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이재용 처벌하면 경제가 죽는다고?

일취월장7 2017. 1. 27. 12:14

이재용 처벌하면 경제가 죽는다고?

[시민정치시평] 삼성 적폐를 청산할 때가 왔다
이병천 강원대학교 교수      
2017.01.18 18:26:42


이번 특검이 시작할 즈음에는 기대보다 우려가 더 컸다. 특검이라지만 죽어가는 권력 눈치 보기에 바빴던 정치 검찰보다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갈까 걱정했다. 박영수 특검에 대해 가졌던 나의 불신은 보통 시민이면 당연히 나올 만한 것이다. 박영수 특검이 황교안, 우병우와 각별한 사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시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무엇보다 이건희를 구속조차 하지 않았던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에 대한 기억을 나는 떨칠 수가 없었다.

지난 시기 2008년 비자금 특검의 결과는 이건희에 면죄부를 발급해 줌으로써 법을 조롱한 삼성을 살려주었고, 민주공화국의 법과 정의를 죽이는 대가를 지불했다. 이어 이명박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도움이 된다며 이건희를 '원 포인트 1인 사면'으로 풀어 주었다. 이로써 삼성은 1996년 에버랜드 전환 사채 편법 상속 사건 이래 계속하던 버릇대로 무리수를 두며 이재용 3대 세습체제로 가는 길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삼성이 나라 경제 꼭대기를 차지하며 검찰 등 권력기관을 길들이는 삼성 공화국, 정경 유착 사슬-세습에 기반한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의 사익 동맹 체제, 총수 일가가 지배하는 재벌 이익 독식을 위해 위험 및 비용 책임을 노동자 및 외부로 떠넘기는 무책임 축적 체제, 불공정‧불평등‧불안이라는 3불 심화의 희생 체제가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 끝이 뭔가. 바로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사익공동체'의 국정농단, 이들 공범자 카르텔에 의한 나라경제와 국민복지 농단, 국민 삶의 농단이다.

이처럼 사태의 중대성 때문에 나는 이번 특검에 대해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 섞인 기대도 가졌던 것이다. 1000만에 달하는 '촛불 시민혁명' 행진이 삼성 적폐- 재벌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 경제를 살리라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잘못했다간 특검도 살아남지 못할 판국이다. 다행히 2017년 특검은 나의 예상을 넘었다. 이건희를 살림으로써 법과 정의를 죽이고 나라 경제를 죽이고 삼성 공화국을 온존시켰던 2008년의 '면죄부 특검'과는 달리, 이번 박영수 특검은 삼성 이재용에 대해 용기 있게 구속 영장을 청구하고 이로써 법과 정의를 세우는 특검, 즉 '촛불 특검'이 되었다. 박 특검은 뇌물 공여(430억 원), 횡령(뇌물 중 일부분이 회사자금, 특경가법 위반), 위증(국회청문회에서 거짓말, 국회 증언감정법 위반)의 3종 범죄 혐의를 이재용에게 적용했다. 430억 원대의 뇌물공여죄는 제3자 뇌물제공과 일반 뇌물수수의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특검이 제3자 뇌물 제공 혐의를 적용한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혐의야말로 삼성 이재용 측이 뇌물 제공의 대가로 경영권 승계라는 '부정한 청탁'을 했다고 간주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특검의 이 말은 민주화 시대는 물론이고 한국 현대사 전체를 통틀어 봐도 아주 낯선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 비리-특혜-세습 공화국에서 찌들고 상처받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정계, 재계, 법원, 검찰, 언론, 학계 등등 전반에 걸쳐 문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뿌리 깊은 수구-보수의 나라에서 우리가 이런 희귀한 말을 들을 수 있게 됐을까. 광장 촛불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광장의 거대한 촛불이 의회의 박근혜 탄핵에 이어, 이재용에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새로운 특검을 나오게 했다. 정의가 경제를 앞선다는 말을 천명하게 했다. 박영수 특검의 이 말은 길이길이 명언으로 남을 것이다.

이재용과 그 일가가 지배하는 삼성은 일단 죽어야 한다. 그래야 삼성 공화국의 시대를 과거로 보내고, 민주공화국의 법과 정의가 살아날 수 있다. 삼성은 완전히 죽으면 안 된다. 삼성이 완전히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절대 반대다. 삼성은 갚아야 할 게 매우 많다. 일단 징벌을 받고 죽은 후에 민주공화국의 시민 기업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리하여 삼성도 살고 나라 경제도 살고 국민 복지도 증진되는 길, 이 길을 여는 데 삼성은 오래 밀린 책임 숙제를 다 해야 한다. 거듭난다면 삼성은 그렇게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공공복리를 위해 기여할 수 있고, 해야 마땅하다. 여기에는 국민연금을 사유화할 생각을 버리고 그 정상적 주주권 행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일, 창업주 이래 오랜 시대착오적인 무노조 경영을 버리고 노동기본권을 명실상부하게 인정하는 일, 협력 부품기업들과 상생의 생태계를 발전시키는 일, 상속세를 비롯해 납세 책임을 이행하고 국민복지 증진에 기여하는 일 그리고 해외투자의 직, 간접적인 유턴과 이를 통해 상생적 산업 연관 및 기업 연관 관계,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일 등이 포함된다. 그것이 초일류 국민 기업, 시민 기업으로 거듭나 국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스웨덴의 발렌베리처럼) 삼성의 미래상이다.

지금, 삼성 측에서는 여전히 모르쇠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물론, 보수 언론, 재계, 재계 산하 연구소 등에서 이재용을 가두면 경제가 죽는다고 난리들이다. 그렇지만 진실은 그 반대다. 한국 경제는 '총수 리스크'가 너무 심하다. 삼성 재벌의 악습을 근절하고 재벌 적폐를 청산한다면 한국 경제는 정의로울 뿐 아니라 새로운 발전 단계로 도약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특검의 말을 아래와 같이 살짝 바꾸어 보면 어떨까.

"정의를 세우는 일이 곧 나라 경제와 국민 복지를 살리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재용 구속이 나라 경제 좌우한다는 헛된 논리

[기자의 눈] "세습 사유회사처럼 운영하려면 상장 폐지하는 게"
이승선 기자       
2017.01.20 08:00:57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청구된 특검의 구속영장이 19일 법원에서 기각됐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구속수감이 우리 경제의 큰 악재가 될 뻔했는데 천만다행이라며 "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면 주말마다 촛불집회를 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과 부패 재벌 총수의 구속을 촉구한 민심은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재계에서는 '이재용의 구속 여부'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정말 중시하는 것은 특정 경영자가 받고 있는 범죄 혐의의 실체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인신구속은 도주나 증거인멸 우려에 따른 필요성만이 아니라, 중범죄 혐의자에 대한 '처벌'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430억 원의 뇌물, 그것도 대통령과 거래를 하고 자신의 경영권 확보를 위해 국민연금까지 동원하고, 국회에서 위증까지 했다는 혐의를 받는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의 사법 관행상 이해하기 어렵다.


▲ 430억 원대 뇌물공여와 횡령·위증 등 혐의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오전 의왕시 서울구치소 밖으로 걸어 나오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봉건왕조 삼성,  첨단실리콘밸리 기업 비전 먹히겠나" 


하지만 글로벌 재계의 시각은 이미 "글로벌 기업이라는 삼성이 이렇게 부패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이런 부패혐의를 받는 최고경영자가 경영하는 기업이라면 거래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특히 삼성전자의 매출 중 해외매출이 90%를 차지하고 해외매출의 30% 이상이 미국에서 나오는 현실에서 미국의 경영윤리와 사법체계는 삼성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미국은 상거래에 관해서는 형법보다 민법이 앞서는 나라다. 그래서 미국은 합의금을 많이 내면 형사 기소를 피하거나, 벌금 내고 기소유예 처분을 하는 사례가 많다. 그래서 한국처럼 인신구속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소 여부, 그리고 혐의의 실체적 진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이재용 사건의 의미가 달라진다. 

이미 이재용 부회장의 야심 찬 인수합병 사업인 미국의 전장기업 하만의 주주들은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 혐의 등에 불안감을 느껴 합병 반대 소송에 나서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만 인수합병 건은 이미 CEO리스크로 국내 대기업과 외국 기업의 합작회사 설립계획이 기업 경영진의 범죄 이력이 없어야 한다는 외국기업의 자체 윤리조항 때문에 무산된 전례의 추가 사례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이재용 부회장이 불기소되거나 기소 후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삼성의 글로벌 경영은 큰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경고가 일부 국제경제 전문가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한국 등 아시아 경제 전문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윌리엄 페섹은 미국의 금융전문지 <배런스> 칼럼에서 아예 "삼성과 같은 상장기업이 구멍가게처럼 운영되고, 경영권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그리고 손자로 이어지는 행태라면 차라리 상장 폐지되어야 마땅하다"고 질타했다.

페섹은 "삼성은 모든 주주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상장회사인 척 하는 것보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운영하는 사적 소유기업으로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정직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삼성에 대한 신간을 출간 예정인 제프리 케인도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이 부회장의 구속 여부를 떠나 삼성이 봉건 왕조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현실이 드러난 상황에서 삼성을 첨단 실리콘 밸리 기업으로 전환시킨다는 삼성의 비전에 큰 타격이 될 것이며, 이런 비전을 주주나 사업파트너들에게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글로벌 평판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은 '글로벌 삼성'의 최고경영자로서의 자격을 이미 상실했다는 혹독한 진단을 피하기 어렵다. 

이와 함께 한국의 재계 역시 "재벌 총수에 대한 단죄는 글로벌 윤리. 법체계 때문에 한국 경제에 타격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구태의연한 방어 논리에 대해서도 따가운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삼성의 비판적 멘토'로 불리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지난 19일 SBS 라디오 <시사전망대>와의 인터뷰에서 "국익이나 애국심 같은 우리만의 시각, 우물 안 개구리 식의 관점에서 보는 것 자체가 사실 외국인 투자자의 관점에서는 냉소를 불러일으킨다"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재벌 총수들이 사법기관에 의해서 처벌받고 안 받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조차도 이런 인식을 갖고 있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이런 우리들의 시대착오적인 마음이 있는 한. 그것이 오히려 역으로 헤지펀드의 공격을 불러오고 또 ISD 소송의 빌미가 될 수 있는.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글로벌라이즈된 이 시대, 그리고 이미 글로벌라이즈된 우리의 기업을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만이 우리의 기업을 더욱더 발전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김 교수는 "ISD, 해외에서의 부패방지법 등 선진국들의 제재가 두렵다면 평소에 떳떳하게 법을 지켜가면서 경영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과거 개발독재 시대의 작은 기업들이 아니다. 우리의 대표 기업들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이 되었다. 따라서 국제 시장이 바라보는, 국제적인 투자자들이 바라보는 투명한 지배 구조를 갖추는 것만이 보호무역주의의 압력이나 또는 헤지펀드의 공격을 막고자 한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상정 "이재용 기각, 헌법 제1조가 삼성공화국으로 읽힌 날"

[언론 네트워크] 대선출마 첫 행보로 제주 찾아…"촛불혁명, 개혁 골든타임"
제주의소리=이승록 기자     
2017.01.20 10:39:56



대선출마를 선언한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첫 지역행보로 제주를 찾았다.

심상정 대표는 박근혜 탄핵은 국민이 정치권의 멱살을 잡고 통과시켰다며, 대통령이 되면 노동문제를 제1의 국정과제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개혁입법을 위한 골든타임으로 야3당이 힘을 모아 개혁드라이브를 걸어야 하고, 정치개혁을 위해 독일식 정당명부제, 대선 결선투표제 등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 19일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제주를 방문, 시국강연회를 했다. ⓒ제주의소리


정의당 제주도당은 19일 오후 7시30분 제주시 이도2동 제주벤처마루 10층 대강당에서 심상정 대표를 초청, '흔들리는 대한민국 어디로 가야하나?'를 주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했다.

심 대표는 "오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됐는데 헌법 제1조1항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구가 삼성공화국으로 읽혔고, 2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아니라 삼성으로부터 나온다로 읽혔다"고 일갈했다.

심 대표는 "이재용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으로 혹시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우려하는 국민들이 있는 데, 저는 탄핵은 걱정되지 않는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수구세력부터도 소용없는 인물로 버려졌다. 국민들이 광장에 보이지 않는다고 촛불이 사그라든게 아니다. 잠시 기다리고, 지켜보는 중으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탄핵을 자신했다. 

▲ 19일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제주를 방문, 시국강연회를 했다. ⓒ제주의소리


국민들이 광장으로 나온 이유에 대해 심 대표는 "만약 박근혜 퇴진만이었다면 1000만 촛불이 모이지 않았다. 불의한 정권과 고단한 삶에 지친 국민들이 그리스 아테네시민들처럼 가장 고전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대한민국의 갈 길을 토론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산업화-민주화를 통해 50년 동안 압축성장했지만 빈부격차 등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는 모순이 나타나고 있다며 노동문제를 국정과제 1순위로 놓겠다고 언급했다.

심 대표는 "대한민국이 보통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라고 자랑하지만 산업화 30년 동안 국가와 기업이 약속한 국민번영은 이뤄지지 않았고, 민주화 30년이 됐지만 국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며 "대한민국 현실은 OECD 국가 중 빈부격차가 가장 크고, 불평등이 심하다. 세계 최고 고학력자 우리 아들 딸들이 헬조선을 울부짖는 나라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요즘 대선주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공약을 발표하지만 대부분은 법개정 사항으로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가 할 일"이라며 "지금이야말로 개혁입법을 위한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다. 

심 대표는 "과거에는 새누리당이 반대해서 개혁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쪼개졌기 때문에 개혁입법의 기회다. 정권을 잡고나서 보수가 뭉치면 불가능해진다"며 "대선주자들은 지금 국회에서 개혁입법을 해야 한다고 당에 요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국민들이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정권교체로 '묻지마 교체'이기 때문에 가장 정권교체를 쉽게 할 수 있는 제1당과 유력후보에 지지가 몰리고 있다"며 "1당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다 잘해서가 아니라 어쨌든 정권교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심 대표는 "새누리당에서 민주당으로 교체를 넘어 과감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데 정의당의 역할이 매우 크다"며 "그런 사명감을 갖고 정의당과 저는 정권교체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 개혁을 통해 내 삶을 바꾸는 촛불혁명의 승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사회경제 개혁을 위한 첫 걸음으로 심 대표는 '노동문제를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 19일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한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제주를 방문, 시국강연회를 했다. ⓒ제주의소리


지난 대선의 시대정신은 '경제민주화'와 '복지'였지만 현실은 바뀐게 없이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고 시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심 대표는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는 사회가 되지 않고, 노동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양극화 대책도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며 "노동권을 확실하게 개혁해야 양극화 해결이 가능하다. 노동문제를 국정 제1과제로 삼는 의지가 없으면 양극화 해결은 거짓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많고, 비정규직 1위, 자살 1위, 출산율 최저, 저임금 노동자 비율 1위 등 불행을 상징하는 숫자가 너무도 많다"며 "이게 천만 촛불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1987년 민주항쟁이 군부독재 타도를 위한 것이라면 이번 천만 촛불은 국민 자신을 위한 혁명이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벌개혁을 위해 심 대표는 재벌 3세 세습 금지, 유전무죄-무전유죄 검찰 개혁, 마지막으로 정치개혁을 주창했다. 

심 대표는 "대한민국 경제 최대 리스크는 재벌 3세 세습"이라며 "재벌은 경영 제1 목표가 승계성사로 여기서부터 불법, 탈법, 정경유착, 비자금 등을 조성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심 대표는 "재벌 3대 세습을 금지해야 한다. 시장경제에서 어떻게 하느냐고 하는데 현행법만으로도 충분하다. 대선주자들이 공약으로 재벌을 안봐준다는 대국민선언을 우선 해야 한다"며 "이재용이 60억원을 상속받아 16억원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44억원을 갖고 각종 탈법으로 20년만에 5조원을 만들었다. 현행법으로 50% 상속세만 잘 지켜도 승계가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심 대표는 "법치라는 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대로 남용해서 국민을 괴롭히지 않고 법에 따라 엄격하게 권력행사를 제한해야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서민들에게 질서를 들이대면서 윽박지른게 법치처럼 돼 있다"며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거꾸로 선 법치가 양극화를 부추긴다.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심 대표는 정치개혁을 얘기했다. 정치개혁을 위해 선거제도를 먼저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심 대표는 "선거제도를 민심대로 의석이 반영될 수 있도록 독일식 정당명부제로 바꿔야 한다"며 "정의당이 총선에서 7.2%를 득표했는데 정당명부제로 했다면 원내교섭단체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 제도에서는 신생정당의 진입을 막아버린다. 정의당은 주류가 될 수 없는 구조다. 생태계가 순환해야 정치가 바뀐다"며 "아무리 잘못해도 거대 정당은 1등 아니면 2등이 되는 승자독식 구조다. 양당체제에서 제3 정당에게 '정권교체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하는 건 폭력적"이라고 비판했다. 

심 대표는 "오늘 제가 대선에 출마한다고 하니 어느 언론에서 첫 질문이 '언제 사퇴할 것이냐'는 것이었다"며 "서로 다른 정당인데 왜 사퇴해야 하나. 노선과 정책으로 경쟁해야 한다. 1당이 혼자 못하면 당대당 연합정치를 하면 된다"고 연대 가능성을 열어놨다.

그는 "군사독재 세력이 집권하니 최악을 막기 위해 항상 차선을 선택하다 보니 우리 정치가 차선밖에 안됐다"며 "저는 누구보다 정권교체를 원하는 사람이고, 촛불민심을 잘 알고 있다. 정권교체와 과감한 개혁을 위해 대선후보로 나선다"고 출마이유를 설명했다.

심 대표는 "심상정 지지율이 높아야 다음 정부에서 더욱 가열차게 개혁을 할 수 있다"며 "정권교체가 안될까봐 다른 곳에 투표하면 정말 그들이 잘해서 지지하는 줄 알 것이다. 그럼 개혁은 더뎌진다. 심상정에게 힘을 만들어줘야 연정도 가능하고, 개혁도 가능하다"고 지지를 당부했다.  



삼성이라는 이름의 역설적 시스템

삼성그룹 이건희 일가는 독특한 ‘금융자산가’다. 보통의 금융자산가들은 기업의 배당률과 주가 상승에 집중하지만 그룹의 경영자이기도 한 이들은 위험한 장기 투자를 감행한다. 그런 과감한 투자 덕에 삼성이 성장할 수 있었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2017년 01월 20일 금요일 제488호


삼성그룹 이건희 가족은 기본적으로 금융자산가다. 일가(이건희 직계)가 그룹의 3대 축인 삼성물산·삼성전자·삼성생명 등에 직접 보유한 주식만 현금으로 25조원에 이른다. 시가배당률을 단지 1%로만 가정해도, 일가에겐 3대 회사로부터 한 해 2500억원 규모의 소득이 발생하는 셈이다. 다른 계열사에도 만만찮은 주식 지분을 갖고 있다. 일가는 금융자산가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건희·이재용·이부진 등 일가의 대표자들은 각각 핵심 계열 기업의 최고 경영 책임자다. ‘금융자산가 겸 경영자’인 것이다.

ⓒ삼성전자 제공
2010년 1월9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가전전시회(CES 2010)를 찾아 가족과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전업(專業)적 금융자산가라면 자신이 투자한 기업의 배당률 인상과 주가 상승을 기대할 뿐이다. 금융자산가에게 기업은 ‘현금 주머니’에 불과하다. 고용된 경영자라면, 높은 보수를 받으며 임기를 무사히 마치면 된다. 그러려면 주주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주주들에게 수익을 나눠줄 수 있는 ‘위험 장기 투자’나 새로운 첨단산업으로 해당 기업을 몰아갈 필요가 없다. 이에 비해 ‘금융자산가 겸 경영자’인 이건희 일가는 매우 독특한 행태를 나타내왔다. 2014년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지금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통해 ‘금융자산가 겸 경영자’의 ‘빛과 어둠’을 살펴보기로 하자.

‘위기 경영’의 시작,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경영권을 상속받은 것은 1987년이다. 6월 항쟁으로 개발독재의 시대가 종료되기 시작할 때다. 그가 물려받은 삼성은 국내에서 명실상부한 1위 그룹이었다. 그러나 세계시장에서는 2~3류 가전제품 업체로 통했다. 상속자의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삼성그룹의 매출 실적이 1988~1993년 다섯 해 동안 두 배 이상 늘어났다. 마침 1987년 7~9월에 절정을 이뤘던 노동자 대투쟁으로 평균임금 수준이 두 배 이상 증가하면서 ‘수요 주도 호황’이 한창 진행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건희의 야망은 국내 최고 기업집단의 수장이 아니었다. 그는 삼성을 미국의 GE나 IBM, 독일의 폭스바겐 같은 세계적 기업으로 발전시켜 아버지(삼성그룹 창립자 이병철)를 뛰어넘고 싶었다. 1942년생인 이건희는, 한국이 세계 최저 빈곤국에서 야심만만한 개도국으로 성장하는 기간에 청·장년기를 보냈다. 이 세대의 공통 의식 가운데 하나는 미국 등 서방세계에 대한 열등감과 부채의식이다. 그중 일부는 지금도 미국과 박정희, 그 딸을 숭상한다. 도심으로 뛰쳐나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종북 세력 척결’을 외친다. 이건희는 이런 세대 의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쟁과 극복의 대상을 국내 기업이 아니라 선진국 기업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선진국 기업을 이기려면 삼성 제품의 질을 대폭 개선해야 했다.

ⓒ삼성 제공
1993년 6월 이건희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룹 경영진 200여 명을 긴급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주문했다.


이건희의 이런 기질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1993년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그해 봄 월드 투어에 오른 이건희는 미국 캘리포니아 전자상가를 방문했다가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다. 상점 진열대에는 소니, 파나소닉 등 일제 가전제품들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삼성 제품은 먼지로 덮인 채 구석 선반의 아래쪽에 처박혀 있었다. 이건희는 다음 행선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켐핀스키 호텔에서 삼성 방송팀이 제작한 30분짜리 비디오테이프를 본다. 삼성 세탁기 덮개가 닫히지 않아 그 가장자리를 직원들이 깎아내고 있었다. 그는 삼성그룹의 핵심 경영진 200여 명을 켐핀스키 호텔로 부른다. 6월7일 시작된 3일 동안의 연설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윽박질렀다. ‘다 바꿔야’ 제품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00년까지 월드 클래스의 기업이 되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대로라면) 삼성전자는 망한 회사나 다름없다. (…)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 이제 7년밖에 남지 않았다.”

이후부터 ‘위기’는 이건희의 말버릇이 된다. 삼성전자가 기록적 실적을 거둘 때도 ‘위기’라고 부르짖었다. 해외 언론들이 그의 경영 행태를 ‘영구적 위기론(perpetual crisis)’으로 부를 정도다.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위기론이 폭력적이고 노골적으로, 또한 가장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니며 실현된 것은 2년 뒤(1995년 3월) ‘애니콜 화형식’ 사건이다. 당시 이건희는 직원들에게 선물로 지급한 애니콜 휴대전화 중 다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삼성 구미공장 운동장에 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애니콜 휴대전화 등 불량 제품 15만 대를 쌓았다. 곧이어 장정 몇 명이 해머를 휘둘러 애니콜들을 부수고 불구덩이에 처넣었다. 남은 제품은 불도저로 깔아뭉갰다. ‘행사’ 직후 이건희는 ‘다시 불량품이 나온다면 같은 일을 되풀이하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질(을 개선하는) 경영’이 당시의 삼성 직원들과 한국 경제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경제 시스템을 중저가 제품 대량생산에서 고부가가치 고급 제품 생산으로 혁신하자는 것이다. 주력 시장을 국내에서 해외로 옮기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추적자’인 삼성이, 이미 선진국 기업들의 고급 제품들이 점유하고 있는 세계시장에 도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선진국 기업보다 더 많은 자금을 더욱 선도적이고 효율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2~3류의 텔레비전 제조업체에 불과했던 삼성전자가 불과 20년 만에 매출액 기준 세계 최대 전자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대규모 투자로 전자산업 생태계의 상층으로


이건희가 경영권을 상속한 이후 삼성은 대규모 투자를 여러 차례 감행했다. 장기적으로 큰 수익을 기대하지만 자칫 회사를 거덜 낼 수도 있는 규모의 자금이었다. 그 덕분에 1990년대 초·중반 이미 LCD 패널과 플래시메모리(전원이 없는 상태에서도 메모리에 데이터가 계속 저장되는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다. 6~7년 뒤인 2002년에는 ‘낸드 플래시메모리(하드디스크를 대체할 정도의 고집적 성능으로 휴대형 기기에 적합한 메모리)’를 개발해서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2000년부터는 이차전지(노트북·휴대전화 등 고기능 디지털 기기에 장착 가능한 가볍고 장시간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전원)를 양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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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22일 이건희 회장이 ‘메모리 16라인 가동식 및 20나노 D램·플래시 양산’ 행사에서 시제품을 전달받고 있다.


당시 삼성의 투자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단 수억~수십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자금을 투자해야 개발할 수 있는 ‘부품’들이다. 워낙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국내외 다른 기업들은 설사 자금력이 있다 해도 투자하지 않았다. 이런 부품들이 결국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삼성이 평판 LCD TV 부문에서 세계 1위로 떠오른 것은 2000년대 중반이지만, 그 핵심 부품인 LCD 패널은 1990년대 초반에 양산되었다. 이차전지와 플래시메모리는 이후 스마트폰의 핵심 부품이 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에 대한 구상을 현실로 옮기는 데 쓰인 필수적 기술이었다. 2012년 삼성전자는 핀란드 노키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모바일폰 생산업체로 떠오른다. 1990년대 초·중반부터 감행한 대규모 부품 투자들이 10~20년 뒤, 삼성이 완제품(TV·스마트폰 등) 시장에 뛰어들면서 천문학적 수익으로 꽃피게 되었던 것이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2013년 3월28일)의 샘 그로발트 기자가 설명한 삼성의 사업 전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성전자가 새로운 산업에 진출하는 경우, 처음엔 해당 산업에서 핵심적이지만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부품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예컨대 마이크로프로세스나 메모리칩이다. 그 부품을 다른 완제품 생산 기업에 판매한다. 이런 과정에서 삼성은 해당 산업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게 된다. 이후 삼성은 완제품으로 생산 영역을 확장하면서, 관련 플랜트와 기술에 (다른 기업이 삼성에 대적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자금을 투자한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판매에서 세계 1위로 부상한 직후인 2012년, 자본 지출로 215억 달러를 썼다. 같은 기간 애플의 두 배다. 삼성은 기술에 크게 베팅한다.”

삼성전자는 매출 기준으로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의 1인자이지만 그 핵심 부품인 디스플레이, 플래시메모리, 마이크로프로세스, 카메라 등에서도 세계 최고다. 심지어 스마트폰 완제품 부문에서 삼성의 경쟁자인 애플은 마이크로프로세스 등 삼성에서 만든 부품을 매입하는 데 총비용 중 15% 내외를 쓴다.

이런 부품 생산능력은 엄청난 비교우위다. 삼성전자가 세계 1위 스마트폰 업체로 떠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생산 기종이 제한된 애플이나 다른 회사와 달리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제품을 시장의 수요에 맞춰 유연하고 신속하게 내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삼성이 디스플레이나 플래시메모리 등을 외부에서 조달하는 형편이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 같은 부품 공급 능력은, 삼성이 글로벌 차원에서 이뤄지는 생산의 피라미드에서 상층으로 올라섰음을 의미한다. 이 글로벌 피라미드의 하부에는 개발도상국의 조립공장들이 있다. 바로 위에는 만들기 크게 어렵지 않은 부품을 개발·생산하는 중·선진국의 각종 기업이 활동한다. 최상부에는 대규모 투자와 고도의 기술력을 겸비해야 양산 가능한 부품 생산능력을 무기로 전체 생산을 글로벌 차원에서 기획·지휘하는 소수의 초국적 기업이 존재한다. 그 대열에 삼성이 들어갔다.

ⓒ사진공동취재단
2015년 7월17일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대표이사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안 통과를 선언했다.


한국이 지금까지도 일본에 무역적자를 면치 못하는 이유는 대다수 산업에서 일본이 기초 기술과 부품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대미 수출품을 생산하려면, 일본만이 만들 수 있는 중간재(부품)를 수입해야 한다. 말하자면 일본은 글로벌 생산 피라미드에서 한국보다 상위에 있다. 이를 극복하기는 매우 힘들다. ‘종속 자본주의’ 같은 살벌한 용어들이 등장하는 이유다. 삼성은 적어도 일부 첨단산업 부문에서 ‘종속’을 극복해낸 것이다.

‘인내하는 자본’이라는 재벌의 역설


이처럼 삼성이 세계적 거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력적인 ‘투자 베팅’의 결과다. 더욱이 남들이 ‘삼성의 발전 단계’에 맞지 않는다고 했던 새로운 산업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삼성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삼성이 LCD 패널, 플래시메모리, 이차전지 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할 때 세계의 다른 기업들은 해당 기술들의 잠재력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선진국 기업 경영자들은 주주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단번에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투자하는 모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플래시메모리 등에 거금을 투자해봤자, 해당 시점에서는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다. 설사 성공한다 해도 본격적으로 수익을 회수할 때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삼성만 해도, LCD 패널에 투자해서 평판 LCD TV로 성공할 때까지 15년 정도가 걸렸다. 1990년대 초·중반부터 플래시메모리와 이차전지에 투자한 돈도 2000년대 후반에야 갤럭시 시리즈로 대박을 쳤다. 영국·미국처럼 주주의 힘이 강한 국가에서라면, 대규모 자금을 장기 투자하고 수익이 나올 때까지 ‘인내’하는 경영자는 주주에 대한 배신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간주되어 직위를 상실하기 일쑤다. ‘고용된 경영자’라면, 10년 넘게 걸리는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 성과가 나올 때쯤이면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코노미스트>(2011년 10월1일)는 이건희의 삼성을 ‘인내하는(patient) 자본’이라고 불렀다. “삼성은 인내심이 강하다. 삼성의 경영자들은 단기 이윤보다 장기 성장에 더 관심이 많다. 피고용인들에 대한 동기부여(고임금)도 잘 한다. 삼성그룹은 전략적으로 사고한다.” 그렇다면 삼성이 ‘인내하는 자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이코노미스트>는, 진보 성향의 한국인들에겐 납득할 수 없는 답변을 내놓는다. “이건희를 중심으로 형성된 컬트(a cult of personality around Mr. Lee) 덕분이었다. (…) 삼성의 인내와 대담성은, 이건희 일가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건희 일가의 삼성그룹 통제는, 계열사들이 서로의 지분을 보유하는 거미줄처럼 복잡한 구조에 의해 지탱된다.”

결국 ‘재벌 시스템’ 덕분이라는 이야기다. 이건희 일가가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총지분 중 실제로 보유한 몫은 5% 내외에 불과하다. 그러나 계열사가 계열사를 소유하는 복잡한 지분 구조 덕분에, 이건희 일가는 전체 그룹을 지배할 수 있다. 이 같은 재벌 시스템은, 주주들이 원해도 이건희를 삼성에서 쫓아내기 힘들 정도로 굳건하다. 이건희 일가가 주주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삼성전자의 장기 성장을 위해 대규모 자금을 불투명한 사업에 투자할 수 있었던 이유다.

ⓒ시사IN 신선영
1월12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소환되어 피의자 신분으로 뇌물 공여 및 위증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물론 이건희의 목적은 일가의 영광, 공명심, 상속, 야수적인 승부욕, 애국심, 일자리 창출 가운데 하나이거나 모두일 수 있다. 금융자산가인 이건희가 금융 수익보다 삼성전자 자체를 키우려 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이 회사를 자신과 일가의 소유물처럼 생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해 정경유착과 다양한 불법·탈법적인 수법을 동원한 경영권 상속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기가 어떠했든 이건희는 선진국 기업 경영자들이 엄두를 낼 수 없는 모험적 장기 투자를 지속해왔고 그 결과가 지금의 글로벌 대기업 삼성전자다.

‘주주 가치 제고 선언’의 덫


이건희의 마지막 모험은 2010년 ‘5대 신수종 사업’ 발표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 삼성도 어찌될지 모른다.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이건희는 위기론을 천명하면서 “다시 시작할” 사업으로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발광다이오드(LED),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등을 제시했다. 모두 삼성이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갖지 못했으며 막대한 자금 투자가 필요한 신산업이다. 2020년까지 200억 달러(약 24조원)를 투자할 계획이었다.

이런 와중에 2014년 5월 이건희는 쓰러지고 만다. 일가는 3세(이재용)로의 상속을 위한 그룹구조 개편을 본격화한다. 2015년 7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은 이건희 일가의 손을 들어줬다. 2016년 하반기, 삼성은 다시 치명적인 위기를 맞는다. 합병 당시 국민연금공단의 결정에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삼성 측이 그 대가로 최순실씨의 딸인 승마 선수 정유라씨에게 수백억원대 자금을 지원한 혐의도 포착되었다. 엘리엇은 이를 틈타 삼성의 경영 체질을 바꿔놓으려 하고 있다. 경영권 상속을 도와주는 대신 삼성전자의 현금성 자산과 앞으로 벌어들일 잉여현금흐름(기업이 벌어들인 수익 가운데 세금·영업비용·설비투자액 등을 제외한 현금) 가운데 상당 부분을 주주에게 내놓으라는 것이다. 지난해 11월29일 삼성전자 이사회는 ‘주주 가치 제고 선언’을 통해 엘리엇의 제안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대세’에 맞춰 주주 가치를 중시하는 기업으로 변화해갈 수 있다. 국내외 수많은 개혁적 경제학자들과 금융투자 업체들이 갈망하던 흐름이다. 그러나 투자보다 주주 가치를 중시하는 삼성이 일반 시민과 노동자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삼성은 앞으로도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새로운 산업 영역에 진출해서 글로벌 1위로 치고 올라가던 발전 패턴을 지속할 수 있을까. 글로벌 경제에서 한국은 지금도 선진국이라기보다 ‘추적자’ 지위에 머물고 있다.



이재용에게 형무소보다 무서운 곳?

[장석준 칼럼] '사외이사' 아닌 '사회이사'를 제안한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2017.01.23 09:26:19


촛불 시민의 응원을 받으며 거칠 게 없던 특검이 처음으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주범 중 한 사람으로 삼성 재벌 3세 이재용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되고 말았다. 구속영장이야 재청구할 수도 있고, 불구속 수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슬 퍼런 특검조차 삼성이라는 벽 앞에서는 일단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삼성 공화국'은 빈말이 아니었다.

한데 이 대목에서 한 번쯤 이런 의심을 던져볼 만하다. 과연 이재용을 구속한다고 해서 재벌 개혁의 일대 성과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재용은 죗값을 톡톡히 받아야 한다. 그도 죄를 지으면 형사 처벌 받는 한 명의 시민일 뿐임을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는 어느덧 세습 귀족 국가로 변질 중인 민주공화국을 되살리는 결정타가 될 수 있다. 이재용 구속은 촛불 시민 혁명이 반드시 실현해야 할 장면 중 하나다.

다만 의문이 드는 것은 재벌 총수가 형사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촛불 시민 혁명의 핵심 과제라 이야기되는 재벌 개혁이 성취됐다고 할 수 있겠냐는 점이다. 현대-기아자동차의 정몽구도 구속됐었다. SK의 최태원도 구속됐다가 박근혜 덕분에 풀려나왔다. 한화의 김승연도 감옥살이를 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가? 저들은 저마다의 기업집단 안에서 여전히 제왕이다.  

수갑을 채우고 수의를 입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두환, 노태우는 그렇게 해서 역사의 대로에서 쓸어버릴 수 있었지만,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흔들리지 않는 핵심인 재벌은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도대체 어떤 처방이 더 필요한가?  

재벌 개혁의 맹목 지점 - 권력의 빈 곳은 다른 권력이 채운다는 진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여러 제도적 처방들이 제출됐다. 순환출자 금지, 집단소송제, 금산분리, 하청업체 보호 등등. 하나같이 간단하지 않은 내용이지만, 하도 오랫 동안 들어서 결코 낯설지 않은 말들이다. 현재 야권 대선 주자들은 이들 정책 중 이러저런 내용을 선별해서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아예 '3대 세습 금지'를 약속하기도 한다.

이 정책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재벌 권력을 어떻게든 축소하려는 조치라는 점이다. 소극적으로는 재벌의 힘을 '규제'하려 하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해체'하려 한다. 재벌이 기업사회와 국민경제를 농단하는 독재자라는 점에서 이런 대응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제왕으로 군림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일단 권좌에서 몰아내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대목에서 다시 의문이 든다. 과연 기존 권력을 줄이거나 잘게 쪼갠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될까? 이것은 어쩌면 총수 1인의 형사 처벌만큼이나 한계가 뚜렷한 임시변통은 아닐까?  

왜냐하면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자연이 진공을 싫어한다지만, 이 말은 오히려 사회에 더 잘 들어맞는다. 기성 권력을 해체하면 권력 없는 세상이 열린다는 것은 대개 순진한 몽상이다. 옛 권력이 사라지면 반드시 새 권력이 그 빈곳을 채운다. 달리 말하면, 새 권력이 등장해야만 옛 권력은 온전히 대체될 수 있다. 그런 권력이 준비돼 있지 못하다면 옛 권력은 아무리 위기에 빠지고 부패했더라도 좀처럼 퇴장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혹은 외양만 바꾼 채 쉽게 목숨을 이어간다.  

재벌 권력도 마찬가지다. 진보개혁파가 주장해온 개혁 정책들이 그대로 관철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재벌 일가는 자신들이 보유한 지분만큼만 투표권을 지니는 대주주 중 일부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처럼 거대 기업집단을 밀실 지령으로 움직일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제일 잘 나가는 핵심 기업의 지배 주주로 남으려고 스스로 관심과 권한을 좁히거나 아니면 서구 대자본 가문처럼 경영에서 손을 떼고 금융 투자자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취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재용이 구속돼도 삼성 일가(이 씨-홍 씨 집안)는 건재한 것처럼, 재벌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더라도 말 그대로 경제가 '민주화'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권력의 빈 곳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누구'가 재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본 소유자라면, 재벌 개혁에도 불구하고 기업 내 독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왕좌의 주인만 바뀔 뿐이다.  

지금으로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구 재벌과 초국적 금융자본 사이의 새로운 타협이다. 이미 대기업 소유구조는 이런 타협을 강요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해외 금융세력이 재벌 일가보다 더 덩치가 큰 대주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주주자본주의 규칙을 어기며 전횡을 일삼는 재벌을 규율하길 바란다.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타협을 성사시키고 기업지배구조에 이를 반영시키길 원한다.  

단지 기존 재벌 권력을 '규제'하거나 '해체'하기만 하는 재벌 개혁은 이런 타협의 더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금융 투자자로 물러선 구 재벌과 해외 투자자들은 이제 크고 작은 이권다툼을 끝내고 안정적인 동맹을 맺을 것이다. 


그것은 단기간의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동맹일 것이다. 산업 논리보다는 금융 논리에 따른 기업 운영에 뜻을 함께 할 것이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들어서겠지만, 이런 대주주 연합의 합의를 충실히 집행하는 대리인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의 강화다.

기존 권력이 허물어져 빈 공간은 다른 권력이 채운다. 그리고 이 권력은 새 권력을 키우려는 특별한 노력이 없다면 기존 권력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더 못한 권력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전통적인 재벌 개혁 정책들, 지금도 재벌 개혁의 주된 처방으로 이야기되는 정책들의 맹목지점이다.  

재벌에 맞설 사회 권력을 키우는 개혁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진보 지식인 중에도 재벌 개혁에 반대하는 이색적인 목소리가 있다. 자칫 더 나쁜 자본주의가 될 수 있으니 섣불리 손대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일면적인 우려이고, 촛불 시민 혁명 정신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을 막후에서 조종하는 세력들의 수장 격인 재벌을 민주공화국의 규율 아래 두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직접 연루된 재벌들의 처벌을 시작으로 묵혀뒀던 재벌 개혁 조치들에 착수해야 한다. 다만 이와 함께 반드시 재벌에 맞설 대항 권력, 재벌을 대체할 대안 권력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재벌 개혁이 단지 지배연합의 두목 자리 교체에 그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재벌 문제를 고심하는 이들이 대안 중 하나로 노동자 경영 참여를 빼놓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자는 기업 안의 시민이다. 기업 내부의 대항 권력이라면 자연스럽게 노동자부터 떠올리게 된다. 산업별 노동조합을 강화하든 아니면 독일식 노사공동결정제도를 도입하든 노동자의 경영 개입으로 재벌 권력을 뿌리부터 견제하고 대체할 수 있다.

한데 지금까지 이런 대안은 항상 수줍은 어조로 제시됐다. 재벌 개혁론자들 스스로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을 대안으로 내세우기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기업 안에서 강력한 야당 구실을 할 수 있을지 좀처럼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삼성은 아직 노동 세력 자체가 미약하고, 현대-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은 여론으로부터 고립돼 있다.  

실은 재벌 개혁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의 변화가 마냥 지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 사회 경제 체제의 한계와 모순은 오래 전부터 너무나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 체제가 완강히 지속되는 것은 이를 바꿔나갈 사회 세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전 이론과 서구의 경험이 그런 세력의 후보로 지목하는 노동계급은 지금 이 땅에서는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여러 분파로 갈가리 찢겨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변화로 대기업 노동자가 '사회'를 온전히 다 대변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모순은 분명하나 모순의 타래를 끊을 첫 번째 주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재벌 문제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이러한 궁지의 축도(縮圖)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개혁은 시작되고 봐야 한다. 난마처럼 얽힌 현 상황에서는 개혁이 일단 시작돼야 개혁 주체도 성장할 수 있다. 즉, 개혁 추진 과정에서 개혁 주체의 성장을 꾀해야 한다. 대안 주체들이 스스로 성장할 근거가 개혁 정책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돼야 한다. 재벌 개혁 정책 안에 재벌 권력을 깎고 쪼개는 조치뿐만 아니라 재벌 권력에 맞서고 이를 대체할 사회 권력을 키우는 전략도 녹아 있어야 한다.  

가령 노동자 경영 참여를 현대 자본주의 상황에 맞게 사회적 기업지배구조 방안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현행 사외이사 제도를 대기업 지배구조에 다양한 사회 주체들이 참여할 통로로 바꾸는 것이다.  

상법 제542조의 8에 따라 상장회사는 이사 총수의 1/4 이상이 사외이사여야 한다. 그 중 자산 규모 2조 이상(대통령령)인 기업은 과반수가 사외이사여야 한다. 이 제도 역시 빗발치는 재벌 개혁 요구로 도입됐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외이사는 전직 정치인, 공직자나 대학 교수가 불로소득을 챙기는 수단일 뿐이다. 이들은 이사회에서 재벌의 거수기 노릇이나 한다.

이 '사외'이사제도를 '사회'이사제도로 바꾸면 어떨까. 주요 기업 이사회의 과반수를 노동자, 소비자, 연관업체(하청기업 등), 지역사회, 중앙정부를 각각 대표하는 사회이사로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재벌의 빈 자리를 주주가 독점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를 비롯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나눠 갖게 하는 것이다. 이들 이해관계자는 구 재벌과 해외 투자자들의 새로운 동맹에 맞서고 이를 제압할 사회 동맹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이 사회 동맹을 통해 이해관계자들의 합의와 협력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대기업 모델이 진화할 것이다.

전례는 없다. 다른 나라에서도 공기업이 아닌 민간기업에서 이런 사회적 기업지배구조를 실현한 사례는 보기 드물다. 그러나 전례가 없기로는 한국의 재벌 문제도 마찬가지다. 또한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도 다른 나라의 전례가 있어서 처음 시작된 게 아니다. 유례없는 문제는 유례없는 해결책을 요구한다.  

사회 권력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공공 

노동이나 다른 시민사회 세력들이 미성숙한 상황에서 이렇게 대항, 대안 권력이 성장하려면 공공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회 집단들이 일상의 훈육을 통해 역량을 쌓아가도록 공공이 바람막이가 돼줘야 한다. 단, 이때의 '공공'은 개발독재 시대부터 재벌과 운명을 함께 한 관료기구일 수 없다. 이 전통적 공공은 관치(官治)에 가장 어울리게 진화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좌파의 공식이었던 '국유화'가 재벌 문제의 대안으로 매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옛 공공이 바뀌지 않고서는 국유화란 박정희 시대의 두 산물 중 하나인 재벌에서 다른 하나인 관료기구로 주인이 바뀌는 것일 뿐이다. 이미 실례도 있다. 산업은행이 대주주였던 대우조선해양은 일상 경영이든 구조조정이든 어느 하나 재벌 대기업과 다른 구석이 없었다.  

재벌 권력을 대체할 사회 권력을 육성하려면 '새로 재구성된' 공공이 필요하다. 새 공공은 광장의 목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공공이다. 예컨대 이런 구상을 해볼 수 있다. 정부 안에 국유 부문을 관리할 새로운 기구를 설립한다. 이 기구는 산업은행 지분, 국민연금 지분을 통합 관리하면서 이에 따른 경영 개입을 지휘한다. 사회이사 중 중앙정부 대표자는 바로 이 기구에서 파견된다. 이 기구는 기존 경제부처로부터 독립해 시민사회 내 다양한 집단의 대표자로 구성되며, 국회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이런 기구가 설치된다면, 국민연금이 청와대와 삼성 재벌의 밀실 거래에 동원되는 일 따위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국가 소유 지분에 따른 경영 개입 방향은 이 기구에 참여하는 시민사회 대표들의 토론에 따라 결정되며, 중대한 사안의 경우는 국회 심의까지 거친다. 필요하면 국회가 경제시민의회(=시민정책배심단)를 구성해서 토론을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사회적 기업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다.  

이런 기구가 새 공공의 대표 주자가 될 것이다. 새 공공은 이제 관치가 아니라 민치(民治)의 통로가 될 것이다. 이런 새 공공의 뒷받침 아래 각 대기업 현장에서 재벌 체제 '이후'를 책임질 이해관계자 동맹이 구축돼나갈 것이다.  

물론 이것과는 또 다른 여러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위의 구상은 단지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재벌 권력 해체'와 '사회 권력 육성'이 동전의 양쪽 면임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런 깨달음이 상식이 돼버린 세상이야말로 이재용에게는 형무소보다 더 끔찍한 악몽일 것이다.  



"'의료 게이트'는 범죄…왜 처벌 못하나?"

[서리풀 논평] ‘법치주의’ 시비
시민건강증진연구소      
2017.01.23 07:55:28

몇 달 동안 법이 유례없이 가까워졌다. 대통령 탄핵이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고, 특별검사가 이른바 '국정 농단'의 당사자들을 수사하고 있다. 헌법 개정도 시기만 문제지 언제든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다. 법은 어느 때보다 일상 속에 들어와 있다.

시민 전체가 이렇게 깊게 법을 공부한 시기가 있었던가? 헌법재판만 해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절차와 내용을 알고 의견을 주장한다. 모두 법 전문가가 되어야 하니, 어찌 보면 시대적 불행이다. 모든 국민이 헌법재판의 내용과 절차를 알아야 하는 사회가 어찌 좋다고만 하겠는가.  

이런 법(들) 또는 법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 이 시기, 법이 사회발전의 동력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자들을 단죄하는 것, 나아가 죄를 고발하고 책임을 묻는 데에 법이 작동한다. 많은 사람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헌)법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인 한, 법과 법치주의는 존중받아야 한다. 특히 권력 집단의 전근대적이고 불합리한 횡포와 악행을 줄일 수 있다면, 법의 역할을 낮춰볼 수 없다. 한때는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삶을 보호하는 중요한 근거 노릇을 했다. 그뿐인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소득과 부동산에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을 어찌 법의 횡포라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법은 또한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삶의 보호와 안녕이 아니라 자칫 억압과 기득권 보호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법리를 따진다는 명분으로 명백한 죄를 논란으로 만드는가 하면, 실정법을 핑계로 죄를 도덕과 정치의 문제로 바꾸는 일도 흔하다.

당장 며칠 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만 해도 그렇다. 뇌물죄가 성립되는지 또는 대가성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상식'과 '감정'으로는 길게 따질 것도 없지만, 법과 법치는 이를 배신했다. 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지금 한국 사회에 법과 법치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법과 법치가 허술한 것은 '의료 게이트'도 마찬가지다. 불법 시술에다 비선 진료, 이름도 잘 알 수 없는 이상한 주사와 처치는 의료 게이트를 넘어 또 다른 국정농단이다. 무슨 주사에 시술, 안티에이징에 줄기세포라고 하면 그냥 농담처럼 되기 쉽지만, 이는 중요한 사회 활동을 부정적 의미에서 '탈공공화'한 질 나쁜 사례라 해야 한다.

우리는 의료 게이트가 범죄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국정 책임자가 국정의 하나인 의료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관련 정책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뿐인가, 의료인과 병원, 일반 국민의 인식과 행동에 오랜 기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 이상한 주사가 앞다투어 출시되고 '시장'에서 수요가 급증한다고 한다. 오늘 그리고 앞으로의 한국 의료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죄가 아니면 무엇을 죄라 할 수 있을까.  

문제는 법치다. 죄가 분명하고 죄를 지은 사람도 명확한데, 실정법으로 이들의 죄를 묻기는 쉽지 않다. 기껏해야 이에 개입한 의료인의 의료법 위반을 문제 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죄의 본질과 무관한 이상한 다른 법률(예를 들어 국민건강보험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을 동원해 검찰의 체면치레 정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구속 영장의 기각이든 의료 게이트를 처벌할 법이든, 법과 현실 사이에는 이처럼 틈이 많다. 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법에서 떨어지고 또한 법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을 무시할 수도 없지만, 완전히 의존하는 것도 곤란하다. 법과 법치주의는 '상대화'되어야 한다.

법과 법치주의가 제 자리를 찾는 데에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리의 법 인식을 바꾸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사법체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전자는 법과 법치에 대한 시각의 문제, 후자는 당장 관심을 가져야 할 실천적 과제다.

우선 우리가 가진 인식의 문제. 법과 법치는 당연히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 토대 또는 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해체할 수 있는 것들이다(자크 데리다, <법의 힘>). 또한, "정의에 비추어 우리는 법이 부당하다거나 적어도 어떤 판결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비판할 수 있다"(박은정, <법철학의 문제들>). 

악법도 법일 수는 있지만 정의는 아니다. 어떤 법이나 판결을 절대 옳다고 받아들여야 할 어떤 근거도 없으며, 그런 점에서 이들은 상대화되어야 한다. 정의를 법의 본질적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한, 법과 법치는 그 이념, 즉 정의에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법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 그리고 최소한의 형식이자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진행 중인 탄핵은 법이지만 법 이상이어야, 그리고 그것은 정의여야 한다. 이는 탄핵 인용으로 끝나는 법률적 절차지만, 정의의 관점에서 국정운영을 심판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 기업들의 뇌물과 의료 게이트도 마찬가지다. 실정법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정의이고, 정의의 관점에서 그들의 죄를 따지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실정법과 관계없이 어떤 죄인지 따지고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그 과정과 성과가 다시 법과 법치로 환원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법률이 정해 놓은 것만 죄가 아니다. 야스퍼스는 죄를 법률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 도덕적인 것, 정치적인 것으로 나누었다(<죄의 문제>, 이재승 옮김, 앨피 펴냄). 맥락은 조금 달라도 박근혜 정권과 그 주변이 저지른 죄도 이 모두를 포함한다. 현행 실정법과 법치주의를 벗어난 것이라고 해서 함부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법과 법치주의를 상대화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법률가(또는 법률 관료)에 있다. 죄의 유무와 형량, 구속 여부를 판단하는 법률가는 가치의 진공 상태에 있는,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inspector)'가 아니다. 미국 대법원 판사들의 이념 성향이 유명하지만, 한국에서 그 편향은 흔히 은폐되어 있다.  

가치 '편향'은 노골적이다. 악명 높은 학연, 지연, 남성 50대 등등은 잘 알려졌지만, (다들 너무 당연하게 여겨서 그런지) 사회경제 질서에 대한 편향에는 관심이 없다. 장담하건대, 지금 한국의 법률가, 특히 법률 관료 대부분은 자유시장 경제와 재산권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긴다(생생한 증언이 있다.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를 번역한 법률가들의 감동적인(!) '옮긴이 후기'가 그것이다).  

이런 법률 관료들이 법과 법치주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겠는가? 버스비 2400원 횡령과 이재용의 수백억 횡령에 잣대가 다르다고 비판하지만, 부당한(?) 비판이다. 기업, 노동, 재산권애 관해, 그러다 보니 횡령과 배임에 관해 판단은 일관된다. 재벌 총수가 횡령한 돈이 얼마든, 그것을 그들이 소유한 재산(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전혀 혼란스럽지 않다. 소유권이 없는 2400원과 소유권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인 몇 백억은 비교할 수 없다.

법체제가 한 사회의 사회경제체제에 조응하는 것인 한, 법률 관료가 어느 정도까지 거기에 맞추어 치우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편향은 체제적이고 구조적인 것으로, 기술적이고 미시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에 여성과 비주류 대학, 법학 교수 출신을 뽑는다고 과연 얼마나 달라질까 의심스럽다.

그나마 이런 한계를 드러내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은 핵심 법률 관료를 선거로 뽑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검찰과 법원이 위임받지 않은 권력을 무소불위로 행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이는 어떤 민주주의의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의 권력 또한 시민 참여와 견제를 통해 민주적으로 통제되어야 마땅하다.      


실무적으로는 검사장 직선제 논의가 시작되었으니(☞관련 기사 : 국민이 직접 뽑는 '검사장 직선제' 추진된다…"검찰 독립 대변혁"), 더 많이 논의하고 검토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헌법 개정에도 반영되어 검찰과 법원을 포함한 사법체제가 시민 중심의 민주적인 것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정권 심판과 탄핵, 대통령 선거, 헌법 개정은 실정법과 법치주의에 크게 의존한다. 법과 법치주의의 불완전함이 비판을 받지만, 법체제가 내재적으로 가진 사회 발전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 법과 법치주의를 절대화해서는 곤란하다. 정의가 실현되는지가 더 높은 기준이 되어야 하며, 그에 비추어 법과 법치주의는 늘 상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삼성은 국정 농단의 객체 아닌 주체” 특검의 창 vs “권력 앞에 기업은 약자” 삼성의 방패

송응철·박준용 기자 ㅣ sec@sisapress.com | 승인 2017.01.23(월) 15:16:52 | 1423호


“특검팀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할 가능성은 확실해 보이지만, 문제는 법원에서 과연 이를 받아들일지 여부다.” 이 부회장이 1월12일 피의자 신분으로 특검팀의 조사를 받을 당시 한 검찰 관계자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특검팀의 영장청구 가능성을 높게 본 까닭에 대해 수사가 상당부분 진척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국민 여론을 감안한 결과라는 분석을 내놨다. 영장을 청구하지 않을 경우 자칫 ‘삼성 봐주기 수사’라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李 구속→靑 압수수색→朴 대면조사’ 시나리오

 

결국 특검이 1월16일 법원에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6대4’ 정도로 법원이 영장을 기각할 확률을 높게 전망했다. 법리적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무엇보다 증뢰죄(贈賂罪)의 경우 수뢰죄와 달리 대부분 불구속 수사가 이뤄진다고 그는 설명했다. 뇌물을 받은 사람에 비해 준 사람은 상대적으로 덜 엄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장 발부에 40%의 비교적 높은 가능성을 둔 것은 국민적 여론과 현재의 정치국면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법리적인 판단이 원칙인 법원이라도 현 시국에선 영장을 기각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란 까닭에서였다.

 

국민의 이목은 법원에 집중됐다. 그리고 법원은 1월19일 새벽 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조의연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사유를 밝혔다. 최순실씨 일가에 대한 수백억원대 자금 지원이 뇌물이 아닌 강압에 의해 이뤄진 행위라는 삼성 측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인 것이다.

 

1월1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오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1월1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오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하지만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 기각을 두고 공식 발표되지 않은 기각의 이유가 뒤늦게 논란이 됐다. ‘뇌물 수수자(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조사 미비’ ‘피의자(이 부회장)의 주거 및 생활환경 고려’ 등이 적힌 것으로 1월20일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법원이 불소추특권을 활용해 조사를 거부하는 박 대통령의 현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또 법조계 일각에서는 증뢰죄 피의자의 ‘주거 및 생활환경’을 이유로 구속할 수 없다면, 수사가 진행 중인 다른 기업 총수들도 역시 구속하기 힘든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법원 측은 이에 대해 “기각 사유는 수사 과정과 이해도를 감안해 가다듬어서 발표한다”면서 “주거환경 부분은 관용적 표현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기재도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번 영장 청구 기각으로 특검팀의 수사 일정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검팀 수사의 ‘종착지’는 박 대통령이다. 삼성을 비롯한 롯데·SK·CJ 등 대기업에 대한 수사는 박 대통령에게 뇌물죄를 적용하기 위한 ‘경유지’에 불과했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그동안 특검팀은 특히 삼성 수사에 집중해 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기업 가운데 가장 혐의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당초 특검의 시나리오는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 수사와 더불어 청와대 압수수색, 박 대통령 대면조사에 대한 법리 검토에 집중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번 구속영장 기각으로 박 대통령에 대한 뇌물죄 적용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특검팀은 2월초 박 대통령을 대면조사 할 계획이었다. 검찰 안팎에선 대면조사 일정이 2월 중순 이후로 연기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 경우 특검팀은 2월말까지인 수사기간을 3월말까지 한 달 더 연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검 측은 “아직 수사기간 연장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특검팀 내에선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하자는 ‘강경론’과 수사를 원점에서 재검토하자는 ‘신중론’이 맞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 대통령 뇌물죄’를 정조준하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이 부회장에 대한 혐의 입증을 성공시켜야 한다. 특검팀을 밀착 취재하는 방송사의 한 중견언론인은 “기본적으로 특검 수사팀 내부에서는 이번 국정 농단 사태를 막강한 정보력의 삼성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비선실세 최순실을 꼬드겨 박 대통령을 농단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삼성이다. 특검의 창(槍)이 뚫어야 할 삼성의 방패는 결코 만만치 않다. 무섭게 몰아붙이는 특검의 기세에 당황하던 삼성은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으로 한숨을 돌리며 전열 재정비에 나섰다. 내부적으로는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라는 말도 나온다. 삼성은 그룹 계열사에 포진한 변호사만 300여 명에 달한다. 이 부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방어하는 변호인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의 송우철·문강배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판사 출신인 이들은 1월18일 영장실질심사에서 영장 기각을 이끌어낸 공신이기도 하다.

 

 

“삼성이 최씨 꼬드겨 박 대통령 농단한 것”

 

송 변호사는 법원 재직 당시 법리에 정통한 ‘선두주자’로 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과 수석재판연구관,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문 변호사는 ‘BBK 주가조작 사건 정호영 특별검사팀’에서 특검보를 맡은 바 있으며, 윤석열 특검팀 수사팀장과 서울대 79학번 동기로 막역한 사이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전관 출신의 굵직한 변호사들이 다수 변호인단에 포진해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최순실씨 일가에 대한 삼성의 지원이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삼성 측 변호인단의 변론이 일부 받아들여지면서 박 대통령에게 뇌물죄를 적용할 연결고리를 하나 잃었다”며 “특검팀 수사에 난항이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검찰 출신 변호사는 “특검팀이 법원의 영장 기각 사유를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수사 방향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수 있다. 현재대로라면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 재청구를 하더라도 논리를 다시 세우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특검 입장에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2월말에 끝나는 수사 종료기간까지 시간이 촉박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벌 개혁’이 재앙이 안 되려면…

재벌 개혁은 신중해야 한다. ‘자본집약도’가 큰 대기업의 공격적인 투자로 노동생산성을 높였고 그 덕분에 한국 경제가 성장했다. 제조업 부문의 높은 생산성이 다른 부문의 그것을 추동했다.

남종석 (부산대 경제학과 강사)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1월 20일 금요일 제488호


재벌은 거악(巨惡)이다. 노조를 파괴하고 관료를 매수하며 검찰을 조종한다. 하청 중소기업에 납품가 인하를 강요하고 심지어 중소기업이 힘겹게 개발한 기술을 탈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순환출자를 통해, 계열사 전체의 주식 수에 비하면 5% 내외에 불과한 지분으로 그룹을 좌지우지한다. 이런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비상장 자회사 설립이나 일감 몰아주기로 자본시장을 농락해왔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빵 가게나 레스토랑, 맥줏집 등 소(小)자영업자들의 사업 영역에 뛰어드는 등 골목상권 장악에 나섰다. 이런 재벌에게 ‘나름의 역할이 있다’고 인정해주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노는 분노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선입견에 휘둘려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면, ‘재벌 개혁’이 자칫 재앙으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

예컨대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낮은 이유를 재벌 대기업 탓으로 돌리는 견해가 팽배해 있다. 대기업이 하청 중소기업의 납품 단가를 깎아 착취한 돈으로 자사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준다는 것이다. 하청 중소기업은 그만큼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에 해당 업체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는 계속 커진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하나의 잘 짜인 ‘스토리’일 뿐이다. 무엇보다 현실의 통계수치로 확인되지 않는다. 국내 최대 신용평가사인 한국기업데이터의 실제 통계수치를 통해 검증해보자.

ⓒ시사IN 신선영
경남 거제시 대형 조선소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래 <그림 1>의 ‘1차 공급 기업’과 ‘2차 공급 기업’은 이른바 대기업의 협력업체이다. 1차 공급 기업은 2차 공급 기업으로부터 납품받은 부품을 다시 가공한 뒤 대기업에 공급한다. 대기업은 여러 1차 공급 기업으로부터 납품받은 부품들을 조립해서 완성재를 만든 뒤 시장에 판매한다. 그런데 시장에는 대기업과 관련 없는 중소기업도 있다. 대기업과 관계없이 최종 완성재를 만들어 곧바로 소비자들에게 파는 ‘독자적 중소업체’들이다. 만약 위의 ‘대기업의 착취로 협력업체의 임금이 낮다’는 스토리가 옳다면, 대기업 협력 중소업체의 임금 수준은 (착취당하지 않는) 독자적 중소업체의 그것보다 낮아야 한다. 그런데 2006~2013년 임금 추이를 나타낸 <그림 1>을 보면,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기업 협력업체들의 임금이 독자적 중소업체의 임금보다 오히려 현격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저임금 원인을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임금 때문이라고 떠드는 ‘부두 경제학’은 사실을 왜곡해도 이만저만 비틀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 협력업체가 독자적 중소기업보다 고임금

그렇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 격차는 무엇 때문인가? 노동생산성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중소기업(협력업체와 독자적 중소업체를 모두 포괄) 노동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중소기업 노동자들보다 ‘능력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능력의 노동자라 해도 주판과 전자계산기 중 어떤 도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계산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즉, 대기업 노동자들은 중소기업 노동자에 비해 훨씬 비싸고 성능 좋은 설비(자본재)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이 높고 임금도 많이 받는 것이다. 전문용어를 사용하면, 대기업 노동자들의 ‘자본집약도’가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그것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의 자본집약도가 높은 이유는 투자를 많이 해서다. 임금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용을 줄이면서 고정자본 투자를 급격히 늘려왔다. 자동화 혹은 ‘노동절약적 기술 진보’라고도 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 한국 대기업들은 연구개발 부문에 대규모 자금을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이를 통해 다른 선진국 기업들보다 독창적인 제품을 개발하면, 시장에서 평가받는 ‘부가가치 몫’이 크게 높아진다. 해당 대기업의 노동생산성 역시 그만큼 높아진다.

이 같은 대기업들의 공격적 투자는 한국 경제 전반에도 대체로 긍정적 효과를 미친 것으로 보인다. 노동생산성이 상승하면 실질임금 역시 오르는 경향이 있다. 아래 <그림 2>는 2000~2015년 한국·영국·일본·이탈리아의 실질임금 추이다. 영국·일본·이탈리아 등의 실질임금은 정체하거나 심지어 크게 하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한국의 실질임금은 상승 추세를 대체로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이탈리아 및 일본과의 실질임금 격차를 크게 줄였다. 실제로 한국은 2000년 이후 OECD에서 가장 급속한 노동생산성 및 실질임금 성장률을 기록했다. 2007~2014년, OECD 국가 중 한국의 ‘중위소득 상승률’은 전체 4위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이상 국가 중에서 중위소득 상승률이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이스라엘밖에 없었다.

한국 경제에서 이른바 재벌 대기업의 비중은 생산성 변동 추이에서도 나타난다. 대기업들이 모여 있는 제조업이 다른 부문의 생산성 상승을 추동하는 경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 3>을 보면, 최근 10년(2005~ 2015년) 동안 한국의 노동생산성 상승에 여러 산업(제조업·도소매 유통업·금융업·지식정보 서비스업)이 각각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알 수 있다. 제조업의 생산성 상승률 기여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유통업의 기여도도 꽤 높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제조업 부문의 변동을 좇아가는 경향이 있다. 즉, 제조업 부문의 생산성이 증가(하락)하면 그 파생효과에 따라 유통업 생산성도 상승(하락)하면서 전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낮추는) 것이다. OECD 국가 가운데 제조업 부문이 다른 산업의 생산성 상승을 추동하며 경기를 이끄는 지역은 한국과 독일 등 제조업 경쟁력이 높은 나라들뿐이다. 수출을 주도하는 제조업 부문 선도 기업들의 공격적 투자와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한 결과다.

재벌의 단점과 장점 파악하고 개혁안 만들어야

재벌 대기업들이 납품 단가 인하, 기술 탈취 등으로 중소기업의 수익성 개선을 억제해온 것은 사실이다.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률이 올라가면 여지없이 납품 단가를 낮추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결과적으로 중소기업들은 호황기에도 영업이익률(영업이익을 매출액으로 나눈 비율, 판매 마진)을 높이기 힘들다. 자연스럽게 중소기업의 투자 의욕이 꺾인다. 적극적으로 투자해봤자 영업이익은 그대로이므로 투자할 필요가 없다. 이러다 보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술 격차가 확대되어왔다. 다만 대기업들이 경기 변동에 따라 협력업체의 사정을 어느 정도 배려하는 징후는 나타난다. 한국기업데이터의 관련 자료들에 따르면, 2007~2013년,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은 7%→4%→6.5%→3% 등으로 심하게 요동치는 반면 협력업체의 그것은 5.5~6%로 일정하다. 이는 경기 하강의 충격을 대기업이 흡수해주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호황 때 납품 단가를 올려주지 않는 대신 불황기에 납품 단가를 떨어뜨려 하청기업을 곤경에 빠뜨리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다. 수출 주도 재벌 대기업을 비판하더라도 이 정도의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재벌 대기업의 사회적 폐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대기업들이, 투자를 기피하면서 돈놀이나 하는 유럽·미국 기업들만큼 ‘자본의 사회적 역할’에 무심한지는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사회적 역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단연 ‘투자’다. 재벌 가족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배력을 계열사의 확장을 통해 실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단기적인 관점이 아니라 나름의 장기적·전략적 시야 속에서 투자를 통해 기업을 키우려 한다. 한국 재벌 집단의 독특한 측면이다.

재벌을 규제해야 한다. 재벌이 착한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골목상권 침해 등 재벌의 악행을 차단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재벌을 규제한답시고 그나마 사회적 선순환을 창출한 부분까지 두들기며 변죽만 울릴 필요는 없다. 이런 행위는 진보 성향 시민들의 심리적 만족감을 높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서민·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는 힘들다. 재벌의 단점은 물론 장점까지도 총체적으로 점검해서 개혁 대안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