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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 99'냐, '20 대 80'이냐

일취월장7 2017. 10. 11. 15:17

'1 대 99'냐, '20 대 80'이냐

[장석준 칼럼] '중간층-저소득층' 공동 이익 구조, 새로운 복지 동맹
2017.10.10 11:34:18

외환위기를 겪은 지 얼마 안 된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아직 낯선 사회과학 전문용어였다. 그때 이를 설명하려고 동원된 도식이 '20 대 80 사회'였다. 20%만 살 길을 찾고 나머지 80%는 버림받는 사회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이런 설명은 쑥 들어갔다.

2008년 금융 위기가 터지자 신자유주의의 위상은 급속히 추락했다. 뉴욕 월스트리트 같은 자본주의 심장부에서 체제를 뒤엎자는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 대 99 사회'라는 표현이 회자됐다. 1%의 슈퍼리치가 99%, 그러니까 사실상 만인을 패배자로 만드는 게 신자유주의라는 성토였다. 이후 '1 대 99' 도식은 어느덧 신자유주의에 염증을 느끼거나 분노하는 대중의 상식이 됐다.  

그런데 최근 이 도식들이 새삼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발단은 한국 사회의 대립 구도를 '1 대 99'라고만 보기 힘들다는 문제제기다. 기득권을 누리는 집단이 1%뿐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1%'에 해당하는 재벌만 문제가 아니다. 기득권층은 그보다 훨씬 더 두텁고 다양하다. 혹자는 기득권 집단의 목록 안에 민주화 세대 중산층을 넣고, 혹자는 대기업 정규직과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지목한다.  

그러면서 '20 대 80'론을 다시 입에 올린다. 그런데 '20 대 80'을 이야기하더라도 20여 년 전과는 어감이 사뭇 다르다. 과거에는 단지 '20'이 '80'에 비해 소수임을 보이려는 도식이었지만, 이제는 '1 대 99'론에 견줘 비판이나 극복 대상이 '1'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이 주된 메시지다. 단지 크기만 한 게 아니다. '1%'의 자리에 '20%'가 들어가는 만큼, 사회 개혁의 방법론도 훨씬 복잡해져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과연 어느 쪽이 우리 현실을 해명하는 데 더 적합한가? 개혁 대상은 이른바 '1%'인가, 아니면'20%'인가? 바꿔 말해 개혁의 주체는 그럼 '99%'인가, '80%'인가?

신자유주의는 동맹의 정치를 통해 작동한다  

이런 논란이 얼핏 번잡하고 공허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퍽 뜻 있는 논의라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를 '1%의 지배'로만 바라보는 시각의 한계를 잘 지적하기 때문이다. 물론 '1 대 99'론이 전혀 사실무근인 것은 아니다. 특히 시야를 지구 전체로 돌리면, 신자유주의 지구화 30여 년만에 한 줌도 안 되는 거대 자본 소유주와 극소수 엘리트가 나머지 인류 위에 군림하는 광경이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한 단면일 뿐이다. 만약 현실의 다른 측면들 없이 노골적인 '1 대 99' 구도만 존재한다면, 이 질서는 단 며칠도 더 지탱하기 힘들다. 어떤 폭력을 동원하더라도 이런 질서를 지킬 수는 없다. 혁명이든 공멸이든 둘 중 하나다. 그래서 대변혁을 바라는 사회운동가들의 선동 언어 속에서 현실이 자주 이런 대립 구도로만 이야기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이런 운동가들에게는 아쉬운 이야기지만, 신자유주의는 이보다는 훨씬 더 영악하고 단단한 지배 체제다. 최소한 한 세대 동안은 세상의 표준인 양 행세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는 파시즘과 달리 대의민주주의의 대립항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대의민주주의를 빈껍데기로 만들었을망정 이를 뒤엎지는 않았다. 철저히 대의민주주의의 룰에 따라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작동시켰다.  

그러자면 선거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대중이 형성돼 있어야 한다. 적어도 신자유주의에 적극 반대하는 이들을 고립시킬 수 있을 정도로는 지지 및 중립 여론의 지대를 넓혀야 한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런 지지 동맹을 구축함으로써 등장했고, 이 동맹을 유지, 확대함으로써 자신의 역사를 써나갔다. 세계 금융 위기를 겪은 지금도 신자유주의 질서가 막을 내리지 않는 것은 이런 동맹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거나 다른 동맹에 압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동맹은 단지 선거 정치에서 기발한 담론을 구사한 결과만이 아니었다. 영국, 미국의 대의제에 결함이 있어서(가령 승자독식 선거제도) 대처나 레이건식의 정치 세력이 과대 대표된 탓만도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시스템 자체가 새로운 이익 동맹을 창출했다. 이 공동 이익의 비전에 밀려 이제껏 복지국가의 토대를 이루던 동맹에 균열이 갔다. 그리고 일단 이런 이익 동맹이 들어선 뒤에는 굳이 선동에 힘쓰지 않아도 선거에서 매번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가 확인됐다. 오히려 전통 좌파 정당들이 '제3의 길'이니 '신중도'니 하는 이름으로 새 합의를 따라야 했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어떤 장치가 이런 이익 동맹의 기반이 됐는가? 금융화와 직결된 자산시장이었다. 마거릿 대처의 영국 보수당 정부가 초기부터 주력한 정책 중에는 BT(브리티시 텔레콤)나 BP(브리티시 페트롤륨) 같은 거대 공기업의 주식 매각과 지방자치단체 소유 공공주택의 민간 분양이 있었다. 노림수는 명확했다. 각각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을 활성화하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주된 추진자인 금융 세력에게 최고의 보상을 안겨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림수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대중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산시장에 광범한 중간층을 참여시켰다. 대처 정부가 공기업 주식이나 공공주택을 거대 법인에 통째로 넘기지 않고 국민주를 발행하거나 임차인에게 우선 분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기획자들은 중간층, 더 나아가 노동계급 상층까지 새 금융 제도의 이해당사자로 만들려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소득 중 세금으로 빠져나가는 부분은 줄이면서 자산시장 투자는 늘이길 바라는 중간층이 두텁게 등장했다. 그들과 노동계급의 사이는 멀어졌고, 노동계급 안에서도 상층과 하층의 골이 깊어졌다. 복지국가 동맹은 와해된 반면 금융자본주의 동맹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저변에서 작동한 동맹의 정치다.

신자유주의의 본산 중 하나인 영국을 예로 들었지만, 이후 어느 나라든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복지국가가 축소되는 만큼 자산시장이 늘어났고, 중간층은 은행 대출을 받아 자산시장에 뛰어들었다. 일단 자산시장에 투자하고 나면 어떻게든 이 시장을 계속 키우는 데 만사를 걸게 된다. 어제의 좌파정당 지지자, 열성 노동조합원, 극좌파 학생운동 경험자라 하더라도 예외일 수 없다. 자산시장에 뛰어들고 나면 은행가, 대자본, 초국적 금융 세력과 공동 운명체가 된다. 

항상 그렇듯 이번에도 벌거벗은 욕망에는 나름의 윤리적 외피가 필요했다. '1%'로 상징되는 최상층과 '20%'는 족히 넘는 중간층의 새 동맹에도 그만의 정당화 이데올로기가 있어야만 했다. 이익 동맹이 이렇게 이데올로기 동맹으로까지 발전해야 지배 체제가 세대를 넘어 지속될 수 있는 법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각 나라에는 나름의 자원들이 있다. 어느 나라든 중간층의 신분 상승 욕망과 결합된 독특한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가령 영미권에는 경쟁 담론과 평등 담론 사이에 걸쳐 있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전통이 있다. 신자유주의 등장 이전에는 이런 전통이 복지국가와 불안하게나마 공존했지만, 신자유주의는 이를 복지국가 구조물에서 떼어내 반복지(연대)-친시장(경쟁) 여론의 구성 요소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영미권에서는 시장주의와 능력주의가 결합된 새로운 중산층 세계관이 구축됐다.  

탈신자유주의는 곧 새로운 동맹의 구축 과정 

한국에서는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요소들이 재료가 됐지만, 이런 재료들로 빚어낸 완성품의 모양새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본 차이라면, 서구에서는 복지국가 동맹을 해체하면서 새 동맹이 다져졌지만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복지국가 동맹이 등장할 가능성을 차단 혹은 지연시키면서 금융자본주의 동맹이 자리를 잡았다는 점 정도다. 한국에서도 재벌 지배연합과 중간층의 이익 동맹이 구축됐고, 그 주된 기반은 이중 노동시장(기왕의 중간층 소득을 보장하는)과 부동산시장(임금 소득을 부동산 투자 수익으로 보완하는)이었다.

영미권에서는 능력주의가 중간층 포섭의 이데올로기적 자원이 됐다면, 한국에서 그런 역할을 한 것은 조선시대 과거제도 이후 각종 '고시'를 통해 계층 상승을 꾀한 유구한 전통이다. 현대에 '일반화된 과거' 노릇을 하는 것은 고소득 전문직 혹은 공무원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인 국가고시나 대기업 정규직 입사다. 이 관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중간층의 삶을 보장받는 구명선에 올라탄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렇게 구명선에 올라탄 이들이 주로 자산시장 투자자로 동원된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입시+고시(혹은 진입) 경쟁과 시장 경쟁이 결합된 결과로서 계층 간 장벽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됐다.

이렇게 중간층 이데올로기가 능력주의보다는 차라리 '고시'주의라 불릴만하다는 점, 구명선 의식과 이중 노동시장이 만나서 정규직-비정규직 격차가 극심해졌다는 점, 공공부문이나 대기업의 관료형 조직에서 서구와는 다른 전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 등등 때문에 한국 사회가 좀 별나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를 지탱한 사회 세력 간 구도와 크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중간층을 그 아래와 단절시키고 위와 결합시키는 동맹의 정치가 다만 '한국적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뿐이다.  

서구든 한국이든 이런 점에서 '1 대 99' 구도는 일국적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른바 '20 대 80'론은 이런 맹점을 정확히 지적하며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의 보다 복잡하고 역동적인 측면을 부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20 대 80'론이 대안의 방향까지 제대로 짚어주는 것은 아니다. '1 대 99'론만큼이나 '20 대 80'론도 탈신자유주의 전략을 모색하는 출발점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우선 기득권을 지탱하는 연합은 단지 '1%'보다 훨씬 클 뿐만 아니라 '20%'보다도 더 크다. 각종 경제 지표를 통해 확인되는 직접적 수혜자들만 지배연합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족 관계, 하찮은 물적 보상으로 지탱되는 예속 관계, 경제적 이익보다 더 폭넓은 영향을 끼치는 이데올로기 등등 덕분에 '20%'는 항상 '20%'보다는 훨씬 더 큰 블록을 구성한다.  

게다가 이른바 '80%'도 허상일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소득 격차를 보여주는 통계표만으로는 그 안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세계관의 차이를 알아챌 수 없다. '80%' 안에는 상당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었지만 '아직' 정규직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들도 있고, 항상 늘 그 자리에 있던 저소득-미숙련 노동자들도 있으며, 새롭게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 소수자, 이주민 등도 있다. 이들이 소득 격차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단결할 수 있다면, 아마 훨씬 전에 노동계급 단결도 쉽게 이뤄졌을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어떤 자본주의 사회도 중간층이나 노동계급 상층의 참여 없이 한 발자국이라도 변화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에 가장 인상적으로 포섭된 그 계층이 나서지 않고는, 이들 중 일부라도 이른바 '80%'와 함께 하지 않고는 변화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재생산 구조에서 투쟁력과 협상력을 지닌 쪽은 여전히 '80%'의 구성원들이 아니라 이들이기 때문이다.  

즉, '20 대 80' 도식에서 '80'이 '20'에 맞서 싸우는 탈신자유주의 투쟁을 그려선 안 된다. '99'가 '1'에 맞서 싸우는 그림에 사로잡혀선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탈신자유주의 '정치'를 고민하고 싶다면, 필연적으로 경제주의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이런 단순 도식들에 머물러선 안 된다.  

우리의 사고와 상상력 안에 복원해야 할 것은 '대결의 정치'의 동전 반대면인 '동맹의 정치'다. 신자유주의의 저변에서 동맹의 정치가 작동했다면, 탈신자유주의는 이와는 정반대 방향의 동맹의 정치여야만 한다. 금융자본주의 동맹을 해체하고 대체할 새로운 이익-이데올로기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  

한국과 달리 2008년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나라들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이익 동맹이 더는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 대중적으로 확인됐다. 그러면서 기존 동맹에 극적으로 균열이 갔고, 새 동맹의 싹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새로운 흐름들은 예외 없이 과거의 복지국가 동맹을 한 세대를 건너 뛰어 다시 복원하려 한다. 물론 예전에 없던 21세기의 구성 요소들을 더해서 말이다. 지금 영국에서 '코빈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변화의 흐름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사회연대전략은 탈신자유주의 동맹의 시작  

그간 한국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사회연대전략이 논의돼왔다. 사회연대전략의 요체는 조직 노동과 신자유주의 피해 대중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노동운동이 미조직, 저소득 계층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앞장서자는 것이다. 조직 노동의 경제적 이익을 일부 축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소득층의 임금 혹은 복지 소득을 늘리는 성과를 만들어서 노동운동의 지적, 도덕적 권위를 높이자는 것이다.  

이런 제안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재벌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하면 됐지 굳이 이런 전술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반박도 있고, 정규직 노동자만 일방적으로 양보하자고 주장하는 꼴이라는 거센 비판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사회연대전략의 기본 구상이 탈신자유주의 동맹의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거대 자본에 맞선 투쟁과 결코 별개가 아니며, 신자유주의에 포섭됐던 노동계급 상층에게 과도하게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니다. 이중 노동시장과 자산시장의 결합을 통해 작동하던 최상층-중간층의 이익 동맹을 대신할 중간층-저소득층의 공동 이익 구조를 만들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사회국가(복지국가)를 지탱할 동맹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사회연대전략 제안들 중에서도 보편증세-복지확대를 내용으로 하는 '재분배 연대' 방안이 이런 동맹의 정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노동계급 내 소득 불평등을 교정하는 임금협상방식을 도입하자는 '분배 연대' 방안도 있지만, 이는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 역량으로는 실현하기 어렵다. 아마도 재분배 연대가 점차 실현돼서 고소득 노동자의 임금 소득 의존도와 고용 불안 심리가 경감돼야 비로소 분배 연대가 힘 있게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야 소득을 넘어선 자산(주택 등)의 재분배도,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도 날개를 달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이번 정기국회에서부터 진보 세력은 증세에 바탕을 둔 복지 확대를 다시 쟁점화해야 한다. 북핵 갈등으로 어수선하고 자유한국당의 난동이 예상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급하게, 더욱 열렬히 외쳐야 한다. 국가 재정이라는 회로를 통해 모두가 지금보다는 나은 살림살이로 나아갈 수 있음을 설득하고 실제 사례로 보여주기 시작해야 한다.

지금이 가장 적기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