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봉투 안에 경제성장 있다
소득 주도 성장론이 정치권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야당의 문재인 대표가 최저임금 인상과 생활임금제를 제기하고 나섰고, 최경환 부총리도 ‘임금 인상’을 촉구했다. ‘광주형 일자리’의 실현 여부가 주목된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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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승인 2015.03.20 02:17:55 |
이른바 ‘소득 주도 성장론’이 여야 정치권에서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한 사회의 총소득은 자본소득(자본 제공의 대가인 이윤·배당금·이자 등)과 노동소득(고용이나 자영업)으로 양분된다. 소득 주도 성장론의 소득은 ‘노동소득’을 가리킨다. 즉, 고용되거나 자영업 부문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소득이 총소득 가운데 일정한 몫을 유지해야 경제의 안정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소득 주도 성장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불황을 극복하려면 노동소득 분배율(노동소득/총소득)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 경제학계나 그 영향을 받은 각국 정책팀에서는 ‘자본과 노동 간의 소득분배’가 어느 시대나 일정한 것으로 간주했다. 혹은 최저임금 인상 등 인위적으로 노동소득을 올려봤자 그 효과가 오래가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면, 남는 대안은 결국 노동시장 유연화 등 규제 완화로 노동비용(노동소득)을 낮춰서 기업이 좀 더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도록 하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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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최경환 부총리도 소득 주도 성장론을 언급했으나, 실제 정책 방향은 ‘부채 주도’에 가깝다. |
이런 주류 이론에 반기를 든 것이 2010년 전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소득 주도 성장론’이다. 국제기구들(IMF·OECD·ILO)은 지난 30여 년 동안 노동소득 분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는 연구 결과를 잇달아 내놓았다. ‘자본과 노동 간의 소득분배가 변하지 않는다’는 주류 경제학의 핵심적 가정이 무너졌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정책특보의 최근 논문 <소득 주도 성장:이론적 가능성과 정책적 함의>에 따르면, “노동소득 분배율의 하락 추세 그 자체에 대한 이견은 거의 없다”. 문제는 이런 추세가 “경제성장과 경제 안정성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라는 것이다.
노동하는 계층의 한계소비성향(추가소득 중 소비되는 금액의 비중)은 대다수가 부유층인 자본소득 계층보다 훨씬 높다. 그래서 노동소득이 감소하면 총수요가 줄어든다고 한다. 그러나 노동소득의 감소로 총수요(소비+투자+해외 수요)가 증가하는 경우도 있다. 자본 측이 늘어난 자본소득(노동소득 감소=자본소득 증가)으로 투자를 늘린다면 그렇다. 또한 노동소득의 하락은, 해당 국가 수출상품의 가격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뜻이므로 수출이 늘어날 수도 있다. 즉, 노동소득이 증가하면 총수요가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이상헌 ILO 특보가 최신 ILO 자료(2013년)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세계에는 두 종류의 국가가 있다. 노동소득 분배율이 증가하면 총수요가 늘어나면서 경제성장률이 상승하는 국가와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국가다. 그런데 한국 등 대다수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전자에 해당된다. 중국·브라질 등은 후자에 속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미국 등에서는 자본소득이 증가한다고 해서(노동소득이 줄어든다고 해서) 자본 측이 기업 투자를 늘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미국 등은 노동소득 분배율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해야 경제의 안정적 성장이 가능한 국가라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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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문재인 대표가 최근 ‘광주형 일자리’를 언급했다. |
지난해 홍장표 부경대 교수는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소득분배가 총수요·노동생산성 등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 분석한 논문 <한국의 기능적 소득분배와 경제성장>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실질임금의 증가율이 상승하면 경제성장률도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노동소득 분배율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했으나, 소비 지출만 크게 위축시켰을 뿐 투자와 수출을 늘리지는 못했다.
결국 한국·미국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노동소득 분배율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해야 일정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는데, 정작 노동소득은 지속적으로 떨어져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비상한’ 수단을 사용해왔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가계가 부채를 늘려 소비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총수요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2008년에 결국 세계 금융위기가 터진다. 한국·일본·독일 등은 해외 수요(수출)를 늘려 모자란 국내 수요를 보충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런 수단이 유효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수출 전망은 계속 불투명해지고 있다.
노동소득 증가하면 총수요·노동생산성도 상승
그래서 소득 주도 성장론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불황 타개 대안으로 ‘소득 상승 정책’을 권고한다. 노동소득이 증가해야 총수요와 노동생산성 역시 상승한다는 것이다. 홍장표 교수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는 실질임금 증가율이 1%포인트 상승하는 경우 “경제성장률이 0.68~1.09%포인트,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0.45~0.50%포인트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상헌 박사에 따르면, 소득 주도 성장론이 임금만 인상되면 경제가 좋아진다는 ‘임금 인상 만능론’은 아니다. 임금은 노동생산성의 상승에 맞춰 인상되어야 한다. 노동생산성보다 임금이 더 오른다면, 자본 측에 큰 부담을 부과해 투자 의욕을 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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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사회통합적 일자리’를 늘리자는 것인데 기존 기아차 노동자들과도 협약을 맺어야 한다. |
현재 한국의 ‘소득 주도 성장’ 논의에는 여야가 모두 발을 걸치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최근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의 ‘임금 인상 촉구’를 사례로 들면서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이 일어나지 않고는 내수가 살아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통해 임금을 올릴지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더욱이 홍준표 경남도지사 등 새누리당 정치인들은 ‘소득’ 개념에 포함되는 복지 혜택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려 몸부림치고 있다. 최 부총리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낮은 노동소득 때문에 부족해진 총수요를 보충하기 위해 가계부채를 늘리는 방법이다. 3월12일 단행한 기준금리 인하도 이 같은 흐름의 일부로 보인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난해부터 소득 주도 성장론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오는 총선과 대선에 즈음한 정책 이데올로기로 활용할 조짐이 농후하다. 문재인 대표는 최근 최저임금 인상론(“시간당 5580원 최저임금으로는 3~4인 가족이 도저히 생활할 수 없다”)과 생활임금제(가족 부양 및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를 거의 동시에 제기했다. 문재인 의원실은 지난 3월10일 민주정책연구원과 함께 <소득 주도 성장과 광주형 일자리> 심포지엄을 주최하기도 했다. 소득 주도 성장론의 정책적 함의를 광주에 조성될 ‘연산 100만 대 규모 자동차산업 클러스터’에 적용해보겠다는 취지다.
광주는 2014년 현재 종사자 4만여 명이 연간 62만 대의 완성차를 양산하는 국내 제2의 자동차 도시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자동차산업 클러스터를 연산 100만 대로 늘리면서 전기·수소차 등 미래형 자동차 제조라인을 유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회통합적 일자리’를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기아차 광주공장이 아닌 다른 부지에 공장을 세워 연봉 3000만~4000만원 수준의 일자리(기아차 광주공장의 평균 연봉은 8500만원)를 대규모로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일자리의 노사는 물론 기아차 노동자들과도 적절한 사회적 협약을 체결해야 한다.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지만, 실현된다면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의 획기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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