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우리는 말한다 “이런 시대를 끝내자” - 아이들이 목석으로 변해가요

일취월장7 2018. 4. 6. 10:55

우리는 말한다 “이런 시대를 끝내자”

이민경 (작가)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4월 03일 화요일 제550호

걸그룹 레드벨벳 멤버 아이린이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했다. 남성들 사이에서 팬을 그만두겠다는 선언이 이어지고, 아이린의 사진을 태우거나 자르고,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는데 이럴 수 있느냐’라는 반응도 나왔다. 말 그대로 난리였다. 같은 날 동덕여대 학생들은 하일지 교수 파면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그가 수업 중 안희정 사건의 피해자를 모욕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또 그가 지금껏 일삼았던 온갖 여성혐오적 언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여자들은 자신을 강간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장애인은 성관계를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 ‘여류 작가 냄새가 나는 것들을 혐오한다’. 심지어 그 역시 여러 학생을 성추행한 가해자였다는 사실도 드러냈다.

언어는 사고를 반영한다. 한 마디를 잘못한 사람은 한 마디만 잘못하지 않는다. 말을 잘못한 사람은 말만 잘못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한 다음 날 나는 출신 학교가 아님에도 동덕여대에 갔다. 그가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교 벽에는 노교수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직접 진실을 찾아 나서겠노라는 학생들의 대자보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언어는 사고를 확장한다. 남성이 여성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게 철저히 억압했던 역사가 긴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최근 아주 짧은 역사 동안 여성 입지가 변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책 읽는 여자는 오랫동안 찾아보기 어렵다가, 노골적인 박해를 받았다가, 은근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린 에피소드’는 동덕여대에 도착한 순간에도 내내 화제였다. 그녀가 읽은 <82년생 김지영>은 일반적인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온화한’ 소설이다. 여성이 그저 여성의 이야기를 읽었다는 게 공분을 일으킨 사건에서, 이 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아이린에 분노한 남성도, 아이린에 분노한 남성에 분노한 여성도 다 안다.

이것은 한 명에게 일어난 한 번의 해프닝이 아니다. 여성들이 학교에 간다고 했다가 책을 찢기거나 얻어맞던 시절도 있었다. 남성들의 분노는 여성이 자신의 언어를 직접 찾아 나서고 확장하는 데 대한 분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분노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언어를 갖는다면 더는 이전과 같이 여성을 통제할 수 없다는. 여성의 분노는 전처럼 가만히 통제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나온다. 한 불길은 사그라질 것이 두려워 타오르고, 다른 불길은 이제야 지펴진 것에 분개해 타오른다.

“우리는 우리의 문학을 써나갈 것이다”


많이 읽다 보면 쓰기 마련이다. 동덕여대 졸업생과 재학생이 함께 쓴 또 다른 글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이제 당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학을 써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도 적혀 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 이런 시대를 끝내자.” 읽다 보면 쓰게 되듯이, 사고는 언어를 낳고 언어는 또다시 사고를 낳다가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행동을 낳는다. 행동은 모여 변화가 된다. 그날 하일지 교수는 이런 말을 반복했다. “나는 부끄럽지 않고, 진실을 말했으니 사과할 이유가 없다. 나중에 말하자. 보도 자료를 봐라.” 궁색하고 조악한 이 말은 놀랍게도 무려 20년간 교수직에 몸담고 평생 문학만을 추구했다던 이의 입에서 나왔다. 약동하는 학생들의 말과 달리 정체된 말이었다. 여태 우리는 겨우 이런 말들을 문학이라 추어올렸던가. 그래서 그들은 여성이 글을 쓰는 순간이 오기를 애써 막았던가. 이렇게 한 시대가 간다.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82년생 김지영’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레드벨벳의 아이린, 《82년생 김지영》 읽었다고 밝히자…

노혜경 시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06(금) 08:00:00 | 1485호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었다. 기억은 그가 움베르토 에코 같다고 말해 주지만, 기억을 확신할 수는 없다. 하여간 에코라고 추정되는 그 작가가 하루는 재미있는 실험을 한 일이 있다. 소설이 하도 잘 팔리니까, 제대로 읽히고는 있는지가 궁금해졌던 거다. 책의 중간쯤에 반송엽서를 끼워 제본을 해 출판사로 그 엽서를 보내오는 독자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는, 극히 일부 독자만이 엽서를 보내왔다. 엽서가 있는 페이지까지 열어본 독자들 중 일부만이 엽서를 보냈다고 추정하더라도 턱없이 적은 비율이었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그의 소설을 명성에 끌려 구입한 독자들의 대부분은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고 짐작되는 것이다.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하는 방법 같은 책도 있을 정도이니 구매가 곧 교양이 되는 것은 이탈리아나 우리나라나 특별히 다를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읽지 않은 소설이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는 것을 넘어, 읽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읽은 사람들이 수난을 당하는 일까지 발생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풍경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다. 평양행이 결정된 걸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이라는 멤버가 이 책을 읽었다고 하자 대소동이 벌어졌다. 사진을 찢고 ‘굿즈’를 불태우는 등 광란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일들이 방송을 탔다. 이유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었으니 페미니스트라는 것이다.

 

걸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왼쪽)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히며 한동안 논란이 일었다. © 연합뉴스·시사저널 고성준

걸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왼쪽)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히며 한동안 논란이 일었다. © 연합뉴스·시사저널 고성준


 

이 사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해도 자꾸만 움베르토 에코 식의 의심이 드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그 소동을 벌인 남성들은 과연 이 책을 읽었을까? 《장미의 이름》만큼 난해한 소설은 아니니, 읽고 나니 페미니스트가 쉽게 될 것 같아 보이던가?

 

나는 또 왜, 읽지 않은 채로 작성되던 수많은 금서 목록과, 읽지 않고 작성된 것이 틀림없는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의 《소녀경》이 떠오를까. 논쟁을 하더라도, 소동을 벌이더라도 그 출발지점은 좀 깊이 있었으면 좋겠다. 김지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김지영을 읽다니 실망이야”라는 이상한 말을 해도 상관없는 나라라는 게 정말 안타깝다.

 

이와 유사한 블랙코미디가 생각난다. 1990년대 초반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사물함에 지니고 있던 사병이 제대를 얼마 앞두고 불온서적 소지죄로 영창에 갈 뻔한 일이 발생했다. 이때 그 사병을 조사하기 위해 한 헌병이 책을 읽었다. 그런 다음 그 헌병은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불온서적이 아니라고 했다가 대신 영창엘 갔다. 괘씸죄에 걸렸을 것이다. 불온하다면 불온한 거지 왜 읽고 난리냐. 《개그콘서트》의 소재가 됨 직한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82년생 김지영》은 금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서 이 책은, 또는 이 책보다 진한 페미니즘 서적들은 자발적인 금서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세상의 속도는 이 자발적 금치문학자들을 내버려 두고 신나게 달려갈 것이 틀림없지만, 나는 안타깝다. 절대적으로 말해 김지영은 소설 속의 오직 유일한 한 사람(허구)이지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보통의 여성들을 적당히 반영한 사람이기도 하다. 허구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현실의 여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목석으로 변해가요

문정우 기자 woo@sisain.co.kr 2018년 04월 05일 목요일 제550호

충동과 절제는 인류가 오랫동안 고심해온 주제 중 하나이다. 인간은 어째서 당장의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중에 드러난다면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걸까. 고대 그리스인은 이 문제를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통찰했다.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 <일리아드> <오디세이>에는 전장을 누비는 영웅도 사실은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심지어 신조차도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사로 간통을 저지르고 복수하며 망신을 준다.

<일리아드>가 충동을 다루었다면 <오디세이>는 절제를 말한다. 그렇다고 오디세이가 목석은 아니었다. 공명심을 앞세우다가 위기를 맞았고 매력 있는 여성의 손짓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10년에 걸친 오랜 여정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깡그리 객사한 일행과 그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디세이는 쾌락을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물러설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그의 자제심은 부족함이 없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던가. 자신을 숭배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스캔들 한번 없었던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란 대부분 스스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누군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충분한 지식이 없어서거나 외부 요인이 있어서라고 설명했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그의 주장은, 성폭력을 될 수 있으면 상대의 유혹이나 질병 탓으로 몰아가고 싶어 하는 요즘의 가해자 쪽 변호사의 입장과 맞닿아 있다. 또한 호르몬 변화나 어린 시절 경험, 포도당, 도시 생활 등 자기 절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외부 요인을 규명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을 격려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한성원 그림
충동과 자제력을 둘러싼 토론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강자 중의 강자이다. 그는 “나는 적을 정복하는 사람보다 스스로를 극복하는 사람이 더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과잉 못지않게 결핍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욕망의 결핍은 발전을 추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중독이 질병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따랐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되 면죄부는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름다움을 비율과 조화에서 찾았던 그리스인의 성향과 연관된다.

그리스 시대로부터 2000년 넘게 지났지만 충동과 자제는 여전히 골치 아픈 논쟁거리이다. 최근 과학은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실험 결과는 우리가 어떤 일을 왜 하는지 잘 알지 못하며, 행동의 규제가 의식의 통제 밖에 있는 다양한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인간은 유전자의 신호에 반응하는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형편이다. 가해자 쪽 변호사들은 유전학·신경학·심리학이란 끌과 망치를 휘두르며 개인의 책임이라는 건물을 부수느라 여념이 없다.

게다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돈과 권세가 있는 명망가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마저 자제심을 발휘하기 힘들게 몰아세우는 중이다. 세계화로 획일화되어가는 이 행성은 성적 충동뿐만 아니라 마약·담배·술·도박 등을 거의 무한 리필하는 뷔페나 다름없다. 미국이나 유럽의 명망가들은 순간의 충동에 못 이겨 패가망신하는 일을 겪지 않으려고 경호원까지 고용하는 지경이다. 마약이나 부적절한 이성 관계에 빠지지 않도록 본인이 이성을 잃고 해고 위협을 가하더라도 나중에 문제가 될 행동을 절대 하지 않도록 철저히 막아달라는 계약을 맺는 것이다.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서는 안 될 사람과 시간대에 전화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는 앱도 인기를 끌었다. 최근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나 연극연출가 이윤택씨 등의 사례에 비춰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조만간 이런 사업이 번창하지 말라는 법이 없겠다.

미국에서는 자발적으로 음식물 섭취량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매년 20만명이 넘는 사람이 위 절제 수술을 받는다. 흡연, 나쁜 식습관, 과음, 위험한 성관계 탓에 해마다 100만명이 넘게 사망하는데 이는 전체 사망자의 절반에 육박한다. 이는 미국식 소비 방식을 받아들인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세계는 지금 충동과의 전쟁이라는, 앞의 두 차례 세계대전보다도 훨씬 사상자 수가 많은 비극을 겪는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인 사망자 수는 40만명에 ‘불과’했다. 인류는 충동이 과연 자기 탓인지 의문을 갖기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자기 절제력을 기르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처지이다.

인간의 충동과 절제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갈래지만 그 전제는 다 같다. 인간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유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마따나 우주의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 욕심의 한계는 알기 힘들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상식에 반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충동 조절에 실패해 쩔쩔매는 기성세대가 무색하게도 젊은 세대 가운데는 수도사 같은 이들이 늘어간다. 그들은 부모 세대에 비해 술·담배·마약· 섹스 따위에 덜 이끌린다. 이들에게 ‘무엇인가’가 일어난 게 분명하다. 예전의 청소년, 즉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담배·술·설탕이 최고였다면 지금은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미국에서 네덜란드, 칠레, 한국에 이르기까지 주로 먹고살 만한 나라들에서 이런 흐름은 일관된다. 그리고 그 흐름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빨라졌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아이들이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 술을 입에 대는 나이도 늦어지고 있다. 유럽에서 술 잘 마시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국의 16~24세 젊은이 중 5분의 1이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술꾼의 메카였던 펍이 매년 1000개씩 사라진다. 젊은이를 상대로 한 나이트클럽의 형편은 더욱 좋지 않다. 평일 밤 11시만 돼도 셔터를 내려야 할 지경이다. 2003~2015년 스웨덴에서는 금주자가 11%에서 31%로, 아이슬란드에서는 23%에서 61%로 늘어났다. 유럽 약물감시센터에 따르면 1999년 이후 10대의 술·담배·마리화나· 흡입제·진정제 같은 ‘기분전환물’ 소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예전처럼 서로 나쁜 영향을 주고받지도 않는다. 주먹질과 반사회적 행동도 현저히 줄었다. 유럽 전역에 청소년이 2007년에 3000여 명이 수감돼 있었으나 지금은 1000명 이하로 줄었다.

술·담배 같은 나쁜 쪽에 손을 뻗지 않는데도 행복해 보이지 않아

젊은이들은 섹스도 잘 하지 않는다. 미국의 20~24세 중 18세 이래 섹스 파트너가 없었던 비율이 15.2%에 달한다. 1960년대 중반에 태어난 이들은 그맘때 6.3%만이 섹스 파트너가 없었다. 일본의 경우 극단적이다. 2002년 미혼 남성 중 섹스를 한 번도 안 한 비율이 34%에서 2015년 47%로 늘어났다.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은 한때 전 세계가 신기하게 봤던 일본이나 한국의 ‘오타쿠’들을 점점 닮아간다.

정확한 원인을 알아내려면 아직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우선 아이들은 겁에 질렸을 수 있다. 청년 실업률의 증가와 함께 OECD 국가 청소년 중에는 장래에 결국 홈리스가 되고 말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는 비율이 늘어간다. 그들은 자신이 친구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나 로봇과의 경쟁으로까지 내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가방 끈을 늘리는 데 시간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OECD 국가에서 2000~2016년 24~34세 학사 학위 이상 소지자가 26%에서 43%로 증가했다. 반면 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원은 현저하게 줄었다.

부모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한다. 특히 아버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 조사에 따르면 부자 나라 34개국 가운데 29개국에서 아버지와 말이 잘 통한다는 자녀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부모와 소통을 하든 안 하든 아이들은 가정에서 고분고분해지고 있다. 부모가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기술은 감시망을 촘촘하게 만들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문자를 검색하고 어디 있느냐고 언제라도 물을 수 있다. 지금은 세계의 어떤 오지로 캠프 여행을 가더라도 수시로 부모와 화상통화를 할 수 있다.

아이들은 거의 100% 과도한 스마트폰·소셜 미디어 유저이다.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15세는 하루 평균 146분 동안 온라인에서 살았다. 그보다 겨우 3년 전인 2012년에는 105분이었다. 최장 시간을 기록한 칠레 아이들은 주말에 거의 4시간, 230분을 인터넷과 씨름했다.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이나 소셜 미디어가 아이들이 다른 여러 가지 실체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만드는 주범이 아닌지 의심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지나친 사용이 아침을 거르거나 그 전날 잠을 설치는 것보다 아이들의 삶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도 아직은 단언할 수 없다.

아이들은 술·담배나 마약처럼 나쁜 쪽에 손을 뻗지 않는데도 예전보다 행복한 것 같지는 않다. 아이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더 외로워졌다고 호소한다. 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 따르면 거의 모든 나라에서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비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예전에는 ‘정상’이었던 스웨덴이나 독일마저 한국(20% 남짓)을 추월해 일본(30% 남짓)에 육박해가는 중이다. 아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욕설·가십·야동은 교환하지만 예전 세대처럼 직접 체액과 주먹·담배·소주는 나누지 못해 불행한 걸까. 아이들은 의학의 발전과 수명의 연장에 반응해 욕망을 충족하는 속도도 늦춘 것일까. 우리는 욕구를 손쉽게 뒤로 미룰 수 있는 중요한 진화의 한 단계를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시간 재벌이 아니던가.

참고한 활자:<자기 절제 사회>(민음사), <이코노미스트> <워싱턴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