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키운 ‘아이돌’
| [443호] 승인 2016.03.18 18:12:32 |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이 있다. PC용 게임으로 시작해서 모바일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 게임은 1991년 최초로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개척해냈다. 게임 속 딸을 다양한 방식으로 육성시키는 게임이다.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가 연이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게임 플레이를 통해 발생하는 딸과의 다양한 정서적 감응 때문이 아니었을까. 게이머들은 플레이를 통해 딸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바캉스를 즐기기도 하며 자라나는 딸에게 애정, 슬픔 혹은 (내가 원하는 엔딩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 등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은 게임의 이야기 진행 방식이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게이머에게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면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게이머는 적어도 마우스를 클릭하는 등의 아주 작은 행동을 통해, 게임의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는 우리가 행위하고 조작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나 친밀감 같은 정서적 교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기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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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et |
엠넷의 <프로듀스 101>은 이러한 측면에서 <프린세스 메이커>가 가진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장점을 차용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프로듀스 101>은 시청자들을 ‘국민 프로듀서’로 호명하며 걸그룹 최종 멤버 11명을 선택하게 하고, 데뷔 싱글의 프로듀싱에도 시청자들이 참여토록 하는 콘셉트이다. 그야말로 ‘아이돌 메이커’ 프로그램이다.
장근석이 “쇼타임!”을 외치며 101명의 소녀들(이라기보다는 소녀 떼에 가까운)을 소개할 때만 해도 서바이벌과 리얼리티를 가장한 ‘엠넷 드라마’는 이미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전형적인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소녀들의 동영상을 재생하고, 홈페이지에 들러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내가 밀고 있는 소녀들에게 투표하며, 마음속에 리스트업된 소녀 11명을 SNS로 홍보까지 하고 있다.
연습생 완전체라 말할 수 있는 김세정이, 연기자를 꿈꾸며 노래와 춤 연습은 거의 해보지도 않은 김소혜를 이끌어주며 백합처럼 청초한 우정을 만들어나갈 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그뿐이랴.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닌데도 순위 발표에서 극적으로 1위를 차지한 김세정이 울면서 “엄마, 오빠, 우리 셋이서 참 바닥부터 힘들게 살아왔는데, 앞으로 꽃길만 걷게 해드리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프로듀스 101>은 단순한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아니라, 데뷔를 향해 달려 나가는 101명의 우정과 성장, 그 대서사시의 시작이다.
일본 걸그룹 AKB48 총선거 콘셉트와 유사
사실 <프로듀스 101>은 일본의 유명한 걸그룹 AKB48 총선거 콘셉트를 그대로 가져온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AKB48을 기획한 아키모토 야스시는 2010년 일본 니혼TV와 한 인터뷰에서, AKB48의 멤버들은 다른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 그룹과는 달리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성장의 서사를 그룹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힘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프로듀스 101>도 마찬가지다. 시청자들(혹은 국민 프로듀서들)은 101명의 연습생이 점차 무대 경험을 쌓아가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며 투표와 다양한 팬 활동을 바탕으로 ‘아이돌 메이킹 시스템’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정식으로 데뷔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의 존재이며, 이미 정식으로 데뷔한 아이돌에 비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그로 인해 팬들은 자신이 직접 ‘아이돌’을 육성하는 느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프로듀스 101>에 속해 있는 소녀들 중 대형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연습생들의 성장이나 순위 변동에의 서사는 다른 멤버들의 것보다 훨씬 극적이다.
물론 엠넷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드라마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악마의 편집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기제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멤버들에게 부여하는 캐릭터다. 개인의 탤런트와 개성을 살펴볼 수 있는 ‘일인직캠’이나 ‘자기소개 영상’과 같은 장치에서부터, 매회 우정이나 갈등·성장을 조장하는 서사 방식은 매우 전형적이지만 그래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다시 만난 세계’를 열창하며 55위에서 단숨에 12위로 뛰어오른 스타쉽 소속 유연정의 등장은 이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성장 드라마’가 완결된 형태가 아닌 캐릭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어차피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을 거야’라는 대중의 인식을 깨트린 것이다.
그러나 게임은 ‘결말’이 정해져 있다. 물론 게임에서의 결말이 영화나 드라마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되지 않고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여러 개의 엔딩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엔딩은 결국 그 게임을 만든 게임 제작자의 엔딩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머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자신이 그 게임의 엔딩을 직접 ‘만들어나간다’는 느낌을 공유한다. 우리는 <프로듀스 101>의 진짜 프로듀서는 아니지만, 아이돌로 데뷔하기 위한 소녀들이 성장하는 시간을 공유한다. 그들의 성장 시간에 대한 공유와 감정적 서포트는 이미 우리를 단순한 시청자가 아닌 소녀들의 ‘프로듀서’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덴마크 교육, '평범한 위인'을 키운다
덴마크에서 엄마가 되다
덴마크인 남자친구를 만나 여권에 한국과 덴마크 도장을 빼곡히 채우며 몇 년간 장거리 연애를 한 끝에 우린 결혼했다. 덴마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곧 엄마가 될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기엔 자리를 잡지 못한 엄마라,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무언가에 관심이 생기면 그것만 보이는지, 거리에 나서면 아이와 엄마들만 눈에 들어왔다. 제일 먼저 느낀 건 '이 나라엔 유모차가 참 많구나'였다. 아이가 많아서, 혹은 아기와 부모들이 밖에 '싸돌아' 다니기 편한 환경이라 그런 걸까 싶었다.
한국에서는 '임산부는 뭐든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했는데, 덴마크에서는 임산부에게 걷기, 수영, 자전거 타기를 강조했다. 순산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아기 낳는 날까지 자전거를 타고 쌩쌩 돌아다니긴 했지만 글쎄…. 서른다섯 시간 진통을 하고서야, 아기를 만난 걸 보면 자전거와 순산은 큰 연관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출산 과정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예정일을 일주일이나 넘긴 것도 모자라 나흘 동안 진통한 산모를 끝까지 기다려준 병원 시스템이었다. 아기 낳는 방에서 전담 산파와 남편 등 함께 힘들지만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진통이 너무 길어져 애초에 바랐던 것처럼 완벽한 자연출산을 하지는 못했지만, 진통제를 맞은 것도, 욕조에 들어가 몸을 뉘었던 것도, 신랑 몸에 기대어 춤을 추며 아기를 기다렸던 것도 모두 내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산부인과 전문 간호사인 산파는 산모의 의지를 최대한 존중해주는 의료인으로, 출산 과정에서 큰일이 생기지 않는 한 의사를 만날 일이 없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정답에 끼워 맞추지 않고 백이면 백 다른 답이 있다는 걸 전제하는 덴마크의 문화를 몸소 느끼며, 엉겁결에 엄마가 되었다.
지금 6개월이 된 딸 루나는 오롯이 엄마의 젖으로 9.8킬로그램(kg)의 아주 통통한 아기다. 아기를 낳기 전, 모유 수유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나는 완모(완전 모유 수유)를 하겠다는 결심은커녕 '초유만이라도 아기에게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는 소극적인 생각을 했다. 덴마크 여자 99%가 모유 수유를 한다지만, 내 몸은 이들과 다르니 분유를 먹이게 된다 한들 날 탓하지 말라고 미리 남편에게 주의를 주기도 했다. 내가 모유를 먹지 못하고 자랐기에 나도 엄마를 닮았다면 모유 수유는 힘들 것이라고, 지레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덴마크 여자 99%가 하는 '쉬운 일'을 우리 엄마가 못했던 것은 신체적인 차이가 아니라 문화적 차이 때문인 듯하다. 예상대로 처음에는 정말 모유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는 며칠이고 빈 젖을 빨았고, 그러자 신기하게도 젖이 돌기 시작했다. 덴마크는 모유 수유실이란 것이 없다. 카페나 공원, 혹은 식당 어디서든 아기 젖을 물리는 게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 덕에 나도 99%에 들 수 있었다.
아기 엄마를 배려하는 문화
또 하나 이곳에서 크게 느낀 것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을 배려하는 문화였다. 덴마크는 추운 나라이고, 덴마크 사람들도 본디 수줍음이 많은 특성이 있어 얼핏 보기엔 차가워 보인다. 처음 덴마크에 와서도 한국인의 '정(情)' 같은 정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기가 생긴 후 우리네 '정'과는 다르지만, 배려로 무장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느낀다.
한 번은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야 하는데, 아기를 돌봐줄 남편도 시어머니도 없었다. 엄마인 학생들이 피치 못할 상황에 아기를 바구니에 넣어 수업에 들어오곤 한다는 얘길 들었지만, 그래도 직접 유모차를 끌고 강의실로 들어가려니 민망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아기 손님의 등장에 교수와 동료 학생들이 환대해줬다. 그러면서 도와줄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아이를 키운다'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까지 느꼈다. 사정상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출산 후 학기가 시작한 지 2주 뒤에 학교에 갔는데도 친구들은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먼저 강의 노트를 보내줬다.
이렇듯 '아기 엄마를 배려하는 문화'는 곳곳에서 느껴진다. 일반 시내버스와 전철에는 유모차를 세울 수 있는 넓은 전용공간이 있어 우리와 같은 뚜벅이 부부도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식당에도 유모차를 세워둘 공간이 따로 있는가 하면, 아기 의자도 어느 식당에나 마련되어 있다. 나는 아기가 옹알이라도 하면 민폐가 될까 싶어 일찌감치 공갈 젖꼭지를 물려 조용히 시키려는 반면, 신랑은 어른들도 다 소리를 내는데 내가 너무 민감하다며 나무라곤 한다. '아무렴 아기니까 그러려니…' 하고 배려하는 범위가 상당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폐를 끼치는 아기를 한 번도 못 본 것을 보면, 부모와 아이 모두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 밴 듯하다.
다만 조금 볼멘소리를 하자면, 타고난 신체가 강건한 바이킹족 엄마들은 우리나라처럼 산후조리라는 개념이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빠가 2주간 출산 휴가를 얻어 아기와 엄마를 보살피는 게 덴마크의 유일한 산후조리 문화일지도 모르겠다.
덴마크는 아이를 대하는 부모들의 관점도 많이 다르다. 사회주의국가라 제도적인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부풀려 말하자면 우리 부부는 덴마크 아기를 잠시 위탁받아 키우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출생 직후부터 만 두 살이 될 때까지 집마다 배치된 전담 간호사가 수시로 가정방문을 한다. 전담 간호사는 아기의 발달을 확인하고 집안을 둘러보며 아기가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자라고 있는지 상세히 기록한다. 이 과정에서 발달이 지연되는 아기를 발견하면 적절한 도움을 주기도 하고, 혹여 적절치 못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가 있으면 개선책을 제시한다. 아동학대가 의심되면, 간호사의 신고로 아이를 부모에게서 떼어놓을 수도 있다. 나도 간호사가 오는 날이면, 괜히 집 청소도 한 번 더 하게 되고 아기 목욕도 깨끗이 시켜 예쁜 옷을 입히는 수고를 마다치 않는다. 전담 간호사를 덴마크어로 직역하면 '건강 돌보미' 정도일 텐데, 말 그대로 엄마가 젖몸살이 났을 때나 아기가 설사했을 때나 육아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제일 먼저 연락하게 된다.
또 시에서는 동네 아기 엄마들과의 모임을 연결해준다. 덴마크인 엄마들 모임과 외국인 엄마들 모임으로 따로 있어, 나는 외국인 엄마들 모임에 나간다. 이들과 같은 달에 태어난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공감대가 높다. 시어머니도 남편을 키울 때 만난 엄마 모임 친구들과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는 걸 보면, 어떤 엄마들에겐 이 모임이 적적한 육아의 한 줄기 빛인가 싶다. 아이를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키우다 보니, '나만의 아기'라는 생각보다 '모두의 아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유모차가 참 많은 나라, 덴마크. 이미지는 2월 16일 방송된 EBS <다큐 프라임> '공부의 재구성' 중 한 장면. ⓒEBS
생후 4개월 딸아이의 유아원 알아보기
아기가 4개월이 될 무렵, 세 군데의 유아원을 탐방하고 그 중 두 곳을 예약했다. 덴마크는 맞벌이 비율이 높아 생후 6개월부터 보육기관에 보낼 수 있게 제도화되어 있다. 유아원을 탐방해보니 육아철학과 교육방식이 조금씩 달라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이해하기에, 덴마크 어린이집은 한국의 공동육아 어린이집과 유사한 점이 많아 보였다. 우선 신체적 발달과 정신적 발달을 고루 중시하며, 아이를 불완전한 존재로 보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여겨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0~3세 유아 여섯 명과 6세까지의 어린이 열 명, 보육교사 네 명이 한 반을 이룬 유치원의 경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형제자매의 역할을 익혔다. 모든 아이들이 매주 순서를 정해 함께 장을 보고 다음날 점심을 준비했다. 금요일은 다 같이 청소하는 시간이었는데,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밀대를 들고 청소하는 시늉을 하니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 없었다. 아기들이 식사 준비를 하고 청소를 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흉내 내기겠지만,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한 교육으로 여겨졌다. 사실 아이들의 시늉에 어른들의 할 일은 더 많아도, 직접 동참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둔다고 한다. 또 조용한 아이들이 노는 방과 활달한 아이들이 노는 방이 따로 있어 아이들이 어떤 활동을 할지 선택할 수 있게 했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도 아이들은 숲이나 농장으로 매일 야외활동을 한다. 가끔은 쓰레기 매립장, 하수처리장처럼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으로 견학을 간다. 종교, 문화,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두가 존중받을 만한 인격체라는 가르침도 중시했다. 특히 모로코 출신의 무슬림 여성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한 어린이집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또 한국과 비교해 남자 교사가 많다는 점도 신선했다. 유치원 교사가 여자여야 한다는 인식은 아이들에게 잘못된 성 역할을 심어줄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덴마크는 아이들이 야외 활동을 할 때 체력적인 면에서 남자 교사가 필요하다는 데 사회적 공감대가 깊었다.
한국의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부모들이 직접 운영에 참여해 여러 명의 아이를 돌보는 '데이케어-맘'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부모들이 이사회 주체로 참여하되 운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일상적인 교육의 영역은 철저히 교사에게 맡긴다는 점이 한국과 무척 다르다. 교사가 된 후에도 정기적으로 자격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교사 한 명이 돌보는 아이가 최대 네 명이라는 점도 교사를 신뢰할 수 있는 요인이다.
우리 부부는 아기를 유아원과 유치원이 함께 있는 큰 시설에 보내기로 했지만, 다수의 아이들은 '데이케어(Day Care)'라는 곳에 간다. 일반 가정집에서 최대 세 명의 아이를 맡아 돌보는 형태다. 물론, 시에서 까다로운 조건과 규정을 두고 수시로 감독한다. 비용은 시설에 보내는 것과 같으며, 시설과 데이케어의 장단점이 따로 있으므로 부모가 결정하면 된다.
평범한 위인을 키우는 '얀테의 법칙'
덴마크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기에 좋은 용어로 '얀테의 법칙(Law of Jante, Janteloven)'이란 것이 있다. "네가 특별하다거나 네가 우리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라는 게 이 법칙의 핵심이다. 우리 아이 귀한 것이야 세상 어느 부모나 갖는 생각이지만, 한국에서 영재교육이나 조기교육이 크게 발달한 데는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귀하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 아닐까.
덴마크 아이들이 또래 한국 아이들보다 셈도 느리고 글도 늦게 깨우칠지 모른다. 실제로 초등학교에서는 수영, 요리, 기계조립, 동물 키우기, 옷 만들기 등 살면서 필요한 것을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40% 미만의 아이들만 고등학문을 배우는 대학교에 진학하며, 다른 아이들은 간호학교·요리학교·미용학교 등 전문 교육기관에 진학한다.
나도 이렇게 관심이 생기기 전에는 유럽과 한국을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덴마크도 2차 세계대전까지는 유럽 최빈국 중 하나였으며 국가가 '보통 사람들'에게 투자한 결과, 현재에 이르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얀테의 법칙'이 개인의 성공을 억누르는 측면이 다소 있을지언정, 마땅히 배울 점이 있다고 여기게 됐다. 덴마크 학교에서는 조기교육이 절대 금지며, 친구들보다 잘났다고 뽐내는 아이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이런 문화는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져, 직업의 귀천이 어느 정도 있더라도 노골적으로 표출하지 않는 문화가 있다. 덴마크에서 살면서 한국의 친절한 서비스가 그리울 때도 많지만, 역으로 누구나 동일한 출발선에 있기에 누가 갑이고 을인지 따지며 처세하는 피로감이 없어 만족스럽다.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법칙을 발견할 영재에게 '얀테의 법칙'은 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의 모든 아이들은 우리가 으레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평범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평범한 삶이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이며, 이 또한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임을 알려줄 수 있는 게 보통 사람인 부모가 보통 사람인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덕목이다.
덴마크에서는 아이가 열여덟 살이 되면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이다. 하루는 갓난아기인 루나를 보며 남편에게 "열여덟 살에 떠나보낼 걸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아리다"고 하니, 역시 '한국 엄마'라고 놀렸다. 한국의 교육열이 덴마크 TV에서 몇 번 언급된 적이 있어서인지, 이곳 사람들도 나에게 '한국 엄마'처럼 루나를 키울 것이냐고 묻곤 한다.
'한국 엄마'가 내 아이에게 살 비비며 정을 내는 걸 의미한다면 'Yes', 내 아이에게 구체적인 형태의 바람과 기대를 불어넣는 것을 의미한다면 'No'라고 대답할 것이다. 때론 이곳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너무도 엄격한 것 같아 나는 조금 더 살가운 엄마가 되고 싶은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결정한 거라면 네가 책임져라'라는 냉정함이나 아이가 어느 정도 집안일에 기여해야만 용돈을 준다는 생각이 나에게는 좀 딱딱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양육방식이 자녀를 일찍, 그리고 완전히 부모로부터 신체적·경제적·정신적으로 독립하게 하는 비결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모쪼록 우리 아이가 훌륭한 보통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아이의 특성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 남편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글을 못 읽어서 방과 후에 선생님이 따로 글 읽기를 지도했다고 한다. 부끄러울 법도 했던 시부모님은 오히려 "옌스는 선생님이 더 챙겨주니 좋겠구나. 기계를 좋아하니 전기공이 되면 좋겠다. 전기공이 되면, 집안사람들의 전기제품을 고쳐줄 수 있지 않니?"라고 말씀하셨단다. 이런 환경 덕택인지 신랑은 자신이 친구들에 비해 글을 못 읽는 건 알았지만, 부끄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부모님 말씀대로 지금 남편은 온 집안사람들의 전기나 컴퓨터를 고쳐주는 공대 박사가 됐다.
내 아이를 '열여덟 살이 되면 떠나보낼 귀한 손님'이라 생각하면, 다른 아이와 비교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큰 울타리만 쳐주고 그 울타리 안에서 아이를 믿고 지켜볼 수 있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얀테의 법칙'을 되새기며 육아의 원칙을 지켜가고 싶다.

▲ 육아 뿐 아니라, 교육에도 덴마크 바람이 불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블로그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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