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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범박사의 저서 ‘아시아의 이상주의’ - 고대 한국(=桓國) 문명의 이상, 환단고기

일취월장7 2016. 7. 14. 16:07

미국의 하버드, 예일, 펜실베니아, 프린스톤, 스텐포드 등의 미국 주요대학을 중심으로 영국의 캠브리지 대, 카나다 토론토 대, 호주 멜본대, 프랑스, 독일, 스웨덴, 놀웨이, 체코, 댄마크, 유우럽, 기타 국가들에서

 

아시아 역사학, 국제관계, 동서 비교문명 분야에서 교재 및 연구도서로 채택돼 활용되고 있는 이홍범박사의 저서 ‘아시아의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 책입니다.

 

 

전, 펠실베니아 대학 교수였던 힐러리 콘로이씨가 아시아 이상주의 추천서를 쓰셨는데 하버드대학 아시아 태평양 전문가였던 라이샤워 박사와 힐러리 콘로이 교수는 미국에서 아시아 태평양 문제의 전문학자로 쌍벽을 이룬 인물입니다.

힐러리 콘로이 명예교수는 한 때  “일본이 갑오경장을 통해 한국에 근대화의 방법까지 숟가락으로 떠먹여주었으나 한국은 받아먹지 못했다”며 한민족을 우매한 나라로 취급했을 정도로 친일파 학자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철저한 친일 학자가 "중국과 일본의 어머니 나라가 한국이며 동아시아 역사의 종통도 한국이다." 라는 내용의 글이 담긴 책 아시아 이상주의 추천사를 적었다는 사실 하나가 주는 상징성은 실로 막강하다 볼 수 있습니다. 이홍범 박사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힐러리 콘로이 명예 교수의 추천서가 의미 하는 것은 이 책에 나와 있는 이홍범 박사님의 주장에 대해서 아이비리그에 있는 박사들이 충분한 검증을 하였다는 것을 학자의 양심을 걸고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 연구의 최고 대가의 추천서가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이상주의"라는 책이 아이비리그의 역사 교과서로 채택이 되고 빌 클린턴, 힐러리 클린턴,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해 지고, 오바마 대통령의 키친 캐비넷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53년 일본의 하와이 진출 역사(1868~1898)에 대한 논문
1960년 일본의 한국 지배 위한 노력 역사 (1868~1910)에 대한 논문
1978년 2차 세계 대전 이후 중국과 일본의 균형에 대한 논문
1990년 은퇴 및 명예 교수 발령
1990년 진주만 폭격에 대한 논문
1991년 미국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논문 

http://www.archives.upenn.edu/faids/upt/upt50/conroy_fh.html

http://www2.hsp.org/collections/manuscripts/c/conroy3018.htm

 

하버드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교수회의를 통해서 책을 선택하는데
이 분야에서 최고의 학술서적으로 평가할 때에 도서연구 목록에 넣습니다.
하버드 유니버셜 라이브러리를 치면 Millenarianis 분야에 책이 4권이 나오는데
여기에 9년동안 한권도 하버드대학에서 채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한국 사람이 쓴 책으로서 채택 된 것은 처음입니다.

하버드대학이 포문이 되어 예일, 프린스턴, 펜실베니아, 스탠포드 그리고 캐나다의 맥길 대학, 이태리 국립대학등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식민지의 유산 1/2

이홍범 선생님의 아시아 이상주의

 

(이홍범, 아시아 이상주의,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역사 교재)

 
과거의 역사기술 그리고 식민지의 유산


카사넬리 교수가 지적한 것과 같이, 한국에 대한 대부분의 역사기술들은 식민지 관리나 식민지 정부가 고용한 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된 부산물이었다. 식민지 정부는 전통적인 사회 제도와 정치 제도를 파괴했고, 그리고 그들의 것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제도의 역사와 정신을 파괴했다. 고대 역사에 관계되는 이상주의(理想主義)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식민지의 유산(遺産)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

민족주의적인 왜인(倭人)들은 한국 역사가 지나와 왜국(倭國)역사 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왜국(倭國)과 지나(支那) 모두 진짜 역사를 왜곡하기를 계속했다. 2003년 지나(支那) 정부의 대규모의 예산을 투입하여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정책하에 지나인(支那人)들은 고대 한국의 역사 문화 유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구려 왕조의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지나인(支那人)들의 목적은 마치 고구려는 한국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나인들에 의해서 건국되었고 지배되었다는 거짓 역사를 만든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지나(支那) 정부는 허가 없이 고구려 유적들의 사진 촬영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고대(古代) 왜국(倭國) 역사의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한사람인 쉬라야나기 슈고 씨는 유교와 도교를 포함한 지나(支那) 문화는 명백하게 한국 문화였다고 논한다. 지나인(支那人)들은 한왕조(漢王朝) 끝 무렵(AD. 220)까지 한국 문화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다. 고대 조선 한국이 지나(支那)의 내륙부(內陸部)를 넘어서서 지배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한국인들이 실크로드(비단길)과 지나(支那)의 내륙부(內陸部)를 넘어서 지배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쓰여진 힘겨운 역사의 왜곡(歪曲)이었다. 그러므로 漢(支那語)의 이름은 韓(韓國語)로부터 지나인(支那人)들이 빌렸다.


저명한 왜국의 학자인 카쉬마 노보루(鹿島昇) 씨는 그의 책 (倭と辰國, 왜(倭)와 진국(辰国))에서 고대 한국인들은 지나(支那)의 하(夏), 은(殷), 주(周)와 왜국(倭國)의 황실 조정과 연결되어져 있다고 논한다. 몇몇 저명한 왜국(倭國)의 지성인들과 명치(明治)의 가장 유명한 애국적인 지성인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같은 학자들도 왜국(倭國)이 한국으로부터 많이 배웠다고 인정했다: 양잠업(養蠶業)과 조선업(造船業), 직조(織造)와 농업 도구, 의학서, 유교 그리고 다른 문화 항목들이 한국으로부터 수입되었거나 또는 왜국에서 발전되었다.


한국에 있는 한국 전문가의 대부분 뿐만 아니라 미국과 다른 나라에 있는 한국 전문가들이 식민지 유산의 덫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식민지 유산을 왜 극복 못하는 지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많은 한국 역사학자들이 동경(東京) 제국대학(帝國大學)의 전 교수(敎授)인 이마니쉬 류와 같이 왜국(倭國)을 위하여 한국 역사 편수회 조선사 편찬 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에서 같이 일한 이병도 교수의 지도하에 공부했기 때문이다. 이 위원회는 1910년에 왜국(倭國)의 식민지 정부에 의해 한국 역사의 생산(生産)을 관장(管掌)하기 위하여 설립(設立)되어졌다.

 

한국의 역사를 파괴하기 위한 왜인(倭人)들의 행위는 대부분 학자들의 상상력을 넘어선다. 1945년 한국은 왜국(倭國)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병도와 식민지 유산은 한국 역사가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으로 남아있다. 이병도에 영향을 받은 많은 한국 학자들이 한국의 대학들에서 그리고 많은 다른 나라에서 역사교수로서 일해왔다. 한국과 한국 전문가들에게 끼친 이병도의 영향은 아직도 대단하다. 예를 들어 하바드 대학에서 출판된 이기백 교수에 의해 쓰여진 신한국 역사는 동학(東學)창시자의 교리(敎理)는 가톨릭(천주교)으로부터의 요소를 포함했고 그리고 통속적인 샤마니즘(巫敎)의 신앙의 특징을 포괄했다고 논한다.

 

왜 동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와 관계를 가지는 고대 한국 역사가 학문적인 깊이로 연구되지 않아왔던 또 다른 이유는 고대 한국, 지나(支那), 왜국(倭國)의 역사 자료들을 발견하고 읽는 과업이 아주 어렵고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한국정부가 주로 한국어, 즉 한글만 사용하기로 한 정책이 채택되었기 때문에, 고대 한국, 지나(支那), 왜국(倭國)의 자료들을 읽기 위한 능숙함을 가진 그렇게 많은 학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영어로 쓰여진 학문적인 출판이 고대 한국 자료들을 거의 소개하지 못했다. 아시아 연구에 대하여 식민지의 유산이 아직도 학문계를 지배하고 있다. 카사넬리 교수의 아프리카 연구에 의해 제안된 것 같이, 식민지의 유산에 의해 야기되어진 몇 가지 잘못된 개념들은 미국 학계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학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왜국(倭國)의 인상을 호전적(好戰的)임에서 민주주의로 바꾸기 위하여 개최된 1964년 왜국(倭國) 하코네 회의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왜국(倭國)과 새로운 친선관계를 창조하는 데 미국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학자들의 연구는 주로 왜국(倭國)의 현대화, 메이지 유신, 타이쇼 자유주의 운동, 사무라이 문화, 그리고 왜국(倭國)의 해외 팽창같은 데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바드 대학의 에드윈 라이샤우워, 알버트 크레이그, 그리고 펜실바니아 대학의 아키라 이리예, 힐러리 콘로이, 카메룬 허스트 III, 그리고 프레드릭 디킨슨, 예일 대학의 존 홀, 제임스 크롤리, 프린스턴 대학의 마리우스 잰슨, 스탠포드 대학의 피터 더어스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왜국(倭國) 연구들에 공헌을 했다.


지나(支那)의 연구에서 미국학자들은 지나 현대화, 애국주의, 태평천국의 난(亂)을 포함한 혁명들, 그리고 공산주의 혁명, 지나(支那)의 역사 이전, 그리고 왜 지나(支那)는 현대화의 여정에서 뒤떨어졌는가 하는 연구에 주로 집중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반세기 후에도 우리는 식민지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해왔다.

 

하바드 대학의 페어뱅크 교수는 그의 책 차이나 신역사(新歷史)에서 주장한다. 역사에 지혜의 행로는 문제와 질문들을 지금 여기서 해결하기 보다는 어떤 문제가 논란인가를 발견해 내고, 주류(主流) 질문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서관은 지나(支那)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작가들의 발표들이 쓰레기더미처럼 널려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많이 모르고 있는 지를 볼 수 없었다. 우리의 지식의 팽창은 우리의 무지(無知)의 변경이 넓어지게 했다.

 

페어뱅크 교수는 말한다. 만약 현대에 지나(支那)가 서방에 뒤떨어진 사회적 인적 요인들을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나(支那)의 한국 역사와 고전적인 사상 그리고 고도의 문명을 우리는 더 가까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떻게 그것들 모두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를 알기 위하여. 그러나 지나(支那)의 이전 역사의 실질적으로 중요한 한부분인 고대 한국역사, 고전적 사상, 그리고 문명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고대 한국역사는 이상주의(理想主義) 교리(敎理)의 기초 위에서 근거했다. 고대 한국의 이상주의(理想主義)와 역사없이, 우리는 지나(支那)뿐만 아니라 태평(太平)과 동학(東學) 이상주의(理想主義) 운동(運動)을 포함(包含)해서 왜국(倭國)과 아시아에서의 진실한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인간적 요소(要素)들을 이해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식민지 당한 국가들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미국의 아시아 학문은 비록 전후 반세기가 흘러갔지만 식민지 유산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학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가 식민지의 유산이나 왜곡된 역사 기술(記述)로부터 인간사의 진실들을 발견하고 기술(記述)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국(倭國)의 전범(戰犯)인 야마쉬타 야수푸미는 처형되기 3-4일전에 역사 왜곡이 왜국(倭國) 군부 도당(徒黨)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연합군의 승리 뒤에 학자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다른 식민지 지배를 받던 나라들을 포함하여 식민지의 유산으로부터 세계의 진실된 역사를 파기 시작했다. 저명한 왜국(倭國)의 학자인 카쉬마 노보루 씨는 말한다. 우리나라는 비록 역사 교사들은 있지만, 역사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적 서술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역사가가 아니다. 한국인들도 왜국(倭國)보다 역사 서술을 읽는데에 더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학계는 아직도 식민지의 유산하에 있다. 노보루는 잃어버린 아시아 역사를 찾기 위하여 왜곡된 역사 서술을 보호하는 사람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사넬리 교수가 지적하듯이 어떤 문제가 논의중인 것을 앎 그리고 역사의 진실을 발견함이 식민지의 유산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카사넬리 교수와 더불어 펜실바니아와 하바드 대학교의 프레데릭 디킨슨, 에드워드 와그너, 그리고 다른 분들이 역사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하여 식민지의 유산을 극복하는 것을 독려한다. 그들은 세계적 맥락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연구뿐만 아니라 이상주의(理想主義) 연구를 위하여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공한다.

 

비교(比較) 역사의 이익중의 하나가 학자들이 외부로부터 그들 자신의 전문 분야를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특별한 학문 전통이 만들어 놓은 몇몇 어두운 곳을 발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세계 역사의 연구를 전진하게 하는 다음 단계는 식민지의 역사를 극복하는 것과 현재 학계의 재검토를 시작하는 것이다.

 

 왜국(倭國) 학자인 이마이 케이이치는 칸토 지역의 발전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큰 기여(寄與)에 대하여 강의했고 썼다. 식민지 시대 동안 동경제국대학 교수였던 카나자와 씨는 또한 왜국(倭國) 황실(皇室) 조정은 왜국(倭國) 황제(皇帝)의 선조들이 한국으로부터 왔다는 역사 기록들을 파괴했다라고 논(論)했다. 또 다른 현대 왜국(倭國) 학자는 왜국(倭國) 황실(皇室) 가족은 한국으로부터 왔다라고 논(論)한다.

 

조선(朝鮮) 한국은 왜국(倭國) 황실(皇室) 조정(朝廷)의 할아버지 나라였다고 말하면서. 왜국(倭國) 황제(皇帝) 텐지는 한국에 백제(百濟) 쿠다라 왕조(王朝)의 우이자 왕(王)의 아들인 부여용(夫餘勇)이었다. 이 황제(皇帝)가 왜국(倭國)을 니폰-일본(日本)이라 명명(命名)했다.


왜국(倭國)의 황실(皇室) 가족은 한국에서 기원(起源)한다. 첫 번째 황제(皇帝) 진무(神武)부터 구세(九世) 황제(皇帝) 카이카(開化)는 한국신라(新羅)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십세(十世) 황제(皇帝) 수진(숭신(崇神))부터 십오세(十五世) 황제(皇帝) 오우진(응신, 應神)과 이십오세(二十五世) 황제(皇帝)인 부레추(무열, 武烈)) 황제(皇帝)는 한국 백제(百濟) 쿠다라 로부터 왔다.

 

이십육세(二十六世) 황제(皇帝) 케이타이(계체, 繼体)에서부터 이십팔세(二十八世) 센카(선화, 宣化) 황제(皇帝) 까지는 신라(新羅)로부터 왔다. 이십구세(二十九世) 황제(皇帝) 텐지(흠명, 欽明)에서 사십세(四十世) 황제(皇帝) 진토우(천무, 天(武)까지는 신라(新羅)로부터 왔다. 또 다른 왜국(倭國) 학자인 타나카 카추야 씨는 그의 고대(古代) 왜국(倭國) 역사 기술(記述)에서 한국 사람들에 의해, 또는 만주(滿洲)와 동(東)러시아를 지배했던 퉁구스(Tungus) 사람들에 의해 통치(統治)된 고대(古代) 조선 한국은 큐슈 지역을 식민지화 했고, 그리고 왜국(倭國) 황실(皇室) 조정(朝廷)을 세웠다라고 논(論)한다.

큐슈(九州)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중요 왜국(倭國) 쉰토(Shinto, 神道) 성지(聖地)들은 곰을 의미하는 웅(熊)같은 한국 이름을 가졌다. 곰(kom)은 한국말이고, 왜어(倭語)로는 쿠마(くま, kuma)이다. 왜국의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왜국(倭國)의 건국 이야기에 대해 기술(記述)한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있는 이야기들은 한국과 중대하게 관계되어져 있다. 이 이야기들은 의미심장하게도 많은 고대(古代) 한국에 관계된 설화(說話)들을 복사(複寫)했다. 이 이야기들은 사실 한국으로부터 왜국(倭國)으로 여행(旅行)했던 한국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

 

고대(古代) 한국의 역사와 언어(言語)의 유창(流暢)함 없이 그 설화(說話)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식민지의 유산이 유행(流行)하지만, 왜국(倭國)의 언어가 얼마나 강하게 한국의 문명(文明)이 왜국(倭國)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가를 가리키고 있다.

 

왜어(倭語)는 쿠다란 코토 이우나(Kudaran koto iuna, 下らん こと 言うな) “커다란 나라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말하지 마라” 라는 관용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왜인(倭人)들은 왜어(倭語)인 하크사이(Haksai) 대신에 고대 시대에 백제(百濟, 지나(支那)의 한 부분을 지배했던 한국의 삼(三) 고대(古代) 나라들 중의 한 나라)를 쿤나라(kunnara) 라고 불렀다. 왜인(倭人)들은 쿠다라(kudara)라고 말한 쿠나라(kunara)를 말할 수 없었다. 왜인(倭人)들은 한국 삼(三) 왕조(王朝)중(中)의 하나인 백제(百濟)를 큰 나라로 동경(憧憬)했고 존경(尊敬)했다. 왜국(倭國)의 중세(中世) 때에 나라라는 단어(單語)는 나라를 뜻하는 한국어(韓國語) 나라에서 유래(由來)했다.

 

고대 동(東) 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 전통(傳統)의 기원
모든 동아시아 역사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고대 동아시아 나라들은 초자연적인 이상주의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아시아 나라들의 전설적인 건국자는 하늘의 또는 신적인 설화(說話)에 기초를 두고 있다. 동(東)아시아에서는 각 나라의 황제(皇帝)와 왕(王)은 국민과 나라의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하늘에 의해 신적(神的)인 권리를 부여받았다.

 

정치적인 투쟁들에서 승리자는 그들의 역사를 위대한 것으로 보고했고, 패배한 나라의 역사를 왜곡했다 그리고 이상주의 신앙을 샤마니즘적으로 비하했다. 좋은 예(例)가 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 역사에서 동학(東學)과 태평(太平) 이상주의이다. 동(東) 아시아 이상주의 전통은 지나(支那) 문화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3세기에 지나(支那) 한(漢) 왕조가 지나의 민족중심주의에 목적으로 동(東)아시아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을, 그리고 19세기에 왜국(倭國)의 팽창을 위하여 황제(皇帝) 이상주의 이념 하에 명치(明治) 왜국(倭國)이 동 아시아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학자는 거의 없었다. 실재로는 전설적인 지나(支那)와 왜국(倭國)의 건국 황제(皇帝)의 이상주의 신화(神話)는 고대 한국의 이상주의 역사에서 기원(起源)했다.

지나(支那)와 왜국(倭國)의 고대(古代) 건국자들은 한국 사람이었다.

고대 한국 역사 기록(記錄)들은 고대(古代) 한국 사람들이 지나(支那)와 다른 아시아 나라들의 권력을 이양(移讓) 받는다라고 기술(記述)한다. 지나(支那) 역사에 따르면 건국(建國) 3황제(皇帝)가 있었다. 태호복희(太嘷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皇帝軒轅)이 그들이다. 그들 모두는 한국 사람이었다.

 

건국(建國)황제(皇帝) 뒤의 5 황제(皇帝)는 1. 소호금천(少嘷金天), 2. 전욱고양(顓頊高陽), 3. 제곡고신(帝嚳高辛), 4. 제요도당(帝堯:陶唐), 5. 제순유우(帝舜有虞)이다.

 

 신원이 불명확한 전욱고양(顓頊高陽) 이외(以外)에 그들 모두는 한국 사람들이다. 고대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은 지나인(支那人)들은 보통 쓰지 않은 태호(太嘷)와 같이 두개의 단어(單語)를 직함(職銜)으로 또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고대시대에 한국인과 같은 퉁구스 사람들인 몽고인들은 고대(古代) 한국에서 기원한 징기스칸 같은 직함(職銜)이나 한국 이름을 사용했다. 고대 조선 한국에서 사용된 한국 낱말들과 언어들은 지나(支那), 몽고(蒙古), 동(東) 러시아 그리고 중앙 아시아 등 많은 나라로 널리 퍼지고, 사용되고, 변형되었다.

 

지나(支那)는 한국 이름인 한(韓)으로부터 자기들의 나라 이름을 한(漢)으로 만들었다. 비록 두 글자의 뜻은 다르지만 발음은 같다. 지나(支那)는 흔히 지나(支那) 당(唐) 왕조(王朝)의 리 쉬지의 리 같이 성(姓)이나 직함(職銜)에 한 단어(單語)를 사용했다. 당(唐)이 고구려를 패배시킨 후에, 한국 사람들은 두개나 네개의 성(姓)에서 한 단어(單語)를 채용(採用)했다.


고대 지나(支那)의 자료인 서경(書經)에 따르면 지나(支那)의 건국자는 한국사람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은 또한 황제(皇帝)로부터 주(周)왕조(王朝)의 우(禹)까지, 비록 그들의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기술했다. 태백일사 라는 한국의 자료에 따르면, 삼황의 첫번째 황제 복희는 한웅 조선 한국 나라의 태우이 천황의 막내아들이었다. 지나 학자에 의해 쓰여진 고사변(古思辨)도 비슷한 견해를 유지한다. 그 책에 의하면 동이는 은(殷)나라 사람들과 같이 같은 사람들을 나타낸다. 사람들의 신화도 또한 같다. 현 시대의 많은 학자들도 복희(伏羲)부터 은(殷)왕조(王朝)까지 지나(支那)의 건국자는 명백(明白)히 한국 사람들이었다 라고 인식(認識)했다.

고대 조선 한국은 지나(支那)의 많은 나라들을 지배한 종주국(宗主國)이었고, 그리고 고대(古代) 한국인들은 지나(支那)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지나(支那)의 기록들 진서(晉書), 후한서(後漢書), 산해경(山海經), 논어(論語), 제서(齊書), 남제서(南齊書), 송사(宋史), 양서(梁書), 주사(周史), 북사(北史), 사기(史記), 요사(堯史)는 아시아에서 광대한 고대 한국 영토를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한국과 지나(支那)의 다른 역사 기록들과 언어학적인 고고학적인 증거들의 관계에서, 기록들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면, 고대(古代)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의 지나(支那) 영토를 지배(支配)했다는 것을 배우기는 어렵지 않다.

지나(支那)의 기록인 설문(說文)은 동이(東夷) 나라를 넘어서 하늘은 엄청나고 영토는 크다 라고 말한다. 이 지나(支那)의 자료는 순(舜, 한국-지나의 황제)은 고대 조선(朝鮮)의 (한국의) 천황(天皇)에게 공물(貢物)을 바쳤다고 기술한다.

 

지나(支那) 역사학자 주 리앙지(Xu Liangzhi)는 자신의 책 (Zhongguo shi qian shi hwa)에서 동이(東夷) 사람들의 활동(活動)이 모든 산동(山東), 하남(河南), 북서(北西) 호남(湖南), 북부(北部) 안휘(安徽), 호북(河北) 그리고 동부(東部) 호북(湖北) 지역(地域), 요동(遼東) 반도(半島)와 한반도에 이르게 광대(廣大)했다라고 기술(記述)한다.

 

 산동반도는 아시아에서 동이(東夷) 활동의 중심이었다. 후(後) 한(漢)왕조(王朝)에 쓰여진 후한서(後漢書)는 고대(古代) 한국은 거대한 영토를 포함하는 78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라고 기술(記述)한다. 비록 고대(古代)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의 지나(支那)를 다스렸지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가장 강력한 고대 조선(朝鮮) 한국의 건국자들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결코 쓰지 않았다.

사마천(司馬遷)은 단지 다른 것에 대하여 썼다. 하지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조차도 지나(支那)의 산동지방 동평(東平)에 그의 묘(墓)가 있는, 고대 환웅(桓雄)시대에 14대 천제(天帝) 치우(蚩尤)는 천자(天子) 황제였다고 말한다. 고대 한국이 지나(支那)의 중앙부까지 다스렸다는 증거의 한 단편(斷片)이다. 지금은 지나(支那) 나라들이라고 알려진 9동이(九東夷) 나라는 단군조선 한국에 공물(貢物)을 바쳤다.

 

 고분(古墳)에서 발견된 고구려 벽화(壁畵)가 공물(貢物) 관계를 묘사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지나(支那) 당국(當局)은 허가없이 사람들이 많은 고대 역사적 문화적 유물들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고대 한국이 대부분의 지나(支那)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고대 한국과 지나(支那)의 기술(記述)들의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 한국 기록에 따르면, 영주(領主)(전설적인 지나(支那) 황제(黃帝)) 순(舜)은 지나(支那)로 부터 산동(山東)에 있는 난계(Nangye)를 5년마다 방문한다.

순(舜)은 아침에 한국 천자(天子) 천황(天皇)을 알현(謁見)했다. 유교(儒敎) 고전(古典)인 지나(支那)의 자료인 서경(書經)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2월에 순(舜)은 동쪽으로 단군 조선 한국에 갔다, 그리고 산동지역 태산(泰山)에서 천제(天帝)에게 경배를 시행(施行)했다. 마침내 그는 동쪽 황제(皇帝)를 알현(謁見)했고 일년(一年)의 달(月)과 일(日)에 대하여 대화(對話)를 나눴다.

 

순(舜)은 아마도 또한 우주(宇宙)의 주기 법칙과 날씨를 이해하기 위하여 역경(易經)에 대해서 배웠다. 하지만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 썼다. 순(舜)은 동쪽의 지배자를 만났다. 사마천(司馬遷)은 후에 지배자(支配者)를 황제(皇帝)로 대체(代替)했다. 사마천(司馬遷)의 시각은 사마천(司馬遷)뿐만 아니라 샤오순, 시마 첸,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작가(作家)에 의해 지나(支那)의 정치적 압력하에서 지나(支那)의 민족중심주의 편견(偏見)을 가지고 기술(記述)됐다.

 

식민지의 역사, 현재 아시아 연구의 학술(學術), 그리고 문화(文化) 차이

 

고대 한국의 상형문자 또는 지나(支那) 문자 동(東)은 동쪽을 의미한다. 이(夷)는 대(大)와 궁(弓) 두 글자가 조합된 것이다. 대(大)는 위대(偉大)한 또는 큰을 의미하고 그리고 궁(弓)은 궁술(弓術) 또는 하늘 또는 천심(天心)을 의미한다. 하늘 또는 천심(天心)의 의미를 가지는 고대 한국 상형문자 또는 지나 문자로 궁(弓)은 한국의 역사(歷史)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왔다.

 

궁(弓)은 하늘 또는 천심(天心)으로 한국 참위설(讖緯說)과 동학(東學) 이상주의(理想主義) 운동에서 또한 쓰였다. 특히 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 연구에서, 우리는 인간사의 연구를 위하여 지나 문자를 읽는 데 아주 조심해야 한다. 번역시 어려움을 일으키는 다른 예(例)가 다음과 같다. 동(東)은 지나(支那)의 핀인(병음, 拼音) 체계(體系)에서는 동쪽을 뜻한다. 서(西)는 서쪽을 뜻한다.​


 하지만 동서(東西)는 동(東)과 서(西) 대신에 보통 사물(事物)로 사용된다. 내용과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는 것 없이 우리는 진실로 지나어(支那語)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夷)의 의미를 쉽게 오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동이(東夷)의 원래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夷)의 의미는 지나(支那) 한왕조(漢王朝) 이래로 야만인으로 사용되어지기 시작했다.

 

후에 지나인(支那人)들은 한국 사람을 동이(東夷) 동쪽 야만인으로, 그리고 서양인을 양이(洋夷) 서쪽 야만인이라 불렀다. 왜인(倭人)들도 전례(前例)를 따랐다. 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지나(支那)와 왜국(倭國)의 동기가 선진 문명에 대한 그들의 질투와 무지(無知)를 숨기기 위하여 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대 문명화된 한국과 현대의 문명화된 서방의 힘이 그렇게 강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지나(支那)와 왜국(倭國)에 대하여 이(夷)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대 한국 사람들은 고대 지나(支那)의 나라들을 건국했고 그리고 그들의 나라들의 건국 기초를 닦았기 때문이다. 지나(支那)와 왜국(倭國)의 지배계급은 원래 한국 사람들이었다. 명치(明治) 시대에 동경제국대학의 교수였던 카나자와 쇼자부로 씨는 지나(支那)에서 왜국(倭國)으로 왔던 고대 지나(支那) 지도자들은 한국(韓國)의 이름을 사용했다고 논(論)했다. 그의 논의(論議)는 사실이다.

 

공자(孔子)와 많은 지나인(支那人)들은 동이(東夷)를 최상(最上)의 문명(文明化)된 사람으로 동경했고, 동이(東夷) 나라에서 살기를 원했다. 동이(東夷) 나라에서는 선(善), 정의(正義), 평화(平和)가 있었으나, 지나(支那)에는 그 당시에 부정의(不正義), 부패, 내부의 싸움, 전쟁에 시달렸다.

 

고대 지나(支那)의 기록에 따르면, 지나인(支那人)들은 동이(東夷)를 용감(勇敢)하고 가장 강력(强力)하고 문명화(文明化)된 사람으로 보았고 동경했다. 이들 지나(支那)의 기록들은 이기백과 존 페어뱅크의 발견물(發見物)들이 의문스럽다는 것을 증언한다. 비록 우리들은 이(夷)란 단어는 원래와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야만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인식한다.

 

고대 시대에는 이 용어는 효(孝)와 평화(平和)를 위한 위대한 (궁술, 弓術)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동이(東夷)(한국(韓國) 사람들)가 왜 궁술(弓術)을 발명하였는가 하는 중요한 이유는 전쟁을 위하여서라기보다는 효(孝)와 충(忠)을 위하여 죽은 조상들과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시신을 동물들이나 야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첫째의 목적이 방어와 평화를 위해서였다. 선생님에 대한 효(孝), 충(忠), 경(敬) 교리(敎理)는 고대 한국 이상주의(理想主義)에서 기원했다.

 

 동이(東夷), 구이(九夷), 조선(朝鮮) 한국의 이름

지나인(支那人)들은 고대 한국의 공식(公式) 국명(國名)인 조선(朝鮮) 대신에 한국 국명(國名) 또는 한국 사람을 동이(東夷, 동쪽 위대한 궁사(弓師))로 사용하였다. 또한 구황(九皇), 구려(九麗), 구정(九井), 청구국(靑邱國) , 창수(蒼水) 같이 이(夷)와 더불어 다른 이름들이 있다. 한국에 대한 지나(支那)의 기록들에 구(九)를 가진 많은 단어들이 있다.

 

구(九)는 고대 조선(朝鮮) 한국은 아홉 개 나라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나(支那)의 산해경(山海經)은 아홉 개의 우물과 꼬리가 있다고 기록한다. 하나의 우물이 손상되면 다른 여덟 우물이 작동한다. 이것은 아시아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이것을 단순히 아홉 우물로 해석하고 이것은 단순히 고대의 설화(說話)라고 생각한다. 아홉 우물들은 고대 조선(朝鮮) 한국의 아홉 개 동이(東夷) 나라를 나타낸다. 아홉 꼬리는 아홉 동이(東夷) 나라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고대 조선(朝鮮) 한국에서는 아홉 동이(東夷) 나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오늘날에도 얼마나 강하게 식민지의 유물이 우리 학문에 영항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한 예가 있다. 이기백 교수는 자신의 책 한국의 신역사(新歷史)에서 논한다. 지나(支那)의 자료(資料)인 삼국지(三國志)에 있는 동쪽 야만인을 동이(東夷)의 기술(技術)로 본 것처럼 삼한(三韓)의 경우는 아마도 정상적인 발전의 예(例)이다. 그렇지만 이기백의 동이(東夷)를 동쪽 야만인으로의 해석은 의문스럽다,

 

비록 그의 책이 한국에 대한 많은 가치있는 통찰력을 주지만! 그의 사상(思想) 학교는 단지 식민지 기간 동안 왜국(倭國) 식민지 학자들이 기술(記述)했던 것을 복사한 식민지의 유산의 성과일 뿐이다.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 그리고 한국에 사는 대부분 한국 사람들과 아시아 전문가들이 범하는 공통적인 실수이다.


존 킹 페어뱅크 씨는 자신의 지나(支那)의 전(前)역사에서 동쪽의 야만인으로 이(夷, yi or i )를 해석했다. 그 해석은 도전(挑戰) 받을 수 있다. 전(前) 역사 시대에는 위(yi)와 이(i)는 문명ghk(文明化)된 사람으로서 쓰여졌다. 이기백이 인용했던 동이전(東夷傳, 동이(東夷)의 일대기),과 삼국지(三國誌, 위(魏)오(吳)촉(蜀) 삼국(三國)의 일대기, AD. 222-263 사이) 는 동이(東夷, (한국 사람들)을 야만인이라 말하지 않았다.

 

동이(東夷)는 보물으로서 금(金) 은(銀) 비단(緋緞)직물(織物)을 취(取)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칭송한다. 동이(東夷)의 성질(性質)은 정직(正直)하고 강(强)하고 용감하다. 지나인(支那人)들이 도덕과 선(善)을 잃어버렸을 때 네 방향으로 동이(東夷)로부터 그것을 배웠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또한 다른 지나(支那)의 책에 쓰여있다. 후한서(後漢書)와 예기(禮記)는 동(東)은 이(夷) 그리고 이(夷)는 기초다 라고 기술한다. 동이(東夷) 사람들은 너그럽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좋아한다. 그 기반은 땅으로부터 온다. 동이(東夷) 사람들의 성질(性質)은 선(善)하다. 그들은 천도(天道)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선(善)한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東方曰夷夷者抵也言仁而好生萬物 抵地而出故天性柔順易爾御至有君子不死之國)

 

한왕조때 허신(許愼)에 의해 쓰여진 설문(說文)은 동이(東夷)는 대도(大道)를 따르는 선(善)한 사람이다 라고 기술(記述)한다. 동이(東夷)의 관습(慣習)은 너그럽고, 그들은 장수(長壽)하고, 동이(東夷)는 도(道)를 따르고 그리고 그들은 위대했다.(東夷從大大人也)


시전(詩傳)에 따르면 동이(東夷)의 이(夷)는 편안한, 명예(名譽)를 뜻한다. 옛날에 천신(天神)은 동이(東夷)의 주신(主神)인 예(羿)에게 활과 화살을 하사했다. 신(神)은 예(羿)에게 하늘 아래 모든 나라를 도우라고 요구했다. 예는 땅으로부터 모든 괴로움을 제거했다. 예(羿)는 사람들이 이상주의(理想主義)에 꿈을 이루게 도왔다. 지나(支那)의 은왕조(殷王朝) 때 쓰여진 산해경(山海經)에는 선(善)한 사람들의 나라가 북쪽에 위치해 있다 라고 기록(記錄)한다.(君子國在其北)

 

 식민지(植民地)의 유산(遺産)과 역경(易經)

아시아에서 역사적 기록들과 기술(記述)들에서 역사가들과 작가들은 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와 관계가 있는 역경(易經) 교리의 용어(用語)들을 사용해 왔다. 역경(易經)없이 우리들은 역경(易經)과 관계있는 용어(用語)들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다. 지나(支那)의 사마천(司馬遷)이나 왜국(倭國)의 이마니쉬 류 같은 학자들과 역사가들은 그들 자신의 국가적인 목적을 위하여 역사를 왜곡했다.

  

아시아와 미국의 아시아 전문가들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식민지의 유산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왔다.

역경(易經)을 아는 것 없이, 우리는 어떤 역사의 이상주의의 기술(記述)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나(支那)의 자료인 강목(綱目)은 복희씨이목덕왕천하(伏羲氏以木德王天下...역왈제출호진(易曰帝出乎震)(복희는 목(木)의 미덕(美德)으로 나라를 다스리면서 ...역경(易經)에 의하면 복희(伏羲) 황제(皇帝)는 진(震)으로부터 왔다) 라고 기술(記述)한다.

  

역경(易經)에서 목(木)은 동쪽을 가리킨다. 진(震)은 팔괘(八卦) 중에 하나이다. 그것은 동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희(伏羲)는 동쪽으로 부터이고 그리고 그는 동이(東夷) 한국인이다. 고대시대에는 동쪽은 동이(東夷)를 서쪽은 지나(支那)를 의미(意味)했다. 역경(易經)의 이해 없이, 관계있는 역사적 기술(記述)과 문자(文字)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동학(東學)과 태평(太平)을 포함한 많은 아시아 이상주의(理想主義) 교리들과 운동들은 역경(易經)과 관계가 있다.

 

 기원전(紀元前) 99년, 사마천(司馬遷)은 한(漢)나라의 지배자에 의해 거세(去勢) 당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동이(東夷, 한국사람)인 흉노족(匈奴族, 훈족, the Huns)에게 항복(降伏)했던 이릉(李陵) 장군(將軍)을 변호(辯護)했기 때문이었다. 사기(史記)는 전형적(典型的)인 왜곡된 역사 기록들 중에 하나이다. 비록 많은 학자들이 사기(史記)의 역사 기술(記述)에 의존해 오고 있지만. 사기(史記)는 지나(支那)의 가장 잘 알려진 역사 기술(記述)이지만, 그것은 또한 가장 흉악한 역사 왜곡중의 하나이다.

  

고대 조선(朝鮮) 한국은 황제(皇帝)라는 칭호(稱號)를 사용했지만, 사마천(司馬遷)은 의도적으로 왕(王) 또는 영주(領主) 등의 용어(用語)를 썼다. 한왕조(漢王朝) 동안 지나(支那)는 한국의 지나(支那) 지배에 대해서 힘을 행사(行使)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역사 왜곡은 고대 이래로 부터 지나인(支那人)들이 지나(支那)를 지배한 것처럼 역사 쓰기를 강화했다.

 

그들은 20세기 후반에까지 지나(支那)에 있는 지명을 변경(變更)하는 것을, 아마도 그들은 고대(古代) 한국이 지배했던 지역을 숨기는 것을 계속했다. 하지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다른 고대(古代) 한국과 지나(支那)의 자료들을 주의 깊게 비교하여 조사해 보면, 사기(史記)의 역사 왜곡을 밝혀내기가 불가능하지 않다.

 

고대(古代) 한국 사람들이 지나(支那)를 건국했고 대부분의 지나(支那) 영토를 다스릴 동안, 한국 사람들은 또한 칸토(Kanto) 지역[에도(Edo)를 중심으로 주변지역, 동경(東京)]에서 왜국(倭國)의 황실(皇室) 조정(朝廷)을 포함하는 지배층을 형성하기 위하여 왜국(倭國)에 들어갔다.

지나(支那) 황제(黃帝)가 역사(歷史) 기술(記述)들을 불태웠다.

지나(支那)에서 진(秦)왕조의 첫 번 째 황제인 진시황(秦始皇)이 거의 모든 존재하는 정치적인 역사적인 책들을 포함하여 유교(儒敎) 고전(古典) 서적(書籍)들을 불태웠다. 비록 의학서와 농사서(農事書)는 제외되었지만. 그리고 460명의 학자와 역사가들을 죽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진실한 또는 정밀한 일을 쓸 수 없었다. 고대 한국 사람들이 지나(支那)를 지배했다는 정도로 자세히 서술한, 셀 수 없이 귀중한 역사적인 기술(記述)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불태워졌다.

 

 고대(古代) 한국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시각

중화인민공화국의 교육부에서 관리되고 발행된 지나(支那) 학생들을 위한 공식적인 역사책은 동이(東夷), 구이(九夷), 치우(蚩尤) 등의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 비록 그 역사책은 그 단어들은 한국으로부터 취했다고 설명하지 않지만, 간단하게 지나(支那)와 실재로 한국 사람들을 호명(呼名)하지 않고 외부 종족(種族) 사이에서의 역사적인 전쟁들을 암시한다.

 

오직 치우(蚩尤)의 이름을 지나(支那)의 적(敵)으로, 그의 영토를 동쪽 지나(支那)로 위치시킨다.

그는 사실 한국의 황제(皇帝)였다고 설명하기를 거부하지만, 그런 인물의 존재와 그에 따라 지나인(支那人)들이 그 나름대로 그와 전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은 한국 사람들이 언젠가 지나(支那)를 지배했다는 바로 좋은 증거이다.

​지나(支那) 정부의 역사책에 따르면, 황제(黃帝, 기원전 2698-2598)는 치우(蚩尤, 기원전 2707-2512)와 싸웠던 지나(支那)의 선조였다. 황제(黃帝)는 서쪽 지나(支那) 지역인 화쉐에 살았다. 고대 한국 기록인 태백일사(太白逸史)에 따르면, 황제헌원(黃帝軒轅)은 단군조선 한국에서 처벌(處罰) 받았던 동이(東夷) 관리 소전(少典)의 자손이었다. 소전(少典)의 다른 자손은 공손(公孫)이다.

 

모든 황제헌원의 사람들은 소전(少典)의 자손이다.(少典之別派曰公孫...軒轅之屬皆其後也) 지나(支那)의 자료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또한 같은 이야기를 말한다. 황제(黃帝)는 소전(少典)의 자손(子孫)이다. 그의 성(姓)은 공손(公孫)이고 그의 이름은 헌원(軒轅)이다.(黃帝者少典之子姓公孫名曰軒轅)

 


 출처: 저자의 승인을 받고 정종호선생님이 해석하여 올렸던 글을 몇가지 간추려서 소개합니다.



고대 한국(=桓國) 문명의 이상 ♥환단고기♥

2015.07.2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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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환국桓國) 문명의 이상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
안경전 종도사님의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10-2〉

인류 정신사에서 볼 때 사실 근대사는 동방, 한반도에서 열렸습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東學운동 나아가 동학이 못다 이룬 사명을 완성해가는 참동학 운동이 그것입니다. 동학은 환국, 배달, 조선, 삼성조의 황금시절 문화를 이은 동북아 광명사상의 전통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환국에서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한민족의 9천년 역사는 한국 고대문명의 두 가지 핵심단어라 할 신교문화와 광명사상으로 일관된 것입니다.

신교사관, 대한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인간이야말로 천지광명을 체험하고 천지의 뜻과 목적인 이상세계를 성취하는 역사의 주체로 본다>는 점입니다. 대한사관은 역사 해석을 넘어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까지 밝혀주는 시각이요 인식의 새로운 틀입니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에는 반드시 우주관·신관·인간관·인생관 등 그 문명을 만든 주인공들의 정신문화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종합해서 시대를 바라보고 역사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태곳적 황금시절인 환국의 전통에서 실로 소중했던 지혜들―우주관, 인간론, 신관, 인류문화의 구성원리, 우주수학의 체계, 우주수학을 담은 천부경 81자의 참뜻 같은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대 환국의 역사 자체는 물론 나아가 환국과 서양 수메르 문명의 관계, 동서문명의 총체적인 참모습을 알 수 있게 됩니다.

 

◎ 유교가 환국桓國에서 유래됐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환국은 인류 최초의 국가이자 시원문명으로 한마디로 황금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고대 문화권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은 광명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우주의 대大광명을 직접 체험하며 사는 것을 지향했고 이를 삶의 가치 가운데 가장 중시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다스리며 광명한 삶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인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통치자도 환인桓仁이라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환국문명에서 갈려나간 수메르 문명에서도 최고 지도자를 ‘인’이라고 했습니다.

유교는 그보다 훨씬 뒤에 공자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는 본래 중국 은나라의 제후국인 송나라의 왕 미자의 후손입니다. 혈통을 따져 올라보면 그는 정통 동이족입니다. 그런데 이미 동서양에 두루 잘 알려진 것처럼 공자의 으뜸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仁 사상입니다. 이것이 유교의 핵심입니다. 바로 이 인 사상이 동방의 환국-배달-조선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자는 자신의 생각과 학설에 대해 스스로 ‘술이부작述而不作’(『논어論語』 「술이述而」)이라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새로 지은 게 아니라 “옛 것(=일찍이 배달과 고대조선 동이족이 갖고 있던 예악문화)을 좋아해서 그 문화의 정수를 정리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공자 자신의 이 말에서 우리는 유교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 고대 한국문명이 유·불·선을 넘어 수메르 기독교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근거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류 최초 문명인 환국 사람들은 천신天神을 섬겼습니다. 천신은 하늘의 하나님이란 뜻이고 동방에서는 전통적으로 상제라 불렀습니다. 천신, 상제의 뜻과 가르침이 정치, 교육, 문화 등 당시 모든 이들의 삶의 이념이고 규범이었습니다. 그러한 뜻과 가르침은 상제가 계시啓示해준 「천부경」에 집약돼 있습니다. 81자로 이뤄진 천부경은 인류 문명사 최초의 경전입니다. 인류의 문화와 사상과 영성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준,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첫 번째 문화혁명을 낳게 한 기폭제였습니다. 천부경은 1에서 9에 이르는 수數를 기반으로 우주의 구성과 변화원리, 하늘땅과 인간의 관계,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 등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천부경은 동양의 사상적 원천이라 할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모태가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서문명이 모두 천부경을 통해 계시된 ‘우주의 수의 법칙’으로 구성됐습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문명도 종교도, 특히 저 기독교의 원천이라 할 수메르 문명 역시 천부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 문명의 근원이라 하는 수메르 문명은 일찍이 환국 사람들이 천산을 넘어가 개척했는데 여기서 환국문명이 바로 천부경에 바탕해 이뤄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의 정치학자이며 현 오마바 대통령의 주요 자문역인 이홍범 박사의 저서 『아시아 이상주의』에서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 동서문명이 천부경 혹은 환국 등에서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는 어떤 것들입니까

▶천부경이 드러내는 우주 수학의 비밀에서 3과 7은 인간의 혼(soul)과 신(spirit)을 구성하는 천지의 생명원리로 파악됩니다. 당장 수메르 문명에 이 두 가지 숫자를 중시한 여러 흔적들이 나타납니다. 수메르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로 피라미드 문화의 원형으로 꼽히는 지구라트가 있습니다. 이는 이미 9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하늘에,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낸 천제天祭문화의 유산입니다.
 

그 제단 구조를 자세히 보면 먼저 제단이 일곱 계단으로 돼 있습니다. 또한 일곱 주신主神들에게 제를 지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저 유명한 바빌론 궁전의 천상天上정원도 일곱 단段으로 돼 있습니다. 이러한 수메르 문명의 일곱 주신 사상은 동방의 전통적인 칠성七星사상과 호응합니다.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인디언 박물관에 가보면 한 원주민 추장의 옷이 전시됐는데 그 날개 깃털이 77개입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요. 우주 수학의 눈을 통해서 그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3위 일체와 그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이삭-야곱의 3대代 문화,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가 삼신三神을 만나고 아기를 낳아서 이스라엘 문명이 시작됐다는 구약의 기록 등에서 우리는 3수 문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야곱이 열두 명 아들을 두었고 이들이 12지파를 구성한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섰던 환단고기에서 전해주는 환국의 12개 문명국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동서의 종교문명, 인류의 4대 문명 등은 그 구성원리가 환국 때 경전인 천부경, 그 천부경이 보여주는 우주 수학에서 왔습니다. 당연히 천부경을 모르면 어떤 종교든 문명이든 그 뿌리와 성격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 고대 한국문명이 인류문화에 “이상주의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이상理想이란 어떤 것입니까

▶환국시대부터 내려온 천부경의 천부天父사상과 신교神敎의 광명문화에는 우주의 틀을 보게 하는 우주사상과 함께 인간과 종교의 근본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깨달음의 진리를 전하는 천부경에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큰 인간이란 뜻의 태일太一사상입니다.

신이 현상계에 자기 모습을 나타낼 때는 삼신三神으로 드러나는데 실제로 그 삼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하늘, 땅, 인간입니다. 이 셋이야말로 살아 있는 삼신인 것입니다. 이렇게 실체화된 삼신은 서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일체一體 관계에 있는데 이를 천부경에서는 천일天一 지일地一 인일人一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인일은 천지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모신 인간에 대한 고대문명의 뛰어난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태일의 참뜻이 나옵니다. 본래 천지부모는 당신의 궁극의 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순환하는데, 바로 그 천지의 이상을 실현하는 사람이 태일입니다. 천지부모와 하나 되어 미래 이상문명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참된 자녀인 것입니다. 태일이야말로 이상적인 인간으로 인류 역사와 문명의 방향을 한없는 광명으로 이끄는 주인공이요 주체입니다. 이러한 태일사상이 온 인류의 이상이 되어 모든 사람이 태일이 되기를 지향하는 삶, 그것이 한국 고대문명이 보여주는 이상주의 문화입니다.
 

◎ 태일에 대해 좀더 설명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세계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서양 관점에서 보아 인류 근대사의 출발점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질문명의 발달사라는 시각에서 본 것입니다. 인류 정신사에서 볼 때 사실 근대사는 동방, 한반도에서 열렸습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東學운동 나아가 동학이 못다 이룬 사명을 완성해가는 참동학 운동 그것입니다.

동학의 메시지는 시천주侍天主, 즉 동방땅에 오시는 참하나님을 모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온 인류가 후천개벽을 넘어 저 옛날 환국 사람들이 누리던 천지광명 가득한 새 세상을 맞게 됩니다. 그러니 옛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천지의 주인(天主)이신 상제님을 받들고 앞날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환국, 배달, 조선 삼성조의 황금시절 문화를 이은 동북아 광명사상의 전통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동학의 주창자 수운 최제우는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무극대도無極大道의 가르침을 받고 고대 이후 인류가 잊고 살았던 제천祭天문화를 다시 열었습니다. 상제님이 새로운 가을개벽 세상을 여신다, 상제님이 세상에 오셔서 직접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메시지가 동학에 의해 선포됐습니다. 가을세상, 가을개벽 세상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 아닌 정신문화의 역사에서 볼 때 이 같은 동학의 출현이야말로 근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구분선이 될 것입니다.

동학이 선언한 새 세상에서는 주문수행이 보편화되고 모든 사람이 신성한 인간으로, 위대한 철인哲人으로 거듭나 광명한 삶을 살아갑니다. 광명한 삶을 살아가는 천지의 아들·딸, 그가 바로 태일이며 다른 말로 대한大韓이고 나아가 홍익인간弘益人間입니다. 고대 한국문명에서 제시된 이상적 인간형인 홍익인간은 ‘천지의 웅대한 뜻인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태일이 되기를 꿈꾸고 천지의 꿈을 이루어 나가려는 이들이 바로 참동학의 일꾼들입니다. 안타깝게도 동학은 그 의미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정부와 외세의 폭압에 의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후천개벽 소식을 전하고 이상적인 새 세상을 건설하는 사명을 증산도가 이어받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민족 9천년 역사·문화의 결정체인 증산도를 참동학이라 하는 것입니다.
 

◎ 한국의 고대문명이 그렇게 오래되고 우수한 것인데도, 대다수 한국인이 그러한 고대 한국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인들은 자기 역사가 얼마나 자랑할 만한 것인지 실제로 잘 모릅니다. 가령 아직도 민간신앙 등과 함께 남아 있는 도교道敎의 원형도 동방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것인데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진시황이 신선이 산다는 곳을 찾도록 대규모 탐사대를 여러 번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탐사대의 목적지가 바로 한반도였습니다. 제주도에는 이 탐사대와 관련된 유적지도 있습니다. 도교의 원형이 되는 신선술神仙術이 한국에서 유래했음을 알게 하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유교를 개창한 공자 역시 동이의 땅, 즉 한반도를 군자가 사는 곳이라며 그리워했는데 이는 『논어』에 기록된 사실史實입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중국문화의 연원이 사실은 옛 한국문명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엄연히 기록으로 나와 있는 고대 한국문명의 존재와 그 우수성에 대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알지도 못합니다. 알고 있다 해도 반신반의합니다. 이처럼 슬픈 현실은 한마디로 중국 중화사관과 일본 식민사관의 역사왜곡이 끼친 악폐에서 생겼습니다. 악의惡意 가득 찬 역사 날조와 집요한 왜곡작업이 오늘 역사를 보는 한국인의 눈을 가리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 중화사관, 식민사관이란 어떤 것인가

▶중화사관은 중국이 처음부터 문명의 중심이었으며 주변 족속들은 모두 오랑캐였기 때문에 중국의 문화가 중국 주변으로 일방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앞에서 본 역사의 증거들과 배치됩니다. 중국문명의 태동에는 홍산문화로 대변되는 북방문화와 동이족 문화가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한국에 심어놓은 식민사관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도록 만들었습니다. 20세기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일제는 한국의 정신, 역사, 문화, 전통을 지극히 열등한 것으로 변질시키려 했습니다. 식민지배를 정당화, 영구화하려는 획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집요하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폄하하는 작업을 지속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인들 사이에는 자조적인 역사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고대 한민족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도외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 관변사학자들이 주장하듯 단군조선의 역사는 신화이거나 기껏해야 부족국가들의 연맹이었을 따름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습니다. 중국에서 도망쳐온 한낱 망명자인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BCE 194)과 그것을 점령하고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한사군 등 날조된 역사에서 한국사가 비로소 본격 시작됐다는 그릇된 인식도 고착됐습니다.

식민사관에 의해 벌어진 더 큰 패악은 그처럼 비뚤어진 역사인식의 틀을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이 고스란히 이어받아 한국사회에 계속 통용하게 하고 후손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7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강단사학자들은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한국 역사의 틀을 견지합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떠들어온 역사가 잘못됐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동안 자기들이 차지해온 자리와 기득권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쓴 초중고 교과서가 어떻겠습니까. 중국과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의 역사교육을 맡은 강단사학자들이 그것을 그대로 한국인에게 학습케 합니다. 당연히 한국인들이 고대 한국문명에 대해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고대사가 사료가 있고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도 있는데 왜 공식 역사로서, 특히 학문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 한국은 물론 세계 역사학의 주류 역시 앞서 말한 식민사관 및 서구에서 생겨난 실증주의 사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는 물질의 문명사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것이 응집돼 있습니다. 정치, 종교, 건축, 생활문화, 자연관, 우주론, 인간의 내면세계, 마음과 영성문화, (우주에 창조주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신관, 경제와 화폐문제, 정치제도, 국가간 교류와 이해관계 등등…. 역사를 제대로 보고 알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살펴보는 총체적인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역사학이란 어떤 것입니까? 유적과 무덤 발굴, 거기서 나오는 결과로만 역사를 판단합니다. 한마디로 유물론에 입각한 실증주의 사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편협한 시각이고 옳지 않은 방식입니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에는 반드시 우주관·신관·인간관·인생관 등 그 문명을 만든 주인공들의 정신문화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종합해서 시대를 바라보고 역사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태곳적 황금시절인 환국의 전통에서 실로 소중했던 지혜들―우주관, 인간론, 신관, 인류 문화의 구성원리, 우주 수학의 체계, 우주 수학을 담은 천부경 81자의 참뜻 같은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대 환국의 역사 자체는 물론 나아가 환국과 서양 수메르 문명의 관계, 동서문명의 총체적인 참모습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세계 사람들이 고대 한국문명이 세계 최초라는 점을 인식 혹은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것은 기존 역사관의 한계 때문입니다. 근대 역사관은 크게 19세기에 등장한 실증주의 구舊사학과 20세기에 전개된, 역사가의 적극적인 해석을 중시하는 신新사학으로 구분됩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철저한 문헌고증과 다양한 해석 등으로 역사학에 많은 성과를 갖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두 역사관은 이제 본질적인 한계에 부딪혔고 인류는 새로운 역사관이 필요한 시점을 맞고 있습니다. 이는 특히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던 환국-배달-조선 등 고대 한국문명을 올바로 해석하는 데 더더욱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해석하던 기존 사관들을 대신할 대안 같은 것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 인류에게는 기존 역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과 서, 과거와 미래가 소통하고 융합하는 이른바 ‘대통일의 역사학’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신교사관 혹은 대한사관大韓史觀입니다. 9천년 역사를 가진 인류 공통의 문화유산인 신교神敎를 바탕으로 혹은 신교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구사학과 신사학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동시에 장점은 살리는 제3의 새로운 역사관, 그것이 신교神敎사관입니다. 신교는 환국시대 이래 환족의 이동과 함께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나가 인류 정신문화의 뿌리가 되었던 문화이고 종교이고 사상입니다. 고대문명에 대한 연구는 신교의 역사관으로 볼 때 그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당시의 생활문화를 바탕으로 지금 남아 있는 문화 유적과 기록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고대문명이 세계 최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저 홍산문화가 기존 역사관으로는 쉽게 파악되거나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우하량에서 발굴된 돌무덤, 신전, 제단의 유적들, 지구촌 여러 곳의 지구라트와 피라미드들, 미국의 몽크스마운드나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의 고인돌도 모두 신교문화의 정수精髓인 천제를 이해할 때 그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장 한국의 강단사학계에서도 신교의 우주론, 인간관, 신관을 근거로 홍산문화를 해석하는 학자가 아직은 거의 없습니다.

신교사관, 대한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인간을 단순히 신의 피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야말로 천지광명을 체험하고 천지의 뜻과 목적인 이상세계를 성취하는 역사의 주체로 본다>는 점입니다. 대한사관은 역사 해석을 넘어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까지 밝혀주는 시각이요 인식의 새로운 틀입니다. 나는 대한사관이야말로 지난 오랜 세월 지구촌 인류를 괴롭혀온 식민사관과 대결사관, 유물주의사관과 실증주의사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고 있습니다. 이 대한사관에 대해서 언젠가 반드시 따로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세계는 그렇다 쳐도, 한국정부는 왜 고대 한국문명이 세계 최초라는 점을 인식 혹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까

▶먼저 한국의 역사문제를 대하는 한국 정부의 입장, 그 생생한 실정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중국은 예로부터 오랫동안 중국 민족이 하늘과 상제님의 대행자를 상징하는 용봉龍鳳문화의 원조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중국과는 아무 관계없던 저 만리장성 북쪽, 동방족의 생활 터에서 뜻밖의 유적과 유물이 발굴됐습니다. 인류 문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홍산문명 혹은 요하문명이 그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중국인들이 주장하던 5천년 전의 용봉문화 흔적보다 훨씬 앞선, 무려 7천년 이상 된 용봉문화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됐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중국 정부와 학자들은 재빨리 ‘만리장성 밖의 북방문명도 중국문명’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 맞춘 이론적 배경도 함께 마련하는 작업도 해나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중국은 55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입니다. 중국 정부는 이들 소수민족의 독립을 막고 계속 중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둬두기 위해 <한족 아닌 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도 모두 중화문명권에 속한다>고 선언하고 여러 가지 정책들을 만들고 실제 그것을 추진해 왔습니다.

먼저 1980년 이래 중국의 서북쪽 위구르족 지역이 중화문명권이라 주장하며 위구르족이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해 왔습니다. 이것이 서북공정西北工程입니다. 또 1986년에는 티베트 역시 중국의 한 지방정부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무력으로 점령했습니다. 그러고는 티베트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남공정西南工程입니다. 나아가 중국은 최후의 야심작으로 2002년 2월부터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시작했습니다. 만리장성 동북쪽의 고구려, 발해 등 대한민국의 옛 영토였던 넓은 지역이 과거 중국의 지방정부 영역이라고 역사를 왜곡하면서 그 또한 중화문명권으로 편입시키는, 후안무치한 작업을 벌였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과거 노무현 대통령 때 한국정부에서 적지 않은 국가 예산을 배정해 《동북아역사재단》을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소속된 학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쪽으로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정부가 보여주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현재 한국의 사학계와 교육계, 관계官界는 그동안 식민사관에 매달려온 이들이나 그런 사람들에게 교육받고 영향을 받은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류를 이룬다는 것은 권력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까닭에 역사학이나 역사 주제와 관련해 (설사 그 내용이 진실이더라도) 그들과 배치되는 이론이나 주장은 아예 공식 교육과정에 채택되지 못합니다. 반면 식민사관에서 왜곡된 내용만이 공교육을 통해 국민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되고 있습니다.
 


◎환국-배달-고대조선 이후 고대 한국문명은 어디로, 어떻게 연결됩니까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세워진 환국에서 시작된 고대 한국문명은 배달을 거쳐 단군조선까지 무려 7천여년 동안 활짝 꽃을 피웠습니다. 기원전 2333년 건국된 이래 무려 2,047년 동안 존속했던 단군조선은 서서히 힘을 잃고 결국 해모수라는 인물이 세운 북부여北夫餘로 국가의 맥이 이어졌습니다.

북부여가 비록 나라의 맥을 계승했지만 단군조선의 전 영역을 물려받지는 못했습니다. 한민족의 활동무대는 이때부터 대륙에서 점차 동쪽으로, 그리고 한반도 쪽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만주지역에 북부여가 자리잡고 한반도에는 낙랑국, 남삼한, 옥저, 동예 등 여러 나라가 난립했습니다. 이것을 한국사에서는 열국列國(여러 나라)시대라 합니다.

약 200년 나라를 끌어간 북부여는 나중에 고구려로 이어지고 잘 알려진 것처럼 고구려를 비롯해 백제, 신라, 가야 등 4국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런 뒤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이는 다시 고려, 조선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조선말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가 해방되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환국에서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한민족의 9천년 역사는 한국 고대문명의 두 가지 핵심단어라 할 신교문화와 광명사상으로 일관된 것입니다. 악의에 가득 차고 편협한 중화사관이나 식민사관, 유물론적 실증주의사관 같은 틀로는 그 면면한 역사의 진실을 결코 제대로 알아낼 수 없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신교사관, 대한사관으로 한국의 고대문명을, 나아가 근대사와 오늘을 조망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한민족은 물론 온 인류가 지나온 역사를, 그리고 다가올 내일까지 제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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