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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경이나 코란보다 중요하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커와의 대화

일취월장7 2016. 7. 15. 16:46

이 책은 성경이나 코란보다 중요하다!

2016.07.15 16:03:29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커와의 대화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

'헬조선'에서 누군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여서 외친다면 당장 몰매를 맞겠죠. 그런데 용감하게 이렇게 외치는 지식인이 있습니다. 바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로 꼽히는 스티븐 핑커(하버드 대학교 교수)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2011년 펴낸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방대한 역사적 데이터를 근거로 세상은 사실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주장해 화제의 중심에 섰죠.

이 책에서 핑커는 '폭력'에 주목합니다. 그는 폭력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해 왔음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20세기 또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인류 역사상 폭력이 가장 적은 시대라는 것이죠. 식민 지배, 양차 세계 대전, 홀로코스트,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군사 독재 등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우리로서는 20세기가 '가장 좋았던 때'라는 그의 주장은 낯섭니다.

하지만 핑커의 주장대로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습니다. 또 공식적으로는 인류의 다수를 노예로 부리는 일도 없죠. 아들이 아닌 딸이라고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없습니다. 길 가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강간하는 일이 남자다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때도 아닙니다. 

물론 오늘(7월 15일)도 프랑스 한 도시에서 트럭이 불꽃놀이를 즐기던 인파로 질주해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5월 17일에는 강남의 한 화장실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생명이 스러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노예 같은 노동에 종사하는 다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5월 28일 구의역에서처럼 목숨을 잃기도 하고요.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의 성을 사고파는 일은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도 팔레스타인, 시라아, 카슈미르 또 아프리카의 분쟁 지역에서는 일상적인 폭력이 다반사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총에 맞아 죽는 게 오히려 행복합니다. 목을 자르고, 때려죽이고, 강간하고…. 

1945년 8월 6일과 9일 이후 핵폭탄을 전쟁에서 실제로 쓴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냉전 동안 인류 전체를 절멸할 정도로 세계 곳곳에 쌓인 핵폭탄이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여전합니다. 틈만 나면 핵 보유를 입증하려는 북한과 '사드(THAAD)'를 둘러싼 한반도의 난리법석은 그 증거죠. 

폭력을 자연까지 확장해보면 어떨까요?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과 상호 작용하면서 생존해 왔습니다. 상호 작용의 대부분은 일방적인 파괴였죠. 그런데 최근에는 이 파괴의 양상이 과거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지금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자연이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지구 온난화가 초래할 기후 변화가 앞으로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또렷한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다수의 과학자를 포함한 비관론자는 인류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안 좋아지리라 예측하죠. 먼지가 무서워서 밖을 나다니지 못하고, 화학 물질(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들은 어쩌고요. 

이런 우울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성경이나 코란보다 중요한 정말로 강력한 희망의 책입니다. 인류가 끔찍한 과거의 폭력을 극복해 왔다면, 앞에서 열거한 우리 시대의 불의 역시 극복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덧붙여서, 핑커는 우리 내면의 악마를 잠재우고 천사가 날갯짓을 할 수 있도록 한 인류의 새로운 무기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돈 많은 '몽상가' 빌 게이츠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극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게이츠는 여러 자리에서 "평생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으로 이 책을 꼽았습니다. 1955년생으로 만 예순한 살인 게이츠도 이 책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은 것이죠. 그러고 보니, 핑커 역시 1954년생으로 게이츠와 같은 또래군요.

번역가 김명남 씨의 노고 덕분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사이언스북스 펴냄)를 한글로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1400쪽이 넘습니다!) 아직도 이 책을 접하지 않은 독자는 이번 여름휴가 때 한 번 도전해 보십시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근거를 찾는 일은 어떤 일보다 중요하니까요. 

< 프레시안>은 지난 5월 20일 한국을 찾은 스티븐 핑커와 전중환 경희대학교 교수와의 대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조금만 주목을 받으면 허세부터 부리는 한국의 그렇고 그런 지식인과는 달리 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식인은 대화 내내 진지하고, 겸손하고, 친절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기자의 틀린 영어 표현까지 꼼꼼히 정정해 주었습니다.)

다음은 핑커와 전중환 교수 사이에 오간 대화 전문입니다. 녹취는 박지영 씨가 도움을 주었습니다. 

▲ 스티븐 핑커 하버드 대학교 교수. ⓒ사이언스북스


우리 안에 악마가 있다 

전중환 :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기본적인 질문을 몇 가지 할 게요. 다소 뻔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한지, 악한지를 놓고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한가요? 아니면 악한가요?

핑커 : 나는 책의 제목으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를 선택했습니다. 이건 에이브러햄 링컨의 1861년 3월의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많은 구성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따라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선한가, 악한가?' 하는 질문에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링컨이 포착했듯이, 우리는 선한 요소도 가지고 있고, 악한 요소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행동은 이러한 우리 마음의 서로 다른 부분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또 이러한 상호 작용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친구입니다. 우리는 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이 격앙되는 일은 있었을망정, 그 때문에 우리의 유대가 깨어져서는 안 됩니다. 신비로운 심금과도 같은 기억은 모든 전쟁터와 애국자의 무덤에서부터 이 드넓은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심장과 가정까지 뻗어 있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이 다시금 손길을 뻗는다면,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만, 다시 한 번 드높게 연방의 찬가를 울릴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중환 : 제 경험에 의하면, 책 표지의 제목만 보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웃음) 제가 만난 많은 사람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오로지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내용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핑커 : 아니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란, 우리 본성에 (선한 것 이외에) 다른 요소도 존재한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내 책 시작 부분에 실린 경구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가! 이 얼마나 진기하고, 괴물 같고, 혼란스럽고, 모순되고, 천재적인 존재인가! 모든 것의 심판자이면서도 하찮은 지렁이와 같고, 진리를 간직한 자이면서도, 불확실함과 오류의 시궁창과 같고, 우주의 영광이면서도 우주의 쓰레기와 같다" (블레즈 파스칼)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말입니다. 링컨의 표현처럼 인간 본성에 여러 다른 측면이 있다는 뜻입니다. 일부는 선하고, 일부는 악하죠.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우리 사회의 어떤 외부적인 변화가 인간 본성의 더 선한 부분을 끌어내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전중환 : 대부분의 사람은 폭력적인 범죄는 소수의 악당들에 의해서 주로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남다른,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간주되죠. 우리들 대부분은 아주 비폭력적이고, 또 선한 성향을 타고난다고 믿고요. 

그러나 당신은 우리 대다수가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그런 폭력적인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폭력성을 타고 난다는 당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어떤 것들인가요?

핑커 : 여러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삶 전반에 걸친 폭력적인 행위를 본다면, 가장 폭력적인 때는 2살 무렵입니다. 이때는 아기들의 절반이 서로 차고, 물고, 때릴 때죠. 자, 이 아기들이 폭력적인 영화를 봤기 때문은 아니죠. 문화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어릴 적 우리들의 자연스런 반응인 것이죠. 

우리가 실제로 배우는 것은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법입니다. (배우지 않아도 몸에 새겨져 있으니) 폭력을 저지르는 방법을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증거도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자신이 싫어하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대한 폭력적인 환상을 가진 적이 있는지 묻는다면, 대다수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대해 환상을 가진 적이 있다고 응답합니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만, 욕망은 있을 수 있다는 거죠.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또 만약 상황이 변하면, 즉 무정부상태나 시스템 붕괴가 일어난다면, 많은 사람은 그들이 더 평화로운 사회에서는 결코 저지르지 않을 폭력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전중환 : 당신은 또 '도덕화 간극(moralization gap)'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해로운 사건이 발생할 때,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재구성해서 받아들입니다. 이 때문에 똑같은 사건을 공격자, 피해자, 중립적 제3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각각 서사가 달라지죠.

핑커 : 맞습니다.

전중환 : 개인적으로 (도덕화 간극과 같은 편향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이 맞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일본과 얽힌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 시기의 폭력적 범죄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당신도 알다시피 전쟁 때 한국의 여성을 성 노예로 동원한 것 말이죠. 그래서 제가 다른 한국인에게 "일본이 그때 그렇게 한 것도 그 나름의 논리가 있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성 노예, 즉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제가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아마 이 나라에서 저는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된다는 것을 어떻게 일반 대중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요? 특히 과학자가 대중에게 어떤 실질적인 조언을 할 수 있을까요? 

핑커 : 우리 적의 입장에서도 나름의 논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가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경우 그렇지 않으니까요. 역사의 엄청난 전쟁 범죄 가운데 하나인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정당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물론이고 어떤 이유에서 정당할 수 없는 일도 (가해자) 나름의 논리를 분석하려는 노력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그런 상황이 다시 도래하는 것을 막는다면, 도대체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유용할 수 있으니까요. 

한국에서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 유럽에서의 나치 독일의 만행, 그리고 스탈린의 소련과 마오쩌둥의 중국의 경우가 그렇죠. 

한 가지 첨언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도덕화 간극은 서로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이 똑같은 상황을 놓고서 다르게 판단하는 간극을 의미하죠. 그러나 또 다른 도덕화 간극도 존재합니다. 때로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릇된 쪽이 스스로의 행동을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작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라! 

전중환 : 당신은 '약탈적 폭력'에 대해서도 설명했죠. 누군가는 원하는 것을 얻고자 약탈적 폭력을 사용합니다. 돈, 재미, 성적 쾌락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 말이죠.

약탈적 폭력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바로 나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주기 전에 가해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내게 돈을 원하는 경우 하나의 해결책은 그가 내게 해를 입히기 전에 그에게 돈을 주는 것이죠. 사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약탈적 폭력에 의한 범죄를 조장하지 않을까요? 

핑커 : 때로는 해결책이 됩니다. 만약 내가 밤에 산책 하는데 누군가 와서 총을 겨누며 "돈 내놔"라고 한다면, 지갑을 주는 것이 최선이겠죠. 물론 사람들이 범죄자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항상 지갑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원치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경찰이 필요한 것이죠. 하지만 때로는 지갑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죠. 

마찬가지로 때로는 국제 분쟁에서도 손해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한도는 정해져야겠죠. 또 분쟁의 대가를 모면하는 것과 비교해 자원을 포기하는 경우의 비용과 편익의 정도도 가늠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조금 포기한다면 다음번에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요구하고, 더 요구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고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단 하나의 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폭력의 피해와 자원 손실의 피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필요는 반드시 있습니다. 

왜 우리는 복수에 열광하는가? 

전중환 : 당신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폭력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는 대중적인 믿음이 완전히 잘못됐다고 이야기합니다. 

핑커 : 네, 폭력을 행사하는 많은 범죄자 가운데 상당수는 아주 높은 자존감을 가집니다. 사실 자존감은 폭력의 원인 가운데 하나죠. 그들이 모욕당할 때, 그들의 자존감이 너무 높아서 그 자존감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 도전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됩니다. 나르시시즘 또한 폭력을 행사하려는 성향과 연관성이 있고요. 

전중환 : 이건 사실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인데요. 당신은 보복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복이란 경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시도를 하려는 경우 심각한 처벌을 각오해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고요. 보복이 일종의 억제 기제로 진화한 것이죠. 

핑커 : 맞습니다. 마틴 데일리와 마고 윌슨에게서 얻은 아이디어죠.

전중환 : 데일리와 윌슨의 <살인>(김명주 옮김, 어마마마 펴냄)에서 그런 주장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우리는 종종 나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경우에도 타인이 적에게 보복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낍니다. 복수를 소재로 한 수많은 문학 작품이나 영화가 그토록 인기를 끄는 것은 그 방증이죠.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핑커 : 그것은 우리가 갖는 대리 만족의 여러 종류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허구의 인물과 동일시할 때, 우리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만약 허구적 인물의 입장에 실제로 있다면 경험할 만한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소설이나 영화의 즐거움이 바로 여기서 기인합니다. 

그래서 만약 허구의 인물이 폭력의 희생자였고 그 폭력의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다면 또는 보복이 일어난다면, 마치 우리가 실제 그곳에 있는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낍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다른 모든 대리 만족과 같은 방법으로, 감정 이입을 하게 되면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를 얻을 때 마치 우리가 그 여자를 얻은 것처럼 행복함을 느끼는 거죠.

공감만으로는 부족하다 

전중환 : 이제는 공감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오늘날 공감이 폭력의 주된 억제 기제로서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공감이나 동정은 사람들이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원인이라기보다 그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왜 공감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나요? 

핑커 : 나는 공감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폭력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때때로 그것은 실제 우리의 우선순위를 왜곡시키기도 하죠.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비슷하거나, 귀엽거나, 무력하거나, 잘생겼거나, 바로 눈앞에 있는 희생자에게 더 공감을 느끼거든요. 

그러나 만약 진정 당신이 최고의 선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 아기같이 귀여운 얼굴이 아닌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을 포함한 수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폭력으로부터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모든 이들과 우리가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국에 13억 명의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들 한 명 한 명과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쟁이 나쁘고, 폭력이 나쁘고, 억압이 나쁘다는 원칙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이 13억 중국인, 10억 인도인, 그리고 5000만 한국인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또 희생자가 굳이 귀여운 아기가 아니더라도, 폭력이 줄어야 하고, 전쟁이 줄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전중환 경희대학교 교수. ⓒ사이언스북스



대한민국, 천사의 날갯짓을 증명하는 곳 

전중환 : 다른 질문을 해보죠. 폭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좋은 예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이라고 당신은 한 강연에서 언급했죠?

핑커 : 대한민국을 의미합니다. 북한은 엄청난 예외죠. 북한은 정말 전 세계의 가장 주요한 예외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중환 : 실제로 대한민국은 폭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는 당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예입니다.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정말 가난했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죠. 이제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왔습니다. 우리나라가 당신의 주장을 잘 뒷받침하는 예라는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핑커 : 대한민국이 폭력의 감소라는 측면에서 진보의 한 예가 되는 여러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론 한국 전쟁 그 자체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시리아 내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에 21세기에 세계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악의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 전쟁을 잊은 거죠. 사망자 수가 300만 명이었던가요? 그것도 하나의 추정치일 뿐이죠. 한국 전쟁은 세계 인구가 지금의 반도 안 되던 때에 일어난 소름 끼치는 폭력이었습니다. 한국 국민은 엄청난 고통을 경험했고, 인류 역사에서도 끔찍한 시기였죠. 그러나 그 전쟁도 끝이 났고, 내 생각에 아마 (다음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놀랄 것 같아요.

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2016년까지, 물론 북한과 남한 간에 전혀 폭력이 없었다고 한다면 정확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한국 전쟁과 같은 폭력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한국 전쟁이 (폭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입니다. 또 한국은 군사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했습니다. 그것은 민주화로 향하는 세계 흐름의 일부였죠. 1980년대죠? 

전중환 : 1987년입니다. 

핑커 : 맞아요. 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 한국은 남성이 가족을 지배하는 상당히 가부장적인 문화였죠. 그런데 한국에는 여성 대통령이 있습니다. 미국보다 더 빠르죠. 우리가 좀 보고 배워야겠네요. (웃음) 그래서 나는 한국이, 한국의 역사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진보의 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한국은 낮은 범죄율을 보이죠. 한국의 살인율은 아주 낮습니다. 미국에 비해 훨씬 더 낮아요. 혹시 한국에 사형 제도가 있나요? 

전중환 : 네,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997년 이후 20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어요. 

핑커 : 그것이 전형적인 역사의 수순이죠. 제일 먼저 국가들은 그저 사형 집행을 하지 않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 어차피 집행하지도 않는데 차라리 없애는 편이 낫다고 말하죠.

전중환 : 그러고는 효과적으로 폐지한다는 거죠? 

핑커 : 그렇습니다. 

도덕성은 어떻게 폭력을 낳는가? 

전중환 :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앞에서 했던 질문과도 연관이 됩니다만, 당신은 인류의 행복에 대한 도덕적 감각, 즉 도덕성의 순 기여도가 마이너스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도덕성이 때때로 폭력을 감소시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더 빈번하게 폭력을 증가시킨다고 했죠. 이에 관해 다시 설명해 줄 수 있나요? 

핑커 : 두 젊은 남자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는 경우를 그려보세요. 둘 가운데 한 명이 상대를 모욕하고, 그 상대가 칼을 뽑아 들고 찌르는 거죠. 마오쩌둥, 스탈린, 히틀러, 제국주의 일본은 꼭 이익만을 위해서 폭력을 저지른 게 아닙니다. 많은 폭력의 원인은 이데올로기, 즉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때문이었죠. 

자기가 믿는 신을 비난해서, 동성애자여서, 자기와 다른 신념을 가졌다고 수많은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등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상당수 사람이 도덕적인 이유로 죽어갔죠. 이런 일이 왜 발생하는 걸까요? 바로 살인자 즉 가해자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 살인자 또한 이후에 착취의 희생양으로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출간된 이후에 나온 앨런 피스크(Alan Fiske)와 타지 라이(Tage Rai)의 <고결한 폭력(virtuous violence)>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도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설문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주장을 더 강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류학자인데, 상당히 많은 문화권에서 상황에 따라 폭력을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도덕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도덕적 감각이 우리가 실제로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 즉 인간의 행복과 좀 더 긴밀히 연결되도록 조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행복이란 생명과 건강과 행복과 번영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부유해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또 동성애와 신성 모독에 맞서는 도덕적 반응에 대해서는, 이것들이 나에게 (부정적) 감정을 일으킨다고 해서 반드시 객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전중환 : 당신은 우리 본성의 천사들 가운데 하나가 이성이라고 말했습니다. (핑커는 우리 본성의 천사들로 '감정 이입', '자기 통제', '도덕성과 터부', '이성' 네 가지를 주목했다.)

그러나 댄 스퍼버(Dan Sperber)와 같은 몇몇 진화 심리학자는 이성이 타인을 설득하고, 나의 주장이 아닌 타인의 주장에서 논리적 오류를 찾아내고자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성이 폭력을 감소시키거나 공정하게 분쟁을 해결하는 기능을 수행하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된 것은 아닐 겁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핑커 : 이성이 폭력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진화되었다고 주장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역사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의 추론이 나아졌다는 점을 강조했죠.

이는 우리에게 교육, 과학, 토론, 그리고 수학, 데이터, 과학적 실험, 동료 평가와 같은 도구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모든 제도들은 우리의 인지와 이성의 능력을 점점 더 객관적으로 올바른 이성에 가까워지도록 만들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혼자서만 사고한다면 논쟁을 이길 궁리밖에는 하지 않겠죠. 

그래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이 논쟁하고, 자신의 입장을 방어해 주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확실한 기준들을 만족시키면서 논쟁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장은 타인의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는 저널리즘, 교육, 과학, 민주주의와 같은 제도들을 우리 이성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간주합니다. 

전중환 : 그러면 폭력의 감소는 이성의 부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어쨌든 역사에 걸쳐 이성이 폭력의 감소에 기여해 왔다는 것이네요.

핑커 : 그것이 바로 역사가 흐르면서 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계몽주의 같은 역사적 사건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죠. 과학 혁명도 있죠.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 그 자체만으로는 효과가 그다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추론 능력을 향상시켜줄 추론가 집단과 일련의 기준 및 원칙들을 필요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