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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일취월장7 2015. 12. 3. 11:23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54년 만 26세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한 이후 60여 년간 현대사의 주역이었다. 민주화 투쟁, 3당 합당, 대통령 당선과 개혁 조치, 5·18특별법 제정, 외환위기 등으로 이어진 생애를 돌아보았다.

이상원 기자  |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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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호] 승인 2015.12.03  01:23:46

퇴임 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삶을 돌아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IMF 대통령’이라는 오명이 다른 경력을 잊게 했다. 서거 후 고인을 다양한 각도에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60여 년간 한국 현대사의 주역이었던 김 전 대통령의 생애를 돌아본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김영삼민주센터 제공</font></div>1951년 9월29일 손명순 여사와 함께 찍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울대 졸업 기념사진.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1951년 9월29일 손명순 여사와 함께 찍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울대 졸업 기념사진.

정치 입문과 이승만 3선 개헌 반대

김영삼은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당선됐다. 이때 김영삼은 만 26세로, 지금도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초선 의원 김영삼은 경무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2009년 시사 주간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3선 개헌 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하던 무렵 이 전 대통령에게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화가 난 듯 손을 떨더니 말없이 나가버렸다”라고 말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으로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 개헌안이 통과되자 김영삼 의원은 자유당을 탈당했다.

민주화 투쟁의 시작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야당 정치인 김영삼은 반(反)박정희 투쟁에 나섰다. 1963년에는 군정 연장 반대집회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969년 박정희 3선 개헌을 비판하던 와중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79년 8월9일 YH무역 사건으로 김영삼은 정국의 중심에 섰다. 가발회사인 YH무역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는 당시 당사를 에워싸고 까칠하게 굴던 경찰 간부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올려붙였다(마포경찰서 정보과장 뺨을 때린 YS 기사 참조). 8월11일 경찰 2000여 명이 투입되어 YH무역 노동자 전원을 연행했다. 김영삼 총재는 이 일을 계기로 그해 10월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김영삼 의원 제명은 10월13일 야당 의원 집단사퇴, 10월16일부터 20일까지 부마항쟁으로 번졌다. 2009년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과는 화해했지만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김영삼민주센터 제공</font></div>1981년 가택연금 당시의 YS.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1981년 가택연금 당시의 YS.

직선제 단식 투쟁, 양김 분열

1980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로 김영삼은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3년 5월18일부터 23일 동안 ‘언론 통제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 복직, 정치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5개항을 주장하며 단식을 했다. 단식 12일째 전두환 정권은 가택연금을 해제하며 단식 중단을 권했으나, 김영삼은 5개 항을 재차 요구하며 단식을 이어갔다. 김영삼의 단식은 해외 언론에 먼저 보도됐고, 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은 <뉴욕 타임스> 기고와 워싱턴 집회를 통해 김영삼을 지지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에 오르자 김영삼은 본격적으로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을 선언하자 호헌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직선제 개헌 이후 8월부터 김영삼은 김대중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결국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기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 소속으로 독자 출마했고, 두 후보는 각각 28%·27%를 득표해, 36.6%를 득표한 노태우 후보에게 패했다. 김영삼 후보는 선거가 끝난 직후 “이 선거는 부정선거이며 무효임을 규정한다”라고 발표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김영삼민주센터 제공</font></div>군사독재 시절 YS는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DJ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군사독재 시절 YS는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DJ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다.

3당 합당과 대통령 당선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은 원내 3당으로 밀려났다.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김영삼 총재에게 합당을 제의했고, 김영삼 총재도 비밀리에 협상에 응했다. 여기에 내각제 개헌 기대를 갖고 있던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도 합류하며 1990년 3당 합당이 이뤄졌다. 합당 결과 신생 민주자유당은 218개 의석을 보유한 거대 여당이 됐다. 노무현을 비롯한 통일민주당 8인은 ‘야합’이라고 비판하며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김영삼은 1992년 5월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대선에서 김영삼은 김대중을 193만 표 차이로 앞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90년 YS가 3당 합당을 선언한 이후 통일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시 노무현 의원이 합당을 반대했다.  
ⓒ연합뉴스
1990년 YS가 3당 합당을 선언한 이후 통일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시 노무현 의원이 합당을 반대했다.

취임 초기 개혁정책 실행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기 획기적인 개혁안을 실행했다. 금융실명제가 대표적이다. 1993년 8월12일 김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명령인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를 발동해 당일 오후 8시부터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실시했다. 이 명령 전 마지막 명령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발동했다. 법률은 ‘비실명 계좌의 실명 확인 없는 인출 금지’ ‘3000만원 이상 순인출 국세청에 통보, 자금 출처 조사 가능’을 담았다. 이 조치로 군사정권 인사들의 차명계좌가 동결됐고, 비리자금 추적이 용이해졌다.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 세력과 선긋기에 나섰다. 시작은 하나회 척결이었다. 하나회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육사 동기·후배들과 만든 군 내부 최대 사조직이다. 하나회 출신들은 군 요직을 두루 거쳤고, 일부는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외부로 알려지지 않던 하나회 인사 명단이 1993년 4월 보도되자 대규모 숙청이 진행됐다. 하나회 출신 장교들은 진급에 불이익을 받았고, 장성들은 강제 전역을 당하기도 했다.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 대통령은 최측근 몇 사람과만 하나회 척결을 논의했다. 국방부는 하나회 측의 쿠데타를 우려해 보름간 밤샘 대비를 했다. 이 무렵 대통령 지지율은 90%에 달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93년 8월12일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명령에 따라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었다. 위는 당시 실명 확인을 위해 은행에 몰린 이들.  
ⓒ연합뉴스
1993년 8월12일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명령에 따라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었다. 위는 당시 실명 확인을 위해 은행에 몰린 이들.

5·18특별법 제정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대통령 명령으로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이 법은 ‘1979년 12월12일과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를 담았다.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12·12, 5·18 사건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1996년 전두환과 노태우는 구속 기소되고, 1심에서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97년 12월20일 김대중 새 대통령 당선자와의 협의로 사면 복권됐다.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은 이제 나 하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발언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97년 2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이 차남이 관련된 한보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1997년 2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이 차남이 관련된 한보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외환위기와 퇴임

임기 마지막 해인 1997년에는 외환위기를 맞았다. 1월 한보철강을 필두로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대한민국 외환보유액은 급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195억 달러 구제금융을 원조받아 간신히 국가부도를 면했다. 대량 해고가 발생하면서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한보 사태 수사 중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됐다. 이 일로 김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대선에서 여당인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패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퇴임 시 최저 지지율(8.4%)을 남기고 청와대를 떠났다.

퇴임 후 행보와 유훈

퇴임 후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슈 메이커’였다. 2000년 강연을 위해 고려대를 찾았다가 학생들에게 제지당하자, 교문 앞에 차를 세우고 14시간 동안 농성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대해 “국민장이 아니라 가족장으로 충분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김영삼 전 대통령 측은 보도가 나온 직후 ‘문맥이 거두절미됐다’라고 해명했다). 2012년 새누리당 경선 당시에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게 “박근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라고 발언한 것이 화제가 됐다. 2009년에는 오랜 정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며 “화해했다고 봐도 된다”라고 말했다. 장례 기간 김현철씨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은 ‘통합과 화합’이다”라고 밝혔다.

 

 

“내 양심을 전두환이 빼앗지는 못해”

11월22일 새벽 0시22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고인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 현대 정치사였다.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시사IN>이 동행했다.

김연희 기자  |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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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호] 승인 2015.12.03  01:24:55

11월22일 새벽 0시22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서울대병원에 빈소가 마련됐고 11월26일 국회에서 영결식이 거행됐다.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장, 최규하·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장으로 치러지는 등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장례 절차를 두고 혼란이 일자 2011년 이를 ‘국가장’으로 통일하는 법령이 마련됐다. 이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은 첫 국가장 대상자가 됐다. 그 자체가 한국 현대 정치사였던 88년의 삶, YS의 마지막 가는 길을 <시사IN>이 동행했다.

국회 “영원한 대부이며 의회 민주주의자”

“나를 감금할 수는 있어.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갈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을 전두환이 빼앗지는 못해.” 1985년 가택연금 때 집 앞을 막아선 군인들에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릿발 같은 호통을 날렸다. 대형 스크린에 고인의 생전 모습이 나타나자 유가족들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조문객의 까만 옷 위로 함박눈이 흩날렸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공동취재단</font></div>11월26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운구 차량이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를 통과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1월26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운구 차량이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를 통과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국회에서 치러졌다. 9선으로 최다선 의원이었던 고인의 마지막 등원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 내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영결식에 참석하는 대신 영구차가 떠나기 직전 서울대학교 병원 빈소를 다시 찾았다.

고인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정의화 국회의장,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전 상임고문은 애통한 표정으로 영결식을 지켜봤다. YS의 오른팔로 불렸지만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던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자리를 지켰다. 추도사는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인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낭독했다. 상도동계 핵심으로 민주화 투쟁 때부터 고인과 함께했던 김 전 국회의장은 “김영삼 대통령님 참으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라는 말로 추도문을 마치며 눈시울을 붉혔다.

추운 날씨 탓인지 국회 잔디밭에 마련된 일반인 석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그러나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하려는 국민들의 마음만은 절절했다. 4·19 혁명공로자회 동지 20명과 영결식장을 찾은 하성수씨(74)는 “김 전 대통령은 4·19 정신의 계승자다. 우리에겐 영원한 대부이며 의회 민주주의자다”라고 말했다. 초대장이 없어 영결식장에 들어가지 못한 대학생 조대공씨(26)는 국회 앞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꽃을 바치며 “대단한 분이었다. (비판이 많지만) 3당 합당 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지도자는 드물다”라고 말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공동취재단</font></div>국회에서 열린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었다.  
ⓒ사진공동취재단
국회에서 열린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었다.

상도동 자택 “다정다감한 이웃이었다”

金永三. 대문에 붙은 문패 세 글자가 없다면 전직 대통령의 집이라고 알아채기 어려울 듯했다. 옆집과 야트막한 담을 맞댄 3층집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46년을 살았다. 역대 대통령 사저 중 가장 작은 규모다. 박정희 정권 때 초산 테러를 당하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서는 가택연금에 처해졌던 그 집이다.

이웃집 대통령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서채숙씨(69)는 “멀리서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면 ‘안녕하십니까’ 하고 먼저 인사해주셨다. 전직 대통령이지만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다정다감한 이웃이었다”라며 눈물을 훔쳤다. 25년간 이 동네에 살았다는 또 다른 주민은 “어딘가 모르게 든든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안 계시니 섭섭하다”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출발한 운구차가 비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장손인 김성민씨가 고인의 영정을 품에 안은 채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남 김현철씨를 비롯한 유가족 20여 명이 뒤따랐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자택을 빙 둘러보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짧은 이별을 마치고, YS는 상도동을 영원히 떠났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공동취재단</font></div>국회에서의 영결식이 끝나고 고인의 영정은 장손의 품에 안겨 서울 상도동 자택에 잠시 머물렀다.  
ⓒ사진공동취재단
국회에서의 영결식이 끝나고 고인의 영정은 장손의 품에 안겨 서울 상도동 자택에 잠시 머물렀다.

현충원 “전국이 다 내 고향”

상도동 자택을 떠난 운구차는 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을 거쳐 국립현충원에 진입했다. 운구 행렬로 뛰어들려던 한 중년 남성을 헌병이 제압했다. 술에 취한 남성은 “전두환 같은 XX들은 살아 있는데…. 나 좀 각하한테 데려다줘, 마지막 가시는 길에 편안하게 가시라고” 하며 횡설수설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네 번째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와는 직선거리로 300m 떨어져 있다.

장군 제3묘역 앞에 마련된 안장식장에는 유가족과 정계 인사를 비롯한 250여 명이 참석했다. 헌화 및 분향이 끝나자, 휠체어를 탄 손명순 여사를 필두로 유가족과 조문객들은 100m 경사를 올라 묘역으로 향했다. 온종일 망연자실한 표정이던 손 여사는 하관 예식 후 부활 대망 예배가 시작되자 눈을 감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의 정치 인생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차남 현철씨는 관 위에 흙을 뿌리는 허토 의식을 하며 또 한번 오열했다. “전국이 다 내 고향”이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고향인 경남 거제도 흙 대신 일반 마사토가 사용됐다.

오후 6시3분, 고인의 넋을 기리는 조총 21발이 발사되며 안장식의 끝을 알렸다. 민주화의 큰 별 혹은 변절자로 불렸던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현대사의 주인공 중 또 한 명이 국립서울현충원에 영면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공동취재단</font></div>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3묘역에서 안장식이 거행되었다(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네 번째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사진공동취재단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3묘역에서 안장식이 거행되었다(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네 번째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정치적 M&A가 부른 유전자 조작정치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YS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 또 있을까. 민주주의의 큰 별이 졌다는 애도와 3당 합당·외환위기로 나라를 망친 장본인이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그의 공과가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오성 기자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김영삼처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 또 있을까. 민주주의의 큰 별이 졌다는 애도와 3당 합당·외환위기로 나라를 망친 장본인이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평가가 극단으로 갈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공과(功過)가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정치 역정은 3당 합당 전과 후로 나뉜다. 3당 합당은 YS 최대의 허물이었다. ‘정치적 변절’이라는 점에서 1987년 양김 분열보다 더 큰 과오로 꼽힌다. 더욱이 이는 YS 자신이 던진 승부수도 아니었다. 1988년 총선 이후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내각제를 목표로 던진 미끼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90년 1월 3당 합당에 합의했다고 청와대에서 발표한 직후의 김종필·노태우·김영삼(왼쪽부터).  
ⓒ연합뉴스
1990년 1월 3당 합당에 합의했다고 청와대에서 발표한 직후의 김종필·노태우·김영삼(왼쪽부터).

흥미로운 건 당시 노태우의 책사였던 박철언 정무장관이 애초에 손을 내민 게 김대중 쪽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노태우 측은 허황되게도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아우르는 ‘보수대연합’을 꿈꿨다. DJ가 이를 거부하는 사이 야권 통합에 실패한 YS가 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군부를 끝장내기 위해 호랑이굴로 간다”라는 명분이었다.

그 후 김영삼의 행보는 ‘권력을 향한 노정’이었다. 안으로는 노태우와의 내각제 합의를 파기하는 등 민정당 계열의 군벌 세력과 처절한 권력투쟁을 벌인다. 밖으로는 (DJ를 겨냥한) 공안몰이, 지역감정 조장이 횡행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터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초원복국집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3당 합당의 가장 큰 과오는 민주화 세력이 군벌과 손잡았다는 것이다. 최근 <박정희 김대중 김일성의 한반도 삼국지>라는 정치 다큐멘터리 책을 펴낸 이충렬씨(전 노무현 대선 캠프 정책특보)는 “3당 합당은 군벌이 민주화 세력 일부를 포섭해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한국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김영삼의 ‘구국의 결단’이 군벌의 정치 생명을 공고화해주었다는 이야기다. 이충렬씨는 “오직 승리만을 위한 합종연횡과 정치적 M&A의 결과 에일리언 같은 괴물이 나타났다”라고도 평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같은 ‘민주화운동 출신 보수 지도자’가 나타나게 된 이유가 이런 ‘유전자 조작 정치’의 결과라는 것이다. ‘호남 고립’ 현상이 심화되면서 지역주의가 한국 정치의 병폐로 자리 잡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5·18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두환·노태우 등이 내란 수괴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연합뉴스
5·18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두환·노태우 등이 내란 수괴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YS에게도 3당 합당은 멍에였다. 정치적 정당성을 회복하기 위해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군벌과의 결별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 YS의 군벌 척결 프로그램은 3단계로 진행됐다. 공직자 재산 공개를 통해 군부 인사의 치부를 폭로했고, 국민적 공분이 끓어오르자 단칼에 하나회의 ‘별’들을 날려버렸다. 금융실명제는 이들 군부 세력이 재기할 수 없도록 쐐기를 박은 것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그의 호언이 현실화됐다. 헌정사상 가장 화려했던 개혁 드라이브는 YS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정치적 면죄부이기도 했다.

하나회 척결로 민정계 세력을 제압한 YS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3당 합당의 한 축인 김종필까지 제거하면서 민자당을 자신의 색깔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때 들고 나온 카드가 1994년 ‘세계화’였다. 지금 보면 의아한 논리지만, 당시 YS 세력은 ‘당의 세계화’를 위해 김종필 같은 옛 정치인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욕심이 지나쳤던 것일까. 이즈음부터 YS의 정치 행보가 꼬이기 시작한다. 조용히 고사할 줄 알았던 김종필이 ‘토사구팽’을 외치며 1995년 2월 탈당한다. 충청 지역에서 동정 여론이 들불처럼 번졌고, 이는 대구·경북(TK)까지 영향을 미친다. 박철언 등 민정계 숙청에 따른 반발이었다. 경상남북도와 충청을 기반으로 한 3당 합당의 기반이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이 틈새를 치고 들어온 것이 김대중(DJ)의 ‘지역등권론’이었다.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평당원 신분이던 김대중은 “40년 동안 영남 정권이 계속됐다. 이제는 호남·충청·강원 등도 동등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라며 정치판을 흔들어댔다. 또 다른 지역주의 조장이라는 비판이 일었지만, 지방선거 결과 집권 민자당은 참패했다. 타이밍을 노리던 DJ는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한다. 권력을 공고화하려던 YS의 승부수가 도리어 정적인 DJ에게 길을 터준 셈이다. 정치권의 호사가들이 “YS가 아니었다면 DJ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촌평을 내놓는 이유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09년 8월10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을 마치고 ‘화해’를 선언했다.  
ⓒ연합뉴스
2009년 8월10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을 마치고 ‘화해’를 선언했다.

정치적 목표에 승부수를 던진 삶

이처럼 김영삼 대통령은 ‘의도치 않게’ 한국 정치의 국면을 뒤바꿔나갔다. 요즘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새삼 회자되는 YS의 ‘역사 바로세우기’도 비슷하다. 1995년 10월 야당 국회의원 박계동이 노태우의 수천억원대 비자금을 폭로하는 대형 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1992년 대선에서 YS가 노태우로부터 받은 정치자금 문제로 비화된다. 심상치 않은 위기를 감지한 YS가 그해 11월 정치권에 던진 승부수가 ‘역사 바로세우기’였다.

5·18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내란 수괴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기본적인 경호 외에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박탈했다.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제 이름을 찾았다. 비록 그 동기는 정치적 승부수였을지라도 그 결과 군홧발로 권력을 찬탈한 정치군인이 최초로 법적 심판을 받게 됐다. 부인할 수 없는 YS의 ‘공(功)’이다.

그의 공과를 하나하나 따지자면, <시사IN> 지면을 다 펼쳐도 모자랄 것이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서슬 퍼랬던 공안정국, 1996년 연세대 사태 등 그를 ‘민주화의 큰 별’로 칭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반민주적 ‘과(過)’도 임기 중 숱하게 있었다. 지금 3040 세대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박한 것은 이런 공안통치 탓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모두가 끄덕이는 그의 ‘공’이 있다. ‘민주주의’ ‘군정종식’ 같은 굵직한 정치적 목표에 평생을 걸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직 유지 같은 눈앞의 목표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국 사회의 큰 변화를 이끌기 위해 앞장섰다. 설령 그것이 무한한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그의 정치는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인사 중 이런 행보를 걷는 이가 누가 있을까.

김영삼 대통령은 1998년 퇴임사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정치 역정은 막을 내렸지만, 그가 쓰다 만 현대사의 과제는 무겁게 남았다.

 

 

마포경찰서 정보과장 뺨을 때린 YS

누군가의 명과 암을 따지기보다 어찌하면 밝음을 보전하고 그림자를 걷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게 유익하지 않을까. 1979년 여공들과 함께했던 정치인 김영삼과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한 농민이 사경을 헤매는 오늘을 생각한다.

  조회수 : 416  |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아빠는 역사적 인물의 명암 중 어느 쪽이 큰가를 다투는 건 보통 의미 없다고 봐. 역사란 누가 잘했고 잘못했느냐를 자상하게 가르치는 도덕 선생님이 아니라 “이번 학기 네 성적은 이거다. 뭘 잘했고 뭘 잘못했는지 2학기에 보자”고 성적표를 발 앞에 톡 던지는 얄미운 ‘담탱이’에 가깝거든. 누군가의 명(明)과 암(暗) 사이 부등호를 두고 씨름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밝음을 보전하고 그림자를 걷어버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더 유익하지 않을까. 아빠는 며칠 전 세상을 떠난 김영삼 대통령, 명과 암이 너무도 선명한 그가 한국 현대사를 밝혔던 한순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

대략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Made in Korea’ 가운데 가장 먼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품목이 뭐였을 것 같니? ‘가발’이었어. “무역공사는 우리나라 수출 상품 중에서 치열한 국제 경쟁을 통하여 처음으로 세계 1위 공급국으로 등장한 가발의 이미지를 정책적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동아일보> 1972년 9월9일자). 이유는 간단해. 가발 산업은 수십만 가닥의 머리카락을 일일이 손으로 심어야 하는 ‘수작업’이었으니까. 부지런하고 손재주 좋은 노동자를 수백만명 거느리고 있던 우리나라 아니었겠니.

‘세계1위’를 달성한 가발업체 가운데 YH라는 회사가 있었어. 서울 왕십리에서 달랑 직원 10명으로 시작해 몇 년 만에 대통령 훈장이며 산업포장까지 골고루 거머쥔 기업이었지. 그러나 YH는 한국인 업체끼리의 제 살 깎아먹기 경쟁과 경영 부실에 더해, 해외로 돈을 빼돌려 그곳 한인회장까지 해먹은 장용호와 그 매부라는 경영진의 숫자 놀음으로 점차 속 빈 강정이 돼갔지. 마침내 YH는 폐업 공고를 내버려. ‘공장 문 닫는다. 지금까지 수고했다. 줄 건 없고 이제 너희들 갈 길로 가라’는 얘기였지. 노동자들은 이 배신에 치를 떨며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게 돼.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김영삼민주센터 제공</font></div>1979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당사에 들어온 여공들을 격려하고 있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1979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당사에 들어온 여공들을 격려하고 있다.

JTBC에서 방송되고 있는 웹툰 원작의 <송곳>에서 노동상담소장 구고신은 이렇게 외치지. “살아 있는 인간은 빼앗으면 화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그래, 빼앗으면 화내는 게 인간이고 한 대 맞으면 주먹 쥐고 싸우는 게 인간이지. 하지만 대한민국은 ‘법적으로’ 빼앗으면 화내는 게 불법이고 ‘법적으로’ 맞고도 받아치면 죄인이 되는 오묘한 법치국가였어. 폐업은 웬만하면 합법이었고 그에 저항하는 파업은 어지간하면 불법이었어. 오갈 데 없는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는 ‘폭력’이 됐지. 공장을 ‘폭력’으로 점거하자마자 공권력은 공장을 공격한단다. 대부분 여성 노동자인 YH 공장에 혈기왕성한 경찰들이 뛰어들어 내동댕이치고 후려치고 짓밟았어. 그들은 공권력이었고, 피를 흘리면서 때리지 말라고 호소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그들을 몸으로 막는 일은 ‘폭력’이 됐지.

보다 못한 몇몇 사람이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찾아가.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때 김영삼 총재는 흔쾌히 그들의 호소를 받아들이지. “야당 당사는 언제나 열려 있십니더. 오라고 하이소.” 경영진이 떠나버린 공장에서 분노만 씹고 있던 노동자들은 1979년 8월9일 서울 마포 공덕로터리에 있던 신민당사로 집결했단다.

여성 노동자들이 제1야당 당사를 점거 농성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렇게도 무심하던 언론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신문 기사와 뉴스에도 YH의 이름이 등장했어. 그것만으로도 여성 노동자들, 이 ‘불법 폭력 분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해. 하지만 ‘공권력’은 그 기쁨을 연장해줄 의사가 추호도 없었지. 박정희 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이 ‘불법’ 농성을 해산시키기로 해.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11월19일 ‘경찰청장 사퇴와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시국선언 발표장에서 116개 시민사회·종교·농민 단체 등 대표들이 경찰의 진압 영상 자료를 보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11월19일 ‘경찰청장 사퇴와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시국선언 발표장에서 116개 시민사회·종교·농민 단체 등 대표들이 경찰의 진압 영상 자료를 보고 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여성 노동자들은 공권력이 진입하면 전원 투신하겠다는 결의문을 울며 읽어 내렸어. 몇 명이 실제로 창틀에 매달리고 몇 명은 지쳐 쓰러지는 상황에서, 이들을 진정시킨 건 김영삼 총재였어. “성경에 나옵니다. ‘너희는 결코 두려워 말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희를 붙들리라.’ 걱정 마세요. 대한민국 역사에서 공권력이 야당 당사를 습격한 적이 없습니다. 나도 있고 국회의원 30명이 여기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야당 당사에 들이닥친 경찰 앞에 선 그는…

후일 김영삼의 행적은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하겠지만 절망에 몸을 떨며 죽음을 만지작거리는 노동자들 앞에서 “결코 두려워 말라”고 부르짖던 순간은 김영삼이라는 거목이 내뿜은 가장 큰 빛줄기 중 하나일 거야. 이어서 그는 당사 안에 있던 사복 경찰들을 힘으로 내몰라고 지시한 뒤 당사 밖을 포위한 경찰 대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 “여공(女工)들이 흥분하니 물러서라.” 경찰을 지휘하던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이 뻣뻣하게 나오자 김영삼은 그 뺨을 올려붙였어. “느그들이 참말로 저 여공들이 떨어져 죽게 만들 참이야?” 폭력이었지. 엄연한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었지. 하지만 지켜보며 조마조마하던 여성 노동자들은 뭉클해진 가슴에 총재님 만세를 부르짖지 않았을까.

그러나 ‘질서와 안정’을 지키고 ‘법의 구현자’를 자처하는 공권력은 이 도전을 살인적인 진압으로 되갚았어. 야당 당사에 경찰력을 들이미는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일’을 벌인 거야. 국회의원이고 기자고 여성 노동자고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고 쓰러뜨리고 끌고 갔단다. 그 와중에 김경숙이라는 여성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설명조차 여러 번 바뀌었지만,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김경숙은 당사 4층에서 떨어진 시신으로 발견됐지. 그렇게 공권력은 ‘폭력’을 진압했어. 이제는 고인이 된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79년 8월9일부터 11일 새벽까지 보여준 행동은,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자들의 ‘불법’을 진압하려는 부당한 ‘합법’의 대변자로서, 공권력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가르쳐준 것이라고 생각해.

11월14일 한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직사(直射)로 맞은 후 사경을 헤매는 건 알고 있겠지. 그가 불법 시위에 참여했다고 욕하기 이전에, 왜 중국인 관광객도 드나드는 청와대 앞길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헌법상 자유인 집회의 자유가 제한되는지를 아빠는 묻고 싶어. ‘합법’의 이름으로, 쓰러진 사람의 얼굴을, 그를 도우려는 이들의 등짝을, 심지어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려는 앰뷸런스까지 공격하던 ‘공권력’에 우선 항의하고 싶구나. 또 “미국 같으면 다 쏴 죽여도 무죄다”라고 지껄이는, 거의 북한 수준의 국회의원에게도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김경숙이 죽음을 맞았던 36년 전에도 “김경숙을 떨어뜨린 불순분자가 있다”라는 상상력은 발휘하지 못했지. 그런데 2015년에 수백만이 지켜본 동영상을 보고도 “물대포가 아니라 그 옆의 사람이 깔아뭉갰다”라고 생억지를 쓰고, “물대포가 아니라 ‘빨간 우비의 초절정 고수가 농민에게 치명상’” 타령을 ‘일베’가 늘어놓고, 그걸 국회의원이 받고 검찰이 맞장구치는 두꺼운 얼굴들에 대하여 헌법상 보장된 아빠의 권리를 행사하고 싶구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고 김영삼 대통령이 남긴 명언이야. 중무장한 경찰들 앞에서 경찰 간부의 뺨을 올려붙이던 그분이 불렀던 새벽을 위하여, 아빠는 돌아오는 12월5일에는 머릿수 하나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이순신 동상 앞으로 가려고 한다. 복면금지법이 발의됐다니 30년 만에 가면도 쓰고 나가야겠다. 아빠는 자유대한 국민으로서 이런 법을 인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