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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종' 과학자, 김상욱을 아십니까?

일취월장7 2016. 7. 26. 11:45

'별종' 과학자, 김상욱을 아십니까?

2016.07.23 07:27:02

[프레시안 books] <김상욱의 과학 공부>

             
지식이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인문학과 과학은 양립할 수 없는 상극으로 평행선을 달리곤 했다.

"양자 역학으로 밥 먹고 사는" 부산대학교 김상욱 교수(물리교육과)는 그의 새로운 책 <김상욱의 과학 공부>(동아시아 펴냄)를 통해 이 양립 불가능한 상황을 중첩의 상태로 바꾸어놓는다. 과학으로 인문학을 통섭하지도 않고, 인문학을 위해 과학을 왜곡하지도 않는다. 텍스트 안에 중첩되어 담겨 있는 두 개의 고유한 사유 방식은 관찰자인 독자를 만나는 순간 때로는 과학으로, 때로는 인문학으로 붕괴되며 드러날 뿐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루어온 과학의 발전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유산이다. 원자의 세계에서 물질은 파동이자 동시에 입자인데 인간의 관찰 방식에 따라 한순간에는 입자처럼 보였다가 다른 순간에는 파동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양자 역학. 시간과 공간이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얽혀 있어서 관찰자의 상대적인 속도에 따라 느끼는 시간이 서로 다르다고 말하는 상대성 이론. 대폭발로 우연히 시공간이 시작됐다고 말하는 빅뱅 우주론.

이 모든 경이로운 과학적인 사실은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현대 과학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경이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인공지능과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눈부신 과학기술 문명은 양자 역학과 같은 과학의 발전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졌다. 그런데도 저자는 과학의 본질이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에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대개 머리가 아주 좋아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대한 과학자는 문지기를 무시할 줄 아는 사람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에 등장하는 문지기에 빗댄 말이다. 여기서 문지기란 과학자 사회의 전통이나 잘 확립된 이론, 혹은 노벨상 수상자의 권위일 수도 있고, 사회적 통념, 이데올로기, 종교, 자본, 정치권력일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이 절대 시간이라는 문지기를 무시했을 때 상대성 이론에 도달할 수 있었고, 하이젠베르크가 운동 궤도라는 문지기를 무시했을 때 양자 역학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뛰어난 과학자들은 문지기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문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한 결과만을 믿는다." 

▲ <김상욱의 과학 공부>(김상욱 지음, 동아시아 펴냄). ⓒ동아시아

과학의 본질이 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이다. <코스모스>의 역자 홍승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이를 가리켜 "사실에서 진실 찾기"라고 말한 바 있다. 과학적 사실 그 자체는 진실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없는 벙어리일 뿐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공산주의자나 영국의 과학자 프레드 호일은 극단적인 결정론에 사로잡혀 우주 팽창을 암시하는 허블의 관측 결과로부터 '빅뱅'이라는 진실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했던 독일의 생물학자는 다윈이 밝혀낸 자연 선택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악용하여 진실에서 벗어난 '우생학'이라는 사이비 학문을 추구했다.

진실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과학적 사실은 경우에 따라 <수학의 정석> 문제를 푸는 능력만으로도 얻을 수 있지만, 과학적 사실 너머에 있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문지기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는, 치열하고 비판적인 사고와 희생을 감수하는 용기 및 열정이 필요하다. 과학의 대상은 자연이지만 과학을 하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과학의 본질도 자연이 아니라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 김상욱의 과학 공부>도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수컷 공작새의 아름답지만 거추장스러운 꼬리를 말하면서 우리 사회에 왜 잉여가 중요한지를 지적하고, 우주의 광활함으로부터 인간 연대의 이유를, 양자 역학으로부터는 오랜 철학적 난제인 인간의 자유 의지를 논한다.

인간에게 감정이 없을 수 없다. 이 책에는 '과학자는 공감 능력을 결여한 너드(nerd)'라는 편견마저도 재치 있는 유머로 승화시키는 위트와 경쾌함이 넘치고(책을 읽는 내내 유머집을 낼 정도로 재기가 넘쳤던 독일의 핵물리학자 프리츠 호우터만스가 떠올랐다), 세월호 참사, 선거 조작 의혹,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 등 사회의 여러 부조리를 보며 느끼는 깊은 분노와 슬픔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과학적 합리성을 갖춘 눈으로 바라볼 때 웃음과 재미는 변화를 위한 실천으로, 슬픔과 분노는 구체적인 희망으로 바뀔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나는 서울대에서 인문계 학생을 대상으로 '인간과 우주'라는 교양 과목을 담당할 때마다 이제까지 읽은 과학 교양서 중에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설문 조사를 하곤 했다. 안타깝게도 학생들이 읽은 과학책은 대부분 두어 권을 넘기지 못하는데, 그 와중에 가장 많이 읽힌 것은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어크로스 펴냄)였다. 내년(2017년)부터는 여기에 <김상욱의 과학 공부>가 추가되어 있기를 기대한다.         



[김상욱 교수의 과학 에세이]'개, 돼지'를 인간으로 만든 과학

―뉴턴 물리학의 사회적 의미  동아일보 | 입력 2016.07.12. 03:08


진부하고 경박한 질문을 하나 해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일까.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티무르? 나폴레옹? 철학자 볼테르는 망설임 없이 ‘아이작 뉴턴’이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숭배해야 할 사람은 폭력으로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자가 아니라 진리의 힘으로 우리 정신을 정복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볼테르가 활동하던 18세기 유럽에서 뉴턴은 분명 가장 위대한 영웅이었다.

뉴턴이 확립한 물리학은 천상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해 주었다. 우주에는 법칙이 분명 존재했고, 이것은 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했다. 적어도 신이 자연 현상에 기적과 같은 형태로 개입할 여지는 없어 보였다. 스피노자와 존 톨런드는 성서를 무시하고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보는 ‘범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과학은 종교 개혁의 혼란을 겪던 타락한 중세 교회에 타격을 주고, 이성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로써 계몽주의라 불리는 서양의 근대 사상이 17, 18세기 유럽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계몽주의는 인간 삶의 목적이 내세(來世)가 아닌 현세의 행복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현세의 행복은 과학적 지식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베이컨이 말했듯이 ‘아는 것이 힘’ 아닌가. 계몽은 무지와 미신과 같은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하다. 계몽을 하면 할수록 인간은 도덕적으로 변하고, 세계는 진보한다. 물론 지금 우리는 계몽주의의 한계를 알고 있다. 계몽의 주체는 이성이며, 이성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필연적으로 당시 지배계급이 가지고 있던 특권주의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계몽주의는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과 같은 역사의 전환점을 만드는 데 한몫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라고 믿는 자유, 평등, 이성 등은 과학 혁명에서 비롯된 계몽주의에 그 근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런 보편적 가치가 아주 최근에야 확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귀족과 평민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때로 평민은 ‘개돼지’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기도 했다. 물론 지금의 시각에서 신분제는 난센스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역사는 이런 당연한 사실이 받아들여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는지 보여준다.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싸움이었다지만,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과 같지 않았다. 백인들이 신분제를 철폐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흑인은 여전히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미국은 독립전쟁을 끝내고 100년이 지나서야 노예해방전쟁을 치르게 된다. 백인 남성들이 평등을 위해 싸우는 동안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백인 여성보다 흑인 남성이 먼저 참정권을 가지게 된 것이 한 예다.

인류의 근현대사는 인간 평등의 범위를 확대하는 투쟁의 역사다. 그런데 인간은 왜 평등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대답할 수 있을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면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필자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오히려 용감하게 답을 할 수 있을 거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이유는 생물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각 개인이 가진 문화적 사회적 겉모습을 벗고 벌거벗은 호모 사피엔스로 섰을 때,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지하철 정비노동자 사이의 차이를 말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유전자 수준으로 가서 보면 차이를 구분하기 더욱 힘들어진다. 모든 인간의 유전자는 다른 사람과 평균적으로 99.5% 정도 같다고 한다. 유전자만 봐 가지고는 두 사람을 차별할 근거를 찾기 힘들다는 말이다. 유전자까지 오면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평등도 문제가 된다. 침팬지의 유전자는 인간과 99%가 같다. 참고로 남자와 여자도 유전자의 99%가 같다. 인간의 평등이 생물학적인 근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제 평등의 범위를 다른 생물종(種)으로 넓혀야 할 시점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

“민중은 개돼지.”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 고위 공무원이 한 말이다. 과학 혁명에 이은 계몽주의,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 전쟁.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가치를 확립하기 위해 인류는 처절한 대가를 치렀다. 서양 사회가 18세기에 치른 계몽주의의 혼란을 우리는 이제 겪는 것일까. 지금 우리는 이런 전근대적 발언을 두고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다. 동성애자 차별, 성 차별, 여성 혐오, 병역 거부자 차별, 외국인 혐오 등을 없애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과학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