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e삼성의 저주는 끝났을까?

일취월장7 2016. 5. 17. 10:49

e삼성의 저주는 끝났을까?

2016.05.09 13:09:43


[이재용 체제 삼성 2년 ①] '이건희의 반도체'와 '이재용의 스마트폰'

             

삼성 3세 경영은 이미 현실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실질적인 총수다. 2014년 5월 10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부터다. 이 회장이 살아있으므로, 재산 상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경영권 승계는 돼 있다.

진보 개혁 진영은 봉건적인 재벌 총수 세습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하지만 새로운 기업 지배 구조에 대한 합의는 없는 상태다. '이 씨 일가 세습 체제가 아닌 삼성'에 대한 막연한 청사진조차 없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진보 개혁 진영의 이론적, 정책적 무능과 맞물려 있다. 정치적 상상력이 모자랐던 탓일 수도 있다. 어찌 됐건, 그 역시 삼성 3세 경영을 현실로 만든 중요한 요소다. 

오는 10일이면, 이 회장이 쓰러진 지 만 2년이 된다. 그간 말만 무성하던 '이재용의 경영 능력'이 모습을 드러낸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 경제의 진로와 관계있는 몇 가지 대목을 점검했다. 

반도체의 성공, 초보 총수의 자신감 

잠시 21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은 와병 중인 이건희 회장의 전성기, 바로 1995년이다. 그보다 2년 전엔 신경영 선언이 있었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라며, 이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섰다. 그 전에는 사실상 은둔 상태였다. 

이건희 회장의 본격적인 총수 행보는, 정확히 반도체 사업의 성공과 맞물려 있다. 반도체 사업은,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시작했다. 이병철 창업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내 적자였다. 창업자가 사망하고 이 회장이 총수가 된 1987년 이후,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1993년부터 성공 궤도에 올랐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운영 체제 보급과 함께, PC(개인용 컴퓨터) 메모리 업그레이드 수요가 폭발했다. 삼성 반도체 수출 실적 역시 수직 상승했다. 

이 회장의 자신감도 함께 치솟았다. 1995년 베이징 발언은 그 정점이었다.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라고 했다. 당시 현직이었던 고(故) 김영삼 대통령이 진노했다. 삼성에 대한 세무 조사가 거론됐다. 윈도95 운영 체제 덕분에,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판매로 돈을 쓸어 모으던 때였다. 세금을 세게 물릴 수 있는 명분이 뚜렷했다. 삼성은 납작 엎드렸다. 이 회장의 공개 발언 역시 뚝 끊어졌다.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알려진 이 회장이 회사 밖으로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쏟아낸 시기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다.

삼성이 고개를 숙였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동차 사업 진출이다. 정부의 협조가 절실했다. 

삼성 반도체 착시 효과와 김영삼 정부 

청와대 역시 마냥 화를 낼 수는 없었다. 1995년은 한국이 OECD 가입 신청을 했던 해다. 5.18 특별법이 통과됐고, '역사 바로 세우기'가 진행됐던 해였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김영삼 정부 역시 이때가 절정이었다. 그걸 뒷받침할 만한 경제 지표가 필요했다. 1995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8.9%였다. 대통령 입장에선 자랑스러운 성적표였다. 1990년대 초 6% 안팎이던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린 주역이 삼성 반도체였다. 대통령이 아무리 불쾌해도, 삼성과의 공생 관계는 끊을 수 없었다. 

이후 역사는 다들 아는 대로다. 이듬해인 1996년, 삼성이 수출 주력 품목이던 16MD램 반도체 가격이 폭락했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PC에 윈도95 운영 제체를 설치한 사람들이 당분간은 메모리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을 터였다. 반도체 호황에 가려져 있던, 한국 경제의 불안한 민낯이 드러났다. 1995년의 경제 성장률은 '반도체 착시 효과' 때문이었다. 1996년 경제 성장률은 7.2%로 떨어졌고, 다음해인 1997년 가을에는 외환 위기가 닥쳤다.

삼성은 정부의 협조 속에서 자동차 사업에 진출했지만, 실패했다. 외환 위기 속에서 천문학적 부실을 털어내는 과정은, 새로운 비리가 잉태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분식 회계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재무 부서의 힘이 막강해졌다. 그전까지는 여러 참모 중 한 명이었던 이학수 전 부회장이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됐다. 이 전 부회장은,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고백 이후 타격을 입는다. 2011년 삼성물산 고문을 끝으로, 삼성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스마트폰만 남았다 

1995년 반도체 호황 이야기를 길게 했다. 이제 2016년 스마트폰 사업을 살필 차례다. '이건희의 반도체'와 '이재용의 스마트폰'은 닮은 점이 있다. 둘 다 아버지가 씨앗을 뿌린 사업이다. 반도체는 이건희의 아버지인 이병철이 시작했다. 스마트폰은 이재용의 아버지인 이건희가 궤도에 올렸다. 또 경영권 승계 초기 수익원이라는 점도 닮았다. 앞서 설명했듯, 삼성 반도체는 이건희 회장이 총수가 된 직후부터 수익을 내기 시작했고, '신경영' 선언으로 경영 전면에 나선 직후 호황을 맞았다. 스마트폰 역시 지금 삼성을 먹여 살리는 품목이다.

경제 지표를 앞장서서 끌어올린다는 점도 비슷하다. 지난 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4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13대 주력 수출 품목 가운데 11개 품목의 수출이 지난해 같은 달보다 감소했다. 섬유류(-10.3%), 석유 제품(-10.8%), 반도체(-11.5%), 컴퓨터(-13.7%), 석유 화학(-14.5%), 자동차 부품(-15.4%), 일반 기계(-15.6%), 철강(-17.4%), 자동차(-18.3%), 가전(-25.7%), 평판 디스플레이(-26.3%) 등이다. 선박(25.2%)과 무선 통신 기기(3.2%)만 증가했다. 선박 수출은 과거에 수주한 물량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이며, 올해 수주 규모는 평년의 20분의 1 수준이다. 따라서 무선 통신 기기, 즉 삼성 스마트폰만 선전하고 있는 셈이다. 1995년에는 반도체 착시 효과가 있었다. 지금은 삼성 스마트폰이 수출 효자 품목이다.

최근 발표된 삼성의 올해 1분기 실적을 보자. 대부분의 삼성 계열사가 적자 또는 제자리 수준 실적을 냈다. 오로지 삼성전자만 성장했다. 삼성전자는 1분기 매출 49조7822억 원, 영업 이익 6조6758억 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1분기와 비교하면 매출은 5.65%포인트, 영업 이익은 11.65%포인트 증가했다.  


스마트폰을 다루는 무선 사업(IM) 부문의 실적 덕분이다. 무선 사업 부문은 매출 27조6000억 원, 영업 이익 3조8900억 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1분기 대비 매출은 6.6%포인트 증가했고, 영업 이익은 42%포인트 늘었다. 무선 사업 부문 영업 이익은 2014년 2분기 4조4200억 원을 기록한 이후 가장 많았다. 갤럭시S7가 전작보다 1개월 정도 빨리 출시된 영향이 반영된 실적이다. 그걸 고려해도, 확실히 좋은 성적표다. 

삼성, '예상된 문제'는 잘 푼다 

삼성 스마트폰에 대한 그간의 불안한 전망을 깨는 것이라서 더 눈에 띄는 성과다. 스마트폰 시장, 특히 고가폰 시장은 이제 포화 상태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또 관련 기술이 평준화됐다. 중국의 후발 업체가 애플 및 삼성의 고급 제품을 엇비슷하게 흉내 낸다. 시장을 선도했던 애플이 최근 고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애플과 시장이 겹치는 삼성 역시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었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1분기 실적은 이런 전망을 깬다.


삼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이자 관찰자인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삼성은 결과가 예상되는 일에 대해서는 강하다." 

스마트폰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시장 포화, 기술 평준화 등의 한계는 IT(정보기술) 업계에서 자주 거론돼 왔다. 그러니까 '예상된 문제들'이었다. 답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중저가 제품을 강화해야 한다. 인도 등 신흥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관건은 실행력인데, 이 대목에선 삼성이 애플보다 한수 위다. 

삼성의 스마트폰 사업은 2014년 2분기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는 '예상된 문제'였으므로, 삼성은 정해진 답을 찾아서 과감하게 실행했다. 결국 반등에 성공했다.

'객관식'에만 강한 삼성, 이제 '서술형' 풀어야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해운 및 조선 산업이 구조 조정 도마 위에 올랐다. 부실 기업 목록이 길게 더 남아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중견 재벌 상당수가 재무 건전성이 나쁘다. 최상위 재벌 일부만 안전한데, 실은 그조차도 미덥지가 않다. 1위 재벌인 삼성은 스마트폰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구조다. 스마트폰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나? 중저가 스마트폰 시장, 신흥 시장도 곧 포화할 텐데, 그럼 어떻게 할 건가? 이건 정해진 답이 없는 질문이다.

김상조 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 

"삼성은 '미지의 충격'에 대해서는 약하다." 

'예상된 문제'가 아니면, 제대로 대응 못한다는 말이다. 객관식 혹은 단답식 문제만 잘 푸는 수험생에 빗댈 수 있다. 갑자기 서술형 문제가 출제되면, 당황한다.

이건희 회장이 총수 자리를 물려받았던 1987년, 혹은 경영 전면에 나섰던 1993년이라면, 주로 객관식 문제만 나왔었다. 당시 한국 재벌은 추격자였다. 선진국 기업이 이미 지나간 길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잘 따라가면 됐다. 얼마나 부지런히, 과감하게 따라가느냐가 승부처였다. 실행력이 유난히 발달한 기업 문화는 그 결과물이다. 

하지만 지금 이재용 부회장 앞에 놓인 질문은 서술형이다. 몇 가지 답안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다. "스마트폰 이후엔 무엇으로 먹고 살 건가?"라는 질문의 답을, 백지 위에 적어야 한다. 

객관식 시대를 살았던 이건희 회장이 오히려 더 나았을 수도 있다. 이 회장은 '반도체 이후엔 자동차'라는 답을 적어 냈었다. 틀린 답이었다. 자동차 사업은 실패했다. 하지만 아예 백지를 내는 것보다는 낫다. 

첨단 기술 산업은 성숙기가 짧다. 스마트폰 사업의 성숙기를 연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쇠퇴기가 곧 닥친다. 스마트폰으로 돈을 벌고 있을 때,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야 한다. 유일하게 수출이 늘어난 품목, 스마트폰마저 쇠퇴기에 접어들면, 투자처에 대한 답을 찾아봤자 소용없다. 투자할 돈이 없다. 

반도체 성공 경험에 갇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다. 바이오시밀러 부문에 투자했다. 차량 전장(자동차 전자 장비) 사업과 가상 현실(VR) 분야도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엉거주춤하는 모양새다. 바이오시밀러란, 바이오 의약품의 복제약이다. 바이오 의약품은 생물체에서 유래한 세포 등을 원료로 만든 의약품인데, 이걸 복제하는 건, 화학 합성 의약품 복제보다 까다롭다. 바이오시밀러를 신사업 품목으로 고른 배경은, 반도체 사업의 성공 노하우를 적용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자본 집약적인 성격 등 메모리 반도체 사업과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지난 2010년에 출간된 <한국 경제, 기회는 어디에 있는가?>(이지효 지음, 북포스 펴냄)에도 같은 설명이 있다. 경영학과 교수 중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꽤 오래 전부터 삼성이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검토한 건 사실인 듯하다.

삼성의 바이오시밀러 사업은, 현재 상장을 추진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가 담당한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반도체로 치면 파운드리(foundry)에 해당한다. 반도체 회사 가운데 퀄컴처럼 설계만 하는 곳은 팹리스(Fabless)라고 한다. 팹리스가 설계하면, 파운드리에 제조를 맡긴다. 위탁 제조 업체인 셈이다. 대만(타이완)의 TSMC가 유명하다. 삼성바이오에피스가 팹리스 격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독자 설계 능력도 있고, 파운드리 사업도 한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삼성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로 팹리스와 파운드리 가운데 하나로 자기 역할을 고정시키지 않은 점을 꼽는다. 그러나 팹리스 역할이 약한 점은 한계로 꼽힌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 비메모리 부문이 미성숙했다는 점은 그래서 생긴 문제다.


삼성이 추진하는 바이오시밀러 사업 역시 같은 한계가 지적된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삼성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역할, 반도체로 치면 파운드리 유형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하청 생산'이라는 안전한 길이다.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당시에 비해 삼성의 지금 위상이 훨씬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보수성은 더 두드러진다.


또 다른 신규 투자처로 꼽히는 차량 전장 및 가상 현실(VR) 분야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가상 현실은, 말 그대로 간을 보는 수준이다. 차량 전장은 지난해 말에야 사업 팀이 꾸려졌다. 박종환 삼성전자 부사장이 전장사업팀장을 맡았다. 박 팀장은 삼성에서 자동차를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임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제 막 팀을 꾸린 상태라서, 본격적인 투자까지는 갈 길이 멀다. 게다가 차량 전장은 과거 반도체 투자처럼 선발 업체에 도전하는 과감한 투자라기보다 등 떠밀린 투자에 가깝다. 구글 등 글로벌 IT 업체들이 너도나도 자동차 사업에 진출한다. LG전자 역시 차량 전장 사업에 오래 전에 진출해서 성과를 내고 있다.  

'e삼성' 실패 트라우마 

신규 투자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반면, 계열사 매각과 직원 감원은 적극적이었던 게 지난 2년이었다. 한마디로 축소 경영이다. 세계 경제 상황이 불안한 탓도 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유난히 축소 지향이라는 점은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예컨대 무리한 투자를 경계하는, 재무 중심 관점을 지닌 경영 전문가들도 비슷한 생각이다. 

이 부회장은 왜 그럴까. 흔히 나오는 해석이 2000년대 초 'e삼성' 실패에 따른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다. 김상조 교수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실패를 두려워해서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려는 성향이 그 때문에 생긴 듯 하다는 말이다. 철저한 보호 속에서 자란 이 부회장에게 젊은 시절의 실패 경험, 그에 따른 사회적 비난은 대단한 상처였을 게다. 하지만 과감한 결정을 계속 미루기만 한다면, 새로운 비난을 살 수 있다. 

최근 <조선일보>가 흥미로운 기사를 냈다. 이 부회장이 주도한 삼성 사옥 재배치 작업을 비판한 기사다. 지난 2008년에는 삼성 계열사들을 서울 서초동 사옥에 모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계열사들을 경기도 성남시 판교, 서울 서초구 우면동, 중구 태평로 등으로 보내고 있다. 이사 비용만 해도 수백억 원대라는 설명이다. 새로운 사옥에 적응해야 하는 직원들의 부담 역시 보이지 않는 비용이다. 반면, 서초동 사옥은 빈 사무실이 많아졌다. 그 역시 낭비다. 아울러 삼성 서초동 사옥을 보고 가게에 투자했던 인근 상인들의 원성도 높아진 상태다. 돈 쓰고 인심 잃은 셈인데, 그래서 얻은 게 무엇인지는 알기 힘들다. 현장 경영을 강화한다는 명분이지만, 직원들은 갸우뚱한다. 

우왕좌왕하는 사옥 재배치 작업은 이재용 체제 삼성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결정의 근거를 조직 구성원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왜 이런 혼란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없다는 점과 맞물려 있으므로, 문제가 된다. 경영진이 바뀌면 흔히 겪는 일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이건희 회장 역시 1993년 신경영 선언과 함께 경영 전면에 나섰을 때 다양한 시행 착오로 직원들을 헷갈리게 했다. 7.4제(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 실시를 둘러싼 혼란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당시와 지금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1990년대 초는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였다. 반도체가 유독 큰 성공을 했지만, 삼성의 다른 계열사 역시 성장세였다. 1997년 외환 위기 전까지는 직원 수 역시 계속 늘어났다. 직원들이, 그리고 다른 이해관계자가 혼란을 감내할 여유가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 사업을 제외하면, 삼성의 거의 모든 사업이 뒷걸음질하고 있다. 제자리걸음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진다. 지속적인 감원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 스마트폰과 반도체 이후에 대한 청사진마저 없다면, 직원들의 일상과 관련된 중요 결정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조직의 안정성이 무너질 수 있다. 미래 가치와 연동하는 주식 가격 역시 불안해진다. 이는 다시 국민 연금 등 연기금의 부실 등 다양한 위험으로 이어진다.

박소정, 박상인 서울대학교 교수가 각각 삼성전자 주식 가격 급락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시뮬레이션(모의실험) 방식으로 연구한 적이 있다. 반도체 부문 수익이 낮은 상태에서 스마트폰 사업이 타격을 입는 경우를 가정했다. 반도체 산업은 경기에 민감하므로, 개연성이 있는 경우다. 스마트폰 사업 부진을 메울 수 있는 새로운 수익원이 없다면, 일파만파 위험이 번진다. 일종의 시스템 리스크다. 

이 부회장이 'e삼성'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대가 치고는, 너무 큰 비용이다.



이재용 테마주, 넌 '대박', 난 '쪽박'?

2016.05.12 10:40:54


[이재용 체제 삼성 2년 ②] 테마주 유행에 휩쓸린 1등 기업

             

정치인 안철수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안철수 테마주'가 덩달아 뜬다. 지난 총선 다음 날 오전에도, '안랩' 주가가 일시적으로 올랐었다. 정치인 안철수에겐 안 좋은 일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집권하면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할 것이라는 믿음이 반영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안 대표가 대권에 가까워질 때마다 '안랩' 주가가 오르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테마주'와 검은 기대

지난 2012년 초까지 300원대였던 미래산업 주가가 같은 해 9월에는 2000원대까지 치솟았다. 안 대표가 지난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에서 '정문술 석좌교수'를 지냈다는 점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미래산업 창업자 정문술 씨가 안 대표와 가까운 사이일 것이라는 믿음이 주가를 6배 이상 끌어올렸다. 정작 정 씨는 안 대표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 닷새 전에 갖고 있던 미래산업 주식 전부를 팔아치웠다. 그래서 400억 원대 현금을 마련했다. 이와 동시에 미래산업 주가는 폭락했다. 이 회사 주가는 현재 400원대다.

'정치인 테마주'는 이밖에도 많다. 최근에는 '반기문 테마주'도 거론된다.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의 동생 반기호 씨가 부회장을 맡고 있는 보성파워텍이 대표적이다. 반 총장이 오는 25일 열리는 제11회 제주포럼에 참석할 것 같다는 보도가 나오자 주가가 뛰었다. 반 총장이 국내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힌 적은 없다. 정치에 뛰어든다한들 꼭 집권한다는 보장도 없다. 만약 권력을 잡고 나서, 동생이 다니는 회사에게 이권을 몰아준다면 탄핵 사유가 된다. 그런데 주가가 뛴다. '반기문 테마주' 목록에는 반 총장과 친하다고 알려진 동창이 사외이사로 재직 중인 회사도 있다. 단지 반 총장의 고향 근처에 본사가 있다는 이유로 '반기문 테마주'에 포함된 기업도 있다. 

설마하니 한국 정치가 그 정도로 썩었을까. 권력자와 실낱같은 연결 고리만 있어도 이권을 챙길 만큼. 주식 시장은 그렇게 보나보다. 

'정치인 테마주'가 '권력을 잡고 나서 친한 사람에게 특혜를 줄 것'이란 검은 기대 위에 서 있다면, '재벌 총수 테마주'는 다른 유형의 어두운 기대에 뿌리를 둔다. 총수가 지분을 많이 보유한 계열사가 다른 계열사로부터 이익을 빨아들일 것이라는 기대다. 요컨대 정상적인 시장 거래로 얻는 것 이상의 이익을 누리리라는 기대다. 

'정치인 테마주' 현상이 정치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했던 역사에서 비롯됐다면, '재벌 총수 테마주' 현상은 한국 재벌의 독특한 작동 방식이 빚어냈다.

총수 지분 높은 회사가 유리하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기관 투자자, 주식 전문가들은 '정치인 테마주'에는 진지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코웃음 친다. 하지만 '재벌 총수 테마주'에 대해선 태도가 다르다. 기관 투자자가 테마주 현상을 부추기는 공범이 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쓰러진 뒤 2년 동안, 국내 주식 시장의 중요한 화두가 '이재용 테마주'였다. 국내 최대 재벌이 3세 경영 체제에 들어섰다. 하필 국내외 경제 전망도 어두운 시점이다. 그룹 차원의 '새 판짜기'가 진행될 텐데, 어느 계열사에 투자해야 이익을 볼까. 널리 통용되는 판단 기준이 있다. 총수 지분 비율이다. 예컨대 삼성그룹에서 사업 재편 작업이 복잡하게 진행 중이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지분 비율이 높은 회사는 손해 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보다 한술 더 떠서, 삼성그룹 수뇌부가 이 부회장에게 유리하게끔 계열사 인수합병 과정을 주무를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많다. 

이런 믿음을 현실로 확인해준 사건이 지난해 7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었다. 당시 합병 비율이 논란이 됐다. 주식 시가 총액을 기준으로 합병 비율을 정하는데, 하필 삼성물산 주가가 낮고 제일모직 주가가 높은 시점을 골랐다. 삼성그룹 수뇌부의 전략적 판단이었다. 다만 법적인 문제는 없다. 당시 제일모직은 삼성그룹 지주회사 격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제일모직 지분 23.2%를 갖고 있는 최대 주주였다. (이건희 회장 일가 지분 합계는 50.7%) 반면,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 주식은 아예 없었다. '총수 지분 비율이 높은 계열사가 유리하다'라는 공식이 그대로 적용된 경우다. 제일모직은 합병으로 이익을 봤고, 삼성물산은 손해였다.

주식 전문가들에겐 이런 공식이 익숙했다. 합병 이전, 이 부회장의 지분이 없었던 삼성물산 주가가 낮게 평가됐던 한 이유였다. 기관 투자자들이 삼성물산을 외면했다. 단, 국민 노후 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은 예외였다. 합병 선언 당시 삼성물산 지분 9.79%를 갖고 있는 2대 주주였던 국민연금은, 합병 논란 속에서 오히려 삼성물산 지분을 11.21%까지 늘렸다. 손해를 키우는 선택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민연금은 6000억 원대 손해를 봤다.

이재용이 사면 무조건 오른다? 

그 뒤론, 학습 효과가 생겼다. 초보 투자자들 역시 '총수 지분 비율'을 눈여겨보게 됐다. 이재용 부회장이 사는 주식을 따라서 산다. 올해 2월, 이 부회장이 삼성엔지니어링 자사주 300만 주를 사들였다. 전에는 삼성 총수 일가가 삼성엔지니어링 주식을 직접 보유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총수 지분이 생긴 것이다. 삼성엔지니어링은 삼성그룹의 대표적인 부실 계열사다. 무리한 저가 수주로 손실을 입었고, 자본 잠식에 빠졌다. 그런데 이 부회장이 주식을 샀다는 발표만으로, 삼성엔지니어링 주가가 뛰었다. 이 부회장이 언제 삼성엔지니어링 주식 추가 매입을 할지가 증권가의 관심사다. 

삼성SDI가 신규순환출자 금지에 걸려 내놓은 삼성물산 주식 역시 마찬가지다. 이 부회장이 일부를 사겠다고 했다. 그러자 삼성물산 주식이 전부 팔렸다.

적어도 주식 가격만 놓고 보면, 이 부회장이 '마이더스의 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사겠다' 한마디만 하면, 기업 실적과 관계없이 주가가 뛴다. 

'총수 지분 비율'만 보고 투자하면 승승장구 하는 건가. 그렇지는 않다. 1년 만에 주가가 반 토막 난 사례도 있다. 삼성SDS 역시 이 부회장이 보유한 지분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투자자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지배 구조 개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다. 지난 1년 사이, 삼성SDS 주가가 최고점을 찍었던 건, 지난해 5월 28일이었다. 34만1000원을 기록했다. 그보다 하루 전, <한국일보>에 "삼성전자-SDS도 합병 유력"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계획이 발표된 뒤였는데, 삼성전자와 삼성SDS의 합병까지 이뤄지면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확실하게 높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무렵, 증권가에서도 비슷한 소문이 돌았었다. 이런 보도가 나올 당시, 이 부회장은 삼성SDS 지분 11.25%를 갖고 있었다. 이 부회장이 지닌 삼성전자 지분은 0.6%였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과 비슷한 효과를 기대한 투자자가 많았다. 제일모직의 자리에 삼성SDS를, 삼성물산의 자리에 삼성전자를 놓는 것이다. 이는 삼성전자 주주들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얼마 뒤, 삼성전자 측이 삼성SDS와의 합병 설을 공식 부인했다. 삼성SDS 주가는 계속 떨어졌다. 지금은 17만 원대다. 

▲삼성SDS 주가 그래프.


하락세가 가팔라진 건, 올해 1월 28일 이후다.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SDS 주식 일부를 팔겠다고 한 날이다. 주식 팔아서 생긴 돈은 어디에 썼나. 부실 계열사인 삼성엔지니어링 주식 사는데 썼다. 이 부회장의 선택에 따라, 삼성SDS 주주들은 울고 삼성엔지니어링 주주들은 웃었다. 물론, 앞으로 이 부회장은 다양한 선택을 할 게다. 그때마다 울고 웃는 쪽이 역동적으로 바뀔 수 있다. '이재용 테마주' 사서 웃었던 이들이, 한순간에 쪽박 찰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경영진 규율 기능이 없는 주식 시장 

애초 삼성그룹 지배 구조 문제가 생긴 이유 자체가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계열사를 장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결국 이 부회장은 지금 얼마 안 되는 지분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을 뿐이다. 한 계열사에서 총수 지분이 늘어나서 생긴 이익은 결국 다른 계열사의 몫을 당겨온 것에 불과하다. 주식 투자자들이 이 부회장의 주식 매입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투자는 불가능하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이익을,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 

'그게 어때서? 주식 시장은 원래 투기 판인데….' 그렇지 않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익과 손해가 있다는 건, 시장이 순기능보다 역기능에 가깝다는 뜻이다.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한 칼럼에서 "(주식 등) 자본 시장의 역할을 자금 조달 측면에서만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본 시장이 금융 시스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미국·영국에서도 기업에 가장 많은 자금을 공급하는 것은 은행"이라며, "자본 시장의 핵심 기능은 기업에 대한 정보를 생산함으로써 실적이 나쁘거나 부당 행위를 한 경영진을 규율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요컨대 실적이 나쁜 기업은 주가가 떨어져야 한다. 그래서 무능한 경영진을 규율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주식 시장은 이런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부실 기업이 '테마주'에 편입돼서 주가가 오른다. 주식 시장은 기업에 대한 의미 있는 정보를 생산하지도 않고, 경영진을 규율하지도 않는다. 공정성, 합리성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시장에선 투기 심리만 만개한다.

시너지 없는 통합 삼성물산, 이재용만 웃었다 

이건희 회장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삼성에버랜드가 삼성그룹 지주회사 격이었다. 그런데 2년 전 이 회장이 쓰러진 직후, 삼성에버랜드는 제일모직과 합치더니 기습적으로 상장했다. 삼성SDS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분간 상장 계획이 없다"라던 삼성 측 입장은 슬그머니 뒤집어졌다. 그 뒤론, 모든 절차가 숨 가쁘게 진행됐다. 삼성에버랜드, 제일모직, 삼성물산이 합쳐진 통합 삼성물산이 지금은 지주회사 격이다. 그럼 이 회사는 뭐 하는 곳인가. 놀이동산과 패션, 건설업과 플랜트, 무역 상사를 아우르는 회사인데, 어떤 전망을 갖고 있는지 투자자도 잘 모른다. 계속 이 상태로 있을 건지, 다시 사업 부문을 헤쳐모여 할 건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주가는 꾸준히 떨어졌다는 점이다. 통합 첫 날인 지난해 9월 1일 17만 원대를 기록한 삼성물산 주가는 지금 12만 원대다. 성격이 다른 사업들을 합친 시너지 효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삼성물산 주가 그래프.


또 하나 분명한 건, 이재용 부회장은 확실히 이익을 봤다는 점이다. 지난 1996년 48억 원에 산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가 지난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을 거치며 통합 삼성물산 지분 16.5%로 전환됐다. 삼성물산 시가총액이 24조1855억 원이므로, 3조3906억 원쯤 되는 셈이다. 48억 원을, 20년 만에 3조 원 이상으로 불렸다. 

한국 대표 기업이 '테마주' 유행에 휩쓸린 책임 

대체로 확실해졌다. '이재용 테마주'에 투자해서 돈을 번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수의 투자자가 돈을 잃었다. 삼성물산 주가는 그룹 차원의 관리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하락한다. 삼성물산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 51%를 갖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바이오시밀러 사업은 삼성그룹의 차세대 먹을거리로 거론된다. 곧 상장을 앞두고 있다. 삼성물산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장의 최대 수혜자로 꼽힌다. 그런데 삼성물산 주가는 오르지 않는다. 삼성SDS 주가는 반 토막 났다.  

아예 '테마주'로 분류되지 않았더라면, 주가에 거품이 끼는 일도, 갑자기 가격이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게다. 삼성그룹 지배구조 재편 효과에 따른 이익을 기대하고 주식을 샀다가, 호재가 발표된 직후에 판 사람들이 주로 돈을 벌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기업 가치를 보고 장기 투자하는 사람들이 불리해진다. 그리고 한국의 대표 기업 삼성이 '테마주' 유행에 휩쓸린 책임은, 삼성 수뇌부에게 있다. 경영권 승계와 사업 재편 과정에서 온갖 변칙을 동원해서 투자자들을 헷갈리게 했다. 

제 구실 못하는 기관 투자자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금융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건, 기관 투자자의 제 역할이다.  

지난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진행될 당시, 비판적인 보고서를 낸 증권사는 한화투자증권 한 곳뿐이었다. 그나마도 보고서를 낸 뒤, 최고경영자가 퇴진 압박을 받았었다. 나머지 다수 증권사의 보고서를 따라 투자했던 이들은 대개 손해를 봤다.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증권사는 없다. 외국 증권사는 보고서 가운데 일정 비율 이상은 주식을 팔라고 한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무조건 사라는 보고서 일색이다. 증권 전문가의 전망을 신뢰하기 힘든 구조다. 전문가의 권위가 없으니, 루머와 작전이 힘을 받는다. 

당시 국민연금의 행태도 황당했다. 중요한 결정에 대해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열도록 돼 있다. 그런데 합병에 반대하는 결론이 나올까봐,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열지 않았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소액 주주들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대해 찬성한 비율이 높지 않았다. 국민연금이 찬성하지 않았다면, 합병은 무산되는 거였다.

경제개혁연구소가 지난해 7월 두 회사의 주주 총회를 앞두고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도 합병에 비판적인 입장이 우세했다. "이건희 회장 일가의 사익을 위한 것이므로 국민연금이 반대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44.3%였다. "국익의 관점에서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42.5%로 찬성보다 1.8%p 적었다. "모름·무응답"은 13.2%였다.

합병 찬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합병 목적은 "이건희 회장 일가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것"(63.2%)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회사와 주주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응답은 26.5%였고 모름·무응답은 10.3%였다. 삼성 측이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눈에 띄는 결과다. 이런 조사 결과는 지난해 합병 당시 기관 투자자들의 행태가 대중에게 어떻게 비쳤을 지를 짐작케 한다. 기관 투자자에 대한 신뢰가 깎일수록, 공신력 낮은 정보에 더 의지하는 악순환이 생긴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반발하는 재계, 주주 여론과 동떨어져

정부 역시 이런 문제들을 알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올해 상반기 안에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기로 한 것도 그래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국민연금,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 국내 상장사 주식을 보유·운용하는 모든 기관 투자자들이 주주권을 적극 행사하고 주주권 행사 내용을 수탁자에게 투명하게 보고·공시하도록 유도하는 자율 지침이다.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는 별 실효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지금 마련된 내용만으로 기관 투자자들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게끔 유도하기에 부족하다는 게다. 예컨대 '기관투자자 간의 연대' 원칙이 빠진 점을 특히 문제 삼는다. 

반면, 재계는 정반대 이유로 강하게 반발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코스닥협회, 한국상장사협의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지난 3일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대한 경제 단체 공동 의견'을 통해 이런 입장을 밝혔다. "상장 기업들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정부가 국민연금, 자산운용사 등 기관 투자자를 활용해 상장사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요컨대 재계는 기관 투자자가 제 목소리를 내는 게 싫다고 한다. 주식 가격을 받쳐주는 역할만 했으면 좋겠다는 게다. 지난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당시 기관 투자자들이 보였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게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준비 중인 금융위원회는 재계의 이런 목소리에 어떻게 대응할까. 분명한 건, 소액 투자자와 일반인의 여론은 재계 목소리와 반대라는 점이다. 각종 조사에서 국민연금 등 기관 투자자의 행태에 비판적인 의견이 더 많았다.



'스타트업 삼성'이 미덥지 않은 6가지 이유

2016.05.17 10:39:06


[이재용 체제 삼성 2년 ③] 삼성에 실리콘밸리 문화 심을 수 있을까


삼성전자에서 일어난 변화다.

"출퇴근 시간을 직원 마음대로 정한다. 복장 역시 자유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본인이 예산을 편성해서 사업 계획을 짠다. 아이디어가 사업화 되면, 인센티브가 있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전혀 내지 않아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50세 이건희, 완전 자율 '타임머신' 팀

언제 있었던 일일까. 24년 전이다. 1992년 7월 15일, 삼성전자는 '타임머신' 팀 출범식을 했다. 사내 공모를 통해 뽑은 과장급 이하 직원들로 팀을 꾸렸다. 업무 방식은 앞서 소개한 대로다. 당시 삼성전자 사보는 '타임머신' 팀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 21세기를 대비하고 고정관념에 빠져 획일화 경직화된 조직을 살아서 꿈틀거리는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다. 21세기 미래 산업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전사적 차원의 비전 제시,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조직 분위기로 기존의 조직 개념을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소프트한 조직 운영으로 21세기 New Frontier 정보통신의 위상과 초일류 기업으로의 변신을 기대해보자." 

'타임머신' 팀을 꾸릴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만 나이로 50세였다. 이듬해 신경영 선언을 하며 경영 전면에 나섰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라고 했고, 실제로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 1992년 7월 삼성전자 사보에 실린 타임머신 팀 소개 기사. ⓒ프레시안


47세 이재용, '스타트업 삼성'



지금 삼성을 이끄는 이재용 부회장은 만 나이로 47세다. 이 부회장 역시 '타임머신'과 비슷한 시도를 한다. 구호는 '스타트업 삼성'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 24일 '스타트업(Start Up) 삼성 컬처 혁신 선포식'을 열고 △수평적 조직 문화 구축 △업무 생산성 제고 △자발적 몰입 강화의 '3대 컬처 혁신 전략'을 발표했다. 아울러 삼성전자는 △직급 단순화 △수평적 호칭 △선발형 승격 △성과형 보상 등 4가지 방향을 골자로 하는 글로벌 인사 혁신 로드맵을 수립해 다음 달 발표할 계획이다.

요컨대 직원의 자율성을 높이고, 직급과 연차에 따른 권위주의를 깬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출퇴근 시간을 유연하게 하는 등의 변화가 이미 있었다. 사내 창의 아이디어 육성 프로그램인 C랩도 운영 중이다. 조직 구성원들에게 창의적 발상, 창의적 시도를 끊임없이 독려하고 있다. 

삼성에 실리콘밸리 문화 심을 수 있을까  

24년 전의 '타임머신' 팀이 회사 전체로 확대된 듯하다. 여기서 궁금증. '타임머신' 팀은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성과도 있었다. 1994년 12월 20일자 <매일경제신문>에 따르면, '타임머신' 팀이 한 해 동안 보고한 아이디어는 450건이다. 예컨대 삼성 휴대폰의 '천지인' 자판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타임머신' 팀을 기억하는 이들은 삼성 안에서도 많지 않다. 팀원을 두 차례 물갈이 한 뒤에 해체됐다. 그리고 1997년 외환 위기가 있었다. 재무 부서가 힘이 세지면서,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문화가 더 견고해졌다. 

이 부회장이 주도하는 '스타트업 삼성'도 같은 운명일까. 경영 전면에 나선 초기, 분위기 쇄신용 캠페인에 그치는 걸까. 단정하기는 이르다. 이 부회장은 이 회장에 비해 개방적인 성격이라고 한다. 총수 전용기를 팔았고, 불필요한 의전도 줄였다. 이런 점은 긍정적인 전망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한국 대기업에도 미국 실리콘밸리 풍의 개방적인 문화가 자리 잡는 걸까. 그 역시 비약이라는 의견이 많다. 기자가 만난 삼성전자 직원들은 대체로 이런 입장이었다. 한계 역시 분명하다는 것. 거칠게 정리하면, 여섯 가지 이유다. 

창의조차 '주입식 관리' 

첫 번째는 '주입식 창의'라는 모순이다. <초일류 사원, 삼성을 떠나다>(티거 Jang 지음, 렛츠북 펴냄) 저자가 쓴 표현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삼성전자에서 전략기획, 글로벌 세일즈 및 사내 벤처 부서를 경험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저자는 삼성전자에서 4년 동안 일한 뒤 최근 퇴직했다. 그가 한 이야기다. 

"(삼성에서는) 창의조차 주입식으로 관리된다." 

실무 부서에서 자율적으로 창의적인 시도를 하기는 어려운 구조라는 말이다. 물론, 이건 삼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실패 책임은 누가 지나이재용, 여전히 등기이사 회피 


두 번째는 실패에 따른 책임 문제다. 창의적인 시도를, 위에서 요구했다. 그런데 실패하면 책임은 누가 지나. 창의적인 시도를 하라고 요구한 윗사람? 맨 위에는 이재용 부회장이 있는데, 그럼 이 부회장이 책임지나? 그럴 리는 없다. 

이 부회장이 아무리 개방적인 모습을 보인다한들, 실패의 책임에 대해서까지 열려 있는 건 아니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의 등기이사조차 맡고 있지 않다.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리면, 권한과 책임이 함께 따른다. 그걸 계속 피하고 있다. 권한만 행사하고 책임은 외면하는 구조는 여전한 셈이다. 

총수가 회피한 책임, 누가 짊어지나. 그게 모호하니까, 일이 복잡해진다. 실패의 책임이 터무니없이 증폭돼서 내게 돌아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업무를 잘게 쪼개야 한다. 그래야 실패 책임이 엉뚱하게 튀는 일을 줄일 수 있다. 아울러 서류 작업이 대단히 중요해진다. '관리의 삼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든 이유다. <초일류 사원, 삼성을 떠나다>의 한 대목이다.

"실제로 내가 하는 일들을 보면 '전략 기획'이라는 명칭이 참으로 민망해졌다. 하루 종일 보고서 줄 간격 조절하고, 사람들 자료 취합하고, 파일 바인더 정리하고, 회의실 컨퍼런스콜 전화기 고치고…. 어쩌면 업무명이라도 근사하게 지어서 위안이나 삼으라는 것 같기도 했다."

현장 경영의 양면성 

세 번째는 현장 중시 경영이 지닌 양면성이다. 이재용 체제 삼성의 한 특징이 현장 중시다. 삼성전자 DMC(Digital Media&Communication)연구소는 지난해 파격적으로 규모를 줄였다. 연구원 대부분을 현업 부서로 보냈다. 또 삼성종합기술원도 역할이 축소됐다. 삼성전자DMC 연구소는 상대적으로 긴 호흡의 연구를 하던 곳이다. 삼성종합기술원은 그보다도 더 장기적인 연구를 했다. '삼성 안의 대학' 비슷한 위상이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던 이들이 대거 자리를 옮겼다. 

현장 중시 경영은 양면이 있다. 소비자의 요구에 바짝 다가서는 면이 있다. 기업 입장에선 인력 투자의 효율이 높아진다. 주주들도 이런 방식을 좋아한다. 반면, 당장의 필요와는 거리가 있는 연구개발은 소홀해질 수 있다. 기업의 기초 체력이 떨어진다. 이재용 체제 삼성은 전자(前者)에 치우쳤다. 기자가 만난 삼성 직원들은 이 대목에선 대개 의견이 겹쳤다. 공과대학 교수들 역시 삼성종합기술원 축소에 대해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눈앞의 요구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부응하는지에만 골몰하는 구조에선 창의적인 시도가 불가능하다. 창의적인 발상이 있다한들, 그걸 시도할 여유가 없다. 현장의 관성에서 벗어나, 긴 시야로 연구개발을 할 공간이 필요하다. 이재용 체제 삼성에선 이런 공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타임머신' 팀은 왜 해체됐나  

네 번째는 경제 위기 가능성이다. 1992년 발족한 삼성전자 '타임머신' 팀의 시도가 이어지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1997년 외환 위기였다. 기업 환경이 나빠지면, 재무 논리가 득세한다. 당장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는 비용은 모두 삭감 대상이다. 이런 구조에선 창의적인 시도가 아예 불가능하다. 장기적인 연구개발 과제가 축소된 것과 비슷한 측면이다.

한국 경제가 다시 수렁으로 빠지고 있다. 주력 산업 대부분이 성장 동력을 잃었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게 삼성 스마트폰이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장은 포화 상태에 가까워졌다. 중국 등 후발 국가 기업의 추격도 맹렬하다. 관련 기술 역시 상당 부분 평준화됐다. 삼성 스마트폰마저 주저앉으면, 창의적인 발상이 한가한 소리 취급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재용에게 주어진 시간 

다섯 번째는 이 부회장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만 47세인 이 부회장은 아직 삼성 경영권을 온전히 물려받지 않았다. 재산 상속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승계가 최종 마무리되려면 얼마나 걸릴까. 설령 아주 빠르게 이뤄진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 이 부회장의 아들이 벌써 고등학생 나이다. 곧 대학생이 될 게다.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에 입사한 게 1991년이다. 당시 이 부회장은 대학교 4학년이었다. 이 때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1995년, 아버지 이건희 회장에게서 61억 원을 증여받으면서 본격적인 경영권 승계 작업이 시작됐다. 그 이후 과정을, 우린 잘 안다. 온갖 불법, 편법 논란이 있었다. 

이 부회장의 아들 역시 몇 년 안에 경영 후계자 수업을 시작해야 한다. 또 경영권 승계 작업도 해야 한다. 이 부회장의 경우를 적용하면, 앞으로 6~10년이 남았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던 이 부회장이므로, 더 신중한 준비를 할 게다. 이 부회장의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일은 더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승계 작업을 더 일찍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이 부회장이 오로지 신규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직원들에게 요구한 창의적인 시도가 결실을 맺을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삼성의 미래' 역시 야근에 시달린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이유, 여전한 야근 관행이다. '스타트업 삼성' 캠페인의 핵심 요소가 불필요한 야근 줄이기다. 하지만 현장에선 아직 통하지 않는다.

야근과 창의가 양립하기 힘들다는 건 분명하다. 창의적인 시도란, 결국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이다. 야근을 한다는 건, 이미 벌여놓은 일도 감당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을 새로 만들다니. 누구나 야근하는 조직에선 창의적인 사람이 따돌림 당한다.

삼성의 새로운 먹을거리로 흔히 바이오시밀러 산업이 꼽힌다. 생물체에서 유래한 혈액 성분·단백질·세포·유전자 등을 이용해 만든 바이오 의약품을, 복제해서 만든 약이 바이오시밀러다. 삼성에서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하는 계열사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다.

삼성그룹 지주회사 격인 삼성물산이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 51%를 지닌 최대 주주다. 나머지 지분 전부는 삼성전자가 갖고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자회사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91.20% 지분을 갖고 있다. 지분 구성만 봐도, 삼성그룹 수뇌부가 바이오시밀러 산업에 거는 기대를 알 수 있다. 삼성의 미래는 바이오시밀러 계열사가 만들고 있다.

그런데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 직원들은 지금 어떻게 일하고 있나.

전, 현직 직원들이 평가 글을 올리는 앱 '잡플래닛'에서 이들 두 회사를 검색했다. 장점과 단점을 쓰게 돼 있는데, 단점은 한결같다. 두 회사 모두 야근이 너무 많다고 한다. 삼성의 미래를 만드는 회사에서 야근이 일상이다.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를 심자는 '스타트업 삼성' 구호에 썩 믿음이 가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