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보수는 망해갑니다
새누리당이 잔류 강경파인 ‘자유한국당’과 탈당 온건파인 ‘바른정당’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확장성이 부족하고 바른정당은 존재감이 크지 않아 위기다. 두 당 사이의 간극도 커졌다.
징후는 광장에서 발견된다. 새누리당에서 이름을 바꾼 자유한국당의 강경파 의원들은 극우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탄핵 반대 집회에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초창기부터 광장에 나섰던 ‘확신파’인 김진태 의원에 이어, 친박 핵심으로 분류되는 조원진·윤상현 의원이 결합했다. 대선 도전을 선언하거나 이름이 거론되는 주자들 중에서도 이인제 전 최고위원과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광장에서 “탄핵 기각”을 외쳤다. 보수 내부 경쟁에서, 강경 아스팔트 보수 여론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높아졌다는 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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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월4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오른쪽)와 윤상현 의원(왼쪽)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2월10일에 나온 한국갤럽 2월 2주차 여론조사를 보면, 탄핵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15%다. 국회의 탄핵안 가결 직전이던 지난해 12월6~8일 조사 결과(14%)와 거의 차이가 없다. 탄핵 찬성 여론 역시 지난해 12월 81%, 올해 2월 79%로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탄핵 여론은 이슈에 따라 출렁이지 않고 안정적이다.
전체 여론 지형으로 보면 탄핵 반대 여론은 고립된 블록이다. 보수 지지층이 붕괴하면서 상대적으로 온건·합리 성향의 중도 보수 여론이 이탈한 상태다. 이에 따라 보수 진영에서는 ‘탄핵 반대 15%’를 잡으면 주도권을 쥐는 역설적인 구도가 등장했다. 탄핵을 반대하는 고연령층과 대구·경북 강경파가 자유한국당 지지 기반의 주류로 자리를 굳혔다.
보수 내부 경쟁의 품질도 나빠졌다. 바른정당의 이륙 실패가 결정적이었다. 보수 혁신을 내걸고 분당해 나간 바른정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 자릿수 지지율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다. 바른정당이 힘을 받지 못하자, 자유한국당은 강경 보수 블록의 지지만 확보해도 보수 내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게 되었다. 강경파의 당기는 힘은 한껏 강해진 반면 외연 확장의 압력은 낮아졌다.
바른정당 창당은 ‘보수 적통 경쟁’과 ‘반기문 플랫폼’이라는, 서로 결이 다른 두 그림이 느슨하게 연합한 기획이었다. 대구 동구을이 지역구인 유승민 의원이 전자를 대표한다. 이 기획의 관심사는 단일 보수 정당의 주도권을 강성 친박계로부터 회수해오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바른정당이 온건 보수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며 보수 전체를 주도하는 정당으로 서야 한다.
‘반기문 플랫폼’ 공중분해된 뒤 막막해져
‘반기문 플랫폼’ 노선은 김무성 의원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이 이끌었다. 유력 대선 주자였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국정 농단 책임을 져야 하는 새누리당에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친박계 색채를 뺀 탄핵 찬성파 보수 신당이 필요했다. 반 전 총장을 불러들여 대선 경쟁력을 바탕으로 보수 진영을 주도하는 당으로 올라선다는 구상이었다. 이 경우 당시에는 새누리당 내에 남아 있던 20명 안팎의 ‘친반기문’ 그룹이 2차 탈당을 할 가능성도 유력했다. 주로 충청권을 기반으로 하는 친반기문 의원들이 탈당 이후 바른정당과 연합하거나 통합한다면 새누리당은 더 큰 위기로 몰릴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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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월1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뒤 인사하고 있다. |
하지만 이 구상은 근본적으로 반기문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카드의 능력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걸었다. 리스크는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반 전 총장은 귀국 이후 짧은 대선 행보만으로 지지율을 까먹은 후, 대선 출마선언도 하기 전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2차 탈당이 점쳐지던 새누리당 충청권 의원들은 어정쩡하게 주저앉았고, 바른정당의 ‘반기문 플랫폼’ 기획은 공중분해되었다. 여론 기반도 조직력도 취약한 신당에게 가장 중요한 반전 카드인 유력 대선 주자가 사라졌다. 바른정당의 핵심 관계자는 “반기문 카드가 ‘쫑’이 난 이후 당의 앞길이 막막해졌다”라고 털어놓았다. 바른정당은 초기 이륙에 사실상 당의 명운을 걸었는데 그게 실패하면서 난감한 처지로 내몰렸다.
보수 처지에서 2017년 대선은 ‘내전’의 성격도 있다. 대통령 당선자를 내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보수 내의 주도권 경쟁에서는 앞서야 한다. 그래야 대선 이후 보수 재편 국면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고, 2018년 지방선거도 유리하게 치를 수 있다.
‘현찰’은 자유한국당이 쥐고 있다. 보수 강경파는 탄핵 반대론에 기운 자유한국당으로 결집했다. 한국갤럽 2월3주차 기준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11%. 새누리당 전성기를 떠올리면 초라한 수치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경쟁자인 바른정당의 6%에 비하면 확실한 우세다. 보수의 핵심 기반인 60세 이상 고령층과 대구·경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물론 이 수준의 정당 지지율로 집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외연 확장은 필수다. 하지만 목표가 ‘보수 내전의 승리’라면 계산은 달라진다. 강경파 결집으로도 내전은 이길 가능성이 꽤 높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황교안 국무총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수 계열 후보 중 가장 앞서 있다. 15% 안팎의 탄핵 반대파가 황 총리에게로 쏠렸다. 다만 자유한국당 이외의 정당 지지자나 무당파층에서는 외면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다. 귀국 전 반기문 전 총장과의 결정적 차이다. 지지율이 높을 때의 반 전 총장은 무당파의 폭넓은 지지에다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 지지층 일부까지 흡수했다. 지금 황 총리로의 보수 결집은 ‘황교안 효과’라기보다는, 탄핵 반대파 15%의 대표주자 옹립에 가깝다는 게 여론 분석가들의 일치된 평가다.
자유한국당의 한 전략통은 “대통령 권한대행을 중간에 내던져야 하는 부담도 있고 당내 기반도 없는 황 총리가 경선에 뛰어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이 후보 추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상 추대에 가까운 경선 룰은 가져다 안겨야 움직이려 들지 않겠나”라고 예측했다. 예를 들어 여론조사 비율을 대폭 끌어올리는 등 민심 반영 비율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경선 출마를 선언한 당내 주자들 주변에서는 황 총리가 결국 출마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지도부는 경선 경쟁자들의 반발을 묵살해가며 ‘추대에 가까운 경선’을 만들기 어렵고, 황 총리는 실질적인 경쟁이 벌어지는 경선이라면 뛰어들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자유한국당에는 현재 대선 출마를 선언하거나 저울질하는 인물이 적지 않다. 안상수·원유철 의원과 이인제 전 최고위원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출신인 언론인 김진씨도 자유한국당 입당과 함께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 김기현 울산시장,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조경태 의원 등도 자천타천으로 거론된다. 대선 본선 경쟁력이 높다는 평가보다는, 대선 이후 보수 재편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후보 자리를 노린다는 평가가 많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홍준표 경남도지사도 2월16일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뒤엎고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대선 출마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대선 후보라 쓰고 당권 후보라 읽는다
자유한국당이 쥔 ‘현찰’은 미래 가치가 낮다. 50대에서도 더불어민주당에 밀리는 자유한국당은 60세 이상 고령층의 지지로 버티고 있다. 신규 유입되는 20대 유권자를 잡기 어려워 지지층 재생산이 쉽지 않은 구조다. 광장의 탄핵 반대 강경파와 당의 지지 기반이 갈수록 겹쳐간다. 반면 바른정당은 현금화가 불확실한 ‘어음’에 당의 명운이 걸린 처지로 내몰렸다. 바른정당 핵심 관계자는 “아스팔트 보수, 강성 보수와 다른 ‘샤이 보수’가 틀림없이 존재한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마저 비호하는 극단적 보수에 질려버리고 숨은 유권자다. 이 층이 지금 안희정 지지로 가거나 무당파로 빠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 기반을 창출해내야 올해 대선과 내년 지방선거를 치를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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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월15일 바른정당 정병국 대표(가운데)가 김정남 피살 관련 긴급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가능할까? 쉽지는 않다. 당내 대선 주자인 유승민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존재감이 크지 않다. 대선 국면에서 집권은 고사하고 합종연횡에도 충분치 않은 지지율로 고전 중이다. ‘보수 내전’에 패배할 경우,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의 압력이 당장 닥쳐온다. 바른정당이 노선과 철학과 지지 기반을 독자 정립한 새로운 보수 정당이라면 보수대연합론을 버텨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바른정당을 그렇게 평가하는 관찰자는 거의 없다. 새누리당을 탈당했으나 바른정당에 합류하지는 않은 정두언 전 의원은 2월1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바른정당도 사실 망했다. 국민 눈에는 둘이 다를 게 뭐냐”라고 말했다.
강경파·온건파 연합은 한번 깨져나가면 갈등을 증폭하는 피드백 고리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강경파 여론은 더 강경하게 치닫고, 온건파 여론은 아예 울타리 밖으로 떠나버린다. 바른정당이 끝내 이륙에 실패하면 울타리 밖으로 떠난 온건파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민주당 계열 정당은 2003년의 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과 2007년 핵분열 이후 기존 연합을 얼추 복원하는 데만 10여 년을 쏟아부어야 했다. 지금까지도 복원은 완전하지 않다. 연합의 한 축이었던 호남의 큰 조각이 따로 당을 차린 상태다. 연합의 복원은 한 울타리 안에서 볼 때보다 몇 배는 어려운 과정이다. 보수는 지금 막 그 길에 들어섰다. 보수의 겨울이 깊어지고 있다.
북한, '선의'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최근 야권 대선후보의 이른바 '선의' 논란이 화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잘못을 한 사람도 애초 동기는 선의였음을 믿고 싶은 정치인의 발언이었다. 선의는 좋은 의도를 말한다. 그러나 선의가 잘못된 결과를 정당화하거나 불법적 사실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선의 논란이 있던 즈음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김정남이 피살되었다. 백두혈통까지 백주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치명적인 화학무기로 암살하는 북한 당국을 떠올리면서 대북정책의 '선의'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의 대북 정책은 일정부분 선의를 가지고 추진된 측면이 없지 않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화해와 협력, 교류와 지원을 통해 우리의 선의가 지속되면 북한도 점진적으로 조금씩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작동했다.
그러나 우리의 '선의'에 대해 북한은 매번 '악의적 결과'로 화답해왔다. 물론 상호 불신과 오인이 상대방의 선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악순환을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여하튼 햇볕정책 초기 우리의 선의는 결과적으로 선의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기대한 바의 성과가 없다고 판단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이번엔 주관적 기대만을 앞세워 대북 압박을 추진했다. 선의 대신 버릇을 고쳐놓고야 말겠다는 외고집이 정당화됐다. 압박과 봉쇄를 통해 북한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주관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몰입했다.
그러나 주관적 기대에 의존한 대북 강경정책 역시 결과는 처참했다. 북한이 변화하고 굴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의 대북 지렛대만 스스로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사실 선의에 기댄 햇볕정책이나 주관에 기댄 강경정책 모두 우리의 의지로 북한을 바꿀 수 있다는 자기중심적 대북정책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강경정책도 그런 의미에서는 역설적으로 선의의 대북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 북한 관영 매체 조선중앙TV는 9일 핵무기연구소 성명을 통해 5차 핵 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밝혔다. ⓒ조선중앙TV
조기 대선의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각 정당 및 후보별로 활발한 정책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외교‧안보‧대북정책도 마찬가지다. 가장 논쟁적인 영역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북핵문제에 갇혀 한발짝도 나가기 힘든 상황이다. 외교도 안보도 대북정책도 모두 북핵에만 집중되는 형국이다. 북핵 문제 해결없이는 사실상 우리의 외교도 안보도 대북정책도 전향적인 진전을 이루기 힘들게 되었다. 따라서 북핵문제의 현실적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지금 각 후보의 최고의 과제가 될 것이다.
선의 논란을 뒤로 하면서 이제 북핵문제도 더 이상의 선의나 주관적 의지만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협상만으로 북핵이 해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제재만으로 김정은의 셈법을 바꿀 수 없다.
이제 북핵문제는 선의나 확신에 찬 일면적인 처방으로는 해결되기 어렵다. 북핵이라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종합처방을 필요로 한다. 감기에도 두통과 인후통과 콧물과 기침과 몸살을 잡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각각의 처방이 종합되어야 한다. 이제 북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일면적 처방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이제는 어느 하나의 처방에만 올인하고 그것만으로 북핵문제를 풀 수 있다는 만능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6자회담만 개최되면 협상으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에는 너무 늦었다. 반대로 제재만 꾸준히 지속하면 북한이 굴복하고 말 것이라는 제재만능주의 역시 비현실적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사드만 배치하면 북한의 핵위협을 억지할 수 있다는 군사적 만능주의도 불필요한 진영 대결만 부추길뿐 해법은 결코 아니다. 외교만 잘하면 제재를 성공할 수 있다거나 북한의 입장 변화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 역시 북한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협상만능주의, 제재만능주의, 사드만능주의, 외교만능주의 모두 현실적인 북핵 해법으로는 부족하고 비현실적이다. 선의 혹은 주관적 신념에만 기대서 북핵문제를 풀기에는 상황이 너무 악화되어 있다. 김정은 정권에게 그리고 그들이 끝까지 포기 못할 정권이익이나 국가이익 앞에 선의나 주관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정책은 철저히 현실에 바탕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해법이어야 한다.
제재를 지속함으로써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는 학습효과를 얻게 해야 한다. 협상을 병행함으로써 북핵의 상황악화를 막고 북핵문제를 관리해내고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군사적 억지능력을 강화함으로써 만약에 있을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자강안보로 대비해야 함은 최우선의 필요조건이다. 외교를 통해 대북제재의 효과를 높이고 북한을 협상장에 나오도록 유도하는 노력 역시 포기해서는 안된다. 더 근본적으로는 북한의 시장확산과 경제발전이라는 불가역적 변화를 추동함으로써 내부의 정치 동학을 견인해내는 장기전략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선의로 의지로 주관적 기대로 북핵문제를 풀 수는 없다. 제재와 억지와 외교와 협상을 병행하면서 동시에 북한 내부의 정치적 변화를 도모함으로써 북핵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내는 종합처방이 필요한 때다.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일관된 종합처방으로 북핵을 관리‧억지하고 결국은 북한 내부의 근본적 해법을 준비해야 한다. 감기를 낫는데도 상당한 시일이 걸리듯이 북핵 문제 해결에도 적지않은 인내와 시간이 소요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보수가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보수의 진짜 정통’이라고, 바른정당은 ‘보수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광장에는 태극기를 든 ‘박근혜 보수’가 있다. 하지만 ‘진짜 보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자유한국당의 정통 보수, 바른정당의 개혁 보수, 그리고 광장의 ‘박근혜 보수’. 이 때 아닌 ‘보수 전쟁’에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면모는 진짜 보수, 보수주의와는 너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말 그대로 기존 질서, 제도, 전통, 관습을 보존하려는 가치 정향을 의미한다. 유럽의 중세 교권, 19세기 왕정체제, 그리고 사회의 기존 위계질서를 유지하려던 정치사회적 움직임이 그 대표적 사례다. 19세기 이후 서구의 보수는 기존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적 요구에 부단히 적응하는 진화론적 행태를 보여왔다. 서구 보수주의가 아직까지도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반동과 구분되어야 한다.
보편적 보수는 기존 질서를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법치주의, 전통과 순응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자유시장과 사유재산의 보존도 보수의 핵심 가치다. 경제·사회적 부조리를 가족주의와 따뜻한 온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도 그 특징 중 하나다. 자유시장에 대한 강조는 자연히 작은 정부와 재정 보수주의로 이어진다. 보편적 보수는 애국주의를 중요시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바로 여기서 나오는 덕목이다. 그러나 이는 관용과 통합을 전제로 한 공동체 애국주의다.
보수의 가치와 이념은 나라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 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어왔다. 그러면 한국의 보수는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그 평가는 정통 보수, 개혁 보수, 광장 보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광장에서 표출된 한국 보수의 공통된 민낯은 ‘진짜 보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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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일 서울 여의도에서 태극기행동본부 주최로 열린 대통령탄핵 반대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삭발식을 마치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2017.3.2 |
법치를 강조해야 할 광장 보수의 함성은 ‘군이여 일어나라’ ‘계엄령만이 답이다’ ‘특검을 해체하라’로 나타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이들은 검찰과 법원까지도 인정한 법적 증거를 부인하고 그와 관련된 가짜 뉴스를 무차별 배포한다. 아예 법 절차에 의한 탄핵 과정 자체도 부인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국가의 대승적 이익을 위해서는 사유재산을 침해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도 좋다는 궤변까지 내던지고 있다. 사회적 책무를 저버리고 약탈과 지대 추구에 익숙해진 기득권 세력들을 옹호하기에 바쁜 광장의 보수, 이건 진짜 보수가 아니다.
‘그래 봐야 보수 정권은 끝장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이승만·박정희의 옛 공적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것 역시 참된 보수의 면모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나라와 동일시하여 그를 구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걸로 착각하고 국가 안보를 정권 안보로 환치시키는 이들의 애국주의는 오히려 반애국적 행보로 보인다. 시각이 다른 이들을 종북 좌파, 빨갱이로 매도하며 대형 성조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이들의 애국심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애국은 어느 누구의 독점물도 아니다. 애국의 지름길은 국민적 합의와 통합이다. 이 규범을 깨고 분열 선동에 앞장서는 이들은 망국의 좀비와 다를 바 없다. ‘보수가 서야 나라가 산다’고? 이런 보수가 서면 나라가 망할 것 같아 걱정된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그의 저서 <반동의 수사학>에서 진보에 대한 보수의 비판을 세 가지 명제로 압축한 바 있다. 첫 번째는 ‘그래 봐야 너만 더 힘들어진다’는 역효과 명제, 두 번째는 ‘백날을 해봐라, 아무 일도 안 벌어진다’는 무용(無用) 명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복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 빨갱이다’라는 위험 명제이다.
이를 뒤집어보면 세 개의 반동 명제를 도출해낼 수 있다. ‘그래 봐야 보수 정권은 끝장이다’라는 끝장 명제, ‘아무리 용써봐야 역사는 흐른다’는 역사 발전 명제, 마지막으로 ‘안보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 북한과 적대적 제휴를 하는 빨갱이다’라는 적대적 제휴 명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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