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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세대는 원래 보수적이었다?

일취월장7 2016. 12. 20. 10:01

촛불세대는 원래 보수적이었다?

통계청 보고서 《한국의 사회동향 2016》로 보는 한국사회

김경민 기자 ㅣ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12.19(월) 12:48:02

최순실씨에 의한 국정농단의 실태가 낱낱이 보도된 이후, 한국 국민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옴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두 달 간 매주 토요일 전국 각지에서 열린 촛불집회. 그 중심엔 ‘분노한’ 청년들이 있었다. 좁은 취업문, 심화된 사회 경쟁 속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수저계급론’이란 자조 섞인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세대다. 

12월10일 서울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청년들. ⓒ 연합

12월10일 서울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청년들. ⓒ 연합


이들의 광장행이 놀라웠던 것은 단지 집회가 질서 속에서 평화로이 이뤄졌다는 표면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통상 가장 소극적인 정치 참여 태도를 보여온 세대가 자발적으로, 또한 적극적으로 정치 행위를 했다는 점이었다. 2030세대가 두 손에 든 촛불은 ‘사회의 부조리를 더 이상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란 강하고 분명한 참여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국민의 정치 참여도를 가늠하는 가장 기본적인 척도가 투표율이다. 통계적으로 1950년대 이전에 태어난 세대의 투표참여는 활발한 반면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 그러니까 현재 40대 중반 이하 세대의 투표참여는 저조한 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6》에 따르면 전반적인 투표율이 높았던 2012년 대통령선거를 제외하면 선거 유형에 관계없이 투표율이 가장 높은 세대는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였으며, 가장 낮은 세대는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였다. 특히, 19-24세 연령층은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 투표율이 가장 낮은 집단이었다. 

이번에 거리로, 광장으로 촛불을 들고 나온 청년들은 하나같이 ‘현실 변화’를 위한 구호를 외쳤다. 정치 성향에 있어 기존의 질서 유지와 사회 안정을 선호하는 편을 ‘보수’라고 볼 수 있다면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편을 ‘진보’라고 볼 수 있다. 이 분류에 따르면 변화를 바라는 청년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정치 성향이 보수화된다”는 명제는 이미 사회적 통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역시 통계로 확인된다. 《한국의 사회동향 2016》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세대와 상관없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되는 경향이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최근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정당의 후보였던 이명박 당시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연속적으로 당선된 것이다. 

386세대의 보수화…한결같이 비보수적인 70년대생

최근 선거로 올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비율이 거의 모든 세대에서 높아졌다. 1950-1954년(62-66세), 1955-1959년(57-61세), 1960-1964년(52-60세) 세대의 보수정당 후보 지지율은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각각 44.6%, 54.5%, 37.0%였으나 2012년 대통령선거에는 각각 67.2%, 74.7%, 64.4%로 높아지며 강한 보수화 경향을 보였다. 산업화 세대와 베이비부머 세대에 속하는 이들이다. 386세대라 할 수 있는 1965-1969년생(47-51세)의 경우에도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보수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비율이 28.8%였으나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42.6%로 높아졌다. 동일한 세대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변화’보단 ‘안정’을 선호하는, 일반적인 변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변하지 않는 ‘소나무’ 정치성향으로 눈에 띄는 세대도 있다. 37세부터 46세까지의 세대로, 최근 여섯 번의 선거 동안 보수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비율이 가장 낮은 세대에 속했다. 보수화되지 않는 게 이 세대가 가진 고유의 특성인지, 아직 연령효과(나이를 먹음에 따라 보수화되는 경향)가 나타나지 않는 것인진 두고봐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연령대가 낮다고 무조건 진보적 정치성향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앞선 37-46세 세대보다 어린 1980년 이후 출생한 세대(36세 이하)는 2000년대 중반 이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보수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2012년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당시 아직 사회에 진출하지 않았거나 최소 사회초년병이었을 나이다. 그런 그들이 윗세대보다 더 보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20대 총선 당시 청년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길거리에 내걸린 현수막들. ⓒ 연합

20대 총선 당시 청년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길거리에 내걸린 현수막들. ⓒ 연합



어려도 더 보수적이었던 80년대생

그러니까 이들 2030세대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적’이란 꼬리표를 단 셈이다. 그런 2030세대의 다수가 이번 국정농단 사건을 규탄하는 촛불집회에 자발적 참여를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의 바로 윗세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더 보수적이었지만, 이 경향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일시적이었던 것인지는 역시 두고볼 일이다.  



"'촛불혁명', 죽 쒀서 개 주지 않으려면…"

[진보논평] 촛불혁명의 과제는 구체제의 청산이다
배성인 한신대학교 교수     
2016.12.20 08:09:45


진보논평은 진보 진영의 대표적 계간지 <진보평론>의 편집위원들이 박근혜 게이트로 인한 국정 농단의 국면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심층 분석과 미래를 순차적으로 전망하는 자리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궤변, 후안무치, 안하무인, 몰염치. 예상했던 대로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 일당'들의 반격은 단순하면서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막가파식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생존을 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지만, 판단력과 변별력이 없는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노동자 민중에 대한 인식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들에게 노동자 민중은 처음부터 투명인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은 존재감도 없고 존재감이 없는 것은 내면이 없다는 것이며, 결국 소통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12월 9일 탄핵 이후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숫자가 감소하는 것을 보고 끝까지 버티면 노동자 민중이 피로증후군으로 인해 제풀에 지쳐 꺾일 것이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고 단순 착각한 것 같다. 그러니 이들이 '촛불민심'을 제대로 알 리가 없다. 


숫자 판독기 역할을 하는 보수언론들의 '시민의식 성숙과 평화집회'라는 프레임은 청와대와 정치권의 안일한 사고를 만드는 데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지난 5차 범국민대회까지 현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고 박근혜 '즉각' 퇴진이라는 민심의 요구를 애써 외면한 것이다. 


정치권의 외면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12월 3일 6차 범국민대회에서 대중들은 응답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박근혜 즉각 퇴진"이라고.  


결국 비박도 무릎을 꿇었다. 232만 명이라는 6차 범국민대회의 규모에 놀란 듯 비박계가 박근혜의 4월 퇴진 약속과 상관없이 탄핵에 동참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켜서 탄핵안은 가결되었다. 일단 이들은 목숨을 당분간 부지하게 됐다.

촛불의 진화와 조건 

촛불은 회를 거듭할수록 진화하고 있다. 박근혜의 말 한마디가 그 원동력이 되었지만 지금은 스스로 진화하고 있다. 지난 12월 10일 7차 범국민대회에서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간만에 감동이었다. 그것은 1980년 서울의 봄,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08년 촛불투쟁의 시행착오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비장감과 엄숙함 때문이었다. 경험과 기억은 의식 형성의 첫 단계이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경험과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의 20대 청년 누군가가 30년 전의 나였듯이 현재의 나는 30년 후 20대 누군가의 모습일 것이다. '헬조선'을 만든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30년 전의 실수를 만회하여 청년 세대에게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 6번의 촛불집회와 10일의 촛불집회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전 6번의 촛불집회는 이른바 촛불로 호명되는 시민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노동조합을 비롯한 운동 진영은 뒤에서 쫒아가거나 등에 업혀가는 형국이었다면, 9일부터의 촛불집회부터는 운동 진영이 선도에서 진보적 의제를 확장하고 주도하는 집회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도권 정당의 일부 지지들이 빠지면서 사회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진성촛불'이 주체가 된 집회였다. 따라서 17일의 주최측 추산 65만 명에 이르는 참가자 숫자는 대단한 것이다. 


그 동안 촛불집회에 대해 많은 걱정과 기우가 있었다. 매번 신기록을 경신하는 참여 인원, 자기검열에 빠진 평화시위, 보수야당의 무능함, 대중가수들의 콘서트장, 협소한 의제, 과도한 시민의식, 탄핵에 대한 압박 등으로 인해 죽 쒀서 개줄까 봐 걱정이란다. 모두 일리가 있는 걱정이다.  

그래서 평화시위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직접 행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계급투쟁으로의 의제를 확장하고, 대중가수 뿐만 아니라 민중가요를 통해서 대중들을 선동하는 방식이 필요하단다. 이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고,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해방 이후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70여 년 동안 구조화된 보수권력의 체제에서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엘리트들은 대중들을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만 인식해 왔고, 자본은 이윤 축적으로 도구로 착취해 왔으며, 학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하는 핵심 기관이 되었으며, 보수언론은 권력 재창출을 위해 헌정질서 유지와 준법정신을 투철하게 강제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구조적 조건 속에서 대중들의 선택은 제한적이었다. 대중이 보수지배세력의 폭력적이고 유치한 종북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 평화집회를 연출하면서 자기검열이 일상이 되었던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오히려 이러한 대중들의 일상을 방치한 야당이야말로 안이한 상황 인식의 공범인 것이다.  

구체제의 청산은 이제 시작이다 

야당 역시 예상했던 대로 박근혜 탄핵이 자신들의 전리품이나 되는 것처럼 황교안 총리를 인정한다거나 대통령 자리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등 꼴 사나운 행태를 연출하고 있다. 이제는 야당이 '촛불혁명'의 성과를 사유화하려고 한다. 이번 촛불혁명의 목표는 구체제의 청산이다. 야당들도 구체제임은 물론이다. 일신하지 않으면 촛불에 쓸려 내려간다.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국정 공백 없이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그것은 박근혜가 군림만 하고 통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근혜와 무관한 것이다. 이 시간에도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와 민중은 고통을 당하거나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소심하고 겁 막고 기회주의적이고 무능한 야당은 지금 당장 박근혜 정부의 모든 정책을 폐기하거나 일시 중단시키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우리가 걱정하는 '죽 쒀서 개 주는 것'은 단지 정권을 다시 여당이나 그 친위부대들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다. 야당이 정권을 획득하더라도 민중적 의제를 하나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다. 


촛불은 이제 헌재 재판관들의 판결, 특검의 수사과정과 결과 등으로 제한되고 축소되려고 한다. 지금 광장의 촛불 에너지는 너무 넘쳐서 그 누구도 담을 수가 없다. 그 에너지가 기존의 권력시스템을 광장으로 끌어내렸다. 그런데 정치세력들은 광장으로 내려온 권력 시스템을 다시 제도정치 속으로 가두려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박근혜 즉각 퇴진과 구체제의 적폐를 완전히 청산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시스템 창출의 초석을 다지는 일이다. 사법권력이나 관료권력 그리고 자본권력 역시 광장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광장에서의 대안 구성은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지금은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하는 게 더 필요한 거 같다. 투쟁의 형식, 조직화, 질김 모두가 중요하다. 지금 시점의 정치적 전선은 바로 이 지점이다. 구체제와의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촛불, '1997년 체제' 탈출 기회가 열렸다

[복지국가SOCIETY]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를 넘어서기 위해
김대현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2016.12.20 10:29


(☞원문 바로 가기 : 촛불 시민 혁명으로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를 극복하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열차를 바라보는 외신이나 외국인들은 수백만 명이 결집한 대한민국의 촛불 민심에 놀라고 그들의 질서정연함에 다시 한 번 '엄지척'을 치켜세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왕조 시대에서 공화정으로 정체(政體)를 교체했는지 의문을 표시한다. 이는 세계사에서 흔치 않는 역사이지만 사실은 우리 안의 수치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지 이후 우리 역사에서는 단 한 번도 지배 계급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이 기회다. 지금 다시 광장에서 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촛불의 메시지는 이렇다. 첫째, 촛불의 열기와 성과를 다시 특정 정치 세력이 독식하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낡은 체제(앙시앵 레짐)를 변혁해야 한다. 촛불 민심은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혁명에 준하는 변혁을 바라고 있다. 셋째, 역사의 죄인들을 확실하게 단죄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반복된 실패의 역사나 민주주의의 역행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실질적 민주주의를 정착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될 때라야 완전한 민주주의가 달성된다. 바로 헬 조선으로부터의 탈출이다.  

▲ 지난 11월 26일 150만 촛불이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프레시안(최형락)


시장 만능주의 헬 조선 벗어날 대안 만들어야  

지금이 야당으로서는 최고의 정치적 호기일 것이다. 그동안 정부와 집권 여당은 재벌 대기업과 부자 특권층을 위한 정책들을 주로 집행해왔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더구나 우리 사회 특권층의 갑질 문화와 특권 의식은 그 정도가 너무나 심각했고,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마저 그들에게는 예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행위들을 비판하고 감시해야 할 권력 기관과 언론 기관까지 통제하며 독재 정권 시절에나 가능했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국정을 농단해왔다.  

사회 안전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압도적 세계 1위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라는 오명만 남았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알바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지탱하는 청년들, 노후의 편안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야 할 전체 노인의 4분의 1이 절대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을 일해 봐야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려운 게 지금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이다. 소수의 부자들을 위해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불안하고 불행하게 살아가야 하는 세상, 이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지금 야당들도 국민적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국회의원 수가 부족하다고 해서 여소야대의 국회까지 만들어줬다. 그럼에도 그들은 산적한 대한민국의 병폐를 거의 해결하지 못했다. 이제 야당들은 박근혜 탄핵 이후 대한민국의 나아갈 방향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헬 조선을 탈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법률과 제도로 확립할 확고한 비전을 보여주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는 야당이 그동안 지탄받아온 바를 사죄하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정치적 87년 체제와 경제적 97년 체제를 끝내자는 촛불 민심의 요구

박근혜 탄핵의 국회 가결 이후 여야 정당과 주요 정치인들은 차기 권력 창출을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골몰하고 있다. 그럼에도 고달프고 성난 촛불의 민심은 구체제의 청산과 보통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외치고 있다. 다시 말자자면, 정치적으로는 '1987년 체제'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1997년 체제'의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의 체제 변화가 시대적 당면 과제로 요구받고 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승자독식-패자전몰의 '단순다수 대표제'라는 선거 제도와 정당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 49대 51로 승부가 갈리는 현행 선거제도는 51%의 승자가 모든 권력을 독식하게 되어 있다. 반면 49%의 민의는 사장된다. 그러다 보니 권력을 획득한 쪽과 패배한 쪽이 집권기간 내내 반목하고 질시한다. 이런 정치의 역사가 87년 이후 3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가령, 세 후보가 34%, 32%, 31%의 득표를 했을 때 34%를 득표한 당선자는 낮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모든 권력을 독점한다. 이로 인해 집권 기간 내내 나머지 약 70%의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받거나 발목을 잡힌다. 그러다 보니 선거 이후에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응답이 전체 국민의 40% 가까이 되는 일이 늘 벌어진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사표를 방지하고 지지율만큼 권력을 획득하는 독일식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이다. 국민은 지지 정당에 투표를 하고, 정당들이 지지율에 비례하여 의석수를 가져가는 것이다. 그리그러면 이 진보적 정당들에게 5~10%만 표를 주어도 15석~30석의 의석이 생기고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당이나 청년이나 여성을 주로 대변하는 정당, 또는 장애인이나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당들도 생겨서 작은 지지율로도 국회 입성이 가능하게 된다. 일명, 다당제 합의제 민주주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정당이 너무 많아진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이미 유럽의 선진 복지국가에서는 보통 4-6개 정도의 원내 정당들이 활동하고 있다. 사실 정당 득표의 하한선인 3%의 지지를 얻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원내의 다양한 정당들이 자신의 취지에 맞는 역할들을 수행하며, 결국 다양한 국민적 이해와 요구가 대의 정치에 반영된다. 우리는 현행 선거 제도와 정당 체제를 개편해야 한다. 그래야 거대 양당의 독점으로 인한 폐해도 줄일 수 있다. 또 선거 때마다 거대 정당 외의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기권을 하거나 차악을 선택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양극화와 불평등을 넘어설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1996년 말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이 다 된 것처럼 요란했다. 그러나 1년 후 IMF 외환위기라는 사상 초유의 재앙을 마주했다. 사실 당시 정치권은 조급하게 금융 시장의 개방과 노동 시장의 유연화, 근로자 파견제 등을 수용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 선진국에서는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그 폐해가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음에도 대한민국에서는 그에 대한 진지한 검토나 공론화가 정치인들의 무능과 이익을 위해 무시돼 버렸다.  

결국 1997년 체제는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인해 양극화와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OECD 34개 국가 중 미국 다음으로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심한 나라로 전락했다. 국민 행복지수도 터키와 멕시코를 제외하면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낮다. 국민이 불안하고 불행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매년 물가는 오르는데 상위 10%를 제외한 나머지 90%의 임금 상승률은 제자리에 머물고, 지불해야 할 각종 비용을 제때 지불하지 못하는 국민이 크게 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 질서라는 허울은 재벌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해 대다수의 국민들을 희생시킨다. 이것이 헬 조선이다. 국민들은 '살아가는 게 힘들다'며 아우성을 쳐도 '1997년 체제'인 신자유주의 노선은 진보 정권에서나 보수 정권에서나 유지됐다. 경제학자들 역시 시장의 우위만을 주창한다. 분배와 정의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기득권 세력의 탐욕은 30대 재벌 대기업의 창고에 800조 원이 넘는 돈이 쌓여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1년 예산의 두 배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끊임없이 곳간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 앞에서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다.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고 보통 사람들이 행복한 역동적 복지국가를 요구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1997년 체제를 끝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적 1987년 체제와 경제적 1997년 체제를 끝내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영원히 헬 조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민 대다수의 삶이 끝없이 추락함에도 불구하고, 재벌 기득권과 낡은 정치 세력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만을 위해 낡은 체제를 유지하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촛불에서 보여준 수백만의 함성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누구라도 이 대열에서 역사를 거스르고 시대를 역행하는 낡은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현행 정치 시스템을 만든 낡은 선거 제도와 정당 체제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그리고 역사의 본질적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어느 정권이 들어선들 경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대한민국의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지난 1987년 이후 30년 동안의 학습 효과이다. 이제 우리는 국민이 행복한 역동적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 제도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