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더 나은 삼성을 상상하라 - 한 개의 삼성이 아닌 열 개의 삼성을 만들자

일취월장7 2014. 9. 3. 11:43

더 나은 삼성을 상상하라

‘재벌 활용론자’인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는 그룹 체제의 장점에 방점을 찍고 삼성을 바라본다. 삼성을 사회적 통제가 가능한 그룹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363호] 승인 2014.09.02  08:51:31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지 100일을 훌쩍 넘기면서 ‘이건희 이후 삼성’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는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와 함께 이른바 ‘재벌 활용론’의 대표적 논객이다. 그는 장하준 교수와 <쾌도난마 한국경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등을 함께 쓰면서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변혁을 일관되게 비판해왔다. 정 대표는 지난해 12월 발간한 <굿바이 근혜노믹스>에서도 재벌 그룹의 지배 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국가·사회적 개입을 주장했다.

이건희 회장 유고 시, 삼성그룹(기업 집단)이 크게 동요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지배권 공백을 틈타 삼성전자의 지분을 많이 획득한 사람(세력)이 새로운 주인이 된다면 그 또한 자연스러운 시장 질서 아니겠는가. 이건희 가문이 지금까지처럼 정치권과 법조계의 ‘장학생’들을 움직여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을 테고…. 굳이 국가와 사회가 민간 기업의 지배 질서에 개입할 필요가 있을까.
삼성, 현대차 같은 대기업 집단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지난 몇 년 동안 의미 있는 수익을 내온 대기업은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의 회사들밖에 없다. 상장사 전체 순이익의 절반을 두 그룹이 차지한다. 경제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R&D에서도 두 그룹의 비중이 절반(민간 부문 기준) 이상이다. 이런 대기업 집단의 지배 구조가 총수 일가의 상속 과정에서 급격하게 변동하면서 국민경제 전체에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발생할 터인데, 그냥 손 놓고 있으면 되겠는가. ‘(자본)시장의 논리’에 국민경제의 운명을 그대로 맡기자는 것밖에 안 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는 재벌 그룹의 지배 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국가·사회적 개입을 주장한다.  
ⓒ시사IN 이명익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는 재벌 그룹의 지배 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국가·사회적 개입을 주장한다.
삼성의 사회적 폐해가 워낙 크니까 어떻게 바뀌든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맞다. 바꿔야 한다. 다만 더 나쁘게 바꾸면 안 된다. 자칫 국내외 금융 부자들이 삼성전자의 경영권(해당 기업의 자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이기도 하다)을 장악한 뒤 사내 유보금 중 상당 부분을 털어 ‘먹튀(먹고 튀기)’해버릴 수도 있다.

재벌 시스템을 깨야 한국 경제가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렇지 않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재벌 개혁이 이뤄져왔다. 흥미롭게도, 이후 크게 발전한 기업들은 기존의 그룹 시스템을 크게 바꾸지 않은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소속이다. 매출과 수익성, 기술력이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다. 반면 그룹 시스템을 거의 포기한 재벌들의 실적은 별로 좋지 않다. 특히 그룹 해체 이후 독립한 기업들의 상황은 참담하다. 그룹에서 나와 외국 자본에 넘어간 쌍용차, 한국GM(대우차), 르노삼성을 봐라. 매출과 고용, R&D에서 모두 정체 상태다. 재벌의 그룹 구조를 깨야 중소기업 하청단가가 오른다는 것도 터무니없다. 한국GM, 르노삼성, 쌍용차 등이 얼마나 가혹하게 하청업체들을 쥐어짜는지 가서 보라.

그렇다면 이건희 회장이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에게 상속할 수 있도록 돕기라도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발간한 책(<굿바이 근혜노믹스>)의 한 장을 삼성 문제에 할애했는데, 그 장의 내용이 ‘이건희 일가가 없는 삼성그룹을 상상하라’였다. 나의 관심사는 총수 일가의 번영이 아니라 그룹(기업 집단) 체제의 번영이다. 총수 일가의 영향력을 줄이면서도 그룹 체제는 유지하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국가와 사회공동체가 삼성그룹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지배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글쎄다. ‘삼성 가문=삼성 기업’ 아닌가? 예컨대 이건희(가문)는 삼성이고, 정몽구(가문)는 현대차로 통한다. 재벌 일가와 재벌 그룹을 분리할 수 있겠는가?

이건희 일가는 삼성전자라는 법인(法人)의 일부를 소유할 뿐이다. 그리고 법인은 ‘법률적으로 인간’이다. 이건희 일가와는 독립적으로, 인간만이 가지는 ‘돈 빌릴 권리’와 ‘상환 책임’을 모두 행사한다(30~33쪽 기사 참조). 예컨대 삼성전자가 부채를 갚지 못하는 경우, 그 책임은 이건희 일가보다 사회의 부담으로 전가된다. 이렇게 보면 삼성전자가 법인으로 존속해왔다는 것 자체부터, 사회에 빚을 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의 대기업 그룹은 1960년대부터 거의 30~40년에 걸쳐 정부의 저리 자금(결국은 세금)과 국내 소비자들의 희생 덕택에 성장해왔다. 지금도 정부는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R&D 투자에 대해 엄청난 법인세 면제 혜택을 주고 있다. 사실상의 세금 지원이다. 법인 대기업들은 저 혼자 잘나서 큰 것이 아니다. 제도(법인)와 자금(정책금융, 법인세 감면 등)의 측면에서 특혜를 받아 성장했다. 나라가 특혜를 주어서 키웠다면 특별한 국가적·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그들에게 부과해야 한다. ‘법률상 주인인 주주들이 볶아먹든 삶아먹든 알아서 하도록 놔두라’고 해선 안 된다. 총수 일가로부터 떼어놓더라도 기업 그룹은 계속 번영해야 한다.

구체적 대안은 무엇인가?

재벌 논란의 핵심은, 그룹 전체 주식의 5% 내외밖에 가지지 못한 재벌 일가가 전체 계열사에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가문의 사익을 채워왔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룹 구조를 유지하면서 사익을 채우지 못하도록 하면 된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방안은 ‘민주공화국’이 그룹 이사회, 대기업 이사회에 들어가 총수 일가를 견제하는 것이다.

국가가 이사회에 들어가려면 해당 기업 주식부터 상당 규모로 보유해야 할 텐데.

이재용 같은 재벌 3세들이 부모의 자산(주로 계열사 주식)을 상속받으려면 그중 50% 이상을 상속세로 내야 한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우, 6조~7조원을 납부해야 한다. 아무리 부자지만 이 정도 현금은 없다. 그 경우 상속받은 주식 가운데 절반 정도를 그대로 국세청에 넘겨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세청은 이렇게 받은 현물 주식을 시장에 팔아 현금으로 만든다. 그런데 누군가 그 주식을 은밀히 매집해 새로운 대주주가 될 경우, 삼성그룹 전체의 지배권이 흔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국세청이 그 주식을 시장에 내다 팔지 말고 정부에 넘기면 어떨까? 정부는 국가지주회사(지주회사는 다른 기업을 지배할 목적으로 해당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는 회사다) 같은 것을 설립해 그런 주식들을 소유·관리토록 한다. 국가지주회사는 자동적으로 삼성의 대주주가 된다. 국가지주회사에서 선정한 인사를 삼성그룹의 지주회사나 다른 대기업 이사회에 넣을 수도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삼성가의 이서현 에버랜드 패션부문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부터).  
ⓒ연합뉴스
삼성가의 이서현 제일모직 패션부문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부터).

어떤 일을 할 수 있나?

국가지주회사 측의 이사가 현 경영진(재벌 3세)을 지지해주면 일단 삼성그룹의 경영·지배권이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청기업에 대한 착취, 노동조합 탄압 등을 저지하고 장기 투자를 촉진하는 등 사회공동체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삼성그룹을 압박할 수도 있다. 3세가 무능하다면, 그를 교체하는 쪽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현재 대기업 사외이사는 총수 일가의 거수기 아니면 투자자(펀드 등)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이제는 이사회에 사회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제3의 힘’을 투입하자는 것이다. 노동당이나 정의당 같은 진보 정당들부터 노선을 선회해야 한다. 시장 투자자와 해외 기업들에게나 이로운 재벌 해체보다는 국가지주회사가 참여하는 대기업 그룹 재편 쪽으로 노선을 선회해야 한다.

일종의 국영기업화 아닌가? 국영기업은 경영이 비효율적이라는데?

착시다. 국가지주회사 측 이사의 기능은 직접적인 ‘경영’이 아니라 ‘경영진에 대한 견제’다. ‘국가’가 껄끄럽다면 공익재단을 만들 수도 있다. 3세들이 상속세로 어차피 납부할 주식을 공익재단에 증여토록 하면 된다. 그 경우 공익재단 대표자가 삼성의 지주회사나 대기업의 이사로 들어간다. 물론 예전에 총수 일가들이 공익재단을 악용해 편법으로 그룹을 지배한 사례가 있다. 재단 이사회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 계열사처럼 부려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의지가 있다면, 공익재단을 재벌 가문과 무관한 독립적 공익기구로 만들 수 있다. 30대 재벌 특별법을 제정해서, 관련 공익재단의 이사회에 재벌 일가가 아니라 공익적·진보적 인사들이 들어가도록 하면 된다. 그간 재벌 개혁을 주장해온 분들이 그런 공익재단에서 활동한다면 삼성 등 대기업 그룹의 일감 몰아주기 같은 편법 경영, 편법 상속을 원천 봉쇄할 수 있다.

그런 사례가 있나?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이다. 발렌베리 계열사인 일렉트로룩스, ABB, 사브, 스카니아 등을 지배하는 지주회사는 인베스토르(Investor)다. 그리고 인베스토르의 대주주는 발렌베리 가문이 아니라 발렌베리 재단이다. 발렌베리 가문이 상속 때마다 주식을 발렌베리 재단에 기부했는데(가문에는 세제상 다른 혜택을 부과), 그런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공익재단이 지주회사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그 공익재단의 이름에는 여전히 발렌베리가 붙어 있지만 그 일가의 영향력을 거의 완벽히 차단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연금은 이미 우리나라 상당수 대기업의 주요 주주다. 국민연금을 국가지주회사나 공익재단처럼 활용할 수는 없나?

국민연금 역시 단기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올려야 하는 펀드다. 다른 투자 펀드들과 다를 게 없다. 국민연금의 대표가 대기업 사외이사로 들어간다 해도 임금 인상, 하청단가 인상을 주장할 수 있을까? 국민연금 수익률이 떨어지는데.

하긴 국민연금공단의 인프라 투자 행태를 보면, 맥쿼리와 크게 다르지 않더라.

다만 국민연금의 자산 중 예컨대 100조원을 떼어내 그것을 ‘수익률 극대화가 아니라 공익적·장기적 목적에만 사용하는 독립계정’에 넣고 운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사회민주주의센터’ 대표가 재벌 그룹 구조를 옹호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장은 훌륭한 하인이지만 최악의 주인’이라는 격언이 있다. 시장이 사회의 하인으로 복무해야지, 사회가 시장을 주인으로 섬기면 재앙이라는 의미다.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은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 즉 ‘시장경제와 사기업을 어떻게 사회공동체와 공공 이익에 복무하도록 개조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보편적 증세로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도 그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대기업 그룹이 총수 일가의 사리사욕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왔는데, 그것을 공익에 복무하도록 개혁하는 것 역시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일환이다.

 

 

 

한 개의 삼성이 아닌 열 개의 삼성을 만들자

홍종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삼성 특별법’에 회의적이다. 특별법이 아닌 특혜법이라는 것. 그는 이미 삼성이라는 하나의 재벌을 위해 많은 법이 바뀌어왔음을 지적했다. 개입이 아닌 개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주진우 기자  |  ace@sisain.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363호] 승인 2014.09.02  08:51:24

 

삼성 이건희 회장이 100일 넘도록 직무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스레 삼성의 미래를 생각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새정치민주연합 홍종학 의원도 논의의 중심에 있는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홍 의원은 부자 감세나 저금리 고환율 정책, 정부보조금 등이 모두 재벌의 이익으로 직결되며, 정부가 매년 수조원을 재벌에 지원하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그 가장 큰 수혜자는 삼성이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서 정책위원으로 일했으며, 경제학자 시절부터 대표적인 재벌 전문가로 꼽힌 그를 만나 삼성의 미래를 물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지 100일이 넘었는데 아직 의식불명 상태다. 다시 돌아온다 해도 이전의 지위를 확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삼성그룹의 재편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동안 일관되게 ‘재벌 개혁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 대부호 록펠러의 명성도 시간이 흐르면서 어쩔 수 없이 약해졌다. 30년이 지나 2세대, 3세대로 교체되면 가문보다 이사진의 지위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 역시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가문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다. 문제는 가문의 힘이 약해졌을 때 받는 충격이다. 그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재벌 개혁이 필수적이다. 재벌 개혁을 통해 선진형 기업 경영 구조로 가야 하는데, 삼성은 총수 1인에 매달리다 보니 지금 기업 전체가 흔들리는 상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홍종학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시사IN 조남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홍종학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우리나라에서는 재벌 개혁을 하자고 하면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얘기가 바로 나온다. 삼성이 망하고 나라가 망한다고 반발한다.

보수층이 우리나라 경제사회 시스템을 영미 국가형으로 만들었으니 재벌 개혁 역시 영미식으로 해야 한다. 미국도 재벌의 영향력이 강한 시대가 있었다.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약 20년인데, 당시 상황이 지금 한국과 유사했다. 거대 재벌이 등장하는 1890년대 이후 미국 경제는 점차 재벌로 돈이 몰리게 된다. 그 결과, 1907년 경제위기에 직면한다. 당시 미국은 경제위기의 원인이 재벌에 있다고 보고, 본격적으로 재벌 개혁을 논의했다. 1912년 대통령 선거의 주된 이슈 역시 재벌 개혁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당시 캐치프레이즈로 ‘머니 트러스트(금권신탁) 개혁’을 내세워 당선했다. JP모건이 장악하고 있는 금융자본을 손질하겠다는 것이었다.

윌슨 대통령의 재벌 개혁 구상은 성공했나?

그는 8년간 집권했지만 결국 재벌 개혁에는 실패했다. 그 여파로 윌슨이 물러나는 1920년부터 공화당이 세 번의 대선에서 연속 승리한다. 그때 공화당에서 펼친 정책이 지금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줄푸세’다. 자연히 재벌의 덩치는 커지고, 양극화는 심화됐다. 1929년 대공황도 결국 줄푸세 정책의 결과였다. 대공황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뉴딜’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개혁 정책이 실시됐다. 대개 뉴딜 정책이 댐 짓는 사업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재벌을 완전히 분해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대표적으로 금산분리 정책을 취했다. 그 유명한 ‘글래스-스티컬법’이다. 당시 미국 굴지의 기업들은 전부 JP모건의 통제 아래 있었다. JP모건은 은행·철강·철도·전기 등을 광범위하게 장악했다. 루스벨트는 은행법으로 이에 제동을 걸었다. 상업은행과 일반 기업을 서로 떼어놓고, 배당에 대해 세금을 물린 것이다. 은행이 일반 기업을 소유하고, 이 기업은 또 다른 기업을 소유하고…. 이렇게 사다리를 많이 쌓을수록 세금을 많이 부과했다. 뉴딜 정책과 세계대전이 맞물리면서 국가가 재벌을 통제한 결과, 미국의 재벌 시스템은 사라졌다.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재벌 집중적이고, 재벌 친화적인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오히려 재벌을 조장한다. 재벌들 세금 깎아주고, 규제 풀고, 노동자 탄압하는 ‘줄푸세’ 정책은 대표적인 재벌 지원 정책이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의 성장 동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데 공감한다. 사실 그 시기부터 재벌 개혁에 뛰어들었어야 했는데, 이후 20년 동안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지금은 성장률이 마이너스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기업은 물론이고 국가와 가계에도 빚이 쌓였다. 기업 부채는 몇 개 그룹을 제외하면 IMF 구제금융을 겪은 1990년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등 일부 그룹에만 돈이 돈다.

서민경제는 정말 심각하다. 한계 상황에 온 것 같다. 근본적으로 판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2012년 대선 당시 이야기했던 부분이다. 지금까지의 방식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중산층 서민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기업이 하청 구조를 이용해서 중소기업에 빨대를 꽂아놓은 구조다. 중소기업이 돈을 벌어도 결국 대기업으로 흘러간다. 이 빨대를 잘라내야 한다. 재벌이 아니라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한쪽에서 복지를 강화하게 되면 서민경제에 돈이 돈다. 서민경제가 활성화되면 결과적으로 재벌이 혜택을 본다. 텔레비전, 자동차 등의 소비가 늘어나니까. 이게 경제의 선순환이다.

박근혜 정부는 물론이고 정치권에서도 재벌 개혁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야당이 재벌에 대한 세금을 올리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여당의 반대로 좌절됐다. 여당에서는 재벌 이야기만 나오면 격렬하게 반대하는 의원들이 있다. 이들은 재벌에 세금을 물리면 기업 활동이 위축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봉급생활자 약 400만명의 세금을 올리는 데는 합의했다. 우리나라 정치·경제 현실이 이렇다. 봉급생활자 400만명의 세금을 올릴 때는 저항이 없는데, 재벌 세금을 한 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벌 세금은 깎아주고 서민한테는 세금을 더 빼앗아간다. 그리고 국가는 서민들로부터 거둔 세금을 다시 재벌에 퍼주는 실정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여당에서 창조경제활성화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나도 야당 간사로 참여했다. 거기서 ‘우리나라는 연대보증 때문에 중소기업이 한번 망하면 회생이 어려우니, 연대보증을 없애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허가를 낼 수 없다고 한다. 말로는 중소기업을 돕자고 하면서 중소기업에 정말 필요한 결정적인 정책은 절대 시행하지 않는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기획재정위에서 ‘면세점 입점 기회를 중소기업에게도 주자’고 주장했는데, 반대가 격렬하다. 현재 면세점은 신라와 롯데가 독점으로 입점한 형태다. 나라가 재벌에게만 특혜를 주는 꼴이다. 그래서 중소기업과도 좀 나눠먹으라는 것인데 쉽지 않다. 정부에서 주장하는 ‘창조경제’를 위해서는 창업 국가가 되어야 하고, 재기가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한 사회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06년 휠체어에 탄 채로 입국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  
ⓒ연합뉴스
2006년 휠체어에 탄 채로 입국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
왜 그럴까?

무엇보다 재벌 의존도가 너무 크다. 경제의 사고방식을 다르게 할 수가 없다. 반면 미국은 다르다. 예를 들어 애플이나 페이스북 등은 20년, 30년밖에 안 된 기업이다. 많은 기업이 망하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건강한 경제다. 우리나라에서 이게 불가능한 이유는 재벌 때문이다. 미국이 재벌로 인해 경제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을 교훈 삼아 위기가 오기 전에 재벌 개혁을 해야 한다.

당장 삼성그룹의 지배 구조가 이슈다. 한국 경제가 건강해지려면 이번 기회에 삼성그룹이 해체되어야 한다고 보나?
삼성그룹의 덩치가 큰 게 문제라기보다 그 자체가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게 문제다. 그러니 피해를 못 주게 하면 된다. 소액지분으로 거대 그룹을 지배하면서 경쟁을 저해하고 일감을 몰아주는 폐해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 삼성의 근본적인 장점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부작용을 줄여나갈 수 있다. 일단 삼성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지금처럼 독보적인 경제력으로 법 위에 올라서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이미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들은 중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간 상태다. 삼성의 휴대전화 사업도 수명을 다해가는 것 아니냐. 빨리 다른 먹을거리를 찾아야 한다. 삼성 혼자서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 열 개의 삼성이 있어도 중국과 경쟁할까 말까인데, 삼성 혼자서 경제를 지탱하는 구조는 곤란하다. 당장 열 개의 삼성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삼성은 물론 한국 경제 전체가 중국 경제에 종속될 우려가 크다.

삼성은 어떻게든 수익 모델을 찾아낼 것이다. 의료민영화 역시 결국 삼성의 배를 불리는 정책이 되리라는 관측이 나온다.
의료민영화가 가능해지려면 공적연금 약화, 민간연금 강화라는 두 가지 고리가 서로 맞물려야 한다. 국회에서는 새누리당이 공적연금 시스템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한편 정부는 지속적으로 민간연금의 지원 강화를 골자로 하는 세법을 발의하는데, 최대 수혜자는 삼성생명이다. 삼성에서 ‘한국은 연금이 부족하니 민간연금 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리면 정부가 이에 호응하는 거다. 최근 임명된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친재벌 인사다. 임명된 지 몇 달 안 돼서 신속하게 친재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이유는 뒤에서 경제정책을 공급하는 그룹이 있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그룹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많다. 이재용 시대가 열릴지도 잘 모르겠다. 지금 차명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에 달렸다고 본다.

이건희 집안이 삼성을 소유하되 경영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어렵다고 본다. 삼성은 지금 관료주의에 빠져 있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재벌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 구성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서민경제에 침투한다. 삼성가의 아들, 며느리, 퇴직자 등이 라이선스를 하나씩 받아서 골목 상권에 진출하는 식이다. 이렇듯 삼성은 관료주의에 빠져 있다. 스스로의 개혁은 쉽지 않을 것이다.

장하준·정승일 등 일부 경제학자는 재벌 그룹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성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말이다. 금산분리 원칙까지 유예를 요구하는 듯하다.
삼성 특별법에 찬성하는 경제학자들은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을 모델로 삼는다. 경영권을 인정해주고 공적인 기능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국회에서 누가 동의하겠나. 여당에서는 동의할지 모르지만 야당으로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삼성 특별법은 엄연히 특혜법이다. 하나의 재벌, 특히 삼성그룹을 위해서 이미 세법은 많이 바뀌었다. 삼성그룹이 절세하는 방법이 밝혀지면 다른 기업이 따라하고, 이를 막으려고 법을 만들면 삼성그룹은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내는 식이다. 세법 중에서도 특히 상속세법은 거의 ‘삼성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 때문에 변화했고 삼성 때문에 만들어졌다. 삼성 특별법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녹취 정리: 조은희 인턴 기자

 

 

 

복잡한 지배구조, 왜?

이건희 회장의 장기 입원으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불안한 상태다. 삼성 해법을 두고 전문가들의 공방이 치열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의 재벌 구조는 왜 생겨났는지, 한국 경제와 지배구조는 어떤 관계인지를 알기 쉽게 소개한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363호] 승인 2014.09.02  08:51:34

 

1945년 광복 직후, 똑똑하고 야망에 찬 젊은이 야심씨는 쌀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야심씨는 한국의 재벌 총수들을 상징화한 인물이다. 또한 ‘기업 지배구조’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자본금, 그룹 지분구조 등의 수치를 극히 단순화했다-편집자). 가게 건물과 땅, 쌀 등은 야심씨 개인 소유였다. 야심씨는 은행과는 대출, 농가와는 쌀 공급 계약을 맺고 있었다.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거나 쌀값을 주지 못하면 야심씨의 개인 재산에 차압이 들어온다. 야심씨는 계약에 얽힌 모든 권리와 의무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후 야심씨는 동료들과 돈을 모아 ‘현성(現星)섬유’를 창업했다. 이내 복잡한 문제에 부딪혔다. 야심씨 등은 현성섬유의 자산(방적기·건물·땅·현금)을 공동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마다 사업(어떤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어떤 농가에서 원자재를 구입하고 어떤 방식으로 섬유를 생산해서 어떤 의류업체에 판매할지)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은행이나 농가와 계약한 뒤 동업자 몇 명의 마음이 변해서 계약을 파기하기도 했다. 점점 불신이 커졌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정주영 현대 회장(왼쪽)과 이병철 삼성 회장(오른쪽)은 상점에서 시작해 재벌 그룹을 일구었다.  
ⓒ연합뉴스
정주영 현대 회장(왼쪽)과 이병철 삼성 회장(오른쪽)은 상점에서 시작해 재벌 그룹을 일구었다.

그러나 방법이 있었다. 동업자들(인간) 명의가 아니라 업체(비인간) ‘현성섬유’의 이름으로 계약하면 된다. 동업자 몇 명의 마음이 바뀌어도, 현성섬유 차원의 계약은 유지되도록 한다. 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도, 동업자들이 아니라 현성섬유가 대출하는 것으로 한다. 상환하지 못하면 당연히 현성섬유 법인이 ‘자신’의 자산으로 빚을 청산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동업자들 소유인 방적기·건물·땅·수익금 등 자산의 주인도 현성섬유로 바꿨다.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는 오직 인간만이 뭔가를 소유하거나 권리를 행사하고 이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있다. 그러나 현성섬유는, 인간이 아닌데도 소유하고 계약하고 책임진다. 야심씨가 현성섬유를 법인(法人:법률상 인간)으로 등록했기 때문이다. 현성섬유 법인은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인간으로 ‘간주’된다. 동업자들의 지위도 현성섬유라는 법인의 주주로 바뀌었다. 주주들은 현성섬유 법인을 소유하고, 법인은 기계·건물·수익금 등의 자산을 소유한다.

출자금을 가장 많이 낸(최대 주주) 야심씨는 동료들과의 주주총회에서 현성섬유 법인의 대표이사로 선출되었다. 이전의 쌀가게(개인 가게)와 현성섬유(법인)는 많이 달랐다. 하루는 공장에 갔다가 섬유 몇 필을 가져왔는데, 사이 나쁜 동업자 한 명이 ‘도둑질’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그 섬유는 주주의 것이 아니라 현성섬유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란다. 좋은 점도 있었다. 쌀가게 주인 시절에는 은행 빚을 못 갚으면 야심씨 개인 자산이 차압당했다. 그러나 현성섬유에서는 법인의 이름과 책임으로 돈을 빌리기 때문에 돈을 못 갚으면 현성섬유가 파산할 뿐이다. 다만 야심씨의 현성섬유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된다. 투자한 돈만 날리면 된다는 이야기다. 덕분에 야심씨는 좀 더 과감하게 경영에 임할 수 있었다.

‘문어발 확장’ 혹은 ‘비관련 다각화’의 비결

현성섬유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야심씨는 섬유업과 관련 없는 중화학공업에 진출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불타게 되었다. 나쁘게 말하면 문어발 확장, 점잖게 부르면 비관련 다각화다. 당시의 정권도, 야심씨가 중화학공업에 뛰어들면 장기 저리로 정책금융을 주겠다고 했다. 뇌물을 바치고 비싼 술도 먹인 결과다. 야심씨는 현성자동차, 현성전자, 현성전기 등을 잇달아 설립했다. 이에 따라 다른 산업의 여러 기업들이 현성 산하에 모였다. 이른바 기업집단 혹은 재벌 그룹이다. 야심씨는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당시까지 현성그룹의 계열사들은 기존 주주 외에는 외부 투자를 받지 않는 ‘비상장 회사’들이었다.

   
 

그런데 중화학공업에는 섬유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본금이 필요하다. 결국 그룹 계열사들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주식을 (추가로) 발행해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외부 투자를 받는다는 의미다. 현성 계열사들은 그 주식이 시장에서 매매되는 ‘상장 주식회사’가 되었다. 밑천(자본금)이 불어난 것은 좋다. 그러나 외부인이 야심씨보다 더 많은 주식을 매집해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자리(경영권)를 탈취할 위험도 커졌다. 야심씨는 동업자들의 주식을 매입해 지분율을 늘렸으나 안심이 되지 않는다. 당시의 정권도 기업공개를 강권한 바 있었다. 야심씨는 술자리에서 취한 김에 독재자에게 겁 없이 항의했다. 국회의원도 ‘까불면’ 정보기관 지하실로 끌고 가서 ‘혼내주도록 하던’ 정권의 수장은 의외로 관대했다. 경영권(=대표이사 자리)을 보호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안을 마련해주거나 허용한 것이다.

하나는, 경영권 보호 법안이다. 이에 따르면, 투자가가 현성그룹 계열사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하려면 야심씨(대주주)의 주식을 사야 한다. 야심씨가 안 팔면 끝이다. 혹은 계열사 주식의 50% 이상을 사야 한다. 쇠고기 10근 사러 갔는데, 정육점째 사라고 요구하는 꼴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돈이 들어 차라리 경영권을 포기하고 만다. 다른 하나는, 야심씨가 경영권을 지키는 동시에 자금도 대폭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계열사 출자’와 ‘상호 출자’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이 법인을 소유한다. 그러나 법인도 법인을 소유할 수 있다. 인간이 주식회사 법인의 지분을 50% 이상 소유하면(경영권 획득), 해당 법인의 자산 전체(100%)를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다. 50% ‘소유’하면 100% ‘지배’한다. 법인이 법인을 소유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야심씨는 자본금 100억원인 현성섬유에 50억원(지분율 50%)을 투자해서 경영권을 보유하고 있다(앞으로 나오는 기업들은 모두 자본금이 100억원이며, 부채는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므로 자본금=자산이다). 또한 현성섬유의 자본금 100억원 가운데 50%(50억원)는 현성보험에, 나머지 50%(50억원)는 현성자동차에 투자해 두 회사의 경영권을 획득할 수도 있다. 같은 방법으로, 현성보험은 현성전자와 현성중공업을, 현성자동차는 현성마트와 현성전기를 지배하도록 한다(31쪽 위 그림). 이 모든 과정에서 야심씨가 실제로 투자한 돈은 현성섬유의 지분 50%를 매입한 50억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배하는 자산의 규모는 7개 기업(섬유·보험·자동차·전자·중공업·마트·전기)의 700억원이다. 이에 더해 계열사 피라미드의 최하층에 있는 현성마트가 자본금 100억원 중 50억원으로 다시 현성섬유의 지분을 매입하면, 현성섬유의 자본금은 150억원으로 늘어난다(상호 출자). 야심씨의  현성섬유에 대한 지분율도 종전의 50%에서 67%로 증가한다. 계열사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있는 현성섬유에 대한 야심씨의 지분율을 한층 강화한 것이다. 이 정도면 외부인이 경영권을 탐낼 수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87년 12월 ‘수출 100억 불’ 시절 삼성전자의 생산라인. 삼성전자가 후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데는 그룹체제가 한 요인으로 꼽힌다.  
ⓒ연합뉴스
1987년 12월 ‘수출 100억 불’ 시절 삼성전자의 생산라인. 삼성전자가 후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데는 그룹체제가 한 요인으로 꼽힌다.

덕분에 야심씨는 은행으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유리한 조건으로 조달할 수 있었다. 예컨대 현성중공업 단독으로 대출할 수 없는 돈을 다른 계열사나 그룹 전체의 보증으로 빌릴 수 있다. 당시 세계 최첨단 산업이던 전자 부문(현성전자)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그룹 구조 덕분이다. 오랜 역사의 현성섬유에 축적된 수익금을 현성전자에 투자했던 것이다. 현성전자는 20여 년 뒤, 전자 부문에서 세계 최강의 기업으로 떠오른다.

그룹 경영에는 약점도 많았다. 외부 투자자들이 기웃거리지도 못할 만큼 경영권이 탄탄했기 때문에 무리한 투자를 벌이기도 했다. 야심씨는 자동차에 대한 개인적 관심을 현성자동차 창업으로 연결시켜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물론 실패했다. 아들에게 자동차부품 회사를 설립하게 만든 뒤 현성자동차에 납품하도록 하기도 했다. 덕분에 급속히 성장한 부품회사의 대주주는 모두 야심씨의 친지들이다. 야심씨는 심지어 회계 조작으로 계열사 법인들의 금고에서 돈을 빼내 사적인 비자금으로 챙기기도 했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현성그룹은 위기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그룹 해체 소문이 도는 가운데 현성자동차와 현성중공업을 매각했다. 이후 금융산업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현성카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외환위기 이후 ‘주식시장 자유화와 개방’

국제통화기금(IMF)은 외환위기를 당한 한국에 돈을 빌려주는 대신 ‘주식시장 자유화와 개방’을 요구했다. 주식의 자유로운 거래를 막는 법적 장치(경영권 보호 법안)와 그룹 구조를 해체하라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한국 대기업 주식을 일정 규모 이상 매입할 수 없도록 금지한 법안도 폐지하도록 요구했다. 이로써 대기업 주식은 국내외에서 자유롭게 사고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

‘주주이익 보호’도 강조되었다. 야심씨의 그룹 경영이 국민경제 전체 차원에서는 순기능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현성전자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그룹 경영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일부 주주들은 손해를 보았다. 야심씨는 현성섬유의 축적된 수익금을 현성전자에 투자했는데, 이는 현성섬유 주주들 처지에서는 자신들에게 돌아올 배당금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주주들에게 불리한 그룹 경영 때문에 한국 기업들의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에 따라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경영’이 국가적으로 제창되었다. 기업 경영의 목표는 ‘주가(기업 가치) 올리기’로 변했다.

정부는 경영권 보호 법안들을 폐지하고 그룹 경영에 압력을 가했다. 기업이 다른 기업에 출자할 수 있는 비율을 제한한 것이다(출자총액 제한). 현성그룹은, 소속 기업들이 자본금(부채가 없는 것으로 가정했으므로 자산) 전체를 다른 기업에 출자하는 것으로 계열사를 늘려왔다. 만약 자본금 100억원 중 30%(30억원)까지만 다른 기업의 지분을 매입할 수 있다면, 그룹은 크게 위축될 것이다. 시민사회 단체와 진보 정당 등에서는 야심씨 같은 재벌 총수 가족이 그룹 구조를 사익에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주들의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외국인이 한국 기업의 주식을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게 되면서 현성전자의 외국인 주주 비율이 50%를 넘겼다. 야심씨의 경영권에 위기가 닥친 것이다(실제 역사에서는 주식시장 자유화 이후, 대기업들의 주식 발행 규모가 커지면서 자본금 역시 크게 불어났다. 그러나 설명의 편의상 자본금 규모가 이전과 같은 것으로 표시한다-편집자).

야심씨는 경영권 유지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돈만 있으면 간단한 문제다. 지주회사(다른 기업의 주식을 소유·지배하는 회사)를 설립한 뒤 그 회사가 6개 계열사(기존 7개사 중 자동차·중공업이 망했고 카드를 새로 설립)의 지분을 각각 40% 정도 소유하게 만들면 경영권을 지킬 수 있다. 이 경우, 지주회사는 계열사(자본금 100억원)마다 40억원씩 모두 240억원의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 예전에는 50억원으로 지배력 유지가 가능했는데 이제 190억원이 더 필요하다. 이렇게 ‘큰돈’은 마련할 수 없다(현실의 재벌들로서는 누워서 떡먹기지만, 이 글은 가상현실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90년대 후반부터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주주의 목소리를 키우는 소액주주 운동이 전개되었다.  
ⓒ연합뉴스
1990년대 후반부터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주주의 목소리를 키우는 소액주주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렇다면 출자총액제한제 아래에서 갖은 보조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우선 현성섬유가 현성보험의 지분 30%를, 현성보험은 다시 현성전자의 지분 30%를 확보했다. 보험과 전자는 그룹의 핵심 기업이라서 이 정도로는 불안하다. 그래서 야심씨는 그동안 각종 수단으로 모아둔 사재를 털어 자기 명의로 현성보험의 지분 40%, 현성전자의 지분 10%를 확보해두었다(현성전자 주식은 비싸서 충분히 사지 못했다). 야심씨 측 지분율은 현성보험 70%(현성섬유 지분 30%+야심씨 개인 지분 40%), 현성전자 40%(현성보험 지분 30%+야심씨 개인 지분 10%)로 올라갔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보험→전기→전자’ 그리고 ‘전자→마트→전기→전자’로 이어지는 계열사 출자로 방어선을 2중, 3중으로 설치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룹의 기둥인 현성섬유다. 현성섬유가 무너지면 모든 계열사가 날아간다. 그래서 섬유에서 보험과 전자로 이어지는 지배력의 고리를 왼쪽으로는 마트(10%)를 통해, 오른쪽에서는 카드(10%)를 통해 섬유로 돌아가게 했다. 전형적인 순환출자다. 이와 동시에 야심씨는 편법으로 현성섬유 법인이 아들 야망씨에게 아주 싼 가격으로 주식을 발행하도록 해서 일가의 지분율을 60%까지 늘렸다. 이에 마트와 카드의 지분을 합치면 현성섬유에 대한 야심씨 측 지분은 모두 80%다. 그 다음 현성섬유의 상장을 폐지하면서 상호까지 조이랜드로 바꿨다. 그룹의 축인 조이랜드에 관한 한 아예 주식거래 자체를 차단해 다른 투자자들의 접근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현성그룹이 이런 그룹 구조를 완성하기까지 엄청난 법적·정치적 논란이 벌어졌다. 다만 야심씨가 오래전부터 길러온 정관계·법조계·언론계의 ‘장학생’들이 은혜를 갚았다.

그러나 위기는 계속된다. 순환출자를 청산하고 금산분리 원칙을 준수하라는 목소리가 계속 커졌다. 현성그룹이 순환출자 고리를 끊으려면 마트의 조이랜드 지분 10%, 전기의 전자 지분 10%, 카드의 조이랜드 지분 10% 등을 야심씨 일가가 사들여야 한다. 그래야 일가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 더욱이 금산분리 원칙을 지키려면, 현성보험의 현성전자 지분 30%와 전기 지분 30%, 전자의 카드 지분 30%를 떨어내야 한다. 막대한 돈이 든다.

이런 와중에 야심씨가 쓰러져버렸다. 만에 하나, 현성보험의 최대 주주(40%)인 야심씨가 사망하면 그 다음 주주(30%)는 조이랜드다. 현행 법률에 따르면, 금융사의 최대 주주는 자동적으로 금융지주회사로 지정된다. 금융지주회사는 현성전자 같은 일반 제조업체를 자회사로 둘 수 없다. 그러므로 조이랜드의 자회사인 현성보험은 현성전자와 현성전기 지분을 토해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현성전자를 야심씨 일가와 이어주는 끈은 야심씨의 개인 지분 10%와 현성전기가 가진 10% 등 모두 20%밖에 안 된다. 더욱이 상속자인 야망씨는 야심씨가 물려준 현성전자 지분 10% 가운데 5%를 상속세로 납부해야 한다. 현성전기의 지분 10% 역시 ‘전자→마트→전기→전자’의 순환출자 고리에 속하므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처럼 그룹을 이어주던 끈들이 마구 끊어지거나 약해질 전망이다. 이를 다시 이어줄 접착제(돈)는 급히 마련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현성전자의 지배력에 공백이 발생하면, 경영권 다툼이 야심씨 일족을 비롯한 국내외 금융자본들 간에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 분명하다. 그 싸움의 결과가 야심씨 일족만의 흥망으로 이어질지 국민경제 전체에 대한 충격으로 귀결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