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TK 보수 몰표의 역사…DJ 2%에서 GH 80%까지 - 호남 정치는 어디로 가고 있나

일취월장7 2017. 4. 18. 12:24

TK 보수 몰표의 역사…DJ 2%에서 GH 80%까지

[언론 네트워크] 2002년 '노무현' 20%가 최고...2017년, '反민주당' 벽 허물까?
2017.04.18 10:45:40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선거 '직선제'를 다시 시작한지 꼭 30년. 대구경북은 1987년 12월 제13대 대선부터 평균 70~80%에 이르는 '보수 몰표'를 이어왔다. 반면 '민주당'으로 통칭되는 야당 후보에게는 말 그대로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당시 딱 한 번 '경북'에서 21.65%를 기록했을 뿐, 지난 30년동안 10% 전후의 야박한 표심을 보였다. 심지어 1987년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대구에서 2.63%, 경북에서 2.33%를 얻는데 그쳤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7, 16년만의 '직선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대구경북 대선 표심은 말 그대로 '보수 몰표'였으며 '反민주당 몰표'였다.  

12.12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출'이라는 전무후무한 선거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호헌'을 내세웠지만 국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현재의 헌법인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6일, 1971년 이후 16년만에 국민들의 직접투표로 대선이 치러지게 됐다.  

그러나 역시 쿠테타 주범인 '민주정의당(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선거는 막을 내렸다. 당시 노태우 후보는 36.64%,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28.03%,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27.04%,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는 8.06%를 득표했다. 당시 노태우 후보의 득표율은 지난 30년동안 깨지지 않는 '최소 득표 당선'이었다. 그러나 대구경북은 달랐다. 노 후보는 대구에서 70.69%, 경북에서 66.38%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대구에서 2.63%, 경북에서 2.33%에 그쳤다. 노태우 후보는 전국 최다 득표였으며 김대중 후보는 전국 최소 득표였다.  

1992년 제14대 대선은 김영삼-김대중-정주영의 3파전이었다. 1987년 대선에서 '군정종식'을 외치던 김영삼이 쿠테타-유신세력과 손잡고 1991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합당'을 이뤄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간판으로 출마했고, 김대중은 '민주당'으로, 정주영은 '통일국민당'으로 나섰다. 최종 전국 득표율은 김영삼 41.96%, 김대중 33.82%로 10%이내 차이였다. 그러나 대구경북은 극과 극의 지지를 보냈다. 김영삼은 대구에서 59.59%, 경북에서 64.72%를 득표한 반면, 김대중은 대구에서 7.82%, 경북에서 9.62%에 그쳐 또 다시 10%의 벽도 넘지 못했다.  

1997, 첫 정권교체 - 2002, 노무현  

첫 정권교체를 이뤄낸 1997년 제15대 대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40.27%를 얻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38.74%)를 불과 1.53%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러나 대구경북은 이회창 후보에게 전국에서 가장 높은 60~70%의 지지(대구 72.65%, 경북 61.92%)를 보낸 반면 김대중 후보에게는 전국에서 가장 낮은 대구 12.53%, 경북 12.66%의 표만 주었다.  

▲ 제16대 대통령선거 결과 - 2002.12.19.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구경북의 이런 표심은 21세기 들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2년 제16대 대선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48.91% 득표율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46.58%)를 2.33%포인트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그러나 대구경북은 이회창 후보에게 7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대구 77%, 경북 73.46%)를 보낸 반면, 노무현 후보에게는 대구 18.67%, 경북 21.65%를 주는데 그쳤다. 그나마 대구경북에서 통칭 '민주당' 후보가 87년 직선제 이후 처음으로 20%에 턱걸이했다는 점이 이채로울 정도였다.  

2007~2012. '이명박근혜'  

이른바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 2007년, 2012년 대선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2012년 제18대 대선 때는 대구경북이 80%라는 최고의 득표율을 박근혜 후보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2007년 제17대 대선에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48.69%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26.14%)를 넉넉히 따돌리고 당선됐는데, 당시 이명박 후보는 대구에서 69.37%, 경북에서 72.58%를 득표한 반면 정동영 후보는 대구경북 모두 6% 수준(대구 6.00%, 경북 6.79%)에 그쳤다. 특히 대구경북은 이명박 후보에게 70%정도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면서도, 세 번째 출마한 무소속 이회창 후보에게도 대구 18.05%, 경북 13.72%의 지지를 보냈다. 이명박·이회창 후보가 같은 '보수' 성향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80%가 넘는 '보수 몰표'인 셈이다.

▲ 제18대 대통령선거 결과 - 2012.12.19.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12년 제18대 대선. 5년 뒤 '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첫 '파면'에 이르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한 대구경북 시·도민들은 무려 80%의 득표율을 '박근혜'에게 안겨줬다.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51.55% 득표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48.02%)를 누르고 당선됐다. 두 후보간 전국 득표율 차이는 3.53%포인트였다. 그러나 대구경북에서는 무려 60%포인트이상 차이였다. 박 후보는 대구에서 80.14%, 경북에서 80.82%를 득표한 반면 문 후보는 대구에서 19.53%, 경북에서 18.61%에 그쳤다. 대구경북은 통칭 '민주당'에게 또 다시 20%의 벽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명박근혜' 10년의 최대 지지자가 됐다.

TK '보수 몰표'. 30년 만의 변화는? 

1987년 이후 '대통령 직선제' 30년이 된 2017년. 그동안 정당의 간판이 여러 차례 바뀌었을 뿐 뿌리 깊은 '보수' 정서는 대구경북에 여전히 남아있다. 실제로 '탄핵' 이후 처음 치러진 지난 4월 12일 재보궐선거 결과, 대구경북은 국회의원 1석과 대구시의원 1석, 대구경북 기초의원 4석 모두 '자유한국당' 후보에게 내줬다.  

지난 30년동안 보수정당은 민정당-민자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꿨고, 새누리당은 현재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나뉘었다. 통칭 '민주당' 역시 평화민주당-민주당-새천년민주당-대통합민주신당-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꿨고, 2016년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당'이 분가했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 제19대 대선후보 포스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19대 대선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된 4월 17일 현재,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국민의당 안철수, 바른정당 유승민, 정의당 심상정 후보를 비롯해 15명이 대선 후보로 뛰고 있다. 문재인·홍준표 후보는 첫 날부터 대구를 찾았고 안철수 후보도 18일 대구에서 유세전을 펼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그리고 '국정농단'을 단죄하는 촛불 항쟁으로 이끌어 낸 2017년 5월 9일 대선. '보수 몰표', '反민주당 몰표'를 보여온 대구경북의 표심, 30년만에 그 '몰표'의 역사가 변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 제13대 대통령선거 결과 - 1987.12.16. ⓒ중앙선거관리위원회


▲ 제14대 대통령선거 결과 - 1992.12.18. ⓒ중앙선거관리위원회


▲ 제15대 대통령선거 결과 - 1997.12.18. ⓒ중앙선거관리위원회


▲ 제16대 대통령선거 결과 - 2002.12.19. ⓒ중앙선거관리위원회


▲ 제17대 대통령선거 결과 - 2007.12.19.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호남에 고함

[이충렬의 정권+교체] 호남 정치는 어디로 가고 있나
2017.04.18 14:45:29

국민의당이 촛불대선의 막이 오르면서 갑자기 사라졌다. 안철수 후보의 선거포스터를 두고 하는 말이다. 40석의 국민의당을 내세워서는 이길 수 없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홍준표 후보의 '호남2중대'라는 네거티브를 피하기 위함일까? 여하튼 안철수 후보는 정당보다는 개인의 브랜드로 대통령이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국민의당은 호남을 핵심 지지 기반으로 삼고있고, 김대중 정신과 노선을 계승한다고 공언해왔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당은 명실상부한 호남당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수년간 호남정치의 홀로서기를 통해 호남세력화를 간절히 염원한 호남인들이 있었는데 국민의당은 그 결실이었다.  

원래 호남세력의 독자세력화를 지향하였으나 대선후보를 못만든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안철수 후보와 연합하여 현재의 국민의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년 4월 총선에서 호남28석 중 23석을 석권하고 정당투표율에서 민주당을 1% 앞서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호남 중진이 얻은 것은 실리였다. 대선후보는 안철수가 하더라도 당의 조직과 기구는 호남이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까지가 호남정치의 절정기였다. 안철수와 호남 중진의 오월동주로 만들어진 국민의당은 촛불항쟁에 뒤이은 대선 국면으로 진입하면서 점차 내부의 갈등과 모순이 심화되고 있다. 호남 중진은 안철수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은 2번째고 우선 개헌연합을 통해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관철하여 대통령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권력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촛불항쟁과 조기대선의 회오리 속에서 그들의 권력플랜은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촛불항쟁의 여파로 유권자 지형이 변화 대 현상 유지로 잡히자 변화를 바라는 세력은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로 집결하고 현상 유지를 바라는 세력은 원래 새누리당 계열의 후보인 홍준표와 유승민 후보 대신에 안철수 후보로 집결하는 양상이 나왔다. 이에 따라 안철수 후보는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보이는 보수표를 얻기위해 기존의 김대중 노선을 대폭 수정하는 우향우 행보를 본격화하였다.  

사드배치 반대를 선도해왔던 국민의당 당론을 사드배치 찬성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친기업법으로 알려진 규제프리존 특별법에 찬성입장을 밝혔다. 또한 개성공단 재개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유엔제재안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금강산 관광 재개와  전작권 조기 환수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입장이며, 앞으로도 계속 기존의 입장을 우향후로 바꿀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후보는 '얼치기 좌파'에서 '보수 후보보다 더 쿨한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것같다. TK에서 안철수 후보가 1위한다는 여론조사가 그런 사정을 대변하고 있다. 실제 바른 정당은 유승민 후보가 뜨지 않자 유 후보를 주저앉히고 안철수 후보를 공개지지하자는 물밑 여론이 조용히 일고 있다.  

국민의당이 이렇게 변화한다면 김대중 정신과 노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안철수와 호남중진은 동거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 문재인이 미워 안철수를 대안으로 선택한 호남 민심이 계속 안철수를 지지할까?  

'호남정신' 사라진 호남정치 

호남정치가 막다른 골목길에 내몰린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 번째는 호남을 대변할 호남 출신 대통령 후보를 만드는데 실패한 것이고, 둘째로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호남정치에서 '호남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2010년 정동영 의원이 호남정신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이후 천정배 의원이 '호남정치 복원'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2014년에 광주에 내려갔다.  

2016년 2월의 민주당 당대표선거에서 문재인과 박지원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호남에서 반노-반문재인 정서가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4월 재보궐선거에서 천정배 의원을 무소속 당선시키면서 호남정치 바람이 본격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작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호남당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이를 다시 요약해보자. 호남정치의 첫 번째 목표는 호남정치세력의 독자적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친노가 아닌 다른 정치세력과 세력연합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자는 것이었다. 둘째 목표는 그를 위해 호남을 대변할 수 있는 독자적인 대통령후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셋째, 호남이 단독집권할 자신이 없는 상태에서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통해 대통령이든 총리든 호남세력이 실권을 잡는 방식을 추구했다.  

① 그런데 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의당에 합류하는 과정에서 호남세력은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천정배, 정동영, 박주선 등 유력 정치인들이 집단을 형성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개인플레이 때문에 서로간의 불신과 반목만 심해지고, 결국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다. 

② 세력화가 무산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통령후보도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안철수의 구심력이 강화되면서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는 안철수로 완전히 정리되었다. 호남출신의 대통령후보는 연목구어가 되었다. 

③그 다음 호남중진들은 개헌문제에 매달렸다. 국민의당과 새누리당 그리고 민주당내의 비문세력까지 망라하면 개헌 의결선인 국회 재석의원 3분의 2을 넘길 수 있다는 계산으로 반문재인 개헌연합 형성에 골몰하였다. 하지만 이런 시도조차 국정농단으로 인한 촛불항쟁이 본격화하면서 결국 무산되었다.  

④ 박근혜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실시되자 이들은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안철수 후보에게 코를 꿰이게 되었다. 보수표를 얻으려 노심초사하는 안철수 후보의 우향우 행보에 치어리더 역할만 남게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빨갱이 소리 들어가면 남북평화와 서민경제론을 내세우면서 싸운 반면 이들은 자신의 비전과 실력으로 전진하기는 커녕, 호남 내의 반노무현-반문재인 정서에만 의지해 '대안없는 반대' 노선에 편안히 편승한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호남정신도 공허해졌고 호남정치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호남은 누구를 선택할까? 

대선의 결과에 따른 몇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해보자.  

①안 : 안철수 후보의 우향우 행보가 성공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경우의 수. 이 경우는 안 후보가 텃밭인 호남은 지키고 외연을 확장하여  TK를 비롯한 새누리당 세력의 표를 흡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승리의 댓가는 김대중 노선의 포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①안의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래서 ②안의 가능성이 대두된다. 

②안 : 안 후보의 우향우 행보가 호남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경우의 수. 이 때는 호남의 다수표는 문재인 후보로 집결하고, 호남을 상실한 안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지면서 보수표 흡수에도 차질을 빚게 되는 경우다.  

명분과 실리 측면에서 호남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것인가? 시나리오 ①이 현실화될 수 있을까? 이미 호남에서 안 후보는 문 후보에 뒤지고 있다. 앞으로 김대중노선의 포기가 거듭될 수록 호남의 지지율은 빠질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에서도 국민의당 내 호남 중진들은 느긋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호남 중진들은 김대중 정신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선택한 지 오래다.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의회에서의 세력 분포로 보아 다양한 합종연횡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연립정부 내지 공동정부로의 정치연합이다. 만약 안 후보가 패배하면 정치를 은퇴하거나 5년 뒤를 기약할 텐데 어느 경우든 안 후보가 문 후보 밑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는 정부와 싸우는 야당의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되며, 그 경우 호남 중진들과는 갈라설 것이다. 호남 중진들은 꽃놀이패를 들고 있다. 누가 당선되든 자신들은 정권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다는 판의 성격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호남 중진들이 꽃놀이패를 즐기는 것은 그렇다치자. 호남정치와 호남정신은 어떻게 되나? 기존의 호남 독자세력화론자들의 치명적 문제점은 호남지역의 이익수호라는 측면만 강조했지, 이때까지 우리 민주화운동사를 끌고왔던 호남의 역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촛불항쟁이 없었다면 문재인의 당선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촛불항쟁이 없었다면 민주당내 비문세력과 국민의당과 기득권세력이 연합을 이루어 개헌이나 선거연대를 향해 총력질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촛불항쟁이 이런 음모를 박살내 버렸다. 

촛불항쟁으로 다시 분명해진 것은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서 호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다. 지금 정권교체를 지지하는 일반국민들과 민주당 당원들은 기본적으로 5월 광주항쟁의 세례를 받고 6월항쟁의 주체였던 사람들이다. 물론 두 항쟁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청년세대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들도 두 항쟁의 정신과 가치를 공유한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촛불항쟁을 통해 우리는 현대사에서 광주항쟁-6월항쟁-촛불항쟁으로 이어지는 시민혁명의 맥락을 생생하게 실감하게 되었고, 이 시민혁명의 시발점에 광주항쟁의 정신 그리고 이를 이어받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신이 놓여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호남은 1970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출현한 이래 이른바 동교동 천하였다. TK의 박정희세력 못지않게 동교동세력은 호남에서 완강한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해왔다.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후 호남은 내부의 변화와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사실 호남 내부에서 호남 중진은 물갈이의 대상으로 지탄받아왔다.  

그런데 지난 총선에서 물갈이의 대상이던 현역중진들이 국민의당으로 슬그머니 갈아타면서 반문정서에 편승하여 다시 국회의원으로 무임승차하는데 성공하였다. 참으로 아이러니였다. 문재인을 혼내주는 것이 제1목표이다 보니 정작 호남 내 기득권세력들은 변화없이 온존하게 되었다.   

호남 대중과 호남 중진들 사이에는 모순관계가 존재한다. 호남 대중들은 다시 호남 기득권 세력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호남을 변화시킬 세력을 선택할 것인가?

문재인과 호남의 연합? 

이번 촛불대선은 '문재인이냐 안철수냐'라는 특정 개인에 방점이 찍혀있는 선거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낡은 패러다임을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느냐의 세력싸움이다. 지난 60년간 한국은 군국주의적 방식으로 개발독재를 밀어부친 박정희 패러다임이 지배한 사회였다. 박근혜의 탄핵과 파면으로 이제 박정희-박근혜로 상징되는 구체제(앙샹레짐)는 종결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번 대선은 앙샹레짐을 거부하고 새로운 미래를 세우겠다는 국민적 결의를 확인하는 선거다.   

그런데, 박정희 앙샹레짐이 60년에 걸쳐 뿌리내리는 데에는 범야권의 분열과 지리멸렬도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 87년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과 90년 김영삼의 3당합당으로 인한 민주세력의 호남으로의 고립을 말함이다. 영호남 민주화세력이 분열하고 반목한 것이 민주주의와 야권의 발전에 결정적 장애였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문재인 후보에게 두 개의 역사적 임무를 자각할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첫째 3당합당 이후 새누리당의 텃밭으로 변한 PK를 다시 민주세력의 성지로 부활시키는 과제, 둘째 호남과의 진정성 있는 정치연합을 통해 영호남 민주화 세력을 대동단결시켜 달라는 과제를 상기시킨 바 있다. (☞관련기사: 문재인, '문고리 권력'은 꼭 호남에 맡기라 )

문재인 후보는 적폐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의 건설에 호남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인식했고, 지난 6개월동안 캠프구성이나 정책과 비전에서 이를 충실하게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은 '영호남민주세력이 화해한 정권이자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모든 국민'들의 정부가 되리라는 믿음을 갖게 해 줄 수 있을까? 

호남은 선택지를 앞에 두고 있다. 호남 중진이 포진해 있으면서 김대중 정신을 지우고 있는 국민의당이냐 아니면 이번에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는 문재인의 민주당이냐?

그런데 천정배와 정동영은요? 

마지막으로 이 중요한 국면에서 천정배 의원과 정동영의원에게 고언을 드리고자 한다. 두 분 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시켰고, 노무현 정부 탄생의 공신이자 황태자였다. 

민주세력의 역사적 화해와 단결을 바탕으로 냉전수구적인 박정희 패러다임을 깨야할 이 역사적인 대선에서 당신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타의 호남중진과 달리 두 의원은 김대중 정신과 노무현 정신의 본류에 속할 뿐 아니라 그동안 가치와 정신을 중심에 둔 정치를 해왔다. 새누리당 계열의 표를 향해 우향후하는 안철수 후보와 동거하는 것이 얼마나 어색한가? 

사드배치 찬성과 개성공단 불가라는 입장에 대해 왜 전투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가?

두 의원은 지난 10년간 많은 정치적 실수와 과오를 범했다. 지금은 그 동안의 갈지자 행보를 의식한 나머지 오히려 정당하게 해야 할 발언과 정치적 행동도 위축되어 조심스러워 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러나 정치인에 대한 최종 평가는 마지막 선택에 달려있다. 안철수 후보의 탈김대중 노선에 대해 문제제기하기 바란다.  

두 의원의 자산과 가치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충정이다. 올바른 선택에 대해서 모두가 따뜻하게 환영하리라 믿는다. 그래도 민주 세력은 다르다는 것을 적폐 세력들에게 보여주자. 예전에 박근혜대표 시절 면도칼 테러를 당한 후 수술에서 깨어나 그가 한 첫마디로 알려진 '대전은요?'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물어본다. "그런데 천정배 정동영의원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