도사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삼개대표론’, ‘과학발전관 사상’에 이어 시 주석의 이름이 들어간 ‘시진핑 신시대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법제(法制)’를 ‘사회주의 법치(法治)’로 바꿨으며, 중국의 현상을 ‘오랜 기간의 혁명과 건설의 과정에 있다’고 한 조항에다 ‘개혁’을 첨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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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nhua 3월17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된 왕치산 전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왼쪽). |
본문에서는 ‘사회주의 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 제도’라는 부분에 ‘중국공산당의 지도는 중국의 특색 있는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를 집어넣었다. 즉 조문 중에 ‘공산당의 지도’라는 문구가 처음으로 들어갔다(제1조 제2항). 또 국가감찰위원회를 신설하고 그 권한과 역할을 국무원 수준으로 올렸다(제3조 제3항). 제24조 제2항에서는 ‘국가는 사회주의의 핵심적 가치관을 제창하고’라는 문구를 삽입해 ‘사회주의의 핵심적 가치’와 애국 의식을 강조했다. 국가공무원 취임 시에 헌법 선서를 공개로 행할 것도 규정했다(제27조 제3항 신설).
장쩌민 무시하고 덩샤오핑도 안중에 없고
이번 개헌은 시진핑 주석의 야심, 그리고 인사와 연동되어 있다. 향후 공산당의 통치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했다. 첫째, ‘시진핑 신시대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헌법에 명기함에 따라 시진핑 주석의 위상이 마오쩌둥의 권위에 이를 만큼 공고화된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당내 집단지도 체제 대신 1인 독재 체제로 갈 수 있도록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말해준다. 실제 그는 장쩌민을 완전히 무시하고, 심지어 덩샤오핑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예컨대 마오쩌둥 집권 동안 개인 우상 숭배와 1인 독재가 만들어낸 폐해를 고치고자 덩샤오핑이 국가주석직의 연임을 제한한 것을 무력화해버렸다. 이는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하에서 최고 지도부인 공산당 중앙정치국 중앙상임위원회 내 계파들 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분열과 파국을 관리해온 당-국가 체제의 독특한 장치를 허물어버린 셈이다.
둘째, 시진핑 주석은 개헌을 통해 막후의 원로 정치를 차단했다. 막후에서 원로 정치를 해온 장쩌민과 쩡칭훙을 제압하고 당내 반(反)개혁 원로 세력과 단절한 것이다. 당 최고 지도자에서 물러나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지금까지 공산당 지도부의 관행이었다. 국가주석직과 당 총서기직을 후계자에게 넘기면서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만은 물려주지 않다가 나중에 넘기기도 했다. 실제로 덩샤오핑과 장쩌민은 후임자에게 국가주석직과 공산당 총서기직을 넘기면서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한꺼번에 같이 물려주지 않았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유지해 후임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진타오만이 세 권력을 한꺼번에 시진핑 주석에게 물려주고 깨끗하게 정계에서 은퇴했다. 원로 대부분은 자파의 인물을 당 최고 의결 조직인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에 밀어넣어 대리청정 방식으로 현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특히 장쩌민은 후진타오 재임 시 막후에서 장쩌민을 최측근 보좌한 쩡칭훙과 함께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쩌민은 시진핑 집권 1기 때까지도 막후에서 시 주석을 견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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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 2017년 10월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회의에서 장쩌민(오른쪽), 후진타오(왼쪽) 전 중국 국가주석이 나란히 앉아 있다. |
셋째, 시진핑 주석 개인 권력의 강화를 통해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시 주석은 당·정·군에 시진핑 사람들을 뜻하는 ‘시자쥔(習家軍)’을 대거 중용해 포진시켰다. 물론 사전 정지작업을 거친 뒤였다. 그가 지난 수년간에 걸쳐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명분으로 장쩌민이 심어놓은 심복을 하나하나씩 쳐내는 권력투쟁에 시동을 걸었다. 장쩌민의 수족들인 보시라이, 링지화, 군부의 쉬차이후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혁명 원로 자제 그룹인 태자당과 공산주의청년단, 장쩌민 전 주석 중심의 상하이 지역 파벌 등 3개 파벌이 분점하던 집권 1기와는 달리 자신의 최측근 인사 그룹인 시자쥔이 요직을 장악해 독주 체제로 나타났다.
시자쥔의 면면을 살펴보면, 먼저 당에는 7명의 중앙상임위원 중 리잔수, 왕양, 한정 등 최소한 4명 이상이 확실한 시진핑파 인물이다. 당 서열 2위의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리는 리잔수 전 당 중앙판공청 주임에게 맡겼고,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에는 왕양 전 부총리를 앉혔다. 정부 계통에도 ‘7상8하’(67세 유임, 68세 은퇴)의 연령 제한 규정 때문에 물러났다가 국가부주석으로 재등장한 왕치산을 비롯해 외교·경제 등 각 분야에서 시진핑과 인연을 맺은 이들이 무수히 많다. 각 지방(성시) 정부의 수장도 시자쥔 인물로 채워진 게 적지 않다. 허난성 당서기 왕궈성, 칭하이성 당서기 왕젠쥔, 쓰촨성 당서기 펑칭화, 광시자치구 당서기 루신서, 장시성 서기 류치, 헤이룽장 성장 왕원타오 등이 시진핑 주석의 사람들이다. 신장위구르와 시짱(티베트)의 주권 및 영토 문제, 반체제 활동, 사이버 공격 등 중국 국가 안전에 위협적인 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정보 수집과 대응을 위해 조직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격인 국가안전위원회 지도부도 시진핑 주석을 정점으로 새로 짜였다. 신설된 국가감찰위원회도 왕치산 부주석 측근으로 알려진 양샤오두 감찰부장이 초대 주임으로 기용됐다.
공산당 일당 독재의 최대 버팀목인 군부도 시진핑 주석 사람으로 대폭 물갈이되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부주석에 유임된 쉬치량과 장유샤 전 장비발전부장, 리쭤청 연합참모부 참모장, 먀오화 정치공작부 주임, 장성민 군사위 기율검사위원회 서기로 채워졌다. 로켓군 사령관에서 국방부장 겸 국무위원으로 기용된 웨이펑허도 장쩌민 수족을 대신해서 새로 기용된 군부의 복심이다.
넷째, 사정·감찰·감시·사찰·정보 수집 기능을 맡은 국가감찰위원회를 신설하고 그 권한과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부기구를 조직했다. 이는 애국주의에 호소하고 사회주의의 핵심적 가치를 제창한 것, 국가공무원 취임 시 헌법을 선서하게 하는 규정들과 맞닿아 ‘중국의 특색 있는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규정한 공산당의 지배력 확대와 통치의 심화를 예고한 것이다.
‘시진핑-왕치산’ 체제의 집권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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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nhua 2017년 8월30일 중국군 건군 90주년 기념식에서 군복을 입고 사열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
‘시진핑-리커창’ 체제에서 ‘시진핑-왕치산’ 체제로 집권 2기가 시작된 중국 정국을 전망해보면, 시진핑이 전면에서 당·정·군·외교 분야를 진두지휘할 것이다. 그를 보좌할 주요 이론적 책사로는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당 서열 4위에 발탁된 왕후닝이 반부패 전쟁, 일대일로 정책, 이른바 ‘대국 외교’ 등의 분야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또 국방과 군사를 제외한 다양한 분야의 정책 실행과 추진 면에서는 총리직에 유임됐지만 권한이 대폭 축소된 리커창 대신 왕치산이 시진핑 주석을 보좌할 것이다.
특히 신설된 국가감찰위원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감찰위원회는 국유기업 간부뿐 아니라 광범위한 인민을 대상으로 사정·감찰·감시·사찰·정보 수집에 나설 것이다. 결국 공산당이 펼칠 통치 기조는 고압적·권위적이며, 인민의 행복추구권, 알권리,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이 제한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유, 민주, 인권, 생태계 환경 등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변화는 내우외환이라는 엄중한 도전에 직면해 강력한 영도가 아니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보는 시진핑 주석과 그 일파의 현실 상황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개인 권력 집중과 구심력 강화는 중국 역사의 거시적 흐름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추이다.
중국은 수천 년 동안 중화제국으로 군림했지만 근대에 들어와 서양에 무릎을 꿇었다. 그 역사를 뼈저리게 각인한 시진핑 주석 등 중국 지도부는 이제 다시 과거 ‘위대한’ 중국의 힘에 의한 질서, 즉 ‘팍스 시니카(Pax Sinica)’ 체제의 강력한 힘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 같은 ‘중국몽’은 옛날 중화제국의 영광과 위상을 다시 세우려는 의도다. 시진핑 주석의 야심은 황제가 되고자 하는 꿈으로도 비칠 수 있다. 공산주의 이념을 견지하면서 공자를 앞세워 중국적 전통 가치를 전 세계에 퍼뜨리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가치를 확산시켜온 팍스 아메리카나와 부딪치는 한 요인일 수 있다.
장구한 중국의 역사에는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일치일란(一治一亂), 중앙집권과 분열, 구심력과 원심력의 순환 반복이 일어났다. 지금 시진핑 체제의 중국은 일치(一治) 시대로 중앙집권과 구심력이 최대치로 나아가는 도정에 있다. 그것이 정점에 서면 다시 일란(一亂), 분열, 그리고 원심력이 작용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시진핑 체제는 당분간 순항할 듯해도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밑으로부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산당 일당 독재가 휘청거릴 정도로 위기에 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의 변화는 우리나라에도 직접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중국의 변화와 동향 그리고 미래를 예측해야 할 이유다.
마오쩌뚱으로 ‘환생’ 꿈꾸는 시진핑의 야망
3월20일 폐막한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시진핑 신시대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국가 헌법에 포함시켰다. 시진핑 주석을 마오쩌둥의 위치로 격상한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10월, 중국 마오쩌둥 주석은 “반(反)혁명 분자 소탕”을 지시한다. 타이완으로 쫓겨난 국민당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자, 해외 제국주의 국가의 ‘비밀 요원’, 그 밖의 수상쩍은 인물 등이 대상이었다. 주석의 입에서는 1000명 중 한 명 이상이 반혁명 분자일 거라는 암시마저 나온다. 상명하달의 1인 독재 체제에서 최고 지도자의 한낱 어림짐작이 조직의 하부로 내려가면 ‘사실’로 굳혀지게 된다. 현장 실무자 처지에서는, 예컨대 성(省)의 인구가 1000만명이라면 1만명 이상을 처형해야 한다. 실제로 목표량을 초과 달성하기 위한 실무자들의 경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수사기관이 실체적 증거로 ‘위법(반혁명) 행위’를 입증하고, 판사가 검사와 변호인 간의 법정 공방으로 유무죄를 가린 뒤 범죄의 경중에 따라 형법에 정해진 처벌을 가하는 법치주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무법천지에서 1년여 동안 대대적인 학살극이 벌어졌다. 1954년 류사오치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은 모두 71만여 명을 처형했다고 공산당 지도부 회의에 보고한다. 당시 중국 인구(5억5000만명)를 기준으로, 1000명당 1.2명이 반혁명 분자로 처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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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nhua 3월17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만장일치로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에 재선출되었다. |
학살이 진행될 당시 각 도시의 육상 경기장 등에서는 대규모 군중집회와 함께 공개 집단 처형이 이뤄졌다. 주최 측(공산당)의 일방적 고발과 일부 군중의 질타로 반혁명 분자의 운명이 갈렸고 곧바로 집행되었다. 중국사 전문가 프랑크 디쾨터 교수(홍콩 대학·인문학)는 에스터 처오라는 젊은 공산당원이 집단 처형에 참여한 경험을 채록했다. 그녀가 베이징의 유명 관광지 부근의 처형장으로 가니, 양손을 등 뒤에서 철사로 결박당한 사람들이 꿇어앉아 있었다. 공안(경찰) 대여섯 명이 그들에게 다가가 뒤통수에 총을 쏘았다. 두개골이 깨지고 뇌수가 튀는 끔찍한 모습에 에스터는 고개를 돌렸다. 당 간부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고 억지로 그 광경을 보게 하면서 고함쳤다. “잘 봐! 혁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 <해방의 비극>).”
혁명이란 “이런 것”이 아니다. 최고 권력자의 자의적 판단 하나로 수많은 인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박탈하며 공포로 찌들게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 이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선거를 통한 집권, 삼권분립, 개인 권리 보호, 법치주의)로 특징지어지는 ‘근대사회’의 장단점을 나름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서구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빈부격차 심화, 식민지 쟁탈 및 세계전쟁, 민주주의 파괴로 나아가는 양상을 지켜보며 ‘근대보다 우월한’ ‘근대 이후(post-modern)의 시스템’, 즉 공산주의를 꿈꿨을 뿐이다. 다만 혁명 이후에도 상당 기간 ‘노동자·인민의 권력(공산당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지배계급을 억압(독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른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혹은 인민독재)’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론은 이후 중국이나 북한처럼 공산당(노동당)이 선거 없이 국가권력을 영구 독점하는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장치로 전락했다.
20세기 초·중반, 중국과 러시아 사회주의 현실은 혁명가들의 꿈과 거리가 멀었다. 당초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지향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꿈이 실제로 이뤄진 나라에서는 최고 통치자 1인만이 자유로웠다. 현실 사회주의는 스스로를 ‘근대 이후’로 착각한 ‘전(前)근대’에 불과했다.
마오쩌둥 사후 중국 최고 지도자 지위에 오른 덩샤오핑은 ‘독재’의 모순을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때 마오쩌둥의 손발로 무자비한 살상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결국 문화혁명의 희생자로 전락한 경험을 했다. 덩샤오핑 집권 이전 중국은, 최고 권력자나 집단(공산당)이 법률과 무관하게 인민의 생명은 물론 재산과 인권까지 박탈할 수 있는 나라였다. 법치가 아니라 인치(人治) 국가였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법치였다. 국가(통치세력)는 미리 정해놓은 법률로만 개인의 생명과 자유, 재산 등을 침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마오쩌둥의 중국에서는 형법도 민법도 제정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1978년 개혁·개방을 선언하면서 법치주의를 제창한다. “법제도가 강화되어야 한다. 공산당은 법에 의거해서 통치해야 한다. 그리고 법률과 제도는 지도자가 교체된다고 해서 바뀌면 안 된다.” 그 이듬해에 비로소 형법이 제정된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법치주의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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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 문화대혁명 당시 자아비판에 끌려나온 사람들. ‘주자파(자본주의 추종자)’ ‘대반역자’라는 문구가 보인다. |
하지만 덩샤오핑 역시 공산주의자였다. 공산당이 선거 없이 국가권력을 영구 독점하고, 공산당이 국가(법률) 위에 있는 정치체제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절충적인 노선을 취한다. 공산당 내부 규율을 바로 세우는 방안이다. 어차피 공산당이 다스리는 나라다. 공산당의 내부 규율을 강화하면 중국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 당시처럼, 지배세력인 공산당 내의 권력투쟁(문화혁명은 마오쩌둥이 정적들을 숙청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이 국가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위험성을 최소화해야 했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내의 여러 분파가 협의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집단지도체제’, 최고 지도자가 임기 중반쯤에 후계자를 지명토록 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 등 불문율을 정했다. 그는 “공산당이 헌법과 법률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라는 규약도 만들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에서는 공산당 지도부의 의사에 따라 헌법과 법률이 제·개정된다. 다만 덩샤오핑이 공산당과 국가(법률)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 시대를 거치며 느리지만 안정적으로 발전해온 중국 법치주의는 최근 들어 다시 역류에 휩쓸리게 된다. 지난해 10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부터 올해 3월 전인대까지 이뤄진 권력 재편 과정에서 최고 지도자의 권력이 마오쩌둥 이후 유례없는 수준으로 강화된 것이다.
중국 헌법에 따르면, 국가는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있다. 형식상으로는 공산당과 국가가 분리되어 있다. 공산당이 내부 회의를 통해 자체적으로 내린 결정이 몇 개월 뒤에 열리는 국가 차원의 행사에서 승인되는 순서이다. 지난해 10월 열린 ‘제19차 당 대회’가 바로 ‘공산당의 내부 회의’다. 제19차 당 대회에는 2300여 명의 지역 당 대표들이 참여해 중앙위원회(명목상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관) 위원 204명을 뽑았다. 중앙위원들은 다시 25명의 중앙정치국 위원을 선출했다. 중앙정치위원들은 다시 7명의 상무위원을 뽑았다. 이 상무위원들이야말로 공산당 및 국가의 실질적 최고 권력자들이다. 7명은 시진핑을 총서기(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로 재선출했다.
지역 공산당 대표들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위원 133명도 선출했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공산당 내부를 감찰하는 사정기관이다. 공산당이 곧 국가인 중국에서는 다른 나라의 감사원보다 오히려 강력한 권위를 지녔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시진핑 주석이 2013년 초에 최고 지도자에 오른 뒤 ‘반부패 전쟁’을 주도하며 그의 정적들을 숙청해왔다. 그 총책임자(서기)는 ‘시진핑의 오른팔’로 불리는 왕치산이었다.
지난 당 대회에서 가장 주목된 사건은 당장(黨章:중국공산당의 이념, 조직 등을 규정한 당내 헌법)의 개정이었다. ‘시진핑 신시대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긴 문구가 당장에 들어갔다. 현대 국가들에서 사람 이름이 당헌이나 국가 헌법에 들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중국은 예외다. 시진핑 주석 이전에도 이미 4명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 러시아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지도이념으로 당장과 헌법에 들어간 것은 이상하지 않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 교리 중 하나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서 공산당의 국가권력 독점을 정당화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고 지도자의 이름은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이론’이란 문구로 들어가 있다. 중국에서 사상이 ‘통합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관’이라면, 이론은 ‘특정 시대의 정치 노선’을 가리킨다. 즉, 공산당의 이념 체계에서는 마오쩌둥이 덩샤오핑보다 한 수 위다.
덩샤오핑과 시진핑 사이의 지도자인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이름이 아니라 정책 슬로건(‘삼개대표론’과 ‘과학발전관 사상’)으로만 당장과 헌법에 흔적을 남겼다. 장쩌민의 삼개대표론(三個代表論)은, 공산당이 노동자·농민(인민)뿐 아니라 지식인과 자본가의 이익까지 대표한다는 내용이다. 개혁·개방 이후 공산당은 시장경제의 발전을 용인하고 심지어 주도해야 했다.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수없이 양산된 자본가들을 적대시한다면 공산당은 국가와 전체 인민을 대표한다고 자처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科學發展觀)’은 시장경제 부작용에 대한 공산당의 위기감을 반영한 문구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으로 발전에 대해 사고하면서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지속 가능한 사회 발전을 성취하자는 이야기다. 이 같은 당장에 ‘시진핑’이란 이름이 마오쩌둥에게만 적용됐던 ‘사상’을 달고 삽입된 것이다. 시진핑 주석에게 고도의 이념적·윤리적·정치적 권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사상, 덩샤오핑은 이론, 시진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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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nhua 덩샤오핑(왼쪽)은 장쩌민(오른쪽)에게 권력을 넘기면서 공산당에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했다. |
이미 중국의 웹사이트에서는 ‘중국 역사 3단계론’이란 담론이 떠돌고 있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세웠다면, 덩샤오핑은 부유하게 했고, 시진핑은 강하게 만들었다.” 시진핑 주석이, 마오쩌둥은 물론 덩샤오핑과도 구별되는 ‘신시대’를 열어나가고 있다는 의미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시진핑 주석의 맞수가 되지 못한다. 제19차 당 대회는 또한 지난 5년(2013~2017, 시진핑 1기) 동안 시진핑 주석의 정책 슬로건을 100% 당장에 집어넣었다. ‘반부패 투쟁’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 주도의 ‘신 실크로드 전략 구상’) ‘공급 측면 구조개혁’ 등이다(30~32쪽 기사 참조).
시진핑 주석이 제19차 당 대회에서 이루지 못한 일은 ‘오른팔’인 왕치산을 공산당의 최고 권력층인 상무위원으로 유임시키지 못한 것 외에는 없다. 당 대회를 통해 장기 집권의 신호까지 인민들과 전 세계에 타전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은 10년(1기에 5년씩 모두 2기)에 걸쳐 공산당의 총서기와 국가주석 직을 맡았다. 집권 2기가 시작되기 직전 당 대회에서 아래 세대의 ‘젊은’ 당원(주로 50대)을 상무위원(현재 7명)으로 올리면, 그가 후계자로 해석되었다. 덩샤오핑이 만든 불문율이다. 이번 당 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50대 중 누구도 상무위원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시진핑 주석이 장기 집권을 노린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 예측은 제13기 전인대에서 적중되었다.
공산당의 의지를 국가 권력기구 재편으로 구체화하는 행사가 전인대다. 당 대회에는 공산당원만이 참여한다. 전인대에 참여하는 지역 대표 중에는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도 많다. 형식상 전인대는 공산당뿐 아니라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국가기관이기 때문이다. 전인대가 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국가원수인 주석과 부주석, 중앙군사위원회(국가의 최고 군사지휘 및 의사결정기구) 주석, 행정부인 국무원의 총리와 그 구성원 등 주로 국가기구의 책임자를 선출하거나 임명한다. 헌법과 법률의 제·개정도 전인대의 권한이다.
지난 3월20일 폐막된 전인대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시진핑을 국가주석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재선출했다. 그는 2013년 3월에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어 이미 1회의 회기를 마쳤다. 재선출로 보장된 회기는 2023년 초까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헌법은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회기(1회에 5년)를 2회로 제한해왔다.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재임 기간은 둘 다 10년(5년 임기를 2회 맡음)이었다. 이번 전인대는 국가 헌법에서 주석과 부주석의 ‘2회기 제한’을 삭제해버렸다. 찬성 2958표에 반대는 2표에 불과했다(무효 1표). 시진핑 주석이 다음 전인대가 열리는 2023년 초 이후에도 국가주석을 맡게 될 가능성이 열렸다. 마오쩌둥처럼, 사망할 때까지 집권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국가 헌법에도 ‘시진핑 신시대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갔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전인대에서 전체 국가·사회에 대한 당의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공포했다. “당이 공산당, 정부, 군대, 민간, 학계는 물론 모든 지역(동서남북중)을 영도한다”라는 마오쩌둥의 발언을 인용한 것이다. 행정부인 국무원과 그 총리인 리커창의 권한이 매우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국무원이 중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해온 것을 감안하면, 시진핑 주석과 공산당이 직접 경제 부문을 챙기겠다는 이야기로 간주될 수도 있다. 실제로 시진핑 주석은 자신의 ‘핵심 경제 자문관’으로 불리는 류허를 국무원 경제담당 부총리에 앉혔다. 류허도 ‘시진핑의 오른팔’로 불리는 인물이다. 벌써 ‘총리보다 강한 부총리’란 말이 나온다. 2010년대 초반까지 ‘차기 최고 지도자’로 시진핑과 함께 물망에 올랐던 리커창으로서는 대단한 굴욕이다.
‘2회기 제한’ 삭제로 장기 집권 기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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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갈무리 공산당이 국가주석의 2회기 제한 규정을 폐지한 것에 대해 중국 유학생들이 붙인 비난 포스터. |
공산당과 시진핑 주석이 행정부(국무원)를 더욱 강하게 통제하리라 보이는 징후는, 국무원의 핵심 부서인 국가발전개혁위원회(발개위)의 몰락이다. 발개위는 덩샤오핑 이후 중국의 경제발전을 사실상 책임져온 부서다. 산업정책과 개발 계획을 수립·승인하고, 국가 투자 사업이 제대로 시행되었는지 감독해왔다. 주요 상품·서비스의 가격도 책정했다. 심지어 시진핑 1기 때부터 강조된 기후변화 대응 및 오염물질 관리도 발개위의 소관이었다. 시장독점 감시도 맡았다. 한국이라면 과거의 경제기획원에 지금의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환경부 등을 모두 합친 정도로 비대한 조직이다. 리커창 등 경제 관료들의 권력 기반인 동시에 정경유착을 통한 부패 사건의 중심이기도 했다. 전인대가 발개위를 폐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기능을 축소하거나 신설된 자연자원부, 농업농촌부 등으로 이관했다. 명분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한 자원 배분을 활성화해서 중국 경제를 현대화”한다는 것이다(30~32쪽 기사 참조).
또한 막강한 사정기관인 국가감찰위원회(국가감찰위)를 신설했다. ‘반부패 투쟁’을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부정부패 단속기관으로는 공산당 내부에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있지만 조사 대상이 당원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에 비해 국가감찰위는 당원은 물론이고 공무원, 기업인, 지식인, 문화인 등 공공 부문과 연관 있는 인사라면 누구나 사찰할 수 있다. 권한도 매우 강하다. 혐의만으로 변호사 접견 없이 최대 6개월 동안 구금할 수 있으며 재산 동결 및 몰수 권한까지 지녔다. 시진핑 주석의 정적과 비판세력을 잠재울 ‘몽둥이’가 될지도 모른다. 국가감찰위 초대 주임인 양샤오두는 시진핑과 왕치산의 측근 중 측근이다.
이렇게 덩샤오핑 이래 집단지도체제가 막을 내렸다. 최고 지도자의 장기 집권 가능성도 열렸다. 공산당과 주석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면서 ‘국가 위의 당’을 어느 정도라도 법률의 틀 속에 가두려고 했던 덩샤오핑의 투쟁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중국 법치주의의 위기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 5년 동안 반부패 투쟁을 통해 정적들을 숙청한 끝에 무소불위의 몽둥이를 가지게 되었다. 이 몽둥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그는 중국 국영기업에 자리 잡은 기득권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시장 개혁을 촉진할 수 있다. 반대로 언론 및 개혁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국가감찰위를 활용하면서 계획경제를 확대할 가능성도 있다. 만약 시진핑 1인 독재 체제가 개인숭배와 인권 탄압, 계획경제로의 역류 등으로 이어진다면 중국은 마오쩌둥 시대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공산당’과 ‘시장경제’는 지속적으로 양립 가능할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취임 때 “시장에 기반한 자원 배분을 확립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영기업 내의 공산당 그룹에게 ‘투자 결정에 개입하라’고 권고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중국공산당의 권력 강화는 개혁·개방(시장경제)의 후퇴로 이어질 것인가? 일단 분명한 것은 중국 최고 지도부를 반(反)시장주의자로 간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공개적 발언과 일부 정책(공급 측면 구조개혁)을 감안하면, 시진핑 주석은 오히려 충실한 시장주의자에 가깝다. 2013년 국가주석에 처음 취임할 때나 최근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그는 일관되게 “시장에 기반한 자원 배분을 확립하겠다”라고 말해왔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의 급속한 성장을 이끌어온 경제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07년 원자바오 당시 총리는 중국 경제를 ‘4불(不) 경제’로 표현한 바 있다. ‘불’안정하고 ‘불’균형하며 ‘부’조화적이라서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이라는 설명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빈부격차 확대와 환경오염, 부정부패 등이 심각했다. 2010년대 초반 들어서는 성장률마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리커창 총리는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연설에서 올해의 목표 성장률을 6.5%로 정했다(지난해는 6.7%). 그러나 중국 지도부 내에서 실업률 급증 및 사회적 소요를 막기 위해 설정한 성장률은 무려 8%다. 이에 더해 그동안 민간과 정부가 쌓은 총부채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260%에 달하면서 금융위기 경보가 울려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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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nhua ‘시진핑의 경제 책사’로 꼽히는 류허 경제담당 부총리. |
‘국가(공산당)의 지나친 경제 개입’이 이런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중국 내외에서 공통적으로 평가한다. 시장경제 시스템에서는 개별 민간 주체들이 각자 자기 책임으로 ‘이후 유망할 것으로 보이는’ 상품·서비스 부문을 선택해서 투자한다. 은행 역시 대출 희망 기업의 사업계획을 나름 엄밀하게 심사한 다음에야 돈을 빌려준다. 시장경제에서는 원칙적으로 개별 경제주체들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투자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 국가가 의도적으로 투자 규모를 확대(성장률을 높이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아주 쉽게 투자를 늘릴 수 있다. 국영기업에 생산을 늘리라고 명령하면 된다. 이와 함께 국책은행에게 돈을 빌려주라고 요청한다. 국영기업과 은행의 경영진에는 당연히 공산당 조직이 들어가 있다. 중국의 지방정부(성)들은 상부에 보고할 도시 개발 실적을 높이기 위해 지역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사업을 확장하도록 권고한다. 대출 보증도 서준다. 결과는 높은 경제성장률, 비대한 부채, 부정부패다.
국영기업에 제일 중요한 일은 투자와 생산 규모를 늘려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다. 시장 수요나 기대 수익률을 참조하기보다 당의 명령을 수행해야 경영진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석탄·철강 부문의 국영기업들이 수요와 관계없이 마구 생산량을 늘리다 보니 상품 가격이 폭락하는 등 시장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중국의 철강 제조량은 글로벌 전체의 생산에서 절반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골머리를 앓아온 국영 부문의 ‘과잉생산’ 문제다.
국책은행은 총대출 가운데 70~80%를 국영기업에 제공한다. 국영기업들은 과잉생산으로 적정 수준의 수익을 올리지 못하면서 상환에 차질을 빚게 된다. 부채 규모가 점점 더 늘어나는 이유다. 지방정부를 배경으로 하는 눈먼 투자는 부동산 거품을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려놓았다.
‘반부패 투쟁’은 경제구조 조정의 성격도
미국 인터넷 매체인 쿼츠(Quartz)가 지난 1월18일 미국외교관계협의회(CFR)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국영기업은 대출 자금을 독식하는 반면 그 수익성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2011~2016년, 민간기업 부문의 이윤이 18% 증가한 반면 국영 부문의 그것은 33%나 떨어졌다. 중국의 민간기업 부문은 이미 GDP의 70%, 고용의 85%를 점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런 상황이니 공산당 수뇌부도 국영기업의 특권을 해체해서 ‘시장에 기반한 자원 배분’을 강화해야 경제 전체를 안정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주장에는 대체로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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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의 철강공장에서 근로자들이 강철 코일을 옮기고 있다. 중국 정부는 국영 부문의 ‘과잉생산’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
실제로 시진핑은 2013년 주석에 취임한 이후 시장주의적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가 주도한 ‘반부패 투쟁’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과잉생산, 비대한 부채 규모, 부동산 거품 등 경제적 폐해의 배경에 있는 ‘엘리트들의 커넥션(국영기업-국책은행-지방정부)’을 공격하는 경제구조 조정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시진핑 주석이 2016년 초에 제기한 ‘공급 측면 구조 개혁’은 한때 굉장히 급진적인 ‘친시장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뉴욕타임스>가 “마르크스나 마오쩌둥보다 레이건과 대처를 연상케 하는 정책”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2016년 3월3일자). 문자 그대로 ‘공급 측면(공급의 주체)’인 기업 부문의 구조를 개혁하자는 이야기인데,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는 석탄·강철 부문 등에서 과잉생산을 줄이겠다는 의지로 해석되었다. 국영 부문에 대한 긴축정책이다. 구체적으로는 국영기업에 대한 대출과 보조금을 줄이거나 끊고 일부 업체를 폐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부채를 줄이고, 경제 전반의 수익성을 높이며(국책은행이 민간기업에 대출할 수 있게 되므로), 국유 부문에 웅거한 부정부패 집단까지 척결할 수 있다.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 산업정책의 총지휘부였던 국가발전개혁위원회를 대폭 축소한 명분도 “시장 메커니즘을 통한 자원 배분을 활성화해서 중국 경제를 현대화”한다는 것이었다. ‘시진핑의 경제 책사’로 불렸던 류허를 경제담당 부총리로 발탁한 것도 주석의 복심을 암시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따르면, 류허는 ‘공급 측면 구조개혁’론의 창안자로 이번 부총리 임명은 ‘부채 폭탄’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류허는 2016년 5월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중국의 고성장은 끝났다”라는 내용의 익명 기고문으로 당시 국무원 경제담당 부총리인 장가오리의 ‘고성장론’을 질타한 바 있다. 장가오리가 ‘올해 경제성장 전망이 좋다’며 더 많은 자금 공급과 투자를 강조한 것에 대해, ‘고성장은 끝났으므로 투자와 부채를 줄이는 긴축정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라고 반박한 셈이다. 당시 류허는 공산당 산하 최고 경제정책 결정기구인 ‘중앙재경영도소조’의 주임이었다. 류허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후 중국의 대규모 경기부양 정책에 비판적이었으며, 시장친화적 개혁과 자유무역의 옹호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의 ‘실천’이 친시장적인 언행과 반대로 치달아왔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말, 2017년의 세계를 정리하는 특집호에서 “지난 3년(2015~2017년) 동안 “시진핑이 경제 영역에서 한 일은 모두 공산당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뿐이었다”라고 혹평했다. 입으로는 시장을 반복하면서 실제로 한 일은 국영기업 내의 공산당 그룹에게 ‘투자 결정에 개입하라’고 권고했으며, 심지어 알리바바·텐센트·웨이보 등의 지분을 확보해서 거대 IT 기업에 대한 통제력 강화까지 획책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당 대회 당시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새 시대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 정책’으로 꼽은 첫 번째 원칙은 “당이 모든 부문을 주도한다”였다. 공산당이 시장과 기업을 통제하겠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당 대회 연설에서 시진핑 주석은 “국영기업들을 더욱 강하고 더욱 좋고 더 크게 만들겠다”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말 나온 공산당의 경제 운영 청사진은 ‘합리적으로’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으나 ‘신용 팽창’을 요구했다. 목표 성장률인 6.5%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부채를 늘려도 상관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공산당으로서 시장경제를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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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nhua 2013년 9월22일 산둥 지방법원의 부패 혐의 재판에 출석한 보시라이 전 중국 충칭시 당서기(가운데). |
이렇게 중국 정부와 공산당의 말과 실천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중국 지도부가 ‘공산당으로서 시장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는’ 자가당착적 처지에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중국공산당은 당초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으로 출범했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수익성 중시’ 따위 냄새만 풍겨도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자’로 몰려 숙청당했다. 덩샤오핑은 이런 마오쩌둥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동시에 시장 시스템을 급속히 도입해야 하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이런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공산당의 정책 슬로건이 있다. 바로 1987년 자오쯔양 공산당 총서기가 제13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덩샤오핑의 동의를 얻어 제기한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이다. 자오쯔양은 중국이 이미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생산력이 지나치게 낙후되어 있는 ‘초급 단계’라고 주장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받는’ 사회주의 고급 단계 혹은 공산주의로 나아가려면, 상당히 긴 세월 동안 시장경제로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고급 단계’는 언제쯤 도래하는가? 자오쯔양에 따르면 최소한 100년 뒤다.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 주창자들은 자신의 이론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100년 뒤에는 모두 ‘마르크스를 만나고 있을 것(공산당 지도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빗대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경제 시스템의 중심을 ‘계획에서 시장으로’ 옮기겠다는 이야기를 사회주의 문헌의 용어들로 교묘하지만 엉성하게 포장한 것이다. 문자로 표현된 공산당의 노선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시장 개혁은 적어도 단기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끌어내리고 이에 따라 공산당의 영향력까지 줄일 것이다. 국영기업에 대한 보조금과 대출을 줄이고 일부 업체의 문까지 닫으면 단기적으로 수백만명 규모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시진핑 주석의 ‘1인 독재’ 체제는 중국의 장기적 발전을 염두에 두고 친시장 개혁에 저항할 엘리트와 인민들을 억압하기 위한 장치로 준비되었을 수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시진핑 주석의 권력 강화에 대해 ‘공산당이 중국의 지배자로 살아남기 위한 심사숙고의 결과’라고 평가한다. ‘선의의 독재’라는 호의적 평가다. 설사 그렇다 해도, 정치적 독재로 중국을 선진화된 시장경제 시스템으로 발전시킨다는 프로젝트가 현실화할 수 있을까?
19세기를 살았던 카를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그 붕괴로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공산당이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소동의 진앙에 시진핑이 있다
이 눈치 저 눈치 다 봐야 기껏 8년을 권좌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어서 그럴까. 미국 대통령들은 상대적으로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도가 지나친 경외심을 표현하기로 유명하다. 리처드 닉슨은 마오쩌둥을 만나 “주석님의 글은 세계를 바꿨다”라고 치켜세웠다. 지미 카터가 덩샤오핑에게 바친 형용사의 행렬은 끝이 없다. 현명하고, 강인하고, 지적이며, 솔직하고, 용기 있고, 자상하고, 자기 확신이 있고, 붙임성 있고…. 빌 클린턴에게 장쩌민은 ‘비전이 있으며’ ‘비상하게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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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원 그림 |
‘투 머치 토커’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라고 밀릴 리 없다. <워싱턴포스트>가 인용한 바에 따르면 그가 보기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아마도 지난 100년간 중국에 나타났던 지도자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이다. 그리고 ‘세계에서도 가장 힘센 권력자’이다. 경제력에서나 군사력에서나 중국이 미국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기꺼이 세계 1인자 자리를 시진핑 주석에게 양보한 셈이다.
종종 증명되듯이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만만치 않은 통찰력이 있다. 시진핑 주석이야말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많은 권력을 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감투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모든 것의 의장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8년간 러시아를 마음대로 주무르고도 이번에 다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한 블라디미르 푸틴조차 조금은 뒤처진 느낌이다. 푸틴은 2024년이 되면 합법적으로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다. 아마도 이번에는 푸틴 대통령조차 시진핑 주석에게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진핑 주석 처지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신과 맨 먼저 정상회담을 한 것은 지금 국제무대에서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만천하에 과시한 쾌거였다. 그는 처음 화해의 물꼬를 튼 문재인 대통령이나 북한의 오랜 숙적인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 앞서 국제정치 무대의 뜨거운 신상품인 김정은 위원장을 선점했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 인민에게뿐만 아니라 점차 한반도와 아시아 전체, 그리고 전 세계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어쩌면 늙어죽을 때까지 중국을 다스릴지 모른다는 예상이 현실이 되자 미국과 유럽의 엘리트는 복잡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체적으로는 중국에 ‘속았다’라기보다는 스스로 오판했다고 책망하는 분위기이다. 소련이 해체된 뒤 마지막 남은 공산주의의 거인인 중국을 글로벌 경제체제에 끼워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비관론자들은 중국이 서방과의 협력으로 날개를 단다면 결국 아시아의 안정을 위협하고 말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낙관론이 대세였다.
낙관론자는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을 가진 차세대 자본주의의 호랑이가 될 것이며 그것이 중국에도 세계에도 이로우리라 믿는다. 안타깝게도 낙관론자의 각론은 거의 다 틀렸다. 그들은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두터워진 중산층이 민주주의와 평등, 인권 같은 서양의 가치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정치인이나 전문가들이 중국을 방문하면 중국인 청중 앞에서 (글로벌 경제체제에 편입된 덕분에) 중국인들이 이룩하게 된 눈부신 경제성장을 칭찬하고 앞으로 민주주의와 인권도 점차 향상될 것이라고 점치곤 했다. 그들은 아편전쟁 이후 걸핏하면 중국에 훈계를 늘어놓던 열강의 외교관들과 다름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낙관론자들은 자기들이 오만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아시아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조지 워싱턴이나 링컨보다는 한국의 박정희나 싱가포르의 리콴유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게 틀림없었다. 미국과 유럽은 법치주의가 중국에 이롭다는 걸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중국에서 법은 결코 당보다 우위에 설 수 없었다. 지금 법치주의를 신봉하는 친서방 성향의 법률가 중 상당수가 감옥에 있으며 나머지는 침묵한다.
중국은 거꾸로 친중국 정치가와 학술단체에 자금을 제공하고 언론을 매수하거나 출판사를 괴롭히는 방법으로 그들만의 가치를 서구에 전파하는 중이다. 중국 정부는 해외에서 거주하는 중국 유학생들의 애국심을 고취해 ‘홍보대사’로 활용하는 데도 소홀함이 없다. 중국의 젊은 세대가 서양의 가치를 쉽게 받아들일 것이라던 예상 역시 틀렸다.
통신의 발달, 특히 인터넷이 중국 정치에 권위주의가 발을 못 붙이게 만들 것이라는 예상도 무참히 빗나가고 말았다. 중국 정부는 감시 경찰 수만명을 양성해 인터넷 통제라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중국은 지금 국가가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인터넷도 얼마든지 정밀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중국식 인터넷 통제 모델은 전 세계 독재국가에서 인기가 높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계만은 중국에 대한 불만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중국에 밉보여 퇴출된다면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재계의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특히 중국이 특정 국가에 대한 정치적 불만을 해당 국가의 사기업에 푸는 데는 질렸다는 반응이 대세이다. 중국 정부가 한국의 사드 배치를 빌미로 롯데에 보복을 가한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과 서구의 고위 관료, 외교관, 사업가들의 사적 모임인 ‘스톡홀름 차이나 포럼’에서도 최근 이 문제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참석자들은 이 모임에서 ‘희망 피로’를 호소했다고 알려졌다. 중국의 규제자들이 새벽에 들이닥쳐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지식재산과 글로벌 고객 명단이 들어 있는 컴퓨터를 가져갈 때면 중국 시장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첨단 기술 기업은 지식재산에 대한 중국 정부나 기업의 노골적인 염탐과 도둑질에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상태이다. 미국과 유럽의 대기업조차 중국 정부를 위한 치어리더 대열에서 점차 이탈하고 있다.
때마침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산 알루미늄과 철강 등에 관세 폭탄을 안기면서 양측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진 상태이다. 냉전 시대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기에는 이르겠지만 미국과 유럽은 불가피하게 중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과정에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노선에 반대하는 자유무역론자들조차 로봇·생물의학· 전기자동차 등의 시장에서 챔피언이 되겠다는 중국 정부의 ‘메이드 인 차이나 2025’ 계획에 우려를 표한다. 중국 정부의 보조금 지급, 국가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는 국영기업의 경쟁 아닌 경쟁,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 제한 등 자유무역 정신에 역행하는 반칙 행위가 지금보다도 훨씬 노골화되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작은 정치적 자유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시진핑 주석
유감스럽게도 비관론자들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중국 정부는 군대의 ‘근육’을 무시무시하게 키우고 있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웃들에게 힘을 과시하곤 한다. 중국이 2000년 러시아에서 전함 몇 척을 사올 때만 해도 미국 해군 7함대는 중국 해군을 깔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군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전력을 갖췄다. 지난해 아프리카 동부 지부티에 최초로 해외 기지를 열었다. 지난해 7월에는 유럽 관문인 발트해에서 러시아군과 합동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중국은 남중국해에 군사용 활주로를 갖춘 인공섬도 만들었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다른 국가들에게 배타적 경제수역(370㎞) 안에서 허락 없이 군사훈련을 못하게 하는 협정을 맺자고 요구한다. 다분히 미국을 의식한 무력시위다.
중국은 여전히 지금까지 (나라로 취급하지 않는 타이완을 제외하고는)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도, 앞으로 침략할 생각도 없다고 말한다. 최근 강화된 모든 군사 행위는 해적을 막고 인권 유린을 예방하기 위한 조처라고 말하지만 비관론자들 눈에는 ‘함포 외교의 재림’으로 비칠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소동의 진앙에 바로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는 아주 다른 유형이다. 국제사회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 해외 순방 때마다 평화와 친선의 사도, 이성의 목소리임을 자처한다. 2017년 1월 다보스 포럼에서 그는 세계화와 자유무역, 그리고 기후변화 협정을 지켜내는 챔피언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겉보기에 시진핑 국가주석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보다 훨씬 멀쩡하다.
하지만 국내에서 그의 얼굴은 다르다. 작은 정치적 자유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그는 잠시라도 방심하면 나라가 소련 같은 꼴을 당하리라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시진핑 주석은 경제 관료로서 입지를 다졌지만 정작 정치에 더 관심이 많다. 이번 헌법 개정을 통해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의 반열에 스스로를 올려놓았는데 덩샤오핑보다는 마오쩌둥에 가까운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휴대전화로 무장한 중산층과 시민단체를 신용하지 않는다. 경제 역시 당이 단단하게 장악하고 있어야만 안정되고 발전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일부 낙관론자들은 세계가 아직 시진핑 주석의 진면목을 다 본 것은 아니라며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 나면 그가 국내에 폭넓은 자유를 허용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그들은 묻는다. 하지만 그런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적임자는 비관론자일 것이다.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한 지도자치고 언론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한 예가 있었던가. 그의 집권 기간이 10년, 15년으로 늘어날수록 중국은 점점 더 숨 막히는 곳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그는 고작 5년 만에, 덩샤오핑이 마오쩌둥 시대로 돌아가는 걸 경계해 만들어놓은 모든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말았다. 권력을 스스로에게 집중해 14억 인구의 국가를 위기에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다. 중국에도, 세계에도 위험한 일이다. 우리로서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도,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도 시진핑 체제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제554호에 계속).
하버드가 물었다...중국은 무엇인가?
[최재천의 책갈피] <하버드대학 중국 특강>
2018.04.20 01:00:25
"시진핑 정권에서 마오쩌둥은 마치 자철석 같은 존재다. 마오는 시진핑의 정책을, 그리고 시진핑이라는 개인의 국가·사회적 역할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궁극적인 도구로 작용할 것이다."
"왜 지금도 마오쩌둥이 중요한가-시진핑의 중국이 마오주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에 대한 답이다.
하버드대학 페어뱅크 중국연구소 설립 60주년을 맞아 연구소 석학 36명이 직접 질문을 던지고 답했다. 이름 하여 <하버드대학 중국 특강>(이은주 옮김, 미래의창 펴냄). 책은 중국의 과거, 현재, 미래 등 크게 세 가지 범주별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과거에 관한 핵심 메시지는 '역사'가 중요하다는 것. 현재와 관련해서는 '복잡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미래 부문의 핵심 메시지는 '중국이 직면한 도전과제'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중국 지도자는 약 5명 중 1명꼴로 90세 넘게 생존했다. 이에 비해 미국의 지도자는 7명 중 1명, 인도는 9명 중 1명, 소련은 10명 중 1명이 90세 이상까지 살았다. 그렇다고 중국의 평균 수명이 이들 나라보다 결코 긴 건 아니다.
2012년 <뉴욕타임스>가 전·현직 정치권 상무위원과 불멸의 8인(마오의 측근으로, 상무위원이든 아니든 간에 지난 6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한)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과거 60여 년 동안 중국 정치권력의 정점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해 온 정치인은 총 61명이었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무려 79세였고, 연령 중앙값은 78세였다. 한 나라에서 지도자가 더 오래 산다는 것은 그것이 그 나라에서 중요한 문제라는 얘기가 된다. 바로 중국이 그렇다. 그래서 질문이 나왔다. "중국 지도자가 장수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체제를 안정시키는 도구인가, 변화를 가로막는 요인인가."
"조직 내부 차원에서는 통치 스타일이나 후계자에 대한 영향력 측면에서 연속성이 유지된다는 점이 있다. 따라서 이념적 지향성과 정책 집행 지속성에서 타 국가를 압도한다. 다른 한편 중국공산당 내에 조성된 파벌을 고착화시키고, 지위 고하와 세대를 불문하고 당을 향한, 혹은 국가 지도자를 향한 충성심을 유발하는 역할도 한다."
질문과 대답 하나 하나가 값지다. "중국인들이 미국 유학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대학 불신과 불만이 미국 대학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에서 공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중국 정권은 공자를 서구 신자유주의에의 대항마로 인식한다.

▲ <하버드대학 중국 특강>(이은주 옮김, 미래의창 펴냄) ⓒ미래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