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반기문 현상’믿습니까?

일취월장7 2015. 10. 2. 12:30

 

‘반기문 현상’믿습니까?

<시사IN> 신뢰도 조사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가장 신뢰하는 차기 대선주자’ 1위(27.6%)를 차지했다. 여야 모두 뚜렷한 강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의 존재감만 도드라졌다. 반기문 현상은 실체일까 허상일까.

이오성 기자  |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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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 승인 2015.10.02  01:51:20

반기문이라는 이름 앞에 여야 정치권은 무기력했다. 문재인과 안철수, 제1야당의 간판 주자들이 추락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 나머지 여야 대권 주자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절반을 넘긴 2015년 하반기. ‘대안 부재’에 빠진 정치권의 현주소다.

< 시사IN>이 2007년 창간호부터 매년 정례적으로 실시하는 신뢰도 조사 결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가장 신뢰하는 차기 대선주자’ 1위(27.6%)를 차지했다. 2위 그룹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13.7%), 박원순 서울시장(13.3%)과는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8.2%), 안철수 의원(5.7%)은 10% 아래를 맴돌았다. <시사IN>이 반기문 총장을 대선주자 후보군에 넣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 결과를 두고 <시사IN> 내부에서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아직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반기문 총장에 대한 신뢰도가 압도적 1위로 나타난 결과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였다. 자칫 ‘거품’일 수 있는 반기문 대망론에 의미 없는 데이터 하나를 더 얹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었다. 반기문 현상은 실체인가 허상인가. 결국 이것이 이번 신뢰도 조사 결과의 핵심 주제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3년 8월23일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오른쪽). 친박계 주변에서는 ‘반기문 대안론’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연합뉴스
2013년 8월23일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오른쪽). 친박계 주변에서는 ‘반기문 대안론’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반기문 총장, 거의 모든 지역에서 신뢰도 1위

조사 결과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반 총장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명실상부한 1위였다. 연령별·지역별·지지 정당별·직업별로 응답자를 나누어 분석해도 마찬가지였다. 지역별로는 광주·전남·전북에서 33%로 가장 놓은 신뢰도를 기록했다. 그다음이 대구·경북(32.1%)이었다. 반 총장의 고향인 충청권 지지율(29.9%)보다 더 높았다. 호남과 대구·경북은 유력한 차기 주자가 없는 지역이기도 하다.

주목해야 할 곳은 부산·울산·경남이다. 이 지역은 김무성·문재인·박원순·안철수 등 여야 유력 대선주자의 출신지다. “다음 대통령은 누가 돼도 PK가 된다”라는 지역 정서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도 반기문 총장이 28.4%로 신뢰도 1위를 차지했다. 비영남권 인사가 이 지역에서 대선주자로 가장 높은 인기를 끈 것은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전 총리 이후로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지지 정당도 뛰어넘었다. 오차범위 안쪽이기는 하지만 새누리당 지지층에서 1위(31.1%)를 기록한 것은 물론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도 반기문 총장을 가장 높게 신뢰했다(25%). 반 총장 다음으로 새누리당 지지층은 김무성 대표(27.1%)를,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은 박원순 서울시장(24.8%)을 선택했다.

 
   
 
대선주자가 넘쳐나는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이 반기문 총장을 신뢰한다는 것은 제1야당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현재 야권 정치인으로는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지지층 사이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는 이야기다. 야권 지지층에서 반기문 총장과 대등하게 맞서고 있는 정치인은 박원순 서울시장뿐이다. 그런데 지난해 <시사IN> 조사에서 박 시장은 신뢰도 25.8%를 기록하며 차기 대선주자를 통틀어 압도적 1위를 기록했다. 올해 결과는 지난해보다 절반 가까이 떨어진 수치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내홍으로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문재인 대표는 이번 조사에서 신뢰도가 8.2%로 폭락했다. 비록 신뢰도와 지지율은 다르지만, 지난해 말 당 대표 출마 선언 이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표에 대한 긍정적 선호가 10% 아래로 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자신에 대한 재신임 투표를 선언하면서 지지율이 올랐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있지만, 문 대표가 ‘내상’을 입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신뢰도를 지지도의 선행 지표로 본다. 신뢰도가 먼저 오르고 그 후에 지지도가 오른다는 것이다. <시사IN> 신뢰도 조사에서 반기문 총장이 1위를 차지한 것은 앞으로 반 총장의 지지율이 더욱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동안 정치권에서는 반기문 총장을 차기 대선주자 후보군에 포함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많이 남은 상황에서 대권 도전 의사를 밝히지 않은 인물을 후보군에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반 총장의 인기는 인지도와 선호도에 가까울 뿐, 실제 지지도와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상황이 변했다. 박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8월25일)을 돌면서 차기 대권에 대한 논의가 달아오르고 있다. 여야 모두 뚜렷한 강자가 없는 상태에서 반기문 총장의 존재감은 외면하기 어려운 정치적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권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반기문 신당’이라는 뉴스가 화제가 됐다. 몇몇 정치·종교·교육계 인사들이 6개월 앞으로 다가온 20대 총선을 앞두고 반 총장의 의사와 무관하게 반기문 신당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의 이름을 앞세워 세를 규합한 다음, 여건이 충족되면 반 총장을 ‘옹립’하는 게 목표다. 물론 이는 반기문 대망론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려는 일부 세력의 자가발전일 공산이 크지만, 그만큼 반기문 카드의 파괴력을 크게 본다는 의미다.
 
   


 
더 주목되는 건 여권이다. 김무성 대표가 사위 문제로 곤욕을 치르면서 그동안 친박계 주변에서 끊임없이 나돌던 ‘반기문 대안론’이 힘을 얻는 모양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인 윤상현 의원(청와대 정무특보)이 9월15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김무성으로는 차기 대선이 어렵다. 새누리당의 후보를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라는 폭탄 발언을 내놓으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유승민에 이은 ‘김무성 찍어내기’가 사위 마약 사건을 기점으로 시작됐다는 관측이 터져 나온다. 새누리당의 총선 승리가 유력해진 마당에 청와대가 김무성 체제로 총선을 치를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돈다.

유엔 사무총장 퇴임 후 귀국하지 마라?

이와 동시에 최근 여권 핵심 관계자가 반기문 총장에게 서신을 보내 유엔 사무총장 퇴임 후 해외에서 국제 재단을 만들어 체류하라고 제안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정가에서는 이 제안이 야권의 공격으로부터 반 총장을 보호하려는 ‘선제 조치’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 총장의 임기는 대선을 꼭 1년 앞둔 2016년 12월까지다. 사무총장 퇴임 이후 해외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결정적 국면’ 때 등판하리라는 관측이다. 이런 관측의 배경에는 마땅한 대선주자를 찾지 못하는 새누리당 친박계가 있다.

이 모든 시나리오에는 대전제가 있다. 반기문 총장이 언젠가 정계 진출을 선언하리라는 가정이다. 갑론을박이 계속되지만, 분명한 것은 반 총장의 정치 참여를 점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집권 여당의 당내 갈등이 격해지면서 이런 관측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그동안 반기문 총장은 여러 경로로 정치할 뜻이 없음을 밝혀왔다. 그러나 반 총장의 정치 참여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들은 거꾸로 본인이 ‘직접’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지난 5월 개성공단 방문을 추진한 데 이어, 9월3일 중국 열병식에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참석하는 등 국내 언론이 집중 조명할 만한 행보를 보이는 것도 예사롭지 않은 게 사실이다.

세간에는 반기문 현상을 보며 ‘안철수 현상’을 떠올리는 이들이 여럿 있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이후 안철수 현상의 거품이 꺼졌듯 반 총장도 그와 비슷한 궤적을 따라가리라는 예측이다.
 
   


 
그러나 정반대의 시각도 있다. IT 전문가 출신인 안철수 의원과 달리 반기문 총장은 외교부 장관 출신의, ‘사실상 정치인’이라는 주장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외교보좌관을 지낼 때는 기자들의 곤란한 질문을 잘 빠져나가 ‘기름 뱀장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노련한 정치인이었다는 평도 있다. 안철수 현상 때와 달리 여야 지지층 모두에게 고른 인기를 얻는 것도 강점이다.

반기문 총장의 정치 참여 가능성을 높게 보는 정치권의 한 인사는 “안철수는 정계 진출 전 ‘한나라당을 응징해야 한다’라며 정치적 입지를 스스로 줄였지만 반기문은 훨씬 넓은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여든 야든 ‘꽃가마’가 준비된다면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반 총장의 정치 참여에 두 가지 정도의 조건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첫째, 본인이 기존 정치권의 꼭두각시로 보이지 않을 것. 둘째, ‘동북아 평화’ 같은 자신의 미래 비전을 실현할 정치적 구심점이 마련될 것. 이 정도 조건이 맞춰지면 반 총장도 ‘결단’을 내리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

반면 반기문 현상이 결국 거품처럼 꺼지리라고 보는 이들은 현실 정치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기존의 유력 대선주자든 제3의 인물이든, 여야 정치권이 체제를 정비해 강력한 주자를 옹립할 경우 반 총장의 인기가 수그러들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주장은 주로 야권 관계자의 입에서 나온다.

“반기문이 무적이란 건 정치권의 착시”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전략통은 “정치권이 한 가지 착시에 빠져 있다”라고 말했다. “반기문 현상은 이미 한 차례 무너진 적이 있기 때문에, 반기문 카드가 ‘무적’이라는 것은 착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여론조사 결과를 내밀었다. 지난 2월2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다. 당시 당 대표 당선이 유력했던 문재인 의원이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반기문 총장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문 대표는 24.8%, 반 총장은 21.4%였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계속된 반기문 총장의 1위 행진이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이 전략통은 “박근혜 대통령과 달리 반기문 총장의 인기는 콘크리트가 아니다. 정치권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반기문 현상은 순식간에 꺼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반기문 현상은 실체인가 허상인가. 답은 결국 정치권에 달렸다.

한편 국가기관별 신뢰도 조사(10점 만점)에서는 경찰이 5점으로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5점을 넘은 기관이 한 곳도 없었다. 경찰의 뒤를 국세청(4.95점)-청와대(4.85점)-감사원(4.78점)이 이었다. 신뢰도가 가장 낮은 기관은 4년 연속으로 국회가 차지했다(3.23점). 국정원(4.16점)은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문재인(8.2%)·안희정(3.1%)·박원순(13.3%) 등 야권 대선주자의 신뢰도는 반 총장에 미치지 못했다.  
ⓒ시사IN 신선영
문재인(8.2%)·안희정(3.1%)·박원순(13.3%) 등 야권 대선주자의 신뢰도는 반 총장에 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