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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 '파시즘' 청산!

일취월장7 2018. 4. 3. 11:56

'친일파' 청산? '파시즘' 청산!

[장석준 칼럼]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이다. 또한 그렇기에 제주 4.3의 70주년이기도 하다. 이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대한민국의 숙명이다. 이 공화국의 정부 수립 기념일은 마치 하늘의 형벌인 양 늘 4.3의 피와 눈물, 비명과 함께 해야 한다. 흔한 개국 신화의 천진난만한 승리의 찬가는 허락되지 않는다. 공화국 시민인 우리 모두는 어둡고 당황스러운 이 진실을 상기하고 또 상기해야 한다.

4.3이 어떠한 사건이었는지는 이제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 현기영의 단편소설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상에 다가갈 수 있었던 시대는 더 이상 아니다. 게다가 일흔 번째 해를 맞아 여러 언론이 4.3을 나름 무게 있게 전하고 있다. 가령 모든 기사를 4.3에 할애한 <한겨레21> 전권특집호의 경우는 그간 이 사건을 잘 모르던 이조차 진상에 바로 육박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4.3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역사라기보다는 '제주'의 역사로만 여겨지는 면이 있다. 제주도 밖 사람들에게 4.3은 결코 잊어선 안 될 비극이되 먼 옛날, 저 먼 변방의 일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지금 내 삶과 4.3의 거리는 4.19나 5.18을 바라볼 때에 비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4.3을 제대로 추념하기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장애물일지 모르겠다.  

1948년에 등장한 대한민국의 여러 얼굴  

4.3이 과연 얼마나 우리 모두의 현재와 깊이 연루돼 있는지 따지려면, 우선 저 운명의 해, 1948년을 돌아봐야 한다. 5월에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이렇게 선출된 초대 국회의원들이 헌법을 제정해 8월에 정부가 수립됐다. 비록 38선 이남 지역만의 선거였고 항일독립운동의 주요 세력들(근로인민당, 민족자주연맹, 한국독립당 등등)이 불참했지만, 제헌국회의 헌법안 토론은 사뭇 치열하고 깊이가 있었다.  

열띤 토론은 그 결실인 대한민국 첫 헌법에 반영됐다. 제헌헌법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토대로 삼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의 대세이던 사회(민주)주의의 자본주의 비판까지 일부 수용했다.  

한국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신체의 자유에 대해서까지 토를 달기는 했다. 하지만 일당백으로 이들에 맞선 또 다른 의원들(가령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통합을 꾀했던 고려혁명당 정신을 잊지 않은 이청천, 의열단 출신인 문시환 그리고 조봉암 등등)의 고투 끝에 "사회정의의 실현"을 경제 질서의 최고 가치로 못 박고 농지개혁, 공공성 있는 기업의 국유화, 노동자 이익균점권까지 담은 헌법이 탄생했다.

새 국가가 탄생하는 광경으로서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제헌국회의 헌법 토론을 통해서만 꼴을 갖춘 게 아니었다. 제헌국회가 활동에 나서던 바로 그 때에 제주도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완전히 다른 얼굴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4월 3일에 발생한 남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 주도의 무장 행동을 진압한다며 들어온 국방경비대와 서북청년단이 새 질서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헌국회의 동향과 상관없이 헌법 속 약속보다 훨씬 강력한 실체를 지닌 질서를 구축했다.  

애초부터 이렇게 될 일은 아니었다. 단독 선거를 부정하는 세력의 무장 행동이 있었다고 해도 이에 합당한 해결 절차는 4월 28일에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남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 김달삼이 벌인 평화회담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강경파의 압력과 극우 단체의 개입으로 평화회담 성과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정부 수립 즈음인 7월에 송요찬 중령이 9연대를 이끌기 시작하며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됐다.

빨치산과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던 중산간 마을 주민들에게는 소개령이 내렸다. 한라산 중턱에서 수천 년 이어오던 마을들 자체가 더 이상 거기에 있어선 안 된다는 명령이었다. 당연히 오랜 삶의 터전을 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더구나 소개령 자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들 모두가 학살당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있어선 안 될 존재로 규정돼 절멸됐다.  

제헌헌법은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권자임을 선언했고(제2조), 국가의 임무를 무엇보다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에 두었다(제5조). 또한 신체의 자유를 헌법 맨 첫머리(제9조)에 둬서 국가가 가장 먼저 보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군복과 완장, 완전무장의 형상을 한 국가가 사람들을 '국민'과 '비국민'으로 나누었다. 국가가 '국민'과 '비국민'을 가려내는 곳에서 국민은 결코 주권자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국가 앞에 자신이 '비국민'이 아님을 입증해야 할 잠재적 총살 대상자일 뿐이었다. 사실 입증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국가의 절대 권력에 순종하며 삶이든 죽음이든 처분에 따라야 할 뿐이었다.  

20세기 역사를 아는 이들에게 이 장면은 그리 낯설지 않다. 4.3의 비극이 시작되기 몇 년 전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이 제3제국 안에 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 그러니까 좌파,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등등을 청소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제국과 괴뢰 만주국에서 천황의 질서에 순응하길 거부하는 모든 이들이 '비적'('공비'라는 말의 뿌리)으로 몰려 토벌 당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인 파시즘 체제들이다.

4.3 중의 제주도는 패전으로 막을 내린 줄 알았던 이 파시즘의 귀환을 연상시켰다. 게다가 제주도로 끝이 아니었다. 1948년 11월에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1년 뒤에야 계엄법이 통과됐으니 법률 근거조차 없는 계엄령이었다. 이로써 제주도는 대한민국 정부가 공인한 헌법 적용의 예외 지대가 됐다. 더불어 초토화 작전 중의 제주도는 헌법 속 약속들을 유예한 상태란 어떤 모습일지 보여주는 표준 사례가 됐다.

법률 체제도 새로 정비됐다. 제주도에 계엄령이 내리고 한 달 뒤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 이후 국가보안법은 점차 헌법 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 법률이 되어갔다. 국가보안법 앞에서 모든 국민은 "반국가단체"에 속하지 않음을 입증할 책임을 지닌 잠재적 처벌 대상자였다. 역시 입증할 방법이란 막연했다. 또한 그만큼 국가(특히 공안 기구)는 더욱 절대적인 권력의 주인이 됐다. 어느덧 4.3 중의 제주도는 대한민국 전체의 질서가 되어갔다.

그 연장선에 한국전쟁 중의 보도연맹 학살이 있었다. 거창을 비롯한 곳곳의 양민 학살이 있었다. 자유당 시절의 정치 테러가 있었고, 군부 독재가 저지른 고문과 의문사가 있었다. 학살이 될 뻔한 1979년 부산, 마산이 있었고, 1980년 5월 광주의 또 다른 학살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처참한 과거를 '좋았던 옛 시절'인 양 추억하던 최근까지의 정권이 있었다. 이 모든 연쇄의 시작점이 되는 고리, 그것이 4.3이다. 

'친일'이 아니라 '파시즘'이 문제다  

4.3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파시즘의 검은 그림자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1년간 소개 작전이라며 학살이 휩쓸고 간 뒤에 제주도 곳곳에는 '집단부락'이라는 이름의 새 정착촌이 건설됐다. 빨치산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마을 주위에 성곽을 쌓았고, 소개된 주민들을 감시하려고 망루를 올렸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도 비슷한 민간인 소개와 정착촌 건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럼 제주도가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끼친 것인가? 아니면 뿌리가 따로 있는가? 

집단부락 안에서는 또한 '보갑제'라는 독특한 주민 감시 체계가 작동했다. 마치 통반제처럼 10호마다 묶어 '패'라 했고, 다시 패를 묶어 '갑'이라 했다. '보'는 갑들이 모인 최대 단위로서 경찰 관할 구역과 일치했다. 만약 어느 패에서 빨치산에 동조했다고 의심 받는 이가 나오면 패 전체가 처벌 받았다. 그러나 패 안에서 의심 가는 이를 미리 신고하면 신고자는 처벌에서 면제됐다. 학살에서 어렵게 살아남은 이들조차 이런 연대책임제 탓에 서로를 감시하는 모진 세월을 이어가야 했다. 그럼 보갑제는 또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집단부락, 보갑제, 모두 발상지는 만주국이다. 만주국은 '순천안민'이니 '오족협화'니 온갖 유토피아적 비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관동군이 세운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실험장이었다. 당연히 중국인, 재만 조선인의 저항이 있었고, 만주국은 이들을 모두 비적이라 칭하며 박멸하려 했다. 급조된 만주국 행정 체계가 미치지 못하는 벽지와 변경에서 비적 토벌이란 곧 촌락 자체의 파괴를 뜻했다. 만주국은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에 '집단부락'이라 불렀다. 그리고 집단 부락 안에 상호 감시 체계를 만들고는 '보갑제'라 이름 붙였다.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기다릴 뿐이었다.  

이 만주국 파시즘 체제가 4.3 이후 제주도에 그대로 이식된 것이다. 경찰과 국방경비대 안에 포진한 총독부 경찰, 일본군, 만주군 출신자들에게 이는 너무도 낯익은 언어이고 관행이며 제도이자 철학이었다. 그들에게 제주도민은 저항하는 변방인 혹은 '비국민'이었고, 이런 이들에게 어울리는 처방은 토벌 작전, 강제 이주, 상호 감시였다. 그리고 미국은 한때 자신들이 맞서 싸운다고 공언했던 이런 요소들을 동아시아 반공질서 구축에 동원하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어쩌면 토벌 작전 주역들에게 '국가'란 애초부터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경험하고 기억하며 숭상하는 국가란 오직 1930년대 이후 파시즘화한 일본이나 조선 총독부, 만주국이었다. 제헌국회의원들이 아무리 불가침의 인권을 논하고 국민 주권을 말해도 제주도에서 '국가'를 대표하던 이들에게 이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수사일 뿐이었다. 새 국가의 집권자들은 그들에게 파시스트 국가관에서 깨어날 틈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격려하고 찬양하며 권력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이 요소는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을 이루는 여러 얼굴들 중 하나였다. 아니, 가장 대표적인 얼굴이었다. 이는 자유당 정권 내내 권력 핵심에 포진했을 뿐만 아니라 5.16 쿠데타로 새롭게 전성기를 이어갔다. 유신 정권은 만주국 출신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상징하듯 이런 체제의 정점이었다. 우리는 이를 흔히 '친일(파) 잔재'라 부른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란 곧 '친일파 청산'이라 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친일파 청산'이 아니다. '파시즘 청산'이다. 물론 1930~40년대 전시에 일본 제국주의가 동아시아에 만들어놓은 질서에 뿌리를 두었으니 관성적으로 '친일 잔재'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친일파 가계와 인맥이 아니고 또 일본을 배격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가기구 안에 포진해왔고 우리의 국가관에도 똬리를 틀고 있는 어떤 요소가 문제다. 이 요소에 붙여야 할 바른 이름은 '파시즘'이고, 4.3은 이것이 새 나라 대한민국에 확고히 자리 잡은 결정적인 계기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장기 반(反)파시즘 투쟁'  

대한민국 안의 파시즘 요소에 맞선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천황제 파시즘에서 시작돼 4.3을 계기로 새 나라에 그대로 이어진 파시즘 요소들은 최근까지도 국가기구 곳곳에서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면 항일독립투쟁과 민주화운동 모두 이러한 파시즘에 맞선 오랜 투쟁이었다. 얼마 전 우리가 이뤄낸 촛불 항쟁도 그렇다. '장기(長期) 반(反)파시즘 투쟁'이라고나 할 긴 여정이고, 아직 채 끝나지 않은 길이다.  

우리가 이 길 위에 서 있음을 잊지 않게 하는 빛이 바로 4.3이다. 그 빛에 이끌려 우리는 물러섬 없이 오직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래서 4.3은 결코 제주도만의 과거일 수 없다. 그때 쓰러진 목숨들은 대한민국 모든 시민이 항상 머리맡에 두길 잊지 말아야 할 경고장이든가 아니면 모두의 별빛이어야 한다. 


▲ 4.3을 다룬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자파리필름



4·3 70년, 정의를 묻는다

1948년 4·3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원통함을 풀지 못한 희생자가 많다.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누군가 대변해주어야 한다.

이규배 (제주국제대 교수·제주4·3연구소 이사장)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4월 02일 월요일 제550호

1948년 4·3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4·3을 헤쳐 나온 분들에게는 지금도 잔혹한 그날이 어제 같기만 할 것이다. 그때 경험담을 들려주는 어르신들의 입은 떨림으로, 눈에서는 마르지 않는 눈물이, 심장은 터질 듯이 박동을 더해갈 따름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떠난 대로, 남은 사람들은 남은 대로, 깊은 기억 속에 각인된 지워지지 않는 이 70년 질곡의 세월은 고통의 깊이가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상처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어느 날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자식들, 처녀라는 이유로 죄도 없이 치욕적인 수난을 당하고 죽음을 맞아야 했던 여성들, 이름도 짓기 전에 비명에 간 어린아이들, 재판도 없이 무슨 죄가 있는지도 모른 채 어디론가 끌려가 땅에 파묻히고 바다에 수장되어 죽어간 숱한 사람들,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식들을 죽이고 자식들을 대신해서 그 아비를 죽이며 남편을 대신해서 그 아내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무고한 이웃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강요하는 만행의 시간들이었다.

ⓒ김흥구
4·3 70주년은 4·3을 직접 체험한 세대들의 마지막 10년 주기라고 한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2014년 66주년 추념식에서 한 유족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

전쟁도 아닌 와중에 2만5000명~3만여 명이 희생되었으니, 이 엄청난 죽음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저 밥 짓고 밭에 나가 일하고 하루하루의 소소한 희로애락 속에 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낮에는 경찰이 무섭고 밤에는 산사람이 무서워서,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두려움에 몸서리쳐지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는 증언들은 4·3의 비극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참혹한 것이었는지 웅변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무자비하고 잔혹해야 했는가? 전국 어디서나 일어섰고 제주에서도 똑같이 일어선 1947년 3·1절 기념대회는 뭐가 잘못됐으며, 어린 소년을 말굽으로 치고 지나치는 기마경관에 대한 항의가 대체 무슨 잘못이기에 군중을 향해 총질을 해댔는가? 조국의 분단은 안 된다며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건 무슨 죄였으며, ‘빨갱이’ 사냥에 혈안이 된 공권력의 불의와 탄압에 맞선 정의로운 저항 또한 무슨 과오였는가? 그래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 모든 공권력의 잘못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자는 제주 사람들의 움직임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진상 규명 운동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군부독재의 이름으로 철저하게 속박당하고, 작가와 시인과 학생들과 의로운 제주 사람들은 다시 고초를 겪고 오랜 시간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다. 1988년 4·3 40주년이 돌아오고, 1998년 50주년이 다시 와도 세월은 멈춰 있는 듯, 그 억울함은 누구로부터도 치유받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해에 “20세기에 일어난 일을 21세기로 넘길 수 없다!”라는 도도한 진상 규명의 열기가 1999년 12월 숱한 고난 끝에 ‘제주4·3특별법’을 만들어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힘을 모아주었던가? 악인이 있으면 귀인도 있는 법, 대한민국의 1%밖에 안 되는 제주의 아픔을 위해 정의롭고 선한 많은 분들이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김흥구
4·3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무속 행위.

2003년 10월15일 제주 4·3의 진실을 담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가 정식 ‘정부 보고서’로 채택되었다. 보름 후에 희생자 유족들과 제주 사람들이 그렇게 목말라하던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대한민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2006년 대통령이 4·3위령제에 처음 참석했다. 모두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의 일이다.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님, 감사합니다!’란 외침과 감동을 얻는 데는 반세기가 넘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4·3평화공원도 조성되기 시작했고, 희생자들은 그 영원한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

2008년 4·3 60주년, 대대적인 기념행사였다. 기념사업위원회가 꾸려지고, 4·3으로 섬을 떠났던 사람들이 4·3으로 다시 제주 땅을 밟았다. 그분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감동, 그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이 이렇게 바뀔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랬을 것이다. 조국의 ‘나쁜’ 정치 때문에 고향을 등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조국의 정부 이름으로 고향에 초대된 것이다.

이제 4·3 70주년, 4·3 당시 20세 청년이었다면 이제 아흔을 바라본다. 70주년은 4·3을 직접 체험한 세대들의 마지막 10년 주기라고 한다. 더 이상 시간이 흐르기 전에 지금 해야 할 일,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지금까지의 진상 규명 운동 성과 위에 무엇을 하나 더 쌓아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정명(正名)’


가장 가슴에 남는 것은 이 사건과 모든 죽음에 대한 정당한 해석이다. 70년 전에 죽은 어린아이의 영혼들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모진 세월 속에 죽음을 강요당했고, 살아서 통곡의 세월을 보낸 모든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 전 나는 제주4·3평화공원 위패 봉안소를 찾았을 때, 방명록에 “희생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을!”이라고 쓰지 못하고,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라고 썼다. 그건 통상적인 위로의 메시지 이상으로 망자를 살아 있는 영으로 대하고, 그들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망자가 대화할 수 있다면, 꼭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지 않겠는가.

ⓒ김흥구
노꼬메 오름에서 보는 제주 중산간 풍경과 비석 없는 무덤들.
오름은 4·3 때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된 비극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해방 정국에서 제주 사람들은 시위도 항의도 평화적으로 했다. 최소한 4·3 발발 직전까지 제주 사람의 폭력으로 유명을 달리한 경찰이나 서청(서북청년단), 군인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이유다. 제주 사람들 손에 피가 묻지 않았으니, 평화적으로 모든 사태가 수습될 수도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태는 대량학살이라는 최악의 길로 가고 말았다. 그래서 해방 조국을 통치하던 그때 미군정은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미국의 책임을 묻고 싶지 않겠는가. 이승만과 경무부장 조병옥 등은 대체 무슨 근거로 제주를 ‘붉은 섬’으로 매도하고 그렇게 혹독하게 탄압을 해야 했는가? 그때의 위정자들에게 불법·탈법의 과도한 학살 책임을 어찌 묻고 싶지 않겠는가. 일단의 보수 세력은 지금도 70년 전 그때처럼 ‘폭동’이니 ‘폭도’니 하며 4·3을 폄훼하는 온갖 언설을 내뱉고 있다. 4·3을 왜곡하고 혐오 발언을 하는 행위에 대해 그 책임을 단호하게 묻는 ‘과거사 처벌법’이 만들어졌으면 하지 않을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명(正名)’이 아닐까 싶다. 70년 전 제주의 4·3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아달라고 하지 않겠는가. 시위와 항의 대열에 참여했든 안 했든, 제주 사람들 대부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할 줄 알고, 판단도 했을 것이다. 불의와 탄압이 있었으니 거기에 저항했고, 조국통일이 옳은 길이니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 반대했다. 제주 곳곳에서 시위와 항의가 있었고, 많은 동네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한 건 그 때문이다. 민족의 염원과 간절한 민심을 아랑곳하지 않는 ‘검은 야욕’에 맞섰을 뿐이다. 민족의 지도자 김구와 김규식도, 전국의 동포들도, 그렇게 떨쳐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제주 사람에게 죄가 있었다면, 우리 민족 수백만명, 혹은 그 이상이 모두 죽어 마땅한 죄인이란 소리가 되지 않겠는가. 정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망자들에게 마땅히 돌려줘야 할 몫, 그것을 돌려주는 것이 70주년을 기점으로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70년 전 그때 일을 온당하게 평가하고, 그 억울함을 씻어주는 ‘해원(解寃)’. 만일 망자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의 끝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르는 보복과 혈투가 아닌, 참된 평화와 정의여야 함을 70년 전 제주는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