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체제, '다른 백년'의 세계상
1. 1987년 이후 30년
2015년이 채 보름도 남지 않았다. 새해가 되면 1987년 이후 29년째다. 1987년 태어난 아기가 곧 서른 살이 된다. 한 세대가 지났다. 벌써 그런가. 1987년의 벅찼던 희망과 기대가 어제 일 같은데, 벌써 그렇다. 그 3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세상은 어떻게 변했는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누구는 지금이 1972년의 유신 전후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누구는 더 거슬러가 1894년 청일전쟁 전야의 상황과 비슷하다고까지 말한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제 대한민국은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민주주의의 다리를 건넜다고 확신했다. 4.19 때처럼 역사가, 민주주의가 거꾸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다고. 60-70-80년대 30년 동안, 4.19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힘이 자라났고, 그랬기에 그 철벽 같았던 전두환 군사독재를 밀어뜨릴 수 있었다고. 이제 한국은 제대로 된 민주국가, 정상국가가 되었다고. 어둠의 임계점을 넘어 광명의 땅으로 들어섰다고. 세계도 환호하며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고. 역사발전의 곧고 탄탄한 정상궤도로 확실히 진입했다고. 다소의 저항이 있겠지만 시대의 대세는 돌이킬 수 없다고. 그런데 시간이 꼬여 버린 듯하다. 다 지나왔다고 생각해왔던 시간 안으로 거꾸로 다시 떠밀려가고 있다는 느낌이니 말이다.
지난 10월 '백년포럼'에서 이부영 전 의원은 1987년 민주화운동 성취 이후, 주도세력에게 '그림', '로드맵'이 없었다고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림이 분명했다. 그 그림은 4.19 이후 30년의 민주화운동이 산출한 것이다. 이 그림은 직선 몇 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그림에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주도 세력은 이 그림처럼 앞에 열린 길이 탄탄한 평지 위의 직선 길이라고 생각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획득한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를 열심히 하면, '경제사회적 실질적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따라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다. 평탄한 호수 위에 돌을 하나 첨벙 던지면 차츰차츰 확대되어 가는 동심원처럼.
그런데 그 후 30년의 실제는 어떠했는가. 1987년 6월 항쟁 10주년째에는 'IMF 사태'를 당했다. 20주년에는 '6월 항쟁을 통해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 내지 정치적 민주주의는 달성했으나 경제·사회면에서의 실질적 민주주의는 여전히 부실하거나 심지어 후퇴했다'는 식의 진단들이 나왔다. 이제 30년이 코앞인데, 이제는 그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달성'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드는 지경이 되었다.
나는 1987년 6월 항쟁 주도 세력이 개인욕심에 빠져 민주화의 대업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는 식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진단은 흔히 동기가 의심스럽거나, 혹은 너무 단순하여 그렇듯 의심스러운 동기에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치권으로 들어간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중요한 점은 나름 열심히 한다고들 했는데 엉뚱한 곳에 와 있는 원인이 뭐냐다. 직선을 따라 30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해 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둘러보니 왠지 출발한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는 느낌, 기분 좋지 않은 기시감이다.
땅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직선이라 생각했던 길이 직선이 아니었다. 지각이 변동하고 있었다. 지각판 변동처럼 대륙이 뜯어졌다 달리 합쳐지고,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되기도 하는 큰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좌니 우니, 동양이니 서양이니, 진보니 보수니, 이런 개념이 터를 두고 있는 지각 자체가 크게 뒤바뀌고 휘어지고 있었다. 1987년 직후인 1989~1990년 동구권과 소련이 붕괴했는데, 이걸 단지 사회주의 이념의 붕괴로만 이해하는 것은 엄청난 단견이었다. 이제 돌이켜보면 16세기에 시작되어 점차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 장기 유럽내전이 이윽고 종식된 것이었다. 이 점이 지각판 변동의 핵심이었다.
2. 지각판 변동=냉전 종식=장기(長期) 유럽내전의 종식
'냉전 종식은 16세기에 시작되어 점차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 장기 유럽내전의 종식이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유럽 내전'에서 생겨났던 여러 대립 프레임 자체가 시효만료가 되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개념 자체와 그 양자의 대립구도, 좌-우, 그와 연동된 진보-보수, 또 유럽 내전의 글로벌한 결과물인 서구-비서구의 차별적·대립적 문명관, 이 모든 게 이제 시효 만료가 되었다는 뜻이다.
냉전을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이라고들 했다. 이 대립 구도의 연원은 유럽의 1848년 혁명이었다. 이때 사회주의 사상이 현실정치의 힘으로 최초로 출현했다. 그러면 사회주의가 극복대상으로 본 체제, 즉 근대적 자본주의 체제는 언제 성립했는가? 유럽에서 그 초기 형태는 16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지배적으로 된 것은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의 서유럽 몇 나라에서부터다. 유럽의 그 16세기는 어떠한 시대였는가? 유럽 국가들이 먼저 종교 문제, 나중에 식민지 문제를 놓고 치열한 전쟁에 돌입했던 때다. 유럽 국민국가와 자본주의는 이때부터 시작된 길고 긴 (갈수록 확산되고 참혹해진) 전쟁 속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말한다, '전쟁이 서구 근대국가와 근대세계체제를 만들었다'라고. 그 근대국가체제와 근대세계체제 안에 자본주의/사회주의, 제국주의(서구)/식민지(비서구)의 대립이 있었다. 냉전은 바로 그러한 근대국가체제와 근대세계체제의 산물이었고, 냉전종식이란 근대국가체제와 근대세계체제가 그 생애 주기(life cycle)의 정점(頂點)을 치고 이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 근대국가 독재권의 본질은 내전 상황의 조성에 있다
독일법학자 칼 슈미트는 유럽사에서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16세기 종교전쟁(유럽 내전)에서 세속국가가 교회 대신 전권(專權)을 행사하는 권력주체로 성장했음을 주목한다. 그의 장 보댕, 토마스 홉스의 주권론 해석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슈미트, 2010, 1992). 아울러 이 시기와 거의 동시적으로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의 시대"에 "세계의 대지와 바다"가 점차 "유럽 민족들의 전세계적 의식에 의해 처음으로 파악·측량"되고 이를 통해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대지의 노모스(nomos)"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대지의 노모스'가 "대륙의 공간질서와 자유해(自由海_의 공간질서의 관계에 근거하며, (이후) 400년 동안 유럽중심적인 국제법, 즉 유럽공법(jus publicum Europaeum)을 떠받쳐왔다"고 한다(슈미트, 1995:23).
그는 그리스어 '노모스'란 "다름 아닌 강자의 임의적 권리"를 뜻한다고 풀이하는데(56), 그 핵심은 "육지 취득(Landnahmen)", "바다 취득(Seenahmen)"에 의한 "원초적 분할(Ur-Teiling)", "원초적 분배(Ur-Verteiling)"에 있다(47). 이렇듯 사뭇 거창한(?) 웅변을 통해서 슈미트는 유럽 근대주권 형성의 '비밀'과 '암호'가 부단한 전쟁 수행, 이를 통한 대지와 바다의 지배권 획득-초기 근대 유럽의 오랜 내전, 그리고 그보다 더욱 길었던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식민지 쟁탈 전쟁(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에 있었음을 공공연하게 자백한 셈이다.
슈미트 주권관의 핵심은 그의 출세작이 되었던 <정치신학>(1922)에서 집약돼있다. 그는 여기서 근대주권의 본질을 "예외를 결정하는 자"라는 점에서 찾고, 이는 "제한 없는 권력" 또는 "모든 현행 질서를 효력 정지시키는 권한"을 보유한 주체라 하였다(슈미트, 2010:16,22,24). 이렇듯 '예외를 결정하는 자'로서의 주권, 즉 "국가적 권위의 본질"은 그러한 예외 결정이 "법규범으로부터 분리되고…국가의 권위는 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강조한다(26). 이리하여 유럽 정치신학의 역정은 중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corpus mysticum)' 개념에서 16세기 '왕의 두 신체'를 거쳐, 17~18세기에 왕권(=주권) 무오류론으로 발전했다가, 이윽고 20세기 슈미트에 이르러 '법 위, 법 밖의 독재권'의 주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슈미트의 정치신학적 예외 주권론은 허다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현대 주권론과 국제관계론 영역에서 상당한 영향력과 추종자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주장이 비단 과거의 나치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서구 주권의 한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고, 이제 서구 주권 형태가 세계적으로 확산된 오늘날 그러한 특성이 서구·비서구, 좌우 구분 없이 널리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아감벤이 냉전 종식 이후 초강대국 미국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보여준 패권 행태에서 그러한 정치신학적 예외 주권의 면모가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아감벤, 2008, 2009).
물론 서구 주권론이 슈미트류의 전권(專權)적 주권론 하나로 집약되지는 않는다. 로크-몽테스큐-칸트 등으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적·분권적 주권론, 스피노자-제퍼슨 등의 민주적 주권론 역시 큰 흐름을 이루어왔다. 여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어떤 흐름도 유럽 근대 300~400년간의 오랜 내전과 해외팽창전쟁의 와중에서 형성되었다는 서구 근대사의 엄연한 사실 밖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슈미트는 자유주의의 배경에는 영미 해양패권의 예외주권이 있고, 좌파 혁명운동의 이면에도 전위당의 독재주권론이 있다는 식으로 그의 예외주권론을 정당화하고 일반화했다. 서구 담론 내에서 슈미트 주권론에 대한 반론과 비판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진정으로 근원적인 비판은 사뭇 궤변적인 그의 논변이 서구주권론·현대주권론에 내재한 근원적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냈다는 점을 인식하고 인정한 위에 가능할 것이다. (논문 <朱熹 主權論의 현재성> 중)

▲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 ⓒ연합뉴스
3. 분단체제에서 공존체제로
동구권 붕괴 이후 '냉전 종식'이 요란하게 선언되었지만, 그 실제 의미는 감추어졌다. 예를 들어 요란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긴 유럽 내전의 최종 승자가 되었고, 그 최종 승자가 이제 미래 역사의 단독 종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유럽 내전의 종식이 아니라 정반대로 유럽내전 상황의 승자독점적 연장, 영구집권을 포효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의 냉전세력이 이 주장에 환호했던 것은 당연하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여기서 나왔다. 미국 편에 섰던 승리자=점령자의 마음으로, 미국이 코치하는 대로, UN 남북한 동시가입, 한소수교, 한중수교를 차례로 수행했다. 입으로는 '냉전 종식'이었지만, 마음으로는 냉전승리세력의 단독영구집권이었다. '북방정책'이 왜 국내에서 '공안정국'과 짝을 이뤘는지도 여기서 자명해진다. 냉전승리세력의 영구집권은 냉전승리세력의 세계독점이기도 하다. 이 판의 양날의 칼을 순진하게도 잘못 읽은 것이 우선 YS였다. 그 승리가 당연히 미국편에 섰던 대한민국의 것이기도 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무차별 도입했던 소위 'Segyehwa(세계화)'(미국 주도 세계 독점의 표어였던 'globalization'의 번안어다)의 결과는 참혹했다. 소련이 붕괴된 이상 이제 세계독점의 자본논리는 구 냉전 시대와 같은 서방/동방의 구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독점의 CEO들에게는 정말 세계가 평평해졌다. 이제 한국이라고 국가부도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챙겨주고 도와줄 이유가 없다. 거꾸로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세계가 평평하지 않게 되었음을 알아야 했다. 제 위치를 착각하고 자신이 미국이라도 된 양 미국식 'globalization'을 덜컥 삼키려다 거꾸로 '세계화당하고' 말았다.
김영삼 정부는 1987년 6월 항쟁 주도세력의 강점과 약점을 잘 드러냈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같은 문제, 직선형 문제의 직선적 해결에는 통쾌한 힘을 발휘했다. 그의 과거의 투쟁경로가 이런 패턴으로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그런 식의 게임에는 강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지형 자체가 변하고 있는 문제, 지각판이 움직이고 있는 상황의 문제에 관해서는 자멸적인 패착을 이어갔다. YS는 민주화의 주역이지만 냉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민주주의관은 냉전 틀 안의 민주주의관이었다. 그의 '냉전 종식' 의식은 후쿠야마식 '역사의 종언'을 벗어나지 못했다. 후쿠야마식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남에서, 그리고 북으로도, 계속 직진하여 일로매진 완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재야세력이나 DJ는 그러한 냉전형 민주화운동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웠던 것일까? 그렇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은 이 세력이 표방해온 '분단체제론'과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모토다. '분단체제'란 '분단체제 극복'을 소리 높여 강조할수록 '분단체제'의 구속력이 강해지는 체제다. 1989년 문익환-임수경-서경원의 연속 방북이 격화시킨 '공안정국'이 그 일례다. 그 논의를 다듬어온 백낙청 교수가 강조해 왔듯 분단체제는 냉전체제의 하위범주다. 따라서 '분단체제 극복운동'이란 '냉전 프레임 내에서의 민주화운동'를 말한다.
냉전종식 이전까지는 '분단체제 극복운동'이 민주화운동 세력을 결집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냉전체제 민주화운동이란 냉전체제의 구속력(=탄압)에 비례하여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노태우 정부의 발 빠른 '북방정책'에 1987년 6월 항쟁 주도 세력은 오히려 당황하고 있었다. 겉보기로, '북방정책'이 냉전체제를 앞장서 허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착시, 착각이었다. 앞서 말한 후쿠야마식 시각, 냉전상황의 승자독식적 연장일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1987년 6월 항쟁 주도 세력은 '실제 현실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다'라고 내놓을 만한 안목이 없었다.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냉전적 프레임 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분단체제 극복'을 소리 높일수록 분단체제의 구속력이 더욱 커지는 구조가 (노무현 정부 중반 이후부터는)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심지어 유신체제의 회귀라는 불길한 소문까지 떠돌게 된 형편이다.
'분단체제'와 '분단체제 극복' 프레임, 즉 '냉전체제'와 '냉전체제 민주화운동'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분단체제'라는 말부터 버려야한다. 분단체제는 냉전종식과 함께 이미 시효 만료된, 사멸하고 있는 체제다. 죽어가는 현실이 아니라, 새로 자라나고 있는 현실, 미래가 확실한 현실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공존체제'라 부른다. 그것이 '다른 백년'의 확실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분단체제를 내려놓고 공존체제를 내세울 때, '다른 백년'의 프로그램이 열린다.
'통일', 서두를수록 멀어진다
4. 공존의 세 차원: 문명, 체제, 사상
공존체제란 단순히 남북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긴 유럽내전' 질곡이 풀렸을 때, 우선 자유로워지는 가장 큰 차원의 대립은 동/서 문명의 차등적 대립이다. 그 결과 동서 문명의 공존이 형성된다. 그 다음은 자본주의-사회주의, 좌-우, 진보-보수의 배타적 대립이 허물어지고 서로 뒤섞이는 체제와 사상의 공존이다. 남북의 공존은 이러한 복합적인 배경 위에 서 있다.
우선 남북공존은 이미 불가피한 현실이 되었다. '통일'은 좋지만, 지금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고, 서둘러 내세울수록 통일은 오히려 멀어진다. 서두를수록, 내세울수록 분단체제로서의 현실만, 마치 바늘로 꽉 찬 주머니를 꼭 쥐는 것과 같이, 더욱 튀어나와 찌른다. 반면 남북의 이 공존체제는 굳이 '극복'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닐 필요가 없다. 통일이 먼저인가, 공존이 먼저인가. 공존이 먼저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어느 쪽 어느 세력이든 '공존체제'에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공존체제가 확고하게 정착될수록 말만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통일이 아닌, 실제적 통일은 가까울 것이다.
이런 상황은 남북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적대하던 미국과 중국, 한국과 중국이 이미 공존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 미국과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공존은 이미 엄연한 국제적 현실이다. 공존을 통해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이 공영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공존이 길어질수록 우리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좋다. 인류 전체에게 좋다. 그 공존의 틀에 한국이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다면 세계인의 칭송을 받게 된다. 1987년 한국이 위대한 민주화를 통해 세계인의 칭송과 존경을 받았던 것처럼.
한국사(Korean history)에서 한국인이 지금만큼 세계로 뻗어간 경우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장보고(787~841) 연간일 것이다. 나당일(羅唐日) 해상무역을 주도하여 중국 해안에는 신라방이 즐비했고 이는 서역을 잇는 육상실크로드로까지 뻗어갔다. 오늘은 어떤가. 이미 미국, 일본, 유럽에는 확고한 거점을 마련했다. 중국연해지역과 동남아, 중앙아시아의 몇 거점에 新 신라방 벨트가 형성되었던 것도 이미 십여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이 벨트가 내륙 깊은 곳으로, 인도, 러시아, 중앙아시아, 이슬람권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 현실 속에 냉전은 이미 없다. 자본주의-사회주의, 좌-우, 보수-진보, 동-서라는 대립이 무의미해졌다. 이미 세계 현실은 공존체제다. '냉전 프레임 안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따라잡지 못했던 엄연한 현실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세계상황은 낯설지 않다. 서구주도 세계체제가 성립하기 이전의 세계, 역사가들이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이후'라고 부르는 15~18세기의 세계가 그렇다. 이때 세계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이슬람, 유럽이 동등한 위치에서 공존하며 활발하게 교류했다. 지금 세계 상황이 비슷하다. 21세기는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이후'의 세계다. 일극 이후 다극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21세기의 세계 상황에서는 자본주의-사회주의, 좌-우, 보수-진보, 동-서가 뒤섞이고 있다. '긴 유럽내전 이후'의 세계임을 말해준다. 순수한 자본주의도 순수한 사회주의도 없다.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이미 사망했다. 여기서 인류의 경제체제는 ①호혜경제, ②재분배경제, ③시장경제의 배합에 의해 구성되어 왔다 했던 칼 폴라니의 혜안에 주목한다. 국가-사회주의는 ②가 괴물이 되어 ①,③을 삼키려했고, 신자유주의-자본주의는 ③이 괴물이 되어 ①,②를 삼키려했다. 둘 다 실패했다. 오늘날 어느 건강한 경제나 세 영역의 조화로운 공존과 균형을 지향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본주의 구분에서 유래한 좌/우, 진보/보수의 구분도 따라서 마찬가지가 되었다. 개념적 구분의 적실성·배타성을 잃은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주의가 배합과 조절, 균형의 문제가 된 것처럼, 보수-진보, 좌-우도 정치위상학의 배치와 균형의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기존의 서양/동양의 대립틀 역시 해체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 대립틀 역시 '긴 유럽내전'의 산물이었다. 유럽내부의 내전이 유럽 밖 식민지 쟁탈전으로 확대되면서 서구(제국주의)/비서구(식민지)라는 차별적 대립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기존 서구(서양)/비서구(동양) 틀에서는 모든 문명적이고 진보적인 것은 서구에서 나오고, 비서구는 서구의 것을 받아들이는 정도만큼 문명적, 진보적으로 된다.
이런 생각은 일반인들에게는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지만(생각이라기보다는 생각하기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미 한참 전에 깨진 허구다. 이를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 서구중심주의라고 부른다. 수준 높은 학자들일수록 분명하게 부정한다. 서구 식민화 이전의 비서구 세계의 높은 문명 수준과 역동적 역사가 밝혀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오히려 서구학계에서 더욱 선명하다. 과거의 서구우월주의를 턱없는 오만으로 생각하여 부끄러워하고, 자신들의 선조들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일들을 반성한다. 그들이 침략했고 식민화했던 나라와 지역에 높은 수준의 문명과 역동적 역사가 있었음을 앞장서 밝혀낸다.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철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그리고 그 결과를 대중화하면서 확실하게 한다. 지금 일본과 일본이 모범으로 삼았던 서구국가들의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물론 일본에도 과거 식민지 침략을 반성하는 양심적인 학자, 정치인, 시민들이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공존체제'란 세 차원을 가진 넓고 깊은 개념이다. 우선 동서 문명의 공존이고, 여러 체제와 사상의 공존이다. 이를 한반도 상황에서 구체화하면 우선 남과 북의 공존이 있고, 이는 미국 중국의 공존과 함께 가며, 그 외곽에는 동서문명의 공존이 있다. 세 개의 동심원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 폴라니적 경제관 : 세 경제의 연관과 중간경제
현실경제는 시장경제와 국가경제(=국가주도 재분배경제), 그리고 그 사이의 중간경제로 구성된다. 다양한 민간 복지경제, 지역통화 시스템, 생산-소비 협동조합들, 대안무역(fair trade) 네트워크, 지역복지-사회기여 활동을 하는 노동조합과 종교조직, 이를 지원하는 각종 재단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연대경제, 자원경제(voluntary economy), 협동경제, 제3섹터 경제, 비영리 경제, 내포 경제(inclusive economy)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중간경제 영역은 시장논리가 강화되고 있는 최근 오히려 성장하고 있는 추세다(Salaman, Sokolowski, and List 2003; 장원봉 2006; 드푸르니 2007; Noya and Clarence 2007).
우리가 이 영역을 묶어 '중간경제'(middle economy)라고 명명하는 까닭을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먼저 그러한 여러 명칭들이 표현하는 다양한 측면을 포괄해 줄 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개념은 시장경제-국가경제와의 차별성을 분명히 표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중간경제'라는 용어는 이러한 목적에 모두 부합한다. 우선 포괄범위에서 시장경제-국가경제는 거대경제(super economy)다. 기본적으로 일국을 포괄하고, 지구화된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제국적이다. 반면 중간경제는 국지적이고 중간적이다. 존재양식에서 시장경제-국가경제가 균일적, 집중적인 반면, 중간경제는 다원적, 분산적이다. 운영원리상 시장경제-국가경제는 수직적-하향적이고, 중간경제는 수평적-상향적이다. 무엇보다 시장경제-국가경제는 기존경제이지만, 중간경제는 대안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미래형 경제다. 이렇듯 중간경제에서 ‘중간’이란 절충이 아니라 적극적-대안적 함의를 갖는다.
중간경제의 네트워크들은 너무 커도, 너무 작아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너무 작으면 '미지의 타자에 의해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원리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너무 커지면 시장-국가형의 거대경제 논리(효율지상주의+관료제)에 위협받게 된다. 물론 중간경제의 여러 단위 경제들 간의 연결망은 독립성, 자율성의 강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연결망은 국가적일뿐 아니라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활발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연결은 약한 연결(weak ties)이 될 것이고, 각 단위 중간경제의 자생성과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또한 중간경제는 슈마허가 말하는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에 친화적인 경제다(Schumacher 1973). 거대경제는 고에너지소비-노동절감적 거대기술에 의존하지만 중간경제는 환경친화적 저에너지소비-고용유발적 중간기술이 잘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다.
우리는 이러한 중간경제 논리의 고유한-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흔히 시장경제나 국가경제의 논리와 뒤섞여 선명하게 잘 드러나지 않는-특징이 경제 행위의 동기가 자신의 필요와 함께 타자의 필요를 향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타자라 했을 때, 이미 기존의 이해관계의 망에 촘촘히 묶여있는 기지(旣知)의 타자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범위 밖에 소외되어 있거나 불이익을 받고 있는 미지(未知)의 타자가 우선적으로 고려될 것이라는 점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근본적인 특징에서 연대성, 민주성, 자율성, 비영리성과 같은 중간경제의 또 다른 특징이 따라 나온다.
중간경제는 국가경제와 시장경제 사이에 존재하면서 한편으로 양 경제를 보완하고 다른 한편으로 견제한다. 경제적 정의와 친환경적 생활경제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이에 부합하는 국가정책과 기업 활동을 지지하고, 여기에 반(反)하는 국가정책과 기업 활동을 비판․시정하려 한다. 아울러 목표를 공유하는 여타 운동들과 연대해 간다. (<미지의 민주주의(증보판)>, 184-185, 인용 문맥에 따라 일부 수정)
브라질 군부독재 vs. 한국 군부독재, 운명은 왜 엇갈렸나
다음은 오는 17일 열리는 세 번째 '백년포럼'에서 발표될 김상준 경희대 교수의 발제문 "공존 체제, '다른 백년'의 세계상: 87년 민주화 세력의 실패와 새로운 정치의 모색"이다. 김 교수는 냉전 종식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아니라 "16세기에 시작되어 점차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 장기 유럽내전이 이윽고 종식된 것"으로 앞으로 "세계는 각 문명과 체제와 사상의 공존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냉전의 종식은 "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개념 자체와 그 양자의 대립구도, 좌-우, 그와 연동된 진보-보수, 또 유럽내전의 글로벌한 결과물인 서구-비서구의 차별적·대립적 문명관, 이 모든 게 이제 시효 만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세력은 분단체제와 냉전체제라는 시효가 지난 프레임에 갇힘으로써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지 못했다.
그는 "'분단체제'란 '분단체제 극복'을 소리 높여 강조할수록 '분단체제'의 구속력이 강해지는 체제"라면서 "분단체제를 내려놓고 공존체제를 내세울 때, '다른 백년'의 프로그램이 열린다"고 말한다. "'분단체제' '분단체제 극복' 프레임, 즉 '냉전체제'와 '냉전체제 민주화 운동'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백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상준 교수의 발제문을 4회로 걸쳐 게재한다.
'백년포럼'은 17일 오후 7시30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리며,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이 토론자로 참여한다. 관심 있는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5. 지난 30년을 다시 복기해보다
이러한 지각변동은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부터 서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통상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현상이 그러한 지각변동의 징후였다. 한국의 '부마 항쟁'과 '광주 항쟁'은 그 징후의 다른 쪽 면이었다. '긴 유럽내전'이 마지막 습곡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세계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신자유주의'란 그것을 더 연장해보려고 했던 몸부림이었고, 한국에서 벌어진 항쟁들은 그 상황의 높은 압력이 만들어낸 파열들이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또는 '세계화'의 초기 현상은 5공화국 때부터 '자유화' '시장개방'을 내세우며 이미 시작되었다. 이것이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을 경유해,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그리고 그 결과인 걷잡을 수 없었던 IMF 사태로 이어졌다. 아다시피, 그 이후 어느 정부도 그 심각했던 후과를 벗어나거나 돌이키지 못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그 추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어느 정도 있었으나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고(결국 그 추세에 밀려 떠내려 가버린 셈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오히려 그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키고자 했다.
한국에서 1980년대 내내 이뤄졌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 결과인 1987년 6월 항쟁 역시 그 흐름 위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긴 유럽내전의 세계체제'가 자신을 연장하기 위해 일으켰던 습곡운동은 일단 소련-동구권 붕괴라는 스펙터클로, 그 결과 생성된 미국 일극주의로 '성공리에'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채 10년이 못가는, 막간 소극이었고, 큰 그림 속의 액자와 같은 것이었다. 동구권 붕괴 후의 실제 전체 세계상황은 오히려 일극주의의 반대물인 다극주의가 거대하게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9·11이 터졌을 때,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과 유럽 사이에 균열이 생겼을 때, 이는 이미 분명해졌다. 당시 중국이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부상하고 있었고, 곧이어 남미가 떠올랐다. 신자유주의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와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이었다면, 그 석양을 상징하는 것은 2008년 미국금융 위기였다. 이어 2010년 중국이 세계 GDP 2위, 인도가 4위로 부상했고, 2011년에는 브라질이 7위로 떠올랐다. 국가별 실제 경제상황은 GDP를 실질구매력으로 환산한 PPP (purchasing power parity)가 더 유용한데, 이 GDP-PPP기준으로 2014년 IMF 통계를 보면, 아래와 같다.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과 비교해 보라. 상전벽해의 변화는 이렇게 진행 중이다.
큰 추세를 이렇게 읽으면서 다시 돌이켜 볼 때, 한국의 1987년 민주화 항쟁이 요청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긴 유럽내전'이 산출했던 여러 대립적 칸막이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앞서 말한 세 가지 차원의) 공존의 원칙을 세우고 지켜갈 수 있는 체제로 신속히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 공존의 가치를 지탱할 수 있는 축은 '공공성'으로 집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지구화, 자유화의 거센 바람을 사회 여러 분야에서 공공성의 기준 아래 조절하여 수용하면서 최저수혜층에 불이익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존 롤스의 '정의의 원칙') 체제를 재구성하는 길이었다.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공공적인 강한 정부가 필요했다.
그럴 수 있는 힘은 존재했다. 1987년 민주화 세력이 그것이다. 1987년 대선에서 야권이 분열되지 않고 집권했다면, 그 정부의 성격과 역량은 당시 격동기에 요청되었던 조절 중심의 역할을 수행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열됨으로써 1987년 6월 항쟁 주도 세력의 힘은 실제 크기보다 오히려 상쇄되어 후퇴했다. 진화가 아닌 퇴화였다. 그렇듯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서 '북방정책' '세계화' 'IMF' '양극화-청년실업' '기업사회화' '투기사회화' '속물사회화' '일베사회화' 급기야 오늘날에는 과거 독재의 재평가와 유신의 부활까지 운위되는 상황으로 미끄러져 왔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사정에서 출발했던 브라질 민주화 과정과 비교해 보면, 그 30년 간의 커다란 차이에 놀라게 된다. 박정희 정권과 비슷하게 1960~70년대 공포통치를 했던 브라질 군부독재 세력은 지난 30년 동안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약화되고 산산이 흩어졌다.
반면 1987년 이후 한국은 오히려 거꾸로였다. 군부독재 세력인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이 그 30년 동안 늘 주도권을 행사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비슷한 군부 독재 경험을 가진 브라질에선 민주화 이후 군부독재 세력이 일소됐다. 반면, 한국에선 여전히 군부독재 세력이 강한 힘을 발휘한다. 이런 차이가 왜 생겨났을까. ⓒ연합뉴스
- 브라질과 한국, 민주화 과정의 차이
1980년대 브라질 민주화의 특징은 군사정부가 초기부터 정국 흐름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점에 있다. 치밀한 장기 민정이양 플랜을 세웠음에도 그러했다. 1985년 첫 민정이양 선거에서부터 제1야당인 PMDB(브라질민주운동당)에 패배했던 것이다.
이후 1990년대를 거쳐 2003년 이후 PT당의 룰라 집권기에 이르면 구 보수세력은 자신의 군사 정권의 뿌리를 스스로 부정하고, 자신을 미국 민주당과 같은 '진보적' 성격의 정당이라고 포장함으로써만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 소수 야당 세력으로 전락했다.
오히려 구 야당이 주도세력이 되어 거꾸로 이렇듯 왜소화된 구세력을 나름의 목적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이용한다. 카르도수의 PSDB(브라질사회민주당)가 대선과 총선에서 그랬고, 2002년 이후 대선·총선에서는 PT도 그렇게 했다. 이러한 과정 전반을 보면 한국 민주화 과정과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 1987년 이후 한국은 군부독재 세력과 야당 세력의 관계가 거꾸로 작동했다. 군부독재 세력인 민정당, 민자당, 한나라당이 늘 주도권을 행사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신생 정당인 PT가 1980년 출범 시부터 PMDB에 다음가는 강력한 제2야당으로 인정되었다는 점, 그리고 1985년 민정이양 선거 시 제1야당인 PMDB가 분열되지 않았다는 점이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PMDB는 1985년의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980년대 초, 독립정당 PT의 출범에 확고한 중지(衆智)를 모았던 범사회운동 세력도, PMDB에 당분간 충실했던 카르도수를 비롯한 PMDB 좌파도 브라질의 장기적 민주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오늘날 브라질에서 PT와 PSDB는 맹렬한 라이벌 관계이지만, 한국 민주화의 지난 경험에서 비추어 볼 때, 이 양자의 라이벌 관계는 오히려 부러운 점이 있다. 군사독재 세력을 완전히 제압한 민주 양당의 경쟁관계라고 보아줄 점이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도 군사독재 잔재 세력이 정치판의 최대주주다. (<진화하는 민주주의>, 163~165p)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역량, 배경, 역사의 차이를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지금 부(富)의 크기를 가지고 남미를 내려다보는 것은 속 빈 졸부의식에 불과하다. 브라질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남미 나라들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되어 면면히 이어져온 자랑스런 독립과 자존의 서사(敍事),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독재자들이 많았지만 그와 맞서 싸운 역사 역시 대단했다. 21세기 들어 브라질만이 아니라 남미 전역에 속속 진보 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남미 민주세력의 원숙한 정치적 경험의 역사적 부피에서 비롯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1987년 이후 30년의 경험을 더욱 냉철하고 뼈아프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6. 공존과 평화의 길
최근 '국정교과서' 파동은 뜻밖에 대한민국의 정치판도에서 매우 중요한 비밀을 하나 노출했다. 대한민국의 의식지형에서 90%와 10%의 대립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는지를 누군가 '실수로' 그만 자백해버린 것이다.
그 핵심은 문명관의 차이에 있다. '공존의 문명관'과 '냉전의 문명관'의 차이다. 냉전의 문명관은 "오직 탈아입구의 길, 서구화의 길, 바다 문명의 길, 반공의 길, 친미의 길, 친일의 길을 통해서만 번영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아래 박스 참고).
과거 일본이 걸었던 탈아입구란 우리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 중의 하나가 되었던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길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 국정교과서 주도세력은 우리의 과거 식민지 경험을 재앙이 아닌 축복으로 본다. 그들은 서양과 동양, 바다문명과 대륙문명이 공존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게 되었음을 믿지 않는다. 오직 반공, 오직 친미, 오직 친일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너무나도 낡아빠진 옛이야기라는 것을, 놀랍게도 여전히 믿지 않는다. 지금 세계가 남북이, 미중이, 동서가 공존하는 세계로 가고 있음을 굳이 부인하고 부정하고 싶어 한다.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세력이 10%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90%라고, 이번 '국정교과서' 사태를 통해 바로 그 사람들 스스로 자백한 셈이다. 대한민국의 '공존파' 정치 세력이 눈여겨 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공존의 길과 대립의 길
20세기는 그 전반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후반은 동서냉전으로 얼룩진 세기였다.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특히 한반도는 20세기의 상처를 가장 크게 받았던 곳이다. 그러한 20세기의 상처투성이의 사유법 안에서 한국과 일본은 생존자(survivor)였고, 북한과 중국은 패배자(loser)였다는 논리가 생겼다. 이 논리는 생존과 패배의 구분선을 서구화와 비서구화로 나눈다.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논리다. 과거의 수렁에 빠져 탈아입구를 이루지 못했던 중국, 그리고 그 길을 따랐던 북한은 패배자가 되었고, 아시아라는 수렁을 빠져나와 과감히 새 길을 간 일본, 그리고 그 길을 따랐던 한국은 생존자가 되었다는 논리다. (…) 그리하여 한반도의 일제 식민지 경험도, 한국의 대미 종속의 역사도, 그것이 아무리 비참하고 부끄러웠다 하더라도, 중국과 북한의 실패에 대비해 보면 오히려 축복이요 영광이었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탈아입구의 편에 서지 않은 중국과 북한과의 거리를 멀리 할수록, 그들과의 대립을 날카롭게 할수록 항상 무조건 옳고 좋다고 하는 논리가 성립한다. 또한 이러한 사고법에서는 북중과의 대립격화는 미일과의 결속강화와 항상 동의어가 된다. 제로섬이다. 이쪽이 커지면 저쪽이 작아지고, 저쪽이 커지면 이쪽이 작아진다고 하는 단세포적 사고법이다. 대한민국은 오직 탈아입구의 길, 서구화의 길, 바다문명의 길, 반공의 길, 친미의 길, 친일의 길을 통해서만 번영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 길에서 한 치라도 벗어남은 몰락이다. 여러 경로의 병립과 배합의 가능성은 이러한 완고한 사고체계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탈아입구의 편에 서지 않은 아시아의 부상(浮上)은 오직 외면과 거부와 부정의 대상이 될 뿐이다. (…) 이제 탈아입구의 주체가 아닌, 아시아의 아시아라는 주체가 오랜 망각과 억눌림의 세월을 딛고 새롭게 일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다만 불길하기만 한 전조로 느낄 뿐이다. 지구적 문명 재편의 가능성 이야기가 나오면 이를 그저 부정하고만 싶어한다. 뛰어봐야 벼룩이다. 결국 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고 싶어 한다. 어디서 이런 심리가 나오는가? 변화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저 기득권에만 안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는 너무나도 명백한 변화의 징후를 굳이 외면하려고만 한다. 그저 철 지난 20세기 냉전불패의 공식을 여전히 신주단지 모시듯 숭배할 뿐이다.
중국과 북한 체제에 문제가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국 문화혁명기의 혼란이나 북한의 장기 대기근의 편력 그리고 삼대세습 등의 현상은 이들 체제에 대해 커다란 실망감을 주었다. 냉전논리는 이러한 실패들을 자기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상대가 처참한 실패를 계속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정당성이 확증되는 논리란 매우 불안정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된 중국의 급부상이다. 실패해야 할 중국이 오히려 성공을 거듭하고, 급기야 세계정세의 판도를 변경시킬 만큼 큰 힘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완강한 냉전논리를 근본에서 흔들어 놓고 있다. 중국 역시 비로소 중국 자신의 길을 버리고 탈아입구의 길로 나선 것인가? 중국의 실상을 잘 알게 될수록 사정이 그와 다름을 알게 된다. 서구의 길의 모방만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중국 고유의 발전 기반과 경로가 있다(이는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다). 탈아입구와 같은 식의 아시아 버리기, 중국 버리기, 통째로 서구 따라하기와는 매우 다르다. 이 속에서 중국의 역사는 오히려 새롭게 다시 조명되고 있다. (…) 거듭 강조하거니와, 20세기식 사고방식을 벗어나고 넘어서야 한다. 20세기에 동서냉전 구도보다 더 뿌리 깊었던 것은 서구(the West) 대 비서구(the non-West), 또는 널리 쓰였던 다른 말로, 서구 대 서구가 아닌 나머지(the Rest)라는 이원구조였다. 우월과 열등, 성공과 패배, 흑과 백, 선과 악의 이항대립구조, 절대적인 서열체제였다. 한번 만들어진 가치 패턴, 사고 패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1990년대 동구권 붕괴로 냉전구도의 축이 우선 무너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서구 대 비서구라는 이원구도 역시 밑바탕에서부터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21세기 징후의 진정한 시작은 서구 대 비서구의 시간 서열 체제의 첨단에 서있던 월가의 금융권력과 아프간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네오콘 일극주의가 동시에 크게 흔들렸다는 사실에 있다. 2009년 G20 회의 이후 의장인 영국총리 고든 브라운이 워싱턴 컨센서스, 신자유주의는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이미 그러한 선언 이전에 종언을 고한 상태였다. 이로써 순수한 사회주의-공산주의만이 아니라 순수한 자본주의라는 생각 역시 근거를 잃었다. 역사 속에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를 시도했던 실험들은 모두 실패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인류 문명의 지구적 재편이 이미 활발하게 작동 중이다. 동아시아권의 도약만이 아니다. 앞으로 십몇년 안에 남미와 이슬람권이 크게 환골탈태하여 부상할 것이고, 힌두권의 진출이 두드러질 것이다. 19세기 이래 영원한 질서처럼 보였던 서구 대 비서구의 일극(一極)적 서열구도는 이러한 격변 속에서 다문명의 비서열적 공존, 동등한 관계정립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정한 상호존중에 기초한 공존과 번영의 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20세기 동아시아에서 탈아입구의 길은 분명 상대적 우위를 누렸다. 이 길을 주도한 일본 내부에서 그 경로에 대한 날카로운 자기비판이 있었고, 한반도가 그 방향으로의 진출의 일차적이고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던 역사가 있음에도 그렇다.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고 흥남철수에서 살아남은 한국과, 한국전쟁 특수(特需)의 바람 위에서 재기의 기회를 잡은 일본은 세계냉전체제의 동아시아 첨병의 역할로 서서히 그 국제적 위상을 높여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 일본인과 한국인이 오직 철저한 경제적 동물이 됨으로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단히 자신의 영혼을 단련하고, 문명적 인간,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책무 역시 추구했다. 이제 대한민국 사람들이 세계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자랑할 수 있는 진정한 성취와 자산은 단순히 경제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화요 여전히 강하고 진취적인 시민적 에너지다. 한국을 잘 알고 사랑하는 많은 외국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본의 경우에도 헌법 제9조의 평화조항이 의연히 흔들림 없는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 사회, 일본 시민의 조용하지만 깊은 민주적 저력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영국을, 다음에는 미국을 모범으로 추구했던 탈아입구란, 실은 절충적 프로젝트였다. 나를 다 지우고 철저히 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시간의 동시성’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신을 구성하는 어느 한 시간을 완전히 지워버린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나를 구성하는 시간이란 항상 복합적이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은 분명 중국과 북한에 비해 서구화된 사회다. 그렇지만 서구화의 한 편에는 영혼을 내다 판 공허와 신경증이 있지만, 동시에 서구 전통에서의 비판성과 창조성을 흡수해 쌓아 온 축적이 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아울러 그 동안 한국과 일본이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과 문화역량을 몽땅 포기하고 내다버렸던 것도 아니다. 동아시아 문명전통의 온축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를 묵묵히 연찬해 온 흐름들이 양 사회에 공히 강하게 존재했다. 흑백대립식, 제로썸식의 동서대립 문명관이 너무나 거칠고 단순하고 빈곤할 뿐이다.
동남아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권과 환태평양권의 접면에 위치한 한반도의 위치는 이제 21세기 문명재편의 시대에 특별히 역동적인 기회를 주고 있다. 탈아입구의 구호를 국시(國是)처럼 떠받들어 온 일본에서도 이제 다시 아시아로 들어가자(入亞)는 취지의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세계의 흐름을 볼 때 불가피한 일이다. 서구권 질서에 오래 편속(編屬)되어 있었던 일본과 한국이 20세기 중후반 동아시아의 부흥을 선도하였다는 것도 흥미로운 역사의 역설이다. 그 토대 위에서 이제 중국의 부상을 계기로 보다 폭넓은 지구적 문명재편의 적극적인 촉매자 역할을 자임해야 할 때다. 천년에 한 번 올, 매우 귀한 역사적 호기다. 동아시아인들이 과거의 낡아빠진 냉전적 이념틀에 붙잡혀 스스로의 발목을 묶는다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동아시아 동반 번영의 기틀을 세워야할 이 중차대한 시기에, 동아시아 내부의 대립과 긴장을 부추기는 것만을 능사로 아는 것은 철 지난 냉전체제의 주인 없는 번견(番犬) 노릇에 불과하다. 이러한 맹목적 적대감과 단세포적 사고법이야말로 미래에 대한 맹목적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는 증거다. 이제 20세기적 냉전의식을 가지고는 5대양 6대주 어디에서도 세계인, 세계시민의 역할을 할 수 없다. 한국인은 세계인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문명인이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동아시아를 품는 문명적 품을 갖추는 일이다. (<맹자의 땀 성왕의 피>, 591~596p)
현재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정치세력의 진정한 구분선은 좌-우, 진보-보수가 아니다. 공존이냐 냉전이냐, 평화냐 대결이냐의 가름이 있을 뿐이다. 이 양 진영이 채택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은 커다란 차이 있다. 냉전=대결 노선의 정책 폭은 공존=평화 노선의 정책 폭보다 좁게 마련이다. 현 정부가 도대체 정책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정책운용의 폭이 좁아진 것은 시대착오적인 냉전파 정치세력의 필연적 운명이다. 요 근년 지겹게 보아 온 것처럼, 이들에게 정책이란 오직 반대자들에게 '종북' 이니 '좌파'니 철지난 딱지붙이기 밖에 없다. 반면 공존파의 정책 폭, 활동 폭은 넓다. 정치, 경제, 노동, 고용, 교육, 복지, 국제정치, 무역 등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자본주의-사회주의, 좌-우, 보수-진보니 하는 구분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원칙함이 아니다. 앞서 충분히 이야기해 둔 것처럼, '공존'과 '공공성'이라는 원대하고 분명한 대원칙이 있다.
또 하나 밝혀진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냉전-대결 세력 역시 시대의 대세가 공존과 평화로 가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알고는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좌-우, 진보-보수를 넘나든다. 그래서 현 정부가 지난 대선에서 복지국가 공약을 내걸었다. 물론 선거 끝나면 마치 '농담이었어요'라는 식으로 입을 싹 씻는다.
또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맺어보려고 나름 고민하는 듯하지만, 귀국 비행기를 타는 순간 마음은 '공안정국'과 'IS 만들기'로 달려간다. 이들 역시 시대의 대세가 공존과 평화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 과제를 진심으로 자임하고 수행해나갈 의도는 추호도 없는 것이다. 다만 기만적으로 상황에 따라 이용할 뿐이다. 이들의 본심은 항상 냉전과 대결을 부추길 ‘꺼리’만을 찾는 데 온통 집중되어 있다.
문제는 현재의 야권 내부에도 있다. 스스로 서로 딱지 붙이기 바쁘다. 그렇듯 '가까울수록 의심하고 거부하는' 습성은 어디서 왔을까? 가혹한 냉전 상황, 독재 하 저항운동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멘탈일 것이다. 그들의 의식은 냉전을 벗어났다고 주장하겠지만, 무의식은 그렇지 못해 보인다. 아직 냉전 상태고 분단체제다. 무의식에서는 현 집권세력과 꼭 같은 꼴인 것이다. 다만 뒤집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제 정치에서는 냉전=대결파보다 무능하다. 활짝 열린 공존체제의 세계상 속으로 힘껏 떨쳐나가 뛰지 못하고, 좁은 집안에서 아옹다옹 다툰다.
공존체제는 '긴 유럽내전' 이후의 세계상이다. 이런 차원을 제대로 보자면, 최소한 '다른 백년'을 내다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그러한 시야를 갖춘 정치세력의 국량(局量)이란 어떠한 것이야 할까? 최근 좋은 책을 하나 읽었다. 현재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는 위잉스(余英時) 교수의 <주희(朱熹)의 역사세계>다. 여기서 위 교수는 우리가 보통 가지고 있던 '주자(朱子)=주희'에 대한 편견을 시원하게 깬다. 주희는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고집 세고 강퍅한 논쟁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새디스트적 도덕주의자가 아니었다. 흔히 주희는 적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육구연(陸九淵)과도 적이요, 진량(陳良)과도 적이요, 섭적(葉適)과도 적이요 등등. 철학사적으로 당대에 주희와 같은 급이었던 1급 사상가들 모두와 주희는 사상적으로 적대했다고 배워왔다. 이 모두가 침소봉대요, 그림 전체로 보면 완전히 정반대였음을 위 교수는 밝혀냈다. 육구연과도, 진량과도, 섭적과도 정치적·철학적으로 서로 격려하고 지원하는 끈끈한 동지였다. 철학적 논쟁은 했다. 제대로 했다. 그러나 주희, 육구연, 진량, 장식, 여조겸, 섭적 모두가 하나의 대원칙을 확고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황제 전권(專權) 체제에서 군-사 공치(君-士 共治)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대원칙이었다. 이 점은 이들의 선배였던 범중엄(范仲淹), 왕안석(王安石)도 꼭 같았다. 그러면서 과거 천 년을 보고 미래 천 년을 봤다. 그런 큰 포부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철학 문제에서 논쟁을 하면서 오히려 이를 통해 더욱 강한 유대를 형성해 갈 수 있었다. 배울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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