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사교육 종사자가 밝힌 ‘학원의 불편한 진실’
사교육 걱정 없는 초등사용설명서① 구본창 편
사교육 걱정 없는 초등사용설명서
제1강(3월14일) 구본창 아깝다 학원비-학원 상품 분별 능력 기르기
제2강(3월21일) 최수일 초등수학 완전정복-수포자 예방을 위한 재미있는 수학공부
제3강(3월28일) 김승현 초등영어 완전정복-영어, 이젠 이렇게 하세요
제4강(4월4일) 백화현 초등독서 완전정복-독서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독서가 가능해진다
제5강(4월11일) 김형태 초등학생을 위한 스마트폰 리얼스토리
제6강(4월12일) 윤다옥 멀지 않은 사춘기, 우리 아이 발단단계와 관계 맺기
제7강(4월25일) 윤지희 사교육 걱정 없이 우리 아이 키우기
새 학기가 시작되면 부모들의 고민도 깊어진다. ‘학교 끝나면 학원, 학원 끝나면 숙제’인 아이가 안타까우면서도 ‘혹시 우리 아이가 뒤처지면 어쩌나’ 하는 현실적인 걱정에서다. ‘옆집 엄마’ 한마디에 좋다는 학습지며 학원을 기웃거리는 부모도 적지 않다.
3월14일~4월25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7회에 걸쳐 진행하는 ‘사교육 걱정 없는 초등사용설명서’ 특강은 이런 부모들을 위해 준비됐다. 학원 상품 분별하는 법에서 아이 발달단계에 따른 공부습관 들이는 법, 스마트폰 사용법에 이르기까지 현장 전문가들이 살아 있는 노하우를 전한다. 지난 3월14일 부모들 앞에 나선 첫 번째 강사는 ‘사교육 시장 전문가’를 자처하는 구본창씨. 한때 사교육 시장에 몸담았기에 ‘사교육 시장의 불편한 진실’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다는 그의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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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강사로 나선 구본창씨는 부모들이 자녀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한편 학원상품 분별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구본창(사교육시장 전문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 정책국장)
나는 전직 사교육 종사자다. 사교육 업체 및 출판사에서 10여 년간 일했다. 지금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에 있으면서 사교육과 대학입시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어찌 보면 내부자 출신 사교육 시장 전문가랄까? 그런 내가 오늘은 우리나라 사교육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 학원 상품을 분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찾아 읽는 사람 중 ‘내 아이는 사교육을 많이 시켜 엘리트 코스를 밟게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누가 뭐래도 아이의 행복과 건강이 최우선이지. 그렇지만 현실이 이런데 너무 뒤지는 것도 곤란해. 적당한 수준으로는 따라가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일 게다.
그런데 ‘적당한 수준’이라는 게 참 막연하다. 내가 공권력을 쥐고 있는 게 아닌 만큼 사교육 고민을 단번에 해결할 강력한 솔루션을 제공해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한때 사교육 시장에 몸담았던 내부자로서 부모들이 사교육 앞에서 방황할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에 대해서는 조언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에듀푸어의 첫걸음, 옆집 아이와 비교하기
먼저 사교육에 관한 최근의 통계들부터 살펴보자. 가장 따끈따끈한 통계는 최근 교육부·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총 사교육비 규모다. 이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5만6000원이다. 아마도 부모 대부분은 이 통계를 보고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 칠 것이다. ‘25만6000원만 돼도 행복하겠다’ 하면서. 실제로 서울시교육청이 조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자녀 1명을 영어·수학 학원에 보낼 경우 월평균 교습비가 47만4000원(2015년 기준)에 이르는 것으로 나온다. 이쯤은 돼야 부모들도 어느 정도는 수긍하시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가 교육부·통계청 통계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추이다. 교육부·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9년 24만2000원까지 올랐던 월평균 사교육비는 이명박 정부 후반 들어 소폭이나마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들어 슬금슬금 다시 오르더니 지난해에는 마침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국정농단 사태 와중에 사교육비까지 증가했나 싶어서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영유아 사교육비는 여기 포함되지도 않았다. 2013년부터 영유아 사교육비 조사를 시작한 육아정책연구소는 2014년 이 부문 사교육비 규모가 3조2000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간과하기 힘든 수준이다. 이때부터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같은 단체가 영유아 사교육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더니, 이듬해에는 그 규모를 1조2000억원으로 대폭 축소해 발표했다. 문제될 게 뻔하니 이를 덮으려 했던 것 같다. 그 전까지 발표된 자료에 비추어볼 때 현재 사교육을 받고 있는 영유아의 경우 적게 잡아도 월평균 12만~15만원은 지출하고 있으리라는 게 우리 단체의 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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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월 평균 사교육비는 지난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
그런가 하면 자녀 연령이 올라갈수록 사교육비가 늘어가는 추세 또한 뚜렷하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4인 가구의 지출 항목 중 교육비 비중이 9.4%인 데 비해 중·고등학생 자녀, 대학생 자녀를 둔 4인 가구의 교육비 비중은 각각 13.8%, 18.8%로 증가한다. 서울시민 가구 부채 항목 비율을 봐도 교육비는 13.1%로 주택 임차 및 구입비(66.0%)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부모들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사교육비가 옆집에 비해 적은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는 태권도 학원을 다니는데 옆집 아이는 롯데월드 스케이트장을 다닌다’는 식으로 사교육비를 옆집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이다. 사실 나도 아이가 병설유치원에서 너무 일찍 귀가하는 바람에 롯데월드에서 스케이트 강습을 받게 한 일이 있다. 그런데 이게 강습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아이는 평소 대여료를 하루 5000원씩 내고 스케이트 신발을 빌려 신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다른 애들이 신고 있는 스케이트화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그중에서도 끈을 묶을 필요가 없는 고급 스케이트화는 무려 180만원짜리라고 했다. 그런데도 이걸 신고 강습을 받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쯤 되면 부모 눈이 뒤집어지기 시작한다. 코치 또한 옆에서 거든다. “기왕이면 비싼 걸로 사세요. 나중에 아이 발이 커서 스케이트 신발을 중고로 내다팔아도 120만원은 받을 수 있어요”라면서. 이 와중에 부모가 중심을 잡기란 정말 쉽지 않다. 나처럼 사교육 시장의 수법을 아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러다 자칫 잘못 판단하면 카드론으로 180만원을 빌리는 ‘에듀푸어’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학원·학습지 등은 부모들의 이 같은 비교·불안 심리를 정확하게 파고든다. 여기 휘둘리다 보면 가계에 경제적 문제가 생기는 것은 물론 배우자·자녀와의 갈등도 깊어진다. “당신이 뭘 알아? 아빠는 무관심이 미덕인 거 몰라?” 하면서 배우자와 의견 충돌을 빚는가 하면, “넌 도대체 누굴 닮아 아직도 한글을 못 떼니?” 하면서 아이를 다그치게 되는 것이다. ‘옆집 엄마’ 또한 요주의 인물이다. “아니, 아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펜’을 안 했어?”라는 이웃·지인 말에 흔들리는 부모가 적지 않다.
그 결과 유니세프가 “너무 많은 학원 교습, 학교 학습으로 인한 시간 부족이 아동의 여가와 놀이에 대한 권한을 침해하고 있다”며 한국 상황을 우려할 정도가 된 것이다(<한국 아동의 놀 권리 현 주소와 대안>, 2015). 특히 영유아 단계의 조기 인지교육은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우리 단체가 소아정신과 전문의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전문의 80%는 영유아 단계의 학습이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이로 인해 짜증이 많아진다거나 경쟁적으로 바뀌는가 하면 신체적으로 틱 장애, ADHD 증후군을 호소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사교육에 몰입하는 부모들의 경우 머릿속에 한 가지 성공 도식이 그려져 있는 듯하다. 영어 유치원 등에서 조기 교육을 시켜 아이를 사립 초등학교에 보낸 다음 국제중-특목고-SKY대를 거쳐 대기업·전문직에 진출시킨다는 도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교육 시장에 진입한다고 모두가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오직 극소수만이 이런 목표에 도달한다(목표에 도달한다고 성공한 삶을 사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 할 텐데, 대부분의 부모는 옆집 엄마의 성공 신화에 이끌린 채 좀비처럼 이를 쫓아가는 삶을 택하는 것이다.
‘불안 마케팅’ 꿰뚫는 분별능력 키워야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사교육 시장이 어떤 구조로 짜여 있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사교육 기관 프로그램이 전반적으로 선행 중심이라는 건 대부분 아실 것이다. 부모와 학생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진입 문턱을 높여서 경쟁을 유발하려는 ‘불안 마케팅’에 따른 것이다.
먼저 우리 단체가 2015~2016년 서울 대치동·목동·중계동 등 이른바 사교육 1번지에 있다는 유명 학원 13곳의 선행 정도를 비교한 결과를 보자. 2015년이 3.2년, 2016년이 3.8년이다. 다시 말해 이들 학원의 경우 초등 6학년에게 고등 1학년 과정을 선행시키는 것이 평균적이라는 얘기다. 심지어 한 어학원은 7년이나 선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이 학원은 초등학생들에게 미국 고등학생 수준의 영어를 가르친다고 홍보한다. 심지어는 초등 1학년짜리도 미국 고등학생 수준의 영어를 배우고 있다고 선전하니, 이런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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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적인 선행학습을 위주로 하는 유명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일부 학생들은 ‘새끼학원’을 다니는 일도 불사한다. |
그런가 하면 대치동의 한 수학학원은 선행 정도가 평균 5년이다. 초등 4~5학년이 고등 1학년 수학을 4개월 만에 마치게 돼 있다. 상식적으로 이게 과연 가능하겠나? 그러니 이 학원은 이 프로그램을 반복해서 돌린다. 이렇게 반복해 수강하다 보면 영재고나 과학고 또는 의대 진학에 유리하다면서.
‘예비 중1’, 다시 말해 초등학교 6학년을 상대로 아예 ‘의대반’을 운영 중인 학원도 있다. 더 충격적인 건 이 학원의 입학시험이다. 이 학원이 발표한 시험요강을 보면 ‘9가 심화까지 선행한 학생’, 곧 중3 수학 과정까지 마친 초등 6학년생만이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걸 통과해 의대반에 들어가면 수학Ⅰ 기본을 시작으로 수학Ⅱ, 미적분, 기하벡터, 확률과 통계, 고급수학 등을 선행하게 된다는 안내도 나와 있다. 이걸 초등 6학년부터 중3까지 몇 번씩 반복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얘기다. 한 번 들어서는 소화할 수 없는 프로그램들을 비정상적으로 깔아놓고 이를 정상인 양 둔갑시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이런 걸 별로 따지지 않고 학원을 고른다. 그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원=좋은 학원’이라는 착각에 빠져 이런 프로그램들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부모들이 학원 상품을 분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원들이 끊임없이 불안 마케팅을 조성하는 것에 대해 속지 말고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레벨별 반 편성이라는 것을 보자. 내가 한때 몸담았던 학원도 만 5세 때부터 아이들을 단계별로 관리했다. 레벨이 낮은 반은 ‘표준 진도’를 나가고, 레벨이 높은 반은 ‘속진 진도’를 나가는 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부모들이 쉽게 현혹된다. ‘우리 아이는 1단계인데, 옆집 아이는 2단계래’ 하면서, 여기서부터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표준 진도만 해도 학교 진도보다는 빠르다. 그렇지만 여기에 만족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다들 속진 진도를 나가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6학년쯤 되면 대부분 중등수학 단계를 거의 마치곤 했다.
학원 입장에서는 이렇게 레벨별로 반 편성을 하고 선행학습을 유도하는 게 여러모로 남는 장사다.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테스트를 받으면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낮은 성적을 받게 돼 있다. 부모들로 하여금 ‘내가 그간 우리 아이에게 너무 공부를 안 시켰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게 학원의 기본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원에 진입한 부모들은 대개 이런 욕망을 품게 된다. ‘우리 아이는 좀 낮은 레벨로 시작했지만, 5학년쯤 되면 최고 레벨에 도달해 있을 거야.’
그런데 이건 사실 불가능하다. 내가 학원에 10년간 있으면서 낮은 레벨로 시작해 최고 레벨까지 오른 아이는 5명도 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은 두세 단계 올라가면 끝이다. 이런 현실을 계속해서 겪다 보면 아이들도 나중에는 ‘이전 반 레벨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하고 자위하는 한편 ‘나는 안 되나봐’ 하면서 좌절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상급반은 상급반대로 한 달에 한 번 정기고사를 볼 때마다 스트레스가 심하다. 어쩌다 상급반 아이의 레벨이 떨어졌다고 통고하면 “우리 애가 컨디션이 안 좋았을 뿐인데 무슨 얘기냐? 학원을 끊겠다”고 협박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높은 반, 중간반, 낮은 반 통틀어 부모고 아이고 행복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내일 볼 시험 과목도 모르는 아이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한밤중까지 학원 건물 안에서 뺑뺑이를 돌고 초등학생 때부터 ‘혼밥’을 먹어가며 사교육에 ‘올인’한 결과가 과연 어떠하냐는 것이다. 내가 일했던 학원의 경우 속진을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을 상대로 테스트해보면 마치 포맷이라도 된 양 초등 4~6학년 때 배웠어야 할 기초가 무너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2강에서도 다루겠지만, 초등 4~6학년 수학은 정말 중요하다. 이때 기초를 탄탄히 하지 않으면 누수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중등 선행을 하고 있으니, 아이들이 훗날 수포자(수학포기자)로 빠질 위험이 높아지는 것이다.
내가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자기주도 학습능력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사교육 투자의 성적 향상 효과는 투자량이 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감소하며, 효과는 단기성을 띤다”는 것이 KDI 정책포럼 연구 결과다. 실제 경험상으로 그랬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면 학원 공부가 일시적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학원마다 학교별 기출문제를 빵빵하게 보유하고 있는 데다 보통 시험기간이 되면 4~5회 이상 평가문제집 풀기를 반복하니까.
그런데 여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나중에는 아이들이 다음 날 학교에서 무슨 시험을 보는지도 모른다. 시험 과목이건 시험 범위이건 학원에서 다 챙겨주니 스스로 학습을 관리할 능력이 키워지지 않는 것이다.
요즘 언론 보도를 보면 명문대에 진학하고도 학점을 따기 위해 전공과목 학원에 다니는 대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내 8할을 학원이 키워줬으니, 대학 학점도 학원이 키워주겠지’ 생각하는 거다. 결국 학습이건 다른 무엇이건 자기주도적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뭔가 관리해주는 시스템에 끊임없이 의존하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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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는 교육과정 개정에 따라 초등학교 1학년의 한글 교육시간이 대폭 늘어났다. 한글 선행교육을 막기 위해서다. |
부모들이 이성적 판단을 하셔야 한다고 호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단 사교육의 이런 메커니즘을 알 필요가 있다. 불가피하게 학원에 진입해야 하는 상황일 때는 ‘내 자식을 알라’는 말을 기억하셨으면 한다. 내 아이의 학업 수준 외 감정 상태 등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불안과 욕심만 앞섰다가는 아이 상태와 해결 방안이 미스매칭되기 십상이다.
학원을 고를 때는 ‘가성비’를 먼저 따져보시라. 각급 교육지원청별로 학원비 기준이라는 게 정해져 있다. 교육청과 학부모, 사교육 종사자가 한데 모여 정한 기준이다. 학원법상 이렇게 정해진 학원비를 학원 건물 벽에 부착하게 돼 있으니, 이걸 보고 시간당 교습비 등이 맞는지 판단하시면 된다. 과하게 책정했을 경우는 환불 조치도 가능하다.
요즘은 초등학생을 한밤중까지 학원으로 돌리는 부모도 많던데 아이 생활 리듬을 생각하시라. 초등 1~3학년은 오후 7시, 초등 4~6학년은 오후 8시를 넘겨서는 안 된다. 내가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아이들이 학원 다니느라 집에서 학교 공부를 복습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학원 시절 상담 통화를 하다 보면 엄마들 대부분은 이렇게 호소하곤 했다. “우리 애가 집에선 통 공부를 안 해요.” 아니, 밤 10시 넘어 집에 오는 아이들이 어떻게 또 공부를 하나.
초등학교 때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초등 부모를 만날 때마다 학원에 시간을 빼앗기기보다 가정에서 복습 지도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씀드린다. 때로는 맞벌이 부부라 아이를 봐주기 어렵다고 호소하는 분들도 있다. 무척 안타까운데 일단은 학교에서 운영하는 돌봄교실을 권하고 싶다. 돌봄교실 시설이나 환경이 너무 부실하다 싶으면 학부모회 등에 꼭 참석해서 학교장을 압박하시라. 청소년수련관 등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들 시설의 경우 숙제 위주로 보충지도를 하는 한편 신체활동, 기초학습 활동 등을 주로 한다. 이런 데서 습관이 잘 형성된 아이는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학습시간을 주도적으로 활용하게끔 유도할 수 있다.
1학년 한글 받아쓰기, 올해부터 금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한글은 떼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고민하는 부모들도 계시던데, 올해부터 한글 교육이 크게 바뀌었다는 점을 아실 필요가 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면서부터다. 새 교육과정부터는 한글 교육 시간이 기존 27시간에서 60시간으로 대폭 늘었다. 연필 잡기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라는 취지에서다. 특히 서울시교육청은 ‘선행이 필요없는 학교’를 표방하면서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동안 받아쓰기 시험을 전면 금지한 상태다.
학교 현장에서 이게 지켜지겠냐고?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내 딸아이를 보니, 실제로 지켜지고 있었다. 기존에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한테 3월달부터 받아쓰기와 알림장 쓰기를 시키기도 했다는데, 우리 딸 학교의 경우 “알림장 쓰기는 한글 교육이 완료된 후 시작하겠다”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실제로 아이는 날마다 선생님이 나눠준 알림장을 공책에 풀로 붙여서 집에 가져오고 있다. 받아쓰기 시험도 1학년 1학기 동안에는 보지 않겠다고 한다.
과거에 부모들이 영유아 단계에서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시키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알림장 쓰기, 받아쓰기를 해야 한다는데 우리 아이 혼자 우는 꼴은 못 보겠다”였다고 한다. 그런데 교육과정이 개정된 지금은 최소한 이런 부담 요소가 제거된 것이다. 다만 개별 학교 차원에서 교육청 방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학교도 있을 수 있으니, 이를 반드시 확인하시라.
정책이 만들어진다는 건 이래서 중요하다. “정책과 실제가 왜 다릅니까?”라고 따질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되는 거니까. 한때 사교육 종사자였다가 지금은 정책대안연구소에서 일하는 나를 포함해 모든 부모가 교육정책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아이가 배우는 게 수학 맞나요?”
전국수학교사모임 대표로 34년간 학교 현장에서 수학을 가르쳤고, 학교를 그만둔 뒤로는 ‘수포자 없는 수학교실’을 위해 교육운동을 벌여온 최수일 수학사교육포럼 대표는 “그럴 수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아이가 개념을 익히기보다 문제풀이에 매달리게 될수록 당장에는 아이 성적이 높게 나올지라도 중고등학교로 가면서 수학과 담을 쌓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수학․영어․독서 공부법으로 이어질 ‘사교육 걱정없는 초등사용설명서’ 강좌를 지상중계한다. 최수일 대표 강의는 3월21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강의실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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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일(수학사교육포럼 대표)
먼저 간단한 문제 하나를 내어 드리겠다. 한번 풀어 보시라.
48/2(9+3)은 얼마인가요?
(청중들에게 잠시 시간준 뒤) 다들 풀어 보셨나?
(일부 청중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2요”라고 답하자) 이 문제는 사실 답이 없다(웃음). “2”라고 답변하신 분들은 아마 ‘48/2×(9+3)’처럼 괄호 앞에 곱셈 부호가 있다고 지레 짐작하셨을 게다.
그러나 그런 수학은 없다. 숫자와 괄호 사이에 곱셈이 있을지 어떨지 아무도 모른다. 중학교에 올라가면 숫자와 문자, 문자와 문자 사이의 곱셈부호를 생략하는 걸 배우게 된다. 그렇지만 숫자와 숫자 사이 곱셈부호는 절대로 생략할 수 없다. 그러니 이건 이를테면 맞춤법이 틀려 해석할 수가 없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조건 답을 구하려 한다. 한국의 교육환경에서는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무조건 답을 내게 되어 있으니까. 반면 똑같은 문제를 외국 아이들한테 물어 보면 손을 들고 “이게 뭐예요?”라고 묻는 게 보통이다.
이번에는 유명한 석사논문에 실린 사례를 한번 보자. 우리나라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실제 벌어진 문답이다.
교사:“7 다음에 오는 수는 뭐지?”
학생:“8이에요.”
교사:“7에서 8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7에다가 1을 더하지요.”
교사:“잘했다.” (학생을 격려해 주고 나서) “어떤 정수를 x라고 하면 x 다음에 오는 정수는 어떻게 쓸 수 있을까? x보다 하나 더 많은 정수를 어떻게 표현하면 될까?”
학생:(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예요.”
여기서 □에 들어간 답이 뭘까? 어른들이라면 아마도 ‘x+1’이라고 쉽게 답변하실 게다. 교사도 이런 답을 유도하기 위해 7 다음은 8이고, 7에서 8을 얻으려면 1을 더하면 된다는 결정적 힌트까지 학생들에게 흘려준 터다. 그런데 아이들이 내놓은 답은? 놀랍게도 ‘y’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교사가 준 힌트에 상관없이 ‘x 다음은 y’라고 자신있게 답한 것이다.
교육학에서는 이를 ‘토파즈 효과’라고 한다. 교사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에 100중 99를 가르쳐주고 나머지 하나만 아이에게 해 보라고 시킨 건데, 아이는 이걸 해내지 못한다. 왜냐? 처음부터 아이가 스스로의 사고로 깨우쳤어야 하는 걸 교사가 친절하게 다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걸 ‘암죽식 수업’이라 비꼬기도 한다. 아이가 혹시나 학습 내용을 소화하지 못할까봐 환자나 먹어야 할 암죽을 아이에게 일일이 떠먹이고 있으니까. 이런 일이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식의 교육이 뭐가 문제인지는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은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이 성장단계마다 부딪치는 고민들에 대해 짚어보자. 먼저 영유아 단계. 나는 유치원 다니는 아이 부모님들로부터 “우리 아이 수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가장 괴롭다. 어떻게 가르치긴, 단도직입으로 말해 영유아 단계에서는 수학을 가르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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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아이들에게 숫자를 학습으로 가르친다면? 지난 2013년 <경향신문>이 ‘영유아 병드는 사교육’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아이들, 호기심이 사라졌다”는 기사를 게재한 일이 있는데, 여기 나온 전문가들 지적이 그랬다. 영유아기에 영어·수학·한자 학습 같은 걸 하게 되면 아이들의 뇌 발달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거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이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이었다. 창의력과 상상력은 통합적인 교육 속에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경험을 쌓으며 발달하는 것인데, 과목별 칸막이를 하는 순간 이것들이 틀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었다. 곧 아이가 한글을 배우거나 숫자를 익히게 되면 여기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미지로 상상하고 통합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학교 안간 아이에게 절대 ‘1’이라는 숫자를 쓰게 하지 마시라. 아이는 ‘1’을 쓰는 순간 망하기 시작한다. 대신 부모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숫자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하나 둘 셋 넷’ 하면서 개수 세는 훈련 정도만 하게 하면 된다.
연산에 익숙해진 머리의 특징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여러 차례 고비가 있을 것이다. 그중 최대 고비는 누가 뭐래도 연산의 고비다. 연산은 정말 중요한 교육이다. 그러나 부모들이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다. 연산은 빨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확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하나를 풀어도 정확히 풀어야 한다. 그러려면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초등 2학년이 되면 덧셈에서 곱셈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때 사고의 점프가 일어난다. 그 전까지 마트에 가면 물건 개수를 일일이 세던 아이가 어느 순간 “물통이 4개씩 8줄로 놓여 있으니까 ‘4×8=32’ 해서 모두 32개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곱셈 개념을 충분히 익히기에 앞서 구구단부터 외워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변 길이가 6cm인 팔각형을 보여주고 전체 변의 길이를 구하라면 변마다 6cm라고 쓴 뒤 이를 전부 더하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6×8’ 하면 자동으로 ‘48’이 튀어나오지만, 정작 곱셈 개념이 없다 보니 팔각형 변의 길이를 구할 때 이를 응용하지는 못하는 셈이다.
“그래도 연산이 느리면 점수가 안나와요”라고 호소하는 부모들도 있다. 그럴 만하다. 초등학교 1~4학년 과정에서는 연산 비중이 50%에 달하니까. 그렇지만 점수 압박에 밀려 분초를 재가며 아이를 압박하는 일은 하지 마시라. 아이가 개념을 익히지 못했다면 오히려 ‘연산시험은 과감히 틀리자’는 식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연산학습지로 아이를 내모는 일도 없어야 한다. 연산학습지에 진입하는 순간 여기서 빠져 나오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이를 왜 그렇게 놔두느냐”며 엄마가 비난받게 돼 있으니까. 차라리 연산 훈련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시면 에듀넷이나 EBS를 활용하시라.
연산 속도는 개념의 힘으로 커버해야지 연산 훈련으로 커버해서는 안된다. 훈련을 하다 보면 연산 속도는 확실히 빨리진다. 그렇지만 훈련을 자꾸 하다 보면 사고력이 줄어든다는 걸 아셔야 한다. 자칫 하다가는 사고 안하는 인간이 된다.
예를 들어 운전면허를 처음 딴 사람은 매사에 조심하며 운전을 한다. 반면 운전에 숙달된 사람은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운전을 한다. 머리를 쓰지 않는 것이다. 연산에 익숙해지면 이런 상태가 된다. 운전은 무의식으로 해도 된다. 하지만 수학은 그러면 안된다. 순간순간 머리를 회전시키며 사고를 해야 한다.
수학교재 중 돌출 연산학습 교재라는 게 있다. 덧셈을 시키다 말고 갑자기 뺄셈, 곱셈을 막 섞어 시키는 방식이다. 이걸 하다 갑자기 저걸 하는 식으로 돌출 연산을 하다 보면 사고가 확확 바뀐다. 계속 머리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연산학습지는 대부분 한 가지 개념이 나오면 그걸로 전부 도배를 하는 식이다. 똑같은 작업을 단순하고 지루하게 반복하는 식의 연산학습은 머리를 나쁘게 할 뿐이다. 한 마디로 시간낭비다. 나아가 이로 인해 아이들은 수학을 아주 지루한 과목, 쓸데없는 과목으로 여기게 된다.
이런 식의 연산 훈련은 아이에게 여러 모로 득될 것이 없다. 딱 한 가지, 학교시험 성적은 그런대로 잘 나올 것이다. 그러나 한 달만 지나면 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것들은 머릿속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초등학교 3학년쯤 두 번째로 맞닥뜨리게 될 고비는 분수와 나눗셈이다. 5학년 때는 넓이와 부피, 6학년 때는 비와 비율이 새로운 고비로 등장한다. 이때마다 각각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야지 공식을 외워 문제를 풀려 했다가는 ‘저질공부’를 하게 돼 있다.
무슨 얘기냐고? 초3아이를 둔 한 학부모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애가 분수하고 나눗셈이 같은 거냐고 물어요.” 교과서 어디를 뒤져봐도 분수와 나눗셈이 같다는 말은 없다. 그런데 아이는 왜 이렇게 생각한 걸까? 문제를 하나 보자.
3명이 풍선 21개를 나눠 가지면 한 명이 몇 개를 가집니까?
문제 푸셨나? 다음 문제도 한번 보자.
3명이 풍선 21개를 똑같이 나눠 가지면 한 명이 몇 개를 가집니까?
차이를 이해하셨나? 아랫문제 답은 당연히 7개다. 반면 위의 문제 답은 1개일 수도, 7개일 수도 있다. 그냥 나눴다는 거지 똑같이 나눈 게 아니니까. 이렇게 ‘똑같이’라는 말을 써주고 나눌 때만 나눗셈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나눗셈은 그냥 나누는 게 아니고 똑같이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개념이 연산 훈련을 하는 순간 사라진다. 그래서 문제를 받아드는 순간 ‘21÷3’부터 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면 ‘213-97’ 같은 문제는 아이들이 척척 푼다. 그런데 ‘전교생이 213명인 학교에서 여학생을 전부 강당에 모이게 했더니 97명일 때 남학생은 모두 몇 명일까?’ 같은 문제는 버거워 한다.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문제를 먼저 푼 뒤 전자의 문제처럼 연산 훈련을 하게 해야 한다. 후자의 문제를 푸는 아이가 전자의 문제를 풀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한다. 먼저 연산 훈련부터 시키고 그 다음에야 활용문제라면서 후자 유형의 문제를 풀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산을 훈련하는 목적 자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일텐데 정반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5, 6학년 수학이 극히 중요한 까닭
개념이 잡히지 않으면 맥락도 흔들린다. ‘20명이 빵 10개를 똑같이 나눠 가지면 몇 개를 갖게 됩니까?’라는 문제를 받아든 순간 아이들은 기계적으로 ‘20÷10=2’를 하고 있다. 답은 ‘10÷20’ 곧 빵 반 개씩인데도 말이다. 이러니 수학은 연산 훈련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차분한 주의력을 갖고 개념을 계속 고민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맞닥뜨리는 넓이와 부피도 마찬가지다. 넓이와 부피는 계산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넓이와 부피의 개념이 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고등학교에 올라가 제대로 적분을 할 수 있다. 적분은 곧 넓이를 구하는 것이니까.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은 넓이를 구한답시고 넓이 구하는 공식에 대입해 열심히 곱셈, 나눗셈 훈련만 수백번씩 하고 있다. 5학년짜리가 2,3학년 수준의 저질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배우는 비와 비율도 마찬가지다. 비율을 알아야 나중에 미분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넓이·부피와 더불어 비와 비율은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 전체를 지배한다. 이들 개념을 정확히 이해해야 중고등학교 수학을 순조롭게 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조금은 느긋했던 부모도 5,6학년이 되면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중학생 되면 수학 성적이 30점은 떨어진대. 그냥 놔뒀다가는 큰일 나” 하는 옆집엄마 말에 흔들려 어느새 중학교 과정을 선행하는 학원으로 아이를 내몰면서 아이 가방에 중학교 교재를 집어넣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당연히 5학년 학교공부보다 중학 선행과정 학원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엄마부터 “학원 가서 열심히 해야 해”라고 독려하고 나선다. 그런데 이때 넓이와 부피, 비와 비율 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채 중학교 공부로 넘어가게 되면 그 뒤 고등학교 공부까지는 다 날려 버리게 되는 거다.
그래서 난 부모들을 만날 때마다 “5, 6학년만큼은 절대 선행시키지 마세요”라고 부탁드린다. “그렇게 중학교 선행학습을 시키고 싶으면 차라리 4학년 때 시키세요”라고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3~4학년 때는 별볼일 없는 개념을 배울 때니 문제가 덜하지만, 5~6학년 때 개념을 다지는 복습을 소홀히 했다가는 중학교 이후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신세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수학에서 개념이 중요하다는 건 사실 상식적인 얘기다. 나도 이 얘길 교단에 선 이래 30년 가까이 해 왔다. 그럼에도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 것은 교육운동을 하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직접 학생·학부모를 만나며 수포자 문제를 다루게 되면서다. 내가 이 단체에서 맨 처음 만난 아이들이 중학생이었는데, 가만 보니 이 아이들이 저마다 상처를 안고 있었다. 문제 하나를 못풀 때마다 그 상처가 더 커지는 듯했다.
특히 중2쯤 되면 상처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적으로 수학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쌓아오다 중학교 들어와 갑자기 수학문제가 어려워지고 부모도 더는 어떻게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게 분노로 폭발하곤 했던 것이다. “너는 초등학교 때 수학 100점도 많이 받았대며?”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이렇게 답하곤 했다. “그러면 뭐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이 싫었어요.”
사실 중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수학 평균점수가 대부분 하락한다. 웬만하면 모든 과목별 평균 점수를 80점 이상으로 맞춰주는 초등학교와 달리 중학교에서는 한 반의 절반 이상이 수학점수를 50점 이하로 받는 일도 흔하게 벌어진다. 중간고사 끝난 4월말이면 그래서 아이들 사이에 곡소리가 난다.
부모나 아이가 무너지는 것도 이때다. 초등학교 때 사교육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던 아이들도 이때가 되면 사교육을 찾아가곤 한다. 처음에는 이게 제법 효과적인 것 같아 보인다. 시험점수가 잘 오르니까.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아이의 공부방법이 점차 이상해진다는 것이다. 개념은 뒷전이고 일단 공식과 정답풀이를 외우려 한다. 학원교육은 기본적으로 점수를 올려야 하기에 이걸 외우게 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고등학교에 가면 최종적으로 무너지게 돼 있다. 중학교 때 학원을 다니며 반짝 점수를 올렸더라도 고등학교에 가서 수포자로 전락하는 아이들이 속출한다.
부모의 불안은 아이에게 전염된다
개념이 중요한 것은 그래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수학 공부에서는 개념이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를 푸는 것은 그 다음이다. 문제를 푸는 순간 아이의 집중력은 개념 대신 문제로 넘어가 버린다. 가로변이 7cm이고 세로변이 5cm인 직사각형 넓이는 ‘7cm×5cm=35cm’라고 계산해 버리기 전에 왜 넓이를 구하는데 가로와 세로를 곱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냐고? 고등학교에서 적분을 배울 때까지 해야 한다. 이로써 아이들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나본 아이들의 경우 문제를 못 풀면 상처가 생기는 것 같더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는 최근 뇌과학 연구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시카고대 리언스 교수팀이 수학 시험을 볼 때 울렁증이 심한 학생들의 뇌를 MRI로 촬영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이 학생들은 수학 시험 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뇌의 통증회로가 활성화됐다고 한다.
또 한 가지 내가 발견한 것은, 특정 문제를 못푼 아이들의 경우 한 달 뒤 다시 똑같은 문제가 주어져도 풀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를 함부로 풀어서는 안된다. 문제를 풀 때는 반드시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뒤 풀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개념을 익혀 준비를 철저하게 한 뒤 문제풀기를 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복습이 중요하다. 개념은 예습․선행으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학교에서 그날그날 배운 것을 충분히 소화하고 나서 문제를 풀어야 이를 못풀 가능성이 줄어들고, 상처도 줄어든다.
그러니 초등학생 자녀에게 “문제 풀어!”라고 하기 전에 “너 그 문제를 풀 준비가 됐니?”라고 물으시라. 약수 풀이 훈련을 시키기 전에 “약수가 뭐야?”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이가 이에 대해 뭐라 답하면 “그건 왜 그러는데?” 하고 다시 물으시라. 이렇게 말싸움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음과 답변이 이어질 때 아이는 개념을 차츰 자기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아이가 자꾸 엄마한테 잘 모르겠다고, 답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상담해 오는 분들도 있던데 걱정하실 필요 없다. 모른다고 답변하시면 된다. 어설프게 아느니 모르는 게 훨씬 낫다. 이렇게 모른다는 입장을 관철하면 아이가 ‘엄마는 믿을 수가 없겠구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독립심과 책임감을 키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부모가 지지와 격려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얘는 수학머리가 아닌가 봐’ 하면서 지레 아이 능력을 낮춰보거나 ‘나를 닮아서 그러나?’ 하면서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 없다. ‘우리아이가 언젠가는 수학을 잘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시라. 단, 전제는 반드시 복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이라면 하루에 교과서 2장 정도는 충분히 복습할 수 있다. 그것도 일주일 내내 복습하라는 게 아니다. 7일중 3일은 놀아도 된다. 나머지 나흘만이라도 복습하는 습관을 들여주시면 된다.
복습은 학원을 다니면서 병행하기 어렵다. 복습만 제대로 하면 학원 다니는 아이보다 우리 아이가 훨씬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시라. ‘우리 아이는 학원을 안다녀 불안해’ 이런 생각은 품는 것조차 금물이다. 부모의 생각은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기계와 사람은 어디서 다른가
나도 아이들의 상처를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머릿속에 온통 수학문제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빨리 풀어 아이들 앞에서 멋있게 보여야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수학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이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지금의 나는 부모와 교사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지금 가르치는 게 수학 맞습니까?”라고. 같은 제목으로 책도 썼다(<지금 가르치는 게 수학 맞습니까?>, 비아북 펴냄)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묻고 싶다. “지금 네가 공부하는 게 수학 맞니?”라고.
세상에는 두 가지 학습 형태가 있다고 한다. 개념 학습과 공식적 암기 학습. 수학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 문제를 풀게 되면 그 학습 방법은 절차적 방법(공식적 암기 학습)이 될 것이다. 절차적 방법에 의한 학습법은 이후에 이어지는 의미있는 학습 곧 개념적인 학습(개념 학습)을 방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로버트 애쉬록은 말한다.
내가 고민해서 내린 결론도 이와 같다. 지금의 수학공부에는 오직 결과와 정답밖에 없다. 이걸 구하겠다고 말도 안되는 공부를 시키면서, 이걸 잘 따라오는 아이가 수학공부를 잘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가 나오기 어렵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쳐 본 결과, 간단한 것이라도 자기 손으로 개념을 만들어내고 연결시켜 본 아이들은 그 지적 성취감이 대단했다. 한번 이런 성취감을 맛보고 나면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문제집을 사서 스스로 풀곤 한다.
외워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건 이미 모두가 아실 것이다. 외우는 건 기계가 할 일이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사람은 개념이 있어야 하고, 개념을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능력을 키우는 것이 수학 공부다. 뭔가를 만들어 내면 이를 연결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 또한 수학을 통해 가장 잘 키울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에게 어떤 영어를 가르치고 있나요?
사교육 없는 초등사용설명서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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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교사인 김승현씨는 전문가들과 함께 영어사교육포럼을 운영하면서 한국 영어교육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 중이다. |
김승현(숭실고 교사,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영어사교육포럼 부대표)
‘영어를 조기에 가르치면 우리 아이도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게 되지 않을까?’ 부모들이 흔히 품는 기대다. 이를 충족시키고자 어려서부터 아이를 영어 사교육으로 내모는 부모도 적지 않다. 최근 몇 년간 영유아 사교육비를 폭등시킨 주범 또한 영어였다. 그러나 이런다고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사교육 없는 초등사용설명서’ 연속강좌 세 번째 강사인 김승현 교사는 “오히려 잃는 것이 많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환경에서는 영어교육 접근 방식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3월28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중계한다.
“수학이 대학을 결정하고, 영어가 평생을 결정한다”는 제목의 책이 있다. ‘엄마는 전략가’ ‘아이는 99% 엄마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책도 있다. 어쩌면 우리 사교육의 프레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제목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부모들은 고민이 깊다. ‘어릴 때 공부를 시작하면 영어를 우리말처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라면서 조기 영어교육은 엄마 하기에 달렸다는 통념 때문에 압박을 받는가 하면, ‘돈만 있으면 영어유치원, 영어학원은 물론이고 어학연수도 보낼텐데’ 싶어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나 아쉬움을 안고 사는 부모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영어에 대한 이런 통념들이 모두 사실일까? 내가 나름 영어교육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약 5년 전부터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영어사교육포럼을 만들어 운영해 왔기 때문이다. 영어사교육포럼에는 이찬승 전 능률교육 대표를 비롯해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 서유헌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어도현 고려대 영어교육과 교수 등 영어 사교육 전문가 26인이 참여하고 있다. 이분들과 함께 토론회도 수십 차례 했고, 현장에 계신 부모님들과도 만났다. 이런 소개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제 개인적인 지명도가 떨어질지라도 안심하고 오늘 강의를 들으셔도 된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웃음). 지난 5년간 우리 포럼이 쌓아온 경험과 자료를 바탕으로 말씀드리는 거니까.
유창한 것이 잘하는 영어는 아니다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동영상을 하나 보여드리겠다. 얼굴을 가린 한국인 중년남자가 영어로 연설하는 걸 한국인 패널과 외국인 패널들에게 들려준 뒤 이를 평가하게 한 실험을 찍은 EBS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이 남자 연설을 듣고 난 한국인 패널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발음이 너무 촌스럽다” “TV에 나올 실력은 아닌 것 같다”라고 평한다. 당신의 아이가 이런 영어를 구사하면 어떻겠냐는 질문에는 다들 도리질을 한다. “우리 아이는 저런 영어 말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한국인 패널들이 이 연설에 매긴 점수는 100점 만점에 40~60점.
반면 외국인 패널들의 반응은 정반대다. “매우 높은 수준의 단어를 구사했다” “문장구조도 좋았고, 의사도 잘 전달했다”라는 식이다. 이들이 같은 연설에 매긴 점수는 무려 90점대 후반.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그제서야 연설을 한 남자의 정체를 밝힌다. 그 남자는 바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그가 2006년에 했던 유엔 사무총장 수락 연설은 ‘21세기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힌 바 있다. 그중 일부 대목을 발췌해 패널들에게 들려줬던 것이다.
이 영상에 사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집약돼 있는 것 같다. ‘우리 아이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면 좋겠다’는 한국인 패널과 달리 외국인 패널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영어를 잘한다는 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대화능력과 의사전달 능력이 중요하다. 그들의 영어가 유창한지는 보너스일 뿐이다”라고. 그러니 영어를 ‘유창하게’ 잘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오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출발시켰으면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나라 영어 환경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언어를 배우는 환경에 특별한 문제가 없고, 충분한 입력(input)이 제공된다면 누구나 6~7세 정도가 되면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재능에 따른 차이는 있을 것이다. 예체능에 뛰어난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언어적 감각이 뛰어난 아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언어는 재능이라기보다 ‘충분한 입력’에 의해 습득된다.
이에 부모들이 매달려 보는 게 ‘그러니 어릴 때부터 시키면 영어를 모국어처럼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다. 그런데 ‘충분한 입력’이라는 걸 어른들이 너무 우습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갓난아이가 어떻게 언어를 습득하는지 그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3년 동안 자기집에 비디오를 설치해 24시간 촬영하고, 그렇게 얻어진 대용량 데이터를 MIT 연구실에 보내 분석한 과학자가 있다. 그가 소개한 영상을 보면 아이가 ‘가가’ ‘가가’ 하고 중얼거리는 데서 시작해 ‘구가’‘와덜’을 거쳐 ‘워터(water)’라는 단어를 완벽하게 발음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영어 환경에 단순히 노출되는 것뿐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 경험 등이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다.
아이에게 영어 단어를 입력시키고 아이가 조금 더 노력한다고 해서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곧 ‘입력(input)=흡수(intake)’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절실한 내적 동기가 없이는 외국어를 내 것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접하기 힘든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서는 영어를 접할 때 그냥 흘려듣지 않고 집중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영어를 잘하게 돼 있다. 이를테면 이전에 만났던 상대가 어떤 말을 했는지 잘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번에 적절히 활용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집중력은 어느 정도 성장한 학생이나 성인이 의식적으로 노력할 때 더 잘 발휘될 수 있다고 권혜경 한국사이버대 실용영어학부 외래학과 교수는 말한다.
그렇다면 영어 노출시간을 대폭 늘리면 되지 않겠냐고? 한국이나 일본은 평상시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환경에 속한 국가군이다. 일주일에 사흘, 80분씩 영어 공부를 해 봐야 일 년으로 치면 192시간일 뿐이다. 날짜로 환산하면 일 년중 8일밖에 영어를 접하지 않은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영어가 모국어는 아닐지라도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해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은 인도나 필리핀과는 크게 다르다.
이런 환경에서는 아무리 학교 영어 수업시수를 늘리고 영어유치원․영어학원에 보내 아이가 영어에 노출되는 시간을 늘린다 해도 “실질적으로 언어 발달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거나 매우 느리게, 천천히 일어난다”고 언어학자인 반 리어는 말한다. 더욱이 언어발달은 수업중(during lessons)보다 수업간(between lessons)에 일어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어 수업시수를 매주 1시간씩 더 늘린다든가, 선생님들이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걸 영어 공교육 강화정책으로 채택해 봐야 한계가 뚜렷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조기교육’보다 ‘적기교육’이 중요하다
영어 교육을 고민할 때는 이런 기본 전제를 이해해야 사교육 정보 프레임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남는 게 별로 없는 현실이 닥칠 수 있다.
한 영어전문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던 김채현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5살짜리가 2년에 걸쳐 습득한 영어 수준을 초등학교 1학년은 6개월 정도면 달성한다. 실제로 영어학원에서 보면 5살부터 영어를 배운 아이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운 아니라 몇 년이 지나면 같은 레벨에서 만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엄마표 영어’를 하는 그룹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유아기부터 영어교육을 해온 엄마와 자녀는 초등학교 2~3학년쯤 되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네 살 때부터 해 왔다면 만 5년, 태교 때부터 해 왔다면 거의 8~9년을 영어에 매달려 살아온 셈이기 때문이다. 영어 외에도 할 것이 태산 같은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 어느 순간 지쳐 버린다. 이때부터가 진짜 공부를 해야 할 시점인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환경에서는 ‘영어 조기교육’이 아니라 ‘영어 적기교육’이 중요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찍 시작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모국어가 어느 정도 돼서 이해력이 발달하고, 영어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됐을 때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적기가 언제야?’라고 묻고 싶으실 게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에 영어교육을 시작하는 우리 방식이 나름 적절하다고 본다. 반면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하는 게 좋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어쨌거나 여행을 가서도 영어공부를 시킨답시고 엄마와 자녀가 다투는 식이라면 그게 적기는 아닐 것이다.
물론 주변을 둘러보면 어릴 적부터 영어학원을 꾸준히 다녔고 영어도 굉장히 잘하는 아이들이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아이들은 수업 중(during lessons) 집중을 했다기보다 수업간(between lessons)’에도 영어를 끊임없이 접하고 공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집에서는 ‘엄마표 영어’를 계속하는 등 부모 역할도 컸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특수한 경우다. 이를 일반화하면서 자기 아이를 잡을 일이 아니다.
이른바 영어 전문학원의 상술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이런 학원에 다니는 초등학교 4~6학년 아이들을 보면 발음이 정말 좋다. 그러나 대단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내용을 보면 기본적인 일상회화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반기문 동영상에서 보았듯 언어에는 스킬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자기 경험이 담겨야 하는 건데, 이것이 빠져 있는 것이다.
EBS 다큐 팀이 미국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때 영재반에서 우수학생으로 있다 귀국한 한 학생을 데리고 모 어학원에서 레벨 테스트를 받아본 일이 있다. 영어 실력이 1% 이내 수준에 든다는 평가를 받았던 여학생이다. 그렇다면 어학원 레벨 테스트 결과는? 90점 만점에 54점이었다. 이곳 학원장은 나아가 아이에게 강행군을 권했다. 자기네 학원 아이들은 하루에 단어를 700~800개씩 외우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 연․고대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영어 전문학원이라 해 봐야 영어 실력이 막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점수로 존재 증명을 하려 든다. 개중에는 ‘영어 학습 1만 시간을 채워주겠다’며 무시무시한 약속을 내걸거나, 초등학생에게 CNN을 듣게 하는 학원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라. 초등학생 3~4학년이 집에서 KBS, JTBC 뉴스를 보고 있나? 영어학원을 고를 때면 이런 부분을 유념해 주셨으면 한다. 상담석에 앉는 순간 “큰일나셨네요”라고 시작하는 학원은 과목을 불문하고 조심하실 필요가 있다.
‘해외 캠프나 단기 조기유학은 어떨까?’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캠프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안전 등의 문제로 개별적인 활동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현지 상황을 접하기도 어렵고 캠프 내에서 만나는 원어민이 그 나라에서 만나게 되는 외국인 전부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 프로그램을 다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2년씩 유학 보낼 게 아닌 바에야 방학동안 2~3주 가는 캠프는 굳이 보내실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냉정하게 말해 영어 사용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우리에게 가장 합리적인 목표는 원어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잘 훈련된 영어 구사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잘 훈련된 영어 구사자는 영어를 시작한 시기와 관계없이 본인의 노력에 의해 어느 정도 도달 가능하다.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지속적인 노력이 축적된 결과이며, 오랜 시간을 지속해서 언어를 사용하고 듣고 말하는 과정”이라고 언어학자 반 리어는 말한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답답한 얘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영어공부는 달리 방법이 없다. 중 3때까지는 영어공부를 끝내줘야 고등학교 때 수능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고? 불행히도 영어는 그렇게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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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환경에서는 영어도서관을 확충하고 활용하는 게 영어를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언어학자 크라센은 말한다. |
정리해 말씀드리자면 영어는 시작 시기나 방법보다 꾸준함과 집중력이 중요하다. 보통은 하루에 3시간 이상씩 영어에 집중하는 시간을 2~3년 가량 가지면 영어 실력이 크게 향상된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 이렇게 하는 게 좋다고 콕 짚어 말씀드리기는 어렵다. 개인 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외교관이 동시통역관을 꿈꾸는 아이는 이른 나이에 이런 적기를 맞겠지만, 보통은 대학 진학 이후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남들과 비교하며 거기서 상실감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어학연수를 할 때 룸메이트였던 스페인 친구는 영어가 초급 단계였는데도 낯선 전화가 걸려오면 거리낌 없이 그 전화를 받곤 했다. 다른 한국인 친구들은 전화받기를 꺼려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못알아 듣는 대목이 나오면 자기가 오히려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못 알아 들으니 네가 천천히 말해야지’ 하는 식이었다. 언어를 공부할 때는 이런 태도도 필요할 때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국어는 ‘습득’, 외국어는 ‘학습’
마지막으로 영어 교육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쟁점들을 몇 가지 정리해 보겠다. 먼저 어린아이가 우리말을 배울 때 ‘듣기→말하기→읽기→쓰기’ 순서로 터득하는 만큼 외국어 또한 이런 방식으로 배우게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모국어는 ‘습득’, 외국어는 ‘학습’의 요소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습을 하라는 걸까. 일단 문법공부는 할 필요가 있다. “우리처럼 영어를 외국어로 접하는 학습자들은 언어의 규칙을 배우고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 그 언어를 익히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다”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곧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서는 삼인칭 단수에 ‘s’가 붙는다는 걸 아이가 절로 터득할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어는 조기교육이 아니라 적기교육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다시 한번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중학교 이후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한 마디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다. 내적 동기가 강하고 집중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이 결국 다른 과목처럼 영어도 잘한다는 것이다.
조기 영어교육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이같은 내적 동기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별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 영어를 접하게 되면 이를 타율적으로 공부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다 학원까지 잘못 만나면 오히려 초등학교 때 키워야 할 중요한 학습역량 내지 습관, 태도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칫 하다가는 부모와의 관계도 악화된다.
의사 소통 중심 실용영어 교육을 강화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물론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영어회화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회화 표현 정도를 익히는 게 학교 영어교육의 진정한 목표여야 할까? 이는 결국 영어교육에 대한 철학이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 차원에서건 공교육 차원에서건 마찬가지다. 우리가 해외에 나가 레스토랑에서 영어로 막힘없이 주문을 하게 된다고 더 행복해지거나 국가경쟁력이 올라가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어 독해 교육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식기반 사회에서 영어 독해 능력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영어 독해 교육에 대한 반감이 있다는 건 알지만 독해는 영어에서 여전히 굉장히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능력이다. 단순히 영어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다. 경험의 폭과 깊이 측면에서도 그렇다.
무슨 얘기냐. 우리가 일상에서 외국인을 만나 대화할 일은 흔치 않다. 그보다 특정 개인이 영어공부를 통해 새로운 경험과 즐거움을 맛본다면 그것은 문학작품 등 문자로 된 정보와 글을 통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학교에서 독해용으로 배우는 별 의미 없는 짧은 글 말고, 좋은 글을 폭넓게 읽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이 확장되고 풍요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어떻게 말할 것인가(how to say)’보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what to say)’가 중요하다는 게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핵심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라. 우리 모두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러나 마음에 안드는 사람과는 1분 이상 대화를 지속하기 어렵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과 계속 대화를 하는 건 영어가 유창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매력이 있어서나 내가 얻고픈 전문적인 역량이 있어서일 것이다.
시기별로 보자면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는 궁극적으로 성인이 되었을 때를 준비하는 예비 단계다. 일주일에 세 번, 30분 가량 꾸준히 영어를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가 스트레스 받지 않게 동요를 따라 부르며 영어를 배우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EBS 등을 통해 알파벳, 파닉스를 익히게 할 수도 있는데 이 과정에서 부모나 아이나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학습지를 이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하루 30분에서 1시간 가량 시간을 늘려 잡으면서 쉬운 영어동화책을 읽고 따라해 보게 하는 게 좋다. 이를 부모 앞에서 설명하고 쓰게 하다 보면 이것 자체가 좋은 말하기, 글쓰기 훈련이 될 것이다. 초등 단계 아이에게는 어려운 영어 단어를 외우게 했다가 결국에는 이를 써먹지 않아 잊어 버리게 하는 것보다는 좋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게 영어 공부를 위해 훨씬 큰 도움이 된다.
말문까지 틔워주는 영어 독서의 힘
이를 위해서는 한글독서의 중요성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폭넓은 한글독서로 이뤄진 배경지식이 있으면 영어책을 읽고 이해하는 속도도 훨씬 빠르다. 독서습관이 잘돼 있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영어 동화책도 더 잘 읽는다. 그렇다고 독서만 하라는 건 아니다. 책 대신 좋은 전시회를 한 번이라도 더 가본다든가, 뒹굴거리며 멍 때리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좋다.
‘다독(多讀)’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드리고 싶다. 모국어 환경이 아닌 상황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실제와 비슷한 상황을 최대한 많이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원어민을 자주 만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적인 언어학자로 꼽히는 크라센이 강조하는 게 영어도서관이다. 그는 “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은 어려서부터 영어회화를 가르칠 게 아니라 영어도서관을 많이 지어 보다 많은 책을 접하게 하라. 그러면 이후에 손쉽게 회화도 배울 수 있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에 따르면 이같은 다독이 영어를 배우는 ‘최선의 길’이 아니라 거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영어 다독이란 우리가 이제껏 수업시간에 해왔듯 어려운 단문을 분석하고 번역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읽기 방식이다. 여러분은 영어책을 재미있게 읽어본 경험이 있으신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가장 큰 실패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나마 요즘 영어도서관에 있는 동화책이나 리더스북, 챕터북 등을 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서울 백석중의 경우 페이지마다 그림이 하나 있고 텍스트는 10~15줄 정도밖에 안되는 챕터북을 중학생들에게 매일 읽혔더니 아이들의 중간고사 성적이 수직상승했다고 한다. 독해 실력도 독해 실력이지만 더 중요한 건 영어 말문을 틔우는 데도 이 방식이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너 남자애야(Are you a boy?)”처럼 일상 생활에서는 결코 쓰지 않을 회화를 연습하는 것보다 책에 나오는 문장을 통해 회화를 익히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교육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어사교육포럼이 각급 교육청에 계속 요구한 것도 영어도서관 인프라를 갖추는 한편 엄마들이 지금 영어학원에 맡기고 있는 역할을 학교에서 해주라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에만 가르치고 나 몰라라 할 게 아니라 우리말 독서 시키듯 영어책 읽는 습관을 들여주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우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아이를 바꿀 수 있는 정도는 제한적이라고 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박사는 말한다. “부모가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하기만 하다. 이런 현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손을 놓자는 것은 아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은 적은 짐만 덜어줘도 훨씬 발걸음이 가벼운 법이다”라고.
학교 상담실에서 부모님들을 만나면 “우리 애는 속이 편해 보여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수업시간에 비록 엎어져 자고 있을지라도 아이가 느끼는 불안감이나 스트레스 정도는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부모는 그 불안감을 증폭시킬 게 아니라 안심시켜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서천석 박사는 말한다. 우리 모두 영어로 관계가 나빠지는 일 없이,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수 있는 부모였으면 좋겠다.
독서가 밥 먹여주는 시대
사교육 걱정 없는 초등사용설명서④ 독서교육
이게 정말 아이를 위한 길일까. ‘사교육 걱정 없는 초등사용설명서’ 네 번째 강사로 나선 백화현씨는 독서가 이미 ‘선택’이 아닌 ‘필수’인 시대가 됐다고 잘라말한다. 독서야말로 존재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줄뿐더러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힘이라는 것이다. 교사에서 독서운동가로 변신한 그의 강의를 지상중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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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출신 독서운동가인 백화현씨는 독서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나아가 독서교육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
백화현(독서운동가, <책으로 크는 아이들> 저자)
나는 독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이며,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다. 사실 초등학교 때는 웬만한 아이들이 거의 다 책을 읽는다. 부모님도 그걸 권장한다. 그러나 중학교에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당장 독서보다는 코앞에 닥친 시험을 걱정하게 돼 있다. 우리의 수업이나 평가 시스템 자체가 독서를 못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독서를 멀리한 채 학원 뺑뺑이를 도는 게 과연 아이를 위한 길일까? 단순히 독서가 아이 인성에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독서는 앞으로 아이가 먹고 사는 문제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게 오늘 내가 강조하고픈 얘기다.
먼저 ‘왜 독서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내게 독서는 무엇보다 존재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주는 행위다. 독서 하면 책을 읽는 행위만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제대로 된 독서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을 하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이렇게 읽고 쓰고 토론하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주변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간다. 돈과 명예, 그리고 지위를 향해 정신없이 질주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누군지, 왜 사는지, 이 세상은 무엇이고 또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지,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왜 학교·학원을 다니는지, 대학은 왜 가야 하는지 질문을 던질 틈도 없이 숨가쁘게 살아간다. 그러나 이럴 때 책을 읽으면 나보다 앞서 훨씬 깊이 고민하다 간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고민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뭔가 잡히는 게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존재의 뿌리는 결국 자존감이 튼튼할 때 탄탄해진다. 그렇다면 자존감은 언제 어떻게 탄탄해질까. 자기를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때다. 생각해 보시라. 남편이 날마다 친구 와이프 음식 솜씨며 옷 맵시를 칭찬하면, 시어머니가 날마다 이웃집 며느리와 나를 비교하면 좋으시겠나.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때 자부심이 생기고 행복해지면서 살 맛이 나는 존재다.
물론 남이 나를 인정해 준다고 모든 게 해소되는 건 아닐 것이다. 철이 들고 나면 스스로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 답을 스스로 찾고 나면 남들이 뭐라 해도 나만의 철학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면서 자존감이 충만해진다. 이를 도와주는 것 또한 독서다. 삶의 이유를 찾고, 삶의 철학을 갖도록 돕는다.
산은 산이고, 아이는 아이일 뿐
내 경우에도 책이 준 가장 큰 미덕은 내 중심을 탄탄하게 잡게 해줬던 점이었다. 우리 큰아이는 공부를 못했다. 처음에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우리반 아이들이 공부를 못할 때면 “괜찮아, 공부 못한다고 기죽을 것 없어. 사람은 누구나 다른 존재고 각자 잘하는 게 있어”라고 격려하던 나였지만, 막상 내아이가 공부를 못하게 되니 잠이 오질 않았다. 도대체 얘는 왜 이럴까 싶으면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런 데 대한 답을 독서를 통해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백인백색이라 아이들에게 말해 왔던 게 진짜 내 생각이었을까? 혹시나 남의 생각을 내 생각인 양 착각하고 살았던 건 아닐까?’ 묻고 또 물으면서 내 철학을 찾아갈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찾은 해답은 ‘아이는 내가 아니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내 입장이 아닌 아이 입장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연습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은 병법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키울 때도 너를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 나만 알고 고집하면 아무 것도 안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아이는 아이일 뿐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부모님들께도 이제는 자신있게 말씀드리고 싶다. 어찌 보면 아이를 키우는 일은 아주 쉽다. 나를 버리면 된다. 오직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시라.
나아가 독서는 스스로 배울 수 있는 힘을 주며, 더 나은 사회를 꿈꾸게 한다. 내가 몰랐던 걸 책을 통해 습득하게 되는데다 이 세상의 구조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열심히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 차원에서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아가 더 나은 사회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이를테면 오늘날 부모들이 아이를 학원으로 내모는 건 결국 ‘밥 문제’ 곧 생존 문제 때문일 것이다. 하루 종일 학교·학원을 뺑뺑이 도는 식으로 공부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고, 그런 아이가 불쌍하다고도 생각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가 공부를 잘하기 힘들테니까, 나아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좋은 대학에 가거나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도 힘들테니까 아이 등을 떠미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달라진 시대의 밥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독서라고. 나는 산업화 시대 한복판을 살아온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 잠깐 존재론적인 고민에 빠져 방황했지만 고3때 어머니가 쓰러지시는 것을 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재수를 한 결과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임용고시를 통과해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때는 교과서와 문제집만 열심히 풀고도 대학에 갈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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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자료 독서는 아이의 인성뿐 아니라 미래의 ‘밥’ 문제도 해결해 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창의성과 소통능력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
산업화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윗사람 또는 시험관이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이해력이 있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인내심과 성실함, 책임감만 있다면 큰 걱정없이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상징되는 지식 정보화 시대다. 사람들의 취향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왜 그런지,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끊임없이 변화에 맞춰가야 한다.
그러려면 지식정보가 토대가 돼야 한다. 창조라는 게 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거다. 독서는 읽기 능력뿐 아니라 창의성과 평생학습 능력을 길러주고, 타인과 협력할 수 있는 힘도 키워주니까. 지식 정보화 시대야말로 ‘읽기의 시대’이자 ‘창의성의 시대’ ‘평생학습의 시대’, 나아가 ‘협력의 시대’라 하지 않나.
독서는 개인이 아닌 국가의 문제
그렇다면 지식 정보화 시대에는 독서야말로 밥과 인성 두 가지를 가질 수 있게 해줄 수단이다. 독서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라고 내가 주장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이걸 개인에게만 맡겨두면? 자연스럽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난다. 좋은 독서 환경을 갖춘 데서 자란 아이들과 달리 책이 읽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점점 더 책에서 멀어지면서 불평등이 심화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게 또 밥의 문제로 이어지게 돼 있다.
그런데도 다들 시대가 달라졌다는 걸 뼛속 깊이 인지하지는 못하시는 것 같다. 지식 정보화 시대 내지 4차 산업혁명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정부나 지도자들이 학교를 지금 같은 시스템으로 유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찌감치 이것부터 부숴놨을 것이다. 부모들 또한 하루 빨리 수능부터 폐지하라고 다 데모하고 일어났을 것이다.
내가 이런 얘기를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한 선진국을 돌아다니며 교육이 실제로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에 드와이트학교라는 데가 있다. 상류층이 밀집해 있다는 뉴저지주 잉글우드 지역 사립학교다. 그런데 이 학교의 경우 초등학교 1,2학년에는 사서교사와 함께하는 수업이 일주일에 한 시간씩 의무적으로 배치돼 있었다. 이 시간이면 주로 사서교사가 책을 읽어주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이 수업을 참관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을 다 읽어준 뒤 아이들에게 소감을 말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한국 같으면 이 시간에 교사가 일정하게 개입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흥부전>을 기껏 읽어줬는데 아이들이 “놀부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돼야 해요” “흥부처럼 아이를 막 낳으면 안될 것 같아요” 이런 말을 하면 곤란하지 않나? 그런데 드와이트학교 사서는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건 “톰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제인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라는 식으로 다 받아줬다. 우리나라 교사들처럼 객관적인 코멘트는 전혀 하지 않았다.
왜 그랬냐고 수업이 끝난 뒤 물었더니 사서 왈, 이 수업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책의 재미를 온몸에 심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책이 재미있어야지 스스로 읽게 되고, 평생 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 그런가? 정답을 잘 맞추는 아이는 늘 칭찬을 받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아이는 “다시 생각해 보렴” 하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러다 보니 책이 재미가 아닌 긴장 내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이 되면 도서관에서 검색하는 방법을 기본적으로 가르치면서 모둠별로 독서·토론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교과서가 있기는 하지만 교사들이 교과서로 수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대신 도서관에 있는 책이나 인터넷에 있는 정보들을 검색하면서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간다는 것이다.
중고등학생이 되면 훨씬 더 넓은 도서관으로 옮겨가 수업을 받게 되는데, 도서관 내에 작은 모임방이 여러 개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이곳에서 자기 모둠끼리 시끌벅적 토론한 내용을 벌인 다음 수업시간에 이를 발표와 리포트로 이어가고, 교사들은 이를 평가하고 있었다. 당연히 ‘1번’ 또는 ‘4번’처럼 사지선다형이나 똑같은 답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핀란드는 미국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몇 천만원씩 내고 이런 교육을 받는 미국과 달리 핀란드는 공교육 시스템으로 같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었다. 내가 방문한 종합학교의 경우 가난한 지역에 있는 일반 종합학교였는데도 초등 1,2학년은 반별로 학생 10~15명에 교사 두 명이 배치돼 있었다. 읽기, 쓰기, 셈하기를 저학년 때 충분히 익힐 수 있게끔 이들 교사가 학생 한 명 한 명을 세심하게 케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만이 아니었다. 핀란드인에게 독서는 일상이었다. 핀란드에서는 대개 4시~4시반이 퇴근시간인데, 이 시간이 지나면 퇴근을 하고 난 아빠들이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동도서관도 있었다. 이동버스 정류장마다 책을 실은 버스가 정차하면서 몇 시에는 이 마을, 몇 시에는 저 마을 하는 식으로 온 마을을 돌고 있었다. 노르웨이에서는 버스 대신 배가 책을 실어나르며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21세기는 유목의 시대라더니, 사람뿐 아니라 도서관도 유목의 시대에 접어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조이스 초등학교는 도서관 공간 배치 자체가 ‘도서관은 학교의 심장‘이라는 철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본래 이 학교는 극빈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성적도 꼴등이고 폭력이 난무하기로 소문나 있었다고 한다.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이민자 자녀도 많았다. 그런데 이 학교에 부임한 교장선생님이 독서를 통해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읽기 능력을 키워줘야겠다고 결심한 뒤 도서관 벽을 헐어버리는 혁신적인 실험에 나선 것이다. 실제로 이 학교 도서관에서는 문을 열면 곧바로 5학년, 6학년 교실로 통하게 돼 있었다. 저학년은 아예 교실에 서가를 꾸며 책을 집어넣어 준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접근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아이들이 책을 가까이 접하도록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진국 독서교육을 보고 충격받다
이들 현장을 보며 ‘선진국이 괜히 선진국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이들은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미래사회가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아이들을 길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보고 돌아와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부터 바꿔야 하나 싶어서였다. 근대화에 뒤졌던 우리는 한 발 앞섰던 일본에 식민 지배까지 당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그 피해가 얼마나 컸던가? 양반들은 그나마 먹을거리라도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갈 뿐이었다. 그런데 거대한 패러다임이 바뀌는 오늘날 똑같은 일이 벌어지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앞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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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선진국들은 수업 시간에 교과서 대신 책과 정보를 적극적으로 탐색하며 활용하는 추세다. |
사실 현재로서 떠올릴 수 있는 대안은 교과서를 한쪽으로 치우고 평가 방식을 바꾸는 정도다. 교과서 대신 도서관의 수많은 책과 인터넷 속 정보를 활용해 살아 있는 공부를 하게 하고, 이미 정해져 있는 정답이 아닌 자기만의 생각을 말하게 하고 이를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하겠나. 백번을 양보해, 정책은 자유학기제 도입하듯 극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을 바꾼들 현장에서 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 이런 교육을 위해서는 교사 스스로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물론 글을 쓰고 토론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교사들은 그렇게 교육받고 선생님이 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정책이 바뀌고 교사들이 준비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수밖에. 가정에서는 부모님이 먼저 책을 읽고 사회적으로는 독서 인프라를 조성하게끔 요구하는 등 독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기본이다. 내가 급한대로 한 가지 제안하는 것은 책모임 내지 독서동아리를 활성화하자는 것이다. 부모님들도 아이에게 어떻게 독서교육을 시킬지 혼자 고민할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그룹을 만들어 책을 읽고 쓰고 토론하게끔 지원하셨으면 한다.
우리 큰아이의 경우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작은아이의 경우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무려 십 년 가까이 친구들과 함께 책모임을 진행했다. 책모임은 일요일마다 우리집에서 진행됐는데, 일단 탄력이 붙고 나니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저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간식을 대주고 자리를 비켜줬을 뿐이다. 그 자리에 있으면 내 자식 못난 꼴이 눈에 들어와 못마땅하고, 아이 또한 부모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초창기만 해도 무슨 책을 고를지 우왕좌왕하던 아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테마를 정해 책을 읽는다든가, 벤다이어그램이나 마인드맵을 그리며 독서 소감을 나누는 식으로 자기들끼리 활동을 만들어 갔다. 때로는 독서여행을 직접 기획해 떠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책모임에서 아주 수준높은 대화가 오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위안을 받는 듯했다. 책모임에 오면 뭔가 채워지는 느낌도 있고, 평상시 친구들과 잡담 나눌 때와는 달리 정신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책모임은 결국 아이들의 인생행로마저 바꿔놓았다. 공부에 뜻이 없어 시골에 가 농사를 짓겠다던 큰아이는 책모임을 통해 공부가 재미있어졌다며 대학에를 진학했다. 현재는 지방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만화 스토리작가 지망생으로 글을 쓰고 있다. 공부는 잘하지만 사회성이 약했던 둘째 또한 책모임을 통해 사회성을 키웠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 대신 다른 책들도 폭넓게 읽게 되면서 성적이 쑥쑥 오르더니 이른바 명문대에 제 힘으로 합격했다.
책모임 30만개를 꿈꾸는 까닭
그러니 여러분께서도 선택하시라. 학원을 열심히 보낼 것인지, 독서모임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인지. 이런 독서모임을 전국적으로 30만개까지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 나의 꿈이다. 가정, 학교, 기관, 직장 등 어디라도 좋다. 이 일을 하고 싶어 다니던 학교도 그만뒀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제 얘기를 듣고 ‘우리아이한테 독서를 빨리 시키고 독후감도 쓰게 해 봐야지?’ ‘책 모임도 해 봐야지?’ 하면서 괜히 마음이 급해진 부모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부모 마음이 아니라 아이 마음이 그래야 한다. 아이가 그런 마음이 돼야 하는 것이다. 나비를 붙잡고 싶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가 주인공인 그림책이 있다. 아이가 붙잡으려 들수록 나비는 더 먼 데로 도망을 간다. 지친 아이는 결국 할머니가 만들어준 꽃향기 나는 이불을 덮고 잠이 든다. 그러자 나비가 제발로 아이를 찾아온다.
마음이 조급해질 때면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부모 자신을 다독일 수 있으면 좋겠다. 존 F.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배움이 없는 자유는 위험하고, 자유가 없는 배움은 헛되다”고. 아이 스스로 배움을 좋아하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울퉁불퉁한 남자아이들 이해하기
초등 남자아이들은 욕구는 큰데 눈치는 안 따라주니 ‘망아지’ 취급을 받는다. 울퉁불퉁한 남자아이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지난해 아이의 담임은 명예퇴직을 앞둔 분이셨다. 하고 싶던 것들을 후회 없이 다 하시는 듯했다. 과학 시간에 끓는 물 공부를 하고는 그 물에 즉석 떡볶이를 해먹는 등 남다른 수업 방식과 규칙으로 아이들을 놀래거나 즐겁게 해주셨다. 숙제도 안 내주셨다. ‘집에서는 공부하지 마라’ ‘학원 가지 마라’ 하셨다. 체험학습에서 예상보다 일찍 돌아온 날에는 운동장에서 더 놀다 귀가하라고 지도하실 정도였다. ‘과소 학습’ 아이를 둔 처지에서는 살짝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고학년 방과 후 축구 수업의 3분의 1 이상이 이 반 아이들로 채워지고 방학 때에도 수시로 ‘접선’해 뛰어놀고 급기야 다른 반 아이들까지 붙어 노는 것을 보고는 교사의 자리가 넓고도 깊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의외로 학부모들은 교사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학대’만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도 있다. 교사는 교사대로 방과 후 특별지도를 좀 하려고 하면 학원 시간 늦는다고 항의하는 학부모에게 시달린다. 서로 쉽게 불신하고 쉽게 포기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상한 선생님’이라도 학년을 마치고 돌아보면 좋은 점 한두 가지는 꼭 있다. 아이들에게 영향력 있는 어른은 결국 스승이다. 대략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격변의 나날’에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가 인생의 ‘오복 중 하나’라고 꼽고 싶다.
본인도 완벽주의자에 가까우시고 두 딸도 심하게 모범생인 어느 반 담임 아래서 그 반 아이들이, 특히 활동적인 남자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혼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는 여자아이들)이 어떤 1년을 보냈는지 자세히 들은 적이 있다. 듣는 내가 다 오줌이 마려울 정도였다. 초등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에 비해 학교생활이 고되다. 여물지 못하고 규범과 질서를 따르기도 힘겨워한다. 한마디로 약간 늦게 ‘인간계’에 진입한다고 이해하면 좋은데, 교실에서는 그 속도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욕구는 큰데 눈치는 안 따라주니 심한 경우 ‘망아지’ 혹은 ‘망나니’ 취급을 받는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아이들이 아니라 교사가 문제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교사들은 평균적으로 학창 시절 ‘범생이’군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공부를 못해본 적도, 사고를 쳐본 일도 드물 것이다. 스스로 그런 ‘한계’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교사 대부분이 여자다. 경험과 소신이 남다른 분이 아니라면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쳐도 멀뚱대고, 협동과 배려를 일러줘도 울퉁불퉁한 남자아이들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내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꽤 큰 규모임에도 지난해 전 학년 통틀어 남자 담임은 단 한 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성비 불균형이다. 이 정도의 비율이면 어느 조직이든 건강할 수가 없다. 교무실이라고, 학교라고 예외가 아니다.
교육 현장의 말도 안 되는 성비 불균형
그런데도 임용 단계에서 적극적인 조처는 없다. 교육대학교 입학 단계에서 성비 할당 정책을 펴고 있지만, 점점 수시 비중이 높아지고 그나마 특별전형은 대체로 제외되므로 현재 적게는 20~25%, 많게는 35~40%인 명목상 입학 정원 성비 규정이 실제로는 보장되지 않는다. 이 수치는 임용 단계에서 또 확 떨어져 한 자릿수를 기록하기도 한다. 2017년에는 남자 교원이 단 한 명만 임용된 지역도 있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고 방치하는 건 옳지 않다. 특단의 조처가 필요하다. 지혜를 모으면 방법은 있을 것이다.
일찍이 잘 놀다 외환위기 이후 엉겁결에 교대에 합격했던 과거 동네 동생은 부모님이 동네잔치까지 여는 통에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 대학 시절에도 여학생들에게 “넌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르느냐”고 타박을 받다가 저절로 철이 들어 꽤 우수한 성적으로 교사가 되었다. 망아지 혹은 망나니 취급 받는 남자아이들이 그 교사의 손을 거치면 유니콘 혹은 의인으로 거듭난다는 전설이 따른다. 나는 그가 성장기 때 공부 못해본 남자 교사라서 절반은 먹고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믿을 수 없겠지만, 참 재미있는 코딩
정부는 초등학생에게도 ‘코딩 교육’을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코딩 교육의 목표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기본이 되는 사고체계, 즉 논리적 사고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소프트웨어(SW) 개발자 친구가 어느 날 SNS에 글을 올렸다. “내 자식은 절대 이 일 안 시킨다.” 홧김에 남긴 말이겠지만, SW 개발자에 대한 직업 선호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급여는 적고 업무시간은 길다는 인식이 많다. 그런데 정부는 전 국민을 개발자로 만들고 싶은 건지, 초등학생에게까지 ‘코딩 교육’을 의무화하겠다고 한다. 학부모들은 혼란스럽다. 코딩이 뭔지 모르는 부모라면 더욱 그렇다.
‘코딩’은 ‘프로그래밍’과 같은 말이다. 컴퓨터에게 뭔가를 시키는 ‘코드(명령문)’를 작성하는 일을 뜻한다(교육부는 ‘SW 교육’이라고 부른다). 코딩 교육이라고 하면 검은 화면에 열심히 영어 단어를 입력하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수십 년 전, 동네 컴퓨터 학원에서 코딩 교육을 할 때는 그랬다. 예전에는 C나 BASIC 같은 특정 컴퓨터 언어의 ‘문법’을 주로 가르쳤다. 과거 영어 교육이 주로 문법 암기에 치중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나마 영어 문법은 잘 바뀌지 않지만, 컴퓨터 언어는 수십 가지가 넘는 데다 유행하는 언어도 자주 바뀐다. 많은 학생들이 금세 흥미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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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지난해 12월14일 한 코딩 교육 기업이 교육용 로봇을 활용해 어린이들에게 코딩 수업을 진행했다. |
이제는 다르다. 코딩 교육의 목표는 어릴 적부터 논리적인 사고능력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춘다. 컴퓨터 언어 문법과 상관없이 SW를 만드는 데 기본이 되는 사고체계를 가르치는 방식이다. 이를 ‘컴퓨팅 사고력(Computational Thinking)’이라고 한다.
컴퓨팅 사고력은 컴퓨터처럼 생각하는 능력을 뜻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컴퓨터에게 요구하는 일은 ‘사진을 예쁘게 꾸며서 친구에게 보내기’처럼 매우 복잡하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해 잘게 쪼개고, 각각의 작은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한 부분도, 도구를 잘 활용해야 할 필요도 있다.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능력도 요구된다.
이런 능력을 배우기 위해서 컴퓨터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정확한 설명서 만들기(Exact Instructions Challenge)’라는 동영상이 인기를 끌었다. 영상에서 아빠는 아이에게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상세히 적어오라고 한다. 아이들이 설명서를 만들어오면 아빠는 컴퓨터처럼 적힌 대로 행동한다. 가령 아이들이 “잼을 발라라”고 적으면, 잼 뚜껑을 열지도 않고 빵에 문지르는 식이다. 아이들은 투덜대며 “잼 뚜껑을 연다. 나이프를 잼 통에 넣는다. 퍼낸다. 빵 옆면에 바른다”라고 설명서를 수정해온다. 아이들에게는 일상적인 활동과 사물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는 동기가 될 수 있다.
이 영상은 ‘샌드위치로 아이들 코딩 교육 시키는 아빠’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소개되었다. 코딩 교육의 원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훨씬 복잡한 개념들까지 ‘몸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많이 나와 있다. 이런 활동을 전원 플러그가 필요 없다는 뜻에서 ‘언플러그드(Unplugged) 활동’이라고 한다.
컴퓨터를 이용해 코딩을 가르칠 때에도 타자를 치는 게 아니라 조립식 블록을 마우스로 옮기는 방식을 많이 쓴다. 이런 ‘교육용 컴퓨터 언어’로도 복잡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로봇을 움직여가며 코딩을 배우는 방법도 있다. 물리적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뜻에서 ‘피지컬 컴퓨팅’이라고 한다. ‘코딩 교육’은 이처럼 다양하다.
코딩 교육 유행은 미국이 주도했다. 2013년 설립한 미국의 비영리단체 ‘코드닷오알지(code.org)’는 무료 온라인 코딩 교육과정을 만들어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이 단체는 SW 교육의 기회가 인종·성별에 따라 편중되어 있다고 보았다. 누구에게나 코딩과 컴퓨터 공학을 배울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크로소프트·구글·페이스북과 같은 많은 거대 IT 기업이 이 단체를 후원하고 오바마 전 대통령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공교육에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 학생들은 만 5세부터 컴퓨팅 수업을 하고, 1300여 개 학교에서 무료 방과 후 프로그램인 ‘코딩클럽’을 운영한다.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에서 코딩을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마트폰으로 장을 보고 택시를 부르는 것처럼, 일상 대부분을 SW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먹는 쌀밥이 어디에서 왔는지,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식품의 원리를 가르치는 게 농부가 되라는 뜻이 아닌 것처럼, 코딩 교육 역시 아이들을 반드시 개발자로 키우기 위함은 아니다.
코딩영재스쿨 등 사교육 열풍도
물론 교양교육 차원에서만 코딩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미래 일자리 걱정을 안 할 수 없다. 미국 클린턴 정부에서 교육장관을 지낸 리처드 라일리는 “미래에 가장 유망한 10대 직업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아직 없는 문제를 풀기 위해, 아직 없는 기술을 사용하게 될 텐데 우리는 ‘지금’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맹점을 지적했다. 코딩 교육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겠지만, 미래에 필요한 고차원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여러 나라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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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창 제공 컴퓨터 마우스로 조립식 블록을 옮기며 코딩의 기초를 배울 수 있다. |
우리 정부도 “SW 중심 사회의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며 코딩 교육의 명분을 내세웠다. 세계화 시대에 대비해 영어·중국어 교육을 강조한 것과 마찬가지다. 재작년에 개정한 교육과정에 따르면 곧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매달 한 시간 정도 SW 교육을 받는다. SW 특기자 대입 전형은 수능점수 없이 수상 경력이나 동아리 활동 등을 보고 뽑는다. 카이스트와 고려대 등 10여 개 학교가 총 300명 이상의 학생을 뽑을 예정이며 앞으로 더 늘린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사교육 열풍이 뒤따른다. 월 135만원이 드는 코딩영재스쿨이 등장했고, 2주일에 1000만원이 넘는 실리콘밸리 체험 프로그램도 나왔다. 줄넘기 과외도 있는 세상이니 뭔들 못하겠느냐만, 정보와 사교육의 격차로 인한 교육 불평등에 한술 더 보태지 않을까 염려되는 지점이다.
평범한 학부모라면 코딩 교육 시대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많은 사람이 코딩이 적성이 매우 중요한 분야라는 점을 간과한다. 개인별 능력 차이도 크다. 1960년대 프로그래머 간 생산성을 비교한 연구가 있었다. 같은 일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20배, 결과물의 성능(속도)도 10배까지 차이가 났다. 이후 여러 연구가 뒤따랐지만 뛰어난 SW 개발자는 평범한 개발자보다 10배 이상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 인식이다.
내신·대입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내 아이가 코딩이 적성에 맞는지 확인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이와 함께 무료로 코딩을 배워볼 기회가 많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운영하는 ‘SW 중심사회(www.software.kr)’에 다양한 참고 사이트가 정리되어 있고, 코드닷오알지에도 한글화된 콘텐츠가 마련되어 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코딩은 음악·미술처럼 창의적인 활동이고 블록놀이만큼 재미있다.
“개발자=코딩? 아니죠~ 컴퓨터와 사람 사이 통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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