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엄마와 딸의 말 못할 이야기

일취월장7 2017. 10. 13. 16:42

엄마와 딸의 말 못할 이야기

엄마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동시에 수호자다. 딸들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까이해하고 싶다사이에서 방황한다. 모녀 갈등을 살펴보면 여성의 삶을 옥죄는 사회의 코르셋이 보인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7년 10월 13일 금요일 제525호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고 한다. 예전에는 남아 선호 사상이 있었다면 이제는 여아를 선호하는 세상이라고 했다. 기혼 연예인을 필두로 SNS에는 ‘딸 바보’ 인증이 유행처럼 번진다. 강지영씨(가명·33)는 코웃음을 쳤다. “딸들이 아들에 비해 ‘가성비’가 좋잖아요. 아들처럼 애지중지 키우지 않아도 결국 비행기 태워주는 사람은 딸이라면서요. 딸 선호 현상이라는 게 결국은 더 만만한 여성을 착취하는 새로운 형태 아닌가요?”

선호 이전에 선택이 있었다. 범띠·용띠·말띠 해에 태어난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는 ‘미신’은 극심한 성비 불균형을 가져왔다. 그 결과 사회는 가임 여성 인구 감소와 저출산이라는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남아 선호 사상은 수많은 딸들을 배제시켰다. 1970년부터 실시된 통계청의 인구동향조사를 보자. 여아 100명당 남자 신생아 수는 범띠 해인 1986년에는 111.7명, 용띠 해인 1988년에는 113.2명, 말띠 해인 1990년에는 116.5명이었다. 모두 결혼 적령기인 25~34세에 걸쳐 있는 인구다.

현재의 여아 선호 현상이 남아를 선별적으로 낙태하는 데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아 선호 사상’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얼마 전 아들을 출산한 이진희씨(36)의 말은 상징적이다. “저나 남편은 딸을 원했는데, 아들이라고 했더니 당장 친정엄마가 안도하더라고요. 마치 만점짜리 시험지를 받아온 날처럼. 시댁 눈치를 보신 거죠. 우리야 우습게 여기지만 ‘대’를 잇는다는 통념만큼 강력한 게 있나 싶고….”


ⓒ시사IN 윤무영



가정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동시에 강력한 수호자다. 엄마 역시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규칙을 내면화해왔다. ‘엄마 노릇’은 엄마와 딸의 삶 모두를 옥죄는 족쇄가 된다. 역시 살아남아 장성한 딸들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까’와 ‘이해하고 싶다’ 사이에서 방황한다. 많은 딸들이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지만, 이 단단한 가부장제의 구조 속에서 지키고 싶은 사람 역시 엄마다. 갈등은 숙명이다.

남녀평등을 글자로나마 배운 딸들에게 균열은 작은 곳에서부터 발생한다. 오빠가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나가거나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고마워서 어쩔 줄 몰랐다. 주서영씨(27)는 자기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오빠가 하면 특별해지는 ‘가사노동의 마법’ 앞에서 허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먼지 같은 차별을 매번 반복적으로 꼬집어 항의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일이다. “엄마 레퍼토리가 있어요. 딸이나 아들이나 다 똑같은 자식이라고, 다 아픈 손가락이라고…. 정말 그런가? 내 경험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주씨는 명절을 좋아해본 기억이 없다. 엄마를 도와도 봤고, 일부러 돕지 않기도 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마음은 불편했다. 이런 엄마와 딸의 갈등을 살펴보면 여성의 삶을 옥죄는 사회의 ‘코르셋’이 보인다.

■ 엄마는 ‘얼굴 평가’ 전문가?


“살면서 엄마한테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외모 지적일걸요?” 김진영씨(29)가 웃었다. 살이 쪄도, 또 너무 빠져도 안 되었다. 헤어스타일 간섭은 예사이고, 옷은 어떻게 입어도 못마땅해했다. 누군가의 입길에 김씨의 외모가 화제로 오르기 전에, 엄마가 선수 치는 모양새랄까. 김씨의 친구 중에는 ‘애프터서비스’라며 성형수술을 권하는 엄마도 있었다. “못생기게 낳았으니 돈으로 후속 조치를 해준다는 거죠.”

많은 딸들이 최초로 만나는 ‘얼굴 평가자’는 엄마다. 사이토 다마키 일본 쓰쿠바 대학 교수(사회정신보건학)는 대담집 <나는 엄마가 힘들다>(책세상, 2017)에서 모녀 관계의 특수성을 몸에 대한 동일시에서 찾는다.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여성다움을 지향하는 훈육의 핵심은 ‘여성다운’ 몸과 태도를 기르는 데 있다. (중략) 딸에 대한 엄마의 훈육은 딸의 몸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시작된다. 모녀 문제의 발단에는 이런 ‘신체적 동일화를 통한 지배’가 있다. 모자, 부녀, 부자 관계에서는 볼 수 없는 속성이다.”

데보라 태넌 미국 조지타운 대학 교수도 <엄마,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 (예담, 2017)에서 사회적 분위기에 원인이 있다고 분석한다. “여성은 나이를 막론하고 외모로 평가를 받고, 사회에는 개인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미의 기준이 존재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엄마는 자연스레 딸의 얼굴과 몸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가족·미디어 등 불특정 다수의 ‘심사위원’에게 딸이 어떻게 비칠지 관리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일을 자신의 트로피로 여기게 된다.

극단적으로는 추함을 선호하기도 한다. 젠더 폭력이 만연한 사회가 딸을 지켜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성폭력의 원인이 외모가 될 수 없지만 차라리 이유가 외모라고 생각하면 편했기 때문이다.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었던 송정희씨(가명·57)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매일 밤 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자는 어린애 붙잡고 기도했던 게 뭔 줄 아세요? 예쁜 외모로 자라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누구 눈에도 띄지 말아줬으면 했죠. 엄마가 24시간 지켜줄 수 없는데 누가 해치기라도 할까 봐….”

■ ‘좋은 엄마’라는 불가능한 목표


결혼과 육아가 여성의 삶에서 성공과 실패의 지배적인 잣대였던 시대가 있었다. 과거형으로만 쓸 수 없다. 관습은 힘이 세다. ‘엄마다움’이나 ‘엄마 노릇’에 대한 세세한 기준은 높아진 여성의 학력·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한다. ‘맘충’이라는 호칭의 등장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엄마와 사회의 참견은 계속된다. 너무 많은 육아 전문가가 등장하고 매번 새로운 방법이 공유되며 이는 세대를 막론하고 ‘여성’을 괴롭힌다. 이때 엄마가 딸을 바라보는 시선은 양가적이다. 엄마는 딸의 직업적 성공을 바라면서도 때때로 딸의 일을 취미 생활쯤으로 여긴다. 어째서 ‘나와 달리’ 자식이 먼저가 아니냐는 비난이 딸에게 향하기 일쑤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앞둔 이성연씨(가명·31)는 최근 어머니와 크게 다투었다. “꼭 복직해야겠냐는 거죠. 일이 애보다 중요하냐고,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시댁에서 그런 말이 나왔어도 환장할 노릇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그렇게 말하니까… 안 그래도 심란한데 속이 뒤집어지더라고요. ‘공부는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라고 소리 질렀죠(웃음). 엄마가 나를 그렇게 키우지 않아놓고, 그렇게 살라고 하니까 기가 막혔어요.”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가 추진했던 핵가족은 아들·딸 구분 없이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로 수렴됐다. 그 덕분에 ‘딸만 있는 집’도 가능하게 했다. 엄마 세대 역시 가정주부에 머물기도 했지만, 경제적 주체로 등장했던 시기다. 2년 전 외동딸을 결혼시킨 함숙희씨(가명·61)는 일과 육아를 병행해봤기 때문에 딸이 짊어져야 할 무게를 안다고 말했다. “늘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사람들은 맞벌이하는 부부에게서 아빠의 역할은 안 물어봐요. 엄마만 찾거든. 다른 것보다 딸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해야 할까. 아이만 잘 길렀으면 어땠을까, 나처럼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긴 하죠. 행복이 다른 게 아닌데 싶고. 나는 그걸 많이 놓치고 살았거든요. 딸한테 말은 못했어요.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웃음).”

엄마는 딸이 ‘정상 가족’의 신화가 공고한 사회에서 이탈할까 봐 긍긍한다. 자신이 수호해왔거나, 한편으로는 노력했으나 지키지 못했던 가치를 딸이 지키기를 원한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결혼을 못하느냐”라는 말도 엄마들의 단골 멘트다. 양소영씨(29)는 이렇게 질문한다. “결혼을 안 하면 내가 외롭게 살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잘못 키운 거 같아서 견딜 수 없는 건 아닌가 싶어요. 나는 엄마로서 할 일을 다 했는데 너는 왜 남들과 다르게 살아서 나를 오해받게 하느냐는 거죠.”

소설 <딸에 대하여>(민음사, 2017)는 이 지점에서 맞춤하게 등장해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동성 애인을 둔 딸에게 엄마는 이렇게 묻는다.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혼인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딸은 답한다. “엄마 같은 사람이 못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소설은 그렇게 가족의 기존 정의를 해체하고, 다시 묻는다. 내 삶 속에서 생겨난 딸이, 나의 조건 없는 호의와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존재가 사실은 독립된 ‘개인’임을 증명한다.

■ ‘청구서’는 딸에게 더 많이 도착한다


리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반비, 2016)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를 통해 엄마와 딸의 관계를 탐색한다. ‘어머니는 아들들에게는 당신의 문제를 늘 숨겨왔다. 그들은 어머니의 가장 좋은 모습만 상영하는 극장의 관객이었고, 어머니도 그걸 바라셨다. 나는 늘 무대 뒤에, 상황이 훨씬 지저분한 곳에 머물렀다.’

솔닛의 어머니 역시 자신의 두 아들이 하는 일은 ‘중요하고’ 딸이 하는 일은 ‘부차적인 것(“너는 집에서 일하잖니”)’으로 여겼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딸에게 더 쉽게 손을 내밀 수 있었던 이유다. 많은 딸들이 비슷한 감정의 문제를 호소한다. ‘키워준 값’에 대한 청구서는 정서적으로 가까운 딸에게 더 자주 도착한다.

“‘너 아니면 내가 어디에 얘기하느냐’라고 할 때마다 숨이 막혀요. 자식밖에 남은 게 없는 엄마처럼 늙지 말아야지 다짐해요(정준희·33).”

“엄마가 화를 내거나 신세 한탄을 하면 그게 꼭 내 잘못 같거든요? 내가 더 잘해야 하는데…. 알면서도 지치죠. 나는 엄마가 자신의 감정을 버리는 쓰레기통이 아닌데(오진영·가명·26).”


ⓒ시사IN 이명익
9월16일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살림센터가 마련한 세대 이해 프로그램 ‘65년생 박미숙, 90년생 김유진’ 워크숍이 진행되고 있다.

■ 서로의 삶을 질문하다


9월16일 서울혁신파크 미래청에서는 5060 여성과 2030 여성이 섞여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살림센터가 마련한 세대 이해 프로그램 ‘65년생 박미숙, 90년생 김유진’ 워크숍이 진행됐다. 워크숍을 진행한 ‘진저티 프로젝트’의 서현선 팀장은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소소한 질문을 이어갔다. ‘좋아하는 영화와 노래는 뭔가요?’ ‘좋아하는 대통령이 있나요?’ ‘더 배우고 싶은 게 있나요?’ ‘스스로에게 주고 싶은 선물은?’ 같은 식이었다. 한 참가자는 “엄마한테(딸에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라고 말했다.



서 팀장이 이날 워크숍에서 강조한 것도 ‘다름’이었다. “가족이라고 하면 서로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잘 인지 못해요. 다 안다고 생각해서 평소에는 묻지 않았던 질문을 통해 엄마와 딸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취업·출산·육아… 엄마 세대가 경험했고, 그래서 다 아는 단어 같아도 지금에 와서 그 내용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워크숍 막바지 참가자들은 메모지에 ‘내 인생의 중요한 사건’ 3가지를 적어 한쪽 벽 타임라인에 붙이고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건은 ‘결혼’ ‘출산’ ‘취업’처럼 간명한 단어로 적혔지만 그 안에 고여 있는 사연들은 제각각이고, 또 비슷했다. 고부갈등을 비롯해 남편과의 갈등, 딸에 대한 미안함, 엄마에 대한 서운함 같은 감정들이 말로 터져 나오는 동안 참가자들은 종종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시사IN 신선영
9월9일 서울혁신파크 50플러스에서 열린 세대 이해 워크숍 ‘폐경과 완경 사이’.


<엄마,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의 저자 데보라 태넌 교수는 책을 닫으며 이렇게 적는다. ‘몇 년 전만 해도 누가 물었으면 나는 평생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평생 엄마를 찾기 위해 애썼다고 말할 것이다.’

가부장제 속에 파묻힌 엄마를 찾기 위해, 또 딸을 찾기 위해서는 각자의 질문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가부장제 위에서 모녀가 ‘연대’하는 방법도 그 목소리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엄마와 딸은 서로에게 질문을 선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