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 년을 가져온다 ①
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 년을 가져온다.
(1) 한국인의 경험
1970년, 학부 3학년 때 국사연구실에서 동양사연구실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대 ‘사학과’ 68학번은 세 학과로 나눠지기 전의 마지막 학번이어서 임의로 전공을 택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사에 마음이 있었지만, 사상사를 폭넓게 공부할 생각으로 동양사를 선택한 것이다.
중국과학사 중심으로 공부를 이어가다가 1980년대 말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마테오 리치의 선교활동으로 잡은 후 동서교섭사를 중심으로 문명사 공부를 진행했다. 그러다가 2008년에 이르러 한국사를 개관하는 책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내게 되었다.
< 밖에서 본 한국사>는 그동안 문명사 공부의 소득을 한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보태도록 제안하는 의미로 쓴 것이다. 그 책에 이어 동양사와 세계사를 개관하는 책들을 시도할 생각이었고, 한국사에 깊이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고개를 들고 있던 '뉴라이트' 역사관을 알게 되면서 이를 반박할 필요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몇 해 동안 들여다보게 되었다.

▲ 역사학자 김기협 ⓒ홍익표 의원실
2009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작업을 시작해 2010년 7월에 냈다. 식민지로 전락한 지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망국의 원인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이 사회에 아쉽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작업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을 부각시켰다. 선악(善惡), 충간(忠奸)의 차원을 넘어 '문명의 위기'라는 거시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역사 해석의 틀을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갈라서 본다면 나는 한국근현대사에서 외인론을 앞세운다. 사회 내부의 노력이 외세의 야욕 앞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던 당시 상황을 놓고는 시각의 큰 틀을 외인론으로 짜는 것이 자연스럽다.
조선의 망국에는 (1) 왕조의 멸망, (2) 이민족 지배, (3) 전통의 단절, 세 개 층위가 겹쳐져 있다. 조선 왕조의 멸망을 위한 조건은 내인론으로 대충 설명된다. 그러나 내부의 왕조 교체에 그치지 않고 이민족 지배를 받게 된 이유는 내인론으로 부족하다. 나아가 전통의 단절이란 민족사 초유의 상황은 거의 전적으로 외부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망국의 세 개 충위 중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여파가 큰 것이 바로 전통의 단절이다. 그래서 외인론에 더 큰 비중을 둘 필요를 느낀 것이다.
< 망국의 역사> 작업을 끝내면서 작업을 시작할 때보다도 더 큰 아쉬움을 느꼈다. 망국의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국(復國)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더 크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바로 <해방일기> 집필 작업을 시작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지 35년 만에 '광복'을 맞았다고 하는데, 민족국가를 회복하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가? 왜 분단건국과 전쟁이라는 최악의 진로로 접어들게 되었는가? 망국 자체보다도 더 설명하기 힘든 문제다. 그래서 1945년 8월에서 1948년 8월까지 3년간의 '해방공간'을 일기 형태로 면밀하게 복원하는 작업을 2010년 8월부터 2013년 8월까지 3년간 진행했다.
< 해방일기> 작업에서 해방의 상황이 망국의 상황과 '서세동점'이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확인했다. 서세동점이란 19세기 중-후반에 걸쳐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부국강병을 이룩한 서양 열강의 압도적인 위세 앞에 동양의 전통사회가 '굴복이냐, 파괴냐'의 양자택일에 몰린 역사적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20세기 들어 일본이 열강의 대열에 진입한 상황에서는 서세동점이 일단락된 것으로 흔히 본다.
그러나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서세동점'의 의미를 넓혀 볼 필요를 느꼈다. 일본의 열강 진입은 동양의 한 모퉁이에 ‘서세’가 내면화한 결과로, 서세동점의 큰 틀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서세'의 한 부분이 되어 '동점' 현상을 더욱 격화시키는 첨병 노릇을 맡았던 것이다. 일본의 러-일전쟁(1904~05) 승리에 안중근, 량치차오 같은 조선과 중국 식자들이 환호한 것은 일본을 서세동점에 대한 저항의 주체로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변질이 확인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07년에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냈고 1919년에 임시정부는 파리 평화회담에 대표단을 보냈다. 그러나 두 번 다 참석 자격을 얻지 못했다. 서세동점의 구조적 발판인 제국주의체제는 지속되었고, '민족자결' 원칙은 패전국의 영토와 식민지에만 적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던 1943년 11월 미-영-중 정상회담에서 나온 카이로선언이 조선 독립에 대한 첫 국제적 지지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인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략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직전에 나온 모스크바선언의 오스트리아 독립 방침과 함께 카이로선언의 조선 독립 방침은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뜻을 둔 것이었다. 종전 후 두 나라의 독립에 10년과 5년의 신탁통치를 부과한 데는 두 나라가 연합국의 의도에 부응하지 못한 데 대한 벌칙의 의미가 있었다.
일본 항복 후 연합국은 카이로선언에 따라 조선 독립을 추진했지만, 독립 자체보다 일본제국의 약화를 위한 부수적 조치였을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독립을 도와주기보다는 점령국인 미국과 소련의 국익을 확보하는 데 더 급급했다. 그 결과가 분단건국과 내전이었다.
여기서 나는 다시 외인론에 치중할 필요를 느낀다. 망국 당시에도 해방 당시에도 이 사회에서는 사회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 어느 사회에 못지않은 노력이 있었다. 매국노-반역자의 준동 역시 어느 때 어느 사회에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회의 건전한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매국노-반역자의 책동에 휩쓸리게 된 것은 외세의 힘이 압도적이던 서세동점의 상황 때문이었다. 망국 때나 해방 때나 조선사회를 불행의 길로 몰고 간 것은 매국노-반역자의 힘이 아니라 그들이 등에 업은 외세였다.
< 해방일기>에 이어 <냉전 이후> 집필 작업을 진행했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는 분단건국 이후 냉전의 첨병 노릇에 묶여 있던 한민족에게 민족의 진로를 다시 세울 반세기만의 기회였다.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민족사의 큰 전환점이 될 것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이제 당시의 희망은 사그라지고 냉전 시대 못지않은 긴장상태로 돌아와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찾은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영접하는 모습. ⓒ연합뉴스
<냉전 이후> 작업에서 나는 1990년대 10년 동안 남북관계를 되돌아보았다. 2000년의 정상회담이 10년 전 공산권 붕괴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면 그 후의 진행이 순조로워야 했다. 실제로 이 10년 동안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면, 민족사회의 복원(復元)이라는 대세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도처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장애물은 지금도 작용하고 있다.
1990년대 남북관계 전개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뒤얽혀 나타났지만, '서세동점'이라는 기반조건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00년 전의 망국 단계나 50년 전의 해방 단계와 다른 점은 '서세'가 남한 사회에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한 사회 내에 '외세'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100년 전이나 50년 전에 비해 민족사회의 의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퇴화되어 있는 것은 이 '내부의 외세' 때문이다.
70년 전 '해방' 때 해방의 주체는 분명했다. 조선 인민의 대다수는 일본 통치자들이 강요한 '근대화'에 물들지 않고 있었다. 새로운 활동방식과 생활방식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좋다는 생각이 별로 없고, 왜놈들에게서 언제고 '해방'이 되기만 하면 원래 방식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방식을 이롭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소수였고, 그들에게는 '친일파'의 딱지가 붙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친일파 중에 진짜 악질분자는 극소수였다. 대다수는 보통사람들이었다. 친일파로 몰린 지주들 입장을 보면, 일본 통치에 따른 소유권 절대화가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었다. 소작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지주의 이익 극대화를 보장해준 이 제도는 농업사회를 파괴해 인구의 3분의 1을 유랑의 길로 몰아넣었지만 대다수 지주들은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것을 자기 권리를 지키고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 아무 죄의식 없이 이에 호응했다. 잘못된 정치가 보통사람들을 반사회적 행동으로 이끈 것이다. 일본인 통치자들은 조선사회의 장래보다 자기네 이익을 앞세웠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정치를 조선에서 행했던 것이다.
잘못된 정치가 보통사람들을 반사회적인 길로 이끄는 상황은 해방 후 남한에서 계속되었고, 이 흐름에 휩쓸리는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해방 전의 외세였던 일본에서는 1백만 명 가까운 군인, 관리와 민간인이 건너와 통치체제의 수혜자 자리를 차지한 반면 해방 후의 외세인 미국에서는 건너온 사람이 적었고 직접 수탈의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한국인이 특권층에 편입될 수 있게 되었고, 일반 대중의 물질적 혜택도 커진 것이다.
해방 1년 후인 1946년 8월 미 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 중 원하는 체제를 묻는 문항에 대해 응답자의 70%가 '사회주의'를 택했다. '공산주의'는 7%, '자본주의'는 14%였다. 70%의 응답자가 사회주의를 좌익으로 생각해서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나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보다 제한된 범위의 소유권을 존중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를 생각하고 지지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90년대에 남한 민심은 자본주의에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980년대를 전후한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물질적 풍요에 국민 대다수가 도취해 있었다. 자본과 권력을 쥔 기득권층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철석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 믿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베트남전 참전의 문제점에 대한 사회의 무감각이었다. '잘 살아보기' 위한 어떤 행동도 정당화하는 풍조가 윤리의식과 정의감을 압도하는 사회였다. 다른 민족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회가 내부의 고통에 민감할 수 없다. 1990년대 남한 사회에는 자본주의에서 파생된 개인주의와 배금주의가 팽배해 있어서 북한 봉쇄정책을 원하는 미국 네오콘 세력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해방 후 50여 년간 자본주의 정신을 꾸준히 내재화해 온 남한 사회에 뚜렷한 의식 변화가 시작된 계기는 1997~98년의 IMF 사태였다. 무한한 경제성장의 꿈에 금이 가고 다수 국민이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동안 무뎌졌던 다양한 가치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IMF 사태 이후 10년간 기득권층의 권력 독점이 얼마간 풀어진 동안 개인주의와 배금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 남한 정치의 쟁점이 '민주화'와 '산업화'의 단순대결 양상에서 벗어난 것도 국민의 의식 확장에 따른 것이다. 진취적 정치활동이 평화, 환경, 복지, 안전 등 종래 경시되어 온 가치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수십 년간 '민주화' 간판에만 매달려 온 제1야당이 2010년대 들어 지리멸렬한 양상에 빠져 있는 데서 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변화에는 외부 정세의 변화로 촉발되는 측면이 크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과의 관계 확대다. 수십 년간 '중공 오랑캐'로 욕하며 멀리하던 중국을 갈수록 가까이 하고 더 잘 알게 되면서 냉전시대의 '반공' 의식은 소수 노인네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 패권의 퇴화 현상도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이라크전쟁 실패에 이어 2008년의 금융공황으로 미국이 이끄는 세계체제의 파탄이 다각적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문제점과 한계를 논하는 '세계체제론'이 각광을 받으며 발전해 나가고 있다.
1970년대 이래 제기되어 온 자원, 환경, 경제구조, 정치구조 등 여러 방면의 문제들이 21세기 들어와서는 미래의 위험이 아닌 현실의 문제로 심화되고 있다. 이 문제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종합해서 변화의 큰 흐름을 떠올릴 단계에 와 있다. 나는 이 흐름의 한 측면이 150년간 지속해 온 '서세동점' 현상의 해소라고 본다.
서세동점의 해소란 동양 국가의 국력이 서양 국가에 대한 열세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체제의 지속적 확장이 그치는 데 서세동점 해소의 본질적 의미가 있다. 20세기 내내 많은 동양인의 의식을 지배해 온 계몽주의적 가치관을 극복하는 것이 또한 서세동점 해소의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근대화'가 절대적 과제로 제기된 개항기 이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온 사실과 가치들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50년간 익숙하던 '상식'만으로는 장래를 내다보는 데 심각한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망국과 분단과 대립을 강요해 온 '서세'가 물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진 정보와 정보처리방법으로는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그렇게 볼 만한 근거가 다르게 볼 근거에 못지않은 단계에 와있다. 서세동점의 해소가 진행되고 있다는 내 관점에 아직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에는 동의할 것으로 믿는다.
오는 11월 26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리는 '백년포럼'에서 발표될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발제문 '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년을 가져온다'의 두 번째 글을 싣는다. 이번 '백년포럼'에서는 김기협 선생의 발제에 이어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가 토론을 할 예정이다. 발제문의 3회분은 25일에 게재될 예정이다. 편집자
(2)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흐름
아편전쟁의 원인
1793년 조지 매카트니가 영국왕의 사절로 중국에 왔을 때 황제에게 고두(叩頭, kowtow)의 예를 거부해서 국교 수립을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은 낭설이다. 이듬해 베이징에 온 네덜란드 사절단은 고두의 예를 행했지만 역시 국교 수립에 실패했다. 청나라 황제와 조정은 중국이 오랫동안 외국을 대해 온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건륭제가 매카트니에게 들려 영국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그대 나라 사람 하나를 천조(天朝)에 보내 그대 나라를 대표하게 하고 그대 나라와의 교역을 감독하게 해달라는 그대의 요청은 모든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고 들어줄 수 없는 것이오. 천조에 봉사하는 유럽인들이 북경에 살도록 허락받아 온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들은 중국 복장을 입어야 하고 지정된 장소에서만 활동할 수 있으며 제 나라로 돌아갈 허락을 받는 일이 없소. 그대도 관습을 잘 알 것이오. 그대가 보내려 하는 사절에게 북경의 유럽인 관리들과 같은 위치를 부여할 수도 없으며, 자유로운 활동이나 본국과의 연락을 허용할 수 없소. 그러니 그가 이곳에 있더라도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오.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오직 훌륭한 통치를 행하고 천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뿐이오. 진기한 물건이나 값비싼 물건에는 관심이 없소. 그대가 보내온 공물을 내가 가납하는 것은 머나먼 곳에서 그것을 보내온 그대의 마음을 생각해서일 뿐이오. 이 왕조의 크나큰 덕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모든 왕과 부족들이 육로와 수로를 통해 귀한 공물을 보내오고 있소. 그대의 사신이 직접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없는 물건이 없소. 나는 기이하고 별난 물건에 관심이 없으며 그대 나라 출산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없소."
16세기 초 동양항로 개척 이래 유럽 전체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심각한 무역 역조를 겪어왔다.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채굴한 막대한 양의 은이 유럽인의 손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더 이상 은의 채굴을 늘리기 어려워진 18세기 말에 이르러 영국 등 산업혁명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유럽국들은 공산품의 수출로 이 역조를 메울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역 확대를 위해서는 국교 수립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절단을 보냈지만, 중국 측에게는 종래의 관습과 제도를 바꿀 뜻이 없었다.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대 중국 무역 역조를 극복하기 위해 아편 수출정책을 추진했다. 인도를 통치하던 동인도회사가 아편을 대량생산해서 콜카타에서 경매로 팔면, 중국의 금령을 뚫고 가져가 파는 것은 상인들의 몫이었다. 아편 사업은 대박이었다. 18세기 말 연간 약 1000상자(한 상자는 60kg 남짓)에서 1830년대에는 연간 3만 상자까지 늘어나, 중국의 가장 큰 수출 품목인 차의 수입액과 맞먹게 되었다. 여기에 제1차 중영전쟁(1840-42)의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아편전쟁'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개항의 압력
아편전쟁은 물론 중국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제2차 중영전쟁(1856-1860)의 충격만은 못했다.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해서 국토 일부를 유린하는 정도의 사태는 역사상 꽤 자주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를 점령당하는 사태는 그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서세동점' 현상은 제2차 중영전쟁을 계기로 본격적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서양 문물을 적극 도입하려는 '양무(洋務)운동'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도 그 여파가 크게 미쳤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따라 이듬해 일-미 화친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개항'이 이뤄진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54년의 화친조약은(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미국 선박의 피난 정박과 필수품 공급지로 개방한다는 내용으로, 일본은 이 해 러시아, 영국과도 같은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하나의 고식책일 뿐, 쇄국정책의 폐기가 아니었다. 진정한 개항은 1858년 미국-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 5국과의 수호통상조약으로 이뤄졌다.
1858년의 수호통상조약이 미국 영사 타운젠트 해리스의 설득에 따른 것으로 한 때는 알려졌지만 근래의 연구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 내에서 1857년 초부터 '개국' 정책이 검토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1854년의 조약은 페리 함대의 위협 앞에서 당장 전쟁을 피하기 위한 고식책이었다. 그런데 3년 후 적극적 개방 정책을 스스로 모색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제2차 중영전쟁이 불러일으킨 위기의식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에서는 1863년 고종의 즉위와 대원군의 집정이 세도정치의 양상을 바꾼 원인에 대한 고찰이 아직도 미흡하다. 안동 김 씨의 세도는 당시 절정에 올라 있고 쇠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느껴 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동 김 씨는 헌종 때도 실력을 지키고 있는 채로 풍양 조 씨를 전면에 내세운 일이 있었다. 내우외환 때문에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느꼈다면, 서양 세력이 중국을 꺾고 동아시아 지역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것이 원인의 일부일 수 있다.
1861년 초, 열하(熱河)로 피신한 황제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북경에 사행으로 갔던 박규수(1807-1877)가 귀국 직후 박원양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전쟁의 충격을 줄여서 보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서양 오랑캐가 요구하는 바는 곧 배상금 독촉과 시장 개방 등의 일에 불과했다. (...) 군주란 멀리 도피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만 어쩔 수 없이 주화파에게 이끌려 잠시 그 예봉을 피하면서, 한편으로 화의를 허락하고 조약 체결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자 오랑캐가 곧 철군하여 모두 떠나가고, 남아 있는 자들은 약간의 상인 무리이다."
북경 체류 중 비변사에 보낸 장계에서도 "서양 오랑캐는 그 의도가 토지에 있지 않으며, 통상과 포교에 전력할 따름"이라 하여 위기의식을 축소하는 논조였다. 그러나 그 후 그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도입하는 데 힘을 쏟아 '개화파'의 영수 역할을 맡은 것을 보면 그의 낙관적 견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찍이 <해국도지>를 살펴보며 정세 변화에 민감하던 그로서, 서양 오랑캐의 북경 유린이라는 경천동지할 사태가 조선 민심에 너무 큰 충격을 주지 않도록 애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원군, 하면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말이 '쇄국'정책이다. 일본에서 많이 쓰인 이 말을 그대로 옮겨 쓰는 데는 문제가 많다. 대원군 집정기의 대외정책은 아편전쟁 전의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통적 대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일본과도 종래의 통신사 관계를 지키려 했다. '만국공법'의 기준으로 봤을 때 '쇄국'인 것이고, 만국공법에 따른 대외관계, 즉 '개항'의 압력이 발생했기 때문에 '쇄국'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중-일 운명의 교차
일본이 일찍 자발적으로 개화에 나서서 근대화-산업화에 성공한 반면 중국과 조선은 개화를 거부하고 있다가 열등한 위치에 빠졌다는 통설이 있다. 큰 의미가 없는 비교다. 같은 평면 위에서 비교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본을 우선 비교한다면, 일본은 서양세력이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개항 전에도 은의 수출 등 서양세력이 주도하는 교역체제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19세기 중엽 대형 증기선으로 해군력을 확장한 서양세력이 일본 개항에 나선 것은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어느 정도 확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 소규모 도발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을 때도 더 큰 함대를 동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일본이 함포외교에 굴복해 형식적 개항을 한 후에도 메이지유신(1868)으로 본격적 개화에 나서기까지 15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15년간 일본 내에서 온갖 곡절이 일어나는 동안 적극적으로 개입할 강한 동기를 느끼는 서양 열강이 없었다. 반면 조선은 강한 '진출' 의지를 가진 일본에게 개항을 당했고, 일본은 자기네가 누린 시간 여유를 조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의 비교에서는 고려할 사항이 매우 많은데, 서양 열강들에게 동양 침략의 궁극적 대상이 일본 아닌 중국이었다는 점을 무엇보다 지적하고 싶다. 서양인이 16세기 중엽 동아시아 교역에 끼어든 이래 중국은 그들이 원하는 온갖 재화를 무궁무진하게 공급할 '엘도라도'로 보였다. 일본은 중국 침략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서양 열강들 중에 자기편으로 삼으려는 나라가 있을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의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모든 열강이 이해를 함께 했다. 청일전쟁(1894-95) 시점에서 일본은 서양 열강의 사냥개 역할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제국주의 경쟁에서 열강의 최대 표적은 중국이었다. 러시아가 아관파천(1896)으로 조선에서 유리한 기회를 쥐고도 일본에게 양보한 것은 중국으로 진출할 통로인 만주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1904-05)은 일본이 만주의 러시아 이권에 도전한 결과였다. 전쟁의 표적은 조선이 아니라 만주였다.
산업화 수준이 아직 낮은 단계에 있으면서 근대화 열망이 높은 일본은 유럽의 1류 열강들에게 하위 파트너로서 인기 있는 존재였다. 세계체제론에서 말하는 반(半)주변부에 있던 일본은 1류 열강과 합작할 때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대 표적인 중국 가까이 있어서 중국 침략을 염두에 둔 동맹의 가치도 컸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일본은 연합국의 하위 파트너로 참여해 중국에서 독일의 이권을 넘겨받는 등 이익을 챙겼다. 이때까지 일본의 상위 파트너 역할을 주로 맡은 것은 영국이었다. 그런데 1차 대전을 계기로 국력이 급성장한 미국이 일본의 길을 가로막는 위치에 섰다. 태평양 건너편을 바라보는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일본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어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은 반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발돋움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래와 같은 하위 파트너 역할로 만족하지 못하는 단계에 와 있었다.
1차 대전이 '유럽대전'에 그친 반면 제2차 세계대전에는 '태평양전쟁'이 겹쳐져 있었다. 유럽의 기존 열강들이 뒤얽혀 기력을 소진하는 동안 태평양 양안의 두 신흥 강국이 '태평양시대'의 주도권을 놓고 부딪친 이 싸움에서 승리한 미국은 일본이 자기 하위 파트너 역할을 맡도록 개조했다. 그 개조의 핵심 내용이 군사력 제거였다. 그로 인해 '불구(不具)국가'가 된 일본은 과거사의 반성에조차 제약을 갖게 되고, '보통국가'가 되려는 열망조차 자연스러운 표현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 지금까지 빠져 있다.(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반성을 제대로 못하는 우리 사회도 '불구국가'의 특성을 일본과 공유한다는 점을 놓고 보면 한일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떠올릴 여지가 있다.)
냉전시대를 거쳐
2차 대전을 통해 제국주의체제가 냉전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근본적 변화를 겪지 않은 것으로 본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세계체계론)에서 냉전시대의 공산주의체제를 자본주의체제의 하위체제로 보는 데 나는 동의한다. 소련의 진영 내 헤게모니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 틀 속에서 부속적인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모순이 제국주의체제에서 민족 모순의 형태로 불거지는 동안 계급 모순이 자라나 냉전체제의 배경이 되었다. 민족 모순은 산업화 이전 시대에서 유래하는 것이므로 먼저 나타난 반면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심화되는 계급 모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화될 것이 예상되었다. 2차 대전은 표면상 민족 모순을 둘러싸고 진행되었지만 바닥에는 계급 모순을 둘러싼 대립이 잠재해 있었다. 따라서 미국과 영국에게 공식적인 적은 일본과 독일이었어도 숨겨진 더 큰 적은 소련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 잠재적 적대관계가 표면화되어 냉전체제를 빚어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한-중-일 3국은 냉전체제에 바로 편입되었다. 일본은 미국 점령 하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교두보로 개편되었고 한국은 남북으로 쪼개져 냉전의 첨병이 되었다. 중국은 공산화되어 동아시아는 자본주의진영의 일본-남한과 공산주의진영의 중국-북한으로 갈라졌다. 겉보기로는 완전한 대칭 상황이었지만, 일본과 중국의 위치에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미국에 예속되었다. 반면 중국의 소련에 대한 종속은 확실하지 않았다. 전쟁 후 소련은 동유럽의 공산권 구축에 전념하면서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았고, 중국 공산당은 자력으로 대륙을 석권했다. 초기의 공산중국은 소련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정권이 안정되자마자 소련에 대한 종속관계에서 벗어났다.
이 차이가 1970년대 데탕트 상황에서 한층 더 분명히 드러났다.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편승해 중국이 국제무대로 복귀하면서 냉전체제의 중요한 변수로 부각된 것이다. 중국이 겪은 정치적 곡절을 나는 세밀히 알지 못하지만, 소련 해체와 공산권 붕괴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수십 년에 걸쳐 큰 국력 신장을 이룬 배경을 냉전기 중국의 독자적 정책 추진에서 찾는 원톄쥔(<백년의 급진>)의 관점을 그럴싸하게 받아들인다.
중국이 독자적 정치노선을 펼치는 동안 일본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고, 그 효과가 남한을 비롯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로 확산되었다. 서양에서 만들어진 냉전체제의 제약 안에서 동양인은 나름대로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그 결과 '아시아적 가치' 논의가 1990년대에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20세기 말까지 '서세동점'의 상황이 틀을 지켰지만,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후반까지 서양세력이 보인 압도적인 힘은 이제 상대적 위치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리고 21세기 들어와서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힘이 상승하는 추세가 더 뚜렷해졌다.
오는 26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리는 '백년포럼'에서 발표될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발제문 '서세동점의 해소, 다른 백 년을 가져온다'의 마지막 글을 싣는다. 이번 '백년포럼'에서는 김기협 선생의 발제에 이어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가 토론을 할 예정이다.
(3) 어떻게 달라질까?
전쟁이 정치가 된 까닭
전쟁의 의미에 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의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延長)"이란 말이다. 이 말의 의미를 요즘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전쟁의 원래 목적은 약탈이었다. 재화나 영토를 빼앗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민을 포획해 노예로 삼는 것도 인적자원의 약탈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카르타고 정벌처럼 화끈한 사례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십자군전쟁에서 장미전쟁까지, 모든 전쟁에는 손익계산서가 붙었다.
전쟁에는 파괴가 따르므로 승자의 이득이 패자의 손실보다 작은 것이 정상이다. 중세사 연구가 잘 되어 있는 잉글랜드 경우를 보면, 전쟁 때문에 왕권이 흔들리는 일이 많았다. 전쟁 비용을 영주들에게 빌렸다가 전리품을 충분히 얻지 못했을 때 왕의 직할지를 떼어 갚는 일이 다반사였다. 중세 유럽에서 전반적으로 왕권 신장이 어려웠던 한 가지 이유다.
그런데 산업혁명기에 전쟁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이 '수지맞는 사업'이 된 것이다.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1850년 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에 나오는 '깨진 유리창' 이야기가 이 변화를 보여준다.
주인 아들이 빵집 유리창을 실수로 깨뜨렸을 때, 사회 전체를 봐서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당시 유행했던 모양이다. 유리가게 주인에게 일거리가 생겨 수입을 얻고, 그가 그 돈을 다시 소비하고, 경제의 활성화에 보탬이 되는 행위가 이로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스티아는 이런 관점이 '보이는 것'에만 얽매여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오류라고 지적했다. 유리가 안 깨졌으면 빵집 주인이 유리값으로 쓸 돈을 뭐든 다른 곳에 써서 어차피 비슷한 경제 활성화 현상을 일으켰을 것이고, 유리가게 주인이 번 돈은 빵집 주인이 쓴 돈보다 작으니, 사회 전체에게는 분명한 손실이라는 지적이었다.

▲ 역사학자 김기협 ⓒ홍익표 의원실
산업혁명이 몰고 온 대량생산-대량소비 구조에서는 전쟁의 파괴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파괴로 인한 수요의 증대가 오히려 경제 활성화를 부채질하는 것이 크게 보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큰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대량생산체제가 확장되는 단계에서는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바스티아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야 경제학에서 '기회비용'이란 개념으로 채택되었다.
전쟁이 약탈행위에 그친다면 그 정치적 의미가 제한된다. 이길 자신이 있으면 전쟁을 걸고, 자신이 없으면 피할 뿐이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는 소득이 큰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수단으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시대 상황에 따른 전쟁의 의미 변화를 깨달았던 것이다.
요즘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산업혁명기 전쟁의 목표가 단순한 자원 획득을 넘어 자본주의체제 확장을 바라보게 된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는 그 지속을 위해 시장 확대를 필요로 한다는 세계체제론의 지적에서 떠오른 생각이다. 지금 존재하는 자원을 탈취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본주의체제의 주변부로 끌어들여 지속적으로 착취하는 목표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함포 외교의 첫 번째 요구가 '개항'이었다는 사실도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서세동점의 척후병 동인도회사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는 유럽인의 해상활동이 약탈 단계에 있을 때였다. 특히 영국인의 해상활동은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1596)의 경우에서 보듯, 해적 행위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에 부사령관으로 나선 드레이크는 스페인 왕이 거금의 현상금을 걸어놓은 해적이었다.
1588년의 승리를 발판으로 1591년 3척의 영국 선단이 처음으로 동양무역에 나서서 3년 만에 귀항했다. 그러나 1596년 출항한 제2차 선단은 실종되고 말았다. 제3차 선단을 준비하기 위해 자본을 모은 상인들은 1599년 이 사업의 독점 보장 등 국왕의 보호를 청원하기로 했다. 이 청원에 따라 1년 후 흠정 헌장이 내려짐으로써 동인도회사(EIC)가 성립되었다.
초기의 동인도회사는 하나의 벤처기업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의 내전 후 왕정복고 때 동인도회사의 위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1670년경의 5개 법령을 통해 독자적 영토 획득과 그 영토 내의 사법권과 화폐주조권, 군대를 보유하고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군사주권 등을 갖게 된 것이다. 영국의 해외 확장을 위한 '하청(下請)국가'가 만들어진 셈이다.
군대 보유권을 갖고도 동인도회사의 병력은 수십 년 동안 수백 명의 경비병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고, 특히 프랑스와의 7년 전쟁 동안 급증해서 전쟁이 끝난 1763년에는 2만 60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후 미소레 왕국과의 전쟁(1767~69, 1780~84, 1789~92, 1799), 마라타 제국과의 전쟁(1775~82, 1803~05, 1817~18) 등을 통해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가 확장되는 동안 수십만 대군으로 확대됐다. 동인도회사는 세포이반란(1857) 때까지 인도 지배의 주체였고 중국과의 무역도 독점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이 국가를 조종한다는 지적이 있거니와, 100년(1757~1858) 동안 동인도회사는 실제로 국가 노릇을 했던 것이다. 아편전쟁의 원인도 동인도회사의 활동에 있었다.
서세동점의 가장 강력한 주체로 활동하던 동인도회사가 세포이반란을 계기로 1858년 인도 통치권을 국왕에게 넘기고 1874년 해산에 이르게 된 것은 영국 제국주의가 궤도에 오른 결과였다. 17세기 영국의 해외 활동은 '약탈' 단계를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고 본국 정치와 별개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하청업체'가 필요했다.
그런데 19세기에 와서는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약탈보다 시장 확대를 중시하게 되었고, 식민지 경영도 본국 정치와 긴밀한 연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 간 경쟁의 심화 때문에 국가가 해외 활동에 직접 나설 필요도 있었다. 한편 영국 의회가 넓은 범위의 자본세력을 대표하게 되었으므로 회사와 관계된 좁은 범위의 특권세력이 배제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측면도 있다.
동인도회사의 퇴진으로 본격적인 '대영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 목적은 재화 약탈에서 자원 획득을 거쳐 체제 확장으로 그동안 바뀌어 왔다. 인도는 주변부에서 반 주변부로 접근해 왔고, 그에 따라 대영제국의 국가체제 안에 더 깊이 편입된 것이다. 이 무렵, 19세기 중엽에는 산업혁명의 성과가 쌓여 열강의 해외활동 목적이 자본주의체제 확장에 집중되고,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개항' 요구가 강화되기에 이른다.

▲ 항구로 실려 나가는 인도산 원면 ⓒ프레시안 자료사진
슬픈 학문의 시대
1990년경의 공산권 붕괴 앞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공산주의체제 실패의 필연성을 논한 대목을 면밀히 읽어보면, 자본주의체제에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체주의 국가의 경우, 그 근저에는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전체주의는 시민사회의 완전한 파괴를 시도했으며, 시민 생활의 완전한 관리를 목표로 했다. 1917년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이래 소련은 반대당, 신문, 노동조합, 사기업, 교회 등 러시아 사회에서 권력에 맞설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조직을 탄압해 왔다. 1930년 말에도 이러한 조직 중 몇 개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옛 정신의 골자는 모두 빠져 버리고, 국가에 의해 철두철미하게 통제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민 하나하나는 원자(原子) 상태에 놓여, 전능한 정부 이외의 모든 '중간조직'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남겨졌다.
전체주의 국가 소비에트는 보도관리나 교육, 정치선전을 통해서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 그 자체의 골격을 바꾸고, 그것에 의해 소비에트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개인적이고 가까운 관계인 가족관계에까지 미쳤다. (...)
사회가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분화되어감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가지 인간관계 - 가족, 종교, 역사적 사실, 언어 - 가 공격 목표가 된다. 그리고 개개인의 밀접한 관계는, 그 당사자를 위해서 할당되어지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다른 인간관계에 의해 대치된다. (<역사의 종말>(이상훈 옮김, 한마음사 펴냄) 57쪽, 필자 밑줄)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똑같이 일어난 일 아닌가? 후쿠야마는 파괴, 탄압, 통제, 조작 등 행위의 주체로 국가를 지목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주체는 당(黨)이고 국가는 도구다.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국가를 도구로 같은 행위를 행하는 세력이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자본세력은 공산주의체제의 당처럼 명확한 형태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그 행위를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는 범위에 차이가 있지만,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 경향은 그 존재를 분명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밑줄 친 두 부분이 두 체제에 확실히 공유되는 것이다.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체제 확장에서도 이것이 핵심적 요소였다. 이 이데올로기, 즉 배금주의 없이는 주변부 착취의 효율성에 한계가 있다. 피착취 사회나 계층의 자발적 호응 없이 착취자가 일일이 힘들여 빼앗아오는 것으로는 체제 작동이 제대로 안 된다.
"주민 하나하나가 원자 상태에 놓이는" 것 또한 자본주의체제 성립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가족, 종교, 역사, 언어 등 이익관계 아닌 다른 원리에 입각한 모든 인간관계가 자본주의체제에서는 공격받거나 주변화된다. 자본주의체제의 가치체계 획일화에는 탄압보다 선전이 더 큰 몫을 맡았는데, 여기에는 근대적 학문이 적극 활용됐다. 노명우는 <사회학의 쓸모>(지그문트 바우만 외 지음, 서해문집 펴냄) '역자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쓸모없다고 박대당하고 있는 철학을 '슬픈 학문'이라고 불렀다. 사회학 역시 철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슬픈 학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슬픈 학문'의 마지막 희망을 "철학이 방법론으로 변질된 이후 지성의 냉대를 받거나 자의적 경구에 머물다가 끝내는 잊히게 된 영역, 즉 '올바른 삶'의 이론"을 회복하는 데서 찾았다. 철학만큼이나 '슬픈 학문'인 사회학의 마지막 비상구 역시 거기에 있다.
제도화된 사회학은 방법론적 정교화에 몰입한 나머지 질문의 능력을 상실했다. 사회학적 질문은 질문을 위한 질문이 아니며, 사회학적 연구의 최종 목적지는 계량화된 연구 실적이 아니다. 질문을 위한 질문, 연구를 위한 연구와 같은 동어반복적 폐쇄회로의 저편에 놓여 있는, '올바른 삶'을 위해 던지는 사회에 대한 질문, 사회학은 그러한 질문에 내재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질문의 힘을 잃어버린 사회학은 주어진 '현재'에 존재하는 '사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무엇이 없어야 하고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상상을 상실했다.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한 상상을 키우는 질문의 힘을 잃어버린 사회학은 그저 세간의 눈으로는 쓸모없어 보인다.(245쪽)
어느 분야의 학자라도 이 글을 읽으며 자기 분야도 또 하나의 '슬픈 학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도 그렇다. 계몽주의시대에 발흥한 근대역사학이 이전 시대의 '봉건제'를 비판한 데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정지작업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그 위에 자본주의체제가 세워진 후의 봉건제 비판은 반동적 행태일 뿐이다. 질문의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학문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근대 세계체제의 한계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 인간 하나하나를 '원자 상태'에 두는 조직방법, 둘 다 공산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의 공통된 요소다. 그리고 이들은 두 체제의 형성기인 19세기의 '과학 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문명 발생 이후 인간은 자연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늘리려고 노력해 왔다. 그것인 인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나는 이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자연과 자신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다. 지금으로써는 완전한 이해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만 일단 관심을 둔다.
인간은 이해가 부족한 영역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확장되어 19세기에는 '과학 신앙' 현상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다른 문명권에 뒤져 있던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또 한편으로는 해외 약탈활동을 통한 물질적 조건의 향상이 이 믿음을 뒷받침해 줬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성과를 얻으면서 이 믿음이 사회를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연과학의 성과를 발판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도 완성을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사회과학이 일어났다. 사회과학은 애초에 종교와 봉건 관계에서 벗어난 '신세계'의 합리적 원리를 모색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났지만, 개척기가 지난 뒤에는 위에 인용한 노명우의 탄식처럼 '제도의 덫' 속에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역할이 더 크게 된 것이다.
19세기를 풍미한 원자론이 이 신앙의 경전이 되었다. 19세기 벽두에 발표된 존 돌턴의 원자론은 한편으로는 자연의 완전한 이해에 이르는 지름길로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 평등 등 계몽주의적 관념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이런 관념을 이념을 넘어 진리 차원으로 받드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어 사회 조직방법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자연과학에서 원자론은 19세기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물질 탐구의 진전에 따라 힘을 잃기 시작해서 20세기 들어와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그러나 사회과학 여러 분야에서는 원자론에 입각한 제 원리가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당한 힘을 지키고 있다. 원자론에서 파생된 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어서 질문의 능력을 잃어버린 학문이 현실의 정당화에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원자론이 그리스철학의 일각에서 나타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여러 문명권에서 원자론과 비슷한 환원론적 세계관이 등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는 어느 사회에서도 이런 세계관이 긴 시간에 걸쳐 강한 지배력을 가진 일이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일로 보인다. 원자론에서 도출되는 개인주의는 사회 조직방법으로서 지속가능성에 불리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과도한 경쟁과 사회안전망의 약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원자론이 19세기 유럽을 풍미하고 오늘날까지 큰 힘을 발휘해 온 것은 산업사회로의 재편기라는, 지속가능성의 약점이 부각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도 전국시대에 원자론에 가까운 사조가 상당한 힘을 얻었던 것 역시 농업사회로의 재편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에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나오고 오일쇼크가 겹쳐지면서 지속가능성 문제가 비로소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밝히는 '세계체제론'도 이 무렵에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뒤이어 문학계와 학술계의 관성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되었다.
어찌 보면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공산주의체제 포함)의 한계가 1970년대에 확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안이 없는 상황 때문에 신자유주의 반동노선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가운데 국제적으로, 그리고 각국 내부에서 모순이 심화되어 왔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부상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이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 세계체제론을 주장한 주요 학자. 왼쪽부터 이매뉴얼 월러스틴, 조바니 아리기, 안드레 군더 크랑크, 사미르 아민. ⓒ프레시안 자료사진
중국의 굴기를 보는 시각
1998년 7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공화당 우파와 민주당 좌파가 이례적으로 손잡고 반대했다. 자본주의에 정식으로 투항하지 않는 중국의 성장에 도움이 될 행동을 미국이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파의 주장이었고, 좌파의 주장은 미국사회가 요구하는 인권 기준을 중국이 충족시키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우호적인 행동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점까지도 미국인들이 중국을 얼마나 깔보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상황이다. 중국이 공산권 붕괴의 소용돌이를 용케 모면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정책에서나 인권정책에서나 미국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동유럽의 구 공산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시장경제' 전면 도입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중국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져 있다. 중국이 초강대국이 될 것인가 여부가 아니라 어떤 성격의 초강대국이 될 것인가에 지금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기존의 초강대국과 비슷한 성격이 될 것인가, 전혀 다른 성격이 될 것인가?
중국도 기존의 초강대국과 비슷한 성격의 패권국가가 되리라고 보는 관점은 기존 세계체제의 성격에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관성에 휩쓸려 1970년대 이래 변화의 조짐과 추세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세계체제의 성격 변화라는 것은 매우 함의가 큰 현상이므로, 그 전망이 분명하지 않은 단계에서도 그 가능성을 가늠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방향으로 참고할 만한 논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성공'이 널리 확인된 2008년(베이징 올림픽과 미국의 금융공황이 있었던 해) 이후 담론 확산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직전에 나온 조반니 아리기(1937~2009)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길 펴냄)가 이 방면 담론의 중요한 지표를 담은 것으로 본다.
아리기는 1970년대부터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과 함께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켜 온 비교사회학자다. 1994년 <장기 20세기>로 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개 과정을 개관하고 미국 헤게모니의 말기 증상을 살펴본 그가 중국의 약진에 관심을 집중해서 그 특징적 현상에서 세계체제의 다음 단계를 내다보는 열쇠를 찾은 것이 이 책이다. 얼마 전까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중국의 급속한 발전에 대한 이 시점에서 가장 깊이 있는 이론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도입부에서 아리기는 제목에 애덤 스미스를 불러낸 이유를 설명한다. '자본주의의 시조'로 알려진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서 제시된 '시장경제'가 자본의 무제한적 축적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원리와 다른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중국의 비자본주의적 경제발전 방식이 "자연스러운 경로"라고 평가한 점을 상기시킨다. 자본주의 아닌 경제발전 방식이 가능하며 전통시대 중국의 경우를 그 구체적 사례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제발전 방식은 유럽 발 자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아리기는 스기하라 가오루가 제기한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을 예시한다.
스기하라에 따르면, 경제적 향상을 추구하면서 비인적 자원보다 인적 자원을 동원하는 이 같은 성향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 경제 내에서 서구 기술을 통합하려고 하던 때에조차도, 계속해서 동아시아 발전 경로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1880년대까지 일본 정부는, 일본이 토지와 자본 모두 부족하지만 노동은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질이 높다는 인식에 입각하여 산업화 전략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전략은 "전통적인 노동 집약적 기술의 적극적 이용, 전통 산업의 근대화, 그리고 요소 부존량의 상이한 조건을 감안하여 서구 기술을 신중하게 적용하도록" 장려하였다. 스기하라는 이 이종 교배의 발전 경로를, "서구 경로보다 노동을 더 전면적으로 흡수하고 이용하면서 기계와 자본으로 노동을 대체하는 것에는 덜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노동 집약적 산업화"라고 불렀다.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61쪽)
원래 스기하라가 근면혁명 개념을 제기한 것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는데, 아리기는 이 개념이 전통시대의 중국에 또한 적용될 뿐 아니라 20세기 후반 이래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자본집약적 발전 원리인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집약적 발전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전통시대 중국의 발전 원리가 오늘날의 상황에도 적용 가능하다는 아리기의 관점은 시사하는 바가 엄청나게 크다. 무엇보다 나는 근대문명의 원자론적 관점(atomic view)에 밀려난 여러 지역 전통문명의 유기론적 관점(organic view)의 부활 가능성을 여기에서 본다. '서세동점'의 본질인 원자론적 관점의 극복에서 그 해소의 결정적 열쇠를 찾는 것이다.

▲ 중국 군인들이 9월 3일 세계 2차대전 승전 70주년 기념 열병식을 앞두고 베이징 근교의 한 부대에서 행진 훈련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사회주의가 좌익이 된 까닭
<해방일기> 작업 중 '사회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1946년 8월, 응답자의 70%가 바람직한 체제로 사회주의를 꼽았던 여론조사를 살펴보면서였다.
이 응답자들이 생각한 '사회주의'가 어떤 것이었을까? 나란히 제시된 다른 선택지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었으니,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나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와 다른 것, 즉 소유권을 제한된 범위에서 인정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를 생각한 것 같다.
이 무렵의 여론조사에 대해 "피면접자들의 대표성도 의심스럽거니와 면접의 절차와 분위기가 과연 정확한 민심의 소재를 밝혀낼 정도로 적절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연구자도 있다. (전상인 <고개 숙인 수정주의> 14쪽) 여기 소개한 항목 같으면 응답자들이 과연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충분한 이해를 갖고 응답한 것인지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는 1946년의 일반인만이 아니라 2015년의 연구자들도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지난 200년 동안 이 말이 쓰여 온 폭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말을 쓰는 데는 정치적 의지가 얹히는 일이 많아서 더욱 혼란스럽다.
1820년대에 '사회주의'(socialism)란 말이 처음 쓰인 것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대립되는 뜻이었다고 한다. 당시 원자론의 폭발적 유행으로 개인주의 풍조가 강화되는 데 대한 저항의 의미로 생각된다. 그런데 20여 년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1848)에서 사회주의를 '반(反) 자본주의'의 뜻으로 쓰고 사회주의 중에도 제대로 된 사회주의, 즉 '과학적 사회주의'를 '공산주의'로 지칭하면서 사회주의의 뜻이 굴절을 겪게 되었다.
'반 개인주의'의 뜻을 가진 사회주의를 '반 자본주의'로 정의하는 것은 일종의 범주착오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인데,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공통점만을 근거로 사회주의를 동류(同類)로 끌어들인 데서 용어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원자론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자론에 반대하는 사회주의가 입지를 잃고 공산주의에 휘말리게 된 것이라고 나는 본다. 유기론적 질서를 중시하던 초기 사회주의는 '공상적 사회주의'로 몰려 유럽 사상계에서 배제되었다.
20세기 들어 원자론과 개인주의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제3세계'에 서양 정치사상이 들어왔을 때 '사회주의'에 대해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오염되기 전의, '반 개인주의'로서 원래의 사회주의를 찾는 경향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 주제에 관한 연구 성과나 논설을 아직 접하지 못했는데, 관련 학계의 검토를 권하고 싶다.
1946년 8월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선택한 '사회주의'에는 '반 개인주의'의 의미가 어느 정도 얹혀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조선인의 대다수가 지키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던 '전통질서'는 유기론적 원리에 따른 것이었고, 일본 통치자들이 제시한 새로운 사회 조직방법에 가장 강한 반발을 보인 것이 그 원자론적 원리였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글 또 한 대목에서 비슷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전체주의의 가장 근본적 실패는 사상을 콘트롤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 소련의 시민은,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혼자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줄곧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오랜 기간 동안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그 정부가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시민은 알고 있었다. 스탈리니즘 이래 견뎌온 개인적인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갖고 있었다. 사실상 모든 가정이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또는 1930년대의 공포정치 하에서 육친이나 친구를 잃게 되었고, 전쟁에서 치른 희생은 스탈린의 외교정책의 실패로 인해 더더욱 크게 되었다. (...) 사람들은 말로는 계급이 없다는 자신들의 사회에서 새롭게 계급제도가 대두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역사의 종말> 65쪽)
이름을 잃어버린 유기론적 원리를 찾아
2008년 가을 <뉴라이트 비판>을 쓸 때, 정치적 입장을 대충이라도 밝힐 필요를 느꼈다. 여러 모로 생각한 끝에 나 자신을 '보수'로 판정했다. 개별 사안을 놓고는 '진보' 쪽 주장에 공감하는 것이 많았지만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있는 그대로 대충 만족하는 사람이다. 물론 향상을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만 점진적 향상을 바란다. 근본까지 바뀌거나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몇 해 동안 이 판정에 스스로 만족하고 지냈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이 판정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선택지가 '진보'와 '보수' 둘 뿐이라면 보수가 맞다. 그런데 이 양자택일이 과연 충분한 의미를 가진 선택일까?
몇 해 전까지 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 사회의 지식인들은 환원론적-원자론적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선택지를 떠올리기 힘들다. 원자론을 벗어난 원리에 따른 사회 조직방법이 가능하다면, 그 조직방법을 추구하는 정치적 입장을 세울 길이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 입장에 설 것이다. 그것을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데는 '개인'을 앞세워야 하는 측면도 있고 '사회'를 앞세워야 하는 측면도 있다. 개인을 앞세우는 개인주의와 사회를 앞세우는 사회주의는 꼭 이름을 붙이지 않고도 인간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리며 작동해 왔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 개인주의에 일방적으로 경도되는 풍조가 일어나 세계를 휩쓸고 오늘에 이르렀다.
개인주의에 대칭되는 원리는 이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지경에 와있다. '사회주의' 외에도 '전체주의'(totalitarianism), '집체주의'(collectivism) 등 개인주의에 맞설 만한 이름이 모두 특정한 정치체제에 이용당하다가 좁고 부정적인 의미에 갇히게 되었다. 유기론적 사회조직 원리는 근대 정치학에서 제대로 검토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쓴웃음을 금할 수 없는 한 가지 사례.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 체제를 'corporate state'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기업국가'로 번역한 책을 두 권 봤다. 'corporatism'은 유기체론의 한 형태인데 이런 개념이 이 사회 정치학자들에게 얼마나 낯선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해방공간에서 만난 민족주의자 대부분이 '중간파'의 길을 걸었다. 1946년 10월에 그들이 빚어낸 좌우합작 7원칙 중 토지에 대한 '체감(遞減)매상 무상분배' 원칙은 일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원칙의 절충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 당시 인민의 70%가 원하던 '사회주의' 원칙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후 수십 년간 환원론적-원자론적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지금 사람들에 비해 그들은 유기론적 정치 원리에 대한 감각을 아직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을 좌절시킨 외세의 압력을 이겨낼 때, 이 사회가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기 바란다.
'서세동점의 해소'가 바로 '동세서점'은 아닐 것이다. 동양 세력이 힘을 키워 서양 사회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광경만을 그려서는 진정한 해소를 바랄 수 없다. 서세동점의 본질적 요소들을 극복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나는 원자론적 조직방법과 사고방식을 그 핵심으로 본다. 유기론적 원리가 복원되어 원자론적 원리와 적절한 방법으로 어울리게 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서세동점의 해소다.
'전근대사 바로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0) | 2015.12.03 |
---|---|
민간인 제외한 의열단의 ‘칠가살’ (0) | 2015.12.02 |
"10대 여자애, 박정희 귀에 대고 할배 이름 속삭이자…" (0) | 2015.11.18 |
2대 임시 대통령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한 놈" (0) | 2015.11.17 |
우리는 왜 친일파·박정희를 비판하는가? (0) | 2015.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